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다이라 쿄는 어렸을 때 좋아했던 작가입니다.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파이럴~추리의 끈 이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를 가진 작품이었지만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있는 작품입니다. 직접 그림을 그리신 건 아니고, 스파이럴의 스토리 작가가 바로 이 시로다이라 쿄 입니다. 다른 만화에서도 스토리작가로 활동했는데, 절원의 템페스트 초반부 조금 본 것 말고는 다르게 본 게 없네요.
사실 읽기 전에는 추억이 돌아왔네 돌아왔어 하고 생각했을 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놓고 집 안에 짱박아 놓은 채 아, 이거 빨리 읽고 중고서점에 팔아야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라 두근두근거리네요.
우선 스토리를 알려드리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미스터리의 틀을 부수려는 해체적인 움직임은 전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학산문화사에서 정발한다고 큰소리 쳐놓고 10년도 넘게 일을 쳐 하지 않아서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세이료인 류스이'의 '코즈믹'을 필두로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꾼 시리즈', '사토 유야'의 '카가미가 시리즈' 등 이른바 '신본격'으로 불리는 작품들이 대표적입니다. 최근에는 게임으로 '단간론파'가 유명했죠.
이런 미스터리의 해체적인 움직임에는 필연적으로 타 장르와의 결합이 따릅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에서도 SF적 요소를 차용했고, 제가 라이트노벨을 처음 읽기 시작한 계기가 된 작품인 '고식'도 비록 미스터리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길을 택하긴 했지만 판타지적인 요소를 차용했습니다. 최근이라기엔 뭐하지만, 근래 눈에 띄는 작품이라면 '고전부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한 '요네자와 호노부'도 '부러진 용골'에서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멋지게 융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허구추리도 이러한 미스터리의 해체적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다른 해체적 미스터리들처럼 판타지적인 요소인 '일본의 민담과 도시전설' 등을 차용했고, 플롯 또한 미스터리의 틀을 부수기 위해 짜여져 있습니다. 이 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스토리로 가실까요.
한적한 소도시에서 '강철인간 나나세'라는 괴담이 퍼집니다. 죽은 아이돌의 원혼이 철골을 들고 밤마다 다른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소문. 보통의 미스터리라면 그것은 가짜이며 분명한 과학적 사실로 그것을 설명하려 하겠지만, 이 소설은 그냥 '그 괴물은 진짜다.' 라고 인정해버립니다. 추리소설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이단.
사실 이 괴물은 사람의 상상력이 뭉쳐 만들어 낸 괴물로, '강철인간 나나세 종합 정보 카페'로 인해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도시전설이 전파되면서 급속하게 힘을 얻은 괴물입니다. 그렇다면 퇴치하는 방법은? '강철인간 나나세'를 거짓으로 만들어버려서 그 힘을 약하게 하면 된다. 이를 위해 요괴들로부터 '지혜의 신'으로서의 사명을 맡게 된 이와나가, 그녀의 현 남자친구이자 '인어와 쿠단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미래를 붙잡을 수 있는'(요약하자면 효과적으로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쿠로, 그리고 쿠로의 전 애인이자 형사인 사키가 활약하게 됩니다.
즉, 이 작품은 애시당초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사건을 꾸며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추리소설로서는 매우 이단아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이단아적인 방법을 시로다이라 쿄는 도시전설과 같은 판타지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 이것이 여전히 '추리소설'로서 기능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시도를 한 작품들이 '허구추리' 하나 뿐만은 아니지만, 다른 작품들이 추리소설의 틀을 고집하는 반면 '허구추리'는 오히려 추리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서 추리를 기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해체적인 추리소설들보다 좀 더 높은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또 높은 평가를 주고 싶은 게, 캐릭터의 매력입니다. 주인공들간의 기묘한 삼각관계. 특히 이와나가가 너무 귀여워요. 이렇게 당돌한 아가씨를 한 권밖에 못보다니 아깝네요. 후속작을 염두에 두는 듯 미묘하게 떡밥을 남겨두고 끝내는데, 이런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드니만큼 두번째 작품은 나오기 힘들지 싶네요. 애초에 나와도 번역 안해줄 것 같고.
주제의식 또한 다른 해체적 미스터리와 달리 분명합니다.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고, 가짜는 언제든지 현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작가의 사상이 은연중에 깔려있는 느낌이라 마음에 듭니다.
6챕터인 '허구쟁탈' 파트의 속도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추억에 남는 작가가 그대로 추억에 묻어둘 걸... 이 아니라 추억을 박차고 나 여기 있소 하고 뛰어나온 기분이라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감상을 길게 쓰는 건 처음이네요. 낡은 영미권 미스터리만 읽다 최근 나온 일본산 명작을 먹으니 신선한 것 같습니다. 이번 책도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