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와이크라 - 불 위를 걷는 소녀 -
글쓴이: 퍼기
작성일: 12-07-31 22:43 조회: 2,498 추천: 0 비추천: 0

와이크라

- How to make the perfect sacrifice -

불 위를 걷는 소녀

Chapter.1

#. 나는 시킨 적이 없습니다

누가 사람이 최고의 제물이라고 한 걸까.
누가 불 위를 걷게 했는가.
온몸이 탈 때까지, 손가락 끝까지 까맣게 타버릴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았어?
역겨워! 살이 타는 냄새! 내가 바라지 않은, 결코 명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저주해! 이젠 네놈들 따위 보고 싶지 않아! 보지 않을 테야!
아니…….
이젠 만날 수 없어.

#. 질문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습니다. 사귀고 싶어요.
아니다. 좀 더 솔직하게.
사귀어도 돼요?


#. 학교 선생님


"저는 '남자친구'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조언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예헤즈켈 도련님."

이르메야 선생님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얘기해드릴 수 있겠군요. 도련님은 부지 대제사장님의 외동아들이시며, 차기 대제사장으로서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셔야합니다."

그런 것 쯤 알고 있다고요.
라고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소녀가 어디 가문의 누구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일개 가정교사인 제가 도련님의 사생활을 캐물을 자격이 되지 않을 뿐더러, 계속 캐물어봤자 안 좋은 소문만 늘어나겠죠."

말하면서 선생님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지나가던 제사장들 몇몇이 선생님과 눈길이 마주쳤다. 주변을 확인한 선생님은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방금 이곳 신전에서 하신 질문 또한 방백들에게 약점으로 잡히기만 할 뿐, 도련님의 평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련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앞으론 '여자친구'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시 돋친 목소리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볼이 뜨뜻하다. 바보같이 질문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나 보다. 선생님은 볼을 만지며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또 한숨만 쉰다.

"대제사장님껜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나를 내버려두고 선생님은 먼저 신전 강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사는 곳, 다후 마을엔 먼 옛날 다후 여신이 노예 생활을 하던 조상님들을 이곳 마을 터에 인도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물이라곤 동네 한복판에 있는 우물이 전부인 사막 마을이지만, 여신의 축복 아래 우물 하나만으로 넓은 아몬드나무 숲을 개척하고 다른 도시와 무역도 할 수 있을 만큼 커진 곳이다. 그래서 다후 마을 사람들은 다후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신전을 세우고, 장로들과 더불어 여신을 모시는 제사장 집안을 공경하고 있다. 이 공경 받는 제사장 집안이 바로 내 가족들, 코헨 가(家)다.

이르메야 선생님은 코헨 가의 가정교사이자 아직 정식임명을 받지 않은 코헨 가 남자애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나이만 잔뜩 먹은 할아버지나 제사장 아저씨들 사이에서 선생님은 유일한 여자고, 가장 나이가 어리다.

선생님의 나이는 17살.

20살이 되어야 정식 제사장이 될 수 있어서 학생들 중엔 선생님과 또래인 형도 있다. 연상인 형도 있고. 그래도 또래인 형들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또래라기 보단 한참 연상인 사람으로 보인다.

같은 나이인데도 형들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처럼.

길고 풍성하지만 머리끝은 모래먼지가 잔뜩 묻은 곱슬머리도 다른 여자들보다 더 기품 있어 보이고, 더 정중하게 대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분위기라면 장로들이나 제사장들도 만만치 않게 무겁다. 더 무섭다면 무섭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이 선생님으로 신전에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정말 정말 똑똑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한마디로 '천재소녀'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우리 다후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든 율법을 외우고 있다.

어느 두루마리에 있는 몇 장 몇 절이 무엇인지 맞춰보라 말하면 순식간에 대답한다. 생각하는 시늉도 안한다. 마치 무슨 구절을 외우라고 시키는지도 다 알아채는 듯이.

더 신기한 건 최근 들어 재판장에서 이르메야 선생님이 지목한 사람은 전부 범인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조사도 안하고 그저 상대방의 행동만 봤는데도 범인이 누군지 맞춘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땐 꺼림칙하게 여겼던 아버지도 결국엔 선생님을 내 전속 가정교사로 두었다.

분명 선생님처럼 모든 율법을 암기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한 가지 더.

한 달 전. 내가 대제사장 훈련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르메야 선생님은 저렇게 딱딱한 사람이 아니었다.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까지 더듬어서 뭘 제대로 가르치질 못했다.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가족 없이 자라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한 사람은 커서 저렇게 된다고 푸념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호되게 야단쳤기 때문에 일부러 언행을 바꿨으리라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아버지 다음으로 얼굴을 많이 본 사람이지만 제대로 얘길 나눈 적이 별로 없다. 정말 선생님은 부모 없이 자랐는지, 어떻게 뛰어난 암기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왜 내가 훈련에 들어간 뒤 변했는지.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말을 더듬다 못해 눈물까지 보이는 누나.

공적인 일 아니면 늘 하는 잔소리로 이야기를 거부하는 누나.

나로선 둘 다 상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냥 수업만 열심히 듣는다.

다행히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내가 한 질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귀지 마'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 홀로부대 두 번째, 선배

"……."

레키 선배는 필사하던 팔을 멈추고 날 뚫어져라 바라본다. 꼭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안된다면 안 된다고 말하세요."

선배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면서 근처에 있던 양피지 조각에다 한마디 적었다.

'점심 바깥에 나가서 먹자.'


"휴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들 빤히 보는 곳에서 얘기 한 거야?"

얼굴이 빨개진 선배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그쳤다. 선배는 신전 뒤뜰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까지 날 끌고 와서야 안심하는 눈치다. 다행히 빵은 갖고 와서 나랑 나눠먹고 있다.

"서기관실은 장로 가문 사람들도 드나든단 말야! 너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선배도 선생님이랑 똑같네요! 대체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디가 불만-"

"대제사장 집 도령이 공부는 안하고 연애나 한단 소릴 들을 게 뻔하니까!"

"헹! 그럼 선배도 명문가 출신이니 평생 누구 좋아하지도 못하겠네요!"

"푸훕! 억, 켁!"

내가 말하자마자 레키 선배가 먹던 빵을 뱉었다. 빵 먹다가 혀까지 씹었나 보다. 역시 레키 선배는 이런 얘기에 약하다. 맨날 안 생긴다고 칭얼대면서.

레키 선배, 정확한 이름으론 베레키야 네리 마하세 선배는 긴 이름답게 명문가 출신이다. 레키 선배의 형은 북쪽의 거대 도시인 '푸른 도시'와의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외교관들의 대표, 선배의 아버지는 장로의 호위무사와 시종들을 통솔하는 시종장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선배는 집안사람들보단 소박한 직업을 추구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후 마을엔 율법과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할 만큼 글자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 적다. 다스리는 일은 제사장과 장로 집안에서 선배 입장에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늘 바쁘지만 말이다.

선배는 쌓여가는 두루마리만큼이나 쌓인 짜증을 여자 친구가 안 생긴다는 푸념으로 풀고 있다. 필사를 하다가도 '여신님 나는 왜 안 생깁니까!' 같은 한탄이 쏟아져 나온다. '혹시 다후 여신님이 내 여자 친구가 아닐까?' 하는 농담 섞인 소리까지도.

나는 레키 선배의 푸념을 보고 '홀로부대'라는 나만의 모임을 만들었다. 진짜로 홀로부대원들이 모여서 안 생겨요를 외치면 재밌겠지만 마음속으로 상상이나 할 뿐이다. 레키 선배는 홀로부대의 두 번째 대원이다. 첫 번째 대원은 선배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서열 상 첫 번째 대원으로 해줬다.

"누, 누가 좋아하지 말래?! 때와 장소를 가리란 거지!"

겨우 숨을 돌린 레키 선배가 계속 말했다.

"때와 장소요?"

"그래! 나처럼 말이야!"

구석진 데까지 와서 얘기한 이유가 있었다. 선배는 숨겨둔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르메야 씨의 가슴이라던가."

"엥?"

"난 말이야, 점심시간 때만 이르메야 씨의 가슴을 생각한다고."

"가슴이요?"

"그래. 난 전부터 계속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르메야 씨는 왜 신전에서 어깨랑 가슴골을 훌렁 내놓고 다니는가야. 특히 그 가슴골 쪽은…… 헤즈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가 본데, 그 튀. 튀어나온 부분까지 가리다 만 천에서 자꾸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손으로 확 벗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다른 제사장들은 의식을 못 하는 건지 일부러 무시하는지 모르겠어. 사, 사실 신전에서 저런 가슴골 내놓기 차림은 율법에도 어긋난 짓이잖아. 대제사장님도 말리지 않는 걸 보면 다들 은근히 이르메야 씨의 가슴에 관심이 많은 걸지도……."

"그럼 선생님한테 물어볼까요?"

"야!!" 잔뜩 째진 목소리로 레키 선배가 까무러쳤다.

"너 미, 미쳤어?! 그거 묻지 마! 그거 묻지 마라!"

"선생님 가슴이 궁금하면 선생님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걸 왜 혼자 고민하세요?"

"물으면 너 나랑 우정 깨지는 줄 알아!!"

"그럼 선배도 내가 한 질문 비밀로 하세요!"

"할게, 할게, 할게!! 원래부터 할려고 했어!!"

레키 선배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사실 이르메야 선생님이 선배의 가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말했다간 마을 광장에서 내 질문을 다 폭로할 것만 같다.

홀로부대가 없어진대도 레키 선배의 푸념이나 발악은 남아있으니까 아쉬울 건 없다.


#. 엘야

신전 복도를 걷는 동안, 엘야에게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할지 고민해봤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방법이 없다.

'오늘부로 홀로부대는 없다.'

엘야는 싫어하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하게 시작하면 장난치지 말라며 농담으로 흘려 넘기고, 돌려 말하면 솔직하게 밝힐 때까지 캐묻고 캐묻는 여자애다. 처음 만날 때부터 엘야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대답했다. 장난삼아 한 말에도 일일이 속을 만큼.

'으으- 헤즈 바보! 바보! 생쥐 없잖아! 깜짝 놀랬단 말이야!'

처음 만날 때 말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번에 갈아준 짚엔 보리 껍질이 한가득 들어있었어. 길쭉한 짚보다 거칠긴 하지만 빵 냄새가 나서 좋아!'

하지만 홀로부대가 없어지고 대신할 거리가 생긴 지금, 엘야를 만날 이유는 없다.

아,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하지! 짜증나!

그래도.

홀로 감옥에 갇힌 여자애 앞에서 짜증을 낼 순 없다.

신전 뒤편에 가면 그늘진 바닥에 비밀구멍이 하나 있다. 이 구멍 아래로 내려가 기름 타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동굴 복도를 걷다 보면 점점 횃불 빛이 보이면서 낡은 감방이 드러난다.

횃불은 늘 타오른다. 바닥도 항상 새 짚이 깔려 있고, 오래된 구석이래 봤자 물 냄새가 심한 동굴과 녹슨 철창뿐이다. 그 철창 안에 누더기옷을 입고, 옷에 비하면 제법 멀쩡한 원통 모양 모자를 쓴 여자애. 붉게 일렁이는 빛 때문에 붉게 보이는 백발을 가진 여자애 엘야가 있다.

처음엔 레키 선배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왔다. 마을의 곡식 장부를 정리하느라 바빴던 레키 선배가 기름통과 이곳으로 오는 길이 적힌 두루마리를 건네줬다. 선배는 횃불만 다시 밝히고 냉큼 빠져 나오라 했고 나도 선배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뭘 하든 엘야에게 들키긴 매한가지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못할 만큼 오랫동안 갇혀있던 여자애가 낯선 인기척을 잡지 못할 리 없다.

"헤즈야."

그날 엘야에게 붙잡힌 나는 아버지 때문에 가야 한다고 열 번은 넘게 말하고 나서야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감옥에 갇힌 여자애치고 한 얘기는 평범했다. 죄가 있어서 갇히진 않았다고 했다. 그럼 난 이러이러한 오해를 샀으니 해결해달라는 말부터 해야 하는데. '실크 헷'인지 뭔지 하는 알 수 없는 단어를 쓰는 건 둘째 치고, 횃불에 묻은 기름의 양에 따라 횃불 색이 달라 보인다는 둥 짚 속에서 기어 나온 벌레 때문에 3일을 나무의자 위에서 지냈다는 둥 내내 자기 얘기만 했다.

꼭 살만하니까 같이 갇혀달란 식으로 말이다.

얼마나 감옥에 갇혀있었으면 집에 돌아갈 생각조차 안 드는 걸까.

이상한 점 투성이었지만 나는 엘야를 계속 만나러 갔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대제사장이 되려면 선생님이나 선배처럼 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나는 이르메야 선생님처럼 하루 종일 공부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레키 선배처럼 하루 종일 집중해서 해야 할 만큼 일이 많지도 않다.

계속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찾아갔다.

오늘까지만 해도 숨 돌릴 곳은 이 곳, 엘야의 감옥밖에 없었다.

오늘까지만.

"헤즈야!"

"왜!"

아 짜증나! 한 번이라도 그냥 조용히 있으면 어디가 덧나나! 돌아보니 깜짝 놀란 채 얼굴이 빨간 엘야가 날 바라본다. 빨간 얼굴은 횃불 빛 때문이겠지.

"으- 헤즈 화났어?”

금방 입술을 삐쭉 내민다.

“생각하는 중인데 자꾸 말 걸잖아!”

“으우-”

곤란할 때면 항상 이런다. 아버지가 이르메야 선생님에게 했던 말, '어렸을 때 가족 없이 자라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한 사람은 저렇게 된다'는 말은 엘야에게 붙여줘야 한다.

“고민 있으면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짜증난다. 먼저 삐치면 나만 나쁜 아이가 되잖아.

“아빠한테 또 혼났어?”

"……."

엘야는 레키 선배 다음으로 홀로부대의 세 번째 동료다. 그런데 레키 선배나 첫 번째 동료인 장로 집 아들 녀석처럼 내가 먼저 고른 사람이 아니다. 엘야는 내가 홀로부대 얘길 하자 스스로 홀로부대에 들어왔다. 레키 선배도 아침마다 안 생긴다며 한숨 섞인 푸념을 하지만 엘야의 칭얼거림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다. 한번은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면서 몰래 홀로 있는 엘야를 관찰해봤다. 나랑 있을 때와는 정반대로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여자애의 모습,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린 여자애의 모습이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종종 나오는 혼잣말은 전부.

헤즈는 언제 올까.

설마 날 잊어버렸나.

아직 헤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말들이다.

-아냐, 아냐! 이 이상 생각하면 안 된다. 제대로 얘기해야 한다. 아직도 시무룩한 채로 있는 엘야를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엘야."

"응."

"나 내일부터 여기 안 올 거야."

솔직하게 말했다. 나만 쳐다본 채 엘야는 대답이 없다.

"도와 줄 여자애가 있어. 오늘까진 수업 마치고 남은 시간에 여기 왔었는데, 이젠 여기까지 올 시간이 없-"

"아빠가 무슨 얘기 했어?"

말을 잘라먹고 엘야가 물었다. 어쩐지 더 당황한 표정으로.

"아버지랑은 관계없어. 사실 오늘 그 여자애랑 만나기로 했는데, 말없이 안오는 건-"

"헤즈는 항상 아빠한테 야단맞고 올 때마다 엉뚱한 얘길 꺼냈잖아."

"나 갈래."

"앗, 잠깐만!" 엘야가 외쳐도 계속 걸어갔다. 할 말은 다 했다.

"잠깐만, 헤즈!!"

귀에 거슬리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레키 선배를 이용해서 또 날 찾으려 들 거다.

"헤즈 말 계속 들을 테니까!!"

외침과 함께 엘야가 철창을 팍 쳤다. 돌아보지 않고 철창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들을 테니까……! 훌쩍…… 가지 마……."

아무래도 왜 여기 안 오는지 제대로 얘기해주는 편이 낫겠지. 일이 자기한테 불리하게 돌아가면 칭얼대기만 하는 애지만 이야기를 못 들을 만큼 눈치 없는 애는 아니다. 더러운 누더기옷 소매로 얼굴을 닦는 엘야를 놔두고 다시 앉았다.

홀로부대는 오늘부로 해체다.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랑 엘야 뿐이지만 어쨌든. 망상이나 도피로 지겨운 하루를 견디는 것보단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견디는 게 낫다. 그래서 보통은 정식 제사장들이 할 수 있는 재판을 맡아보려고 한다. 재판을 맡으면 사람들을 도우려고 공부를 할 테니 이르메야 선생님과 레키 선배는 물론 아버지도 토 달지 않을 것이다. 나랑 또래거나 선생님과 또래인 형이나 누나들은 어른들을 찾아가기 번거로울 테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다.

얘길 들은 엘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관심을 보인다.

"그럼 나는 조수할래!"

역시 그냥 갔어야했다.

"필요 없어."

"으-"

금방 속마음을 들킨 엘야가 다시 침울해한다.

"재판관이 남한테 도움 구하기만 하면 아무 쓸모없잖아! 도움을 구한대도 너 말고 찾아갈 사람은 많아!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면서."

"선생님이나 레키 씨는 많이 바쁘잖아."

"선배는 필사하면서도 항상 빈둥대고 선생님은 하루 종일 강의만 하진 않으니 됐어!"

"난 헤즈가 올 때마다 도와줄 수 있지롱!"

볼을 부풀리며 끝까지 졸라댄다.

"여기 올 때마다 얼마나 힘든지 알아?"

올라간 내 목소리에 엘야가 흠칫 놀란다.

"매번 지나가는 아저씨들 없나 살피고! 아버지나 선생님 눈치 보면서 다니고! 컴컴한 동굴은 퀘퀘한 물냄새에 생쥐에! 여기 냄새 씻으려고 나가서 몰래 향유 바르는 것도 이제 싫어! 내가 네 종이야? 맨날 와서 횃불 붙여주게!"

"헤즈……."

"그렇게 감옥이 싫으면 네가 나와! 왜 나갈 생각은 안하고 맨날 잡담이나 해? 레키 선배 같은 남자라면 이딴 낡은 철창 쉽게 부술걸?"

"으……."

"곤란해 하지 마. 엘야가 진짜 보기도 싫었음 아까 안 멈추고 그대로 갔을 테니까."

평소처럼 엘야는 먼지 묻은 눈가에 또 눈물을 잔뜩 붙인다. 한동안 넘쳐서 흘러내릴 정도로 눈물만 자꾸 붙인다.

왜 엘야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랑 헤어지는 게 저토록 싫을까.

냉큼 일어섰다. 이 이상 얘기했다간 또 밤늦게까지 붙잡힐 게 뻔하다. 만난 지 끽해야 한 달 조금 넘을까 하는데 저 녀석에겐 내가 오랫동안 사귄 친구다! 인사는 관두고 재빨리 달렸다. 엘야가 뭐라 외치는 소리를 일부러 물기 어린 동굴바닥을 박차며 가렸다. 물 튀기는 소리에 섞여 헤즈는 바보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 내 여자친구, 의뢰인

"헤즈는 정말 신기하네."

내 첫 의뢰인, 질파가 처음 내 이야기를 듣고 한 말은 이렇다.

"괜찮다면서 결국엔 그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고 온 셈이잖아."

속삭이는 목소리로 사근사근 얘기한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참 바보다. 내 일이니까 내가 사귄다면 사귀는 건데 남들 눈치를 보고 나서야 사귀다니.

난 정말,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얽매여 있구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헤즈는 대제사장 가문의 도련님이고 난 평범한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여자애니까 처음부터 어려운 건 당연해."

평범한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여자애.

질파는 자신이 마을 외곽의 천대받는 노예 출신임을 이렇게 돌려 말했다.

노예들은 율법에서조차 속죄 제사를 지낼 때 대가로 곡식 한 됫박이면 괜찮다고 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다. 레키 선배는 노예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라고 얘기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남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를 하며 지내다보니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귀족이나 제사장들은 물론이요 평범한 마을 사람들조차 종으로 두려고 하지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여차하면 사람도 잡아먹는 놈들이라며 마주치지도 말라 했지만 지금 나는 질파와 만나 얘기하고 있다.

밥을 잘 못 먹고 다녀서 힘이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가졌다. 오른쪽 눈을 길게 기른 앞머리로 가려서 옅은 목소리와 함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애다. 마치 연기가 사람이 되어 나를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느낌이다.

엘야도 만만찮게 의문투성이인 여자애지만 질파가 풍기는 의문투성이와 비교해보면 장난스럽다는 정도다. 아니, 애초에 철창에 얼굴을 딱 붙이면서 마구 들이대는 엘야랑 다소곳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질파는 다르다.

"이렇게 헤즈네 집 화장실에서 얘길 나누는 것도 당연한 거고."

질파의 말대로 난 볼일 본다고 집 밖 화장실에 나와 있다. 엘야를 챙기지 않았다면 수업 마치자마자 신전 근처에서 얘기 할 수 있었을 텐데, 밤에 화장실에서 이러고 있다. 집안에선 부엌 아주머니들이 요리하는 소리와 아버지가 삼촌이나 다른 제사장들에게 뭐라 명령하는 소리가 들린다. 메마른 땅의 마을답게 밤이 되면 무척 추워지고 더불어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의 똥냄새가 지독하지만 질파는 이미 익숙해졌는지 그저 웃기만 한다.

"저, 질파."

"응?"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해. 얘길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

“괜찮아. 나는 허락 받을 어른이 없어."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허락 받을 어른이 없다.

가족이 없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헤즈한테 고마워해야지."

질파는 어리둥절해 하는 날 보고 그저 웃기만 한다. 아, 창피해! 재판관으로서 첫 의뢰를 들어주는 이 중요한 때에 깜짝깜짝 놀라기나 하고!

"저, 저기 그게. 일단 말해둘게, 난 아직 초보 아니 견습 재판관이고 남들 몰래 하는 거라 빨리 일을 해결해주지 못할 지도 몰라."

"괜찮아. 난 몰래 하는 게 더 좋아."

"그, 그래?"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말하면서 질파의 양손이 내 손을 잡았다. 거칠고 깡마른 손가락들이 느껴지자마자 흠칫 놀란 내 팔을 질파가 붙들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처럼, 질파의 손은 거칠면서도 따뜻하다.

질파의 재판관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나지만, 먼저 찾아온 쪽은 질파였다. 내가 대제사장 가문의 아들인지 알고 있었단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동네 사람 모두의 죄를 사하기 위해 특별히 공개적으로 치르는 제사 시간에 항상 난 대제사장의 아들로서 서 있었다. 다후 마을 여신의 율법에 따라 제사는 차별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노예들도 먼발치에서나마 제사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때, 질파는 날 발견했을 것이다.

나는 질파가 나를 찾아왔을 때에야 제대로 질파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여자애를 감싸주지 않으면 좋은 제사장이라 할 수 없어.

처음 질파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예헤즈켈 코헨. 헤즈라 불러도 되지?’

난 아버지가 가로막는 것도 있고 다후 마을 여신의 신전 밖으로 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신전 근처만 돌아다녀도 나를 찾기 쉽다. 그러나 내가 질파를 찾아가지 않고 질파가 나를 찾아오게 만든 게 정말 미안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헤즈.”

"으, 으응."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내 손을 꽉 잡은 질파의 손이 점차 떨기 시작했다. 얼마간 신음하던 질파의 목소리가 점차 가느다란 슬픔으로 바뀌었다.

"헤즈……!“

“질파!”

내 손을 다독이던 질파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질파의 미소가 무너지고 말았다. 다소곳한 웃음으로 가렸을 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공포가 질파의 얼굴에 드러났다. 눈동자마저 흔들리는 듯한 표정으로 질파는 계속 속삭였다.

“나 봤어. 마을에서 제사를 지낼 때, 헤즈를 몰래 훔쳐봤어.”

“그, 그거야 뭐, 난 제사 지내는 아버지 옆에 있었으니까 질파가 있던 곳에서도 충분히 잘 보였을 거야!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질파는 메마른 목소리로 외쳤다.

“내, 내가 헤즈를 쳐다봤을 때……그 사람도 날 쳐다봤어. 날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는 헤즈를 계속 만나면 일주일 뒤에 죽여 버린댔어.”

말하는 질파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안 그래도 힘없는 목소리가 더욱 가늘어진다.

질파를 죽인다?

대체 이 아이의 어디가 잘못 되어서? 노예라서?

“누, 누구야?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해?”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져간다. 일주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단순한 재판이 아니다. 질파는 지금 나에게 구조요청을 하고 있다.

“어떡해, 난 지금 헤즈를 만나고, 만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날 봐버리면…… 헤즈, 도와줘! 그 사람, 그 사람을 죽여줘! 우리 엄마도 죽었어! 그 사람 때문에 미쳐 죽어버렸다고!”

“지, 질파 엄마가? 아니 대체 누군데?”

“이르메야 힐―”

“예헤즈켈!!” 순간 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온몸을 들썩이면서 질파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몸이 저절로 뒤돌아봤다.

“화장실 간다더니, 무슨 짓이냐 이게!!”

아버지였다.

제사장 예복을 벗고, 화장실에 가려는 차림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칼칼한 목소리가 나를 푹 찔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 뒤흔들어도 질파가 말한 이름은 잊어버리지 못했다.

이르메야 선생님.

“네년은 또 어디서 굴러들어온 거냐! 썩 꺼지지 못해?? 노예 주제에 누굴 만나려 들어?!”

“꺅!!”

선생님이…….


나는, 선생님에게 질파의 존재를 알려준 셈이었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