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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나는 여동생을 그렸습니다.
글쓴이: 이시안
작성일: 12-07-31 20:48 조회: 2,108 추천: 0 비추천: 0

0.

메모 0일째.

남매란 무엇일까.

같은 환경,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같은 피의 가족.

하지만 다른 외모, 다른 성격, 다른 시간을 보낸 남남.

많은 친구를 사귀고, 확고한 꿈을 이야기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오빠.

하지만 그가 될 수 없는, 그늘 속에 가려진 여동생은 그의 모습에 동경을 가지고, 부러워하고, 이윽고 질투의 감정을 품는다.

그가 이룩하는 눈부신 나날이 추억이 돼가는 동안, 그 여동생의 마음은 탁한 앙심으로 어둡게 변하여 이윽고 하나의 강한 결심을 만들어 냈다.

아아, 오빠의 인생이 나의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1.

갑작스럽지만 청춘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춘, 누구에게나 있었을 시간이며 누구나가 겪는 인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시기. 아직 어린아이일 때는 어서 경험해보고 싶다고 선망하며,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좋았던 시절이라며 회상한다.

즉, 이 청춘이란 시간은 일정의 기간, 타이밍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불어 아직 꿈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황금기라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인생을 논함에 결코 빠질 수 없으며 요리로 따지자면 메인 메뉴, 아이스크림콘이라면 끝 부분 비스킷, 케이크로 따지면 중앙에 곁들여진 초콜릿.

…어쩌다 먹는 이야기로 흘러갔지만 그건 자취생의 흔한 괴로움인 공복이 복부를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아무튼 간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앞서 말했듯 그 청춘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결국에는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끝은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놀지 않게 되었을 때일 수도,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현실의 장벽 때문에 꿈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일 수도 있다.

왜 이런 지루한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것이냐, 그것이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내 경우, 저 위에 나열한 예들이 모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스물, 외동아들인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동창회의 연락은 오지도 않고, 이루고 싶은 꿈도 없는 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여자 친구에게도 차이고 말았다.

그러므로 끝나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난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청춘이었으나, 누구나처럼 결국 끝을 맞이했다.

그랬을 터였다.

“왜 멍 때리고 있어! 왔다 왔어. 저기! 저기 벌써 왔잖아!”

한창인 여자아이의 높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묘하게 따갑다. 아니, 실제로 요란스럽게 휘두르는 손짓에 어깨가 맞고 있어서 아플 수밖에 없지만. 아무튼 힘들다.

유명한 여대의 정문 앞에서, 통기타를 등에 맨 채 컴퍼스로 잰 듯이 완벽한 원을 가지고 있는 안경을 끼고선 자전거까지 타고 있는데다가, 나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면박을 받고 있는 이 상황도 마찬가지로 힘들기 짝이 없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고통의 범인은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강도를 더해간다.

뒷목 언저리까지 살짝 내려간 검은 머리, 천연 곱슬머리인지 웨이브를 준 듯 끝에서부터 풍성하게 말아져 살짝 떠있다.

놀라우리만치 흰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학생처럼 보이는 소녀.

약간 눈의 끝이 쳐져 있는 듯하나, 맑은 눈동자와 진한 눈썹으로 인상이 훤해 보였다.

그런 부분은 나와 닮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 지금. 지금이야!”

“야, 야 잠깐만. 역시 이건 아니야!”

아까부터 소녀가 가리키는 대상은, 한가롭게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는 여대생이었다.

물론, 면식 따위는 없다.

만날 약속도 없었다.

아니, 그전에 남친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묻는 게 예의잖아!

“인제 와서 뭘 겁내는 거야! 기껏 코디까지 해줬는데!”

“그 코디가 문제라고! 왜 이런 촌스러운 복장을 입히는데!”

내 반박에 소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초, 촌스러?”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어떤 안목을 지니고 있는 거냐.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좀 전까지 자신감 넘치던 소녀의 모습은 간데없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덜렁이가 남아있었다.

“이, 이 복장이 촌스러운 줄 알면서 왜 순순히 입었던 건데!”

역으로 화를 내내!?

“그럼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사귀라고 하는 말을 진짜로 믿어야 하는 거였어!?”

이 정도면 그게 진심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거짓말 같았으면 왜 일부러 전철에 자전거까지 끌고 여기로 온 건데. 이 덜렁아! 복장이 불만이면 진작 말했어야지!”

얘가 나를 덜렁이라 부르네!? 그런 것까지 닮아있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무튼, 난 절대 못해!”

자전거를 끌고 자리를 뜨려고 하자. 소녀가 뒷좌석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하지만 어차피 여자애다.

페달을 힘껏 밟아서 백수인 나에겐 너무나 거북한 이 세상을 뜰 것이다.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땅을 찼으나, 웬걸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눈부시게 빛나던 미소녀가 다리를 씨름 선수처럼 벌리고 자전거를 당기고 있었다.

“절~대~못~가아아아!”

효율적인 힘의 사용에 감탄 한 번, 여자의 자존심을 모두 버린 필사적인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세상에, 인중과 이마에 모인 주름살과 땀 봐.

하지만 나는 내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심층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격한 거부감을 오로지 페달에 쏟아 붓는다.

여대 정문 앞. 방과 후 시간, 여름 땡볕은 받으면서 88년도 복장을 하고 자전거로 나보다 작은 여자아이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아아, 진짜 어떻게 되먹은 인생인지.

짧고도 긴 사투 끝에 자전거 페달이 굴러가는 느낌을 받았다.

“으, 아. 이젠 한계야아아…”

힘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승리의 함성을 외친다.

지금쯤 소녀가 땀에 절어 울상을 짓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유쾌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어?”

웃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도 신경 쓰지 않고 미소 짓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앞을 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 여대생을 향해서.

아마, 좀 전의 씨름을 하는 동안.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겠지.

힘껏 밟았던 페달은, 기대에 훌륭히 답하겠다는 듯이 자전거를 움직였다.

마치 빨리 차여버리라는 듯이.

만사를 포기하고 다시 뒤를 보자 마치 속으로 승리의 함성을 외치고 있을 법한 상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힘내, 오빠!”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거기 아가씨이이이!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오오오!”

이 당연히 실패할 것이 분명한 일을, 나 20세 백수 이정우는 무모하게도 소위 말하는 ‘여동생’의 응원을 받으며, 도전을 하고 있었다.

다시 청춘을 누리기 위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외동아들이다.

그날은 분명, 최악의 하루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젠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원장이 전화로 말하길, 이번 모의고사도 빼먹으면 ‘다음 중 좋아하는 것을 고르시오. 1.퇴출 2.퇴출’이라는 문제를 제출하신다 하여 간만에 학원에 가기를 결심한 날.

버스에 오르자마자 학원 녀석들이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거나, 양아치 여러분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반으로 들어갈 때까지 만나는 선생마다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 정도야 익숙한 일이었다.

지망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대충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수준의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0의 소수점만 늘리는 일이 되자, 학업에 흥미를 잃었고, 이미 낸 돈이 아까워 대충 얼굴이나 비추는 내 행동이 마뜩잖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학습 분위기에 방해된다느니 어쨌다느니 해서 수도 없이 상담을 거치고 이내 낙오자 취급을 받았으니, 어떻게 퇴출만 안 당하려고 출석을 할 때마다 날아오는 따가운 눈초리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밉상의 인간이어도, 이제 곧 나갈 인간인 이상 큰 얽힘을 섞지는 않았다.

생존경쟁이나 다름없는 입시 학원에서 한 명의 패배자 때문에 투자할 시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따라 그 얽힘의 범주가 선을 넘고 만 것이었다.

“씨발. 수험만 잘 보면 그만이지 뭔 놈의 실기시험이냐고.”

“왜, 니 성적으로도 지원할 수 있는 게 다행이지 인마.”

교실의 정적을 신경 쓰지 않는 소음이 그 날도 학원을 찾았다.

성실히 공부할 의지가 있는 놈들은 앞자리, 못 다닐 수가 없어서 다니는 놈들이 중간이라면, 뒷좌석은 어디에나 흔히 있는 전형의 인간들의 자리다.

나름 예대를 지망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머리를 화려하게 올리고, 염색한 그들은 앞자리의 모범생 중 하나를 먹이로 삼아 날이면 날마다 재미를 본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음습한 괴롭힘이 되었든 간에 육식동물 같은 그들도 일을 크게 만들기를 원치 않기에, 단 하나의 먹이만을 노리고 행동한다.

그리고 마치 일과라도 되는 양, 목적을 달성하면 자리로 돌아가 잡담을 떠들다 시간도 못 채우고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굳이 가까운 인종을 찾자면 나와 같은 낙오자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화제에서 나를 이끌어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반에 그림 좀 그린다는 새끼 있지 않냐?”

그 때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마치 심장을 휘어 잡힌 듯한 느낌이었다.

“새끼, 과외라도 받으시려고?”

“미쳤냐. 아, 저기 있네. 야, 거기 곱슬 대가리.”

그들이 내 바로 옆으로 올 때까지 아무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놈들이 새로이 먹이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챈 마냥.

그런 환경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다는 듯이,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미대를 가야 되거든.”

알게 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근데, 뭐 몇 점되지도 않는 실기 시험 때문에 내가 돈을 들일 수는 없잖냐?”

마치 당연한 논리를 말하듯 그는 내 가방을 힐끗 보며 웃었다.

“그림 교재 같은 건 특히 비싸니까. 좀 빌려 간다.”

평소라면, 그들이 바라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주게 되어있다.

이런 상황은 별로 드물지도 않다.

돈을 원하면 주었을 것이다.

그 이외 어떤 것이라도 맞기는 싫으니까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건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이건 안 돼!”

뻗어오는 손을, 무리하게 뿌리쳤다.

“그림 교재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이건… 피, 필요 없을 거야.”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은, 당연히 그들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툰 거짓말이라도 일단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그 것들을 나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그니까. 이건 못 빌려…”

머리를 맞으면 그 뒤는 멍해서 아픔도 못 느낀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학원가의 고시원 2층 한구석.

그곳이 내가 생활하는 집이자,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온통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형광등을 켰다.

몇 번의 깜빡임과 함께 내 집의 모습이 비춰진다.

3평의 작은 방, 침대와 책상은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 정도로 띄어져 있고 책상의 옆에는 작은 냉장고와, 그 위를 작은 브라운관 TV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는 혼자서면 충분하고 냉장고는 거의 비었으나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어서 편리했으며 TV는 이 좁은 방을 시끄럽게 채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리고 책상에 이르러선. 작은 데스크탑과 그것들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 놓여 있는지 우선 확인했고. 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가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열어, 그것들과 같은 내용물을 꺼내었다.

그것은 여동생 소설이었다.

학원에서 두 사람에게 마구 얻어맞으면서도 가방만은 뺏기지 않으려 했으나, 그들은 집요하게 가방을 붙잡은 손을 노려 결국엔 그 내용물을 드러내고 말았었다.

“뭐야 이거!? 순, 여자 그림밖에 없잖아?”

“진짜네, 참나. 그림 좀 그린다더니 그냥 변태였잖아!”

그러고는 마치 전리품을 자랑하는 것 마냥 바닥에 난폭히 흩뿌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초식동물처럼 움츠리고 있던 녀석들도, 양아치들의 실소를 이어받아 비웃어대기 시작했었다.

“이건 더 가관이네, 여동생 어쩌고 하는 만화책? 뭐야 소설이야 뭐야?”

나는 여동생을 그리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여동생물의 심취한 변태로 유명했다.

특히 직접 그림을 그린 적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도 그저 그림을 좀 그리는 녀석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여동생물에 푹 빠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가 할 것 없이 비난하고 괴롭히며, 멀어져갔다.

지금까지는 학원에서만큼은 그 과거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는 학원비가 아까워서 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 생각하자 자연스레 손에서 힘이 풀리려 했고, 나는 무심결에 떨어뜨릴 뻔한 가방을 강하게 붙잡았다.

여동생의 관련된 소설과 그림 교재들이 들어있는 가방.

맞았던 뺨이 다시 달아 오는 것을 느꼈다.

“고작 이딴 거 때문에…!”

그동안 소중히 끌어안았던 그것을, 나는 구석으로 세차게 던졌다.

하지만 역시나 너무 좁아, 충격으로 책상 위에 물건들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단편적인 여러 장의 그림들과, 관련된 자료들이 떨어진다.

그리고 여동생을 그린 그림이 사뿐히 그 위에 내려앉았다.

여름철에 느낌을 살린, 푸른색 핫팬츠와 팔랑거리는 블라우스가 잘 어울리는 검은 곱슬머리에 눈이 약간 처진 나를 닮은 여동생.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여자친구가 없을 정도로 못생겨도, 꿈도 포기한 낙오자여도, 설사 부모마저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나의 아군이 되어줄. 상냥하고 귀여운 나의 여동생.

그런 여동생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해서, 무심결에 여동생이 나오는 만화를, 소설을 찾아 헤매었다.

그림 교재 같은 건 여동생을 보다 완벽하게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닮았다는 인상을 심기 위해 가족의 특징을 잡아 여동생의 이미지를 구상해, 약간 끝이 처진 눈과 곱슬머리로 그렸다.

아아, 청춘을 실패와 실패로 거듭한다 하더라도, 나의 여동생만큼은 나의 편, 나의 이해자, 누구보다 완벽한 가족이자 연인으로서 있어줄 것이다.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가까이서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잡동사니 위에 올려진 여동생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형광등의 빛이 그 실체를 밝히었다.

흰 병원과

나무와

밤의 별들과

친구들의 얼굴들이 그려진 그림들.

내가 낙오자가 아니었던 시절에 그린, 다른 그림들.

꿈으로 가득했던 청춘의 그림.

머리를 세차게 방망이로 맞은 것 같았다.

그러자 더 이상 그림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작작해라…이정우.”

마치 다독거리는 듯이 다뤘던 좀 전의 기분이 거짓말 같게 그림을 던지고, 구석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자신을 자극해 피곤함이 몰려왔던 하루였다.

언제가 되었든, 다시 학원에 갈 준비가 필요하니 잠을 자두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학원엔 갈 수가 없다.

이젠 아르바이트로 쌓아둔 돈도 거의 다 떨어졌다.

아니, 애초에 돈이 아까워서 간 학원이었으니 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없다.

자신을 닦달하던 고등학교도 이미 졸업했다.

이젠…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다.

“어라, 그럼. 이제 난 뭘 하면 되더라…”

말해놓고 우습다. 어차피 실패한 청춘이 아닌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이젠 아무것도 없다.

의지할 수 있는 여동생만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여동생을 그리던 화가 지망생 이정우도 이젠 지나간 청춘이다.

어차피 여동생의 그림도, 여동생도 상상이었을 뿐이니까…

“이런 인생 따위…”


“필요 없다고?”


어?

분명, 여성의 목소리가 자신의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다.

그러자, 아직 끄지 않았던 형광등의 아래에서 당당히 서 있는 인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은 확실히 닫혀있었다.

푸른 핫팬츠와 간편한 블라우스.

뒷목 언저리까지 살짝 내려간 검은 머리, 천연 곱슬머리인지 웨이브를 준 듯 끝에서부터 풍성하게 말아져 살짝 떠있었다.

목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녀석은 여성이었다.

아니, 소녀였다.

아니, 여동생이었다.

“…정아?”

태어나서 처음 만난 여동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없다면, 나한테 양보해. 오빠의 청춘을.”

그리고는, 처음으로 나를 오빠라 불렀다.

“오빠가 인생에 절망한 덕택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어. 고마워.”

내 여동생, 아니. 여동생의 얼굴을 한 소녀는 다른 이야기들도 해주었다.

강한 마음이 향한 물건엔, 귀신이 담기게 되며. 자신의 모습은, 내가 언제나 그리고 또 그려왔던 그림의 귀신이기 때문에 내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이 그 귀신이란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내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아? 어차피 곧 버릴 인생에 의문 하나나 둘쯤 남는 것 정도야.”

“무슨…소리야?”

내 목소리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을 여동생이라 칭하던 귀신은, 그야말로 얼음장과 같이 차가운 웃음을 토해내었다.

“내가 오빠의 절망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아직 한 사람 몫의 생명력은 가지지 못했거든.”

소녀는 ‘아직’이라고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한 사람 몫의 생명을 가지겠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몸서리가 쳤다.

“이제 알았지? 오빠가 더욱 절망하면, 내가 오빠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래서, 양보해달라고?”

어느새 내 목소리는 내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져 있었다.

“그래, 어차피 오빠가 줄 생각이 없어도, 내가 강제로 오빠의 인생을 뺏어갈 생각이지만 말이야!”

상상의 여동생과 똑같이 생긴 소녀가 나의 가슴으로 손을 뻗어왔다.

양아치들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나는 같은 공포를 느꼈다.

마침내 가슴에 손이 닿자, 사랑스럽게 그려왔던 얼굴은 보기에도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은 듯한 그런 얼굴.

나로서는 도저히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안도감이 찾아왔다.

내 덕분에 혹시 이 세계에 새로운 생명이 싹튼 것이 아닐까.

“…어라?”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되겠군.

“이상하다…”

그것뿐인가 이제 소녀는 나보다 훨씬 빛나는 인생을 살 것이 틀림없다.

“여, 여기가 아닌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의 희생으로 세상에 미소녀가 태어나다니!

“저기요?”

생각해보자. 세상에 미남미녀보다 추남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으…오빠?”

그 숫자가 적음으로써 세계의 미남과 미녀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오빠, 잠깐 나 좀…”

그런데 추남 하나와 미녀 하나를 교환하다니. 기적의 등가교환이 아닌가!

“나 좀 잠깐 보라니까!”

“으아악!”

귀신의 높은 고음이 고막을 꿰뚫었다.

“뭐, 뭔데!? 왜 아직 안 끝났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물음이지만, 귀신은 그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거 처음이고…”

남의 생명을 처음 뺏는 걸 저리 수줍은 듯이 말하다니.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하고 있는 귀신인지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단지 저렇게 곤란해 하니 집중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지, 외양이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여동생이어서 당황해 하는 모습을 매 순간 시신경에 각인시키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왜지? 아까는 능숙하게 됐는데…”

“느, 능숙하게라…”

그건 그거대로 무섭군. 하지만, 정말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절망해서 태어난 거랬지? 그럼 내가 또 울면 되는 거야?”

근데 난 왜 이런 걸 조언하고 있는 거야.

귀신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아니, 오빠가 꼴사납게 침대 속에서 울은 건 이거랑 상관없는 일이야.”

“꼴사납…”

친절히 설명해주는 것이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파져 왔다.

“애초에 귀신이 태어나는 절망은, 고작 눈물 한 방울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냐. 그보다도 훨씬 깊은 추락의 기분…을.”

정좌의 자세로 앉아 고민하던 귀신이 갑작스럽게 내 가슴에 다시 손을 뻗었다. 침대로 들어갈 때 상의를 벗어던진 터라 얇은 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얇은 손가락이 이곳저곳 찔러대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그리고

“으아, 차거!”

“귀신이니까 당연하잖아!”

과연, 여름의 피서를 책임지는 요소 중 하나답군요.

내가 쓸데없는 감상을 피로하는 동안 무언가 알아냈는지 귀신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리곤 이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숙인 것도 아니고. 안타까움? 실망? 오히려 귀신 쪽이 절망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저, 저기. 뭐, 괜찮을 거야. 이렇게 쓸모없는 인생을 산 인간도 너 같은 귀신한테는 필요한 거지? 뭐든 말해, 협력할게.”

이런, 너무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이래저래 엄청난 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인 건 사실이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 의도가 전달이 됐는지 귀신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그런데, 뭔가 내가 원한 반응을 주지 않네? 뭐지 저 표정은? 아까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다른 듯한, 마치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듯한 표정이다. 뭐지 저 표정은? 연민? 동정? 한숨을 쉬었다!?

나의 그런 고민을 아는 듯, 귀신은 알기 쉬운 표정과 반응을 보여주는 관용을 베풀어 주었다.

분노로 찬 커다란 외침을 지르는 것으로 말이다.

“똑바로 좀 살아!---”

메모 1일째.

이게 뭐냐고!

정말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

멋진 인생, 멋진 시간, 멋진 청춘을 보내기 위해서.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나 또한 살아서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누군가의 절망을 토대로 삼아야만 한다.

귀신이라면 간단하게 해낼 수 있어 보이지만 의외로 이것은 어렵다.

귀신의 모습으로 절망시키는 것은 간단하다. 단지 겁을 주면 된다.

하지만, 귀신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선 우선 절망을 토대로 태어나야만 한다.

이 무슨 부조리함. 마치 호텔에 묵기 위해 호텔을 사라고 하는 것 같다.

호텔을 살 돈이 있었으면 진작에 집을 샀을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난 정말로 운이 좋았다.

고시원에서 자취를 하는 것도 고마운데 제멋대로 절망해서 굳이 집까지 돌아와 준건 정말 하늘이 주신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멋대로 발산해지는 절망 덕택에 쉽게 생명력을 얻고 몸을 얻기까지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 정말 세상엔 쉬운 일이 없는 것 같다.

정말이지 그런 인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귀신은 누군가의 절망을 토대로 삼아야한다.

이 절망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언제 절망할까?

단순히 깡패들한테 얻어터졌을 때?

돈을 뺏기고 자신의 숨은 취미가 드러났을 때?

여자친구에게 차였을 때?

모두 정답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깡패한테 맞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 다시 얻어터졌을 때.

뺏길 돈도 없고 취미는 대놓고 공인되어있을 때.

차일 여자친구도 없을 때.

그런 사람은 절망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래도 정황상, 내가 뺏어야했을 인생을 사는 ‘오빠’의 경우.

그런 절망조차 남겨지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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