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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어떤 아이돌의 용과 로봇
글쓴이: 아이유
작성일: 12-10-31 23:58 조회: 4,998 추천: 0 비추천: 0


ChpaterⅠ. 이상소녀(異常少女)와 브리튼의 용


소금기 가득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먼 나라들로부터 실려온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잠시나마 그 발걸음을 쉬어가는 곳, 이곳은 바로 인천 국제공항이었다.
거대한 비행기들이 늘어서 있는 활주로의 틈바구니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취급주의!'와 'HANDLE WITH CARE!' 라는 붉은 글씨가 큼지막하게 이곳 저곳에 쓰여져 있는 상자를 옮기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이봐! 조심해!"
다급한 누군가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힘겹게 옮기고 있던 기다란 나무 상자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나무 상자의 뚜껑이 슬쩍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다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고아한 은색의 검신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황금빛을 띄는 힐트는 수수한 형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느껴졌다.
상자를 떨어뜨린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바들바들 손을 떨고 있었다. 그가 전해 듣기로 이 화물들은 전부 영국의 유명한 박물관에서 국내 전시를 위해 대여해 온 고대 유물들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으로는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들로 알고 있었기에 남자는 지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거 참! 내 조심하라고 작업 전에 누누히 일러뒀거늘! 이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현장 관리자로 박물관까지의 수송 책임을 맡은 노씨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20대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장한 체격을 갖춘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제끼며 아직도 공황 상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이! 언제까지 혼을 빼놓고 있을 작정이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일해야지 일!"
한숨을 푹푹 내쉰 노씨는 바닥에 떨어진 나무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뚜껑을 활짝 열어젖힌 그는 한참동안 검을 살피더니 이내 뚜껑을 닫고는 몸을 일으켰다.
"괘, 괜찮나요?"
남자는 최후 통첩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초조한 기색으로 노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뭐, 유물이라고 해도 전부 진품은 아닌 모양인데다가 이건 아마 모조품일게야. 게다가 뭐 어디 부서지거나 그런것도 아니니까 걱정일랑 그만하고 얼른 옮기기나 해!"
"네, 네!"
남자는 황급히 상자의 뚜껑을 닫고는 누가 볼 새라 서둘러 상자를 든 채 종종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뒤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시대의 고대 유물이라고 했는데, 저렇게 새것 같은 칼이 진짜 유물일리는 없겠지."
여전히 어설프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힘겹게 나무 상자를 옮기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씨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전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히는 공항에서의 한 때, 노씨는 손 때 묻은 모자를 눌러 쓰고는 소리를 질렀다.
"거기 조심하라고!"

청명한 하늘 아래로 비치는 도시의 아침은 의외로 신선한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친환경 사업의 일환으로 심어진 푸르른 가로수를 따라 기다랗게 이어진 길 위에는 저마다의 하루로 분주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아침의 분주함에 쫓기지만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적어도 여기 이 소녀만큼은 그런 분주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드라운 이불과 한껏 뒤엉킨 채 세상 모르게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는 소녀, 수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따르르르르르르르릉!"
머리 맡에 놓아 두었던 탁상 시계가 시끄럽게 자명종을 울려대며 아침이 왔음을 알리자 천사처럼 순수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수미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으아아악!" 하는 괴성과 함께 여전히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한 쪽 손만을 뻗어서는 자명종을 꺼버린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푹신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는 잠을 청했다.
보드라운 이불의 기분 좋은 감촉은 물론이거니와 채 가시지 않은 나른한 잠 기운, 더불어 째깍째깍 거리는 탁상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일 정도로 고요한 방 안은 그야말로 잠을 청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찝찝했기 때문이다.
결국 번쩍 눈을 뜬 수미는 자명종을 집어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5분.
"꺄아아아아아아아!"
떠나갈듯한 비명 소리가 방 안 뿐만 아니라 집 안 전체를 뒤흔들었다.
내팽개치듯이 자명종을 집어던진 수미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다가갔다. 물론 그 와중에 다리에 엉켜있던 푹신한 이불 덕택에 침대 위에서 고꾸라졌던 것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이야기이리라.
옷장 안의 교복을 집어 든 수미는 그대로 훌훌 잠옷을 벗어제끼고는 서둘러 교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늘 소풍이랬는데! 아! 젠장! 젠장!"
입으로는 쉴새없이 걱정과 불만들을 토로하면서도 손 끝은 재빨리 교복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한 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낑낑거리며 양말까지 모두 신고 나자 잠옷에서 교복으로 갈아 입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남짓, 물론 그 여파로 방바닥에는 뒤엉킨 이불과 잠옷이 기괴한 형태로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지만 수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다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잠결에 부스스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연신 머리카락을 빗으며 방 밖으로 나섰다.
"엄마! 엄마?"
수미의 목소리가 텅 빈 집 안을 외롭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이 커다란 집이 수미에게는 당연한 일상이기도 했다. 언제나와 같이 식탁 위에는 간단한 프렌치 토스트가 마련되어 있었고, 냉장고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엄마가 촬영이었던가?"
그녀의 어머니는 방송국에 종사하고 있는 유명 아나운서였다. 그 때문에 불규칙한 촬영 탓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하기도 힘든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수미는 프렌치 토스트 두어 조각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는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받아줄 사람도 배웅을 해줄 사람도 없었지만 수미는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쳤다. 그것이 지난 몇년 간 그녀가 혼자 집을 나서면서도 외롭지 않으려 반복했던 일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1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가 13층까지 올라오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벌써 손목시계의 시계바늘은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학교까지는 전철을 타고 넉넉잡아 20분 정도 거리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건만 오늘 따라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더디게 느껴지는지 수미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임박한 출근 시간과 등교 시간으로 인해 거리는 초조한 기색의 사람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수미도 그러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섞여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또래의 중학생들 보다도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오히려 그러한 몸을 이용해서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날쌔게 누비며 움직인 탓에 평소보다 전철 역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줄일 수 있었다. 타고난 운동신경 하나만큼은 발군이었기에 그 거리를 쉬지 않고 내내 달렸음에도 수미의 호흡은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
"좋아! 3분 단축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하던 수미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전철은 또 어떻게 타나?"
이 시간이라면 어느 전철역이라도 사람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곳 사당역은 특히나 환승역이었기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개미떼처럼 거뭇거뭇 몰려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수미의 눈에는 그로테스크하게 비춰졌다. 저 징그러워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 속으로 다시 뒤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수미는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야! 신수미!"
복잡한 사람들이 얽히고 섥힌 소음의 언저리에서 너무나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미의 등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현주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너 전화는 왜 안 받아?"
수미의 어깨를 덥썩 잡으며 말을 건넨 이는 놀랍게도 그녀의 단짝 친구인 현주였다.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그녀는 너무나도 반가운 친구이자 지각이라는 고된 시련을 함께 넘어서야 할 든든한 전우였다.
중학교 입학 이후 줄곧 수미와 함께 붙어 다닌 현주는 화려한 아이였다.
화려하다고 해서 허영심이 많다거나 하는 식의 나쁜 의미가 아니라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의미였다. 커다란 눈에 오똑한 콧날,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선홍빛 입술까지, 누구나 호감을 가질법한 외모 뿐만 아니라 뛰어난 언변에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펼 줄 아는 당당함까지 갖춘 현주는 그야말로 화려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적어도 수미가 바라보는 그녀의 친구, 현주는 그런 아이였다.
"응? 전화했었어? 잠시만!"
전화벨소리는 커녕 핸드폰조차 오늘 하루 꺼낸 적이 없었던 수미는 의아한 얼굴로 교복 주머니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그녀의 핸드폰은 신기루라도 된 듯 손에 잡히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버림 받은 고양이마냥 울상이 된 얼굴로 현주를 바라본 수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핸드폰 집에 두고 왔나봐."
"으이구! 이 바보야!"
현주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살짝 꿀밤을 때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미는 혀를 삐죽 내밀며 아픈 시늉을 해보였다.
"아프잖아!"
"아프기는 뭐가 아파. 내가 얼마나 살살 때린건데 또 엄살 피우기는! 그리고 핸드폰은 오늘 하루 쯤 없어도 되잖아. 어차피 연락 올 데도 없을테고."
정곡을 찌르는 현주의 낭랑한 목소리에 수미의 표정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그것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진실이었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상했다. 수미는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현주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되레 큰 소리로 무안함을 감추려 했다.
"엄마한테 연락 올 수도 있단 말이야!"
"너희 어머니께는 내가 메시지 보내놓을게. 따님이 핸드폰을 두고 외출 했사오니 연락할 일이 있으시면 제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세요 하고 말이지. 그러니까 빨리 가자! 늦었다고! 나 너 데릴러 왔는데 나까지 늦으면 곤란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되받아 친 현주에게 다시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수미는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 뒤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만큼이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현주가 앞장서서 달렸다. 하나로 높이 묶어올린 현주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수미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현주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매일 아침 다니던 잠실역으로 향하는 2호선 게이트가 아니라 4호선 게이트였다. 하룻밤 사이에 잠실에 있던 학교가 4호선 부근으로 이사를 했을리는 만무한 일이니 수미는 당황스런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현주야? 2호선 타야하잖아?"
"2호선? 아니야 4호선 맞아. 내가 아까 핸드폰으로 다 검색해서 확인해 봤어."
"아니 여기서 잠실까진 2호선 타야하잖아?"
"잠실? 아! 신수미 너도 참 어지간하다. 이런 애가 내 친구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잠실' 이라는 수미의 한마디에 그제야 현주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수미가 약이 오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왜! 우리 학교 잠실에 있잖아!"
"그래, 그래 학교는 잠실에 있지. 그런데 오늘 소풍간다고 국립 중앙 박물관 앞으로 각자 모이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어제 종례 시간에 담임이 다 얘기했잖아. 박물관으로 소풍 간다고 그렇게 싫어하더니 아예 기억을 다 지워버린 거야?"
"아, 아니야! 소풍가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단 말이야……."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는 아무리 항변을 해봤자 별다른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실랑이를 벌일 새도 없이 플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결국 수미는 잠자코 현주를 따라 회기역으로 향하는 4호선 열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전철 안에서 간신히 손잡이를 붙들고 둘만의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 그녀들은 재기발랄한 10대 중반의 소녀들 답게 이내 자신들만의 화젯거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미야 너 어제 음방 봤어? DB 오빠들은 진짜 너무 멋있는 것 같아."
"어제? 아, 음 뭐."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주의 물음에 수미는 대충 아무렇게나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주가 말하는 DB는 바로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인 드라이브 B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비쥬얼적인 부분은 물론 멤버 다섯명이 모두 작사, 작곡 및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음악적 재능까지 겸비한데다 노래 실력마저 뛰어난 편이었기에 실력파 아이돌로서 최근 가요계에 급부상하고 있는 가장 핫한 보이그룹이었다. 애초에 아이돌이니 연예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수미였지만 그럼에도 DB 만큼은 단짝인 현주가 매일 노래를 부르다시피 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어디서나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외모와 쾌활한 성격 탓에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로부터 항상 주목을 받아 왔고 인기가 많은 현주가 왜 이렇게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것인지 수미는 솔직한 심정으로 의아했다. 수미의 눈에는 TV에 나오는 아이돌들보다 훨씬 현주가 아이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짝 친구인 수미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할 뿐이었고 정작 현주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현주의 장래희망이 바로 아이돌이기도 했다.
"참! 이번 주말에 에이피아 엔터테인먼트 오디션 있는데 같이 가 줄거지? 응?"
"오, 오디션? 글쎄."
"야 넌 친구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그러기야? 운이 좋으면 DB 오빠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응, 응? 게다가 오늘 나때문에 너 학교 갈 뻔한 거 박물관 가는거잖아. 내가 사당역에서 안 기다리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니까 응? 수미야."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기에 수미는 현주의 간곡한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심 오디션을 보는 현주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 하며 자신을 합리화 해봐도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우와! 엄마 저기, 저기 슈발리에야!"
전철의 투명한 유리창에 뽀얀 입김이 서리도록 찰싹 달라붙어 있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돌아보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덕분에 전철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고, 그것은 수미와 현주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 슈발리에 RF-1 시작기다!"
차창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한강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람의 형태를 지닌 거대한 로봇이었다. 투박하기 그지 없는 형태로 멋스러움은 없었지만 전고 8m에 달하는 거체는 그 몸집만으로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RF-1은 프로토 타입의 기체라 다른 기체들에 비해 크기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슈발리에는 슈발리에네. 아 멋있어! 타보고 싶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창 밖의 거대 로봇 슈발리에 RF-1을 바라보던 수미는 얼른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하지만 집에 두고 온 핸드폰이 이제와서 주머니 속에 얌전하게 들어 있을리는 없었다. 허둥지둥대며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수미의 코 앞으로 들이 밀었다.
"자! 사진 찍고 네 폰으로 전송시켜. 그럼 되지?"
"고마워 수미야!"
빼앗듯이 현주의 핸드폰을 낚아 챈 수미는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띄우며 핸드폰 카메라의 렌즈를 슈발리에 RF-1 시작기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현주는 버릇처럼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는 말았다.
슈발리에 RF 시리즈, 통칭 슈발리에로 불리우는 이 거대한 로봇은 국지전에서의 보다 유용한 전투를 핵심 전제로 하여 개발된 고기동 인형 병기로서 과거 전차나 전투기가 수행했던 전술 병기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최신 병기였다. 현재 4세대의 개체까지 개발되어 있는 상태로 각국에서는 특색에 걸맞는 다양한 이름을 부여해 이미지를 차별화 시키고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보통 고기동 인형병기라 하면 슈발리에로 알려져 있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러한 전술 병기인 슈발리에가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음에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과학의 흐름 속에서 전술적 핵심 병기인 슈발리에 역시 해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되는 기술의 진보 속에서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슈발리에는 함부로 폐기하기에는 너무나도 고가의 병기였다. 더군다나 활용 가능성도 무궁무진 했기에 최근에는 전투용으로 유용성이 떨어진 구형의 슈발리에 RF-1 시작기의 경우, 재해복구 현장 같은 곳에 투입되어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좋아?"
"응?"
"저 커다란 로봇 말이야."
"슈발리에 RF-1 시작기 말하는거야? 글쎄, 시작기도 멋있긴 하지만 역시 최신 모델인 RF-4가 난 더 좋더라. 사진으로 밖에 보진 못했지만 너무 멋있더라구.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어!"
"그, 그래. 그렇구나."
수미의 열성적인 모습에 현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전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던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둘의 모습이었다. 현주에게 아이돌이라는 꿈이 있듯이 수미에게도 슈발리에의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꿈을 갖고 있었음에도 수미와 현주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
"다음 역은 이촌, 국립 중앙 박물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수미야 다 왔어! 내리자!"
거대 로봇 슈발리에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수미의 팔을 잡아당긴 현주는 가까스로 전철의 출입문이 닫히기 전에 내릴 수 있었다.
"어휴, 진짜 신수미 넌 못 말리겠다. 도대체 그런 로봇이 어디가 좋다고……. 아, 정태 오빠다!"
한바탕 수미에게 핀잔을 늘어 놓으려던 현주의 시선이 전철의 플랫폼에 설치된 브라운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곳에서는 드라이브 B의 리더인 정태가 출연한 이온음료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현주가 수미를 나무랄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차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 넘실거리는 초록빛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수미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솨솨.' 나뭇잎들이 부대끼는 소리.
박물관에는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도착해 있었고, 선생님이 인원 점검을 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수미와 현주의 모습을 발견한 동급생 하나가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지금 안 온 사람이 수미랑 현주 둘 뿐인가? 반장 둘한테 전화 해봐."
"선생님 저기 수미랑 현주 오고 있어요."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수미와 현주는 뛰는 시늉을 하며 아이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다가왔다.
"신수미, 정현주. 너네 둘이 제일 늦었다."
"선생님 진짜요?"
"거봐! 내가 뛰자고 했잖아."
"수업이 9시 시작이니까 소풍도 9시까지만 오면 되는 거 아니었어?"
"둘 다 그만!"
어느새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수미와 현주의 모습에 선생님은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소풍이라고 하지만 현장 체험 학습의 일환이니까 야외 수업이라고 생각하고 박물관 안에서 너무 떠들지 않도록. 그리고 혼자 움직이지 말고 최소 2인 이상 조를 짜서 박물관을 관람하고, 그리고 조별 감상문은 다음주 월요일까지 제출하면 되겠지?"
"선생님! 무슨 감상문이에요!"
"맞아! 소풍을 박물관으로 온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우우! 감상문 물러가라!"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에 반 아이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일제히 아우성을 치며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물론 담임인 그라고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꽃다운 나이, 이팔청춘이라 불리우는 열여섯살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의 소풍 장소로 박물관이 썩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쉿! 박물관에서 떠들면 안된다고 했지? 12시까지 조별로 관람을 마치고 다시 이 장소로 집합해. 그럼 인원 점검 한 후 바로 마칠테니까 알겠지?"
"네……."
아이들은 모두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은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감상문에 대한 불평불만과 걱정은 금세 잊어버린 채 언제 그랬냐는 듯 잡담을 나누며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자자, 얼른 조 짜고 입장해. 감상문 제출 해야 하니까 3시간 동안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봐야 할거다. 선생님이 일일이 다 읽어 볼거니까 베끼면 안되는 건 알지?"
담임 선생님의 으름짱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답하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미야 이것 좀 봐봐!"
호들갑을 떨며 현주가 내민 것은 박물관 입구에 놓여있던 팜플렛이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이 빳빳한 그 종이에는 이런 저런 박물관 내부의 사진들과 까만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흥미가 동할 것이 하나도 없는 팜플렛에서 시선을 뗀 수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처음 마주하는 공간, 맨질맨질하게 빛나는 바닥을 따라 보이는 박물관의 저 편은 미지다. 이미 몇몇 아이들은 조를 이루어 저 편의 미지를 향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박물관 내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처음 맡는 냄새,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책장의 헌 냄새가 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녀갔을 발자취가 뒤섞여 사람 내음도 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담임 선생님이 박물관의 데스크에서 큐레이터로 보이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어디 먼저 보러 갈까?
팜플렛을 뒤적이는데 열중이었던 탓인지 수미의 무사무려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현주는 그렇게 물었다.
"글쎄……? 아무데나? 근데 우리 둘이 갈 거야?"
"응? 그럼 누구 또 같이 갈 애 있어? 다른 애들 다 들어가지 않았나?"
현주의 반문에 수미가 슬며시 박물관의 출입문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쭈뼛쭈뼛한 얼굴로 손 끝을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하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현주도 익히 알고 있는 아이였다.
왕따라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귀여운 인상의 그녀의 이름은 아마도 한다혜였을 것이다. 새학기가 시작된지도 벌써 두달이 다 되었건만 같은 반임에도 불구하고 다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인상이 희미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박물관에 와서조차 다른 아이들과 조를 이루지 못한 채 입구에 외로이 서 있었다.
"둘 보다는 셋이 더 낫겠지?"
"그래, 그러자!"
수미의 물음에 현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의 의견이 모아지자 수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성큼성큼 다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다혜야 아직 조 안 짰으면 우리랑 같이 다닐래?"
"응?"
갑작스러운 수미의 제안에 놀랐던건지 뿔테 안경 너머 다혜의 새까만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수미는 그런 다혜의 반응이 귀엽게 느껴졌다. 물론 수미의 등 뒤에서 그 둘의 하는 요량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현주의 눈에는 다혜나 수미나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 둘이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셋이 돌아다니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같이 가자!"
아름다운 외모와 활달한 성격 탓에 반 아이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현주까지 그렇게 살갑게 설득하고 나서자 다혜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었던 일행은 셋이 되었다.
낯선 미지를 탐험하려는 모험가들처럼 파티는 꾸려졌다. 세명의 소녀는 박물관 내부를 향해 씩씩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근데 어디부터 먼저 가야하지?"
출발한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당면한 문제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소풍이라고 해도 사실 감상문을 제출해야 했으며, 게다가 3시간이라는 시간 제한이 단서로 붙어 있었기에 아무 전시실이나 내키는데로 막 돌아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어……. 여, 여긴 어떨까?"
같은 조를 이루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거의 말이 없던 다혜가 먼저 말을 건넨 것이 뜻밖이었기에 수미와 현주는 살짝 놀란 얼굴로 다혜를 바라봤다.
"아, 아니 그냥 아니야."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다혜는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내밀었던 팜플렛을 다시금 감추려 했다. 그러나 수미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응? 이거 나도 갖고 있어! 우리가 아까 봤던 거잖아?"
수미의 손에 들려진 팜플렛을 본 현주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똑같은 것을 꺼냈다. 분명 아까 수미가 보았던 그 팜플렛이었다. 다만 그때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대충 훑어보다 시피해서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전혀 살펴보지 않았지만 다혜의 것은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 이라는 부분의 페이지가 펼쳐져 있어 한눈에 들어왔다.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 여기?"
"그, 그게 안 가도 돼! 근데 어, 음. 이왕 갈거면 거긴 어떨까 싶어서……."
"그래? 그럼 다른데 가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다혜의 모습이 귀여워 현주는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다혜는 금세 풀이 죽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 응."
"장난이야 장난. 어차피 우리 갈데도 없었으니까 여기 가면 되겠다. 괜찮지 수미야?"
"주제를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이라고 잡으면 감상문 쓰기도 편할 것 같고, 3시간 안에 전부 다 해치울 수도 있을 것 같고. 난 괜찮은데? 근데 다혜는 원래 이런 걸 좋아했어?"
"조, 좋아하기 보다는 그냥 관심이 있었어."
다혜는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도 그녀의 이런 소극적인 성격 탓에 귀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채 친구도 별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수미는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앞으로는 그녀를 잘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빨리 보고 뭐라도 먹으면서 놀아야지!"
한발짝 앞서 나가 뒤를 돌아 다혜와 현주에게 눈을 맞춘 수미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리고는 이미 먼저 박물관 안으로 사라진 아이들이 갔던 길을 따라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수, 수미야!"
"응? 왜?"
다급한 다혜의 부름에 수미가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어진 다혜의 조심스러운 한 마디.
"거기 아닌데……."
수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현주는 박물관이 떠나갈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거기로 가도 되지만 그럼 돌아가는 거라서……. 이, 이리로 가는 게 더 빨라."
결국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이 열리는 전시실까지의 안내는 다혜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이전에도 몇차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와본 적이 있었기에 팜플렛만을 보고도 전시실까지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밖에 없나봐? 다른 애들은 다 다른데로 갔나?"
특별 기획전이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넓디 넓은 전시실 안에 현주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이 커다란 전시실은 어쩐지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우와아아아!"
얼어붙은 듯 전시실의 입구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다혜의 입에서 순간 괴성이 흘러나왔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시실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수미도, 왠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에 어깨를 감싸고 있던 현주도 놀란 얼굴로 다혜를 돌아보았다.
"다, 다혜야?"
그러나 다혜는 현주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이미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사이를 누비며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황당한 얼굴로 다혜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미와 현주의 시선이 문득 마주쳤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장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 같은데?"
"너 같애."
입가에 절로 웃음이 어렸다. 확실히 저렇게 유물에 열중하고 있는 다혜의 모습은 슈발리에에 빠진 수미와 비슷했고, 아이돌에 빠진 현주와도 비슷했다. 어쩌면 다혜와는 의외로 잘 통하는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수미와 현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도 사진이나 대충 찍자. 감상문 쓰려면 뭐라도 있어야 할테니까."
"그래, 그럼 난 이 쪽으로 돌면서 찍을테니까 현주 넌 저쪽으로 돌면서 찍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한 수미와 현주가 반대편 방향으로 헤어졌다.
소풍이라는 명목하에 찾은 박물관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소풍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마 다혜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수미와 현주만큼은 소풍이 아닌 감상문을 쓰기 위한 일환으로 이곳 전시실을 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터운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유물들은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유럽에서 쓰였던 물건들이나 복식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수미는 유물 앞에 간략하게 쓰여진 설명조차 전부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버렸다. 유물을 관람하기보다는 감상문을 쓰기 위한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데만 급급했다. 무언가 안타까운 상황이긴 했으나 열여섯살 소녀들의 소풍 장소로 박물관을 택한 것 자체가 훨씬 안타까워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표정없는 얼굴로 묵묵히 사진만을 찍고 있던 수미가 문득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슈발리에를 발견했을 때 처럼 수미는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미의 시선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은 바로 기다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전시실의 한 쪽 외벽에 거치되어 있는 그 검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두터운 유리벽 너머가 아니었다. 그저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 검은 빛나고 있었다.
전시실의 불그스레한 조명 불빛마저 미끄러질 것 같은 고아한 은색의 검신에는 낯선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황금색의 힐트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형태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그 검을 신비롭게 하는 듯 했다. 그랬다. 수미는 지금 이 낯선 한 자루의 검에 홀려 버린 것이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검신을 바라보고 있던 수미의 가느다란 손 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던 현주가 그런 수미의 이상스런 행동을 발견한 것은 그녀의 손가락이 검 끝에 닿기 직전의 일이었다.
"야! 신수미!"
"악!"
현주의 외침과 수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거의 동시에 전시실 안을 울려 퍼졌다. 수미의 왼손에는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수미야!"
"수, 수미야 괜찮아?"
어느새 달려온건지 다혜 역시 안절부절한 얼굴로 수미의 손가락을 살피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날에 베였음에도 깊은 상처는 아니었기에 현주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굳히며 수미를 나무랐다.
"너 도대체 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거야? 왜 갑자기 칼은 만지려고 해!"
"아니, 그게 아니라……."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몰아 붙이는 현주의 모습에 수미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의 현주는 정말 무서웠던 터라 수미는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다친 것은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 현주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유별난 상황이었건만 그만큼 현주가 자신을 걱정하고 아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수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은 수미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수미는 전시실 벽면에 거치되어 있는 그 검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놔둘 정도면 분명 모조품인데다가 모조품에는 날도 서 있지 않을텐데……."
다혜가 의아한 얼굴로 유심히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수미가 그랬던 것처럼 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현주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너까지 무슨 짓이야!"
"아, 아니야. 이것 봐봐. 날이 안 서 있어."
"응? 정말이네?"
그랬다. 다혜의 말대로 수미가 손가락을 베였다고 생각했던 그 칼에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다혜가 아무리 손가락으로 검날을 눌러 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현주 역시 검날에 손을 대보았지만 그저 차가운 금속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미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현주의 목소리에 놀라 손가락을 검날에 베였다. 방금 전의 일이니 그녀가 착각을 할리도 만무했고, 분명히 날카로운 검날에 베이는 촉감도 있었다. 하지만 검에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아무리 수미가 부정을 한다해도 검에는 날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베였더라면 조금이라도 핏방울이 맺혀있을 법도 한데 그런 흔적조차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에 베인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빠르게 스치면 이런 모서리 같은 곳에도 베일수가 있으니까."
"어쨌든 많이 안 다쳐 다행이야."
다혜의 말처럼 분명 다른 곳에 베였을 수도 있는 것이었고, 현주의 말처럼 많이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일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수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이 검에 베인 것이 맞는데, 자신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주변의 모든 정황이 그 감각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합리했다.
"일단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약 바르고 반창고라도 붙이든가 하자! 사진은 다 찍었지?"
"대충은."
"으, 응."
아직도 무언가 께름칙한건지 수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여전히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에 다혜는 이대로 전시실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유물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다혜의 그런 반응에 현주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덧붙였다.
"얘가 뭐 곧 죽을 정도로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자료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다혜가 좀 남아서 더 찍어줄래?"
"그, 그래도 돼?"
"그래! 대신에 다 찍고 나올 때는 전화해줘. 알았지?"
"응! 알았어! 꼭 전화할게!"
밝은 미소를 띄우며 흔쾌히 대답하는 다혜 덕분에 현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시실을 나설 수 있었다. 다만 수미만큼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검을 노려보며 현주의 손에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전시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수미와 현주가 없는 전시실, 다혜마저도 여러가지 유물들을 살피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을 즈음 전시실의 한 쪽 벽에 거치되어 있던 그 검의 은빛 검신에서 붉은 핏자국이 어슴푸레하게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 손잡이를 당기며 들어선 집 안은 고요했다. 그리고 싸늘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 안, 모든 것이 수미가 집 밖을 나섰던 아침과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엄마는 아직도 안 왔나?"
새벽까지 촬영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방송국 일이라는 게 워낙 불규칙한 것이라 수미라고 해서 엄마의 스케쥴을 모두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 나이 쯤 되면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수미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풍 덕택에 수업이 일찍 끝나기는 했지만 현주와 다혜, 셋이서 함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기에 이렇게 시간이 늦어버리고 말았다. 틈틈이 군것질을 했기에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리모콘을 집어 들어 TV를 켠 수미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TV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적막한 집 안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물품 중 하나가 도난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물품은 유럽 문화 특별 기획전을 위해 영국에서 대여해 온 것들 중 하나로 다행히 전시를 위한 모조품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보안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 최대의 박물관인만큼 보안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텐데요……."
텅 빈 거실, 수미가 켜놓은 TV만이 외로운 독백을 거듭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수미는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늦잠을 자느라 워낙 정신 없이 아침에 집을 나섰던 터라 정말 방 안은 온통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들어 차곡차곡 개어 옷장에 넣고는 침대에 반쯤 걸터 있는 이불도 다시 정리했다.
대충 보이는 것만이라도 어느 정도 치우고 나자 그나마 방이라고 부를만한 수준은 된 것 같았다. 수미는 가방을 벗어놓고는 반바지에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아아함."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아침부터 여지껏 돌아다녔던 탓인지 수미는 졸린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욕실로 향해 대충 세안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거실에 켜둔 TV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TV를 끄고 싶지는 않았다.
똑바로 올려다 본 천장에는 새하얀 형광등의 불빛이 눈가를 따갑게 찌르는 것만 같았다. 수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TV 소리를 자장가 삼아 환한 형광등 불빛을 무섭고 외로운 어둠 대신으로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드는 수미였지만 오늘만큼은 웬일인지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없었음에도 잠이 깨고 말았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 였기에 수미는 그대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불편했다. 왠지 모르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고,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불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수미는 억지로 눈을 비비며 방 안을 둘러 보았다.
불을 켜두고 잤던 터라 눈을 뜨자마자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는 통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미는 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잔상이나마 그것이 어딘가에서 보았던 물건임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시력이 회복되자 수미는 그것의 형체를 또렷이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
휘영청 밝은 달빛이 비추는 새벽의 어느 한 때, 떠나갈듯이 시끄러운 비명 소리 하나가 고요하기만 했던 깊은 밤의 도시를 달음질쳤다. 그랬다. 그것은 수미가 박물관에서 본 그 검이었다.
심호흡을 거듭하며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수미는 물끄러미 검을 바라봤다.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검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미는 검 주변으로 손을 뻗어 휘저어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놀랍게도 그 검은 말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수미는 얼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이런 장면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두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에게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소녀여."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났다.
"마, 말을 했어?"
수미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린지도 모른 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허공에 검이 떠 있다는 것만 해도 이미 해외토픽감인데 말하는 검이라니, 신수미 16년 평생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피의 계약에 따라 합당한 자격을 지닌 그대에게 묻나니."
"네, 네? 무슨 소리야?"
"그대는 용의 섬김을 받겠는가?"
"네? 그게 뭐에요?"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 이상한 검과의 일방적인 대화에 질려버릴 대로 질려버린 수미는 무섭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다고 계약 성립이란 말인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 시켜버리다니 무슨 보이스 피싱도 아니고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무, 무슨 소리냐구요!"
그리고 이러한 수미의 격렬한 항의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허공에 떠 있던 검에서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두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돌풍에 방 안의 물건들이 휩쓸려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이내 검을 중심으로 눈부신 빛무리가 폭발하듯이 터져나왔다.
"사, 사람……?"
희뿌연 빛무리의 너머로 어렴풋이 보인 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수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나는, 아."
검이 사라진 자리에 우뚝 나타난 소년은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수미를 바라보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빛이 부서지는 듯한 화려한 백금발의 머리카락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는 앳된 얼굴 탓에 중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게다가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독특한 분위기의 복장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옛 신화속에서 얘기되는 고대인들의 그것과도 비슷한 차림이었다. 그는 천천히 쓰러져 있는 수미를 향해 다가가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또래 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편에 속하는 수미였지만 소년 역시 170 남짓 되어보이는 작은 키였기에 어쩐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수미를 침대 위에 눕히고는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나는 브리튼의 용이다. 꼬마 아가씨."
수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렇게 중얼거린 소년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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