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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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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린 그대에게, 가치 없는 그대에게, 고장난 그대에게글 bless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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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5-15 18:38
 
 

이 거리는 지극히 단조로운 십(十)자식 구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장소다.
거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열십자로 이어진 채로 거리를 네 등분으로 나누고 네 등분으로 나눠진 거리는 다시금 자잘한 길과 길로 나뉘게 되며 그 중엔 흔히 알고 있는 커피숍이나 전자기기상, 우체국과 통신사 대리점들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매일같이 총원 600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중학교와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선다. 특별나다 할 만한 장소는 없다.
그나마 동쪽에 늘어서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약간 밑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위치한 호수 딸린 공원이 있지만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는 아니다.
거리 중심이 되는 십자로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걸어가면 보이는 역전을 타고 두 정거장 앞에 있는 호화로운 유원지가 시시하고 볼 것 없는 공원보단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장소, 이 거리는 어떠한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단조로운 장소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소에서 어떠한 특정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가정할 때 그 가능성은 세상에나 전국을 뒤흔들만한 연쇄살인범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던가, 지진이나 태풍으로 인한 재해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거나 아직까진 세상에 명함 한 장 내밀지 않은 어느 천재님께서 팡파레(Fanfare)와 함께 요란한 인생역전 행진곡을 울릴 경우다.
그 밖에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일상에서 오는 감동적이며 인간다운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쪽은 취미가 아니다.
... 이것들을 전부 제외한 채로, 마지막으로 남은 가능성은 역시 거리 전체가 말 그대로 일변(一變)한 경우지 않을까?


그래, 굳이 예를 들자면.


6월 중, 무르익은 초여름 무렵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는 어느 날.
평범한 거리가 계속 이어져야할 부분이 세계의 칼날에 잘려나간 듯, 아래로 향한 까마득한 절벽 층과 그 너머로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대해가 펼쳐진다면.
신인지 악마님인지 모를, 어느 유난히 장난 좋아하는 훌륭한 분께서『거리』를 잡아 뜯어 이세계(異世界)한복판에 냅다 붙여 놓는다면...
뭐, 진부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분명 아직 알 수 없는 어떠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 중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                      ※                      ※


... 저곳에 시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아직 낯선 거리를 헤매다 원치 않게 공원입구까지 당도한 소녀가 느낀 충격적인 감상이었다.


일색거리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쭉 내려다가 보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한시공원의 입구.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고 관리 또한 제대로 되지 않은 건지 4월에도 불구하고 잡초만 무성하게 돋아난 공원이라기보다는 터에 가까운 한시공원은 입구만은 요란하면서도 내부 상황을 훤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구조를 띄고 있어 365일 주민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가끔씩 들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공을 몰고 와 우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나 할 짓거리를 찾지 못한 채로 방황하는 무리가 잠시 쉬기 위해 들르는 소년 소녀들 정도다.
그리고 오늘, 현재 공원을 이용하고 있는 방문객 수는 2명.
다름 아닌 오늘 처음으로 일색거리에 방문한 소녀와 이 드넓고 쓸모도 없어 보이는 장소를 홀로 끌어안듯 공원중심에 위치한 벤치에 시체마냥 늘어져 있는 누군가가 바로 다른 한명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로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먼 거리에서도 사방이 확 트여있는 한시공원의 지리에 의해 그가 어떤 사람인가 정도는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흔치 않게도 꾸밈새가 없는 검은 교복. 한손은 내려쬐는 햇볕을 가려 막는 지붕이 되어 소년의 얼굴을 덮고 있었고 다른 한손과 한쪽 발은 진득한 점액이 탁자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이 볼품없는 형태로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단순한 공원 중 휴식을 취한다 하기에는 너무 개방적이며 추악하다.
공공시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이 아니면 사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6월중 열사병에 걸려 쓰러졌답니다. ... 라니, 그럴 리가 없지.
“...”
소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어와, 다가가기 싫다.
그것이 소녀의 숨길 것도 없는 진심이었다.
온몸으로 ‘나는 엄청 수상한 사람이랍니다. 접촉 난이도는 글쎄? B?’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다지 본 기억이 없고 스스로 접촉해본 경험은 전무 하다. 뭐가 좋아서 저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지만 정말로 저 사람이 어떠한 위기를 겪어 몸을 겨눌 수 없다던가, 기절에 상응하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한다면 이 장소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소녀 자신뿐이다.
물론, 그 가능성이 태어나서 한번 겪기도 힘들 정도로 희박한 가능성이라지만 그 가능성을 상상해버린 이상, 지금 소녀가 저 소년을 무시한 채로 갈 길을 가게 된다면 이후로도 쭉 후회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추가 되어버린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지만 그것을 스스로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역시 다가가기 싫다. 그 두 가지 감정을 마음의 천칭에 놓고 결과가 나오기 까지 걸린 시간은 8초 미만. 미묘하게 어디선가 찌르르 우는 매미의 울음소리와 겹치고 있었다.


괴한에 맞서기 위해 소녀가 선택한 주 무장은


《나뭇가지 +0》
공격력 : 은근히 끝이 뾰족해서 찌르면 짜증나는 정도
길이 : 미묘하게 적당해서 아마도 25cm.
레어도 : 눈에 띄는 대로 집어올 수 있을 만큼 흔함
부가속성 : 뭔가 감촉이 꺼칠꺼칠한 게 기분 나쁨.


소녀는 적을 향해 용사처럼 나아간다.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고 거칠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것도 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소년에게 가까워질수록 슬럼프에 빠져드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고 1M도 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는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것으로 변해있었다.
지근거리에서 물끄럼이 내려다본 소년은 가슴부분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이 비극적이게도 죽어있다던가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몸을 뒤척이며 비루한 신음을 흘려내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단잠 중이시다. 그 증거로서 내려다 보이는 소년의 입가가 미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울컥하고 허탈감과 함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소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봐요.”
미리 준비해온 나뭇가지로 소년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자 소년의 몸이 움찔 떨다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 사이가 살짝 벌어지며 그 틈으로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소녀를 응시해왔다.
아직 졸음이 전부 풀어지지 않은 건지 초점이 풀려있는 검은 눈동자 속에 거울처럼 소녀의 모습이 비치자 반사적으로 소녀가 침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 건강 하신가요.”
소년이 말했다.
“뭐라고요?”
“모르겠니? 인사야. 인사. 사람 인(人)자에 일 사(事)자를 이어 붙인 사람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거라고. 게다가 이곳은 동방예의지국이지. 세상에나 그것도 모르는 것 같아 간단한 예제를 들어 준거야. 첫 만남엔 ‘이봐요.’ 같은 말로 사람을 찌르는게 아니라 너는 좀 더 정중하고 예의를 담는 말과 행동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읏차! 은근히 진부한 기합과 함께 소년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십분 이십분을 벤치위에서 잠을 잔 게 아닌지 팔을 배고있던 머리카락 부분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송곳을 세우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졸린 눈으로 옅게 띄워져 있었지만 예상보다 부드러운 눈매. 얼굴의 선은 엷고 고와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충분히 미소년이라 부를 수 있는 계통이었다.
 그러나 성격은 좋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쁘다. 방금 전 소년이 토해낸 지껄임만 들어도 그건 명확한 것이었다.
“생각하지 않는데요. 세상에나 듣는지도 모르는 상대를 두고 인사를 하는 건 돌이나 나무에게 인사를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대놓고 자는게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즉, 너는 내게 주의를 주기 위해 왔다는 건가.”
“네. 그 밖에 뭐가 있겠어요.”
걱정에 대한 부분은 입 안쪽으로 쏙 삼키며 소녀가 새침하게 팔짱을 꼈다.
그것에 소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큰 하품을 한번 내쉬더니.
“내게 호감이 있어서 헌팅 해온 줄 알았지 뭐야. 하하하.”
“....”
“잠깐, 침묵 하지 말아줘. 질린듯이 보지 말아줘. 이 부분은 수줍음과 수치심에 얼굴을 붉혀야 되는 부분이라고?”
“그런 대사에 정말로 수줍음이나 수치심을 느낀다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뇨, 조금 다른 의미지만 수치심은 분명 있어요. 이런 천한 사람과 엮였다는 수치심이요.”
“음, 그렇다면 그 수치심을 잊지 말고 잘 기억해 두도록 해.”
“처음부터 계속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요?!”
“... 너는 일일이 지껄이는 모든 대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거니? 말도 안 돼. 얼마나 성실한 거야.”
“아아, 당신 정말 짜증나!”
당장이라도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며 소녀가 새침하게 소년을 바라봤다.
 어찌되었건 정신적으론 어쨌든 간에 육제적으로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소녀가 소년에게 간섭할 이유는 없어졌다.
아니,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가기엔 수지가 맞지 않으니 뭐 하나 만큼은 얻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소녀다.
“길 좀 물어도 되죠?”
“어, 어... 음. 안된다고 하면 어떻게 돼?”
“당신을 물겠어요.”
용서 없이 소녀가 답했고 이에 소년이 펄쩍 뛰었다.
“안된다고! 나, 개나 고양이에게 엄청 물리니까 물리는 건 사양하고 싶어!”
“... 거절하는 게 전제인가요. 그런 성격이니까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거죠.”
“...으응? 음...!”
소녀의 말에 소년이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뭘 납득했는지에 대해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고 상상도 하기 싫은 소녀다.
소년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표정에 드러내더니 이윽고 얼마되지 않아 시퍼렇게 표정을 굳혀버리고 말았다.
“이봐, 어떻게 내 성격이 더러운 걸 안거야...“
“이봐요. 저는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면 좋은 건가요. 네?”
설마 소녀가 그것 하나 깨닫지 못하리라 생각한 대목인가, 스스로가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소녀는 단  한 번도 더럽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더럽다고 칭한 대목인가, 그것도 아니면 소년의 존재 자체인가.
모르겠다. 일단 한마디만 더 하면 일단 물고 시작하자. 그렇게 소녀가 묵묵히 다짐하고 있자 소년이 두 팔을 반쯤 굽힌채로 들어 항복을 청해왔다.
“... 그 행동은 뭔가요.”
“왠지 더 놀리면 정말로 물릴 것 같아서.”
“... ... ... ... 설마, 상식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정말로 사람을 물리가 없잖아요. 어이없어. 바보네요.”
“응, 그런가. 과연 침묵은 무서운걸. 처음 알았어.”
“시, 시끄럽네요! 시계탑이 있는 장소나 알려주시고 도로 자버리던가 하세요!”
“시계탑?”
“네, 주황 벽돌로 이루어진 큰 시계탑이요.”
“왜 그런 시시한걸 보러 온 거야?”
“그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소녀의 목소리엔 자연스럽게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듯이 소년이 웃었다.
“그래, 상관없네. 네가 뭘 찾고 뭘 하든지 나랑은 하나도 상관없어.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도리로서의 친절을 아주 약간만 베풀어준다면, 이 거리에 시계탑은 하나 뿐이고, 이 장소에서 밑으로 쭉 내려다가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거야. 아마, 눈에 확 들어올걸?”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답하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가 잠시 동안 당황했다만 이것이 일반적이며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이 의외스러움에 대한 당황도, 조금 전까지 가슴속에 쌓여가던 분노도 누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고마워요.”
이것으로 별것 아닌 만남은 끝났다.
이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고 있고, 이곳에 머무는 것에 망설일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소녀는 가볍게 뒤로 두발자국을 물러서더니 마지막으로 끝까지 궁금했던 사항을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부터 시선을 피하는 건가요?”
그거다.
처음 몸을 일으켜 세운 이후로 소년은 소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던 거다.
첫 마디부터 워낙 이상한 사람이고 하니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었지만 모든 것을 풀어 마지막으로 내뱉는 질문으로서 이는 합당했을 것이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말에 처음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더니 정말이지 상하하디 상냥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 키는 정말로 작으니까 내려다보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하고 걱정해서 내 나름대로 판단한 행동이야. 감사받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니까 , 감사는 필요 없어.”
소년의 터무니없는 이유에 대해 소녀는 3초간 침묵을 지켰고, 이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년을 노려봤다.
“감사 할까보냐! 그게 더 상처라고! 울어버린다!”


그 뒤로,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소녀가 공원에서 빠져나온 뒤로 소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소녀의 눈은 당당하게 눈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볼 수 있었다.
제법 요란한 안내문이 소녀의 눈을 확 끌어들였다.
『일색 시계탑까지 ↑ 600M 』
다만, 소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어딘가가 엇나가 있었다.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600M. 아래가 아닌 위로 600M.
아래로 쭉 걷고 있던 소녀가 발견 할 수 있었던것이 바로 이러한 표지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이, 이...! 이 거짓말쟁이──!”
소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메마른 하늘 아래 울렸다.


2.
물론, 거짓말쟁이다.
아무렴. 거짓말쟁이고말고.
적당히 따스하고 순풍이 불어오는 초여름 중 한낮.
공원 벤츠에 몸을 대책 없을 정도로 늘어뜨린 소년이 귓가에 닿지 않은 누군가의 외침소리를 예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따스한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만복의 시간을 누리고 있던 것을 방해한 천벌이라며 소년은 아마도 지금쯤 울상이 되어있을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선 어깨를 떨었다.
이 준 성.
소년의 이름이다.
올해 나이 18세, 인근 일색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고등학교 2학년.
딱히 성적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어중간함에 운동 능력 또한 좋은 결과를 내본 경험이 없다.
타인이 그를 평가하기에, 나름대로 볼만한 얼굴만 아니라면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준성에겐 이미 다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강한 특이점이 있었다.
에피큐리언. 즉. 준성은 이미 과거는 물론이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같은 것들보다 현재를 즐기고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는 훌륭한 쾌락주의자(Epicureanl)인 것이다.
준성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옛 일이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지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이다. 지금에 충실하면 사람은 행복해진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상 계속되는 것이며 그건 즉, 준성은 언젠가 다가올 끝에 다다르기까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뭐냐, 현재를 구가한다면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이지 뭔 놈의 쾌락주의인가 라는 의문이 어쩌면 떠오를 수도 있기에 짧게 지껄여 보자면 쾌락은 어디까지나 쾌락이 있기에 쾌락이다. 지금을 즐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면 그건 해탈이니 뭐시기니 입에 담기 좋은 설탕 같은 것들이 되겠지만 쾌락이란 보통 욕망의 충족이라 하며 욕망이란 보통 입에 담기 좋은 말이 되진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준성의 욕망 또한 어디까지나 평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준성의 욕망. 그건 장황하게 돌아갈 것도 아니고, 간결하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삐뚤어진 것을 좋아한다.
단순하게 화려하고 거대한 것도 좋지만 역시 엇갈리고 당황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들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호쾌하고 정의로운 영웅의 이야기보단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다. ... 어디가 삐뚤어졌느냐고? 그야, 지혜로운 왕에겐 얼마나 까다롭고 삐뚤어진 이야기들이 따라다니지 않는가.
뭐, 그렇다고 해서 준성이 현명하다던가 지혜로운 해결자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방관자적 입장으로 흥미로운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과 직접 그 흥미로운 사건을 직접 풀어간다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준성은 정리하는 자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자다. 실컷 조롱하고, 비틀고, 키워놓고서는 처리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인간재앙. 이 이상이 없을 민폐덩어리. 그게 바로 준성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봐야 준성이 말로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큰일을 저지르거나 범죄에 손을 넣지는 않는다.
자신의 욕망추구보다 사람다운 자유로움이 아슬아슬하게 준성의 마음속에서 우세를 정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 세상엔 사람들의 무리로 이루어진 단체나 국가가 있고 그곳에서 정한 규칙이 있다. 그리고 정해진 정도의 선을 넘어설 때 준성은 이 세상에서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를 잃게 된다.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준성은 어디까지나 아슬아슬한 선을 지켜가며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조금 전, 이름도 없는 소녀에게 저지른 안내 따위가 그러한 종류다.


...그렇다면 아주 만약에... 이 세상에 법도, 규칙도 없는 그저 무한하게 자유로울 뿐인 공간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다면...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갑작스럽게 주변을 울리는 20세기 중반 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전화 음.
작은 경종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음은 공원 주변을 울리고 있던 매미의 소음마저도 압도하며 준성의 청각을 멀게 했다.
무므, 하고 불편하게 얼굴을 찌푸린 준성이 자신의 호주머니 속으로 길게 손을 집어넣었다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청각을 멀게 하는 소음의 범인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따르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발신인은 『예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은 요정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
덤으로 준성의 핸드폰 착신음으로 이런 광역 어그로기를 추천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평범하고 듣기 좋은 착신음이면 언제까지라도 받지 않으시잖아요?’가 그 이유였으며 은근히 준성으로도 납득했기에 준성의 핸드폰 착신음은 이걸로 고정된 지가 벌써 한 달 째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당신의 사랑스러운 준성입니다.”
그 시끄러운 벨소리가 한번 더 울리기전에 재빠르게 통화버튼을 누른 준성이 장난스럽게 통화를 받자 이 작은 기기 저편에서 기쁘게 웃어주는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럼 저와 사겨주시는 건가요?』
정상적인 범주를 살짝 넘어서는 준성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 치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답해온 목소리는 계곡물이 흐르듯이 청량한 목소리, 그윽하고 향기롭지만 기품이 없다. 조신하고 아름답지만 어딘가가 텅 비어있다. 
“좋아, 오늘이 1일째야.”
『그럼 기념으로서 지극히 갑작스럽지만 지금부터 같이 데이트하지 않으시겠어요?』
“좋아, 오늘 해어지자.”
『와아──. ... ... 너무해요.』
도중까지만해도 잔뜩 들떠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죽어가며 더 이상이 없을 만큼 음침한 기운이 감돈다.
우와...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탄하면서도 준성이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참고적으로 말해주자면 나는 기분 좋은 대낮에, 기분 좋은 장소에서, 기분 좋은 낮잠을 즐기고 있는 도중이었어.”
『아, 낮잠 이신가요? 분명 따스한 햇살을 이불삼아 포근한 바람을 즐기는 환상적인 일을 경험하고 계셨겠네요. 그런데 혹시 오늘 2시에 무슨일이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2시인가, 응. 알고 있어. 너랑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지?”
『와아──. 기억해주셔서 기뻐요. 그리고 20분 남았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손뼉소리가 울린다. 그렇게까지 기뻐해준다면 아무리 준성이라고 해도 덩달아 기뻐진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사랑스럽지(평범하지)않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서...
『오늘도 약속을 무시하시면 당신의 소중한 사람... 조각조각으로 찢어버릴테니까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음성으로 뒷말을 이어 말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준성이 식은 땀을 흘려낸다.
“어─...어... 음.... 확인 상 물어보는데, 내게 원한을 푼다는 선택지는 없는 걸까?”
『설마요! 좋아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쌓인 원한은 당신의 가족, 친척, 친구에게 푸는 거죠.』
“그런가, 다행이야. 혹시라도 내게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할까 생각했거든. 난 아픈 걸 엄청 싫어해서 울어 버릴 거야. 펑펑 울어버릴거라고. 그런 점에서 울지 않게 돼서 다행이다. 이야, 다행이다.”
『그건 오늘도 약속을 무시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응, 상관없어. 내게 소중한 사람은 딱히 없거든.”
부모님은 없다. 보호자도 없다. 친구는... 어, 음. 부끄럽지만 없는 준성이다.
그러니까 상관없다.
『네, 알겠어요. 후우──.』
핸드폰 저편에서 체념이 담긴 긴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뒤로 그녀가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하여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이는 준성이었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와 이어지는 통화는 어이없을 만큼 깔끔하게 잘라졌다. 남은 것은 통화가 중단된 휴대전화. 그리고 따스하게 부는 여름바람.
‘그럴 리가?’
묘한 공포감을 느끼며 준성이 가만히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자 한순간 준성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한번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을 울린다. 발신인은 예상한 그녀로부터 였다.
메시지 내용은 한 글자도 없는 사진 첨부가 전부다.
가느다란 손바닥, 그것이 여성의 손이라는 것 정도는 외형을 통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녀린 손 그러나 아름답다고는 거짓으로도 말할 수 없다. 조잡한 화질만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여성의 손은 상처투성이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아물어간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성의 시선을 바로 잡은 것은 손바닥의 중심, 조금 전 상처를 당하기라도 한듯 길이 12cm 정도로 길게 찢어진 채로 피를 흘리고 있는 깊은 상처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 이었나.
준성이 생각한다. 반복하건데 준성에겐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러나 확실히 친구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유일하게 한사람. 조금 전까지 통화를 했고 메시지를 보내온 여성인 이예리다.
준성이 사진을 바라보며 이 상황이 곤란한 상황인지 곤란하지 않은 상황인지를 판단하고 있을 때 준성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칼날로 깊게 베어 상처가 난 부분에 입체적으로 맞지 않게끔 일자로 길게 매직이 그려져 있다.
선은 두 줄, 방향은 서로가 엇갈리듯 X자로 그려져 있었고 이번에는 사진 밑으로 작은 몇 마디도 메시지에 끼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장난ㅋ, 펜이랑 물감으로 칠 하고 풀로 디테일을 더한 거예요.ㅋㅋㅋ 저도 아픈 건 싫어하는걸요.』
5초도 지나지 않고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는 건 더 싫을 거예요.』
이번엔 2초.
『기다릴게요.』
그것을 끝으로 그녀... 예리의 통화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라면 이렇게도 간절하게 애원하면서도 소름이 끼칠만한 협박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상이 아니기에 그녀는 분명 비(非)정상인거다.
“으응 ... 곤란해, 이길 수 없어.”
준성이 고개를 질린듯이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상이 아닌 사람, 떨어지고 싶은 사람, 가능하면 인생에서 만나고 싶지도 않은 괴짜, 상종하고 싶지 않아지는 위험인물. 이 전부가 그녀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삐뚤어진) 그녀이기에 사랑스러운 거라고 준성이 미소 지었다.


2층 높이로 지어진 일반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면 건물 안쪽에서 울려오는 벨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물 안쪽에서 벨소리가 메아리치며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가기를 수 초, 이내 주택 안쪽에서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는 현관문 바로 뒤편에서 격철이 당겨져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음이 이어졌다.
소음은 한 두 개가 아니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족히 다섯 가지 이상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약 30초가 넘어가서야 입구를 막고 있던 두터운 문이 간신히 열렸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20cm 이상 벌어지지 않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준성에게 인사를 건내왔다.
박예리. 약 15분전 까지 준성에게 전화나 메시지를 보낸 장본인이며 숙녀라는 이미지가 강해보이는 흑안흑발의 미녀.
휴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교복을 입은 준성과는 달리, 여름에 어울리게끔 개방적인 새하얀 원피스와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가 시선을 끈다.
“응, 잘 기다렸어. 오래간만이네.”
“하루 하고도 두 시간 만인가요. 일단, 생각도 없이 지껄이는 버릇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야 내가 아니지.’ 예리의 권유를 넌지시 거절하며 준성이 자택 안쪽으로 발을 들인다.
예리의 자택은 상당히 넓다. 아니, 상당히 로도 부족할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저택에 가까운 것이다. 층수는 2층으로 이어지고 방의 개수는 총 8개. 지하로는 방음 처리된 오락시설 또한 갖추어져 있다. 인색한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면 방문객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벽화가 준성을 반긴다. 검은 점과 선이 복잡하게 얽혀 기괴한 문양을 형성하고 있는 그림. 그건 마치 정신을 빨아들이는 마녀의 흔적같이도 보인다.
대체적으로 자택 내부는 병이 걸릴 것 같이 새하얀 벽면과 가구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무늬 따위는 없다. 살아있다는 기척 따윈 느껴지지도 않는 무기질적인 풍경이다. 하다못해 수수한 조화라도 장식해두는 것이 이 질려버릴 듯 한 정적에 생동감을 더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언제 봐도 인형의 집이야.”
“그렇게 재미있는 곳은 아니지만요.”
자연스러운 감상을 토해내는 준성에게 예리가 쓴 웃음으로 답했다.
“녹차라면 대접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티백이지만요.”
“괜찮아. 이런 모조천국 같은 공간에 색을 더하는 건 죄를 짓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쿠션마냥 편안해지는 쇼파에 몸을 맡기며 풀어진 표정으로 준성이 말하자 예리는 맞은편에 앉아 손뼉을 쳤다.
“우연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이거든요.”
“... 그거야 네가 살고 있는 자택 안이 이렇게까지 시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헤에, 그건 제가 이 풍경을 좋아하고 있다고 들리는 데요.”
조용하게 고하는 예리의 음색에 준성의 말이 막힌다.
준성이 마주보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박예리. 준성과 같은 학년과 같은 반에서 재학 중인 고등학교 2학년. 아름다운 흑발이 발목까지 길게 내려서 있으며 전체적인 몸의 굴곡은 왜소하여 병에 걸린 환자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이게 그녀에게 개성을 주고 있는 것은 그 눈동자. 빛조차도 삼켜버릴 듯 한 그 까만 눈동자엔 초점이 없다. 이것도 저것도 빠져나가버린 공허함만이 그곳에 있다.
“음, 그렇군..”
... 네가 무언가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끝말을 삼키며 준성이 이야기를 돌린다.
“그래서 용건은 언제나 부탁해온 그건가?”
“어머, 아세요?”
“벌써 세 번째 부탁인걸. 익숙해질 만도 하지.”
어깨를 들썩이며 과장되게 떠는 준성에 예리가 놀란 듯이 한손으로 입가를 막았다.
긴 숨을 빠르게 삼키는 소리를 준성의 달팽이관이 감지했다.
“사람은 학습하는 생물이란 거네요. 처음 알았어요.”
“그 대사는 오해를 불러온다는 걸 알고 있어? 어이, 어디 행성에서 오신 외계인님이신가요.”
“물을 것도 없죠. 저는 당신과 같은 지구출신 인간이에요.”
“그럼 사람을 처음 본다는 투로 말하지 마. 보는 사람이 다 슬퍼진다고.”
한숨과 함께 준성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예리가 따라 나선다. 이미 몇 번인가 반복해온 작업이기에 준성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거실을 지나쳐 긴 복도를 지나면 창고로 쓰이는 방에 다다르게 된다. 그 안쪽에 위치한 것들은 방안을 빼곡하게 매우는 그림의 산들. 열 개나 스무 개로도 부족하다. 물경 백을 넘는 그림들의 산이다. 다만 하나 같이 통일되어 있다. 새하얀 바탕에 검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문양들이 그려진 그림들 뿐. 그건 분명 거실에 걸려있던 그 그림과 무척이나 유사한 것들뿐이었다.
준성은 이 많은 그림 중에서도 한 개를 집어 들어 창고를 빠져나온다. 준성이 지금까지 해온 일은 단순하다. 거실에 걸려있는 벽화를 비슷한 그림으로 갈아 끼우는 것. 겨우 그 정도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이야기의 장에서 진 히로인은 첫 번째가 아니라 나중에 나온다고 생각해요.”
거실로 걸어가 벽화를 갈아 끼우던 준성에게 예리가 입을 연 것이었다.
준성의 시선이 벽화에서 그녀에게로 향하자 예리의 텅 빈 눈동자는 그런 준성을 거울처럼 비추더니 얼굴색 하나 변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으응, 그러니까 하나의 이야기엔 하나의 이야기가 있죠. 요즘엔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도 많다지만 보통은 그렇잖아요?”
“어, 그러니까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야 다음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말이구나.”
“사이드가 나온 다음 나오는 메인요리 처럼요!”
“아니, 그것보단 식 후에 있는 디저트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점심 다음 저녁 식사라는 느낌이야.”
“어째서 그렇게 심술궂은 건가요!”
“... 어째서 화내는 거야?”
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도 예리는 보기 드물게도 귀엽게 화를 내며 고개를 돌린 채로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지뢰를 밟은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준성. 이런 반응을 준다면 가능하면 원인을 깨달은 채로 다음에도 꾸준하게 골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적지 않게 들고 있었지만 준성은 끝까지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3.
준성이 예리의 자택에 도착한지도 2시간이 흘러, 시간은 벌써 4시를 넘어간다.
그리고 4시라면 아침을 든든히 먹어두었다 하더라도 점심을 굶었다면 사람의 뱃속에서 둥지를 튼 자명종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위 말에서 예상할 수 있듯, 준성과 예리는 아직까지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것.
이곳 까지 왔으니 예리로서는 평시에는 사용하지 못했을, 호화로운 조리 기구들을 왕창 사용해주겠어! 라는 느낌으로 조리대에 서는 준성이었지만 비극적이게도 냉장고 안의 식료들은 야채 전반을 제외하면 전멸해 있었다.
그야 물론 앞이 보이지 않는 예리가 불이라던가 세세한 조리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곤 생각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심한 상황이라며 비관하는 준성이 짧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쇼핑.
고기 맛을 좀처럼 맛보지 못한 가여운 중생에게 배푸는 자비란 녀석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대형마트처럼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 예리를 대리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렇다면 자택에 남아서 얌전히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기다리라고 말했던 준성이었지만 예리는 끝까지 따라와 마트 앞에서 준성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긴 지팡이로 바닥을 집어가며 걷는 것 치고는 상당히 빠른 발걸음.
그러고 보니 휴대전화로 메시지도 잘만 보냈던데 혹시 앞이 보이는 게 아닌가 하고 물었지만 휴대전화는 버튼 소리로 버튼을 구분 할 수 있기에 보낼 수 있는 것이며 걷는 것은 사람으로서 익숙해진 덕분이라는 말을 성취감 있는 듯이 지극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고 준성으로서는 그 안쓰러움과 우스꽝스러움에 갈채를 보내는 것 이외의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가 대형마트.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구성된 거대한 건물 상가를 단 3개월 만에 부랴부랴 뜯어고쳐 이 거리에 냅다 던져놓듯이 오픈 한 것이 바로 이곳인 일색마트다. 당시엔 이건 정말 괜찮은 건가하고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파격적인 이벤트로서 순식간에 유명해진 장소였고 개장 반년이 지나가는 지금으로선 인근 주택가에서나 찾는 그냥 그런 장소가 되어주었다.
개교기념일에 맞춘 평일, 그것도 어중간한 시간대인 4시 덕분인가 매장 내부에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한산 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단순하게 드는 것 보단 미는 게 좋다는 이유로 동전을 먹인 카트를 끌며 돌아다니는 준성에게 구입계획 같이 착실한 게 구비되어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폭거, 융통성도 없고 연관성도 없는 식재료들의 향연이다.
그렇다면 우선 눈에 띄는 크림빵 종류와 와사비, 육류등을 장바구니에 담아볼까 하고 파멸적인 선택을 준성이 취하려던 때.


‘사건’은 그야 말로 갑작스럽게.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아무런 징조조차도 없이.
일어났다.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떨림 소리와 함께, 매장이 기울어진다.
매장 전체가 2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뒤흔들린다. 아니, 준성은 기울어진 것이 매장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어 쓰러질 듯 몸이 휘청거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준성 주변에 위치하던 각종 진열대들도, 진열대 안쪽에 가득 채워져 있던 다른 물품들도 흔들리는 지축을 버텨내지 못한 채로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려는 듯이 쓰러지고 있었다.
준성은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같이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경험이 있다. 4박 5일간의 짧다면 짧은 여행. 그 시간 속에서 준성은 지금과 같은 경험을 겪어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느껴 볼 수 없는 경험. 세계가 비명을 지르듯이 지축이 뒤흔들리는 경험. 사람으로서는 대항조차도 할 수 없는 그저 압도적인 재해.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매장 전체는 아수라장이 되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러지는 소란은 이윽고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압도당한다. 천장 위쪽에서 매장을 밝히던 전등이 불길한 소음을 흘리며 깜빡거리고 물건들이 굴러 떨어지고 병조각들이 사방에서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어지는 잠시간의 정적속이서 홀로만이 존재감을 발하듯 터지지 않은 음료수 병이 바닥을 굴러가 어딘가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착각 때문일까, 이상하기 그지없게도 분명 사방이 틀어 막힌 건물 내부에서 시원한 바람과 소금의 짠 내를 준성이 맡았다.
시간적으로 따진다면 3초 남짓, 양손으로 쇼핑카트를 잡아내 어떻게든 넘어지는 것만은 면한 준성이 무의식적으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그리고...
"어?"
멍하게 그런 소리를 흘린 건 필히 준성만이 아니었을 거다.
정말이지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제법 위력이 강한 지진을 만났다고 생각했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금 있는 장소는 ‘다른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되어 있었습니다.’ 오오, 하고 놀랍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하고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
어찌되었건 간에 대형마트, 그 중에서도 수백 명이 가득 매워져도 부족함이 없는 거대한 실내 코너 중, 윗 쪽에 위치한 전자기기 및 장난감 코너들이 신이 만든 칼날에 잘려나간 듯이 매끄러운 절단면을 자랑하며 소실되었으며 그 텅 빈자리엔 까마득한 절벽과 그 너머로 망망대해로 가는 해안선이 드러났던 것이다.
휭─, 하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모든 사람들의 떨림이 멈추고.
누군가가 입을 열기보다 빨리 화려한 불빛으로 점거되었던 대형마트의 실내코너는 정전으로 인해 드리운 새까만 그림자에 묻혔다.


그 뒤로.


어, 어음... 대충,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혼란에 따라 꺅꺅─! 고주파 공격을 내지르고, 뻥 뚫린 북쪽 해안선에서 들어오는 태양 빛을 의지해 가족을 찾고, 핸드폰을 열어보면 권외표시가 되어버렸고, 이런 놀랍게도 그 비스듬히 잘려나간 면적에 위치해 있던 사람은 두 눈으로 못 볼 대참사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뿔뿔이 흩어졌고 이곳에 남은건 아수라장뿐이다.
아수라장, 제법 감미로운 그 단어를 되새겨보며 준성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현 상황을 판단한다면...
"만약, 이게 이야기라면 지금이 시작부분이라고 생각해."
"에, 네?"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오다, 그리고 시작되는 모험과 낭만 그리고 사랑이지. 하하. 물론, 마지막은 농담이야."
장소는 이래저래 난리가 난 대형마트.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소란스러움에 쓰러진 걸까,  넘어진 진열대에 깔린 채로 상반신만을 내밀고 있는 한 소녀에게 준성이 쭈그려 앉은 채로 흘려낸 소리였다. 진열대는 와인 병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주변은 깨진 파편들과 여러 종류의 와인 향들이 한대 섞여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 중심,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아픔조차도 잊은 채로 당황한다. 초점이 흔들리며 몸이 힘껏 움츠러들었다. 시내를 걸어가다가 변태를 만났을 경우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준성이다.
실로 아쉬운 반응이다. 그러나 준성이 생각하기에도 그 반응은 평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미안한 마음이 싹트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유쾌한 상황에 관한 흥분감에 준성은 보다 유쾌하게 지껄임에 이르고 만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힘내보자. 아! 그렇다고 서로 협력하자는 의미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줘."
소녀는 그저 입을 뻥끗 거릴 뿐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준성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래간만이네, 소녀. 3시간 만이지? 찾고 있던 시계탑은 찾았어?”
준성에 대답에서야 소녀가 기억을 떠올렸듯 한가지의 명확한 감정이 소녀의 눈에 깃든다.
준성으로도 명확히 알 수 있는 그건 짜증스러움이었다.
“읏, 당신! 이 거짓말쟁이! 내게 뻔뻔하게도 웃음으로 말을 걸 수 있네요!”
말할 것도 없었다.
준성이 아침 공원에서 만났던 그 소녀였다.
그 훌륭한 낮잠을 나뭇가지로 찔러 방해했던 그 소녀다.
여전하게 기운차고 당찬 모습은 언제나 괴롭혀지고 싶은 모습이구나 라는 감상을 품으면서 준성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설마 비열하기 짝이 없다던가 무서운 모습으로 대면하고 싶었던 거야? ... 그렇구나, 소녀는 말로만 듣던 마조인가.”
물론, 소녀는 울컥한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뻔뻔한 얼굴로 제 앞에 나타난 당신에게 기가 막힌 거예요! 안 그래도 엄청 아픈데!”
“아파? 음, 네가 지금을 인식하는 정도는 겨우 그 정도인가. 좋아. 우연도 두 번째면 우연이 아니라지. 이름을 말해. 특별히 기억해줄게.”
“... 네?”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 반, 이상한 괴인을 피하려는 두려움 반으로 준성을 올려다보는 소녀.
그런 소녀를 내려다보며 준성이 곤란하다는 듯 요란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으음, 그 반응으로 보아하니 너는 잘 모르는 듯하네, 이쪽에서 너를 내려다봤을 때 네 상처는 심각해.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는 건 통증으로 알고 있지? 의학이라던 가는 전혀 모르지만 저 정도면 피가 계속 흐를 거야. 그러면 출혈사 하지 않으려나."
"...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무슨 말이라니, 별거 아냐.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거지.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힘이 약해서 너를 깔고 있는 진열대를 치울 수 없을 거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힘들 것 같네. 그러니까 헛된 희망을 품기 전에 솔직하게 고백할게, 나는 너를 구할 수 없어."
준성이 손가락 끝으로 소녀의 볼기를 쿡쿡 찌르며 냉담한 말을 흘렸다.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름을 기억해 주는 거야. 고전만화 좋아해? 뭔가 장대하게 말하잖아,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영원하게 살아간다.'고, 웃기는 말이지만 그걸 내가 해주겠다는 거야. 집주소를 알려준다면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댁의 따님은 인근 대형마트 와인코너에서 숨지셨습니다. 라고 전해줄게."
생각해봐, 이름을 아는 것만이 아닌 대서비스라고? 넌 운이 좋아, 행운아네!
그런 말을 늘리며 가볍게 웃는 준성, 그러나 그런 준성과 반대로 소녀로서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주변이 흔들렸다 싶었더니, 무거운 짐들에 깔린 채로 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넌 죽는다.'라니──.
누구라도 웃을 수 없는 이야기다.
"잠깐만요. 거짓말이죠? 거짓말..."
증거로 소녀의 말은 초조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외침을 준성은 부드러운 미소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너는 '이건 꿈이야.'라고 절망과 비관하는 등장인물의 뒷이야기가 정말로 꿈 이었다──. 라는 이야기를 본적 있니?"
"... 무?"
소녀는 말을 삼킨다. 부들부들 떨리는 초점이 뒤로 향하지만 어두운 상황과 깔려버린 자세로 뒤로 초점이 닿지 않는다.
아주 잠시 동안 소녀의 표정이 여러 갈래로 바뀌어가며 끝내 시퍼렇게 굳어가더니 다시 한 번 준성을 올려다보았다.
"...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손목을 긋고, 밧줄에 열매처럼 매달리는 사람들뿐이지. 흔히 말하는 '죽어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당장 죽어버리면 되지 정말로 죽고 싶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아. 그런 행동은 자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신호라고, 즉, 이 세상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너만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마법처럼 죽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요! 구해주세요!"
"후우, 너는 정말로 이기적이구나. 하지만 어떻게 구하란 말이니? 나는 진열대를 들 수도 없고 너를 치료해 줄 수도 없고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너를 구해?"
"궤변이에요!...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할 수 없다.’란 해본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과연─. 하고 납득한다.
소녀에게 절망은 보여도 포기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훌륭하다. 흔히 말하는 눈이 부시는 일면이다. 그것이 비록 목숨구걸에서 오는 마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발밑에 깔려있는 소녀는 발버둥 친다. 어떻게 봐도 아이밖에 되지 않는 키와 가느다란 몸을 엎치락뒤치락 뒤집으며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자세와 깔린 위치가 나쁜 건지 소녀를 누르고 있는 진열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저 꼴사나울 뿐이구나... 준성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용하게 눈을 감는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눈앞에 들이닥쳤다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준성 앞의 소녀는 지극히 인간다우면서도 강한 사람.  준성은 그러한 사람을 나름대로 좋아하는 편인 것이다.
준성이 몸부림치는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동안 조용하게 생각하듯 눈을 감고 있던 준성이 눈을 뜬다.
"네 마음은 이해했어. 이런 생소한 장소에서 이런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천만분의 일 만큼일 지라도 내게 전해졌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답해줄게. ... 싫어. 나는 너를 돕지 않을 거야. 나는 무의미한 것에 머리를 들이밀 정도로 괴짜가 아니거든. 게다가 나는 시체를 본적이 없어.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서 시체를 보게 울지도 몰라, 토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는 가급적 빨리 이 장소를 떠날 거야. 그러니까 빨리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래? 걱정하지 마. 그러면 너는 이곳에서 죽는 다해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응, 생판 남의 가슴속 이지만. 그것도 아마 7일 도 못가서 잊어버리겠지만... 뭐, 없는 것 보단 낫잖니?"
양 무릎을 굽혀 앉았던 준성이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이란 듯 입을 닫자, 몸부림치던 소녀가 준성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과 그 밑에 위치한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맺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무언가 목소리를 토해내려고 하지만 목청에서 걸려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는 투였다. 준성은 그런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허리를 굽혀 오른손으로 상냥하게 아직 흘러내리지 않은 소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래, 끝까지 네 이름을 알지 못한 건 조금 아쉽네."
그게 내 후회다.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듯이 준성이 소녀를 향해 말을 건넨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 역시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황을 준성은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좋아. 이게 마지막. 이제 슬슬 떠나야할 때다. 어찌되었건 전체적으로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고 이 장소에서 끝도 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영차."


정말, 지금까지 뭔 소리를 지껄인 거냐고 물을 정도로 간단하게, 준성은 소녀를 깔아뭉개고 있던 진열대를 세웠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채로 선반에 올려져있던 와인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울고 있던 소녀의 표정이 또 한 번 멍하게 굳는다.
그렇든 말든 준성은 진열대가 쓰러지지 않게 일자로 세워두더니, 얄미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해, 나오지 않고?"
"에...?"
"왜 그래? 뭐가 그렇게 이상해?"
벙찐채로 준성을 아직까지도 올려다보는 소녀.
그 입속에 한번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다는 장난기가 도는 준성이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왠지 한치의 거짓말도 없이 정말로 잘려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기에 기적적인 인내력으로 그것을 참아낸다.
"에, 에에...  힘이 약해서 진열대를 들지 못한다고..."
소녀가 묻는다.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이상 없이 세워진 진열대를 가리킨다.
그것에 준성은 뭐 하나 이상할 것 없다는 투로 자연스럽게 답했다.
"거짓말이야. 다른 것들처럼 금속도 아닌 목재로 이루어진 진열대고 진열된 물건들은 와인들인데 이건 대부분 깨졌잖아? 아무리 힘이 약해도 남자라면 이 정도는 세울 수 있어."
"다리에서... 상처가 나서 피가 난다고."
"응, 상처는 있어, 따끔따끔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피가 흐를만한 상처는 아니야. 너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간단하게 내 말을 믿더라, 그리고 다리가 축축하다 느낀 이유는 터진 와인 때문이지."
"나는, 이곳에서 죽는다고..."
"지금까지 모든 게 거짓말이었는데 설마, 여기서 부정하길 원해? 아, 무척이나 유감스럽습니다만 당신은 이곳에서 죽게 됩니다. 불쌍하군요. 훌쩍훌쩍. 이라는 말을 듣는 비극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거니?"
"그, 그럼. 그럼 지금까지 있는 모든 게..."
"하하, 모두 알고 있잖니?"
소녀의 감정을 일축하며 소년이 우스운 소리를 내뱉은 듯 웃었다.
정말이지 못된 장난이 성공했다는 해맑은 미소로 예나 저나 똑같게 지껄인다.
"장난이야."


 
+ 작가의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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