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기담집이나 신기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청구야담」, 「계서야담」, 「어우야담」이나 조선시대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낙선재본 소설이 그것이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맥이 끊겨 꾸준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서양은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를 바탕으로 엄청난 양의 소설과 시, 영화, 음악을 꾸준히 창작하고 있고 옆나라 일본도 옛부터 내려오는 자신들의 신화와 기담을 여러 매체로 활용하여 재해석과 창작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정연 작가님의 다른 작품 「유랑화사」 감상문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기담이나 신화, 설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렇기에 서양과 일본의 기담과 신화를 활용한 미디어믹스 문화는 무척이나 부러운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여러 학자들의 노력 끝에 「청구야담」과 낙선재본 소설 등의 한글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고 장르소설계에서도 우리식 판타지나 설화를 변주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 만큼 우리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담집도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유랑화사」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신비한 능력을 가진 화사와 꼬마 여우가 겪는 기이한 이야기는 우리식 기담 이야기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유랑화사」를 쓴 정연 작가님이 이번에는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 태어나 이매망량을 다스리는 여우 백란과 괴이를 보는 눈, 천안(天眼)을 가진 소년 유단 이야기를 선보인다고 하니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세계는 아주 위험한 미로니까. 다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44쪽)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귀에 의한 끔찍한 사고는 어머니를 앗아가는 대신 괴이를 보는 천안을 유단에게 남긴다. 어린 시절부터 귀것들과 타인의 죽음을 미리 볼 수 있있던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유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것에게 홀려 괴롭힘 당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다.
유단은 알지 못했지만 괴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존재하며 사람과 함께 했다. 그리고...
괴이에 휘말려 기묘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신비로운 가게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반월당(半月堂)"
하늘의 뜻을 타고 태어난 지혜롭고 자비로운 반월당의 주인 여우 백란과 백란을 모시는 반월당 점원들인 도깨비 도 씨, 흑구렁이 아가씨 흑요, 동자삼 남매 채설과 채우. 액받이 사건으로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유단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유랑화사」와 마찬가지로 설정만 보면 일본의 여러 현대기담물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신비로운 가게와 인간이 아닌 가게 주인 또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보는 눈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이미 일본만화 「펫숍 오브 호러즈」나 「세상이 가르쳐 준 비밀」, 「백귀야행」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친숙한 소재가 되었다. 거기에 괴이에 자꾸 휘말리는 불쌍한 인간과 신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 아닌 존재의 등장은 '인간 또는 인간의 편=선(善)', '인간 아닌 존재=악(惡)'이라는 공식을 따르는 일본식 퇴마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정연 작가님의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서 일본식 기담 이야기와 차별화하였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산과 물, 늘 보는 나무와 바위,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줌의 낟알, 길어 올린 우물물. 심지어는 대들보 위에 몰래 숨어 사는 구렁이까지. 한때 이 땅에는 세상 만물이 신령하다고 믿으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았는데요. 그들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더 너그러웠습니다."(145쪽~146쪽)
"어떤 귀신은 우리에게 해코지를 합니다. 이유도 없이 괴롭히며 분풀이를 하고, 다치게도 하며, 심지어는 이렇게 생명의 위기를 맞게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좀 져줘도 됩니다. 그들이 가장 원해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223쪽~224쪽)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긴 수명과 천 리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지만 결코 어떤 생명도 하찮게 생각하지 않는 자비로운 마음씨를 가진 천호(天狐) 백란은 분명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D백작이나 아오아라시와는 다르다. 또한 괴이를 퇴치하는 것이 아닌 제자리에 돌려 놓아 순리대로 존재하게 한다는 백란의 방식은 구마나 퇴마의식으로 악귀를 섬멸한다는 서양과 일본의 방식과는 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무속 문화는 인간이 아닌 것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닌 그 혼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구나. 그래야 하는 거구나. 난 정말 몰랐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혼을 내고 윽박질러서 멀리 쫓아 보내기만 했는데.
그런 건 소용없구나. 제자리로 돌려보내야만 진짜로 끝나는 거구나."(70쪽)
한 장, 한 장 계속 읽으면 읽을 수록 작품 전반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따스한 신선이 느껴진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 사람과 동물.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고 옛부터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는 작가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에 선과 악의 대립, 한쪽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외국의 퇴마물이나 기담물이 아닌 우리식 기담이라는 느낌이 한층 강하게 느껴진다.
출판물로는 「유랑화사」가 먼저 나왔지만 반월당은 조아라에서 연재를 했었다는 작가님의 후기를 보면 어느 작품을 먼저 쓰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유랑화사보다 반월당 쪽이 훨씬 이야기가 촘촘하게 전개되고 한 에피소드에 두 가지 이야기가 들어간다거나 캐릭터 성격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는 점에서 반월당이 늦게 쓰신 작품인 것 같긴 한데...... 유랑화사도 재밌게 읽었지만 반월당이 훨씬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된다.
녹시님의 아름다운 일러스트도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빼놓을 수가 없다. 1권 표지는 천호 백란이니 2권은 우리의 주인공 유단이 될 확률이 높지 않을까? 내지 삽화가 없는 건 여전히 아쉽지만 다음 권이 꾸준히 출간되어 유단과 반월당 점원들의 모습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