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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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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켈라푸토의 보디가드
글쓴이: 아우터갓
작성일: 12-07-31 21:09 조회: 2,295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 신서(神書)


야심(野心)한 15일의 밤. 태양을 대신하여 보름달이 지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반딧불이조차 없어 어둠으로 가득 찬 숲 속을 하염없이 달려나가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주위 배경에 겉모습이 녹아들어 잘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희미하게 형태를 이룬 윤관이 슬쩍 성별을 일러둔다. 170cm 전후로 보이는 신장과, 있는 듯 없는 듯 불확실한 머리카락의 길이 등, 이러한 정보로 미루어보아 그림자는 '그'라고 불러야 할 사내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엇갈리고 부딪히는 소리를 뒤로하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나가던 실루엣이 드디어 숲을 빠져나왔다. 달빛을 받아 육신을 가리던 그림자가 걷어진다.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밤의 어둠과는 사뭇 다른 흑(黑)의 형상이었다. 왜냐하면, 남자의 몸을 이루는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빛을 흡수하는 불길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까칠까칠하게 뻗은 스포츠형 헤어 스타일의 머리카락은 물론, 그 외에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발끝으로 끝나는 심신(心身)이 모두 검은 계열의 색상으로 뒤덮여 있다.


이마 아래의 미간과 인중 위를 지나는 부드러운 콧날과, 동글동글한 턱선을 토대로 형성된 얼굴은 미남이라 부르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매서운 인상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를 추남이라 부르지도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의상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개조된 신부복으로, 이것이 유일하게 빛을 머금은 십자가 목걸이의 개연성을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다리의 동작을 그치지 않고, 오히려 혹사시키려 하고 있는 칠흑의 얼굴을 관측하자면, 의외로 겁에 질려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튜라츠란 애칭을 가진 그는, 숲을 빠져나온 뒤에도 질주를 유지하면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근처의 심야를 힐끗 돌아봤다. 두 눈이 인식한 건, 등 뒤를 쫓아오고 있는, 잔재하지도 않는 가시광선을 끌어모으는 은빛. 육체가 수은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자신과 동류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하얗다고 해야 할까? 웬만해선 밖을 나돌지 않는 귀족 자제보다도 더 섬세한 피부에, 여성의 머리카락처럼 귀밑을 덮고 목덜미 언저리 내려오는 백(白) 단발. 흐물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직선의 헤어 스타일이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으며, 눈동자 색 또한 마찬가지로 흰색이었다. 새하얀 안구에 검게 테두리만 그려진 동공은, 상대로 하여금 섬뜩함을 자아내게 한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등골이 싸했다. 사람이라고 하기도 뭐한, 따라오는 ‘그것’을 시야로 확인하고 있자니, 두려움은 추진제가 되어 달아나는 발소리를 더욱 높였다. 태어난 이래로 자신을 가장 열심히 노력하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째서 이렇게 전속력으로 도망가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튜라츠는 원래 자주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동네 지리에 빠삭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도망’이란 선택지 다음 취할 수 있는 길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것뿐이었다. 물론 거소(居所)에서 이리도 멀리 나와서야, 집 주변 지리를 잘 아는 걸로는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미아가 되는 경험은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지 않겠나.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되어 보는 건데. 스스로도 이게 무슨 한심한 생각이냐고 자책하면서, 자신을 이처럼 처량하게 만든 원흉에게 분노를 향한다.


“……어휴! 이 무서운 새끼야! 그만 좀 쫓아 와라─!”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가 쫓는 자의 귓가로 도달하지 못했는지, 쫓기는 자와 대비되도록 회색 승복(僧服)을 나부끼는 남성은, 속력을 감속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속하고 있었다. 고풍적인 의상은 움직이기 불편할 법도 한데, 그가 달려나가는 모습에 어색함이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현재 진행 중인 술래잡기조차 평범함을 넘어선, 소리의 영역을 가볍게 뛰어넘은 죽음의 놀이였으니까. 지금도 착실히 지면은 파헤쳐져 흙더미가 하늘로 치솟는 중이었으며, 방금 지나쳐온 숲도 쓰러진 나무와 가지로 인해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야…, 야야야야야──야!”


소리에 절규가 더해진다. 약 1초도 되지 않은 시간, 튜라츠는 심장이 얼어붙는 기운을 느끼고서, 살 떨리는 감각이 등에 닿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뒤를 돌렸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 하얀 손이 휘둘러지려 하는 걸 보면서, 새어 나오는 다급한 비명과 함께 옆으로 몸을 던진다. 폭풍인가? 아니면 근력에 의한 충격파인가. 어찌 됐든 마력(魔力)이나 성력(聖力)과는 다른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조금 전까지 튜라츠가 달려가던 직행 루트를, 거대한 소음이 생성되기보다 빨리 휩쓸고 지나갔다.


난장판이란 단어는 이럴 때 써야 하는 거겠지? 지진이라도 일어나야 생길 법한 거대한 균열이 대지를 좀먹고 있었다. 미리 몸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바람이라기보단 진공처럼, 진공이라기보단 칼날처럼, 칼날이라기보단 마법처럼, 마법이라기보단 기(氣)처럼 날아간 일격의 출처는, 벌써 보았다시피 은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백색의 남자였다.


“드디어 멈췄나.”


굵지 않고 가느다란 목청을 울린 남성은, 바닥에 눌러앉은 튜라츠를 향해, 그 무엇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살며시 내밀었다. 분명 무기가 아닌 주먹을 쥐고 있을 뿐인 맨손인데, 마치 칼끝이라도 향해지고 있는 것처럼 위기감이 전해져 온다. 저것이야말로 인공적인 재해를 일으킨 원흉이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튜라츠는 주의 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않은 기분을 그대로 얼굴에 표출하면서, 하의 쪽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낸다. 튜라츠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 무거운 음률을 흘렸다.


“그래, 드디어 멈췄다. 이 신발 놈아.”


“열심히 짖어대는 건 보기 좋은데, 우선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게 어때? 얼른 날개를 꺼내지 않으면 힘 조절을 실수할 수도 있거든. 네놈도 알고 있겠지만, 개미를 죽지 않게 즈려밟는 건 상당히 힘들어. 이 내가 벌레 같은 네놈을 쫓아다니고 있다면, 보상을 해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오만불손한 말투에 하아…, 하고 튜라츠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다. 그럭저럭 일 년 가까이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데, 저 사람 신경을 마디마디로 건드리는 주둥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진짜 뒤로 가서 대가리를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이 복받쳐 오르지만, 약자가 참아야지 어떡할꼬. 게다가, 뭐? 남 귀찮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지겹도록 쫓아온 이유가… 고작 날개를 보기 위해서? 그렇게 날개를 보고 싶으면 조류 사육사를 만나보든가 해야지!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라고 호통치고 싶다. 하지만 속으로만 해둔다. 저 날개가 그 날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불운한 인생에 대해서는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으로 일괄하며, 튜라츠는 그쪽의 의사(意思)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목소리에 짜증을 섞어 내보냈다.


“날개? 내가 새냐? 날개를 꺼내게?”


“발뺌하지 마. 그때의 싸움을 잊었을 리가 없잖아? 너도…, 나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미안한데, 너 사람 잘못 본 거 같거든? 제발 좀 꺼져 주라.”


“네 어미나 그렇겠지.”


덜컥, 공기가 가라앉았다. 중력의 강도가 돌변한다. 서로가 서로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한 발짝…, 두 발짝…, 두 남자는 똑같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물론 행동의 의미까지 같았던 건 아니다. 순백의 남자가 거리를 좁혀오는 데 반해, 튜라츠는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치고 있는 중이었다.


“야…! 잠깐! 스톱! 정지!”


이러다간 큰일나겠다 싶어, 튜라츠는 허둥지둥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언행을 일치시키고,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에이…, 라리씨? 우리 사이에 왜 그래. 대화로 해결하자, 대화로.”


“호오…, 우리 사이? 우리가 대체 어떤 사이였지? 궁금한걸?”


“무슨 또 어떤 사이야. 우리는 당연히… 음…… 에…… 그러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말문이 틀어 막혀 버렸다. 안 그래도 없는 지능을 최대한 쥐어짜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낸다. 문득 한 장면이 뇌세포를 스쳐 지나갔다.


“통성명(通姓名)한 사이?”


…………………………?

………………………………………?

……………………………………………………?

…………………………………………………………………?


저도 모르게 내뱉은 언어가,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을 가져와 공간을 감싼다. 은근히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라리였기에, 허탈한 웃음은 유난히 높이 던져졌다. 하하하 소리가 떨어지자, 그는 일순 표정을 바뀌었고, 입술은 상황에 걸맞은 어휘를 뽑아냈다.


“뒈질래?”


쏴아아아아아아────하고, 잔디밭에게 음흉한 춤을 소개하며, 차가운 밤바람이 기분 나쁜 멜로디를 가져온다. 참을 대로 참고, 쪽팔리게 아양까지 떨었는데, 돌아온 응답은 욕지거리라니. 튜라츠의 잇몸은 어느새 우득 하고 이빨을 갈고 있었다.


“엿.”


지금까지와는 태도를 바꿔, 오른손의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좌우로 흔들고 있는 튜라츠. 그는 라리가 화를 참지 못해 달려들기 전에, 강해 보이게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 야, 그런 의미로 하나만 물어보자. 내 날개의 고집하려는 이유가 뭐냐? 나 말고도 네 관심을 끌 만한 건 많잖아? 이 켈라푸토에 강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과학으로는 마법의 흉내까지 낸다는 요즘 같은 시대에, 너같이 강한 놈이 나 따위를 쫓아다니는 건 사치 아닌가? 아니면 뭐야, 그때 내지 못한 승패를 가르고 싶은 거냐? 이미 말했지만, 그건 내가 진 거라고.”


“졌, 다고…? 네가 나에게?”


라리는 입이 아닌 내면으로 되풀이하듯, 불투명하게 속삭임을 내보임과 동시에, 화제를 전환하는 내용을 꺼내 들었다.


“나야말로, 네가 모를 리가 없겠지만, 일단은 물어 보지. 신서(神書)에 대해 알고 있나?”


물음에 응하여 튜라츠가 혀를 찬다. 의미 그대로, 신의 책을 뜻하는 용어.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신의 지식이 담겨 있는 도서. 모를 리가 있나.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튜라츠는 알고 있다. 이유가 있다면, 그 자신이,


──신의 지식을 육체에 담았다고 하는 자였으니까.


──신의 지식을 영혼에 새겼다고 하는 자였으니까.


──통칭 그리놔르와 앙첼료트로 분류되는, 신의 힘을 가진 자였으니까.


귀신 신(神)과 글 서(書)가 집합된 이 단어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나라, 켈라푸토 내에서도, 아니, 세계 전체적으로 탐욕의 눈길로 쏘아지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이렇게 유명하다면야 모르는 게 더 이상하고, 어떻게 알게 됐든 경위(經緯)야 별로 상관없겠지만, 튜라츠가 알게 된 원인은 다른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경로(經路)를 통해서였다. 그것을 당사자인 그는, 자기 자신의 일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걸 내가…, 내 몸에 내포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하하, 정말이지 쉽게 말해주는구만? 하지만 말이야. 너는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어. 바로 그게 너 자신의 무례함이라는 것을.”


“무례함? 내가 무례하다고?”


눈가를 좁히며 묻는 튜라츠에게, 라리는 시원할 정도로 가볍게 답변을 냈다.


“당연하지! 켈라푸터의 강자가 많다고 했었나? 그렇다면 말해 봐라. 그 강자들조차 경외 시 하는 진정한 강자가,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고, 누군가가 죽지도 않은 싸움을 돌이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게 무례함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아? 억지 좀 적당히 부려라. 싸움을 싫어하는 게 죄냐?”


“─하, 나야말로 탄성을 내지르고 싶다. 그 날개의 색. 그 날개의 형태. 그리놔르였나? 그래, 그 강함.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싸움을 기피하는 게, 강해지고 싶어 하는 녀석들에게 있어 무례가 아니라고? 어이가 없군. 그래서, 무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가 있다는 명목으로, 그걸 무례라고 생각하는 자들까지 없다고는 여기지 마라. 자기만족에 불과하니까. 알겠나? 그렇지 않다는 거다. 마법이니 뭐니, 과학이니 뭐니, 결국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이 시대에, 사내로 태어나 어울리지 않는 힘을 손에 넣었으면, 서둘러 구원(=죽음)이나 당할 것이지, 아직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네놈은, 눈에 거슬린다고.”


목의 성량을 드높이며, 선포라도 하듯 과장된 포즈를 취하는 라리에게, 튜라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면서 입을 때어 냈다.


“시끄러. 내가 이 힘을 얻고 싶어서 얻은 줄 알아? 그리고 뭐? 구원? 나보고 저세상이나 가라고? 허…, 참. 저기 미안한데, 사후세계라는 곳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죽지를 못하거든? 진짜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죽으려 해도 죽지를 않는다고. 이건 나와 직접 싸워 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전혀 모르겠는걸? 생(生)에게는 지배당하고 있는 주제에, 사(死)에게는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시(自恃)하는 거냐? 멍청한 놈. 설령 죽음이 없는 존재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위를 걷는 무(無)는 언제나 유(有)의 곁을 왕림하는 법이거늘…. 이건 순리다. 세계조차 당해낼 재간이 없는 순리. 그러니 넌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너의 구원은 내가 받들어줄 테니까. 그러려고 지금까지 내가 널 쫓아다닌 거다. 자──”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투명한 무언가를 쥔 오른손을 앞으로 향하면서, 고조된 감정을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어서 날개를 꺼내라.”


표정에 서린 여유작작함을 없애며, 튜라츠는 부자연스럽게 경련을 일으켰다. 빡 돌았다는 은어처럼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말귀를 안 들어 처먹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고나 할까? 그는 사람 한 명쯤은 가볍게 잡아먹을 기세로 눈알을 부라린 다음, 하반신에 다리의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힘을 줬다.


“아오, 진짜! 너랑은 대화 안 해! 이 신발 놈아! 이제 봐주는 건 없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너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지금부터 전력으로…, 진심 전력으로….


튜라츠가 자세를 잡아가자, 라리는 순수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찰나 안에 사라질 거라고, 과연 그 누가 앞일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선언을, 깊은 암(暗)에 담궈진 남자는 고했다.


“도망친다.”


1화 - 의뢰.


치열하기까지 했던 15일의 밤이 어떻게든 지나가, 보름달은 태양과 바톤을 터치해 지하 깊숙한 밑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현 16일의 시각은 정오일 듯했으며, 내리쬐는 햇볕은 상쾌하다 못해 나른함을 남기는 중이었다. 수억의 인간이 생명의 불씨를 살려 순회시키려는 일상은, 작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원의 중심이 되는 켈라푸토의 수도, 러븐에는 적당 선을 넘어서는 크기의 성전(聖殿)이 세워져 있다. 왕이 사는 성채(城砦)로부터 밖으로 나와, 마을 외곽 언덕에 위치한 신의 집에 당도한다. 인간의 집과 차이가 있다면, 신을 섬기기에 묻어나오는 깨끗함이 허물 수 없는 벽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정도일까. 늠름한 교회의 주위에는 다른 건물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건 들어오는 자를 축복으로 맞이할 탁 트인 광장뿐.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잠든 이를 깨우려고 맞춰 놓은 알람이 고공(高空)을 울린다. 시간은 12시 30분. 지금 막 초바늘이 숫자 6을 지나다가 멈춘 참이니 약으로 따지면 12시 31분이겠다만, 이런 자잘한 사항은 대충 넘어가서, 시끄러운 시계 소리가 방안을 구타하고 있는 와중에도 튜라츠는 잠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음냐…, 쩝쩝….”


깨우라고 맞춰 놓은 시각은 12시이건만, 그때부터 5분에 한 번씩 울리는 알람을 듣지 못하고 있다니, 어지간히 귀가 먹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심히 좋은 꿈나라 여행 티켓을 손에 넣은 것일 수도 있고, 이것도 아니라면 어젯밤에 조우한 별빛을 숙성시킨 듯한 남자가 잠을 방해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답은 본인만 알고 있겠다만, 어쨌든 이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교회에서 시작되는 무상급식(無償給食) 시간이었으니까. 꼴을 보아하니 자느라 아침은 못 먹은 거 같고, 혹여나 여기에서 점심까지 놓치게 된다면 이후에 찾아오는 공복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문제는 수면이 너무도 깊이 박힌 나머지, 귀가 시끄러워지는 건 누구이고, 고파오는 배의 아픔은 자기께 맞는지 완전히 남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고막을 찌르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베개가 허공에 떠 포물선을 그린다. 대체 어떤 험악한 꿈을 꾸고 있으면 베개와 맞짱을 뜰 수 있는 걸까. 마침 시계의 소음공해도 멈췄고, 더는 튜라츠가 잠에서 깰 희망이 없다고 싶을 때, 기가 막힌 우연으로 고양이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만 일어나라!”


천둥과 같은 우렁찬 꾸짖음에 더해, 튜라츠가 침대에서 떨어진다. 눈 주위와 귀, 꼬리와 발, 신체 대부분이 검은색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털은 전부 하얀색으로 도배된 고양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낸 것이다. 생김새로 보았을 때 품종은 ‘샴’이라고 알 수 있었지만, 평범하지는 않다. 평범한 고양이는 말을 못 하니까. 참고로 이 고양이의 품종이 샴이라는 걸 알자 튜라츠가 지어준 이름은 그냥 샴이었다. (……)


“으…, 내 허리…….”


튜라츠는 통증의 신음 하면서 히프 부위를 매만지고 있었다. 잠은 깼음에도 아직까지 졸음이 가시지 않아, 어리둥절하게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바보에게, 고급스러운 고양이인 샴이 요염하게 다가온다.


“몇 시까지 잘 생각이냐? 이 바보가!”


고양이의 소리를 내는 기관으로는 도저히 발음할 수 없는 낱말들이 문장을 이룬다.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기라도 한 건지 튜라츠의 눈이 크게 떠졌다.


“헉….”


튜라츠가 갑자기 심각한 낯빛으로 감탄사를 내뱉자, 아무리 말을 할 줄 아는 신기한 고양이라도 당황함을 숨길 수는 없었는지, 말을 더듬으면서도 부리나케 물어 왔다.


“뭐, 뭐냐?”


“배고프다.”


말하기가 무섭게 퍽, 하고 짐승이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튜라츠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허공을 뜨는 체험부터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돌연히 깨닫는다. 머리를 들어 올린 것도 아니고, 눈동자를 위로 향한 것도 아닌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현상을.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의문을 유추한다. 정황을 되짚어 보자면, 갑작스럽게 날아온 샴의 드롭 킥이 안면의 꽂혔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명중률을 지니고 있어, 맞는 순간 통쾌한 타격음이까지 불러들였다. 즉, 모든 요인의 시발점은 샴이다. 그렇지. 자기 스스로도 완벽한 추리라고 감탄하며, 꽤 길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던 체공시간의 끝을,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인력에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물론 침대에서 떨어질 때와 똑같은 낙법(?)을 구사했지만,


“…아야야.”


오히려 고통은 두 배가 되어 허리를 괴롭힐 뿐이었다. 고양이 주제에 말은 잘하고, 앞발로 무게 50kg 이상의 물체를 손쉽게 쳐날리는 힘을 보면, 보통이 아니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다짜고짜 공격을 당했기에, 평소의 튜라츠였다면 포풍 화딱지가 냈겠지만, 아니, 이미 화딱지를 풀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방해공작인지 뭔지 밖에서 누군가가 현관문을 때려 왔다.


“형~! 아직도 자?”


“시끄러, 이 등신아!”


절대로 그리 보이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애완동물인 샴에게 반격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크리티컬을 맞아,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에게 화풀이하는, 그런 형이 여기에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슬퍼지니까.


“아아, 조용히 할 테니까 문이나 열어.”


큭──. 욕지거리를 듣고도 반격하지 않는 동생이라니, 단순히 바보인가, 아니면 착해 빠진 건가. 뭐, 착한 걸로 해두자. 옆에서 혓바닥을 내밀며 야골리는 샴은 무시하고, 잠겨진 방문을 열어주기 위해 튜라츠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숙박 중인 성당(聖堂) 교회는 오질나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지라, 1층의 예배당을 뺀 나머지 층은 여관이나 호텔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즉, 이곳은 본인의 집이 아니라 방이다.


찰칵, 잠겨진 잠금장치가 풀리자, 형광등도 켜놓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방의 내부로, 조그마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활짝 열린 문이 보여주는 바깥 풍경을─이라고 해도 성당 내부였지만─, 그렇게 길지 않은 녹발(綠髮)의 청년이 가로막는다. 넓은 어깨와 꼿꼿이 세워진 척추가 강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었다. 푸른색을 배경으로 한 단정한 제복이 착용자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튜라츠를 형이라 부른, 그러니까 튜라츠의 동생이라 할 수 있는 남자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어, 하이.”


“앙? 너, 미쳤냐?”


튜라츠가 까다롭게 받아치자, 동생이라는 작자는 하하하 하고 실없이 웃음을 내보였다.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어대는 동생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튜라츠가 깊은 탄식을 들이쉰다.


“산달아, 너 좀 가라.”


산달…, 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사실 그의 풀네임은 에리야 산달포리브였다. 기사 가문으로 유명한 에리야 가문의 차남. 우리 귀족님께서는 애칭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꼬리를 말았다.


“웬만하면 포리브라고 불러줘. 그리고 오늘은 권유가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온 거야.”


“부탁?”


그러고 보니, 포리브의 등 뒤로 새카만 사람의 자취가 힐끗 눈에 띄었다. 자기 딴에는 배려라고 판단했는지 쓸데없이 옆으로 물러난다. 정면의 구도가 되어 바라본 손님은, 검정 가죽에 의상으로 상의와 하의를 맞춘, 이상하게 봐도 아가씨 같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딱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도록만 시허연 피부. 착용한 옷과 바지에 어울리는 짧은 흑발. 손에까지 씌운 검은 장갑은 트레이드 마크일까? 시계(視界)에 비취는 신비로움에 멍하니 있자, 차가운 분위기의 소녀는 조용하게 고개를 숙여 왔다.


“안녕…, 하세요?”


몸짓의 인사는 저쪽이 먼저 했지만, ‘안녕…, 하세요?’ 라고 음성을 울린 건 튜라츠 혼자였다. 말 없는 인사라니 저런 밥 말아 먹은 예절을 보았나. 참을 인(忍)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꾹 참는다. 튜라츠는 소녀를 보다가, 불현듯 이상한 끔세를 챘다


“…음?”


조신하게 고개를 숙인 체 아래를 쏘아보는 눈길이 신경 쓰인다.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게 뭔가…. 똑같이 고개를 숙이자, 튜라츠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하체에 걸쳐진 의류가 팬티 한 장 뿐이라는 것을. 앞부분이 조금 튀어나온 우렁찬 사각팬티다.


“헉…!”


튜라츠는 깜짝 놀라 서둘러 문을 닫고, 깎아 내려진 체면에 말을 더듬었다.


“이…, 이런… 산달! 너… 여성 분이 있다면 있다고… 아니, 너 일부러 그랬지? 죽는다아아!?”


밖에서부터 들리는 남성의 함박웃음. 젠장, 포리브 녀석…. 고의가 분명하다. 어젯밤부터 운이 안 좋다 안 좋다 했는데, 설마 오늘 아침 아닌 아침까지 이렇게 불운하게 출발할 줄이야. 철문은 경계가 되어, 좌절하는 튜라츠와 기뻐하는 포리브를 나눴다.


★☆★


“흠흠…, 처음부터 다시 해서, 자기소개부터 하죠. 저는 메타튜라츠라고 합니다.”


“…….”


다행히도 아까의 해프닝은 잘 무마되어, 대가는 동생이 형에게 두들겨 맞는 정도로 끝났다. 지금의 이 상황은, 대충대충 머리에 물을 묻히고, 검은색 신부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튜라츠가, 이야기는 안에서 듣겠다며 둘을 방으로 초대한 것에서 시작됐다. 개인 사무실처럼 생긴 내부로 들어와, 사각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네 개의 소파가 둘러싸인 대화 장소에 앉은 삼인(三人). 그런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이름 모를 소녀는 튜라츠에게 답장은커녕 까닭 모를 침묵을 일괄하고 있었다. 그녀를 대신하여 입은 연 건 포리브였다.


“음…, 형? 이분은 릴리첸투 씨. 성격이랄까, 목소리가 작으셔서 말을 잘 안 하셔. 해도 밀착해서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거든.”


“아하, 그럼 이야기는 너랑 해야 하나? ”


“그렇지.”


검지와 엄지로 턱을 누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럼 넌 좀 가라.”


“에이…, 혀엉.”


“애교 부리지 마…, 죽을래?”


“그보다 걔는 소개 안 해 줘? 릴리 씨께서 아주 좋아하실 텐데.”


“걔? 아아. 맞아. 이 녀석도 소개해야지. 샴!”


부름에 응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뭉텅이. 천장에 거미처럼 붙어 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낙하하던 샴 품종의 고양이────샴은 튜라츠의 어깨 위로 멋있게 착지했다.


“얘는 제 애완견으로, 이름은 샴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손님 앞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해두었기에, 샴은 평범한 고양이처럼 얌전히 있었다. 마땅한 조치다. 문외한인 사람이 본다면 얼마나 놀라겠나? 튜라츠는 서로의 소개도 거진 끝났다 싶어, 슬슬 본론을 꺼내 들까 하다가, 그만 말문이 틀어 막혀 버렸다.

“…….”


아니, 주제를 꺼내려고 해도, 샴을 바라보는 릴리첸투의 눈빛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라서, 차마 꺼낼 수가 없다. 반짝반짝 빛을 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싶다. 그녀가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귀….’


음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오므리는 입술의 모양으로 알아 맞춘다.


“귀?”


.
.
.
.
.
.
.
.
.


“우, 우왓?!”


난데없이 자신의 흑안을 붉히며 달려드는 릴리첸투 씨. 이유야 모르지겠만,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샴을 껴안기 위한 행동이었다. 거의 날아오르는 수준의 점프라니, 그 뒷일을 생각해야지…!


우르르 쾅쾅!


주위가 아수라장으로 화한다. 예의 따지지 않고 말하자면, 민폐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샴은 바닥에서 릴리첸투의 조금 작은 가슴에 안긴 상태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니, 조금이 아닌가? 그것보다도, 튜라츠는 릴리첸투에 의해 깔아뭉개져,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복부에 올라타 있다고 하면 될까? 앞으로 누운 남성 위에 여성이 앉아 있다니, 자세가 조금─이라고 쓰고 많이라고 읽는─이상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19금 영화에서 나올법한 묘한 자세보다도, 그녀의 팔꿈치가 튜라츠의 명치를 찌르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야…! 사, 산달…!”


“릴리 씨!”


포리브가 양팔을 붙잡고 말리자, 그제서야 릴리첸투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깨닫고,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재빨리 샴을 내려놓고 거리를 벌린다.


‘아… 저… 아… 그게….’


역시 입 모양을 보고 알았지만, 검은 사복의 소녀는 심각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버금버금 거리는 게 은근 귀엽다? 흠흠…. 방금 전 행동을 의아해하는 튜라츠에게 포리브가 덧붙인다.


“릴리 씨는 귀여운 것만 보면 마음이 흐트러지셔서.”


!? !? !?
!?!? !?!? !?!?
!?!?!? !?!?!? !?!?!?
!?!?!?!? !?!?!?!? !?!?!?!?
!?!?!?!?!? !?!?!?!?!? !?!?!?!?!?


“후…, 그건 됐고. 빨리 이야기나 해라. 그래서 부탁이 뭐라고?”


튜라츠는 복부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앉았다. 포리브와 릴리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고, 샴은 벌써 어딘가로 내빼 보이지도 않았다. 포리브가 대화를 잇는다.


“형.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


“또 얼마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경고부터 날리냐.”


“아니…, 내가 언제 속을 뒤집었어….”


“알았으니까 빨리 말이나 해라.”


“맞아, 이건 형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거참 되게 뜸들이네, 하고 튜라츠가 궁시렁거리자, 포리브는 헛기침 한 번에 뜬금포를 속사포로 바꿔 명령에 따랐다.


“저기…, 릴리 씨를 얼마 동안만 데리고 살아주면 안 될까…?”


“…….”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라는 듯이 튜라츠의 붕어 눈이 포리브를 노려봤다. 포리브가 당황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 온다.


“안…, 될까?”


“신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매서운 괴성이 고막을 폭행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볼륨에, 포리브와 릴리는 양 귀를 막았다. 화난 튜라츠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는다.


“야…, 내가 너에게 뭐 잘못했냐? 너 왜 내 인생의 도움은 안 될망정 자꾸 귀찮게 하냐?”


“형, 릴렉스. 릴렉스. 내가 진짜 미안하긴 한데, 이것도 진짜 중요한 극비 임무거든? 형도 귀족이었으니까 내 사정 알고 있잖아. 믿을 사람이 형 밖에 없어서 그래. 좀 도와 주라. 응?”


“저기 말이지, 그 믿음을 좀 없애주면 안 될까? 사정이나 말해봐. 일단은 들어나 보자.”


“……….”


이번에도, 대답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한다는 건,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거겠지. 이해한다. 포리브도 말했다시피, 튜라츠는 과거에 귀족이었으니까. 위에서 받는 명령은 다 그러하다. 기사 나리로서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을 테니… 아이고 불쌍한 것.


“이 골치야…. 아아, 알았어. 근데 말이지. 그래도 내가 뭐 때문에 같이 있어줘야 하는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여자아이 달랑 맡겨 놓으면 쓰나. 나도 남자거든?”


“그거야말로 아니지. 형이 남자여서 문제라니? 남자여도 형이면 문제가 없어.”


빡, 뒤통수를 강타하는 맨손. 튜라츠가 맞은 부위를 감싸는 포리브에게 말했다.


“죽을래?”


“미, 미안….”


“사전설명이나 해라.”


“내가 하는 일이면 하나지, 뭘. 아흐라므야, 아흐라므.”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인다. 현 인류의 최대 골칫거리. 『아흐라므』. 흔히들 악마라 표현하는 세계의 적이자, 어떻게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괴물, 귀신, 요괴, 마귀, 도깨비 등 어떤 글자로도 포괄할 수 없는 명실공히한 죄악의 실태. 골치에 머리를 쥐어 뜯는다.


“진짜 귀찮네. 재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요번에는 거절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릴리 씨? …는 쫓기기라도 하고 있는 거냐?”


릴리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힐끔 눈길을 흘기는 튜라츠. 그녀는 눈을 감고,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포리브가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며 말한다.


“뭐, 그렇지.”


긍정하는 포리브의 대해, 튜라츠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핵심을 콕 짚어낸다.


“클래스는 마수(魔獸)냐?”


“아니, 못해도 마인(魔人)은 돼. 형은 되야 싸울 수 있지. 그래서 찾아온 거고.”


“얼씨구, 과대평가하지 마라. 쪽팔린다.”


“형…, 다시 돌아오시죠.”


문득, 포리브는 그런 말을 해왔다. 순간 공기가 멈췄다. 묵직함에 침묵이 지속한다. 튜라츠는 질렸다는 듯이 제스처를 취했다.


“또 그 말 하면 내쫓힌다.”


튜라츠가 큭큭 웃으며, 대화를 끝내자고 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리브가 아닌 릴리에게 방향을 향해서, 손을 뻗는다.


“동생이 간청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어쨌든 잘 부탁해. 릴리 씨.”


여전히 표정의 변화도 없고, 그저 같이 손을 뻗어 악수했을 뿐이었지만, 왠지 희미한 스마일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튜라츠의 대답을 듣자마자 포리브는 승리의 파이팅 포즈! 를 하며 말했다.


“와…, 내가 정말 형 때문에 산다. 나중에 한 턱 쏠게.”


해님과 달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우월함에 빠져 의기양양하고 있던 튜라츠는, 이후에 찾아올 아찔한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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