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그 바보와 히로인은 후회하지 않아!
글쓴이: OneWayStreet
작성일: 12-10-31 23:38 조회: 4,705 추천: 0 비추천: 0
?

~prologue~

쓸 때 없는 짓 이란 걸 해본 적 있어?

예를 들어, 국어책에 학교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처음부터 세어 봤다던가, 종례가 끝나면 청소당번들이 치울 교실을 체육시간에 혼자 남아 청소를 했다거나 하는 등 해봤자 아무런 득 될 것 하나 없는 그런 짓 말이야.

대부분 사람들은 수업시간이 너무 지루했다거나,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거나, 그냥 한번 쯤 해보고 싶었다거나 하는 이유로 한 번 쯤은 해 봤겠지만 그 쓸 때 없는 짓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만약에 그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을 밥 먹듯이 해대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이렇게 부를 거야.

멍청이.

그리고 씁쓸하게도 나는 그 ‘멍청이’중 하나란 말이지. 아, 하지만 그냥 멍청이는 아니야.

담임과 상담 전문가조차 고개를 저으며 “그는 좋은 멍청이였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의 도저히 구재할 방도가 안 보이는 멍청이 중의 멍청이 바로 왕 멍청이라지!

…………

아니… 뭐… 나도 자랑 할 만 한건 전혀 아니란 건 알고 있고 안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도하고 있긴 한 대, 이놈의 몸이 전혀 따라 주지를 않는다고요.

그 덕분에 지금도 숨이 턱을 뚫고 머리 끝 까지 차올라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10분 째 좁은 골목길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거라지. 한 손으로는 생판 처음 보는 여자애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이야.

“케헥…! 헤엑…! 끄허억…! 아이고 나 죽네!”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저질 체력이시네요 당신.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사막 한 가운데에서 늘어져 있는 불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니 어떤 의미로 굉장한데요.”

“헤엑…! 시… 시끄러! 그보다 그 녀석들 이제 안 쫒아 오냐?!”

소녀는 무표정으로 비어있는 왼쪽 엄지손가락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당장 거기 서! 이 빌어먹을 애송이 자식아!”

“젠장할! 그냥 저 애새끼 머리통에 구멍하나 뚫어서 멈추게 만들까요?”

“안 돼. 이런 곳에서 민간인을 함부로 건들면 귀찮아지니까 처리하려면 잡아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쥐새끼도 모르게 없애버려야지!”

오메 저게 뭔 소리래!?

아이고! 하느님 아버지!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어여쁜 여고생이 아닌 수상쩍은 검은 정장아저씨들한테 쫒기는 상황에 처해야 하는 겁니까!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라고 속으로 신한테 열심히 하소연을 해봤지만 이놈의 시궁창 같은 현실은 뭐 변화가 없다.

아아, 이거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후회된다. 오늘은 상황이 요따구인 만큼 더.

아까 그 골목길 입구에서 그런 쓸 때 없는 짓거리만 안했다면 지금 이런 일을 겪고 있을 리 없을 텐데.

만약 시간을 되돌리게 돼서 다시 그 골목길 입구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때야 말로…!

~1장. 현실은 때때로 소설보다 굉장한 반전이 있다지!~

“하아… 이거 주말에는 알바를 하나 더 뛰어야 하나…”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폐보다 짜잘한 영수증이 더 많이 들어있는 눈물이 절로 나오는 지갑을 들여다보며 걷고 있었다.

다음 아르바이트비가 나오는 날 까지 일주일은 남았는데 지갑에 남아있는 돈은 겨우 2만원. 고등학생의 용돈으로만 본다면 넉넉한 편이지만, 혼자서 자취를 할 때 필요한 생활비로 본다면 빠듯한 금액이다.

“역시 지난주에 수재민 돕기 성금이랑 불우이웃 돕기를 30만원이나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도 개조하지 않은 학교지정 교복에 염색이나 파마도 하지 않고 적당한 길이로 자른 머리. 귀나 손목에도 장신구 따위는 없고 신발과 가방도 초승달이랑 닮은 마크가 새겨진 유행하는 것이 아닌 일명 S.J라 불리는 동네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딜 봐도 사치랑은 거리가 멀다 못해 빈곤해보이기 까지 하는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이렇게 생활비가 모자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성금 때문이다.

매달 모금함에 봉투를 집어넣을 때 마다 속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다’를 반복하지만, 다음 달만 되면 또 다시 봉투를 들고 모금함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내가 있으니 이건 알코올중독이나 인터넷 중독도 아닌 모금 중독 이라고 봐도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생활비는 쪼들리게 되고 월급날 직전에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아침은 원래 안 먹고 다니고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고 저녁은 알바를 하는 편의점에서 제공해주니 굶을 걱정은 없다는 것 정도.

…그다지 위안이 안되는 게 함정이지만.

“에휴… 빨리 갈아입고 알바나 가야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한숨만 나오는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항상 이용하는 지름길인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길의 분위기는 차마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막다른 갈림길이 한 두 곳이 아니고 높은 담벼락과 지붕이 햇빛을 대부분 가려 언제나 어두운데다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 사방곳곳에는 숙성된 쓰레기와 벌레가 돌아다닌다.

게다가 가끔씩 특별 옵션으로 종이막대로 입에서 하얀 안개를 뿜어내는 마술사 형들까지 붙어 있으니 여기를 지날 때는 항상 귀를 쫑긋 새우고 마술사 형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싶으면 망설일 것 없이 back.

만약 여기서 마술사 형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서도 ‘시간은 금이다!’같은 소리를 하며 전진을 계속하다간 지갑에 진짜 영수증 빼곤 아무것도 안 남는 수가 있거든.

다행이도 오늘은 하얀 안개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는걸 보니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있을 같았지.

그 소리를 듣기 전 까지는 말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하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은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걷는 속도를 올리기로 하고 발걸음을 내딛은 그 때, 어디선가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몰렸으니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순순히 따라 와라.”

“뭘~ 그렇게 겁먹을 건 없어. 넌 아직 쓸모가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러니까 그냥 따라 와. 응? 이 아저씨들도 매너란 게 있어서 말이야. 너도 일단은 계집애고 말이야. 안 그래? 하하!”

이거… 아무래도 저쪽에서 누가 이미 뜯기고 있나본대. 그런 거라면 미안하지만 나는 이름 모를 그대를 제물로 삼아 도망가는 수밖에 없겠구려.

애도라고 할까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담긴 인사를 보내며 왔던 길로 다시 방향을 틀었지만, 그 순간. 돌연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나를 엄습했다.

가만… 돈을 뺏는 거면 이 자리에서 뺏으면 될 일인데 따라오라고…? 쓸모가 있다는 건 또 뭐고? 거기다가… 계집애…? 그렇다는 건…

이… 이거 설마! 뉴스에서 보던 그 납치 감금 ㅅ… 성폭행?!

그런 거면 완전 큰일이잖아?! 경찰! 경찰은 어디 있소?!

허둥대며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112번을 누르자 한 번의 짧은 연결 음 후, 금세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고를 하고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저, 저기요. 여기 지금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거든요? 빨리 포돌이… 가 아니라 경찰 좀 보내주세요!”

“진정하시고 상황을 침착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에, 그러니까 말이죠! 그 뭐시냐! 그거! 그거! 아아! 성폭행!”

“……네?”

이게 아닌데?! 이러면 무슨 범죄 예고 같잖아! 아이고. 평소에 책 좀 많이 읽어둘걸!

“조급해 하지 마시고 천천히, 정확한 상황이랑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역시나 프로라고 할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순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금세 침착한 태도로 대화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위, 위치는 R.C마트 근처 골목이요! 그, 그리고 상황은 그러니까 남자 셋이랑 여자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지, 지금 성폭행이요!”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이 남성 세 명이 여성 한 명을 R.C마트 골목길에서 성폭행 하려는 중이다 이 말씀이신가요?"

"네, 네! 그겁니다 그거!"

나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한다고 애쓴 거지만 여전히 알아먹기 힘든 말을 상담원은 이번에도 프로답게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서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네! 빨리 좀 부탁드릴게요!"

"아니요 그게… 죄송합니다만 현제 신고가 평소보다 많이 접수된 상태라 아무리 빨리 도착한다 해도 15분은 걸릴 것 같습니다만…"

……뭐?

무사히 신고를 끝마쳤다고 생각하며 안심하려던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상담원의 충격적인 말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15분. 초단위로 환산하면 900초. 그만큼을 기다려야 저 골목길 너머에 있는 여자애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니, 그때라도 과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까? 저 녀석들은 여자애를 납치 하려고 하는 중이다. 소리가 들린 곳은 막다른 길 쪽이라 이쪽에서 나오는 것을 못 봤으니 아직은 그대로 있겠지만 1분 후, 2분 후, 3분 후 에도 저 애가 저곳에서 무사히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대 자그마치 15분을 가만히 기다리라고?

아주 웃기고 자빠졌네…!

"저기요…? 괜찮…"

탁!

상담원이 또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했지만 더 이상 예기할 여지 따윈 없었다. 핸드폰을 거칠게 덮은 다음 배터리를 빼버리고선 가방과 함께 근처에 대충 던져버렸다.

그리고, 떨리는 두 다리를 사정없이 채찍질해 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간 다음,

"그만 둬! 이 개자식들아!!!!!!!!!!!!"

외쳤다.

정확히는 외치면서 뿌렸다고 해야겠지.

지갑에 한가득 있던 영수증들을 양손에 움켜쥐고 그곳에 있던 세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을 향해 있는 힘껏 뿌려버렸다.

“뭣, 뭐야 이게!?”

예상대로 갑자기 영수증 폭탄이라는 기상천외한 공격을 당한 세 명의 남자들은 혼란에 빠져 양팔을 허공에 마구 휘젓고 있었고, 그 틈을 놓칠세라 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소녀에게 달려가 그 손을 거칠게 붙잡았다.

“지금이야! 빨리 도망가자!”

이런 개판인 상황에 뜻밖에도 소녀는 침착함을 넘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열다섯 살 쯤 되 보이는 작은 채구의 소녀는 허벅지 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의 긴팔 티셔츠와 거기에 가려져 끝자락만 간신히 보이는 하얀색의 매우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전체적으로는 흑색의 단발이었지만, 사이드테일로 묶고 있는 옆머리만은 팔꿈치 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외모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면 한번쯤은 돌아볼 정도로 귀여웠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사태다. 아무리 귀엽다 한들 실실거릴 여유 따윈 있을 리가 없고 일단은 도망치고 보자는 생각으로 달리려 하던 그 때,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소녀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요? 당신. 다짜고짜 숙녀의 손을 잡다니 변태신가요?”

…………

어라…? 이건 대체 무슨 전개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받는 소녀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면서 [다… 당신은 대체…!?]라며 물어 주인공이, [그건 나중에! 일단 뛰어!]라고 대답한 후 나중에 두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꽃피는 전개는 흔히 있다지만 다짜고짜 변태로 몰아버리는 전개라니! 이런 막장 스토리 듣도 보도 못했는댑쇼?!

“뭔가요. 왜 대답이 없으신가요? 아, 혹시 제 손을 감상하느라 언어를 잊어버리신 거군요. 당장 놓으시죠. 이 변태.”

“뭐야 그게!? 너 앞에 혹시 라고 했잖아! 근대 왜 뒤에는 확정인건데!”

“시간이 아까우니 그냥 변호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 뿐 인대요.”

제일 중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이… 이 자식! 뭐하는 놈이야!”

상황 파학을 전혀 못하고 있는 소녀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그 짧은 사이에 괴한들은 이미 혼란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하기야, 그도 그렇지. 뭐 연막탄을 던진 것도 아니고 영수증 뭉치에 뭘 더 바라겠어? 하하… 하이고 망했구나.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남의 일에 쓸 때 없이 끼어들었으니 그만한 각오는 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지?”

험악한 얼굴의 괴한들은 각자 손이나 목을 으드득 소리가 나게 꺾으며 도망칠 유일한 길목을 막아버렸다. 나름 위협을 하겠다고 이빨을 최대한 악 물고 괴한들을 노려보았지만, 쥐가 호랑이 앞에서 꼬리를 새운다고 호랑이가 겁을 먹을 리가 있나. 오히려 내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발뒤꿈치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슬쩍 고개를 들어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유리병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도 되어있지 않은 채 하얀색 대형마트 비닐봉지에 한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거다! 이것만 잘 이용하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어!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퍼즐을 맞추던 X탈출 게임의 주인공의 기분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옆에 있는 소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뭐죠? 그 몸값을 청구하려고 부모한테 전화한 유괴범이 할법한 대사는. 이제 그 다음은 경찰에 신고하면 가만 안두겠다~ 인가요?”

“…내가 잠시 동안 저 녀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테니까 ‘뛰어!’ 라고 소리치면 전속력으로 뚫고 달리자. 알았지?”

“주의를 분산시키신다고요? 설마 또 그 하얀 걸 뿌리실 생각이신가요? 맙소사, 게이 속성까지 갖춘 변태라니 제 앞날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냐!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고 한 번만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 주면 안 되겠냐!”

내 절실함이 와 닫은 걸까. 소녀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괴한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를 한 후, 괴한들이 눈치체지 못하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세를 좀 더 낮추고 양 쪽 팔을 슬그머니 뒤로 돌려 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앙? 어이 애송아. 이번에는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거냐?”

하지만, 괴한들도 바보는 아니다. 도망치던 녀석이 갑자기 멈춰 뭔가를 꼼지락 거리는 것을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못 알아볼 리 없었고, 중간에 있는 남자가 명백한 비웃음을 날리며 물어왔다. 나머지 두 명 역시 내가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던 아무런 위협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썩소를 지으며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나와 소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그래. 계속 그렇게 무시하고 있으라고. 그래야 준비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으니까.

음 그런데 말이지?

아오! 이 매듭 뭐 이리 단단히 묶어놨대!? 어차피 이런데다 무단투기 할 거면서 쓸 때 없이 말이야! 하여간 뒷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요!

잠시 동안의 매듭과의 사투 끝에 결국 간신히 푸는 것을 성공하자 괴한들 딱 좋은 거리까지 와 있는 상태였다. 나는 팔꿈치로 소녀의 다리를 툭툭 건드려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일어나 소리쳤다!

“뛰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멈칫한 괴한들을 향해 뒤에 감추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집어던지자 안에 들어있던 유리병이나 통조림 캔 같은 위험한 것부터 시작해 정신까지 데미지를 입힐 음식물 쓰레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괴한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 이건 또 뭐야!”

“너 이 애새끼가!”

“젠장! 이런 거였냐!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댁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내가 그걸 왜 던졌는데!

이번에는 무기의 질이 다른 만큼 괴한들은 혼란을 넘어 패닉 상태에 빠져 머리를 가리고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소녀의 손을 잡은 그때 얌전하다 싶던 소녀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을 따라가기 전에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제시해 주시…”

“제발 그냥 좀 뛰어라!!!!!!!!!!!!!!!!!!!!!!!!!!!!!!!!!!”

“…이거 괜찮은 건가요?”

대충 그런저런 사정으로 한참을 달려 이젠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와중에 손을 잡고 따라오던 소녀가 여전히 무감정한 어조로 물어왔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 허세를 부릴 여유가 있을 리가 없기에 나는 아주 정직하게 대답해주었다.

“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거든! 헤엑…! 무슨 좋은 방법 없냐!?”

그 말에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작게 콧방귀를 뀌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전 당신이 아니라 제가 괜찮은지 물었던 거 에요. 당신이 죽던 말던 딱히 상관은 없는데 다짜고짜 이런 길도 모르는 곳 까지 끌고 오셨으니 나중에 돌아갈 때 미아가 되면 어쩌란 건가요. 그러니까 그 저질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말도 못하게 되시기 전에 지도라도 만들어서 내놓으시죠.”

미아?! 이 상황에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냐! 목숨이 다섯 개 쯤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무슨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는겨!?

“…뭐 상관 없으려나요. 이제 슬슬 그게 나올 타이밍이니까요.”

…그거? 그거라니 대체 뭐야…?

순간 엄청난 불안감이 온 몸을 감돌았고, 잠시 후.

“케… 케헥…! 이, 이게 뭐시여?!”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막혔잖아?!!!!!!!!!!!!!!!!!!!!!”

난데없이 튀어나와 눈앞을 가로막은 5M쯤 되 보이는 벽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처절하게 절규했다. 소녀는 그런 나를 뭐 이리 한심한 놈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영화나 만화도 안 보나요? 원래 이렇게 쫒고 쫒기는 장면에서 장애물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연하긴 개뿔이! 그렇게 따지면 너무 부조리하잖아!”

“하아… 또 뭐가 말인가요?”

“영화나 만화에서는 말이다! 이런 장면에는 꼭 미소녀 구세주가 나타나서 도와주는 법이잖냐! 그런대 지금 미소녀는 고사하고 칙칙한 배불뚝이 중년 경찰도 안보이거든?!”

“아아, 그런 거라면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쪽에서 비슷한 게 오고 있으니까요.”

뭣이라! 어디?! 어디?! 나를 구해줄 미소녀님께서 어디서 오고 계신다는 거냐!

“저기 안 보이시나요? 마침 딱 맞게 도착한 것 같은데.”

나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으며 땅바닥에서 일어나 미소녀님께서 납신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대해 감상부터 말하자면,

최악이었다. 진짜로.

“허억…! 허억…! 드디어 잡았다 이 애송이자식…! 각오는 되어 있…”

“저게 어딜 봐서 미소녀 구세주야?!!!!!”

이 꼬맹이가 사람 가지고 장난치나! 저건 미소녀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아예 성별부터가 소녀가 아니잖아! 게다가 이쪽 편 도 아니고! 완전히 THE BAD AND 뜨기 직전이라고 이거?!

갑작스레 영문 모를 개소리를 지껄이는 내 모습에 쫒아온 괴한들은 오히려 당황하여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가 언제 미소녀 구세주가 온다고 했나요? 이런 상황에서 까지 어린 소녀를 겁탈할 생각을 하고 계신다니, 역시 저질 변태는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방금 뭔가 엄청나게 진실이 외곡 된 발언이 들렸는데?!

“화, 확실히 미소녀가 온다는 말은 안했어도 비슷한 게 온다며!”

그래! 이건 순수 100% 진실이다! 어디 변명이나 들어보자 요놈!

소녀는 핵심(?)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반론에 뭘 그리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한테야 어찌됐던 저한테는 이 이상 모르는 곳을 해매다 미아가 되는 걸 막아준 구세주들인데요? 설마 세 명 다 당신 같은 바보라서 돌아가는 길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아, 잠시 만요. 그렇게 따지면 길을 막아준 이 벽이 구세주 이려나요. 정말 고마워요 벽."

그렇게 말하며 벽면을 쓰다듬기 시작한 눈앞의 소녀.

그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이 자식들이 누굴 가지고 장난치나…!”

…문제는 아무래도 저쪽은 할 말이 넘치는 것 같다는 거지.

자기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바보 같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우리의 모습에 잠시 동안 얼이 빠져있던 괴한들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어느 세 정신을 되찾고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를 토해내며 선글라스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살의가 담긴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보았고,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 챈 다른 두 명의 괴한들도 재빨리 얼빠진 표정을 사납게 바꾸고 금방이라도 달라 들 것 같은 자새를 취했다.

“마지막 경고다 이 빌어먹을 꼬꼬마자식아. 뭐 같은 영웅놀이는 그만 집어 치우고 거기 계집에 이리로 넘겨. 만약 여기서 불응한다면…”

중간에 말을 흐리며 리더는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보던 상황인대 저거 서, 설마…

타앙??!!

역시 저거냐?!

리더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영화에서나 봐오던 이른바 권총이란 놈이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괴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발 앞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자그마한 싱크 홀이 하나 출연해 있었다.

“자. 결정해라 꼬맹이. 계집애를 넘길래? 아니면?”

자… 잠깐만…

철컥.

이… 이거…

“죽을 거냐?”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19년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마주쳐 본 적 없는 목숨이 걸린 상황에 다리를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리더는 두 발 째 총알이 장전된 총구를 들이대며 그 누구에게 들었던 것 보다 살벌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최악이라고 불러도 좋을 상황에도 여전히 무표정인 채로 침묵을 지키던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쓸 때 없는 바보짓을 잘만 해오시지 않았나요.”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로,

“지금도 다를 건 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보세요.”

두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어차피 여기까지 따라와 버린 이상 갑자기 등장해서 구해드리는 미소녀 히어로는 무리지만,”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채,

“그래도 미소녀 히로인 이라면 되어드릴 수 있으니까요.”

여느 때 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했다.

하, 하하하하. 미소녀 히로인이라니 이것 참. 하하하.

소녀의 말이 끝난 후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동안 굳어 있었지만 이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채하지 못하고 나는 미친 듯이 실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리더는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드디어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거냐. 그렇다면 계집에는 순순히 넘겨준다는 뜻으로 알겠다.”

리더는 들고 있던 총을 양복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선 나머지 괴한들과 함께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안돼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번에는 리더 쪽이 실소를 터트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벌벌 떨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주먹을 쥐고 어설픈 자세를 잡고 있었으니까.

“풉, 푸하하하! 너 지금 그게 뭐하고 있는 거냐? 하하하!”

“뭐긴 뭐야 권투지. 너는 올림픽도 안 보냐?”

“너? 하! 건방진 꼬맹이 자식이. 뭐 좋아. 그래서, 그건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냐고.

저 양반은 뭐 저리 뻔 한 걸 묻고 앉아있대? 히로인 앞에서 주먹을 쥐고 괴한들과 마주보고 있는 주인공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잖아?

“당연히 너희를 박살내고 이 녀석을 지킬 거라는 의미다 이 망할 자식들아!!!”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그 모습에 두 명의 괴한은 황당한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리더만은 점점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러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는 모르겠다만 소원대로 죽여주마 이 애송이 새끼야!”

살기가 가득담긴 노성을 지르며 리더는 또다시 총을 꺼내 겨누었다.

젠장, 또 저거냐! 나는 맨손인대 반칙이잖아 이 비겁한 놈!

죽음.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가장 원시적이고 큰 공포에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1초, 2초 3초…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총성이 울려 퍼지는 일은 없었고 대신 귀청을 울린 것은 한줄기의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이번에는 또?!

나는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다시 한 번 놀라며 입을 쩍 벌린 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정말이지 더는 못 봐드리겠네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던 괴한들의 리더가 내가 지키겠다고 큰 소리 치던 작은 소녀에게 꺾여버린 팔을 붙잡힌 채로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랑하던 총은 완전히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다른 괴한들도 배나 턱을 잡고 쓰러져 신음하는 채였다.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변태야 변태니까 이해한다고 칩니다만 당신들은 뭔가요? 정신연령이 초등학교 6학년에서 멈춰버리신 건가요? 이런 장난감을 들고 죽어라~ 하고 노는 건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같이 졸업하셔야 하는 거 모르시나요?”

“너… 너 이년…! 지금 반항하겠다는 거냐…!”

“반항이고 뭐고 착하고 성실한 가출 미소녀 모범생이 하루 만에 순순히 집에 들어가는 거 보셨나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 가출 미소녀라니 그게 무슨 괴짜 캐릭터냐.

소녀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평소 같은 무덤덤한 말투에 무심코 딴죽을 걸고 말았지만, 긴장감 덕분인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리더는 이를 빠드득 갈며 알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네년이 아무리 변수라 하더라도 내일 그것만 무사히 마친다면…!”

“에, 패배자의 전용 대사는 질리도록 들었으니 그쯤 하시고 잠이나 주무시죠.”

리더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소녀는 잡고 있던 팔을 놓고 품으로 파고들더니, 팔꿈치로 복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신음조차 재대로 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에 앞으로 꼬꾸라지기 직전 다시 한 번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발차기가 그대로 턱을 부숴버렸다.

그걸 본 나머지 두 명은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소녀의 무릎이 코와 이빨을 부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먹이 순식간에 급소를 무작위로 난타했다.

“정말이지 요즘은 부모들도 일찍 독립하라고 잔소리하는 시대인대 이놈의 집단은 무슨 집착증 환자들 소굴인가요?”

무참하게 쓰러진 괴한들을 향해 소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내뱉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카오스였다.

저 소녀는 대체 정체가 뭐지…?

괴한 세 명을, 그것도 총 까지 소지한 상대를 상처는커녕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할 틈도 주지 않고 유치원생에게 삥을 뜯듯 일방적으로 쓰러트려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서 있다.

보통 여자애,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걸 저런 작은 여자애가 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소녀는 대체 뭐지?

만화도 영화도 소설도 아닌 현실에서 만난 저 소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면 대체…!

“당신은 또 뭔가요. 사람을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지 마세요. 이 이상성욕자.”

상식을 초월한 광경을 보여준 소녀에 대해 의문을 포함한 각종 감정들이 극에 달한 그 때 소녀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건가요. 당신도 역시 제가 무서우신 건가요.”

“그… 그런 건…”

아니야.

이 짧은 한 마디가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뭐…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서워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무서워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소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괴물이니까요.”

"괴물 이라니 그게 무슨…"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신경써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자세히 아실 필요도 없고요. 그저 변태 주인공과 괴물 히로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뿐이에요."

짧은 만남의 끝을 알리는 그 말을 남긴 채 소녀는 등을 돌렸다.

아아, 괴물인가. 과연 그럴 만도 하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서도 소녀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변함이 없었고, 돌아서는 순간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고 해야겠지.

스스로를 상처주고 짧은 만남에 이별을 고하는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고.

정말이지 엄청나게 괴물 같은 연기력 이고만.

"야. 기다려 이 바보야."

"…뭔가요?"

오오? 분명 '함부로 불러대지 마시죠. 이 변태' 같은 수식어가 붙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네?

…랄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하려던 말을 시작했다.

"저기 말이지. 만난 지 1시간도 채 안된 내가 이런 예기를 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할게."

스스로도 생각했던 것 보다 자못 진지한 분위기에 소녀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너 그런 멍청한 생각이랑 연기는 이제 그만 둬."

"……무슨 소린가요?"

"말 그대로지. 뭐가 괴물이고 여기서 끝이냐 이 바보야. 왜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버리는 건대."

내 말에 소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하아… 당신 말이죠. 말 했잖아요. 신경써주실 필요는…"

"내가 언제 널 신경써준다고 했냐! 잘 들어!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너한테 죽도록 얻어터지는 걸 각오하고 하는 사나이로서의 고백이니까!"

나는 소녀가 하는 말을 중간에 가차 없이 끊어버리고 뭐라도 된 마냥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소녀도 놀란 듯 눈동자가 커지는 처음으로 표정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말이지. 쟤 뺨이 어째 불그스름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에이,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지 뭐.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나는 말이다 네가 저놈들을 쓰러트리는 걸 보고나서 분명히 무섭다고 생각했고 머릿속에서 네 정채가 대체 뭐니 마니 하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던 건 사실이야. 이걸 부인할 생각은 없어."

아까 전에 소녀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소녀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것들,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전부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진실만을 마음속에서부터 끌어낸다.

"하지만! 내가 널 무서워 한건 쓸 때 없는 똥폼이나 잡았다고 두들겨 맞을까봐 그랬던 거고 결코 단 한 번도 널 괴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알았냐! 이 바보야!!!"

그리고 그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정말 한심할 정도로 바보 같아서 말한 장본인인 내 얼굴은 고기도 구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화끈거린다.

"정말… 엄청난 변태시네요. 당신이란 사람은."

"시, 시끄러워! 좀 멋있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 나냐!"

혼신의 힘을 다한 고백이었건만 소녀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뭐 그래도 보람은 있네.

끝이니 뭐니 하면서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 마냥 쓸쓸하고 외로운 뒷모습을 보이던 소녀가 지금은 아주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건가요?"

소녀는 창피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팍 숙이고 있는 내게 갑자기 의미모를 질문을 던져왔다. 아직 얼굴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나는 지금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어쩐다니 뭘 말하는 거야?"

"당신… 설마 아무 생각도 안하고 절 붙잡으신 건가요?"

넹.

이라고 하면 뭔가 엄청난 꼴을 당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니 이럴 때는 차라리 묵비권이란 놈을 써먹어 봐야겠군!

하지만 묵비권이란 게 원래 대체로 불리한 놈들이 써먹는 회피용 스킬인지라 소녀는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변태에다 바보 속성까지 있다니 진짜 환장할 노릇인대요 이거. 당신하고 일주일만 같이 지내면 한숨으로 평생 복을 다 날려먹게 생겼네요."

그것 참 미안하게 됐네!

"뭐 그래도 일단 물어보긴 할게요. 방금 전 벌어진 일을 보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셨나요?"

"응? 그거야 거의 다 파악했지."

"헐."

뭐시여 그 엄청 의외라는 듯 한 반응은. 이래 뵈도 분위기 파악하는 거 하나는 끝내주거든?

이참에 저 소녀의 안에 있는 내 인상을 확실히 뜯어고치자는 마음으로 나는 자신만만하게 자작 명추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너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랑은 거리가 먼 가출소녀 인거지. 그런데 집안은 상당히 유복한 편이라 부모님이 전속 경호원들은 시켜 널 데려오게 한… 끄어어어억!"

하지만 그 추리는 마지막까지 세상에 발표되지 못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짜증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걷어 차버렸네요."

"너 임마! 아니면 아니라고 할 것이지 다짜고짜 정강이를 차 버리냐! 아이고야!"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통증에 나는 지저분한 골목길이라는 것도 잊고 맞은 다리를 감싸 앉고 바닥에서 뒹굴었다.

"뭐 괜찮으실 거 에요. 피는 안 나는 것 같으니까."

피만 안 나면 괜찮다니 그게 무슨 초딩 논리냐!

젠장, 이렇게 되면 어디 너도 한번 피만 안 나게 맞아봐라!

"어라? 당신 어째 눈빛이 불손한대요? 피 나올 때 까지 맞아 보실래요?"

"네?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망울 두고 무슨 말씀이세요!"

하핫 여러분. 원래 사나이란 게 항상 자존심만 새울 수는 없는 거랍니다.

"…오그라드니까 그만 하시고 하던 예기나 마저 하죠."

"아픈 걸 어쩌라고!"

"누가 뭐라고 했나요. 그냥 그대로 들으세요."

자존심을 두 번이나 구길 수는 없기에 아픈 다리로 낑낑대며 간신히 일어나자 소녀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방금 찼던 정강이를 또 걷어차는 게 아닌가.

"아이고오오오오! 무슨 짓이야 임마!!!"

또 다시 땅바닥에서 구르며 토해내는 절규.

하지만 소녀는 깔끔하게 무시하며 본론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나라에서 경찰이나 군인을 제외하고 총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총? 으으음… 잘 모르겠는데."

또 폭언이 날아오겠거니 생각했는데 소녀는 의외로 그냥 넘어갔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상당히 많은 숫자에요. 단, 그중 대부분이 합법적으로 소지한 게 아니에요."

"합법적인 게 아니라면 그 만화 같은 곳에서 보던 밀수라던가 그런 거야?"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수뿐 만이 아니에요. 정부 기관 몰래 자체적으로 생산 시설을 갖춘 곳 까지 있어요."

"그 말은 설마 이 사람들도…"

"뭐 대충 그런 거 에요."

너무나 간단하게 긍정하는 소녀를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에 실제로 내가 휘말리게 될 줄을 상상도 해 본적이 없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당신은 어쩌실 건가요?"

"어쩌다니… 뭘?"

"하아… 아직도 모르시나요. 일반인들은 평생 인연이 없을 그런 위험한 사람들과 저는 엮여있는 거 에요. 그런 저의 일에 이 이상 참견 하시는 건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는 거 에요."

아아, 난 또 뭐라고. 겨우 그런 거였냐. 괜히 쫄았네.

나는 그제야 땅바닥에서 옷에 묻은 흙은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소녀에게 대답했다.

"이미 여기까지 온 거 당연히 끝까지 같이 가야지. 안 그래?"

"당신 아직도 잘 모르시나 본대, 그렇게 간단히…"

실실 웃기까지 하는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소녀는 곳 바로 반박하고 나섰지만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네 말대로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해. 너, 아까 분명히 말했잖아? 히로인 이라면 되어 주겠다고. 네가 히로인이라면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이 히로인을 중간에 내버리는 그따위 전개 난 죽어도 용납 못 해."

응 그래.

이유가 필요하다면 이거 하나로 충분하지.

주인공과 히로인은 언제나 함께 힘든 일들을 극복하기에 만화나 소설이 행복한 결말이 나오는 거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긴 하다만 그딴 건 나중에 생각하지 뭐.

"하아…."

소녀는 질렸다는 듯 또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며 작은 입을 열었다.

"유채련."

"응?"

"언제까지 너, 너, 하실 건가요. 히로인의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이라니 최악이에요."

그, 그러고 보니 확실히 여유가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봤구나.

나는 멋쩍은 기분에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오른손으로 채련이 내민 손을 잡았다.

"서민혁.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히로인."

다른 사람이 본다면 손발이 삭제되는 장면이겠지만 뭐 우리밖에 없으니 상관없… 아?

"저기 근대 말이지."

"뭔가요?"

"이 사람들은 언제 쯤 일어나는 거야?"

나는 슬쩍 주변을 가리키며 물었다.

"………"

"…………"

"…일단 장소부터 다른 곳으로 안내 하세요. 이 변태."

"…엄청 억울하다만 일단 옮기고 보자."

~2장. idiot? NO! Fabulous idiot!~

골목길에서 벗어난 채련과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가정형편이 좋아 부모님이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알바비로만 생활하고 있는 자취생의 집이라고 하면 역에서 멀고 주변시설도 안 좋고 내부가 엉망진창이라도 역시 값 싼 원룸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차라리 방금 전 까지 있던 골목이 훨씬 낫겠네요.”

“그 정도는 아니거든! 이런 집이라도 보증금 500에 월세 20만원이나 된다고.”

뭐 분명 주변 분위기는 아까 그 골목이랑 별 다를 바 없고 햇빛도 잘 안 들고 비가 오면 물이 새긴 하지만.

“와. 굉장한데요. 그런 게 바로 본인도 모르는 새 당하는 사기라는 거네요.”

얄미운 소리를 해대면서 채련은 서슴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폭력이 무서워 차마 대놓고는 못하고 뒤에서 작게 불만을 궁시렁 거리며 문을 닫고 채련을 따라 들어갔다.

아직 오후인대도 집안은 한밤중처럼 캄캄해 체련은 형광등의 스위치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스위치가 보이지 않자 짜증이 가득한 느낌으로 말했다.

“이 놈의 싸구려 집구석은 형광등이 데코레이션인가요? 스위치도 없으면 뭐 어쩌라는 건가요. 이런 빈곤해 보이는 장식품으로 놔둘 바엔 차라리 깨부숴서 폐품으로 팔아버리죠.”

“야, 야! 스톱! 스톱!! 내가 지금 켜줄 테니까 하지 마!”

얘 뭐 이리 성질이 급해?! 컵라면에 물 부어놓고 30초 만에 안 익는답시고 회사에 항의전화를 난발할 기세고만 아주!

정말로 형광등을 깨부수려 하는 채련을 간신히 뜯어말리고 냉장고 뒤에 팔을 집어넣고 더듬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뭐하시나요. 불 키라니까 웬 바퀴벌레 사냥을 하시는 건가요.”

“누가 바퀴벌레 사냥을 한다는 거야 임마.”

“그럼 뭐하고 계신 건대요.”

“잠깐만 기다리면… 아 됐다!”

잠시 뒤 딸깍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이 컴컴한 집안을 밝혔다.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 새 다가와 내 배에 주먹을 날리고 있는 채련의 모습이었다.

“커허억!!!!!!”

어떻게든 숨은 쉬어지는 걸 보니 힘 조절은 해준 것 같다만 그래도 엄청나게 아파 눈물까지 찔끔 머금고선 구부정한 자세로 채련에게 따지고 들었다.

“너 기껏 불까지 켜줬는데 또 왜 때리는데!”

그에 채련은 방금 전 보다 더욱 짜증이 심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장난하시나요? 스위치가 그런 곳에 있으면 그렇다고 써 붙여 놓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니면 뭔가요? 어린 소녀들을 대려다가 어둠 속에서 당황하는 틈에 겁탈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냥 놔두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저 이 집에 나 혼자 사는데다가 평소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 적이 없었으니까 필요성을 못 느낀 것뿐이야!"

"……아."

응? 그 반응은 뭐야? 어째 느낌이 상당히 안 좋은데 이거.

잠시 후 채련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집에 놀러 올 친구 한 명 없는 왕따셨다니, 아픈 부분을 건드려 버렸네요. 사과드릴게요."

물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엄청난 독설이었지만.

"누가 왕따라는 거야! 게다가 묘하게 진심이 느껴지는 게 더 열 받아!"

"뭐에요, 아니셨나요. 그럼 한 대 더 맞으세요."

"끄하악!!!"

장렬하게 턱에 꽂히는 어퍼컷.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KO.

이 녀석 분명히 전생에 간디의 숙적이었을 거야.

"힘 조절은 충분히 했으니 엄살떨지 마시고 빨리 욕실로 안내나 하세요. 일단 좀 씻고 싶으니까요."

이건 완전 칼만 안 들었지 강도랑 다를 게 없네.

하기야 전신이 무기인데 칼이 뭔 필요겠어.

나는 한 손으로 얼얼한 턱을 붙잡은 채로 대답했다.

"요, 요씨리라면 브로 요페자라."

"…뭔 개소린가요.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해서 다시 짖으세요."

짖다니?! 내 인간으로서 존엄성은 대체 어디!? 랄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채련의 시키는 대로 아픈 턱을 움직여 재대로 말 해 주는 건 뭔가 자존심이 상해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옆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풋…. 마지막 자존심 인가요. 뭐 이해해드릴게요."

너 무슨 독심술이라도 쓰는 겨?!

문을 닫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채련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를 열어 저녁으로 먹을 만한 게 있나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녁 준비하기 전에 오늘 아르바이트는 못 가게 됐다고 점장님한테 전화부터 해야겠군. 그런데 결근 사유는 뭘로 하지?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역시 가장 무난한 꾀병으로 정하고 수화기를 집어든 그 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분홍색 비누가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하자 비누는 냉장고와 부딪히며 쾅 소리를 울렸다.

사… 살았다.

회피 스킬의 숙련도가 40% 증가했습니다!… 가 아니라!

"너 또 갑자기 무슨… 커허어어어억!!!"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한소리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그곳에는 펼쳐져 있는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너… 너… 그… 그게… 뭐… 뭐…!"

"시끄러워요! 당장 눈 안 돌리시나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상체만 내민 채련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수건으로 가린 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다고 돌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이미 한번 본 것이 잊혀질리 없고 선명하게 새겨진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려 했다.

"상상하지 마세요! 이 구재불능 변태가! 강제로 기억을 날려버리기 전에 안 잊으시나요!"

"누… 누가 상상했다는 거야! 것보다 너 왜 그런 차림인대!"

"아까 말할 때 뭐 뭐하셨나요! 씻는다고 했잖아요!"

그게 샤워한다는 소리였냐!

다 큰 여자가 남자 집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당연히 세수나 하는 줄 알지!

"어… 어쨌든 보일러나 올려 주세요. 씻을 수가 없잖아요!"

너무 당황한 탓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내게 소녀는 부끄러운 듯 더듬으며 말하고 다시 화장실 문을 닫으며 들어갔다.

나는 찰싹 소리가 나도록 뺨을 몇 번 때려 겨우 진정하고선 온수에 맞춰 보일러를 틀었다.

후… 저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그래도 뭐…

예뻤지…

뭐 발육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게 흠이지만.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을 다시 한 번 상상했…

…………

안 돼… 이거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한 성벽이 생겨버린 건가…?

"…저기요 당신."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잡념을 떨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중 화장실에서 말없이 샤워를 하고 있던 채련이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가 너무나 쓸쓸하게 들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바로 화장실 문 앞으로 가 조심스레 대답해주었다.

"왜 그래?"

"한 가지 물어봐도 상관없나요?"

"뭐, 쓰리사이즈만 아니면 얼마든지."

"…변태."

예상했던 대로의 딴죽에 짤막한 웃음을 흘리며 나는 화장실 문에 기대어 앉았다. 그에 맞춰 물소리가 멈추고 채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려 하는 건가요.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저는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까 주인공이기에 히로인을 버릴 수 없다고 하셨지만 이건 달콤한 만화가 아닌 현실이에요."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채련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는 재대로 설명해 드리지 않았지만 저를 도우시겠다는 건 오늘로 당신의 목숨이 끝날 수 도 있다는 거에요. 방금도 말씀 드렸지만 이건 현실이에요. 만화처럼 당신이 저를 지키고 제가 당신을 지켜 드리면서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자신감… 솔직히 저는 없어요."

어조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말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금까지 봐온 채련답지 않았다. 당당함도 장난기도 섞여있지 않고 그저 낮고 어둡기만 해 무슨 말을 해주면 조금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채련의 말은 계속되었다.

"설령 기적이 일어나 제가 하려던 일을 무사히 끝마친다고 해도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제가 드리는 짤막한 감사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에 비해 잘못되었을 때 당신이 잃는 건 너무나 큰 그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해 봤자 쓸 때 없는 일인 거에요. 그러니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주인공과 히로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 그러니까 이제? 저를 버려주세요."

하하하.

어째서일까.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웃음이 마구 새어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자 문 너머의 채련이 '왜 웃나요' 라며 물어왔다.

"틀렸으니까 웃었다 이 바보야."

"틀렸… 다니요…?"

이 녀석 보기보다 머리가 나쁘구만.

만약 네가 학생이고 내가 교사였다면 이건 가차 없이 빨간 줄을 그어 버렸을 거라고.

나는 등은 계속 기댄 체 자리에서 일어나 억양을 낮추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약간의 폼을 잡았다.

"뭘 틀렸는지 말해주기 전에 조금 옛날이야기를 할게."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