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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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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One More Chance!글 김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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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5 19:39
 
 

"좋아! 리스트 작성 끝!"

피핀은 한 손으로 반대쪽 팔꿈치를 잡고 기지개를 켰다. 다른 쪽 손에는 두 뼘이나 되는 긴 펜을 들고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책상에는 조금 전까지 쓰고 있었던 것 같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둘둘 말린 긴 종이와 작은 팜플렛 따위도 쥐에 있었으나, 그것들은 책상 위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었다. 피핀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허공을 훑자 책상 위의 한 장을 제외한 종이는 모두 사라졌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앗, 내놔!"

피핀의 어깨 너머에서 손이 하나 뻗어 나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피핀은 머리 위로 팔을 들어 붙잡으려 했지만 손의 주인은 재빨리 팔을 뒤로 빼 그 손아귀를 벗어났다.

"보자…뭐야, 이 리스트는?"

"제파는 몰라도 돼!"

피핀은 고개를 뒤로 젖혀 제파를 보았다. 제파는 거꾸로 뒤집힌 피핀의 얼굴을 보며 종이를 팔락거렸다.

"숨기는 거 보니까 역시 위험한 것 같은데."

"아니거든? 여기로 데려올 사람들 명단이야."

어느새 제파의 뒤에 나타난 피핀은 종이를 다시 뺏었다. 제파는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피핀은 배를 바닥으로 향 한 채 엎드린 자세로 공중에 떠서 종이를 가슴팍에 집어 넣고 있었다.

"야, 피핀. 이쪽에서의 개입은 중죄인 거 몰라? 이건 진짜 장난으로 안 넘어간다."

"나도 알아. 아, 어쩔 수 없네. 제파는 일러바칠 거 같으니까 그냥 지금 설명해 줄게."

그렇게 말하고 피핀은 두 손을 모아 입술을 가렸다. 그리고 모은 손을 제파의 귀에 가져다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피핀의 말을 듣던 제파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졌다.

"어…. 그게 되나?"

"된다니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건 아무것도 없잖아. 판을 깔아 줄 뿐이지."

"아니, 판을 깔아주는 거 자체가 개입 아냐?"

"융통성 좀 가지라니까. 아니면, 제파는 그 세계들이 그대로 실패한 채 남아 있는 편이 좋다 이거야?"

피핀은 이마를 제파의 턱에 들이대며 몰아붙였다. 제파는 난처한 표정으로 피핀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게 그 세계가 도달한 결말이라면 우린…."

"답답하네 진짜! 그, 러, 니, 까, 그 결말이 과연 옳은 결말이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거잖아. 좋잖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을 내려주는 거! 그것도 못하면 뭐가 신이야?"

피핀은 연극적인 손직까지 더해가며 열변을 토했다. 제파는 그런 피핀을 반쯤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네 신관(神觀)은 대체 왜 그렇게 인간적인 건데? 우린 그런 존재가 아니라구. 이번에 네가 한 얘기도 의도 자체는 좋아 보이는건 사실이지만, 네가 하는 일이라서 신뢰가 안 간단 말이지."

"왜! 나도 가끔은 좋은 일 해!"

"네가 재밌다고 느낀 일이 우연히 좋은 일이었던 게 아니고? 뭐, 어차피 내가 말린다고 들을 너도 아니고 그냥 너 알아서 해. 대신 난 모르는 일이다."

"야호! 제파 사랑해!"

피핀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제파에게 뛰어들었따. 하지만 피핀의 포옹은 공기를 껴안았을 뿐이었다. 제파는 책상다리를 한 채 피핀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래서, 그 최종 1인은 어떻게 선택할 거야?"

그 말에볼에 바람을 가득 채운 채 제파를 째려보던 피핀의 표정이 변했다. 피핀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쫙 폈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생각할 거야!"

*

헨릭은 이를 악문 채 눈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보통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것은 얼핏 인간처럼 보였으나 조금만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광대뼈와 뺨 부근은 도마뱀 같은 비늘이 덮고 있었고, 앙상한 날개와 기이하게 뒤틀린 뿔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전설 속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듯한 악마의 형상 그 자체였다. 세간에서는 마왕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왜 그러는가? 나를 쓰러뜨리고 전쟁을 끝낸다고 하지 않았나? 무엇을 망설이는가?"

마왕의 입술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헨릭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지만 그뿐이었다. 헨릭은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마왕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따. 마왕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한심하도다. 고작 이 몇 놈의 목숨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아둔한 족속들이로구나!"

그렇게 말하며, 마왕은 축 늘어진 채 공중에 떠 있는 인간 여성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만둬!!"

목구멍을 찢는 듯한 절규가 헨릭의 입에서 토해졌다. 하지만 마왕은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헨릭의 자세가 낮아진 순간, 마왕의 손이 여성의 머리통을 지나 더 앞쪽에서 멈추었다.

"그대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리 할 것이다, 용사여. 이 고깃덩어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내게 닿지조차 못하는데 내가 어찌하여 그걸 건드린단 말인가?"

마왕은 내민 손을 쫙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빛줄기는 의식을 잃은 여성의 몸 위에 기어가는 뱀처럼 퍼지더니, 이윽고 허공에 거대한 방패꼴의 문양을 새겼다. 반투명한 붉은 색의 방패의 중심에 다섯 명의 인간이 매달린 채로 나타났다. 그들의 몸은 하나같이 상처투성이였고 누구 하나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헨릭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너 이 자식!!!"

마왕은 지옥의 밑바닥에서나 들려올 법한 절규가 유쾌한 광대놀음이라도 되는 양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그가 한참을 웃어제끼는 동안에도 헨릭은 여전히 황망히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오는 동안 비슷한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동료들을 방패로 삼고 광희하고 있는 저 존재는 지금까지 만났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격부터가 달랐다. 가장 교활하고, 가장 잔혹하고, 가장 공포스럽고, 가장 간악하고, 가장 망설임이 없고, 가장 증오스럽고, 가장 모독적이고, 가장 끔찍하고, 가장 빈틈없고, 가장 강한 마물. 그것이야말로 마왕.

망설임은 파멸만을 불러올 뿐.

마왕은 헨릭이 검을 고쳐쥐는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마왕은 작게 웃음을 띄웠다. 헨릭은 마왕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 웃음은 보지 못했다. 마왕이 이죽거렸다.

"그래, 검을 들어 휘둘러라! 그대의 실력이라면 이딴 쓰레기들의 생명력으로 만든 방패 따윈 일섬에 찢어버릴 수 있을 터이다! 자, 오너라! 와서 그대의 사명을 완수해 보아라! 이들의 피를 바쳐 다른 수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구하라! '더 큰 선'을, 어디 그대의 손으로 잡아 보아라! 용사여!"

마왕의 말이 멈춘 순간 헨릭의 발이 땅을 찼다. 수 미터도 넘는 거리를 한 번의 도약으로 좁히며, 왼손으로 검 손잡이를 말아 쥔다. 오른쪽 팔꿈치가 당겨지고, 치켜든 검신은 오른쪽 어깨와 수평을 이룬다. 오로지 파괴력만을 생각한 커다란 자세. 그대로 검 끝이 방패에 닿을 만한 곳까지 육박한 헨릭은 눈을 질끈 감고,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미안하다. 모두들.

모든 것은 '더 큰 선'을 위해…!

"아름답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자(愚子)로다! 내 너의 동상을 세워 주마!"

헨릭은 마왕의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쓰러져 죽었어야 할 마왕의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다음 순간, 헨릭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헨릭의 검은 동료들이 매달린 방패를 깨끗하게 일도양단했다. 그러나 방어막은 깨져 사라지는 대신 검붉은 색의 불쾌한 거품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헨릭은 그 압도적인 기괴함에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검은 이미 그 붉은 거품에 잠식된 상태였다. 붉은 거품은 마치 촉수처럼 뻗어 나와 헨릭의 손발을 묶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헨릭은 들려온 비명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운 절규를 내지르는 동료의 얼굴을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헨릭은 구역질을 했다. 그의 토사물은 찐득찐득하고 검붉은 색이었다. 결코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헨릭의 시야가 검붉게 물들었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헨릭의 의식이 멀어져갔따.

아아, 나는 실패했구나.

한 번, 단 한 번만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더 잘 해낼 수 있을 텐데.

"그런 당신을 위한 대 출혈 서비스!"

헨릭은 갑작스레 들린 앳된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저항도 없이 낙하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뭣…!?"

헨릭은 당황하면서도 바닥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허사였다. 땅까지 남은 거리는커녕 아래에 대체 뭐가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떨어지는 상태'에 처해 있을 뿐이었지만 그걸 알 방도는 없었다. 아래를 보며 (그걸 아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연실색해 있는 헨릭의 눈앞에 피핀의 얼굴이 나타났다.

"듣고 있어?"

"넌 누구냐! 마물이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헨릭은 그렇게 외치며 눈앞에 나타난 소녀에게 검을 들이대려 했으나, 아무리 그라도 끝없는 자유낙하 속에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헨릭은 검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마물이라니 실례천만! 내 이름은 피핀, 신님이야!"

헨릭과는 대조적으로 피핀은 큰 대자로 누운 자세를 전혀 흐트러트리지 않고 계속 낙하해 갔다. 헨릭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확실히 피핀을 바라보고 질문을 던졌다.

"신? 지금 네가 신이라고 했나?"

"아, 뭐 그건 그냥 이름이고 네가 생각하는 신이랑은 다른 사람이지만. 신님은 신님이야. 에이, 그런 얘기는 아무래도 좋아! 너, 다시 한 번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뭐?"

"대답해 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잖아?"

헨릭은 입을 벌리고 피핀을 바라보았다. 피핀은 은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헨릭은 작은 소녀의 시선이 자신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감각이 헨릭의 몸을 감쌌다. 이내 자신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다. 헨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환영해! 당신은 신의 자비에 선택된 인간이야! 이곳은 나의 세계! 여기서 있는 힘껏 노력해서 또 한번의 기회를 손에 넣도록 해!"

피핀은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헨릭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낙하하고 있는 것 조차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헨릭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한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다시 할 수 있다고?

세계를 구할 기회를 한번 더 준다고?

내 실패를,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고…?

현재 상황에 대해 무엇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헨릭이었지만, 그 말이 가진 힘은 모든 의문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피핀은 헨릭의 멍한 얼굴을 보더니 키득거렸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당연히 그냥 해 주는 건 아니야. 당신은 여기서 당신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해. 당신의 열망이 어느 누구보다도 크다는 걸 나에게 보여줘! 그 때 소원을 이루어 줄 테니까!”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럼 수고해! 시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헨릭은 그대로 땅에 격돌했다.

*

헨릭은 위화감을 느끼며 일어섰다. 일반적인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기반은 인간이다. 수 분을 훌쩍 넘는 시간동안 낙하하다가 지면에 충돌하면 당연히 무사할 수 없다. 헨릭이 멀쩡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헨릭이 실제로는 추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피핀이 만들어낸 연출. 헨릭의 이동은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동안의 여행으로 기른 감으로 상황을 대충 판단한 헨릭은 우선 주위를 살폈다.

주변은 온통 꽃밭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온 사방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물망초, 라벤더, 제라늄, 수국, 각양각색의 튤립과 국화…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의 바닥을 꽃들이 빽빽이 메우고 있었다. 유일하게 꽃이 피어있지 않은 곳은 헨릭이 서 있는 곳부터 동쪽 언덕 너머까지 나 있는 길이었다. 헨릭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다. 이렇다 할 건물은커녕 언덕이나 거목같은 자연물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명백하게 부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 헨릭은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주의는 얼마나 해 두어도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게다가 헨릭은 아직 피핀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마물의 사고방식은 인간과는 다르다. 마왕의 악취미라고 생각하지 않을 근거도 없었다. 온 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둔 채 걷던 헨릭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던 헨릭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헨릭의 검이 수평으로 가르고 지나간 빈 공간에 잘린 꽃잎이 휘날렸다. 헨릭은 오른쪽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딱 헨릭이 검을 휘두른 폭 만큼 꽃들이 잘려나가,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이 생겨 있었다.

“역시 환각인가.”

헨릭은 자신이 공중에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이 모종의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지금, 그 의심은 확실한 것으로 변했다. 아마도 헨릭은 좁은 공간을 빙글빙글 돕고 있었으리라. 불행하게도 헨릭은 마법의 소양이 없었기에 정공법적인 해결책은 불가능했다. 헨릭은 호흡을 가다듬고 검을 바로쥐었다. 없는 것을 고민해 봐야 어쩔 도리도 없는 법. 헨릭은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검을 내리쳤다.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헨릭은 눈앞에 나타난 성을 보고도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13세기풍의 뾰족한 첨탑이 달린 성이었다. 애너하임의 왕궁만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지방의 영주들이 머무는 성 정도의 크기는 됐다. 성벽은 헨릭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헨릭은 주변을 한번 더 살피고 문을 열었다. 문은 그 거대한 크기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열렸다. 헨릭은 건물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구석에 있던 화분 하나가 박살났다.

“또 실패인가. 벌써 세 번째네. 역시 호락호락한 녀석은 여기 안 오는구나.”

홀의 중앙에 있는 계단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헨릭은 총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방금 전의 공격이 그 여성의 소행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헨릭은 경계를 풀지 않고 여자와 대치했다.

“그보다 뭐냐고 진짜. 검으로 총알 궤적을 바꾸다니 사람 맞아?”

여자는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윤기 나는 검은 생머리는 목 언저리에서 짧게 잘랐다. 위아래로 남성용 정장을 차려입은 탓도 있어, 멀리서 언뜻 보면 남성으로도 보였다. 방금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저격소총을 한 손으로 들고 휘적거리며 걸어오던 여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어. 느닷없이 총 쏜건 사과할게. 그러니까 그 뒤숭숭한 물건은 좀 치워 주지 않을래?”

“너를 신뢰해도 좋다는 증거가 있나?”

“꼼꼼하기도 하시지. 자.”

여자는 총을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헨릭이 그래도 경계태세를 풀지 않자 피식 웃었다.

“아, 좀 봐줘. 숨기고 있는 거 없어. 지금은 저게 내가 가진 무기 전부야. 믿어줘.”

“무기? 저 지팡이를 말하는 건가?”

“뭐?”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 바퀴벌레를 본 알래스카 원주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기, 미안한데 자기소개 좀 부탁해도 돼?”

“헨릭 한센. 마왕을 쓰러뜨리고 전쟁을 끝내는게 나의 사명이다. 자, 나는 답했으니 너도 정체를 밝혀라.”

헨릭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소리와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여자는 전혀 감명을 받지 않은 듯 했다. 그녀는 심란한 얼굴로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며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마왕? 하아, 이거 또 골때리는 사람이…. 뭐 됐어. 난 이서현이라고 해. 당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야.”

“다른 세계? 이건 환각 아니었나?”

헨릭이 조금 동요를 보였다. 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환각? 아, 저 꽃밭 말야? 저딴 건 그냥 단순한 속임수야. 그 하늘에서 떨어지는 연출도 경황이 없어서 잘 못 봤지만 뭐 비슷하겠지. 하지만 이 세계 자체는 진짜야. 그보다 총도 모르는 거 보면 네 세계의 기술 수준은 뻔할 것 같은데, 그럼 내가 굳이 말 안 해줘도 알지 않아? 네 세계에서 이런 거 본 적 있어?”

중세풍의 외관과 달리, 홀은 매우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의 거대한 계단, 벽에 걸린 액자 등 구조는 고전적이었으나 디테일은 깔끔했다. 확실히 헨릭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꾸며진 실내였다.

“그 말대로다. 확실히 한 번도 본적이 없군. 그래서? 이곳이 다른 세계라면, 난 여기서 무엇을 하면 좋단 말인가?”

“너도 올 때 그 꼬마한테 듣지 않았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얘기.”

“들었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봐? 참고로 나도 같은 얘기를 듣고 여기 왔어.”

서현이 씩 웃었다. 헨릭은 조용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서현을 노려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날 공격한 이유는 그것인가.”

“눈치 빠르네. 경쟁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잖아?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래서, 날 벨 생각이야? 솔직히 당신한테 저항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안 드네.”

서현은 눈을 반쯤 감고 헨릭을 떠보았다. 눈은 아까보다 더 감겼지만 오히려 나른한 기색이 사라지고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헨릭은 흥미 없다는 듯 그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넘겼다.

“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을 베지 않는다. 더욱이 이것이 어떤 경쟁이라면, 그것은 공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대를 베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내가 먼저 그 비열한 짓을 했는데?”

“그건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서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타입의 인간을 상대하는건 서현에게 언제나 고역이었다. 올바른 인간. 이것이 헨릭에 대해 서현이 내린 평가였다. 서현이 살던 시대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부류였지만 모두 서현에게 꺼림칙한 인물들뿐이었다. 서현은 마음속으로 헨릭을 요주의 인물로 점찍었다.

하지만 서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올바른 인간, 이라는 평가는 대체적으로 옳다. 하루 전에 이런 평가를 내렸다면 완전히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왕의 성에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은 헨릭을 바꾸어 놓았다. 그게 근본까지 영향을 끼친 뒤틀림이었는지, 아니면 표면에 조금 상처를 냈을 뿐이었는지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단순히 올바른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나 있었던 것이다.

“뭐 좋아. 감사를 표할게. 그럼 가자. 너와 나 말고도 초대받은 손님들이 꽤 있거든. 아마 전부 모이고 나면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야.”

서현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헨릭도 묵묵히 뒤를 따랐다. 2층으로 올라가자 그나마 성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홀은 완전히 사라지고, 거의 밋밋할 정도의 복도가 나타났다. 헨릭은 처음 보는 구조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 꼬맹이, 꽤나 악취미지? 안을 이렇게 꾸며 놓을 거면서 왜 포장을 그딴 식으로 해 뒀는지 모르겠어. 자, 다 왔어. 여기야.”

서현은 복도가 꺾어지기 직전, 모퉁이 옆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슬쩍 돌아봐 헨릭이 잘 따라왔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자, 신입 왔다. 다들 인사해.”

“흘려야 할 피가 또 늘어나다니…. 내 죄를 대체 얼마나 더 무겁게 해야 만족할 생각이야? 운명--- 신!”

“아,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헨릭을 맞이했다.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은 쪽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키나 체격으로 보아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많아야 십대 중반 쯤 되었을까. 소파에 기대 앉은채로 장갑을 낀 왼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의바르게 인사한 것은 작은 소녀였다. 대략 십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은 어깨 부근에서 찰랑거렸는데, 체리 모양의 악세사리로 옆머리를 살짝 묶어 올린 것이 앙증맞았다.

헨릭은 두 사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자신도 많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서현을 제외한 이 둘은 너무 어려 보였다. 헨릭의 심중을 알아챈 듯, 서현이 말을 걸었다.

“내가 아까 말했지? 실패는 당신이 세 번째, 였다고.”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헨릭은 ‘기습적으로 날아온 총격을 막아냈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탄환이 날아오는 속도와 그 파괴력은 이미 경험했다.

“단순한 아이는 아니란 얘긴가.”

“뭐, 그런 거야.”

“그렇다 해도 지지 않는다.”

헨릭과 서현은 둘 사이에서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후드를 쓴 자는 여전히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헨릭 한센이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

“연하늘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하늘? 신기한 이름이군.”

“아, 잠깐 거기에 대해서 말인데.”

서현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하늘과 헨릭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 왜 우리랑 말이 통하는거야?”

“좋은 질문입니다!”

하늘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다 책상에 걸려 넘어졌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던 사람도 몸을 움찔했다. 헨릭과 서현은 비교적 놀라지 않고 담담히 피핀을 바라봤다.

“멤버가 모두 모였으니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타이밍에 질문해 주셨어요! Good job!”

‘시끄러워….’

서현은 자신에게 엄지를 들어보이는 피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피핀은 개의치 않는 듯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신의 권능으로 여러분의 대화는 언어와 관계없이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게 했어요! 사실 지금 저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그 언어에 담긴 뜻만을 자기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거죠. 설명이 됐나요?”

“아, 뭐….”

‘역시 시끄러워.’

“그럼 막간 설정은 이쯤하고, 지금부터가 본편이에요. 여러분이 어째서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는 알고 있죠? 서로서로 사정은 다르지만 원하는 건 하나! 시간을 되돌려서, 여러분 자신의 세계를 구하는 것!”

네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은 후드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기에 눈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도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 순간은, 각자가 ‘되돌리고자 하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 지, 만. 아무리 신님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말이죠. 이건 어디까지나 특혜! 그리고 모두에게 퍼다주면 그건 특혜라고 할 수 없겠죠? 기회를 얻을 수 있는건 단 한 명 뿐이에요.”

“그 한명은 어떻게 정하는데?”

말한 것은 후드를 쓴 사람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피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네. 물론 궁금하시겠죠. 하지만, 지금 알려 드릴 순 없어요. 왜냐면, 경쟁은 공정해야 하잖아요?”

피핀은 헨릭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서현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다 보고 있었나. 뭐, 예상대로지만.’

“앞으로 여러분은 이 성에서 생활하게 될 거예요.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때가 되면 이 경쟁에서 승리한 한 분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드리겠다고 약속하겠어요. 맹세해도 좋아요.”

“나도 하나 질문이 있다만,”

“말씀하세요.”

“선택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지?”

헨릭의 질문은 핵심을 꿰뚫는 것이었다. 네 사람, 아니. 피핀을 포함한 다섯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피핀은 이곳에 모인 넷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찬찬히 바라보았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피핀은 순간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공중에 거꾸로 뜬 채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고, 피핀은 장난스럽게 혀를 깨물었다.

“비밀이랍니다.”


 
+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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