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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 1챕터 피드백 일자는 편집부 사정상 이번주 목요일(11월 14일)까지 작성됩니다.
늦어지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드리며, 수정을 위해 3주차 마감을 다음주 월요일(11월 18일)로 연장합니다.
피드백을 받은 뒤 이미 작성된 글을 수정하셔도 무방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검토는 최종 수정 원고가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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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장난전화
13-11-06 23:46
 
 
  방에는 문이 없었다. 덩그러니 남은 문지방에는 경첩을 뜯어낸 자국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변변한 가구도 없이 휑한 거실에 들어선 세 소녀가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았다.
  “애늙은이. 너 집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래도 특이하니 좋지 않아?”
  “좋기는 무슨.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야, 흰머리. 진짜 너희 집 맞아?”
  내 집이니까 문 따고 들어왔지. 난수는 청아의 핀잔을 슬쩍 넘기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투덜거리던 청아가 어린아이처럼 신발을 벗어던졌다. 그 뒤를 이어 서리가 제집마냥 들어왔다.
  “시, 실례합니다.”
  “선짓국 이 바보야. 흰머리 혼자 산다잖아.”
  허리가 90도로 꺾이는 선지를 보고 청아가 깔깔거렸다. 선지는 벌게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 그래도 아버님, 어머님께서 오실지도…….”
  “너희 밥 안 먹었지?”
  “모르느데야아아악!!”
  불쑥 고개를 내민 난수는 벼락처럼 날아드는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바짝 얼어붙은 소년이 눈알만 간신히 굴려 선지를 바라보았다. 선지는 벽을 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씩씩거리며 되레 큰소리쳤다.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 놀랐잖아!”
  “어, 으. 응. 죄송합니다.”
  난수는 엉겁결에 사과하고 말았다. 홍당무가 된 선지는 거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안면몰수의 위기에서 벗어난 난수가 프라이팬을 보여주며 물어봤다.
  “아무튼 밥 안 먹었지?”
  “너 기다리느라 쫄쫄 굶었다. 머슴아.”
  아예 대(大) 자로 드러누운 청아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난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교복을 줄인 탓에 말려 올라간 옷자락 사이로 매끌매끌한 배가 드러났다. 핸드폰을 두드리던 청아가 난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실소했다.
  “꺼져. 흰머리.”
  “아니, 가려줬으면 좋겠는데.”
  난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선지의 돌발적으로 선정적인 속옷이라면 모를까, 툭하면 소리치는 청아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껄떡거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청아가 오히려 발칵 화를 내며 일어섰다.
  “뭐야. 흰머리. 나한테 관심 없다는 말이야?”
  “신경 끄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
  “뭐라는 거야. 안 들려. 안 들려.”
  청아가 귀를 막고 도리질치자 난수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어제 사온 계란 서너 개를 골라잡아 깨 넣자 기름칠한 프라이팬이 지글지글 소리를 냈다. 뒤집개를 들고 멍하니 서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흐음. 냉장고도 없네.”
  뒷짐을 진 서리가 부엌을 기웃거리며 나타났다. 형광등의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오로지 소녀의 얼굴을 뒤덮은 안대만 새카맣게 반들거렸다. 익어가는 계란프라이를 뒤집으면서 난수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황량한 집에 초대해서 미안하게 됐네.”
  “설마. 이런 두근거리는 상황에 처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줄곧 프라이팬만 지켜보던 난수가 그 말에 서리를 힐끔거렸다. 애꿎은 계란프라이를 뒤집개로 뒤적거리면서 소년이 넌지시 물었다.
  “무섭지 않아?”
  “무섭긴. 친구들도 모여 있고 믿음직스러운 선생님까지 함께 있는걸.”
  난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텅 빈 거실바닥에서 데굴거리는 청아나 구석에 무릎 꿇고 앉아 약혼 어쩌고 웅얼거리는 선지가 썩 믿음직스럽게 보이진 않았다. 소년의 어깨에 보드라운 손길이 닿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청아가 말은 안 해도 걱정 많이 했거든.”
  “그 선배라는 사람 일 때문에?”
  “청아는 그 언니랑 친했거든.”
  난수는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죽으면 그도 슬픔을 억누르기 힘들 것이다. 악을 써도, 발을 동동 굴러도, 목 놓아 울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아.”
  “꼭 다 털어놓아야 할까? 여자는 비밀이 많아.”
  노릇노릇하게 익은 계란프라이를 접시에 담는다. 불을 끄고 몇 번이고 가스밸브를 점검한 난수가 서리에게 돌아서서 단언했다.
  “비밀은 아무 소용없어. 난 너희들을 반드시 살릴 거야.”
  복통이 도졌다. 난수는 배를 부여잡았다. 마주보던 서리가 선뜻 다가왔다. 소년이 신음을 삼키며 손사래 쳤다.
  “오지 마.”
  “병이라도 걸렸어?”
  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수가 변태안경이니, 애늙은이니 불리지만 겉만 놓고 보면 건강한 그 나이 또래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를 붙잡고 낑낑거리니 보통은 의아해 할만했다.
  “아냐.”
  “사돈이 땅이라도 샀어?”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난수는 딴죽을 잊지 않았다. 서리가 곁에 있으면 복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소년은 싱크대에 기대서 다가오는 서리를 멈춰 세웠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져.”
  “땀을 뻘뻘 흘리면서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 사실은 여자애가 가까이 오면 배 아픈 체질이야.”
  “선지가 들으면 너 맞아죽겠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정타로 들어갔다. 서리는 생긋 웃고서 거실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했냐며 매달리는 선지와 그 사이에서 이죽거리는 청아 탓에 또다시 집이 시끌벅적해졌다.
  ‘한결 낫네.’
  서리에게서 멀어지자 난수는 숨을 몰아쉬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드물지 않다. 저 안대소녀 옆에만 가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몸뚱이란 말인가.
  “지랄도 팔자지. 당분간은 좀 얌전해라.”
  난수는 씹어뱉으면서 접시를 들었다. 얼러도 불만스러운지 뱃속이 따끔따끔 일어났다.  

***

  난수가 만든 계란프라이는 호평이었다. 항상 딴죽을 걸던 청아도 군말 없이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알맞게 구워서 안도 속도 부드러워 꼭 계란빵 같은 느낌이었다. 입맛을 다신 청아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난수의 등을 두드렸다.
  “앞으로 신세 많이 질게! 흰머리!”
  “부탁인데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래?”
  갑과 을의 사이? 난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소년은 말을 돌리려다가 조신하게 무릎 꿇은 선지와 눈이 마주쳤다. 선지가 짧은 정적을 깨고 손사래 쳤다.
  “아, 아니, 그야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인데 겸손한 마음으로 먹어야하지 않나 해서.”
  “겸손할 것까지야. 입맛 없으면 안 먹어도 돼.”
  “아, 아, 아냐! 입맛이 없다니 천만에!”
  선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부리나케 숟가락을 움직였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식성이 과연 천하장사가 따로 없었다. 조용히 수저를 내려둔 서리가 생긋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
  “너 무슨 계란프라이로 장사할 작정이야?”
  우물거리면서 말하는 통에 밥풀이 튀었다. 청아는 그 사이에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난수가 난처하게 대답했다.
  “그야, 보통 혼자 살면 거하게 차려먹기 힘들거든. 그나마 쉽게 만들 수 있는 반찬이 계란프라이 정도니까.”
  “중학생 때부터 혼자 살았어? 이 새끼 이거 명물이네.”
  청아가 탄성을 터뜨리자 난수는 손을 내저었다.
  “초등학생 때부터야.”
  “뭐?”
  “초등학생 때부터?”
  청아와 선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난수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멋쩍게 만지작거렸다. 비단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세 사람에게 믿음을 줘야했다.
  “응. 4학년인가 그랬어. 내가 학교에서 괴담을 겪은 적 있다고 그랬지? 그 직후에 부모님과 별거했어. 맡아줄 친척도 딱히 없었거든.”
  실상은 이제까지 살갑게 맞이해주던 친척들도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차마 부모 마음에 애를 버리지는 못하겠고, 적당히 떨어진 곳에 집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유복한 집안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힘들었으리라.
  난수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옛날 사람들은 요괴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바쁘게 오가던 수저질이 느려지자, 난수는 말문을 열었다.
  “요괴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타였어. 당시 사람들은 흔히 말하길 이성적인 사고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요괴를 빌어 해결했지.”
  “서리한테 선생님 소리 듣는다고 꼰대짓하겠다는 거야?”
  팔짱을 낀 청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난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너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거야. 요괴, 귀신을 믿는 사람들은 현대로 접어들면서 줄어들었어. 옛날에는 설명하지 못하던 많은 현상들이 규명됐기 때문이야. 하나씩, 하나씩. 그런 경향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느꼈겠지. ‘요괴나 귀신은 없다!’라고.”
  난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일까? 정말 설명하지 못할 현상은 없을까? 가령, 내가 지금 만든 계란프라이를 먹고 우리 모두가 배탈에 걸린다면 단순히 계란이 상했을 뿐일까? 그 계란에 사실은 누군가 독을 타서가 아닐까?”
  “그래서, 뭐라고 하고 싶은 건데?”
  청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빈정대는 반응을 듣고서도 난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는 많은 면이 밝혀졌어. 하지만 명백한 논리가 있다고 해도, 그 논리가 항상 통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항상 긴장하고 산다는 말이야? 음악실에서 그랬잖아. ‘불안은 제일 큰 독이야’라고.”
  서리가 교단에 섰던 난수를 흉내 내자, 청아는 배를 잡고 웃었다. 선지만이 굳은 얼굴로 난수를 빤히 쳐다봤다. 헛기침으로 이목을 끈 난수가 이어 말했다.
  “나는 불안해하지 않아. 긴장할 뿐이지. 두려워하는 대신, 나는 그에 맞설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어.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그래서 집이 이 모양 이 꼴이야?”
  청아가 코웃음을 치면서 받아쳤다. 소녀는 휑한 집구석을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
  “문짝 뒤에 누가 숨어있을까 봐? 자물쇠가 하나면 누가 따고 들어올까 봐? 냉장고를 열었더니 귀신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그릇은 왜 또 플라스틱인데? 깨져서 밟고 뒈질까봐 그러시냐?”
  “맞아.”
  뜻밖에도 시원시원한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청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난수가 빈 그릇을 모으면서 덤덤하게 굴었다.
  “차를 몰 때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잖아. 난 그보다 조금 더 대비할 뿐이야. 블랙박스를 달고, 때가 되면 타이어를 교환하고……. 그런 부분이 이상해?”
  “이상해. 너 진짜 이상한 새끼야. 변태안경.”
  난수는 흰머리에서 변태안경으로 바뀐 호칭을 무슨 수로 되돌릴지 고민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을 따라 서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도와줄게. 나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손님한테 맡기기 부담스러워. 아니, 설거지도 안 해봤어?”
  “우리 집은 여자가 손에 물 묻히면 안 돼.”
  서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 그룹은 어째 하나같이 별종만 모였다. 선지가 그나마 양반이라고 느껴질 지경이니 난수의 심적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를 올려둔 난수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사람에게 부탁했다.
  “지금부터 한 명씩, 얘기를 나누고 싶어.”
  “우리가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네가 골라잡는 데로 얘기하게?”
  청아가 비웃었지만, 난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지와 서리가 불만을 드러내지 않자 청아도 누구 말마따나 불안하긴 한지 발만 쿵쿵 굴렀다.
  “그럼 누구부터 먼저 할까? 정해보세요. 선생님.”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서리가 은근한 투로 물었다. 혈기왕성한 남학생이라면 허리가 쑥 들어갈 만큼 선정적인 광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복통이 도지려는 난수는 그 정도에 흔들릴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돕는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꽉 차있었다.
  “우선은 선지부터…….”
  난수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시선이 속 터질 만큼 굼뜨게 움직였다. ‘보면 안 된다.’ 괴담은 호기심에 발을 들이는 이들을 덮친다. ‘확인해야 한다.’ 상대가 무엇인지 모르면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다. 난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설마.’
  똑.
  무언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혹은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거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선지도, 청아도, 서리도, 그리고 난수까지도 숨을 죽였다.
  똑똑.
  정적을 깨고 메마른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정확히 두 번이었다. 선지와 청아가 눈을 마주쳤다. 입가가 일그러진 선지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똑. 똑. 똑. 똑.
  “기다려.”
  난수는 현관으로 나가려는 선지를 가로막았다. 선지의 파리한 낯빛이 소년의 가슴을 옥죄였다. 선지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켜. 누군지 몰라도 담판을 짓겠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선지는 장래가 밝은 유도 유망주였다. 실력도 우수했다. 하지만, 난수는 선뜻 선지에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저 문을 열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집을 잘못 찾은 사람일 수도 있고, 경비원 형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려보며 난수는 인터폰을 켰다.
  전원이 들어온 화면은 온통 새카맸다.
  똑. 똑. 똑똑. 똑똑똑. 똑똑.
  “누군지 몰라도 장난은 작작 쳐!”
  결국 폭발한 선지가 고함을 치며 뛰쳐나갔다. 난수는 그 때에도 인터폰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장이 났다고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인터폰에 드리운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선지야!”
  자물쇠를 푸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선지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닿지 않은 냉랭하고 푸석푸석한 공기가 선지를 반겼다.
  선지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마냥 좌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선지의 거친 숨소리만 복도를 울리자 청아와 서리도 말없이 나와 복도를 내다봤다. 가장 먼저 청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들렸어. 너희도 들었잖아.”
  열이 오른 선지가 씩씩거리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가리켰다. 복도에는 껄끄러운 한기만 감돌았다. 서리가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집을 잘못 찾은 사람 아닐까?”
  “내가 나가자마자 소리가 멎었어. 그럴 리 없어.”
  선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지 몰라도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막상 아무도 없으니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세 사람은 약속한 듯이 난수를 돌아봤다. 인터폰으로 복도를 지켜보던 사람은 소년 한 명밖에 없었다.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청아가 날 선 투로 추궁했다.
  “누군지 봤어?”
  “아니. 못 봤어.”
  대답하는 난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난수는 묵묵히 인터폰을 껐다. 간신히 인터폰에서 눈을 뗀 소년이 복도에 나가 서성이던 세 사람에게 부탁했다.
  “문 좀 닫아줘. 자물쇠 확실히 잠그고.”
  난수가 거실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자 선지는 잽싸게 친구들을 물리고 서둘러 돌아왔다. 신발을 벗던 선지가 갑자기 흠칫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훤칠한 키의 선지가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리자 다른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선짓국.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아 묻던 두 사람이 현관을 보고 바짝 얼어붙었다. 선지의 발자국이 검붉은 색으로 찍혀있었다. 선지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피, 피잖아.”
  창백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선지가 피만 보면 졸도할 만큼 순진한 소녀는 아니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피가 신발에 피가 흠뻑 묻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난수가 걸레를 들고 와 끈끈한 핏자국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냈다.
  “무서워하지 마. 진짜 피도 아니니까.”
  “뭐?”
  “피 비슷한 거야.”
  난수는 동요를 숨기고 거짓말했다. 바닥에 엉긴 붉은 자국은 분명 피 때문이었다. 응어리진 꼬락서니가 정체 모를 상대의 집착을 분명히 드러냈다. 난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붉은 걸레를 보여줬다. 아직까지도 낯빛이 하얗게 질린 선지와 유심히 지켜보는 서리 사이에서 청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흐, 흥!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경비원도 있었잖아. 어떻게 들어왔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일지도 몰라. 무슨 수를 써서 형을 속여 넘겼겠지.”
  궁색한 변명이었다. 경호원 교육까지 받은 그 형이 낯선 사람을 선뜻 들여보내줄 리 없었다. 적어도 책임감이라는 면에서 이 아파트의 경비원들은 수준급이었다. 결국 경비원에게 들키지 않고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했다간 세 사람은 내색하지 않을지언정 틀림없이 불안에 떨 것이다. 곧이곧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세 사람이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진실을 털어놓았다간 시작도 하기 전에 수포로 돌아간다.
  오밤중의 갑작스러운 청소를 마친 난수가 돌아오기 무섭게, 청아는 소년을 붙잡고 닥달했다.    
  “애늙은이, 뭔가 못 봤어? 분명 소리는 났잖아.”
  “선짓국이 무서워서 도망간 거 아냐?”
  이럴 때도 애늙은이냐. 힘이 쭉 빠졌지만 굳이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난수는 머리를 짚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 자의 정체는 몰라도, 분명 인터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알아차려주기 바란 듯이.
  “도망가지 않았어.”
  난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어도 진심이 섞여있었는지, 청아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선짓국한테 쫄아서 튄 거잖아. 너 선짓국이 얼마나 센지 몰라?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오빠들 집어던지던 애라고. 피 비슷한 걸로 장난치는 놈이 어디 맞장 뜰 배짱이나 있겠어?”
  “그런 말 하지 마.”
  “그 놈은 즐기고 있어.”
  말리던 선지가 황망한 눈으로 난수를 돌아봤다. 즐기다니, 누가 이런 상황을 즐긴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질문은 없었지만 대답은 돌아왔다. 난수가 확신을 갖고 단언했다.
  “장난전화 때문이야.”

***

  장난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나쁘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놀림거리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사람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분을 풀 기회마저 사라지면 으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서너 번, 대여섯 번 겪다보면 그러려니 싶어진다. 장난전화를 몇 번 받으면 사람이 흥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번 걸려 와도 덤덤하게 넘기는 사람이 있고, 한두 번 걸려 와도 분통이 터지는 사람도 있다.
  그도 살면서 장난전화 한두 번쯤은 받아봤다. 조잡한 장난질이라고 치부하며 넘겼다. 어린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화풀이할 상대도 눈앞에 없는데 굳이 고함을 질러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애써 어른스럽게 굴었다.
  하지만 한 번, 단 한 번으로 그는 모든 결심을 내던졌다. 이 세상이 어찌되건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을 흘려듣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장난을 치면 잘못한 줄 알아야 하고,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만큼 고된 여정을 즐기지 못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몸을 움직이는 데에 공을 들인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즐거움이 느껴졌다. 겁에 질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온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 아이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그가 불안에 떨었듯, 불안에 빠져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의 소망은 공허하게 입 속을 맴돌았다.
 
+ 작가의 말 : 1챕터 2주차입니다.

노블B 13-11-13 12:07
답변  
비밀글이므로 글을 볼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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