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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 1챕터 피드백 일자는 편집부 사정상 이번주 목요일(11월 14일)까지 작성됩니다.
늦어지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드리며, 수정을 위해 3주차 마감을 다음주 월요일(11월 18일)로 연장합니다.
피드백을 받은 뒤 이미 작성된 글을 수정하셔도 무방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검토는 최종 수정 원고가 기준이 됩니다.

 
SF와 무협의 기(氣)에 대한 차이(가제)글 흑동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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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강철로 꾸며진 가짜 무대 위에서 연기자는
13-10-23 23:39
 
 

1.

아침 8. 휴일 치고는 이른 시간. 주성은 관광지로도 자주 쓰이는 세율시 내의 역사 관람 공원에 있었다.

교황도의 각 섬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있는데, 모조리 박물관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장소였다.

물론 공원은 공원이라, 쉴 수 있는 벤치도 있었기에 주성은 홀로 벤치 하나를 모조리 차지하고 드러누워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그러고 있자 곧이어 나타난 상대가 주성의 귓가에서 소리쳤다.

이봐! 제대로 일어나지 못해!?”

주성이 20분 내내 전화를 걸어대 겨우 일어난 프랜시스 한이었다.

~ 다짜고짜 불러내선 퉁퉁 부은 얼굴로 가만히 축 쳐져서 벤치 위에 엎어져 있을 뿐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프랜시스는 휴일 날 아침부터 스마트폰의 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는 사실이 불만인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씩 봄의 싱그러움이 사라지고 여름의 더위가 다가오는 시기의 휴일.

주성은 벤치 위에 엎어진 상태로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어젯밤, 자신을 서령에게 팔아버린 배신자 프랜시스를 노려봤다.

“........”

저기, 10분 내내 그렇게 노려보기만 해선 아무 의사도 전달되지 않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프랜시스는 슬슬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햇볕을 막기 위해 늘 쓰는 검정색 바탕의 뉴에라를 푹! 뒤집어썼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야?”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거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주성은 몇분째인지 모를 정도로 이를 갈았다.

“.......계속 그렇게 이만 갈다가는 치과에 가야할거야.”

, 그건 안 되지. 치과는 아직 좀 무섭거든.”

주성은 이를 갈던 것을 멈췄다.

한심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주성은 아직까지도, 치과에서 들어가면 들려오는 기분 나쁜 기계소리를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치과의 치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지고는 했다.

어린 시절 있었던 어떤 일이 큰 트라우마를 만든 것 같지만 주성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연상 되는 것은 차갑게 미소 짓는 서령이라는, 자칭 하인의 얼굴뿐으로. 어찌된 일인지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서도 그녀는 10대 후반의 아름다운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성은 이를 가는 것을 멈춘 대신 이를 갈면서 풀고 있던 원한 아닌 원한을 모조리 시선으로 옮겨버린 듯, 뚫어지다 못해 뚫려 생긴 구멍에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바득바득 이를 갈지만 말라는 게 아냐! 노려보지도 마! 얼굴에 구멍 뚫리겠어! 너 또 수련 도망친 거지? 서령 언니에게 여기 있다고 연락해도 좋아?”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타박에 주성은 눈에서 힘을 풀었다.

평소의 귀차니스트의 얼굴로 돌아간 주성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프랜시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난 왜 불러냈어?”

혹시 데이트 신청? 프랜시스는 이런 남자지만 만나고 싶다고 연락받은 것이 싫지만은 않은지 미미한 기대감을 가지며 미소 짓고 있었다.

심심해서. 적당히 말 상대나 해줘.”

하지만 그 말에 그나마 남아있던 주성에 대한 호감도가 폭삭 내려앉았다.

하아? 무슨 소리야? 난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거든?”

한순간에 얼굴의 미소를 지워버린 프랜시스는 짜증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적당히 받아넘긴 주성은,

좋아. 그럼 적당히 내 불평을 들어줘.”

말만 틀리지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이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

.......!! 따지고 보면 똑같잖아!”

좋아. 그럼 데이트다. 이건 데이트니까 적당히 어울려줘. 어제 분명 나한테 데이트는 다음에 해자?’라고 귀엽게 말하고 갔잖아?”

으으.......!! 어울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 적당히 라는 게 기분 나빠........”

귀엽게 말했다는 부분은 부정하지도 않으며 프랜시스가 벌레라도 본 듯한 얼굴로 말했다.

프랜시스는 어째 기대하고 있던 말을 들었는데도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좋아, 그럼 데이트로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하자.”

주성은 프랜시스의 기분도 적당히 무시하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건 오늘 아침의 일이었어.”

왠지 길어질 것 같네.”

가볍게 넣은 프랜시스의 딴죽을 무시하고 주성은 말을 이었다.

 

2.

몇 시간 전.

 

주성은 아직 이른 새벽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시지요. 수련 시간입니다.”

차갑기 그지없는 물세례를 맞으며.

푸핫!? , 뭐야? 지붕이 뚫려서 비라도 내리는 거야!?”

허우적거리며 바닥에 깔아둔 이불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주성의 눈에 귀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인물이 보였다.

꺄아아아아악!!!! 처녀귀신!!”

가볍게 차였다. 서령이었다.

, 뭐야? 서령이었어? 뭐야. 왜 깨우는 건데?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너도 알다시피 어제 밤, 난 마라톤을 하다 왔어. 그래서 무척 피곤하단 말이다. 휴일에는 좀 쉬자고.”

겨우 정신을 차린 주성이 삐딱한 얼굴로 불평을 쏟아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성은 어제 밤 10시부터 서령이 내린 벌로서 제 빈천군에서부터 집이 있는 제율시까지 뛰어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을 향해 돌진해가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밤의 다리 위는 무척 추웠고, 주성은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폐가 터지도록 뛰어서 새벽 2시 즈음에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그 뒤에 깨어났을 때에는 어느 샌가 집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불이 펴진 방바닥에 집어던져져 깼을 때 시간을 확인했기 때문에 몇 시에 잠들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참고로 현재 시각은 새벽 430. 주성은 겨우 2시간 30분밖에 자지 못했다.

숙면을 취하셨으니 2시간 30분 정도 주무셨으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난 2시간 밖에 자지 못했는데 30분이나 더 자다니 짜증나.”

이봐! 너 정말 사용인 맞아!?”

사용인이랄까 고용인이랄까, 하인입니다.”

하인은 개뿔이다!”

하인이 개뿔이었습니까?”

그건 또 뭔 소리래!?”

깨자마자 말싸움 아닌 말싸움을 했기 때문일까, 주성은 지친 얼굴로 물에 젖은 것도 무시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몰라. 대충 자다보면 마르겠지. 됐으니까 피곤하면 너도 가서 좀 더 자면 되잖아. 애초에 어젯밤에 그냥 놀러가게 놔뒀으면 이렇게 서로 피곤할 일도 없었을 텐데.”

죄송하지만 뿌린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얼른 일어나지 않으시면 안 그래도 안 생기는 여자 친구가 더 안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악담이었기에 가뿐히 무시한 주성은 약간 젖어서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물이기에? 어째 좀 시원한데?”

밖에 고여서 얼어있던 구정물.”

푸핫!? 그런 건 좀 더 일찍 말하라고!”

주성은 자신이 얼굴을 묻고 있는 이불을 적신 물이 더러운 구정물이라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급히 젖은 이불을 멀리 집어던졌다.

서령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이불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농담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여름으로 달려가는 시기. 얼어있는 구정물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여긴 고산지대가 아닌 섬인지라 밖에 놔둔다고 어는 것이 아니더군요.”

! 그럼 이 물은 뭔데?”

그냥 수돗물입니다. 설마 화장실 물이겠습니까?”

주성은 서령의 마지막 말에 찝찝함을 느끼며 급히 샤워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잠시 뒤, 주성은 급히 씻고 난 뒤에 집 한쪽에 세워진 작은 도장으로 불려가 있었다.

도장이랄까, 요즘엔 보기 드문 목조 형식의 바닥을 하고 있는 체육관 같은 건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제율시에 세우는 이상,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았다면 건물은 무조건 조선시대에 가까운 형태로 지어야했기에 벽이고 뭐고 모조리 목제로 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목조가 아니라 목제로 보일 뿐인 합성물질을 가공한 것이었지만, 다행인 점이라면 사람의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주성은 샤워를 하는 바람에 잠에서 깬 맨 정신으로 서령이 끌고 오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기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기, 이건 뭐야?”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하고 자신의 정신이 멀쩡한 것인지 의심하는 주성에게 서령은 기계를 끌고 오던 것을 멈추고 뭔가 터치패드 같은 것을 조작하며 되래 물었다.

뭘 것 같습니까?”

, 글쎄? 뭘까?”

애매하게 대답한 주성은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좋군요. 거기서 세 발자국만 뒤로 가주십시오.”

서령은 웬일로 주성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터치패드의 조작을 계속했다.

주성은 그 말에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픈지 확인해 봐야겠지만, 척 보기만 해도 저 서령이라는 자칭 하인인 사용인은 멀쩡해 보였다.......기보다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서령을 조사한다 해도 다른 때와 틀린 점은 없을 것 같았기에 주성은 다시 한 번 기계를 주시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이거 그거지? 터치패드라던가 이런 저런 것들이 붙어있지만 분명 그거지?’

아무리 봐도 야구 배팅 게임에 이용하는 피칭머신이랑 똑같이 생겼다.

주성은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 같아서 창백한 얼굴을 했다.

저기, 서령?”

. 무슨 일이시죠?”

터치패드의 조작이 끝난 것인지 가볍게 고개를 든 서령에게 주성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향했다.

혹시, 이거 내가 상상하는 그거야?”

대체 무엇을 상상한 것일까. 주성이 불안에 떨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령은 잠시 주성의 얼굴을 이목저목 살피더니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하얗게 질리지 않은 걸 보니 조금 부족하군요.”

주성은 이대로 도망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 전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이만 조퇴합니다!”

하지만 어느 샌가 주성의 뒤까지 와있던 서령에게 주성은 목덜미가 붙들리고 말았다.

그럼 어떤 상상을 하셨든지 그 이상을 보여드리죠.”

그 이상이랄까, 그보다 더할 수도 있는 거야!?”

이제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딱딱하게 굳은 주성을 붙잡고 서령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 뒤, 주성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도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으로 피칭머신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럼, 수련을 시작합시다. 11시간 분량을 추가해 총 14시간 분량을 수련하기 위해선 최소한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고는 상당히 힘이 듭니다. 현재 시각은 오전 520분으로, 오후 1220분까지 수련. 그 뒤 30분가량 점심을 드시고 다시 남은 분량인 7시간가량을 수련. 그것을 끝내면 8시쯤이 될 테니 저녁을 드시고 가볍게 목욕을 하신 뒤 취침하시면 되겠습니다.”

서령이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을 술술 읊어주자 주성은 듣기만 해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난 로봇이 아냐....... 난 인간이다.”

밥 먹는 시간만 빼놓고 조금도 쉬지 않은 채 이런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이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인간이 아닌 로봇이 한다고 해도 저렇게 풀로 굴리면 고장 날것이 분명하다.

주성은 입술을 삐쭉이며 통하지도 않을 작은 반항으로 두 귀를 막고 안 듣는 척을 했다.

하지만 서령은 주성의 작은 반항도 무시한 채 이어서 수련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 피칭머신.......?이었나요? 이걸 이용해서 야구공을 날려 보내겠습니다만.”

서령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지 약간 꺼림직 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속도고 뭐고 모조리 랜덤모드.......? 그러니까, 대충 제멋대로 날아간다고 하니 모조리 피하도록 하십시오.”

? 야구공? 그런 걸로 했다가 잘못 맞으면 죽지 않아?”

주성이 불안하단 얼굴을 하며 막고 있던 귀에서 손을 때자 서령은 담담히 말했다.

그야 죽겠지만, 전 주성님을 믿습니다. 주성님은 체력이랑 회복력을 빼면 시체잖습니까?”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한 말이었다.

주성은 밀려오는 공포에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는 것을 느꼈다. 야구공을 맞았다간 잘못하면 최소 중상. 심각하면 식물인간에 사망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못 고치는 병이 없어졌다지만 병원으로 옮길 세도 없이 즉사해버리면 발달한 의학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다. 그대로 비명횡사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거기선 평소처럼 믿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입니까? 전 언제나 도련님을 믿고 있습니다.”

서령은 정말 답지 않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주로 반드시 제 생각의 정반대로 행동하실 것이라는 점을 말이죠.”

,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서령이 답지 않은 밝은 미소를 계속 유지하며 터치패드를 살짝 조작했다.

그 모습이 사신을 부르는 의식처럼 느껴진 것은 어째서일까? 어째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죽음의 공포가 다가온다고 해야 하나. 주성은 밀려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쳤다.

역시! 선생님! 저 이상하게 몸이 안 좋아서 보건실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 전 선생님이 아니고 여긴 학교가 아닙니다.”

서령의 차가운 대꾸와 함께 터치패드 화면에 나타난 ‘START!' 버튼이 눌러지고, 곧이어 피칭머신에서 주성을 향해 야구공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누가 좀 살려줘어어어!!”

, 확실히 쉬는 시간이 없으면 탈진으로 쓰러져 죽으실 지도 모르니 2시간에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죠.”

괜히 생색내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서령에게 주성은 외쳤다.

그건 고맙지마아아안!!”

참고로 도련님이 멈추셔도 이 피칭.......? 머신은 멈추지 않으니까요.”

주성에게 있어 경악스러운 사실을 담담히 전한 서령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죽어! 절대로 죽을꺼야아아아아아아!!”

주성은 목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야구공에 얻어맞아 죽지 않기 위해 쉴 세 없이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칭머신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은 정확히 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맞더라도 절대 머리와 국부만큼은 보호한다! 라는 결사의 각오로 모든 야구공을 피하거나 맞더라도 팔다리 등에 맞도록 한 주성은 다행히 걱정과 다르게 죽진 않았다. 물론 거의 탈진된 상태로 바닥을 기게 되긴 했지만.

그럼, 1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요. 전 다음 수련의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온몸에 멍이 든 주성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취한 서령은 그 말만을 하고 수련용 도장에서 물러났다.

주성은 그녀가 준비한다는 다음 수련이 무엇인지에 대한 크나큰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것이 미지라고 했던 것이 누구였던가. 서령이라는 여자는 알게 모르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여자다. 적어도 주성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뛰어넘었겠지.

피칭머신으로 날리는 궤도, 속도, 변화구 유무 등의 모든 것이 랜덤인 야구공을 피하거나 막는다는 바보 같은 짓보다 쉬울 리가 없을 것이다. 주성은 자신의 상상력이 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수련이 무엇일지 상상해 보기로 했다.

히이이이이익!!!!”

주성은 이번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한 가지 큰 결심을 하기로 했다.

탈출이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절대로 죽을 거야!”

탈출했다 붙잡혔을 경우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주성은 곧장 결정을 내렸다.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이 흘린 땀으로 흥건해진 도장 바닥을 기어 문으로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하는 주성.

후후후훗! 이래 뵈도 맨몸으로 감옥에서 탈출하는 법!’ 등의 책을 읽은 몸이라고! 하물며 여긴 우리 집이다! 탈출하는 건 누워서 껌 먹기지!”

주성은 누가 썼는지도 확실치 않은 책을 언급하더니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아! 이 지옥에서 대 탈출이다!”

그리고, 주성은 정말 단 5분 만에 탈출하게 된다.

그 결과, 집을 장악한 서령이라는 마녀 때문에 더 이상 집엔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3.

 

“........, 그렇게 된 거야.”

하아. 뭔가 바보 같은 이야기네.”

주성이 기나긴 불평어린 이야기를 끝내자 프랜시스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주성을 훑어봤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것. 주성이 어째서 후줄근한 도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이유는 적당히 듣게 되었지만 어째 더 바보 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세율시는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쯤의 시대를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 옛날 풍의 도복을 입고 있어도 그리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웬일로 이 인간이 늘 입던 청바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푸른색 재킷 외의 것을 입고 왔는지 궁금했는데 그냥 수련 도중 빠져나오느라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뿐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체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주성의 이야기에서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잡아내지 못한 프랜시스는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다.

주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결론은, 난 지금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거야. 아무래도 우리 집은 마녀의 손에 떨어지게 된 모양이거든. 아니, 처녀귀신이라고 해야 되나? , 어느 쪽이든 무서운 건 마찬가지니 상관없지만.”

서령이 들었다면 소리 없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발언을 한 주성이 한숨을 쉬었다.

흐응, 그래서?”

프랜시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성도 역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 그래서 오늘 하루만 네 집에 좀 재워주라.”

기각!”

프랜시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외쳤다.

에엑!? 뭐 어때서 그러냐!? 이 매정한 인간! 혼혈마녀!”

다물어. 미안........하지도 않나. 그보다 너 너무하지 않아? 난 혼자 살고 있다고! 그렇게 가벼운 태도로 혼자 사는 여자애 집에 재워달라고 하다니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널 우리 집에 들이겠어? 네 어딜 믿고?”

치가 떨린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떠는 프랜시스를 흘겨본 주성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렇게 된 건 어제 네가 속여서 그런 거잖아.”

으윽!”

주성이 어젯밤의 일을 언급하자 프랜시스는 양심이 찔렸는지 얼굴을 굳혔다.

꼭 서령을 도와줄 필요도 없었잖아? 어제 날 붙잡는데 협력한 이유가 뭐야?”

주성이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묻자 프랜시스는 주성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것이 더욱 수상해보였는지 주성의 눈빛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뭔가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눈이었다.

프랜시스는 그 눈빛이 점점 부담스러운지 아직 크게 더운 시간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려대기 시작했다.

아악!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마! 넌 째려보는 시선이 무섭단 말이야!”

시선에 기겁하며 벤치의 끄트머리까지 후퇴한 프랜시스는 얼굴을 굳히며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말이지.”

.”

주성은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 듣고 나서 너무 화내지 않기다? 알겠지?”

.”

몇 번이고 확인하듯 물어오는 프랜시스에게 주성은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주성을 보던 프랜시스는 난처한 듯 몇 번인가 목 언저리를 문지르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실은,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의 초청 권 한 장을 구해준다는 약속을 받아서-”

웃기지마 어이!!!!”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듣자마자 주성이 열 받은 얼굴을 들이대는 바람에 벤치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야. 뭐야! 화 안내기로 했으면서!”

어깨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심하게 쑤셔오는 부위를 움켜잡으며 프랜시스는 성을 냈다. 화를 안내기로 약속해서 기껏 말해주었는데 조금도 참지 않고 터뜨리며 들어오니 자신도 화가 나기는 한 것이겠지.

사실은 자신이 되래 화를 내는 것으로 어젯밤의 일을 묻혀가려는 속셈이 더 컸지만.

정말! 기껏 말해 줬는데! 애초에 네가 어제 밤늦게까지 놀러 다닌다고 수련 스케줄을 모조리 씹어 먹은 게 잘못이잖아!”

주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욱 불안을 부채질한 것인지 프랜시스는 더욱 과장되게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내가 화를 낸 부분은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 부분이야 어느 정도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 시간에 일부러 날 찾아다닌 네게는 미안한 감정도 느껴.”

정말 답지 않게 눈을 착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주성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 , 잠깐?”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그녀가 적응하질 못하고 있었지만 주성은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네게 잡힌 건 순전히 너를 너무 믿은 내가 잘못이었으니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어.”

“........아니, 믿었다기보다는 단순히 네 음흉한 마음 때문이었잖아? 솔직히 그때 뭔가 좀 닿았지? 닿았잖아?”

프랜시스가 자신의 행동을 너무 포장하고 있는 주성에게 딴죽을 걸었지만 주성은 역시 그것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날 두고 서령과 어떤 거래를 하든 상관없어.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즐거웠던 것도 같으니까. ........하지만.”

프랜시스는 꼴깍, 침을 삼켰다.

어찌된 게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 이 남자, 엄청나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서 별 것 아닌 이야기에도 긴장하게 되어버렸다.

의외로 이 인간, 엄청나게 제대로 된 인간인 것 아냐? 이때까지의 모습은 모조리 연기였다거나 뭐 그런 건가?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잖아? 재산 문제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던가.

그렇게 온갖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며 역시 영화광이라고 할까, 프랜시스가 어쩌면 픽션 같은 상황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떨리는 가슴을 붙잡았는데-

날 이용해서 거래했으면서 한 장이 뭐야 한 장이!”

그 한마디에 올라갔던 고조감과 떨리던 마음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 무슨.......소리야?”

갑자기 터져 나온 한심한 한마디에 프랜시스는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주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하아? 못 알아들은 거야? 넌 바보냐? 영화를 보러 가는데 초청 권 한 장이라니 혼자 갈 속셈? 당연히 같이 가야지!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라던가 동료라던가 같은 동아리 선후배라던가! , 물론 여기 가까이에 있으며 그 초청 권을 얻을 수 있도록 분골쇄신하여 서령에게 굴려져도 굴복하지 않고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를 데려가도 좋지만! , 한 장밖에 없으니 결국 혼자 가야겠지만.”

그 이후에도 하지만 뭔가 방법을 찾아보면 한 장 정도는 더 얻을 수 있을지도. , 네가 도망간 날 잡아왔다는 건 어떨까? 그걸로 초청 권을 한 장 더 요구하는 거지- 라던가 쉴 세 없이 주절거리고 있는 주성을 황망히 바라보던 프랜시스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한 가지 결론이 내려졌다.

뭐라고 할까, 역시 안 되겠다, 이 녀석. 철저하게 글러먹었어.

그동안 그의 한심한 언동이나 행동을 참아와 주며 어울렸던 반동이었을까. 프랜시스는 조용히 벤치에서 일어서더니 오른 주먹을 치켜들었다.

어라? 뭐야, 프란. 뭔가 볼일이라도 있어?”

멍청하게 들리는 그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순간 이성이 모조리 날아가 버린 프랜시스는 차가운 한마디를 날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 주로 네 머릿속에.”

머릿속?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글러먹은 남자의 얼굴에 프랜시스의 주먹이 연달아 꽂혀 들어갔다.

 

4.

아무래도 프랜시스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갑작스런 폭력에 놀란 주성의 얼굴에 분노의 주먹을 쉴 세 없이 꽂아 넣던 그녀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입술이 살짝 터진 주성에게 차가운 눈길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야만스럽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도망쳤다기보다는 이런 한심한 녀석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에 대한 스스로의 한심스러움 때문인 것이겠지.

어쩌면 한동안 주성과는 대화도 하기 싫어졌을지도 몰랐다.

주성은 터진 입술이 따가운지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프랜시스를 기다리던 자세 그대로 벤치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아, 하늘은 맑은데 배는 고프고~ 그러고 보면 아침도 못 먹고 나왔던가.”

프랜시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은 점심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태양은 점점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고 조금 선선했던 기온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가볍게 뱃속에서 울리는 공복을 알리는 소리에 한숨을 내쉬면서 주성은 벤치 위에 누운 상태로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등을 옆으로 하여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주성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옷차림 때문일까.)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었다.

주성의 눈이 생각보다 좋았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녹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공원 한쪽에 흰색 일색의 무언가가 나타나면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찾아온 커플이나 역사탐방 같은 것을 위해 찾아온 학생 따위는 아니겠지.

애초에 흰색 일색의 옷이라니, 양반집에서 일하는 일꾼도 조금은 색이 있는 옷을 입었던 것 같다.

주성이 수련복으로 입고 있는 옷도 일단 흰색 계통이긴 했지만 손목부분과 발목부분의 옷자락이 펄럭거리지 않도록 남청색이나 검정색 끈 따위로 묶어놓고 있다.

게다가 너무 단조로운 기분도 들어서 볼멘소리를 내뱉는 서령을 시켜, 왼쪽 가슴 부위에 멋들어진 흑룡 자수를 넣기도 해서 따지고 보면 흰색 일색의 옷은 아니라는 소리다.

요즘 같은 세상에 흰색 일색의 옷이란 거의 없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노비도 (단순히 낡고 더러운 것이긴 하지만) 갈색이나 흑색 계열의 옷을 입는다.

그나마 흰색 일색으로 된 옷이 있다면 과학자나 의사들이 위에 걸치는 하얀 가운 정도뿐이겠지.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일부러 이런 공원에 오기는 할까? 그것도 흰색 가운을 걸치고.

혹시 매드 사이언티스트 코스프레라도 하는 거려나.”

그렇다면 왜 또 이런 공원에서 그런 꼴을 하는 것인지. 그런 코스프레를 할 것이라면 제 빈천군이나 체해군으로 가는 편이 어울렸을 것이다.

일부러 이런 제율시의 자연풍 공원에서 그런 옷차림을 하다니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여기는 실은 남자지만 여자처럼 생긴 고등학생이 무녀 옷을 입고 모조 칼을 휘두르고 있는 풍경이 보이는 신사 따위가 아니다. 것보다 여긴 일본도 아니니 신사가 있을 리가 없지. 절 정도라면 의외로 크고 작은 것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그 절에는 나이 드신 스님이나 계실 것이다.

코스프레도 아닌가. 그럼 뭐지?”

대체 뭐가 여기까지 찾아왔나. 주성이 그런 호기심에 계속 그 흰색 일색의 그림자에 시선을 주고 있는데-

주성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일까.

갑자기 주성이 앉아 있는 벤치에 시선을 주는 것 같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라?”

점차 가까워지는 흰색 그림자는 점점 형체가 알아볼 수 있게 되어갔다. 대략 수초 정도가 지나 주성이 드러누운 벤치 앞까지 도착한 그림자는 의외로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주성의 가슴께까지 오는 정도에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흑발이 발목 까지 닿을 정도였다. 매끄러운 도자기가 연상되는 피부는 황색 빛을 머금고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앞머리였다.

소녀는 가볍게 가슴께까지 오는 앞머리를 양쪽 귓가로 대충 넘겼을 뿐이었다. 그것도 정리라면 정리겠지만 저렇게 치렁치렁한데 머리핀 하나 꽂지 않았다니 이상했다.

그야 뒷머리라면 일부러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자르지 않는 사람도 있길 마련이다. 여자란 머리카락을 소중히 한다고 하니까. 괜히 실연한 여자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거나 하는 전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꼭 실연했다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성이 단발령이 내려지기 전의 남자였다면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이해가 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조금 특이한 배경을 가지긴 했어도 확실하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소중히 하는 마음 따위 이해할 수조차 없다.

어쨌든 그렇게 머리카락을 기르는 여자야 많다. 확실히 아기 때부터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길러왔다면 뭐, 개중에는 특별히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발목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통 앞머리까지 자르지 않던가?

아무리 머리카락이 소중하다지만 앞을 보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앞머리를 기르지는 않는다.

주성은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이어 눈에 들어온 어떤 사실에 그쪽으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 이 여자애! 입은 옷이 하얀 가운 하나 뿐이야!?’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하의실종패션이나 짧은 민소매 셔츠 따위라고 생각했지만 잘 보니 허벅지 안쪽에 유난히 짧은 반바지 따윈 없었고 상체에도 미미하게 느껴지는 가슴이 얼핏얼핏 보이고 있었다.

, 속옷도!? 그럴 리가!? 요즘 중학생들은 이렇게 대담할 정도로 노출을 즐기는 건가!?’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저런 복장은 이상했다.

주성도 어느 정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그녀의 자극적인 복장에 시선이 팔려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뿐.

주성은 소녀의 몇몇 부위를 뚫어지도록 쳐다보다가 이내 소녀의 시선도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 크흠! , 어라? , 왜 그러지? 참고로 난 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았는데?”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봤다고 광고하고 있다.

주성이 다급하게 벤치에서 일어나 제대로 앉자 그녀는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더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주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주성은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 어쨌든, 넌 뭐야? 무슨 일인데? 난 나쁜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음흉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은 있는 것인지, 주성은 딱딱해진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지만,

지이..........”

하얀 가운의 소녀는 계속해서 반달눈을 한 체 입으로 소리까지 내가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지이........”

“.......어이?”

지이.......”

“.......저기?”

지이.......”

아 진짜! 그래! 봤다! 음흉한 시선으로 봤다고! 그래! 말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뭐든 들어드릴 테니 경찰아저씨만은 소환하지 말아주세요!!”

계속 입으로 소리 내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에 주성도 평소의 두꺼운 철면피를 내세우지 못하고 두 손 들고 말았다.

항복의 제스처로 양손을 어깨 위로 드는 주성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는, 그제야 딱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

?”

첫 마디가 라니? 주성은 거기서 이어질 요구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여부터 시작하는 단어는 의외로 많아. 설마 여왕님.......은 아니겠지. 여객선, 여과기 등등. 하지만 얘는 여자애니까 아마 보석이나 비싼 브랜드 제품을 요구하지 않을까?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핸드백이나 화장품 종류? 그 중에서 여로 시작되는 브랜드가 있었던가?’

스스로가 입는 옷도 대충대충 마음 가는대로 고르는 주성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브랜드 화장품이나 핸드백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끔 프랜시스가 자랑하고는 했던 이런 저런 물건들을 뒤져가며 고민하고 있는데 그제야 겨우 소녀가 제대로 입을 열었다.

여긴.......”

여긴? 여긴 이라니 뭐야? 여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브랜드 제품이 있었어!? 설마 외국제품? 어미로 따져봐서 어디 나라거지? 아니, 그보다 여긴이라니 글자로는 어떻게 쓰는 거야!?’

주성이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소녀의 말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참이었다. 소녀는 눈알을 데구루루 굴려 주성과 그 주변, 간단히 말해서 제 5도시의 공원을 둘러보더니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어디?”

? 어디.......라니? 그런 이름도 있던가? 뭐야 그거. 브랜드 제품?”

주성이 멍청한 얼굴로 묻자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여긴, 어디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어서 물었다.

그거냐!!”

주성은 과장되게 소리치며 온 몸으로 태클을 걸며 외쳤다.

정말, 말을 하려면 제대로 끝까지 하라고.”

괜한 고민을 했군. 하기야 고작 중학생 정도 되는 여자애가 그런 것(?)을 구실로 돈이나 명품 백을 뜯어낼 리가 없지 않은가. 주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겨우 진정된 얼굴로 소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여긴 어디야 라니? 혹시 길을 잃은 건가?”

주성은 소녀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간단히 근처에 위치한 경찰서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공원은 밤엔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작은 경찰서가 위치하기 마련이니까.

이 공원 근처에도 있어서 주성이 앉아있는 벤치에서 3분 정도만 걸으면 몇몇 경찰들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는 작은 경찰서가 나온다.

함께 가서 안내해 주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옷차림의 여자애와 함께 갔다가 오해라도 받으면 유치장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

당연하지만 유치장에 갇히게 되면 신원보증을 위해서 아는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성의 교육담당이자 고용인인 서령이 불려올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수련 도중 도망쳐서 붙잡히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중학생인 여자애에게 성추행하다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는 상태로 만나게 되면 카오스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암.’

주성이 속으로 절대 길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관련되지 말자- 고 다짐하는데 조금 뒤늦게 소녀의 입이 열렸다.

.......? 아니.”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아냐.” 미미하게 고개를 저은 소녀는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술을 달싹여 들릴라말락 작은 음량으로 말했다.

기억이 안나. 여긴 어디야? 난 누구고? 혹시....... 너 나 알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다짜고짜 기억상실소녀등장이라니. 주성은 픽션으로도 옛날 옛적에 막장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 자신에게 닥치자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5.

 

결국, 주성은 자신이 들어 누워 있던 벤치에 소녀를 앉히고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물어보게 되었다.

결과를 말해보자면, 소녀 왈. 어제 밤 이전부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은 어째서인지 조선 전기로 밖에 안 보이는 거리에 던져져 있었다고.

혹시 자신이 과거로 시간 이동이라도 한 것이 아닌지 불안했다고 한다.

우선은 하나밖에 없는 옷가지(하얀 가운)를 둘둘 감고 근처 벤치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배가 고파져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주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혹시 자신을 아는 사람인지 몰라 다가와 누군지 떠올려보려 계속 노려봤다고 한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이름은?”

이름은....... 어렴풋이 밖에 기억나지 않아. ...... 뭐였던 것 같은데.”

하아? ? 너 외국인이야? 엘로 시작하는 이름이면 엘리나 엘렌?”

주성은 척 보기에도 동양인으로 보이는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까지 샅샅이 훑으며 물었다. 대충 보기에도 혼혈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흑발의 소녀는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지 애매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정말 기억상실이 맞는 듯 했다.

어찌된 것이 겉모습은 동양인인 주제에 이름은 엘로 시작한다고 하니, 어쩌면 엘로 시작하는 건 이름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고 주성은 생각했다.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던 주성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안 되겠다. 전혀 방법이 없어. 적당히 하고 집에 돌아갈까.”

단순히 길 잃은 어린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리도 무거운 일이라니. 아니, 확실히 길을 잃긴 했다. 길과 함께 이름이나 기억 등등도 같이 잃어버려서 문제지.

집에 가면 서령이 있겠지만....... 몸이 좀 고생하는 게 훨씬 났겠지.”

이 일은 자신의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 주성은 적당히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신원 불명인 흑발의 소녀를 돌아봤다.

으음, .......로 시작한다고 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나? , 상관없겠지. 적당히 불러서 신원 불명의 소녀! 나는 널 도와줄 수 없겠구나. 그냥 이 근처에 있는 경찰에게 가서 신원조회 같은 걸 해달라고 해봐. 어쩌면 널 아는 사람이 네가 없어져서 신고라도 했을지 모르잖아?”

, 이 정도로 설명해 줬으면 적당히 됐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가볍게 속으로 만족한 뒤 주성은 소녀와 함께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난 가볼게. 이래 뵈도 할 일이 꽤 많거든. , 대부분이 강제로 주어진 일 뿐이지만.”

하하핫!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하고 적당히 웃어넘기듯 한 손을 들고 자리를 뜰려던 주성이었지만,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 , 경찰서로 가는 거?”

그래. 경찰서로 가서 부탁해봐야겠어. 언제까지고 이런 옷차림으로 있을 수도 없으니까.”

아아, 좋아 좋아. 분명 널 아는 사람이 이미 실종 신고를 끝내뒀을걸?”

. 흰색에 용 모양 자수가 새겨진 도복에 쓸데없이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흰색 가운만 입게 만든 뒤에 내버려두고 갔다고 해야지.”

“........?”

소녀의 말에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자자자 잠깐! 잠깐 기다려봐! 지금 뭐라고!? 경찰서로 달려가서, 누구한테 무슨 짓을 당해?”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겠지. 주성은 딱딱한 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다시 한 번 확인 차 질문했다.

. 그러니까, 흰색에 용 모양 자수가 새겨진 도복에 쓸데없이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한 남자가-”

오케이! 거기까지! 잘 알겠어! 잠시 다시 벤치에 앉아봐. 일단 이 나와 이야기부터 제대로 해 보자고. 어째 너랑 나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는데, 잘 풀릴 거야. . 그렇고말고.”

역시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이 여자, 어쩌면 경찰에게 허위 신고를 해서 자신을 궁지에 몰지도 모를 인간이었다.

이대로 보내면 위험하다. 일단 지금도 서령이라던가, 서령이라던가, 자칭 하인인 악랄한 여자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바람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이상 위험을 끌고 올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오해라고는 하지만 잠시라도 유치장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집에 돌아가는 순간 서령이 만들어낸 지옥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주성은 창백해진 얼굴로 알몸+백의 소녀의 손목을 잡더니 약간 강압적이게 벤치에 끌어 앉혔다.

좋아. 우선 이야기를 하자. 아무래도 네가 나한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오해?”

어째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원 불명의 소녀에게 주성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해! 우선 말해두겠는데, 난 널 버리는 게 아냐! 알겠냐? 넌 굳이 비유하자면 길 잃은 아기고양이고, 배가 고파하고 있었어. 난 그걸 우연히 발견하고 급식으로 나왔던 빵을 조금 뜯어서 나눠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근데 넌 그런 나를 따라오려고 했고, 결국 난 내 사정 때문에 널 두고 갈 수 밖에 없는 거지. 하지만 별 수 없이 널 두고 가는 날 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가 널 버리고 간 줄 안다는 거야!”

알아들었냐! 하고 조금 빙 둘러가는 동시에 조금 엇나간 설명을 속사포처럼 쏟아낸 주성은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여.”하고 말했지만,

하지만, 넌 나한테 급식으로 나온 빵은커녕 비스킷 조각 하나 던져주지 않았는데?”

소녀의 그 한마디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난 지금 배가 고파.”

“........”

말하자면 네가 설명한 그 길 잃은 아기고양이랑 같다는 거야.”

“........”

그러니까, 네 설명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그 말대로 배고픈 나에게 빵이라도 사와서 나눠 줘야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 하고 동의를 구하듯 주성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주성은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기, 혹시 너 기억 잃지 않은 것 아냐?”

? 무슨 말이야?”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의 행동에 주성은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기억이 있든 없든 이 여자애는 자신이 먹을 것을 사다주기 전엔 절대 물러서지 않을 셈으로 보였다.

제길, 별 수 없군.”

, 방법이 없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주성은 소녀의 설명대로 쓸데없이 푸석푸석한 머리를 긁적이며 읏차! 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좋아. 네 말대로 내 특별히 밥을 사가지고 오마.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돈이 없어. 그러니 잠깐 집에 다녀올 테니까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냐?”

절대로 돌아올 테니까. 하고 다짐하듯 말한 주성은 귀찮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서령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다녀오는 수밖에 없겠지. 아마 서령은 자신이 몰래 빠져나갔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 집 곳곳에 자잘한 함정을 설치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 함정들을 일일이 해제하며 들어갔다 나오는 건 무척 고된 일일 것이다. 주성은 그것을 생각하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런 주성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인지, 못미더웠던 것인지. 소녀는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어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서로 달려가서 흰색에 용 모양 자수가 새겨진 도복을 입고 쓸데없이 푸석 푸석한 머리를 가진 바보 같은 얼굴의 남자가 이런 옷차림으로 만든 뒤에 벤치에 앉아서 수치플레이를 하면서 기다리라고 말하곤 가버렸다고 할거니까.”

어째 이것저것 더 붙은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한 시간 내론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주성은 귀찮다는 기색을 연실 들어내며 공원 밖으로 나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꼭 와야, .”

그런 주성의 뒤에서 이름도 확실치 않은 하얀 가운의 소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계속, 기다릴 테니까.”

그녀의 얼굴엔 불안감과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6.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성은 돌아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그 신원이 애매한 소녀가 경찰서에 허위신고를 하든 안 하든, 결국 자신이 맞이하게 되는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고 주성은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그 여자애가 신고해주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유치장에 갇혔다면 빠져나오는 수속을 밟느라 서령이 준비한 을 어느 정도 늦게 받았을 테니까.

주성이 서령이 준비한 악랄한 이자 수련메뉴인 스케줄을 모조리 끝마치고 나자, 그 자칭 기억상실증의 소녀에게 다짐받은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훨씬 넘게 지나있었다.

이러니 당연히 못가지. 집에 들어오며 서령에게 들킨 순간부터 주성은 당분간 그쪽 공원에는 가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침에 끝낸 2시간의 수련을 제외하고 남은 12시간 수련 중 7시간 분량 정도를 끝낸 주성은 어느 작은 방에서 쓰러져 버렸다.

어떻게든 두 다리를 움직이고 싶지만, 무슨 진동기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덜덜 떨리는 것이, 정말 제대로 심하게 쥐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 몸을 움직이는 건 그렇다 치자고. 움직임이나 몸은 확실히 단련이 되니까. 하지만 마지막 이건 또 뭐야? 아무것도 없는 방에 앉아서 촛불만을 바라보며 무릎 꿇고 앉아 좌선? 게다가 귀에는 불경을 틀어주질 않나. 게다가 그 불경도 구세대 라디오로 들려주는 음질 나쁜 녀석이라니.”

궁시렁궁시렁 불평을 쏟아내고 있자니 어느 샌가 방에 들어와 있던 서령이 한쪽에 놓아둔 구세대 라디오의 카세트테이프를 멈추었다.

이 좌선은 정신통일에 가깝습니다. 가급적 마음을 차분히 하고 정신력을 기르는 것이지요. 옛날 군대에서 했다는 스파르타식 정신통일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속도가 빠른 대신 독기가 심하게 늘어서 영 써먹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독기만이 남은 정신력은 여차할 때 자포자기식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아. 그럼 이 불경을 들려주는데 사용한 구세대 라디오는?”

주성이 쥐가 나는 다리를 계속 부여잡은 채 짜증내듯 말하자 서령이 그의 오른쪽다리를 가볍게 주물러주며 설명했다.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은 이제 이것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카세트테이프에는 특수한 조작이 가해져있는 듯이 보여서. 음원파일로 바꿔보았지만 이 테이프 속의 불경에 있는 기묘한 청량감은 어떻게 해도 담아내지 못했더군요.”

주성은 서령의 손길에 생각보다 빠르게 다리가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짜증으로 가득했던 얼굴을 풀었다.

기묘한 청량감이라니?”

그런 게 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한 채 서령은 반대쪽다리도 주무르기 시작했다.

청량감, 이라고 할까. 조금 비현실적인 기분도 들지만요.”

비현실적인 기분?”

역시 순식간에 편해지는 다리에 웃는 낯으로 물은 주성에게 서령은 담담히 답했고,

(). 그러니까, 이 카세트테이프의 불경은 자연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을 도와준다고 하더군요.”

그 내용에, 주성은 입을 다문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

().

21세기의 중반을 달려 나가고 있는 현재엔 그리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침술이나 한의학에서 기라는 것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그 때문에 또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연구가 전부 제대로 진행되었느냐고 한다면 영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지.

온몸에 위치한 혈도라는 것이나 기가 흐르는 길이 있다는 것 까지는 밝혀냈지만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의학의 기라는 것은 의료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럼, 이제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분명 아침과 점심은 드시지 못하셨지요?”

서령은 주성의 다리가 멀쩡해 진 것이 확인되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쓰러진 자세 그대로 굳어있던 주성을 부축하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오늘은 고생하셨습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기 수련에 들어가겠으니 이 이후엔 푹 쉬시길 바랍니다. 제가 차려둔 저녁을 드시고 계시면 목욕 준비는 끝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라며 서령은 주성을 상을 차려둔 장소로 안내했다.

주성은 서령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지금 그것을 물었다간 이때까지의 관계마저 모조리 무너져버릴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서령이 상을 차려둔 장소는 널따란 대청마루였다.

하긴, 그야 여름도 다가오는 시기이기도하니 이렇게 밖에서 먹는 것도 좋겠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주성은 흔히 상이 휘어질 정도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반찬이 올라가 있는 밥상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저기, 난 이거 전부 못 먹는데.”

주성이 얼굴을 굳히자 서령은 가볍게 웃었다.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남기시면 됩니다.”

이거, 서령이 갑자기 왜 이러지? 혹시 죽을 때가 됐나? 상 앞에 앉은 주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서령이 다 안다는 어투로 말했다.

오늘로 몸 만드는 과정은 끝이 나셨으니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기 수련에 들어갑니다. 이 친절함과 저녁식사는 그 기념인 것뿐이니 너무 좋아하진 마십시오. 내일부터는 평소의 저로 돌아갈 테니 말입니다.”

피식 웃는 그녀가 제대로 적응되지를 않아서 주성은 꺼림직 하다는 얼굴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으려했다.

 

그런데, 밥을 한 수저 뜨자 공원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생각난 이유는 어째서인지.

설마 정말 경찰서에 달려가서 허위신고를 한 건 아니겠지만, 정말 기억상실이든 아니든 어디 갈 곳도 없는 것 같았는데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밤의 공원이라니, 아무리 경찰서가 가까이에 있다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직 기다리고 있으려나.”

?”

, 아냐. . 밥이 잘 지어졌네. 반찬도 맛있어 보여.”

. 평소보다 좀 손이 많이 갔지만 말이죠.”

, 그래? 고생했네.”

잠시 이 근처에서 성범죄 발생률이 어느 정도였는지 고민하던 주성은 대충 얼버무리며 밥을 입에 씹어 넘겼다. 그리고 반찬으로 나온 제육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역시 안 되겠어.”

곧장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령, 난 잠시 가야할 곳이 있어.”

“.......이미 시간은 8시를 넘기고 있습니다. 뭔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만?”

안주인님께서 정하신 통금시간도 6시였고, 밥을 먹다 도중 일어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하고 담담히 말한 서령이었지만, 평소와 다른 주성의 진지한 얼굴을 보더니 , 잠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저녁은 돌아오시면 다시 데워드리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필요한 거라.”

주성은 잠시 식탁을 둘러보다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 적당히 밥 한 그릇 더 식탁에 놓아줘.”

, 그리고 빵 있어? 하고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주성에게 서령은 , 적당히 만들어두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7.

 

제율시의 밤은 상당히 음침하다.

그야 조선 전기 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제현 하느라 이런 저런 공공기물이 많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대의 마을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밤의 놀이 시설이 현대 타 도시보다 부족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한창 놀 나이의 학생들도 금방 귀가하거나 현대풍으로 꾸며져 있는 빈천군, 혹은 조금 뒤떨어지지만 그나마 다른 도시보다는 놀이시설이 많은 제 체해군에서 놀다 돌아오는 형편이었다.

학업에 열중하는 이들도 대부분 집으로 과외선생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밖을 돌아다녀야하는 이유가 없는 이상 대부분 집에 틀어박히게 되고 그 때문에 밤의 거리는 인적이 드물다.

여기, 이렇게 사람이 없었나?”

길 가다 칼이라도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원 입구에서 주성은 난처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낮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사람이 있더니 지금은 그 흔한 노숙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긴, 노숙을 한다면 지하철역이 최고겠지만.”

물론 교황도는 여러 섬들을 이어서 이루어진 섬의 군집 이었기 때문에 지하철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모노레일 따위는 있는 모양이지만 주성은 별로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 이런 꼴을 보아하니 그 녀석도 다른 장소로 이동했을지 모르겠군.”

괜히 뛰어 왔잖아. 작게 중얼거리며 거의 뜀박질에 가깝던 걸음 거리도 늦춰 설렁설렁 걷기 시작한 주성은 마침내 자신과 그 소녀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벤치에 도착했다.

“.......역시 없네.”

하긴, 벌써 8시간은 지났으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에 허탈감을 느낀 주성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서령에게 준비해달라고 부탁한 밥은 어떡한다. 그냥 같이 먹자고 해야 하나.”

아니, 그녀석이랑 같이 마주보고 단 둘이 식사라니, 무슨 고문인지. 주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려 했는데,

멍청이! 제대로 찾아보란 말이야!”

크허허억!?”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성의 몸이 저 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갑자기 등장한 습격 자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낙법을 시전하며 고개를 든 주성은 기괴한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빠가 일할 때 입는 옷을 빌려 입은....... 어린애?”

어린애라고 하지 마!!”

기겁하며 소리친 습격 자의 정체는 8시간 전쯤에 주성을 협박했던 신원 불명의 소녀였다.

그녀는 어째 복장이 바뀌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주성이 무심코 내뱉은 것처럼 몸에 맞지도 않은 커다란 옷을 입고 발에는 구두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어라.......? 경찰복? 뭐야. 네가 왜 그런 걸입고 있는 거야?”

나도 몰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렸지만 당신이 오질 않으니까 약속대로 경찰서로 달려갔는데! 안에서 뭔가 하고 있던 경찰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저기, 이런 곳에서 그런 차림은 곤란하단다. 그래. 이 옷을 빌려주마. 나중에 다시 돌려주러 오렴.’ 같은 말을 하면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단 말이야!”

아마 그 경찰은 널 뭔가 다른 것과 착각한 것일 거야....... 주로 어려운 이웃이라던가.

이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구나. 아직 세상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군.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주성이 가까운 벤치에 앉으며 생각했다.

그래서, 넌 그 뒤로 계속 여기서 기다렸다고?”

뭐야 이 민폐녀는. 하고 질린 얼굴을 한 주성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두 시간이나 돌아오지 않으면 보통 도망친 걸로 생각하지 않아? , 너도 그렇게 생각해서 경찰서로 달려갔다고 했던가. , 예상대로 풀리질 않아서 안 됐군.”

나야 이럴 줄 알았지만. 하고 앞으로 이 앞은 어떻게 돌아다녀야 할지 고민했던 주성은 사실과는 반대로 허세를 떨어대며 탐색하는 눈으로 소녀를 흘겨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성은 이 여자애가 정말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늦은 시간, 여자애 혼자 공원에서 노숙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조금 걱정되어 나온 것이지만, 설마 기억상실이라니. 그런 막장 드라마에서도 보기 드문 설정이 현실에서 펼쳐질 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타국에서 도망친 공주님이 사정이 있어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설정이 훨씬 알기 쉬운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다. 기억상실 따윈 치료하는 방법이 무척 까다롭다고.

게다가 아는 지인도 없다고 하니 더욱 까다롭겠지. 병실에서 깨어나며 어라? 제가 누구죠?’ ‘, 이쪽이 보호자입니다.’ 라는 방향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어라? 제가 누구죠?’ ‘아니, 나도 모르는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시작부터 하드모드라니 아무리 게임이 아니라지만 친절하지 않은 것도 정도가 있다.

아마 이 소녀는 거짓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녀석을 집에 데려갈 수는 없다. 이대로 추궁해서 사실을 밝혀내고, 약속대로 밥을 준 뒤 약간 도와주고 헤어지면 족하다.

자아, 어서 말해. 네가 숨기고 있던 것을 밝히라고! 그에 대한 대가는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호화로운 식사다! 라는 등 조금 범인을 추궁하는 탐정이나 취조중인 검사 같은 기분에 휩싸이면서 주성이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무서, 무서웠다고.”

소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은 한참 넘어가 있지, 혹시 사정이 있나 해서 한 시간 더 기다려봤지만 오지는 않지. 그거 알아? 2시간 전 쯤엔 웬 술에 취한 아저씨가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어.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사방에 사람은 줄어만 가고. 어딜 어떻게 가야할지도 몰라서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확실히, 기억상실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옷차림으로 어두운 공원 한복판에 던져졌다면 보통 이런 반응 나오겠지.

어딜 어떻게 가야할지 알 수조차 없다. 돌아갈 장소가 없다. 게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조금 기괴하기는 하지만 이곳도 섬은 섬이다. 거기다 각각의 섬은 각각 다른 시대를 모방하고 있다. 이런 기괴한 장소에 아무것도 모른 채 떨어지면 뭔가 대책을 세우려고 해도 반응이 늦고 만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이 한 말이었지만 그것에라도 매달려보려 했던 것일까.

오히려 못미더워 보이는 주성의 모습에서 안심하고, 꾸밈없는 태도에 안도했다.

그래서 믿고 기다렸지만 오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계속 기다렸다.

, 결국 그녀가 말하는 약속이라는 것도 반쯤 협박으로 했던 것이지만.

으음, , 그랬냐? 미안하다.”

주성은 눈앞에서 여자애가 울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멋쩍어하면서 괜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주성의 주변에 있는 여자는 어째 대부분이 억새다 보니 주성이 잘못했거나 실수한 일이 있다면 화를 내며 정의의 철퇴를 가하지 이런 식으로 울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어서 익숙하질 못했다.

, 우선 조금 늦었지만 우리 집에 올래? , 따뜻.......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는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하하핫! 빵보다는 났지? 라는 둥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허둥지둥 팔을 휘두르며 과장된 몸짓을 선보이는 주성은 조금 얼빠지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또 조금이나마 통했던 것인지.

, 바보 같아.” 라고 하면서도, 소녀는 웃었다.

여전히 신원 불명인 소녀가 조금씩 눈물을 그친 듯 보이자 주성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마찬가지로 웃어보였다.

일단 돌아오기도 했으니 데려가긴 해야겠지?’

결국, 이 이름도 출신지도 모르는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 주성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는데,

으음, 집에 데려가는 건 좋은데, 이걸 어쩐다? 서령에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적당히 얼버무리며 신원불명의 여자애를 들일 수 있을 정도로 주성이 살고 있는 집의 게이트키퍼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잘은 몰라도 서령이라면 이것저것 물으며 따지고 들것이 분명하다. 잘못되면 해외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께 이런 저런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서령이 그 정도로 입이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넘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점점 복잡해지는 머리에 두통이 일자 생각하기를 포기한 주성은 이제는 커다란 경찰복이라는, 노출은 줄어들었지만 더욱 괴이쩍게 보이는 복장을 한 흑발에 신원불명인 소녀를 돌아봤다.

우리 집은 여기서 20분 정도만 걸으면 나오는 쓸데없이 넓은 가옥이야. 방은 남아도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지낼 수 있어.”

“.......그 말은?”

설마, 하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주성은 피식 웃으며,

, 하루나 이틀 정도는 머물러도 좋다는 거야.”

가끔씩은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도 좋겠지. 하고 어울리지 않게 말했다.

그래.

이렇게 기분 좋게 웃으며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친절을 베푼다.

주성이 평소와 다르게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을 것이다. 본래 주성의 성격이었다면 그냥 귀찮아하며 무시할 것이다. 그저 그가 여기까지 나온 이유는 그야말로 변덕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훈훈하게 웃으며 함께 집으로 데려가 밥이나 먹여주고 하루나 이틀, 재워주는 것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은 틀려먹지가 않는다고 해야 하려나.

아쉽게도,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주성이 벤치에서 일어나 소녀를 돌아본 참이었다.

마치 신사와도 같이, 소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 자리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소녀가 힘차게 웃으며 그 손을 잡기 위해 마찬가지로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주성의 손에 닿지 못했다.

 

굉음이 울리며 날아온 근원을 알 수 없는 충격.

발생지마저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일격이, 소녀가 앉아있던 벤치에 직격했기 때문이다.

 

........?”

주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이자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절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설치된 벤치마저 사라져 있었다.

단지, 순간적으로 보인 것은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과,

거대한 충격에 얻어맞은 벤치가, 강한 힘에 우겨진 모습으로 날아가는 장면 뿐.

,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겨우 공황상태에서 돌아온 주성이 벤치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어둠 저편을 바라본다.

하지만 전등 같은 것이 얼마 설치되지 않은 이 공원에선 주성의 자리에선 소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만 그 방향으로 흩뿌려지듯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조금씩 주성의 방향으로 조르륵 흘러오는 것도 있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붉은 액체.

눈 씻고 봐도 피로만 보이는 그것은 조금씩 다가와 마지막에는 주성의 신발에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신발의 바닥에 피가 묻고 나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한 주성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었.......?”

방금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럴 리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웃기지 마.” 라고 주성은 내뱉듯이 외쳤다.

장난, 치냐! 사람이 답지 않게 친절을 베풀겠다는데!”

이를 갈면서도, 벤치가 날아간 자리까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진 못하면서 주성은 어둠 저편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를 낸다.

그럴, 리가....... ,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있을 수 없어. 라고 주성이 속삭이듯 말하는데,

그와 맞추듯,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을 수 없어, . 뭐야 이건? 이 녀석은 뭐지?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걸 찾아냈다기에 가볍게 인사 차 벤치 통째로 날려버린 건데 말이야.”

그리고,

한없이 깊은 악의를 지니고, 모럴(도덕성) 따윈 갔다 버린 존재가 주성의 앞에 나타났다.

 

8.

 

그것은 기묘한 복장을 한 여자였다.

머리카락은 칠흑과 같은 흑색을 가볍게 올려 묶고 붉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는 여자.

무당들이나 입는 붉은색 철릭을 개조해 팔과 배의 노출을 늘린 옷을 걸친 그 여자는 옛 풍경을 모델로 꾸며진 이 마을에서도 조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철릭이란 복장을 개조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나았을지 모른다.

물론 무당이란 존재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이질적이었던 모양이니 개조 여부는 크게 상관없을 지도 모르지만.

다만 여자는 그런 몇 가지 요소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붉은색을 기조로 한 철릭을 개조해 입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붉게 빛나는 눈동자도 제외하고,

악의가 넘쳐나는 음산한 미소도 제외하고,

그 등에 멘 거대한 방천극을 제외하고도.

주성은 깨달았다.

저 여자는, 뭔가 맞지 않는다.

....... 대체 뭐야.”

주성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지는 갈 곳 없는 악의에 온몸의 털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관자놀이 부근에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진다.

잘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감각이 등줄기를 내달리고 있다.

그야말로 맹수와 대면하면 이런 기분일까.

여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기분 나쁜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 뭐라고 할까, . 그렇네. 말하자면 액션 전문의 사극 배우라고나 할까? 들어봤어? 세간에선 액션배우 채향이라고 하면 꽤나 유명해. 얼굴도 되고 몸매도 되고, 거기다 대역 안 쓰기로도 유명하니까. , 참고로 다음에 있을 역을 연습하러 온 거야. 여긴 밤에 사람이 없어서 연습하기 편하거든. 봐봐, 이런 기다란 막대를 휙휙 휘둘러대면 사람들이 불편해 할 테니까.”

스스로를 채향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에 방천극을 들고서 말했지만,

거짓말.”

몸이 위험을 감지해 열이 올라있던 머리가 차갑게 식은 주성에겐 통하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사람을 죽일 마음 가득인 주제에 배우라니 믿을 수 없다. 그것도 저렇게 개조한 복장으로 그런 말을 하니 개그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 제대로 말해. ........뭐하는 녀석이냐.”

주성은 굳은 얼굴로 씹어 삼키는 목소리를 내더니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살기가 폴폴 풍겨오는데 어디서 개소리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리친 주성은 이내 참은 숨을 토해내듯 헐떡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살기가 온몸을 옭아매고 있는 느낌.

상대에게서 눈을 때면 죽는다고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헤에. 날 몰라?”

채향은 의외라는 얼굴을 하더니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 상관없겠지. 내가 진짜로액션 전문 배우라고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넌 절대 믿지 않을 것 같고, 여기에 연기 연습하러 왔다는 말은. , 확실히 거짓말이니까.”

빼들었던 방천극을 가볍게 들더니 그대로 땅에 박아버리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 입가의 미소는 이전에 지었던 생글거리는 미소와는 달랐다.

정말, 장난감을 발견해서 즐겁다는 미소였다.

주성은 채향의 말도 안 되는 괴력에 놀라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 하지만 말인데, 내가 너에게 내가 누군지 설명하면, 넌 그걸 알아들을 수나 있어? 내가 소속된 단체나, 회사 같은 걸 네가 이해할 수나 있나?”

채향은 탁, 하고 발 옆을 굴러다니던 작은 돌을 차올렸다.

그렇네. . 그럼 네가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법한 걸 가르쳐 줄까.”

, 웃은 그녀가 통통. 하고 두어번 가볍게 뛰었을 때, 주성은 다급히 몸을 한쪽으로 날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 자신의 눈가를 지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여자가 온몸을 회전시켜 축구선수가 골대로 공을 날리듯 뻥! 하고 차버렸기 때문이다.

, !”

채향의 입에서 즐거운 듯한 한 마디가 들리고 발에 맞은 돌은 산산이 부서져 떨어졌다. 하지만 주성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무슨 바보 같은!?”

주성이 주춤 몸을 움직인 동시에 묵직한 공기가 주성의 귓가를 때린 것이다.

돌을 걷어찬 충격이 돌이 부서져도 사라지지 않고 날아오다니, 주성은 그 사실을 깨닫고 온몸에서 울리는 위험 경보가 더욱 세차지는 것을 느꼈다.

,. 네가 그, 벤치를.......? 그럴, 리가.”

주성이 떨리는 입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 소녀가 앉아있던 벤치를 날려버린 것은 이 여자란 말일까.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주성을 한 번 흘겨보고, 채향은 돌을 차기 위해 움직인 다리를 바닥에 디뎠다.

, 대충 이런 건데.”

주성이 놀라든 말든 고개를 모로 꼰 채향은 생긋 웃으며, 수학공식이라도 가르쳐주는 선생님과 같이 담담히 말한다.

, 알아듣긴 했을까? 믿을 수 있겠어?”

그리고 한 발자국, 주성의 앞으로 다가오며,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갈 곳 없이 뿜어지기만 하던 살기의 일부를, 모조리 주성에게 돌린다.

죽겠지?”

크윽!?”

겨우 안정됐던 주성의 숨이 다시 한 번 가빠졌다. 온몸이 떨리고, 등에는 식은땀조차 나지 않았다. 안색이 나빠지며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질 뻔한 주성이었지만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간신히 기절만 하지 않았지, 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주성을 흥미롭게 보던 채향은 다시금 생긋 웃으며 주성에게 향하던 살기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 지금은 널 상대할 시간은 없으니까 봐주도록 할까. 난 회수해야 하는 것이 있거든.”

“......허억.허억. , 뭐라고?”

겨우 살기가 사라지자 숨을 뱉을 수 있게 된 주성은 가까스로 그렇게 물었다.

회수........? 뭘 회수하겠다는 거야?”

이 여자는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주성은 삐걱거리는 머리로 생각하며 물었다.

여자는 주성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성을 지나쳐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흑발의 소녀가 앉아있던 벤치가 날아간 자리로.

주성은 그것을 보고 여자가 말하는 회수라는 것이 무엇인지 겨우 알아챘다.

어라? 으깨졌을 줄 알았는데 아직 멀쩡하잖아? ‘회수대상’.”

이 여자는, 그 흑발의 여자애를 데려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소리다.

저벅, 저벅,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어둠속에서 겨우 빛이 드는 장소까지 나왔다.

가볍게 질질 끌리는 소리는 아마 소녀의 머리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이겠지. 여자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붓 삼아, 먹물대신 피를 이용해 글자라도 쓰듯 움직였다.

, 확실히 위에서도 죽이지는 말라고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멀쩡하면 조금 쇼크인데?”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한손으로 소녀의 다리를 잡은 여자는 툭, 물건이라도 다루듯 주성의 앞에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소녀를 집어던졌다.

주성은 자신의 발치로 굴러온 소녀를 보고,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렇네. 너 얘랑 아는 사이였던가?”

채향은 그런 주성을 내려다보며, 선심 쓰듯이 말한다.

인사라도 하는 건 어때? 이제 다시는 못 만날 텐데.”

깔보는 목소리. 그리고 바보 취급하는 목소리로 채향은 웃었다.

주성이 그런 그녀에게 반응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소녀만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주성을 비웃던 것을 멈추었다.

재미없네.”

대신,

꼬마가 질린 장난감을 부서 버리듯,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녀의 머리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지만.

돌도 부숴버리는 그녀의 발길질이 소녀의 머리에 작렬했다.

 

 

그리고.

 

 

콰득, 꽈득, 빠그작.

 

뼈가 분질러지는 듯한 소리가 어두운 공원에 울려 퍼진다.

“.......,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지?”

채향은 소녀의 머리 바로 옆에서 억지로 멈춰 세워진 자신의 발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소녀의 머리를 으깨버렸어야 하는 자신의 발.

그것이 주성의 손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

주성은 채향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도 벙긋하지 않은 주성은 천천히 무릎 꿇고 있던 자세를 바꿨다. 이제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단지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이더니 채향의 발을 놓지도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성이 몸을 일으키니 채향의 다리는 당연하게도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철릭이 아닌 다른 짧은 치마나 미니스커트였다면 강제로 안쪽 속옷이 보이게 될 정도의 높이였다.

“.......여자의 다리를 억지로 벌리다니, 매너가 없는데?”

“.......”

주성은 그 말에 상체 정도까지만 들었던 팔을 머리 위까지 올렸다.

그러자 아무리 긴 치마라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노출이 많은 여자라 해도 수치심을 줄 수 있을 정도까지 다리가 벌어졌다.

“.......이거, 내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너한테 눕혀졌을지도 모르겠는데?”

채향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다리를 빼려고 했다.

이 전까지는 장난 정도라 생각하고 봐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이상 간다면 아무리 그녀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주성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려찍기를 하는 요령으로 들려진 다리를 내린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주성의 두개골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윽? , 다리가, 안 움직여?”

아무리 힘을 줘 봐도 그녀의 다리는 올라간 상태로 더 이상 내려오질 않았다.

혹시 이 남자가 의외로 힘이 센 것인가 생각해봤지만 발목에선 커다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 게 된 거지?’

채향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패닉에 빠지자, 겨우 그제야 주성이 움직였다.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뒤 채향의 몸에 더욱 밀착한다. 그리고 채향이 넘어지지 않도록 등 뒤에 손을 대 부축한다.

결국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져 코와 코가 닿을 것 같이 되어 버리자 채향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키며 이번에는 몸 전체를 움직였다.

!”

다행히 이번엔 제대로 다리가 움직여 다급히 몸을 뺄 수 있었지만 대신 주성의 부축이 없어져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크읏, , .......”

채향은 그 사실에 심한 굴욕감을 느낀 듯, 이를 갈며 주성을 노려보았지만,

아아.”

주성은 넘어지는 채향도 보지 않고 자신의 손만을 바라보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군. 손이 닿아 있지 않으면 안 되나.”

쓸모도 더럽게 없군. 짜증내듯 속삭인 주성은 슬쩍 일어나고 있는 채향을 흘겨본 뒤 천천히 쓰러져 생사도 불명인 흑발의 소녀 쪽으로 몸을 돌리려했다.

주성은 혹시 그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펴볼 생각으로 향한 것이었지만 채향은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 날 무시해!?”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그 특유의 발차기를 먹이기 위해 주성에게 달려든다. 그녀의 속사포 같은 발차기는 주성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런 채향의 행동도 무시하며, 주성은 소녀의 입에서 숨소리가 들리기는 하는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작은 타격 음이 들린 뒤, 채향의 발은 가볍게 주성의 손에 의해 막혀 있었다.

아아, 이 감각을 왜 잊어먹고 있었는지.”

주성은 다시 한 번 채향의 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들어 올리며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웃었다.

정말. 하도 수련을 빠트리고 도망치다보니 대련할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가볍게 목을 우드득, 꺾은 주성은 힘껏 미소 지으며 웃어보였다.

, 그 여자랑 하는 대련은 대련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지만.”

그 여자라는 것은 서령을 말하는 것이겠지. 주성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채향의 얼굴을 핥듯이 훑어보며 웃었다.

살기라는 감각도,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은 법이다 멍청아.”

다시 한 번 주성이 붙잡지 않은 다리를 걷어차자 몸의 균형이 무너진 채향이 넘어질 뻔 했다.

!”

하지만 채향은 가볍게 상체를 움직여 두 팔로 땅바닥을 딛더니, 물구나무를 선 자세 그대로 다른 쪽 다리를 이용해 주성의 턱을 차 올렸다.

“.......!”

날카로운 채향의 발차기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 주성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턱을 매만졌다.

역시, 말도 안 되는데.”

인상을 찡그린 주성의 턱에는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생겨 있었다.

책에나 나오는 묘사처럼,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발차기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얼굴을 찡그리며, 주성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작은 상처를 매만졌다.

, 확실히 돌을 걷어차 박살내서, 충격만 날린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뒤통수를 긁적인 주성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이어서 말했다.

뭐랄까, 역시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인 것 같지만 말이야.”

내가 제일 비현실적이잖아, 제길. 주성이 쓰게 웃으며 내뱉듯 말하자 그 손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8.

 

주성이 자신의 손에 은은히 맺혀있는 기()의 효능을 알게 된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과정 속에서였다.

 

어느 날 어깨가 결린다는 프랜시스를 만났을 때, 주성은 그녀의 몸을 마음껏 만질 기회가 왔구나! 후후후훗, 조물조물조물조물 마음껏 만져주마! 라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그녀에게 마사지를 할 줄 안다고, 그깟 어깨 결림이나 근육통 따윈 모조리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여러 가지 수련을 하다 보니 몸의 근육에 대해 통달하게 되었다는 거짓말로 프랜시스의 몸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권리를 얻어낸 주성은, 쓸데없이 넓은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갈 수 있었다.

마침 서령도 저녁 식사용 재료 조달을 위해 장을 보러나간 참이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

속옷에 가까운 민소매 셔츠와 허벅지 절반 즈음에서 싹둑 잘린 반바지를 입은 프랜시스의 몸에 올라타다 시피한 주성은, 그 뒤로 기세만을 믿고서 그녀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마사지라는 것은 기세만으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혀 시원하지 않다며, 좀 더 잘 해 보라는 프랜시스의 타박을 듣게 된 주성은 이대로 있다간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혹시나! 하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프랜시스의 몸을 만지는 손에 기라는 것을 씌어보기로 한 주성은 반쯤 믿지 않는 마음으로 그녀의 몸에 손을 올렸다.

 

전혀 효용이 없다면 뺨을 맞는 것으로 끝이겠지. 그때는 남자답게 받아들이자는 각오를 하며 마지막 수단으로 두 손에 기라는 것을 씌우고 그녀의 몸을 만지는 순간,

 

햐윽!’

, 잠깐~’

, 기분이?’

? , 기다, 잠시만 기다리라니까!’

라고하는, 그야말로 나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프랜시스의 야릇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기세를 탄 주성은, ‘드디어 메인디쉬다!’하고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고,

 

.......마침 집에 돌아온 서령에게 그 모습을 목격당하는 바람에 고문에 가까운 정신 교육을 받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된 기의 효능이 신체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성은 기의 힘을 이용해 한동안 프랜시스의 근육통과 어깨 결림을 풀어주는 전속 안마사로 굴려지게 된다.

 

상당히 힘들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쓸모도 없을 줄 알았던 기의 힘을 깨닫게 된 과정을 회상하던 주성은, 자신의 머리통을 노리고 살기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미미한 기가 맺혀진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약간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그의 손엔 채향의 다리가 잡혀있었다.

크읏! 자꾸 잡지 말라니까! 손은 이상하게 번쩍 번쩍 빛내면서 말야!”

짜증난다는 얼굴로 다급히 몸을 뺀 채향을 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주성은, 손을 그녀에게 향한 체 추잡스러운 손동작을 보이며 말했다.

쿠후후훗, 그래. 그렇게 계속해서 발차기를 날려라. 네 매끄러운 발을 몇 번이라도 막으며 만져주마!”

크읏, 이 변태가!”

채향이 질린다는 얼굴로 몸을 빼자 주성은 겉으론 추잡스럽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할까, 사실 이 웃음이나 이런 저런 것들은 모조리 주성의 허세였던 것이다.

제길! 역시 보이질 않잖아!’

채향이 보기엔 주성이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의 발차기를 막은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주성은 거의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발차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발차기의 충격이 어찌나 센지, 한 번 한 번 막을 때 마다 주성의 손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크윽, 계속 시간을 끌다간 위험해.’

게다가 아직까지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날카롭고 끈끈한 살기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주성은 이를 갈았다. 익숙해졌다고 했던 말도 모조리 허세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주성은 자신만 들릴 정도로 포기의 말을 내뱉으며 공원의 어둠 속에서도 미미하게 보이고 있는 손을 뒤덮은 기운을 노려봤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이 기라는 것은 살상력 따윈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고, 자신의 손도 보호해주지 않으며, 단지 닿은 신체의 긴장을과 근육의 이완을 풀어 조금이라도 몸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만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 손에 잡힌 몸엔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한 번 잡히면 온 몸을 빼지 않는 한 빠져나올 수가 없는 모양이지만.

그럭저럭 단련 된 주성의 손을 삐걱거리게 만들거나 돌을 차올려 충격만을 날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면 상대도 뭔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뿐이었다.

거기까지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손목이나 손가락이 날아가기 직전이다. 이 이상 상대했다가는 금방 바닥이 들어날 것이 분명했다.

 

뭐랄까, 귀찮다고 할까, 뭐라고 할까.”

주성은 더 이상 끌었다간 자신의 손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허세를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역시 안 되겠어. 내 진짜 힘을 보여주마!”

그리고 두 손에서 뿜어지는 기의 기운을 더욱 끌어올렸다. 뭐랄까, 이런 상태의 손이 몸에 닿는다고 해도 이때까지와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어찌됐든 이 인간이 뭔가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크윽, 역시 조금 간당간당한데?’

그 때문에 별로 있지도 않은 기가 급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미미하게만 느껴지던 체내의 기가 모조리 빨려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로 상대도 나에게 쫄았겠지. 주성은 속으로 생각하며 더욱 허세를 부려 상대가 물러나게 만들 셈이었는데,

헤에. 그렇구나. 네가 진심으로 나왔다는 건, 나도 거기에 답해 주는 게 예의인 거겠지?”

채향이라는 여자는 아무래도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얼굴을 한 그녀가, 발차기를 날리려던 자세를 풀고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래.

등 뒤에 메고 있다가 퍼포먼스 격으로 바닥에 박아 넣었던 방천극을 들기 위해서.

주성은 채향이 방천극에 손으로 잡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 제길! 이봐! 무기를 드는 건 반칙이잖아!”

? 뭐야, 난 각법이 전문이 아니라 이쪽이 전문이라고. 네가 진심으로 한다기에 특별히 들어주는 거야. 나 같이 예쁜 여자의 진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는 건 어때?”

아니, 이런 식의 진심은 싫어. 끌어낸다면 야외가 아니라 안에서 부탁한다. 하고 속으로 외치며 주성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리치가 긴 무기를 들게 되면, 자신의 손이 힘을 발휘하는 손과 신체의 접촉같은 상황은 더 이상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게다가,

, 제길! 벌써 기가 바닥이 나다니!’

얼마 번쩍이지도 않았는데 번쩍거리던 주성의 손이 수명 다 된 전등처럼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핫! 뭐야! 벌써 전지가 다 된 거야!? 잘 됐네! 그럼 이걸로 넌 끝이야, 이 변태야!”

주성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 상대가 기세등등해진다면 자신에게 승산은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 주성이었지만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방법은 없고, 남은 기도 거의 다 떨어졌다. 게다가 상대는 저런 기다란 무기를 들고서 자신을 내려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이런 욕지기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주성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죽어 이 변태 자식아!!”

채향이 자신의 키보다 기다란 방천극을 휘둘러 주성을 내리쳤다.

그래도 다리와는 다르게 눈으로 따라갈 정도는 되는 그녀의 공격에 주성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양손을 뻗으며 외쳤다.

으랴아아!! 칼날잡기다아아아!!”

채향이 그런 주성을 비웃으며 방천극을 휘두르는 속도를 더욱 늦췄다.

멋대로 손뼉이나 쳐보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휘두른 채향의 방천극의 날이 주성의 몸을 세로로 갈라버리기 위해 내리쳐졌는데,

주성의 두 손이 마주쳐진 순간이었다.

그 손끝이 정말 운이 좋게도 방천극의 날 부분에 살짝 닿았고,

순간, 주성과 채향, 두 사람의 시야를 완전히 빼앗아버릴 정도의 빛이 공원을 뒤덮어버렸다.

끄아아아악!! 이게 뭐야!”

꺄아아아악!! 앞이! 앞이 안 보여!”

주성과 채향은 갑작스러운 안구테러 공격에 두 눈을 감싸 쥐며 혼란에 빠졌다.

끄으으윽!! 정말 죽여 버리겠어! 이 변태 안구테러범아!!”

자꾸 죽인다 어쩐다 하지 마 이 사이코 여자야!”

주성이 눈의 고통을 짜증으로 들어내며 외치자 채향은 빠드득, 이를 갈며 마구잡이로 방천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끄으윽! 죽어! 눈이 안 보여도 죽여 버릴 거야!”

채향이 막무가내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붕붕 거리는 뭔가가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성은 기겁했다.

끄아아아아악!! 정말 방천극을 휘두르기 시작했어! 안 돼! 잘못해서 스치면 죽는다! 진짜 죽어!”

주성은 마구잡이 휘둘러지는 방천극에서 도망치기 위해 바닥을 기려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땅바닥을 더듬으며 기어가던 주성의 손에, 뭔가 말랑한 것이 잡혔다.

어라? 이게 뭐지?”

땅바닥의 흙에서 느껴질 법한 감촉이 아니었기에 주성이 의문을 가진 순간이었다.

도망치자.”

?”

누군가가 작게 주성의 귓가에 그런 말을 속삭이며 그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악!! 이 변태 자식은 어디에 있는 거야아아아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 방천극의 위험에서 도망치게 된 주성의 뒤에서 채향의 히스테리 가득한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 작가의 말 : 진짜 미묘하네. 하긴 3일만에 썼으니 별 수 있나.

노블B 13-10-31 00:51
답변  
해당 작품은 1주차 중단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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