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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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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 1챕터 피드백 일자는 편집부 사정상 이번주 목요일(11월 14일)까지 작성됩니다.
늦어지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드리며, 수정을 위해 3주차 마감을 다음주 월요일(11월 18일)로 연장합니다.
피드백을 받은 뒤 이미 작성된 글을 수정하셔도 무방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검토는 최종 수정 원고가 기준이 됩니다.

 
신은 칼퇴근을 하지 않는다글 나이스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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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챕터
13-10-10 00:52
 
 

 프롤로그-신은 칼퇴근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교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있는 평범한 여고생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니 확실히 그렇게 보이겠지만, 나는 신이 맞다. 하지만 신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위치에 있는 전지적 존재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절대 아니라고 대답해 줄 수 있다. 특출난 재능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 낀 평범한 인간들이 있듯, 초월적인 존재들 뒤에서 우물쭈물 하는 나 같은 신들도 있는 것이다. 신계에서의 내 직업은 회사원이다. 좋게 말해주면 커리어 우먼이지만, 중소 기업 말단 사원에게는 사치스런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터지는 질문 하나, 나는 왜 인간계의 고등학교 교실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걸까?

신계에도 학교가 있다. 나도 왕년엔 학교에 다닌 적이 있고, 교복도 분명히 입어 봤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안 나지만, 교복 입을 나이는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

그래, 이틀 전이다. 이유라고 생각할 만한 건 그것 뿐이다. 이틀 전의 그 실수. 거기서부터 꼬인 거다. 추측일 뿐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공부의 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타이틀을 가지고 인간계에 온 이유는 그 실수 때문인 것이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렇게까지 거대해져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사장 놈은 알았을지도.




0-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




 " 부장님. 여기, 인쇄해왔어요. " 

 " 어, 그래. "  

 어제 퇴근도 못하고 밤새 사무실에 쳐박혀 컴퓨터와 씨름하며 겨우겨우 만든 보고서 PPT다. 곧 있을 전반기 보고총회에 사용될 자료라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일이랄까. 뭐, 보고총회라고 하니까 좀 거창해 보이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다. 우리 회사 규모는 좋게 쳐줘야 중견기업 정도. 직원 수가 많지도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우리 회사는 하청전문업체다. 자가적으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기업에서 일을 받아 처리하는, 전형적인 사무계열 하청업체란 말씀. 

 " 어이, 아이린. 혹시, PPT 검토는 해봤어? " 

 " 아뇨. " 

 " 그렇구나. " 

 " 왜요? " 

 " 여기, 한 번 봐봐. " 

 부장님이 가리킨 부분엔 도형들이 마구 엉켜진, 형태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괴이한 그림이 있었다. 피카소의 감정이 그대로 실린 듯한 기하학적인 추상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표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내 예술 감각은 고작 이 정도인가.

 " 이게 뭘까? 맞춰 봐. " 

 " 으음, 모르겠는데요. " 

 " 도표다! 만든 녀석이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 

 " 아! " 

 " 냉큼 다시 해 와. 회의까지 20분 남았다. " 

 " 저기, 이거 굳이 인쇄해야 해요? " 

 " 윗분들 취향에 맞춰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 

 그렇다. 인간들의 회사나 신들의 회사나, 높으신 분들 마음대로 회사가 돌아간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그 뿐이랴, 끝나지 않는 야근 퍼레이드, 소리지르는 금요일 밤의 환희, 절규하는 월요일 아침의 고통까지..., 신은 정말로 자신과 닮은 생물을 창조해낸 것이다. 

 신들의 사회 구조는 전체적으로 인간 사회와 비슷하다. 우리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한다.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려면 좋은 대학의 졸업증이 필요하다. 나는..., 음..., 딱히 좋은 스펙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이런 회사에라도 취직한 게 다행이려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인간의 종교 중에서도 메이저한 부류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러한 종교들은 신들의 사회에서 잘 나가던 대기업들이 인간 사회에서도 크게 성공한 경우다. 옛적엔 올림푸스가 유명했다. 관료제 엘리트들로 구성된 12간부 체제로 철저한 관리 하에 운영되던 기업이었으나, 사장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지금은 문화관광산업 쪽에서만 부각을 나타낼 뿐, 핵심적인 종교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역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기업이라면 가톨릭-크리스트 그룹. 세대 전환에 빠르게 적응하여 살아남은 기업으로, 놀라운 성장성을 보여주며 인간 사회에 범세계적으로 영향을 중 가장 큰 기업이 되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기업이었지만, 최근 극성 추종자들의 행포로 인해 주춤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거기다 CEO는 오래 전 은퇴.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뉴스를 몇 번 접한 적 있다. 그래도 뭐,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가던 대기업의 신들도, 현대의 인간들에겐 거의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했다. 과학을 발전시킨 뒤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간들이 늘어났고, 그만큼 신들은 인간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신과 인간의 상호 작용은 인간이 가진 신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으로 강해지는데, 인간이 신을 믿지 않으면 신은 그들에게 힘을 쓸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신들은 인간 세상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의 간섭 밖에는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어이, 5분 남았다! " 

 " 잠깐만요, 몇 장 뽑는 거였죠? " 

 " 대충 넉넉하게 뽑아! "

 " 그럼 2000장. "

 " 짤리고 싶냐? "

 " 히익. "



 " ..., 대외 홍보 효과는 미미하지만, 장기적 측면에서 볼 때 미래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 " 

 수십 명이 모인 회의실, 부장님과 나는 여기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야만 한다. 입사 새내기인 나에게 이런 건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부장님은 나를 믿어주셨다.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 실수하지 말자.

 " 다음은 영업부의 실적 보고 및 후반기 계획 프레젠테이션이 있겠습니다. "

 " 어이, 긴장 풀어. " 

 " 기기기긴장 안했어요. " 

 " .... " 

 부장님은 못 미더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는 프로젝터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고 나도 노트북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갔다. 

 " 영업부의 카챠 에버그네일과 아이린 스노우화이트입니다. " 

 형식적인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계신 임원 분들께 PPT 인쇄물을 나눠드렸다. 혹여나 실수해서 부수를 잘못 센 건 아닐까 마음 졸이며 말이다. 다행히도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저지르지 않은 것 같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노트북 앞에서 멍하니 있다가 적당한 때에 클릭 몇 번 하는 것. 불 같은 타이밍이 생명이다.

 " 가톨릭-크리스트에서 하청 받은 목록입니다. " 

 2/4분기 교황청 임원 변화 현황 보고서, 연도별 교회 헌금 변화율과 국가별 신도 전도율 파악 현황 보고서, 개신교 인터넷 시스템 문제 해결, 그 외 기타 등등. 

 " 지난 해 대비 17%의 추가 업무를 하였고, 33%의 추가 수익을 냈습니다. " 

 카챠 부장님은 높으신 분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확한 발음과 적당한 발성, 프레젠테이션의 여왕이란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어!

 " 도표를 보시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지금, 클릭할 타이밍이다. 

 " .........? " 

 " 수치가 올라간 수준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도표가......? " 

 스크린 화면에는 도형들이 마구 엉켜진, 형태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괴이한 그림이 있었다. 피카소의 감정이 실린 듯한 기하학적인 추상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어라, 이 그림은..., 아까 분명 수정한....

 아.

 " 야, 이게 무슨..., 수정 안 한 거야? "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 저, 제가..., 수정하기 전의 파일을 연 거 같아요.... " 

 실수해 버렸다. 중요한 회의에서, 실수해 버렸어. 내가 보고총회가 별로 거창한 게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실수하면 안 되는 자리였는데. 

 " 맙소사..., 빨리, 다시 제대로 켜 봐. " 

 " 네, 네. " 

 높으신 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요하면 안 돼. 폴더, 폴더를 열고, 아니 열지 말고 닫고. 수정한 파일이 있는 폴더가 뭐였지, 비둘기였나? 가마우지냐? 두루미? 왜가리? 오리? 회의자료 폴더, 이거야. 천천히, 두 번 클릭한다!

 실수로 게임을 실행시켰다. 

 " 어라. " 

 " 뭐하는 거야, 임마! " 

 " 으아, 죄송해요! " 

 이건 크다. 이번 걸로 내가 업무 시간에 몰래 게임을 하곤 했다는 사실도 들통났을 거야! 일단, 일단 이거 꺼야 되는데, 안 꺼지잖아! 종료 버튼이 안 먹혀? 게임 회사 로고가 떠 버렸어! 쉬프트 알트 딜리트, 아니, 쉬프트 말고 컨트롤! 작업 관리자, 프로세스 탭 들어가서 프로세스 종료! 

 실수로 중요 프로세스를 종료시켰다. 바탕화면 아이콘과 시작 탭이 통째로 사라졌다.

 " 어라? " 

 " 야, 뭐해? " 

 " 하하, 그게, 이건, 그러니까.... " 

 이, 이거 어떡하지? 잠깐, 일단 침착해야 해. 아니, 침착할 여유가 없잖아.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 야! " 

 눈물이 핑 돌았다. 

 " 죄송합니다.... " 



 회의는 엉망이 되었다. 컴퓨터를 재부팅하고, 발표를 재개하긴 했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투덜대며 나가는 높으신 분들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 너무 신경 쓰지 마. 징계 먹진 않을 거야. " 

 지금 징계 같은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 실수를 했는데, 이제 회사 생활 꼬이는 건 시간 문제란 말입니다. '영업부 덜렁이' 같은 별명이 이미 사내에 쫙 퍼졌을 지 누가 안담?

 " 그나저나 날씨 좋네. 이럴 땐 땡땡이 치고 싶어진다니까. " 

 " 은근슬쩍 담배 피지 마요. 사내에선 금연이라구요. " 

 " 창문 밖은 회사 밖이잖아. 얼굴 내밀고 피면 되지. " 

 " 순 억지.... " 

 " 너도 바람 좀 쐬봐. 기분 나아질 거야. " 

 " 싫어요. " 

 " 너 우냐? " 

 " 안 울어요. " 

 갑자기 짜증이 났다. 학교 다닐 적에 궁금하던 게 문득 떠올랐다. 분명히 나는 신인데, 왜 인간처럼 생활하지? 닮은 건 생긴 거나 성격 정도로 끝난 거 아냐? 사회 시스템까지 닮을 필요는 없잖아? 가만 보면 우리가 쓰는 물건들은 전부 인간의 물건들이다. 컴퓨터, 칫솔, 커피, 침대..., 왜 우리는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걸까? 왜 인간처럼 살아가는 거야? 

 " 부장님.... " 

 " 왜. " 

 " 이 일, 재미있으세요? " 

 " 무슨 소리야? " 

 " 재미있냐고요. 쥐꼬리만한 월급 받고 삼류 회사나 다니면서 시답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거요. 인간 코스프레나 하면서.... " 

 " 너 중2병 걸렸냐? " 

 " 아니거든요. " 

 부장님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풍경도 인간 세상과 끔찍이도 닮아 있겠지. 

 " 글쎄, 재미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지. 누가 이러고 살고 싶겠어? 떵떵거리며 사는 대기업 사장 딸내미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 

 " 그럼 왜...? " 

 정확하게 질문하진 못했지만, 카챠 부장님은 알아들은 것 같다. 

 "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 

 " 이해요? "

 " 인간들은 우리를 이해 못해. 상식 밖의 일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들에게 아주 어려운 일이거든. 배려심 많은 신님께서 친히 이해해줘야지, 안 그래?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처럼 사는 거지. "

 " 뚱딴지 같은 대답이네요. " 

 " 뚱딴지 같은 질문이었으니까. "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수준의 대답이라도 생각한다. 바람이 불자, 부장님의 긴 앞머리가 휘날렸다. 

 " 부장님, 지금 보니 꽤 멋있으시네요. 부장님이 여자만 아니었으면 반해버렸을 텐데. " 

 " 뭐래, 쪼끄만 게. " 

 " 농담 아닌데. " 

 " 에잇, 꺼져. 난 그런 취향 아니니까. " 

 " 저도 아니에요. " 

 " 그럼 가서 일이나 하시지. " 

 " 부장님도 땡땡이 치고 계시잖아요. " 

 " 네 짬밥으로 내 영역을 넘보는 거냐? " 

 " 더러운 권력의 앞잡이 같으니.... " 

 " 방금 뭐랬어. " 

 " 오늘 저녁은 근사하게 먹어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 

 " 올해 유급휴가는 없는 걸로. " 

 " 오늘은 야근이 하고 싶어요, 부장님♡ " 

 " 어차피 밤샘근무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 

 " 그러네요. 젠장. " 




1-야간근무가 진화하여 파견근무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즈음, 영혼 없는 눈을 한 채 여섯 잔 째 커피를 쓰린 위장 속에 들이붓고, 10초에 두 번씩 시간을 체크하며 점심시간을 기약하고 있었을 거다. 나란 녀석은 밥을 야근 먹듯이 하며, 아니..., 잠깐, 맞는 표현 같군. 어, 나란 녀석은 복도를 거닐 때도 혹시 간부급 임원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며 조마조마 심장 졸이고, 매일 같이 부장님께 깨지는 게 일상인, 중소기업 말단 직원이다. 해고를 당할 정도로 크게 잘못한 적도 없고, 직급 특진에 연봉 인상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해낸 적도 없단 말이다. 근데, 왜, 어째서! 

 왜 나는 사장실에서 사장님과 1:1 대면을 하고 있냔 말이야! 



 " 출장이다. " 

 " 예? "  

 새벽 1시에 퇴근해서 오늘 8시에 출근하려 비몽사몽 죽을 맛인 나는, 출근하자마자 부장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갑작스런 통보를 받았다. 

 " 출장. 파견근무. 다른 지사로 발령나는 거. " 

 잠깐만요. 저는 단어 뜻이 궁금한 게 아니에요. 

 " 무슨...,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 

 " 그럼 뭐 1년 전에 미리 알려주리? " 

 " 아니, 제 말은..., 언제 가는 건데요? " 

 " 내일. " 

 " 그걸 오늘 알려주는 게 어딨어요! " 

 " 나도 오늘 알았어. " 

 " 이게 뭐, 깜짝 선물이에요? 축하합니다! 말단 사원 스노우화이트 양! 내일 직행으로 출발하는 파견근무에 당첨되셨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사장과 정정당당하게 일기토를 붙던가 해서 요령껏 알아내십시오! " 

 " 흥분하지 마. " 

 " 흥분 안 하게 생겼냐고요, 지금! " 

 피곤했던 몸에 불끈 힘이 솟았다. 어떠한 자양강장제도 이만큼의 효능을 내진 못했을 거다. 만약 이 모든 일이 단순히 나에게 각성 효과를 주기 위한 스트레스 요법의 일환이었다면, 부장님 잘하셨어요. 효과가 대단합니다.

 " 덕분에! 아주 스태미너가 넘치네요! "

 " 뭐라는 거야. "

 아무리 열불을 내봐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갑자기 출장이라니, 설마, 어제 회의 때문에....

 " ..., 저, 좌천된 거에요? " 

 " 네가 그런 어려운 단어도 쓸 줄 아는구나. " 

 " 부장님은 대체 저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 거에요? " 

 " 좌천이라.... 그럴 지도 모르지. " 

 " 역시 어제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사장 눈 밖에 나버린 걸까요, 저. " 

 " 설마. 사장님이 그렇게 깐깐하실 리가 없잖아. "

 " 그걸 어떻게 알아요. 쫌팽이 대마왕일 수도 있죠. 막, 우리 회사에 저런 무능력한 녀석은 필요 없어! 이러면서, 자기가 무슨 대단한 회사를 이끌어가는 재목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말이에요. " 

 나는 흥분하면 말이 많아지는 버릇이 있다. 그게, 말만 많아지면 다행인데, 안 좋은 쪽의 말을 많이 하는 게 문제다. 그래, 나는 그쯤에서 그만뒀어야 했다. 주절주절 떠드느라 다른 누군가가 부장실에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플래그가 선 것이다. 

 " 아무튼간에 말이에요. 사장이라고 사원들 함부로 대하거나 하는 건 잘못된 거라구요.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을 해주진 못할 망정, 난데없이 출자-앙? 그렇게까지 해야 속이 풀리냐고! " 

 " 야. 그만해. " 

 " 부장님도 똑같아요! 부하 사원이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데,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냐고요! 위로해 주지는 못할 망정, 타박이나 하고! " 

 " 난 경고했다. " 

 그렇다. 내 귀엔 정말 아무 말도 안 들렸다. 미친 듯이 지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래선 안 됐는데.

 " 아..., 시끄럽구만. "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불대던 입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 아무래도 사내교육이 별 효과가 없는 것 같군. 사장 앞에서 사장 욕하는 사원이 멀쩡히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말이야. " 

 입사면접 때 한 번 듣고 영영 듣지 못했던 목소리.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광하는 걸 멈췄다.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안 그런가. 말단 사원 스노우화이트 양. " 

거..., 거기서부터 듣고 계셨습니까....

 " 파견근무는 당첨되거나 하는 게 아니야. 인사부에서 결정을 내리고, 내가 검토하지. "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자네는 따로 사장실로 오게. 에버그네일, 잠깐 나와서 얘기하지. "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신은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 지라, 늙고 근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카리스마와 터프함. 그것만으로 나는 압도당했다. 



 데미안 폴스틴. 코퍼레이션 이노베이션, CI의 최고책임자이다. 나에겐 사장님인 이 분은, 외모만 봐도 여자 좀 후리고 다녔을 거란 걸 알 수 있다. 스타일도 좋고, 작은 곳이지만 일단은 기업의 CEO. 성공하신 분이지, 여러모로. 

 그리고 한낮 말단 사원인 나는, 사장실에서 그 분과 함께 있게 되었다. 나, 짤리나? 그럴 리가, 사장 뒷담 좀 깠다고..., 짤리나? 

 " 아이린 스노우화이트 양. 맞나? " 

 " 네..., 네! " 

 짤리나요? 저 짤리나요? 

 " 파견근무 건 말인데.... " 

 짤려서 취소 되나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 미안하네. 급하게 결정된 거라 알릴 시간이 없었어. 이해해 줄 수 있겠나? " 

 " 네! 이해합니다! 당연히! " 

 안 짤렸다! 안 짤렸어! 할렐루야!

 " 파견근무는 뭐...,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알려주겠네. "

 " ..., 네에.... "

 다시 초조해진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사장실까지 날 불러온 걸까? 정말로 좌천? 아직 초짜 새내기 사원인데 벌써 눈 밖에 나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건가....

" 자네가 할 일은, 지금은 거의 사장된 일이지. 인간계에 내려가 그들을 돌보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지. "

" 네? " 

 한 때 질풍노도의 시기에 빠졌을 때, 신이란 뭐하는 존재인가에 대해 탐구해 본 적이 있다. 그 때 조사한 내용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신이 인간에게 간섭한 적이 최근 전무했다는 사실을.

" 자네는 내일, 인간계로 파견될 거라네.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 

이해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 지금 말씀하시는 게.... " 

" 자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 

이건, 차라리 짤리는 게 더 편할 지도 모르겠다. 

" 인간계에 직접 내려가, 그들과 소통하는 것. 그들을 돕고, 이야기를 듣게. '신'으로서 말이지. "

 " .... "

 " .... "

 " 그렇군요.... " 

 " 그렇군요, 그게 다인가? 뭐, 더 할 말은 없고? " 

 할 말이 없다기 보단,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 내가 너무 거창하게 말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예수처럼 유일신 컨셉은 아니야. 걱정 말게. 대단한 일이었다면 애초에 초짜 새내기 사원에게 시키지 않았어. " 

 " ..., 저, 근데 왜 제가 이런 일을 하게 된 거죠? " 

 " 자네가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 " 

 " 자격이 된다고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 

 2천 년이다. 2천 년이 넘는 동안, 신은 인간 세계에 직접 관여한 적이 없다. 그건 필히 이유가 있어서이다. 신들의 힘이 약해진 것도 있지만, 

 더이상 인간은 무언가를 숭배하지 않는다. 

 더이상 인간은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는다. 

 더이상 인간은 내일 먹을거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더이상 인간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굳이 우리가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걸, 인간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박대하지 않을까? 당장 예수 같은 인물이 나타나 앉은뱅이를 치료하거나 하면 정형외과, 신경정신과, 기타 등등 죄다 망한다. 제우스나 토르가 아무리 번개를 날려봤자 피뢰침이 있으니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힘? 그들은 우주를 뚫었으며, 바닷속을 탐사한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신들이 인간을 따라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신의 '전지전능함'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두 글자만 빼온 '지능'만으로 충분히 우리를 앞질렀다. 우리의 권능은 그들에게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 굳이 해야만 하나요? " 

 내 의견을 종합하여 말하였다.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나, 신에게나. 

 " 미안하지만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자네도 알고 있잖나. 말단 사원 스노우화이트 양. " 

 " .... " 

 하긴,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거다. 나는 말단이니까. 까라면 까야지. 

 "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네. " 

 중요한 건 철학적인 생각이 아니라 현실인걸. 

 " 바로 본론으로 들어 가지. 일단, 국가. 200개가 넘는 인간계의 국가 중에, 자네가 당도할 국가는.... "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제발, 북유럽이나 호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북한, 소말리아, 이런 데만 피하면 돼! 

 " ..., 대한민국. " 

 " 예쓰. " 

 " 기뻐 보이니 다행이군. "

 뭐, 적어도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 아까도 말했지만, 유일신이라든가, 그런 거창한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이번 일은 테스트 같은 거니까 말이야. 자네는 '공부의 신'이네. " 

 으음, 그렇군. 공부의 신이라..., 공부의 신..........

 뭐? 

 " 뭐라구요? " 

 " 공부의 신. " 

 이건 미친 짓이다. 

 " 제가요? " 

 " 공부의 신이라네. " 

 이름 없는 대학도 간신히 졸업해서 어중이떠중이 스펙으로 겨우겨우 중소기업 입사한 내가, 공부의 신?

 " 말도 안 되요! " 

 " 말이 되건 안 되건, 자네가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네. 말단 사원 스노우화이트 양. " 

 " 아 진짜! 아까부터 계속 말단 말단, 그만 놀려요! " 

 " 어쨌든 축하하네. "

 " 축하는 얼어뒈질! "

 " 입이 험하군, 자네. "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갑작스런 파견근무에, 부담스런 사장실 1:1 초대 면담에, 다 좋다 이거야.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야지. 난 회사원이지, 너네들 취향대로 굴리는 주사위가 아니라고! 시키는 일의 기준은 명확히 해야지! 이번 건 그냥 못 넘어간다.

 " 아니, 내 말 좀 들어 보셔요! " 

 " 그건 자네가 따질.... " 

 " 알아! 나 말단 사원이니까! 짬밥이 안 되지! " 

 " 사장한테 반말하는 사원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 

 " 어쩌라구요! 젠장! 공부의 신이라니, 죽어도 못해요! " 

 " 해. " 

 " 왜요! " 

 " 난 사장이고, 자넨 말단이야. " 

 " 사장이 시킨다고 다 하는 게 어딨어요!? " 

 " 사장이 시키면 해야지. "

 ..., 빌어먹을..., 맞는 말이잖아.... 반박할 수가 없어....

 " 내일 아침은 일찍 출근하게. 비서를 보내 일을 도와주도록 하지. " 

 " 더러운 지배층 같으니.... "

 " 잘못 들었네만? "

 " .... "

 면담이 끝났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사무실이다. 오늘 밤도 철야근무를 해야 한다는 점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집에 가면 진지하게 일을 때려칠까 고민해봐야겠다.




2-집 떠나와 버스 타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신은 겉모습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지면 자연스럽게 노화가 멈춘다. 물론 개인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걸 빼면 우린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늙어 죽지만 않지, 병 걸려도 죽고, 차에 치이면 죽고, 굶으면 죽는다. 신이지만, 불사신은 아니다. 우리도 먹어야 산다. 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만드는 저주가 있다고 어디서 들은 적은 있지만.... 그게 왜 저주냐고? 저주에 걸린 사람은 굶어 죽진 않지만, 식욕도 잃고 맛도 못 느끼게 된다고 한다. 메리트는 오직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 뿐. 오감 중 하나를 잃는 대가치곤 너무 작다는 생각 안 드는가? 아니, 이야기가 딴길로 샜다. 요점만 간단히 말하자면, 신도 먹고 살아야 한다. 그게 당연하다.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을 못하면 굶어 죽는 거다. 

 굶어 죽고 싶진 않으니까, 때려치는 건 그만 두기로 한다. 

 오전 7시, 잠이 덜 깬 채로 회사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을 시키는 거야..., 그보다 내 책상이 왜 이렇게 깨끗하지? 내가 어제 정돈을 하고 집에 갔나? 아니, 이건..., 너무 깨끗하다. 아무 것도 없다. 사무실 구석에 놓인 상자와 그 안의 물건을 보니 감이 잡힌다. 나 좌천되는 게 맞는 것 같아. 

 " 왔군요. 아이린 양. " 

 목소리는 누군가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게 대략적인 호감도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문제다. 가령 목소리만 듣고 멋대로 성품을 파악하는 경우, 음, 저 분 목소리 톤이 낮고 부드럽군, 인자하신 분임에 틀림 없어! 같이 신빙성 없는 추측을 한다던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끼고 말았다. 이 여자는 보통 깐깐한 여자가 아니다. 깐깐함의 스페셜리스트, 깐깐함을 집대성한, 깐깐함 그 자체라고! 

 나중에 깨닫게 될 무서운 사실은, 나의 그 안일한 추측이 정확히 드러맞았다는 것. 

 " 아, 안녕하세요. " 

 깐깐녀는 부장실 쪽에서 나타났다. 아니, 아직 깐깐하게 군 적은 없지만..., 뭐 어때.

 " 글로리아 위튼입니다. CI 사장실의 비서직을 맡고 있습니다. 당분간 제가 당신의 업무를 관장할 거니, 자주 보게 되겠군요. " 

 " 네. 그, 잘 부탁드려요. " 

 "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설명하죠. 따라오세요. " 

 가지런히 정돈된 헤어스타일에 안경, 말 그대로 정장. 그야말로 비서란 직업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복도를 조금 걷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곳은 지하 12층. 그리 밝지 않은 조명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는 약간의 기피를 포함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글로리아 씨는 특유의 담담하고 차분한, 그런데도 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당신은 버스를 탈겁니다. 운행 라이센스를 취득한 인간계-신계 구간 고속 터미널을 지날 거에요. " 

 보통, ‘뿅‘하고 소환된다거나..., 하늘에서 거룩하게 내려온다던가 하는 게 아니었다. 고속버스다. 고속버스를 타고 인간계로 향한다. 품어 왔던 환상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 

 " 뭐, 언짢으세요? " 

 " 아니요..., 저는 좀 더 환상적인 걸 기대했거든요. " 

 " 자기 고유의 힘만으로 인간계에 갈 수 있는 신은 '초월한 신'중에서도 소수에요. 뭘 기대한 겁니까? " 

 초월한 신, 쉽게 말하자면 메이저한 신들을 말한다. 인간 세계의 기록에 남아 있거나, 오랫동안 추앙된 신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진정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것과는 달리, 그들은 인간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연을 맺던 세대다. 인간에게 '신'이란 그들만을 일컫는 거겠지. 

 " 강진고등학교입니다. 당신이 학생으로서 들어가게 될 학교의 이름이죠. " 

 " 진짜구나......, 공부의 신.... " 

 " 일단은 외국에서 전학을 왔다는 설정인데..., 당신 머리 너무 튀네요. " 

 " 예? " 

 " 너무 길어요. 게다가 머리색은..., 아이보리? " 

 " 뭐, 뭐가 어때서요. " 

 " 좀 잘라야겠어요. " 

 " 예? 아니, 왜요?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로리아 씨가 팔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다. 순간 날붙이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듯한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이 잘려서 느낌이 싸한 거였잖아! 

 " 이게 뭐야! " 

 " 훨씬 깔끔해졌군요. 머리색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 

 허리 밑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칼이었는데 이젠 어깨를 간신히 넘길 정도만 남았다. 

 " 으으..., 어떻게 한 거에요? 그냥 손만 휘둘렀잖아요? " 

 " 신의 능력입니다. 초월한 신의 힘을 빌려온 거죠. " 

 " 능력이요? " 

 " 초월한 신에게서 하사 받은 힘이란 얘기입니다. " 

 " 그런 게 가능해요? " 

 " 의심이 많군요. 머리 더 잘라 드리면 됩니까? " 

 " 이해했습니다. 완벽하게. " 

  초월한 신들은 대부분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 이상하게 최근에 탄생된 신들에겐 발현되지 않는 초능력과 같은 힘, 그거야말로 신이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데,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근데, 글로리아 씨는 어떻게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거에요? " 

 나는 딱히 악의적인 의미는 없었다. 초월한 신의 힘을 어떻게 중소 기업 사장 비서가 다루고 있느냐는 것을 궁금해하는, 원초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글로리아 씨는 그 질문에 기분이 상했던 건지, 아니면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던 건지, 더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않고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근거 없는 의심이 잠깐 생겨났다 사라졌다. 나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고민은 지울 수 있으니까. 

 " 다 왔군요. " 

 몇 분 동안 걸어 도착한 곳엔 놀랍게도 아스팔트 도로가 뚫려 있었다. 가로로 길게 뻗은 도로는 고속도로의 터널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정차 중인 리무진 버스 한 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버스다. 

 " 여기, 가방 속에 교복과 쪽지가 들어있습니다. 쪽지엔 당신이 묵을 집 주소와 학교 주소가 적혀 있으니 잘 챙겨 두십시오. " 

 글로리아 씨가 복도 끝에 놓인 빨간색 학생 가방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정말로 학생이 되는 거구나. 멀쩡히 회사 다니다 고등학생으로 돌아 간다니, 무슨 짓이냐고요,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넌센스다. 

 " 저는 그냥 학교만 열심히 다니면 되는 거에요? "

 " 명색이 공부의 신이니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되겠지만, 맞아요. " 

 " 2천년 만에 인간 세계에 당도하는 신의 임무가 고작 학생 코스프레? " 

 " 이 업무는 테스트의 일환입니다. 사장님이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어디까지나 파견 근무를 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당신이 집에 도착해 잠에 들 때까지 당신은 퇴근한 게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 

 " ..., 네.... " 

 " 인간 세계에 도착하시면, 먼저 학교에 찾아 가세요. 입학 수속은 마쳤으니, 알아서 잘 하실 수 있으리라 믿겠습니다. " 

 " ..., 네.... " 

 " 좋아요. 아무쪼록 잘 해내시길. " 

 그냥 공부하러 가는 건데 못 해낼 건 또 뭐람. 후우, 어쩔 수 없는 거다. 회사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다. 좋든 싫든 나는 말단 사원이니까. 글로리아 씨 말대로라면, 나는 인간 세계에서조차 칼퇴근을 하지 못한다. 한숨만 나오는 순간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말단 사원이니까. 

 버스는 어두컴컴한 직선 터널을 달리고 있다. 터널이 대체 얼마나 긴 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인간계에 가고 있는 건 맞을까? 아무리 고민해 봤자 터널이 짧아지진 않는다. 그냥 마음 편히 있자. 좋아, 가방이나 살펴 볼까나. 이 브랜드 로고는 처음 보는데, 아마 인간 세계의 브랜드라고 생각 된다. 밝은 빨강색 디자인이 내 마음에 쏙 든다. 혹시, 내 취향도 미리 조사해서 가방을 준비한 건 아니겠지. 로고도 재미있게 생겼네. 안경에 콧수염이라.... 

 안에 들은 건 교복과 접힌 쪽지뿐이다. 쪽지에는 서울특별시로 시작하는 주소가 인쇄된 글씨체로 쓰여 있다. 손 그림 약도까지 있다. 내가 주소도 못 찾아 갈 거라 생각한 거야? 기분 상하네. 쪽지를 대충 주머니 속에 구겨 넣고 교복을 꺼내 보았다. 잘 다림질된 교복에 새 옷 냄새가 그윽하다. 교복 입어 본 지 얼마나 됐지? 이 버스, 따로 기사 아저씨도 없는 것 같고(어떻게 굴러가는 거지)..., 여기서 입어 볼까? 

거울이 없다. 이래선 내 모습이 어떤 지 확인도 못 하잖아. 머리도 짧아졌는데, 이상하진 않을까? 처음 만난 깐깐녀의 센스를 믿는 수 밖에 없다니, 비참하다. 버스는 아직도 터널 안을 달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꽤 일찍 잠에서 깼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지금 눈치챈 건데, 나 지금 굉장히 피곤하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운동하던 물체는 그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멈춰 있는 물체는 계속 멈춰 있으려 하고, 움직이던 물체는 계속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 달리던 기차가 정차할 때 달리던 방향으로 몸이 쏠리거나, 멈춰 있던 기차가 다시 운행을 시작할 때 반대 방향으로 몸이 쏠리는 것. 바로 뉴턴역학 제1법칙(Lex Prima), 관성의 법칙이다. 나는 방금, 극단적인 관성의 법칙의 예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속 80km가 넘는 속력으로 주행하던 버스가 급정거. 브레이크 장치를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장인이십니다. 1초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이 덩치 큰 버스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브레이크를 만들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안전벨트도 안 맸는데 말이죠. 

 " 어? " 

 앞좌석에 얼굴이 제대로 들이박혔다.




 코피가 안 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픈 코를 부여잡고 버스 밖으로 나오는데, 때마침 부는 선선한 바람이 나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 아스팔트 바닥, 낯설지 않다. 인간 세계에 도착하여 처음 발 딯는 이 곳은 버스정류장. 역시 익숙하다. 붉게 물든 노을도 여러 번 보았던 것이다. 그 빛을 받아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구름도 마찬가지다. 여긴 정말로 신계와 판박이다. 아니, 신계가 인간계의 판박이라고 해야겠지. 

 잠깐......, 노을? 

 이런, 학교에 가야 하는데 너무 늦은 것 아닐까? 대한민국의 학교에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야근 프로토타입이 존재한다고 들었는데, 모든 학교에 있는 건 아니라고 했어. 일단 약도가 그려져 있다는 쪽지부터 살펴야겠다. 쪽지, 쪽지를 보자!

 ..., 없다? 

 교복엔 없다. 옷을 갈아 입고, 버스 안에 내팽개치고 그냥 나왔지. 그럼 옷에 들은 쪽지는 아직 버스 안에 있어? 

 뭔가 잘못된 걸 깨닫고 뒤를 돌아봤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 에............. " 

 저기에 집 주소도 적혀 있는데. 

 " 안 돼.......... " 

 손 그림 약도는 필요 없었다. 쪽지도 못 챙기는 등신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공부의 신' 1일차,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 작가의 말 : 글로리어스!

시우시에 13-10-16 16:41
답변  
음. 재미있기 읽어서 그다지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독자층을 어느 정도로 잡고 계신지 묻고 싶군요.
저는 대학생이고, 곧 취직을 앞두고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자만, 중 고등학생이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 지 짐작이 가지 않네요.
무엇보다 주인공이 여자입니다. 여자가 주인공이 나쁜 건 아니지만 남자가 보고 감정이입하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죠. 그렇다고 남자로 바꾸라는 건 아닙니다. 여자가 주인공이라도 인기있는 소설은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은 아무리 봐도 프롤로그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어보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좀 더 봐줘! 하고 말하는 느낌? 분량 자체는 꽤 되는데 왜일까요.
 주인공이 공부의 신이 된 다음의 내용을 앞부준만이라도 추가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만으로 좀 더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네요.
     
나이스웨더 13-10-16 21:55
답변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회사물은 페이크고 학원물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방식인데 안될거같네요.
주인공이 여자인걸 마음에 들어하는 독자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주변인물이 죄다 여자인것보단 자연스러워서 좋을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으면 어떡하죠.
여유가 생기면 추가분량을 올려놓을까 생각하던 참이었고 분량 추가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시우시에 13-10-18 19:02
답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는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무지 하고싶어요. 동시에 두 개의 스토리를 전개한다던가, 알고보니 두 개가 하나였다던가. 그런식으로 서술 트릭도 쓸 수 있고요.
다만, 그게 굉장히 어렵다는 게 문제죠.
주인공이 여자인 걸 좋아하는 독자는 확실히 있습니다! 장담할게요! 분명 많이 있어요! 다만, 회사물과 섞이면 그게 읽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드린 말씀입니다. 학원물이라면 여자 주인공이라도 OK죠.

뒷내용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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