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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 1챕터 피드백 일자는 편집부 사정상 이번주 목요일(11월 14일)까지 작성됩니다.
늦어지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드리며, 수정을 위해 3주차 마감을 다음주 월요일(11월 18일)로 연장합니다.
피드백을 받은 뒤 이미 작성된 글을 수정하셔도 무방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검토는 최종 수정 원고가 기준이 됩니다.

 
흡혈귀가 서울에서 살아남는 방법글 네코코노미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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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13-11-18 22:52
 
 



아르바이트 후배가 흡혈귀였다.

그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된 다음날.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버릴 정도로 큰 일이 발생해도 세상엔 아무런 영향도 없다. 결국 아무리 커다란 일이라고 해봤자 변혁은 개인 단위의 수준으로 일어날 뿐이고, 사실 생각해보면 후배가 흡혈귀인 게 딱히 중요한 일인가? 내 인생이 어딘가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바뀌지도 않았고. 어차피 난 선배로써 OJT를 하면 그만인데. 하고 생각하니, 뭐, 그리 큰일도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게 본심이지만. 그리고 흡혈귀라고 해도 피를, 그것도 평소에 주로 고양이 엉덩이를 깨무는 것뿐이니.

이쯤 되면 그냥 특이한 식문화를 가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면 별 차이도 없으려니. 싶기도 한 것이.

그렇구나. 별로 상관없는 일이구나. 하고 새삼 깨달은 나는 결국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일. 거창한 진실은 어둠의 저편에 묻어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이다. 후배가 흡혈귀여도 내가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고.

그래서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도 평범하게 레스토랑에 출근했다.

내가 ‘랑’의 문을 막 열었을 때.

“우후훗.”

“히히힛.”

주변 동료들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는 인사를 건네 오는 것도 아니고, 저만치 멀리 떨어져 어딘가 미묘한 미소와 웃음을 지은 채 히죽거리면서 나를 바라보고는 하는 것이.

…아, 그런가. 괜히 머리가 아파져 와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게, 또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군.

한숨을 내쉬며 들어선 휴게실. 탁자와 소파를 빙 돌아 남자 탈의실 문을 연 직후.


거기에 헐벗은 여자가 있었다.


흐트러진 투피스 정장 차림…하고 말할 것도 없이 단적으로 말해 효연 누님이었다. 효연 누님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콧대 위로 늘어트린 한 가닥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내게 야릇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효연 누님.

어딘가 흐릿하면서 색기가 묻어나오는 그 시선에 여기가 남자 탈의실이라는 지적을 해주기 전에 먼저, 살짝 당황하려는 찰나.

이내 하아…하고 요염한 한숨을 내쉰 효연 누님은

“무, 무울…”

하는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로커에 손을 짚고 몸을 숙이더니 우우우우욱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효연 누님! 하지 마세요! 뒤처리가 힘들어지니까!”

방금 그 표정은 숙취 때문이었나! 어째 엄청 마셔대더라니!

간신히 물 한 잔을 들고 효연 누님에게 마시게 한 뒤 한숨 돌리고 나자, 그제야 효연 누님은 속이 좀 진정됐는지 팬티스타킹 차림으로 로커에 기대고 앉아 우우우 하고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그렇군. 시우 덕분에 제법 괜찮아졌다.”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라는 내 질문에 효연 누님은 내가 어제 늦은 밤 춘자를 찾기 위해 음식점을 나선 뒤에도 약 1시간 정도, 자정까지 환영회는 계속되었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거기서 마음이 맞는 이들은 노래방으로 2차까지 가거나 했다고 하니.

“주는 대로 넙죽 넙죽 마시지 말아주세요. 누님.”

그렇지 않아도 술도 약하시면서.

“앞으로는 그 조언을 참고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효연 누님은 비척거리면서도 힘겹게 로커에 등을 기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비틀. 하고 쓰러질 뻔한 것을 허리를 감아 받쳐주자, 확 하니 술 냄새가 풍겨온다. 거기에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으으음. 그야말로 어른 OL의 느낌이라고 할지. 숙취로 수척해진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여기저기 빈틈이 보이는 것 같아 괜히 마음 깊은 곳을 자극하는 효연 누님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돌봐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버려두면 이대로 다시 쏟아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진짜 그것만큼은 봐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하여간 여전히 내게 몸을 기댄 채로 “잠깐 머리가 어지러워서, 이대로 조금만, 음. 조금만 더….”하고 움찔 움찔 몸을 추스르는 효연 누님을 거스르지도 못한 채로 할 수 없이, 누님의 부드러워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몸을 지탱하고서 서 있는데.

불현듯

“그러고 보니 시우, 어제 춘자를 따라가서 무슨 일이 있었지?” 라고 어딘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딘가 의미심장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질문을 던져왔다.

잠시 생각하다

“아뇨,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밤도 늦어서 그대로 춘자를 찾아서 집에 보냈을 뿐이에요. 문자도 보냈는데, 못 받으셨나요?”

라고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을 가장할 것도 없이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로.

정말 그건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후배가 흡혈귀든 뭐든, 그건 정말 아무래도 좋다.

“음, 그 문자라면 받았지. 그래서 따로 다른 이들도 걱정을 하진 않았던 것이고. 시우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그 말에는 절로 송구스러워지지만, 수척해진 얼굴로도 살포시 나를 바라보며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효연 누님의 눈길에 못 이겨 애써 나는 미소 지었다.

역시… 이대로 효연 누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있다. 춘자와는 무슨 관계인가. 춘자를 맡긴 아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일일이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캐물을 것이 아니었다.

그래. 효연 누님이 먼저 내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남을 배려할 줄 안다면 개인사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법. 나는 현대인의 매너에 충실한 남자다.

누님은 여전히 내게 몸을 기댄 채로 으음 하고 신음하더니.

“으음. 그래, 그렇군.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지.”

그리 납득해주셨다.

그렇게 해서, 어쨌거나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효연 누님에게 여긴 남자 탈의실이라고 잔소리하며 대충 누님을 갈아입히고서는 밖으로 내보내고.

나 또한 옷을 갈아입고 중앙홀로 나가자마자.

“아.”

“어.”

마침 출근한 춘자와 맞닥뜨렸다.

홀 한 가운데에서 지금 막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 백색의 원피스 차림에, 머리에는 커다란 챙을 쓰고 있는 백금색의 소녀가 휘둥그레 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저, 그게…. 오,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어딘가 주뼛 주뼛 어색한 몸동작으로 쏜살같이 휴게실 너머로 사라지는 춘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낯설다면 착각일까.

그 뒤로 진행된 업무.

나는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고 온 춘자에게 OJT를 시작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평소처럼.

우리 레스토랑에서 실시하는 OJT 기간은 약 한 달가량.

대강이라고는 해도 그 한 달 사이에 레스토랑의 전반적인 업무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레스토랑 업무를 하면서 춘자에게 OJT를 하는 동안에도 춘자와 나는 마치 서로의 동태를 살피듯,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채로 어색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춘자쪽이 내 안색을 살피며 주뼛거리는 가운데 어딘가 의심하는 태도로, 그러니까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행동 구석구석에서 “선배, 진짜, 진짜루 구마국에 신고 안할 거죠?” 하고 무언의 압박을 가해오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어색한 몸동작 투성이였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실로 성가시기 짝이 없을 뿐이지만, 주변에서는 오히려 이게 어떻게 비춰진 건지, 우리의 그런 어색한 모습을 볼 때마다 흐뭇하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것이, 역시나 오해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개탄스럽기 짝이 없구나. 뭐든지 연애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작금의 풍조라니.

게다가 거기에 정점을 찍어주시는 분이 계셨으니.

잠깐 춘자에게 따로 일을 지시하고 나 또한 내가 할 일을 위해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역시 수상해.”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반 바퀴 회전, 그곳엔 실로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마치 코앞에서 신묘한 마술로 범죄를 저지른 세계적인 괴도를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명탐정 같은 얼굴로 나를 있는 힘껏 바라보고 있는 녀석이 있었으니.

다시 한 번 “수상해.”라는 목소리에 따라 뒤통수에서 길쭉하니 내려와 있는 말총머리가 뿅뿅 움직이는 게, 오히려 이쪽이 더 수상하지 않아? 구조라던가. 비밀장치 같은 게 있다던가? 하는 의문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여자아이.

다름 아닌

“지현이냐.”

우리 레스토랑 ‘랑’의 유일한 여대생 아르바이트생. 오지현 양이었다.

“수상해요.”

또 다시 그 소리, 눈앞에서 목격한 사건의 범인에 대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범죄를 추궁하지 못하는 형사처럼. 지현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상하다니, 뭐가.”

“그도 그럴게. 수상하잖아요. 오빠!”

이번엔 난데없이 불쑥 소리 지르기까지. 그러니까 뭐? 아까부터 수상수상, 같은 말만 반복하고. 미안하지만 내게 장차 국가의 수상이라거나 그런 높으신 분이 될 예정 같은 건 없는데. 내 장래희망은 쉐프라고.

“엑! 아저씨 개그! 군바리 센스 구려!”

코앞에서 여대생에게 센스가 구리다는 소리를 들었다. 살짝 마음에 상처. 이래봬도 전역한지 5개월 넘었다고….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보는 쪽이 기분 나빠질 정도로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였던 시우 오빠랑 춘자인데!”

……지현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니. 순간 가슴이 착잡해졌지만.

“그보다 말이죠! 출근한 다음부터 지금까지의 그,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 그래요! 그것은 마치 어쩌다가 청춘남녀가 한 때의 불장난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고! 막상 두 남녀가 다음날 일어나보니 흥분이 가신 다음 서로 얼굴 마주치기가 어색해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그대로 지현이의 말총머리를 잡아 댕겼다. 아, 아아! 아, 아파요! 오빠! 하고 외치는 지현이었지만 놓아줄까 보냐. 대체 못하는 말이 없어요. 이 녀석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아, 아야! 에에에이잇! 부조리한 폭력에도 난 굴복하지 않아! 오히려 오빠가 이런 반응이니까 더 의심스러운데요?! 사건의 냄새가 풍긴다아앗!”

사회의 부당한 폭력에는 굴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대생의 길! 하고 외치는 지현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이 아가씨는. 게다가 지현이에게 있어 여대생이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시우 오빠! 설마 어젯밤 춘자를 뒤따라 사라진 다음에…!”

다음에?

“둘이서 남몰래 거사를 치뤘다던가?!”

뭐?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던가?!”

여대생 명탐정 오지현은 놓치지 않는다! 하고 외치는 지현이었지만, 이미 왕창 놓치고 있거든요. 전혀 명탐정이 아니라고. 뭐, 둘 만의 비밀이라면… 공유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전혀 아니라고.

하여간 요즘 세대의 풍조는 이런 식으로 뭔가 일만 있다하면 죄다 그렇고 그런 쪽으로 몰아가려는 바보들뿐이라. 아침 출근 당시 동료들의 반응이 미묘하게 히죽거리는 것들도 전부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탓이겠지.

그러니까 그런 일은 없었다고.

“거짓말! 이 맛은 거짓말을 하는 맛이야! 솔직히 저렇게 이-쁘은 외국인 여자애의 뒤를 따라간 주제에! 그래놓고 복귀도 안한 주제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어! 오히려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지! 나라도 덮쳤을 테니까?! 분명 둘 사이에는 하룻밤 만에 만리장성이! 거대하아아안! 대따시이이이만한! 만리장성이!”

양 두 손으로 무언가를 주물럭거리듯, 징그럽게 손가락을 연체동물마냥 흐느적거리는 지현이를 보며 진심으로 질려버렸다. 여대생의 머릿속이란 원래부터 이렇게 변태스럽기 짝이 없는 걸까.

“만리장성은 여기가 아니라 옆집 중국집에서 찾으라고.”

역시 구려! 하고 반발을 듣긴 했지만, 애당초 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만리장성이 나았을 거란 말이지….”

나는 춘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현이의 말도 안 되는 오해는 차치하고서라도, 확실히 어제 이후로 나와 춘자의 관계가 어색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남들이 봐도 확실히 눈에 들어올 정도로.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지현이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날 당일에 하소연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 흥분이 식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거겠지. 지금 춘자의 태도는.

그러다보니 지현이가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는 않지. 그건 단순히 지현이 머릿속이 분홍빛이라 그런 것뿐이고. 게다가 자기라도 덮쳤을 거라니. 남 앞에서 그런 말을 당당히 입에 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당연하죠! 전 오빠 앞에서만 이런다구요!”

“예이. 예이.”

어쨌거나 머릿속이 축제 분위기인 지현이의 꽁지머리를 적당히 당겨서 흥분도 MAX를 찍은 여대생 씨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이후로도 춘자와 내가 미묘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마다 더욱이 지현이는 두 눈동자를 마치 유명한 명탐정 토끼가 사건의 범인을 발견했을 때처럼 번쩍이며 “수상해, 더욱 수상해! 여대생 탐정은 깨달았다! 사건의 진실을! 사건의 답은 하나!”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지를 않나. 여러모로 곤란한 녀석이다. ……일단은 현역 여대생인데.


뭐, 그래도 결국 시간은 흐르는 법이고. 근무시간도 절반 이상이 지나. 마침 두 번째 휴식타임이 돌아왔을 때였다.

“지현아, 춘자 못 봤어?”

근무조와 교대하면서 제복 위로 걸친 앞치마를 잘 개켜 품에 안아들며 묻자.

“역시!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찐한 관계에 있는 그녀부터 찾는 태도! 아욱! 아욱! 아욱!”

그녀부터…까지 말한 시점에서 이마에 촙을 날렸다. 촙촙. 그 못 된 입 다물지 못할까.

“바, 방금 문 앞에 빗자루 질 하러 갔어…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답하는 지현이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나는 그대로 춘자를 찾기 위해 매장을 나섰다. 업무 시간 동안에는 착실히 OJT를 실시했으니.

본론은 지금부터다.

춘자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어도 그뿐. 나는 춘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보다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다.

물론 자세한 개인사까지는 파고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어제 춘자가 했던 말이 귀에 아른거리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서울이란 말이죠. 서울이란 흡혈귀들에게 있어 지옥 같은 도시라구요!


루마니아 브라쇼브에서 한국까지 홀로 찾아온 외국인 흡혈귀, 사실 그 정체가 흡혈귀든 뭐든 그건 상관없다. 내가 효연 누님으로부터 부탁 받은 임무는 춘자에게 OJT를 실시하는 것. 그러니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에도 나는 착실히 춘자를 가르칠 것이고.

지금 춘자에게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들으려는 것도, 어디까지나 OJT 담당을 맡은 선배로써 보다 확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함일 뿐이다.

서울이란 흡혈귀에게 있어 지옥 같은 도시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그 뒤에 춘자가 열성적으로 토해낸 부연설명을 듣고 보니 확실히 춘자가 서울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건 큰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은 게 사실.

그렇다면 춘자가 찾아온 곳이 왜 하필 서울인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효연 누님을 찾아온 것일까. 그런 사소한 의문들이 들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간섭할 이유도 없고, 간섭해서도 안 되는 개인 프라이버시라는 거겠지.

난 단지 선배로써 춘자가 좀 더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것이 선배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역시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저번에 언급했던 ‘피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설마하니 흡혈귀가 등장하는 만화라면 으레 뒤따라 등장하기 마련인 흡혈귀 사냥꾼이라던가, 기독교 퇴마조직이라던가 그런 비현실적인 단어가 달라붙는 건 아니겠지.

긴눙가가프의 마녀인지, 뭔지만으로도 충분히 내 메모리 한도 초과인데 말이야.

그렇게 지현이의 말을 듣고 춘자를 찾기 위해 레스토랑 문을 열고 나와 봤지만, 정작 문 앞을 쓸고 있어야 할 춘자가 보이지를 않았다. 하늘에는 햇볕이 쨍쨍. 모래알…은 없고, 대신에 아스팔트가 반짝거리고 있는, 인간 입장에서 본다면 실로 바깥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지만.

반대로 흡혈귀에게 있어서는 지옥 같은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청량감을 어필하고 있는 지금.

재빨리 문 앞을 쓸고 들어와도 부족한 마당에 춘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때 마침 어디선가 “냐아앙……”하는 힘없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생각에 내가 우리 레스토랑 뒤쪽, 그러니까 쓰레기와 함께 재활용 분리수거대가 놓여있는 뒷문 쪽으로 돌아가자.

“아.”

그곳에 바로 춘자가 있었다.

내게는 등을 보인 채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우리 레스토랑 ‘랑’의 제복. 적갈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가 가진 타이트한 핏 덕에 춘자의 가느다락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보인다.

아니, 아니지. 지금은 어딘가 가녀리지만 보호욕구를 자극하는 춘자의 아리따운 뒤태가 문제가 아니다.

춘자의 어깨 너머, 그러니까 레스토랑 뒷문에 놓여있는 담벼락 위에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 앞발로 자기 엉덩이를 매만지는 포즈라는,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양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서는 다시 한 번 “냐오오옹….” 애달프게 울면서 춘자에게 자기 몸을 공양하고 있었다.

“미안해…. ‘제임스 씨’. 하지만 반드시 이 은혜에는 보답을 할게. 당신의 피 한 입으로 나는 더욱더 마력을 키워서, 반드시 멋진 흡혈귀로 성장하겠어!”

고양이의 헌신에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장래를 다짐하는 흡혈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다름 아닌 내 아르바이트 후배였지만.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살기 위해 고양이의 엉덩이를 깨무는 춘자의 실체였던가. 순간 말을 잊었다. 그 정도로 초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기. 춘자 너.”

내가 부른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일까.

“냐웅?!”

고양이…그러니까 제임스 씨의 엉덩이를 깨문 채로 춘자가 화들짝 놀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냐우오아우아웅?!”

“일단 입 좀 떼고 말해.”

“푸하! 무, 무,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고 자시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와 보기 좋게 분류 되어있는 재활용 쓰레기까지. 말하자면 쓰레기장, 보통 매장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가져다 둘 때 말고는 찾을 일이 없는 이곳에서 춘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나의 추궁이 방아쇠가 되었던 걸까. 순식간에 춘자의 양 눈가에 눈물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흐어어어엉!”

대성통곡 스타트.

“추, 춘자야?”

“흐아아앙, 흐앙. 저…, 흐윽, 히끅…. 점…심, 흐앙, 배가…, 흐아아아앙! 고…파서! 히…끅! 흐끅…!”

간신히 춘자의 등을 쓸어주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배가 고파서 길냥이에게 부탁했다고?”

“히끅. 네, 네에…. 저, 어제 저녁에 먹은 게 마지막이라서, 원…래 점심은 이렇게, 그, 주변 길냥이 씨들에게 부탁하고 있어서…”

저번에도 말했던 그것인가 보다.

아, 과연. 가끔 점심때 기운이 없어 비척거리다가도 휴식시간만 끝나면 쌩쌩해져서 돌아오는 건 그 때문이었나. 사소한 의문이 풀린 건 둘째치고서라도.

방금까지 춘자가 입에 물고 있던 고양이는 내가 나타나자 쪼르르 도망쳐버렸고, 춘자는 그저 좌절한 기색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을 따름.

나는 조심스레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나의 후배를 바라보았다. 꼬르르륵 하고 허기를 호소하는 자기 배꼽 시계 소리에 더욱 서러워진 건지 흑흑 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하는 춘자를 바라보면서.

하는 수 없지.

결심한 나는 소매를 걷어서 팔을 내주었다.

“……선배?”

“딱 한 입이야. 그 이상하면 내 쪽이 곤란해. 애당초 성인 남성의 평균 전혈 헌혈양은 2개월 간격으로 400ml 정도니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500ml까지는 괜찮다던데. 그 이상 넘어가면 위험하다더라. 그러니까 딱 한 입만 먹는다는 생각으로 빨아.”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사라락하고 내가 내민 맨팔 위를 쓸고 지나간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춘자는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저, 정말 빨아도 되요?”

“그래.”

후배가 배고파하고 있다. 일반적인 음식으로는 배고픔을 채울 수 없다니. 식욕이란 말하자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3대 욕구중 하나다. 물론 흡혈귀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고픔을 참는 것이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나의 후배. 후배가 배고파서 괴로워하고 있고, 내게 그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줄 수단이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잖아.

내 생명이 위험하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면 되니까. 그것이 후배를 위해 선배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정말 내 피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진짜 배를 채우는 건 나중에 따로, 피란 예로부터 좋은 먹거리로 활용되는 재료고 실제로 외국에서는 피를 가공해 소시지나 푸딩을 만들기도 하니까. 섭취할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 단적으로 말해 선짓국도 좋은 수단이고.

“이, 이번엔 도움을 받겠지만. 저는 이 한 입을 발판으로 도약을 꿈꿀 테니까! 제가 패배를 인정했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애당초 인간들은 흡혈귀의 식량이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주뼛주뼛 내게 다가온 춘자.

흡혈행위. 흡혈귀에게 있어서는 살기 위해 당연한 섭식 행위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인생에 처음으로 해보는 경험이다. 내가 내민 팔뚝 위로 천천히 입가를 가져다 대는 나의 후배, 춘자를 바라보며 문득 ‘그러고 보니 헌혈을 한지도 제법 오래됐구나.’ 하는 아무래도 좋을 생각이 드는 가운데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향내는, 으음. 향내라기보다는 냄새. 그것도 샴푸라기 보단 비누, 특히나 이건 빨래비누의 냄새일까. 톡 쏘는 자극적인 냄새가 어쩐지 익숙한 것이, 손빨래 할 때마다 맡아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아무래도 좋을 생각들이 두서없이 마구 떠오르는 와중에.

“그, 그럼, 시, 실례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채 되기 전에 먼저

“앙.”

하고 후배가 내 팔을 깨물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팔뚝을 스치운다. 백금색의 소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딘가 달뜬 얼굴로, 새하얀 얼굴 위로 살그머니 홍조가 어린 얼굴로 내 팔에 입술을 대고 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어오르는 열락에 가까운 감각.

몸에 몸살기가 돌 때처럼 어딘지 모르게 흐릿하게 붕 뜨는 느낌이 전신을 간질인다. 앙 다문 입술 사이로 빛나는 것은 흡혈귀의 특징적인 그것, 송곳니인 것일까. 순간 흡혈귀에게 물린 이는 또한 흡혈귀가 된다는 전설이 생각났지만.

‘상관없으려나…….’

평소에도 춘자가 고양이를 깨물고 다닌다는 걸 생각하니,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간질간질한 감촉, 홍조를 띈 얼굴로 어딘가 필사적으로 내 팔을 깨물고 있는 소녀.

“응, 읏, 으응…….”

첫눈이 내린 듯 백색으로 물든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춘자는 힘겹게, 무언가를 견디듯 내 피를 빨고 있었다.

춘자가 참고 있는 것이 ‘쾌감’이라는 것을 눈치 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름 아닌 내 쪽에서도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이 슬금슬금 성적인 쾌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연인이 사랑의 확인을 위해 서로의 몸을 애무하듯. 열락에 취해 서로의 육체를 탐해가듯. 그러고 보면 인터넷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흡혈귀들의 흡혈행위란 말하자면 동족을 늘리기 위한 의식이고, 또한 육체적 쾌락을 주기도 하는 일종의 성교와 비슷한 행위라고.

몸을 움찔거리면서 뜨거운 호흡을 토해내며 피를 빠는 춘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낯 뜨거워지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헌혈을 할 때처럼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춘자가 내 팔에서 입을 떼었다.

“……하아.”

소녀의 입가에서 열락에 가득 찬 뜨거운 숨결이 내뱉어진다. 벌겋게 물든 얼굴, 어딘가 흐리멍덩한 얼굴이 하아. 하아. 하아. 하고 뜨거운 호흡을 계속하며 게슴츠레하니 뜬 눈동자가 조심스레 나를 올려다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와는 다른 흡혈귀다운 춘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동요하고야 만 것이다.

주르륵. 미처 채 처리하지 못한 핏방울이 팔뚝을 타고 흘러 떨어지려한다.

“앗.”

그것이 아까운 듯 서둘러 분홍빛의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을 열어 할짝. 하고 핏방울을 핥는 백금색의 소녀.

살짝 망설이는 기색이 어린 동작으로 아쉬운 듯 내 팔을 바라보던 춘자는 이내

“끝…났어요.”

라는 말과 함께 슬그머니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색한 침묵.

내가 걷었던 옷의 소매를 내리며 제복을 매만지는 사이, 춘자와 나 사이에는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지 않은 채로, 어딘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흡혈 행위가 이토록 에로틱할 줄은 몰랐다. 완전히 예상 밖. 단순히 후배의 급한 불을 꺼주기 위해서 했던 봉사이다만, 이래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된 것은 아닐까. 그보다 급한 불을 꺼준다고 말하니까 엄청 선정적인 의미로 들려오는데…….

그렇게 우리가 어색한 공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시우 오-빠!”

빼꼼히 분리수거장 모퉁이에서 지현이가 등장했다.

“지, 지현아?”

“지현 서, 선배?”

어색한 분위기 속에 춘자와 나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런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 탓일까. 서둘러 나를 찾아왔을 지현이가 어쩐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우리를 바라보며 수상하다는 듯 눈동자를 번쩍거렸다.

“뭐야, 두 사람. 수상해. 수상한데.”

팔짱을 끼고서는 포니테일의 여대생 오지현 양은 마치 사건 현장을 목격한 명탐정처럼, 지금이라도 곧장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놈이 범인이다! 하고 외칠 것 같은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리는가 싶더니

“그래! 알았다!”

번쩍 두 눈동자가 빛이 났다.

“알긴 뭘 알았다는 거야?”

내 딴죽에 아하하 웃어 보인 지현이는 양손의 검지로 나와 춘자를 가리키고서는 기세 좋게

“설마하고는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도 설마는 계속해서 사람을 잡아왔지! 알았어요! 시우 오빠! 나도 오빠의 대범한 행동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겠는 걸요! 설마 휴식시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나의 그녀인 춘자와 이런 으슥한 장소에서 해, 해, 해.”

해?

행위를 벌이다니! 대담해! 대담하기에 오히려 그 누구도 상식적으로 예상치 못한 완전 범죄! 게다가 이제 막 깊은 관계가 되었을 뿐인 두 남녀가 갑작스레 하드한 야외 플레이라니! 아마 나 같이 유능한 명탐정이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거야! 이번 수수께끼는 영원토록 오리무중, 미궁의 라비린토스였겠지요!”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미궁의 라비린토스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진짜 무슨 소리야?

게다가 행위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나 알고 있는 거냐. 아니, 해설은 필요 없지만. 사실 무슨 뜻인지도 알 것 같고, 방금 전의 분위기로는 영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더 가슴이 아프다만.

이 와중에 유일하게 춘자만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야! 그래도 놀라버렸어요! 시우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짐승남이었을 줄………!”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서 꽁지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욱!”

꾹꾹 잡아당겼다.

“아욱! 아욱! 아욱!”

제지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게 지현이의 무서운 점이었다.

그보다

“나 찾은 거 아니었어? 무슨 일이야?”

어느 정도 지현이를 진정시키고 그리 되묻자, 아차! 하는 표정을 지현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레스토랑에 선배를 찾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찾아와? 누가?

이런 반문에 방금까지의 폭주가 거짓말이라는 듯이 이히히 하고 낮고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린 여대생 씨는

“그야 당연히…!”

나의 또 다른 후배의 방문을 알렸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놓여있는 테이블 한쪽에서, 나의 후배가 우아한 자태로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창가에서 흘러드는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흑색의 머리칼, 일자로 가지런히 정리한 앞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은 빈틈이 없어 자칫 차가워보일지도 모르지만, 입가에 떠올린 희미한 미소가 차갑다기보다는 깔끔하다는 인상을 준다.

주말이다 보니 복장은 당연히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 장식이 적은 상의와 무릎까지 오는 단색의 치마차림. 거기에 봄용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마치 양갓집 규수 같다.

허리까지 오는 흑발을 쓸어 넘기며 아메리카노의 그윽한 향기를 즐기고 있는 소녀.

나의 후배이자 레스토랑 ‘랑’의 오너인 연효연 누님의 동생인 연효요다.

“꺄아아아! 효요야! 오랜만! 보고 싶었어!”

“네. 지현 언니. 저도 보고 싶었어요.”

지현이가 두 눈동자를 빛내며 달려들자. 효요는 살짝 웃으면서 앉아 있는 채로 그 손길을 피한다는 기예를 선보였다. 원투, 원투, 잽. 요리조리 피하는 게 보통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지현이는 오히려 자기 손길을 피하는 효요의 모습에 양 손가락을 흐느적거리면서 “오오옷! 호승심을 자극한다! 반드시 만지겠어!”라고, 상식인 기준에서 상당히 아웃이 아닐까. 싶은 말을 해대면서 다시 한 번 돌진…하려다가 “오지현! 근무 중에 이탈하지 마!” 라는 소리에 히끅 놀라더니 우는 얼굴로 다른 직원에게 붙들려 퇴장.

그렇게 한 차례 해프닝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나는 효요 앞에 앉았다.

“선배,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야. 거의 한 달만인가?”

고등학교 자퇴 이후, 효요와 매일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적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의 공백은 유난히 길었다. 뭐,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효요와 일을 하느라 바쁜 내가 딱히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동안 6월 모의고사를 준비했거든. 학업은 중요하니까.”

딸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효요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6월 모의고사라, 그 단어야말로 오랜만에 듣는 구나. 그립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생각해보니 벌써 6월이구나. 시간이 참 빠르다. 춘자가 우리 레스토랑에 들어 온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는 소리니까.

“뭐, 누구누구 씨와는 달리 학업에 열중이라서 말이야. 이번에는 제법 좋은 성적을 받아낼 자신도 있어.”

쿡쿡 웃으며 말하는 효요의 말에

“6월 모의고사가 수능 점수라는 소리도 있었지? 자기 실력을 체크해볼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해.”

사심 없이 응원. 특히나 여기서 막간 토막상식. 고등학생 시절 6월, 9월에 치뤄지는 모의고사는 수능 출제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직접 주관하는 시험이기에 다른 시험보다도 유독 중요하다. 이상.

“…쳇.”

내 막간 토막상식 어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효요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며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뭐. 좋아. 그래서 말인데. 선배……?”

다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말문을 열기 시작한 효요의 시선이 마침 내 뒤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내 뒤 레스토랑의 문가에 주뼛거리면서 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여자아이, 춘자에게로.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효요는 거의 한달 간을 레스토랑에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아직 모르고 있겠지.

“아참, 효요는 아직 모르겠네. 이쪽은 김춘자. 한달 정도 전부터 우리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신입 아르바이트생이야. 그리고 춘자야. 이쪽은 우리 레스토랑의 오너 연효연 누님의 친동생 연효요. 서로 인사해.”

내 소개에 춘자는 어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였지만.

“응?”

효요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심상치 않은 표정, 어딘지 굳은 얼굴로 춘자를 바라보는, 그보다 노려본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선으로 춘자를 쏘아보던 효요는

“…어째서? ‘저런 게’ 여기에?”

“효요야?”

덜컹 하고 의자를 박차고 효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선배, 언니하고 이야기하고 올게.”

효요는 허리 언저리까지 오는 흑발을 흩날리며 성큼성큼 오너 사무실이 있는 윗 층으로 올라가버리고야 말았다.



잠시 뒤.

2층에서 내려온 효요가 어찌된 일인지 나를 매장 구석으로 불러냈다.

“무슨 일이야?”

“선배. 내가 충고 하나 해줄게.”

충고?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 효요는

“저 여자애랑은 엮이지 마.”

효요가 가리킨 손가락은 정확하게 구석 테이블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춘자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 엮이지 말라고 해도.

“이미 난 춘자 OJT 담당이야, 이제 와서 엮이지 말라고 해도 무리고.”

어째서 그게 충고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 경우에서 중요한 건 효요가 어째서 이런 ‘충고’를 해줄 수 있는지가 되겠지.

이런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효요는 얼굴을 찌푸리며, 뭐, 찌푸린다고 해도 아미에 주름이 가는 정도로 내 입장에서 보면 귀여운 투정 같은 걸로만 보였지만, 효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하지만 선배, 저 녀석은……!”

턱하니 효요의 말이 멈춘다.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무언가를 전하고는 싶은데 그걸 전할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는 듯, 웅얼거리기만 하는 나의 후배를 바라보면서 나는 말했다.

효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흡혈귀라는 거지?”


“어…?”

알고 있…는 거야? 라고 되묻는 효요의 말.

“물론 알고 있어. 오히려 선배로써 한 달이나 돌봐줬는데 모르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일반적인 상식인 기준에서 말이지. 그 정도로 나는 흡혈귀에요! 하고 어필하고 있는 녀석을 상대로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또 차원이 다른 영역이 아닐까. 만화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둔감한 주인공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이 경우엔 도리어

“효요가 춘자를 보자마자 어떻게 ‘흡혈귀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궁금한걸.”

내 말이 방아쇠가 된 것일까. 효요의 얼굴이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굳어버렸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새하얀 백짓장처럼 변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는 나의 후배.

“그, 건…….”

양 손가락을 맞대고 우물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후배, 효요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추궁할 의도는 없었는데. 그러니까.

턱하니 효요의 머리에 손을 올린다.

“선, 배?”

“효요가, 그리고 효연 누님이 나에게 무얼 숨기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아니,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경 쓰지 않을게.”

“선……배.”

하지만

“춘자는 평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 후배야. 내가 담당하고 있는 신입 아르바이트생. 그러니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어. 효연 누님도 날 믿기에 맡겨준다고 말했었고.”

솔직히 그 이면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 왜 하필 춘자를 내게 맡긴 건지 궁금한 건 잔뜩 있지만.

“지금은 그냥 선배로써 가르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건 이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춘자와 엮이지 않을 수는 없다.

“춘자는 내 후배야. 효요, 너와 마찬가지로 나의 소중한 후배.”

비록 그것이 효연 누님이 무언가 술수를 부려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해도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한다. 그것이 날 믿어준 효연 누님의 배려라면 더욱 더 내버려둘 수 없다. 그것은 나 ‘박시우’의 신념이라고.

잠시 효요에게서 말이 없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꾹 참듯 몸을 떨던 효요는 이내

“……알았어. 그래. 선배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지. 깜빡하고 있었어.”

치켜뜬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시원스레 말했다. 그러고는 살짝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미안하다는 듯

“속이고 있었던 건 사과할게. 하지만 자세한 건, 아직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 누님도 그렇고 너도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 무리해서 뭔가를 말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

애당초 춘자는 ‘피신’을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건 아니지만, 그건 내가 파고들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무언가 복잡미묘한 문제가 산재해 있는 것이겠지.

어쨌든 간에 나와 효요는 그것으로 심각한 대화는 마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잘 부탁해. 김춘자라고 했지? 내 이름은 연효요. 효연 언니 동생이야.”

“아, 아, 넷. 아, 안녕하세요. 루마니아 브라쇼브에서 온 김춘자라고 합니다.”

서로 꾸벅.

이것으로 어떻게든 통성명은 마친 것인가. 하고 한 차례 고비를 넘긴 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효요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이런 말을 해왔다.

“그건 그렇고 선배, 이번 6월 6일에 무슨 볼일 있어?”

볼일?

“맞다. 6월 6일이면 레스토랑 정기휴일이었지. 음, 딱히 볼일은 없는데?”

6월 6일. 현충일. 참고로 우리 레스토랑 ‘랑’은 이런 식으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는 날은 전부 정기휴일로 정해져있다. 마침 쉬는 날이라고 해도 별로 할 일은 없다. 집에서 레시피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 보거나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하는 정도겠지.

이런 내 말을 들은 효요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래? 선배. 참고로 난 모의고사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6월 6일에 남자친구랑 놀이공원에 놀러가기로 했어. 에버랜드로 말이야.”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에버랜드. 학교에서도 곧잘 소풍 가기로 유명한 국내 굴지의 놀이공원 시설. 확실히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가기엔 나쁘지 않은 장소다. 집에서 멍하니 지낸다고 말한 나에 비하면 확실히 보람찬 시간이 되겠지. 특히나 고3이라면 흐지부지해지기 쉬운 연인관계를 한층 더 돈독히 하기 위해서라면 실로 적절한 장소선택이 아닐 수 없다.

가슴이 두근콩닥 뛰는 롤러코스터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두 연인은 각종 놀이기구로 서서히 거리감을 좁혀갈 테고 그런 와중에 유령의 집 같은 데서는 꺄악! 안기는 이벤트. 찻잔이 빙글빙글 돌며 서로를 향해 보내는 그윽한 눈빛. 덧붙여 최후에는 회전목마 같은 로맨틱한 놀이기구로 화룡점정. 빈틈이 없다. 공부에도 열심이지만 노는 것도 충실하게. 매사에 허투루 하는 법 없는 효요다운 데이트 코스다.

슬쩍 한쪽 눈을 뜬 채로 내 기색을 살피는 효요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 재밌겠네. 부디 잘 놀다와. 기념품 기대할게.”

“……그래. 보란 듯이 잘 놀다올 거야. 남친이랑 러브러브해줄 테니까.”

이를 갈며 말하는 효요의 귀여운 행동에 슬며시 웃는데


“뭐? 놀이공원?!”


갑작스러운 습격자가 등장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들은 건지 시야 한구석에서 지현이가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채로. 주방 구석에서 “선배! 지현이가 또 탈주했어요!”, “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이 녀석 또 설거지하다가 도망쳐 나왔군.

“삐빅! 촉이 왔습니다. 촉이 왔어요!”

촉은 무슨, 그보다 일을 하라고. 이 녀석.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바이트생 입장에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 생각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연애사 관련 이야기가 여대생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라구요!” 하고 외칠 뿐인 지현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거에 흥미진진할 시간에 일을 하라고 이 녀석. 어찌되었건 효요랑 춘자도 그런 지현이의 등장에 당황한 모양인지.

“지현 언니?”

하고 부르는 효요의 말에 지현이는 양손에서 세제 거품을 휘날리면서도 꿋꿋하게

“칫칫! Yes! I am!” 하고 외쳤다. 아니, 진짜 의미를 모르겠거든……. 우리들이 당황하든 말든 지현이는 척하니 춘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춘자는 혹시 놀이공원 가본 적 있어?”

“놀…이공원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금색의 소녀는 오히려 반대로 “놀이공원이 뭔가요?”하고 실로 의문스럽다는 듯이 반문.

여기에는 아무리 지현이라고 할지라도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회복했다.

“봐봐요! 시우 오빠! 춘자는 놀이공원이 뭔지도 모른다고요!”

그야, 음, 춘자는 루마니아 브라쇼브 출신의 흡혈귀니까. 저번에는 자신을 촌뜨기라고도 설명했던가, 확실히 모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실제로 국내에 놀이공원 같은 테마파크가 있는 나라가 그리 많은 건 아닌 모양이고.

“자! 그럼 이럴 때는 역시 오빠가 선배로써 나서야죠!”

“나?”

“네! 이번 휴일에 시우 오빠가 춘자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면 되는 거죠!”

춘자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내 반문과 함께 네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춘자. 그리고

“자, 자, 자, 잠깐! 잠깐만! 지현 언니?!”

효요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덜컹덜컹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런 효요는 그야말로 깨끗하게 무시하면서

“자, 춘자도 괜찮지? 시우 오빠랑 놀이공원에 가는 거. 어차피 휴일에 할 일도 없잖아? 재밌을 거라고?”

“아…네. 저야, 상관은 없지만. 그…놀이공원이라는 게 뭔가요?”

“놀이공원은 말이지.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곳이야!”

“…네?”

지현이의 지리멸렬한 설명에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는 춘자였다. 일단은 내가 나서서 설명해주었다. 놀이공원, 혹은 테마파크라고 부르는 장소가 있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어트랙션을 타면서 시간을 죽인다거나, 솔직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들어봤자 알 수 없는 이야기일 테고, 실제로 춘자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공휴일이니까 아마 사람도 많겠지.” 라는 내 말에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인파는 좀 힘들어서.”

“응? 그래?”

지현이는 처음 듣는다는 듯 반문했지만 어쩐지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춘자는 흡혈귀.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서울 내에서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녀석이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마늘이나 기타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식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사람이 있는 곳은 체취라거나,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하던가.

기본적으로 인파에 약한 녀석인 것이다.

“그래도 놀이공원 같은 곳은 한 번쯤 가볼만한데 말이야. 기왕 한국에 놀러온 거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나랑 선배가 같이 가주니까! 괜찮지 않을까!”

어느샌가 멋대로 나까지 가기로 이미 결정된 모양이다. 그런 지현이의 막무가내 같은 말에도 춘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면서

“선배가 함께라면, 네…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라는 의미겠지만, 뭐, 선배로써 후배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고, 나도 그때는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같이 가는 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런 가운데 유일하게 괜찮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잠! 깐! 만! 요! 지현 언니! 저 좀 봐요!”

효요는 그대로 지현이를 이끌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이윽고


“잠깐, 왜 방해하는 거에요. 지현 언니?!”

“그게,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는 게 괴로워서. 솔직히 효요의 그 방법은 이제 틀렸다고 할지, 글러먹었다고나 할지. 시우 오빠는 절대로 반응 안 할 거라구?”

“익…! 그, 그래도!”

“게다가 아무 생각 없는 게 아니야! 이 언니는 말이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명 연애도사라고 불리는 몸이시라고! 내가 보기에 효요랑 시우 오빠 사이에 필요한 건 낯설음이야!”

“낯, 설음?”

“그래!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너무 친숙해진 나머지. 시우 오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서로가 가만히 있는 게 당연해져버린 거지! 그래서는 생겨야 할 연애감정도 생기지 않아! 이 경우엔 아예 새로운 등장인물을 집어넣는 것으로, 아, 그 아이라면 이럴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라고 어시스트를 한다던가? 어라? 그런 방법으로 진짜 될까?”

“언니가 궁금해 하면 어떡해요!”

“하여간! 이 연애도사 오지현만 믿어! 난 연애엔 엄청나게 관심 많은 여대생이니까! 이런 거 페이스북에서도 많이 봤었다고!”

“……그게 못 믿겠다는 건데….”

“괜찮아. 괜찮아!”

“그럼. 좋아요. 저도 따라가겠어요.”

“아니, 그건 안 돼. 이미 효요는 남친이랑 놀러가기로 한 ‘설정’이잖아?”

“크, 크으으…….”

“이 언니만 믿어! 놀이공원에서 계속 자리에 없는 효요의 매력은 어필해줄 테니까!”

“이건, 무언가 아닌 거 같은 느낌이…….”


결국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소곤거리는 대화를 마치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 그렇게 해서. 시우 오빠와 춘자. 모두 이번 6월 6일 일정은 꼭 비워두도록!”

“뭐, 상관없지.”

내가 바라본 춘자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약속은 잡혔다.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계책이 잘 맞아떨어진 것에 흡족해하시는 책사 오지현 양이셨지만. 이 자리에 유일하게 효요만이 이건 역시 무언가 아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야.

그래.

놀이공원이란 말이지.

가본지도 오래됐구나.



어느덧 찾아온 6월.

계절은 봄을 넘어 슬슬 여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약속한 날짜인 6월 6일의 아침 8시 정각. 나는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해놨던 장소인 건대입구 3번 출구 앞에 나와있었다.

웅성웅성.

건대입구 거리가 원채 복작복작거리는 곳이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휴일이라 그런지 지나치는 사람이나 자동차의 숫자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전부 어딘가로 놀러 가는 걸까. 오늘 우리가 가기로 한 장소는 놀이공원, 정확히 말하면 이곳 건대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잠실역에 있는 롯데월드다.

에버랜드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서울 중심에 있어 교통편이 편리하다는 장점도 있고 놀이기구도 즐길 거리가 제법 있는 나쁘지 않은 장소로, 한 번도 놀이공원에 가보지 못했다는 춘자에게는 적절한 곳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언제쯤 오려나.”

시계를 확인한다. 8시를 넘어서 8시 5분.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일은 처음이니 감은 안 잡히지만, 여자들은 원래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고 하던가. 뭐, 지현이의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기다리는 건 감수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까지 생각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카톡왔숑 하는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지현이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죄송해요. 오늘 약속 못지킬 것 같아요! 놀이공원에는 저 빼고 춘자랑 둘이서 갔다와주세요!]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지ㄱ, 2주 만에 아랫배에 신호가 와서! 도ㅐ히 나갈 여유가 업ㅂ어요!]

아….

[그래. 힘내라.]

[1ㅓㄷ아어라!]

그걸로 카톡 대화는 종료.

아르바이트 후배의 아랫배에 안녕이 깃들기를 기원하면서 나는 스마트폰을 닫았다.

난데없이 주최자가 빠진 격이지만,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랐다. 지현이는 춘자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차라리 나 혼자 있는 편이 대처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어쨌거나 좋아. 지현이는 나오지 못한다고 했고. 결국 남은 건 한 녀석인가.

나는 기다렸다. 직접 연락을 해보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춘자에게 전화를 한다해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춘자에게도 분명 스마트폰은 있었다. 효연 누님이 솔선해서 개통해주신 물건이라고 했던가. 다만 문제는 춘자 본인이 그런 기계류 전반을 다루는데 익숙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다른 건 다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카운터 포스기 앞에서만 죽을 쓰는 걸 보면 내가 전화를 건다 해도 수신이 가능한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게 약속 시간에서 10분 더 경과했을 쯤이었을까. 근처 광장 거리의 웅성거림이 유난히 커지기 시작했다.

만지작거리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한 곳에서 나는 찾을 수 있었다.

거기 있었다.

건대입구역 3번 출구 앞 광장. 딱히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춘자 녀석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있는지. 버스 정류장 바로 옆, 건대입구 3번 출구를 알리는 알림판 기둥 바로 아래에 그 녀석은 서 있었다.

6월 초순, 시기적으로는 아직 봄이라고도 하고, 슬슬 더위가 기승을 심술을 부리기도 시작하는 계절. 아마 조만간 장마가 찾아와 한바탕 물난리도 날 테지만, 6월 초순의 아침 8시에 불어오는 바람에는 아직까지는 봄 느낌이 물씬 풍기는 따사로운 바람 냄새가 짙게 배어있어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바람 속에 물빛 원피스는 나부꼈다.

어깨까지 오는 새하얀 백금색,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칼. 그 사이로 피어있는 한 떨기 꽃 같은 이목구비. 커다란 눈동자, 오똑한 코, 앵두 같은 입술. 아마 표현한다면 대강 그런 말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거기에 옷차림은 푸른 물빛을 기조로 한 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뻗어있는 팔다리는 햇볕 하나 받아본 적 없는 것처럼 새하얀 우윳빛을 자랑한다.

실제로 햇볕을 받아보지는 않았겠지. 흡혈귀에게 태양볕은 치명적이라고 하니까. 그러니 저 새하얀 색깔도 따지고 보면 전부다 자외선 차단크림의 색깔이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한낮에 밖에 나가려면 자외선 차단크림 한통은 써야한다고 투덜거렸었던 적이 있던가.

커다란 하양 양산을 걸친 채, 그런 아름다운 자태의 여자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상대가 '흡혈귀'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앗. 선배!"

마침 춘자도 나를 발견했는지 양산을 휘두르며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에 맞춰 춘자가 신고 있는 에나멜 구두가 따각 따각 시원스럽게 울린다.

"바, 방금 지현 선배가 친 전보 받으셨어요? 글쎄 지현 선배가…."

과연 카톡을 전보라고 표현하는 시점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시대착오 흡혈귀(촌뜨기)다. 그나마 용케 그건 확인하는데 성공했군.

"카톡이라면 받았어. 아랫배에서 장절한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던데."

그것은 흡사 적벽대전에 버금가는 화염과 창칼의 소용돌이와도 같을 것이다. 세상 모든 변비여성들에게 묵념.

"저, 그럼 어떡해야…."

"뭐, 둘이서 가도 상관없지 않아? 오히려 지현이가 없다면 정체 들킬 우려가 줄어서 괜찮겠지."

괜히 쓸데없는데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그편이 더 자유로운 건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그 옷은……."

"아, 이거 말이죠."

춘자는 양산을 든 채로 빙그르르 몸을 회전시켰다. 자연스레 입고 있던 물색 원피스가 움직임에 따라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린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cf에 등장하는 배우냐고 묻고 싶어질 정도다.

"어제 지현 선배가 골라준 거예요. 이 옷이면 반드시 격침시킬 수 있어! 라고 하던데. 놀이공원엔 쓰러트려야 할 적이라도 있는 건가요?"

미지의 공간에 대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춘자는 가히 신대륙에 대해 상상하는 콜럼버스와도 같은 위풍당당함을 자아냈다. 대체 이 녀석은 놀이공원에서 어떤 전투를 펼칠 생각인 걸까. 원투 원투 잽. 후방이동 돌진과 함께 멱살을 잡는다. 하고 중얼거리며 가상의 전투를 혼잣말로 재현하고 있는 춘자의 행태에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뭐, 상관없겠지. 일단 지하철을 탈까?"

참고로 나한테 차는 없다.



“지현이가 골라준 옷이라면 따로 사복은 없어?”

건대입구 3번 출구로 바로 들어가면 7호선이 나오는 만큼, 우리는 그쪽이 아닌 2호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대입구 2번 출구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변에서 시선이 마구 꽂히는 건 춘자가 흔치 않은 외국인 모습에, 옷차림까지 무슨 아이돌 같기 때문이겠지.

그게 어쨌다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이런 아리따운 후배를 대동하고 걷고 있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거리는 와중에 우리는 그런 대화를 시작했다.

“사복이라면, 따로 없어요.”

“그럼 평소에 입고 있는 옷은?”

“그건, 여기 오기 전에 마녀가 선택해준 옷인데요….”

마녀라. 생각해보니 춘자는 매번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고 있었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날 찾아왔을 때 입고 있던 그 옷 그대로.

그럼 결국 가지고 있는 사복은 그것뿐인 걸까.

평소 레스토랑 제복을 입고 생활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다. 으음.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외출한 거 돌아오는 길에 새로 옷이라도 사러가야 될까.

“마녀가 한국에 왔을 때 평범하게 인간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서는 꼭 입어야 한다고 해서 말이죠. 여자애는 꾸미는 거라고도 했었는데……, 방심할 수 없겠어요. 인간 여자들이 평소에도 보호색을 소홀히 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니.”

살풋 웃으면서 말하는 춘자의 말에 새삼 내 마음 속에서 마녀 이미지가 한 차례 갱신되었다.

긴눙가가프의 마녀라는 어감치고는 꽤나 서민파인 거 아닐까. 그 사람. 다만 그 의도가 춘자 본인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게 우리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섰다.

지하철 안에 들어갈 때. 춘자는 연신 우와. 하는 감탄을 흘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간혹 “던전 입구, 아니, 이 경우엔 카타콤…일까요.” 하고 중얼거리는 게, 나름 느끼는 바가 있는 걸까.

2호선 승차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내 굉음과 함께 들어오는 지하철의 소리를 듣고서 “핫? 적의 습격?!” 이라며 깜짝 놀라기도 하는 둥.

마침내 스크린도어 너머로 들어선 은색 광택이 도는 네모난 지하철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흥분해서 양산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 춘자는

“서, 선배! 이, 이 무쇠 상자는 대체 무엇인가요?!” 하고 외치지를 않나.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렇다 치더라도 스스로가 촌뜨기라고 말한 걸 여기서 그렇게 어필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지하철이야. 지하철. 대중교통의 일종.”

“이게 지하철……하지만 여기는 지하가 아니지 않나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또 그렇긴 하지만. 지하랑 지상을 오고가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하철이라는 말보다는 전철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지.

“이게…… 대중교통. 그러고 보면 TV에서 봤던 적이 있어요. 정부에서는 대중교통의 이용을 장려한다던가. 분명 그랬어요! 선배!”

활짝 웃는 얼굴로 공익광고 같은 말을 해도 반응하기 곤란한데 말이지. 꺄악꺄악 거리면서 즐거워하는 춘자를 바라보며 나는 안심했다. 그래도 다행…인걸까. 처음에 지현이의 제안을 받고서 가는 걸 내켜하지 않은 것치고 지금의 춘자는 제법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까.

일단은 흡혈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평소에 대체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의문이 드는 아이고, 실제로 내가 지난 한달 간 돌봐줬다고는 해도 그간 부대끼며 내가 보아온 춘자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는 모습뿐이었다.

뭐든지 경험해보는 게 좋은 것이라 했던가, 이번 기회에 춘자가 이런 일상적인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도 기대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단순히 놀이공원에 놀러가는 일이라고 해도 오늘 일은 춘자는 물론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건대입구에서 잠실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아마 30분, 어쩌면 더 짧게 걸릴지도 모르는 가까운 거리인 것이다.

잠실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들어선 뒤.

"그래서 어제 지현 선배에게 방심하지 말라는 말을 계속 들어서."

춘자는 어제 지현이에게 들었다는 ‘놀이공원에 찾아가기 전에 외워두어야 할 수칙 10가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현이의 말에 따르자면 놀이공원이란 희대의 마경이며 수많은 인파가 득시글거리면서 펼치는 지옥도에 버금간다고 한다던가.

특히나 오늘 같은 공휴일에는 눈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한 가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땡볕 아래에서 수 시간을 버티기를 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엎치락뒤치락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며, 개개인의 강인함을 시험하는 다시없을 시련의 장소라던가 뭐라던가.

"이런 곳에 솔선해서 들어가는 인간이란 정말 한시도 자기단련을 멈추지 않는 엄청난 족속들이로군요."하고 흡혈귀로써 질 수 없다며 괜히 범종족적 적개심을 불태우기도 하는 춘자였다.

일단 코앞에 있는 나도 인간이다만. 게다가 놀이공원은 그런 곳도 아니고.

물론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은 귀찮았고, 혼자 겁에 질려서 싸울 각오를 다지는 춘자를 보고 있는 것도 재밌어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직접 가보면 알겠지, 직접 가보면.

그렇게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기를 얼마, 이내 우리를 태우고 있는 지하철은 천천히 롯데월드가 위치한 잠실로 향하기 위해 탁 트인 공간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6월의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이 보였다.

기세 좋게 나아가는 지하철의 전동에 맞추어 창밖 풍경을 즐기고 있을 때.

이변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시콜콜 떠들어대던 춘자가 갑작스레 턱하니 입을 다물었다.

지하철은 마침 푸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다음 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참.

그런 와중에 춘자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해서

"응?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묻자, 춘자는 그저 창밖 저 멀리로 보이는 무언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저 선배,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은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왜. 뭣 때문에 그런데?"

춘자는 그 큼지막한 두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어린 채로 검지를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혹시 저희가 타고 있는 이 무쇠 상자가, 저, 저기를 가로지르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천천히 춘자의 가느다랗지만 예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타고 있는 지하철은 이제 막 전역을 지나, 강남, 즉 한강 건너편으로 이어진 다리를 향해 힘차게 약동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인간의 과학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극치. 약동하는 운동력의 상징.

정부가 과연 교통수단으로는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 이용하는 게 좋아요 그 편이 싸게 먹힌다니깐! 하고 외칠만 하달까.

그것보다

그랬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강남 잠실 쪽에 있는 롯데월드.

평소 같았으면 지하철로 얼마 걸리지도 않는 거리고 별다른 부담도 없는 위치의 장소였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까지 가는 길. 건대입구로부터 잠실역까지 가는 길에는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소가 있다.

세계 각지 주요 대도시 중심부에는 어김없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인류 생활사에 있어 꼭 필요한 만큼 주거 지역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연적 지형으로. 특히나 이름 하여 하느님께도 봉헌된 성스러운 도시 서울의 젖줄로 이름 드높은 그것.

한강이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지하철은 지금 현재에도 시시각각 다음역이 있는 그곳을 향해 한강이 있는 그곳으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하나.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춘자는 흐르는 물이 약점이라고 했던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자외선 크림을 발라 창백하던 춘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내 침묵. 그것은 마치 10년과도 같은 10초였다.

이후.


"약점이에요! 죽는다고요! A에서 B로 나아가려는 지향성을 지닌 3.5% 이하의 염분도를 가진 액체 위를 통과한다니! 죽어버릴 거야! 죽는다고오오! 흡혈귀는 그것만으로도 죽어버리는 가련한 생물인데에에에!"


폭발했다.

우어어어 하고 겉으로만 보면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난데없이 객실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같은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하고 쯧쯧 혀를 차는 노인 분이라던가, “엄마, 저거 봐.”라고 가리키는 어린애와 “어머 눈 마주치면 안 돼.” 하고 아이의 눈을 가리는 어머님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여고생쯤 되어보이는 여자애 서넛이 흥미로운 얼굴로 동영상 촬영까지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밤에라도 당장 페이스북에 지하철 난동녀라는 제목으로 업로드 되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아니, 그게 말이죠.

으음.

"진짜 위기상황이라는 느낌?"

"느낌이 아니라구요…!"

이제는 꺼이꺼이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하는 춘자였다.

TV에서는 정부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권장하던데. 설마하니 정부가 직접 나서서 차도살인지계로 흡혈귀를 멸종시키려고 했을 줄은 몰랐다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이 뒤에는 전부 구마국의 음모가! 하고 거대한 음모론까지 꺼내드는 춘자를 보고 있으니 진짜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시각각 한강으로 다가드는 지하철.

시시각각 정신을 잃고 실성하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 후배.

어느 쪽이 우선인가 하면 역시 그거겠지.

"어쩔 수 없지."

나는 곧장 춘자의 손을 움켜잡았다.

"서, 선배?"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뛰자. 춘자야."

우리들은 곧장 지하철이 나아가는 방향의 반대, 뒤쪽 객차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 한 걸음 내딛어 다음 한 걸음으로, 걸음을 내딛을수록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다.

“선…배!”

춘자의 부름에 돌아본 창밖에 비치는 것은 서서히 다가오는 시커먼 강물의 그림자. 이쪽이 아무리 달리고 있어도 전철은 무자비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물 위로 멈추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이대로, 는…!”

절망에 가득 찬 백금색 소녀의 얼굴에 눈에 들어왔다. 사색이 되어서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앞으로 들이닥칠 비극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련한 나의 후배. 그런 후배의 평범한 사람보다 차가운 손을 꼭 쥐며 나는 말했다.

“포기하지 마.”

“선배…?”

포기하면

“그 순간 모든 게 끝나는 법이야. 그러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거야.”

하는 데까지 해보자. 그러기 위해서 내가 바로 곁에서 손을 잡고 이끌어줄 테니까. 나는 한층 더 춘자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단단히 느껴지는 이 감각. 평범한 사람보다 약간 더 차가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후배의 손을 붙잡고

“후배를 위해서라면 선배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네! 선배!”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환히 빛나는 미소를 지은 춘자의 얼굴에 나 또한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도달한 곳은 물론 열차의 마지막 칸.

“서, 서, 선배! 더 이상 길이 없어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에 경악하며 황급히 나를 바라보는 춘자였지만.


“뭐, 전철 안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선배애애?!”

그야말로 세상 전부로부터 배신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춘자. 아니, 그야 당연한 거지. 전철 안인걸. 달려봤자 어차피 독안에 든 쥐 신세니까. 막다른 길에 도착하는 게 당연하지.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달린 거예요?!”

“그쪽이 더 드라마틱하니까?”

“말도 안돼애애애!”

비명을 지르는 아르바이트 후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나와 가련한 흡혈귀를 태운 전철은 그대로 흐르는 물, 그러니까 ‘A에서 B로 나아가려는 지향성을 지닌 3.5% 이하의 염분도를 가진 액체 위’를 무자비하게 통과해버리고야 말았다.

한강의 위를 지나치고야 만 것이다.

“…원, 통하다…!”

한강을 통과하는 바로 그때.

정부의 차도살인지계에 당하고야 만 김춘자 양은 그렇게 분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면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웅성웅성.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웅성거린다. 시끄러웠던 탓일까. 어쩌면 방금 벌어진 한 차례 촌극을 바라보며 무슨 연극이라도 벌이는 건가 싶어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운 것에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며, 나는 여전히 정신을 잃어 실신한 채로 흐느적거리는 나의 아르바이트 후배, 춘자양을 수습한 뒤 빈 자리에 앉혔다.

결과적으로 춘자가 승천한다거나, 퇴마당한다거나, 소멸한다거나 그런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기절했을 뿐이다. 사라락 어깨 자락을 감싸는 순백의 머리칼에 잠든 듯 고요하게 닫혀 있는 두 개의 눈꺼풀. 하얗고 고운 피부 위로 가끔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거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건 잠든 것처럼 기절한 지금에도 무언가 안 좋은 악몽을 꾸기 때문인 걸까.

음. 반성한다.

살짝 장난기가 발동해서 무리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다.

그래도 뭐.

방금 전까지의 소동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는 내 옆자리에 앉힌 춘자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흐르는 물을 통과하는 것 정도로 춘자가 무언가 극적인 일이 당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뻔한 이야기다. 단순한 예상이 아닌 근거에 의거한 적절한 상황판단. 그러니까 처음부터 단서는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춘자는 흡혈귀다.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서울에서 살아가기 힘들어, 서울이 이미 흡혈귀에게는 지옥 같은 도시라고 말하는 흡혈귀인 것이다.

흐르는 물에 약하다. 십자가에 약하다. 마늘에 약하다. 햇빛에 약하다. 은으로 만든 물건에 약하다. 초대 받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스러운 말에 제약을 받는다. 어떤 높으신 분이 서울을 ‘오롯이 존재하는 그분’에게 봉헌하면서 서울 자체에 성력이 충만해 곤란하다. 피를 빨지 않으면 죽는데 문제는 빨기가 힘들다. 성수에도 약하고, 소금도 약간 힘든데다가 불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이토록 춘자는 실로 많은 약점들을 지니고 있다.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여타 다른 초인적인 흡혈귀들과는 달리 매사에 조심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춘자는 일상생활조차 힘들어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작 그것이 춘자를 해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힘들고 곤란하고 가까이 가기 힘들지만, 어쨌거나 십자가는 가슴을 철렁거리게 하고 마늘 냄새는 헛구역질을 불러일으키고 성스러운 말은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말하자면 그뿐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춘자와 대화를 하며 저 약점들을 가진 채로 정말 죽을 뻔했다던가, 실제로 해를 입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가정의 가능성이었고 혹시나 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혹시라도 춘자가 정말 흐르는 물, 한강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위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도 영 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고작 그런 불확실한 가정으로 후배에게 위험이 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춘자가 무사할거라고 내게 확신을 주는 증거가 하나 있었으니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도 춘자가 언급한 대다수의 약점들이 실질적인 위험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가장 확실한 증거.

그것은 바로


춘자가 햇빛 아래에서 멀쩡히 걸어 다닌다는 사실이다.


태양. 햇빛. 햇볕.

만화,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그 어떤 매체에서도 똑같이 언급하는 흡혈귀들의 가장 큰 위협.

흡혈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절대로 친해질 수 없는, 흡혈귀들을 물리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

밤늦도록 흡혈귀에게 쫓기던 이들이 간신히 동틀 무렵까지 버티면서 흡혈귀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식상해지기까지 한 클리셰다.

흡혈귀는 야음을 틈타 피를 빠는 괴물이기에 그 존재감을 지닌다.

어둠 속에서 슬며시 다가와 목덜미를 물어 피를 빠는 것이 흡혈귀의 올바른 정체성이다.

수많은 전설과 민담에서 내려온 흡혈귀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허나 춘자는, 비록 자기 말로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자외선 크림을 바른다고 하지만. 겨우 그런 것들로 햇빛이 가려질 리가 없다. 그건 말 그대로 햇빛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햇빛을 차단하는 술수가 아니다.

양산을 쓰는 것도 챙이 넓은 모자를 쓰는 것도, 자외선 크림을 바르는 것도 결국엔 전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서는 정말 최근 만화나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현대식으로 어레인지 된 흡혈귀’에 지나지 않는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이다.

내 앞에서 흡혈귀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피를 빨기도 하는 소녀. 백금색의 소녀. 김춘자.

외국에서 국내로 ‘피신’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하는 이 외국인 소녀.

결국 흐르는 강물 또한 춘자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기절한 것도 단순히 두려운 나머지 실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설마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는 멋대로 행동한 것에 반성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엄청나게 많은 약점을 가지고 실제로 그 약점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주제에 정작 그런 약점들로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 이 소녀의 정체.

나는 천천히 내 옆자리에 앉아, 어느덧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든 채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춘자.

넌 대체 뭐지?


 
+ 작가의 말 : 깨물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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