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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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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반쪽 하늘의 별.
글쓴이: 악명높은
작성일: 12-07-31 19:23 조회: 2,672 추천: 0 비추천: 0
반쪽 하늘의 별.(半空의 星)

*

이 글은 실재의 인물, 사건, 지명 등의 일체의 사실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매우 없으며 아주 픽션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파생효과에 대한 법적 책임은 작가에게 절대 없으며, 그러니 정말 다 거짓말입니다.

*

지금, 이라는 혜성.
아직도 쫓고있다.

*

갑자기 덮쳐눌려졌다. 엉덩이부터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혔다.
아프다. 뜨거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이 꼬리뼈로부터 올라왔다. 그 선명한 고통에 저절로 벌려진 입에서는 신음성 하나 나올 틈이 없었다.
등이 바닥에 충돌하자 호흡이 뱃속을 밀고 튀어나갔다. 손 아귀의 힘이 저절로 풀려서 우산이 멋대로 나뒹굴었다.
비가 쏟아져 내린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옷으로 빨려들어오는 축축한 감촉. 그리고 내 위를 덮쳐누른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는 약간의 온기가 스민 물방울의 감촉이 묘하게 인상에 박힌다.
그리고, 단단한 감촉이 가슴 정가운데에 꽂혔다. 검은 윤곽, 둔탁한 무게감, 빗물이 타고 흐르며 빛나는 단단한 느낌. 그건,
권총이다. 나는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채로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경련하듯 숨이 걸려서 괴로웠지만 어떻게든 호흡을 이어나간다, 호흡이, 생각이 정리되지 못해 어지럽다. 비는 계속 내린다. 그런 나를 천천히 관찰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동무."
단단하게 긴장이 배긴 목소리, 어색하지만 자연스러운, 아니 익숙한, 습관적인 어조. 나는 그 목소리에서 북쪽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협력하라우."
그녀의 손 아귀에에 힘이 들어가는게 보이고, 가슴뼈 위로 총구가 진득하게 눌리는 것이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이 마구 뛴다. 귀가 먹먹하고, 호흡이 느려지고,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라를 배신할 것인가. 살기 위해서.
아니면, 죽을것인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긴장, 진지함, 그리고 다급함.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한다.
트리거에 손가락이 올라가 있진 않다, 하지만 안전장치는 확실히 풀려있고, 그 눈은 완전히 진심이었다.
나는, 저항하지 못한다.

+

1화. 최현희.

최현희.

*

거짓말이지만 분명히 다 기억한다. 거짓말이다.

*

인간, 정재현은 틀림없이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고등학교 2학년생이니까 뭐 크게 할 수 있는건 없지만 그래도 또래들 중에서는 상당히 유능한편, 아니 감히 최상위 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재현은 살면서 단 한번도 누가 부탁하거나 시킨 일을 못한 적은 없었다. 예를 들자면 시험에서 정답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해서-, 게시판 설전에서 쳐발라서 버로우 태우는 것까지. 둘중 뭐가 힘든일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후자다. 그 외에도 운동도 만능, 어떤 게임이든 용병을 뛸정도로 한다. 공통화제를 찾아내거나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등의 흔히 말하는 '대화의 기술' 도 뛰어나다. 외모도 깔끔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눈이 높다못해 하늘을 뚫을 기세인 여자 고등학생들이 '지적인 훈남' 으로 평가할 정도다. 철저한 영양관리와 운동으로 키와 체격도 183에 슬림하면서도 탄탄한 몸으로 만들어냈다. 그렇다, 난 유능한데다가 훈남이기 까지 한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고, 천부적인 재능 역시 있었지만,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엄청난 인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즉, 나는 노력하는 천재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알맹이 없는 스펙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없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스펙.

그래, 누구나 못하는거 하나쯤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뭐 딱히 거창한거 말고 매운걸 못먹는다거나 수영을 못한다거나 하는 정도. 그런 어떤 면에서는 귀여울 정도의 약점. 나도 그런게 하나 있는데, 그 약점은.

그래, '진심으로 부탁받으면 거절 할수 없다.' 라는 것이다.

딱히 내가 성격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냥 '아- 저 정도는 해보면 될것 같기도 하긴한데.' 싶은걸 상대가 진심으로 원하고, 곤란해하고 있다면, '뭐 그래, 해보자.' 하는 생각이 박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다가 안될것 같으면 포기해도 좋으련만 왠지 상대의 실망하거나 슬퍼하거나 화내는 그런 다양한 표정들이 머릿속에 들러붙어서 필사적으로 하게 되는거다. 그래, 이걸 속세에서는 호구라고 부르겠지. 라고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어쩄든 맡은 일만큼은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결해내지 못하면 쉴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다. 이쯤 되면 정신병인게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고 겨우 이까짓(?)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좀 그렇고,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는 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것 자체가 내가 호구라는걸 증명하는 걸지도 모른다.
상대가 진심이 아니면 어떻게든 거절할 수 있지만, 진심이어버리면 아주 곤란해 지는거다. 내게 있어서 그 부탁은 일종의 저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강제성이 있다. 이런 내 호구 같음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편리할대로 부려먹히고 있으며-,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가장 유능한, 노력하는 천재 빵셔틀' 이 아닐까.

망할. 그게 뭐야.

뭐, 인터넷 소설이었다면 이 어리석은 빵셔틀이 자신의 약점을 멋지게 극복하고 퀸카와 춘향뎐을 덩덕쿵덕 덩기덕 쿵더러럭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쉽게도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극복 그런거 없으니 그런거 기대하신분은 때려치셔도 좋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한 남자가 철저하게 파멸하는 이야기다. 그는 유능하고, 선량했으며, 위대했으나 어떤것도 이루지 못했고, 노력은 배신당했으며, 결말은 당연하게도 비참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 이야기와 사람이 남았다는 것일 것이다.

*

그래, 이 이야기의 시작즈음으로 가보자.
그날도 나는 빵셔틀로서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 빵셔틀이라고 해서 늘 빵만 나르는건 아니다. 아니 사실 빵을 그렇게나 절실하게 진심으로 사다주길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빵을 사다 나르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생각해보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드물다. 그리고 최근에는 더욱 드물어 지고 있다. 그 이유는, 진심으로 곤란한 사정에 빠진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 이면 정말로 좋겠지만 신학기가 시작하면서 이 학교 1학년으로 들어온 어떤 후배 때문이다.

나의 이 "빵셔틀" 짓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인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되는데, 무슨 계기로 내가 이런 성격이 되어버린것인지 혹은 이런 성격을 타고 난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주 오래된 성격인것은 분명하다. 이런 성격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RPG 게임의 케릭터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주위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는 곤란한 일(퀘스트, 하나하나가 메인 퀘스트인지 회피도 안된다.)들을 해결하면서 능력치를 늘려가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 퀘스트들은 대게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 후배 역시 내가 퀘스트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만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것은 중학교 때였다. 중학교 때의 나는 내가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가혹할 정도로 빡빡한 일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밤 쌍코피를 틀어막고 잤다고 하면 좀 설명이 될까? 그렇게 살았는데도 쑥쑥 제대로 큰 자신이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 나는 겨우 중학생이었고, 겨우 중학생인게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와 다르게 친구들의 부탁은 몹시 진지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아버지의 건강의 악화나 실업에 대한 고민(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도우려고, 심지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나는 정녕 중학생이었던 것이다.)부터 시작해서, 연애 문제(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는 아직도 나에게 중요한 화두다.), 친구간의 갈등이나 학업문제등으로 내 어깨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필사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공부했고, 발로 뛰었고, 싸웠으며, 상처입었다.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는 세상에는 해결할 수 없는 진지한, 심각한, 포기할 수 없는,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의 마지막 즈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목숨이라도 걸 기세로 부탁해왔다. 아니, 그녀는 이미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상태(?)로는 상상도 할수 없지만 그녀는 인간불신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부정적인 성격에, 사색적이고 무엇보다도 순수했었다. 그녀의 부탁은 부모간의 불화였다.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모를 화해시켜달라, 그녀에게 단란한 가정을 돌려달라. 사실, 그런 부탁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진심인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 단란한 가정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그래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버릴 기세였다.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두 사람의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면, 끊겠다.
그런 과격한 결심은, 부정적이며 사색적인 성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성격을 만들어낸,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일들에 의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결론만 말해서,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는 해결했다. 기적적으로, 아니 오로지 기적에만 의존해서 나는 저 문제를 해결해냈다. 하지만 인생에 펼쳐지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모두 행복해지는, 그런것은 현실이 아니다. 간신히 회복된 가정은 적나라하게, 그 흉물스러운 상처가 드러나있었고, 나아질 가망조차도 없었다. 그녀의 가정은 끝내, 어쩌면 가장 온건한 형태로, 하지만 확실히 파괴되었다.
그 마지막에, 그녀는 울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던 모든 사람중 최초로, 나에게 해악을 깨쳤다. 그것은 통렬한 보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나는 저항할 권리마저 박탈 당했다. 어떻게? 간단하다. 저항하지 말아달라고 진심으로 '부탁' 받은 것이다. 약점에 제대로 꽂힌 한방에 난 완전히 무력화 됐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중학교 3학년을 통해, 나는 마침내 졸업한것이다. 중학생을. 세상에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수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을 나는 납득했고, 더 나아가서 그런 수 없는 일들에는 손을 내밀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라고 나는 배웠다.

그리고, 이 순간에는 나는 아직도 내가 그런 일에는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 후배, 이수지는 내뒤를 쫓듯이 냉큼(하지만 동네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각각 하나씩 뿐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운명적이고, 필연적이면서도 자동적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무려 입학식 첫날 부터 나를 잡아서 연행하는 폭거를 행했다.
그때 연행된 이래로, 내 생활은 철저히 그녀에게 지배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경찰 국가의 무력한 국민이나 다름 없다. 곳곳에 비밀경찰이 깔려있고, 밀고가 정려되며, 매일같이 사상검열이 있고, 주말마다 비판무대에 올라 자아비판을 해야하며,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교화소로 끌려간다. 이런 만행이 남조선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높으신분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오늘만해도 그렇다, 나는 끌려가는 소처럼 내 후배가 있는 그 두렵고도 끔찍한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그곳은 학교 기관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그 실체는 그저 나를 사용하는 권리를 사고 파는 스톡 마켓(투기장)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은 또 어떤 심한 명령을 들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철퇴를 결정했다. 사실 오늘 부탁받은 일중에는 집에서 해야만 하는 일도 몇가지(바람피는 증거를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자꾸 캐고 다니면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과 함께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미묘한 입장에 있었지만, 이런 경우 확실히 조사해서 수지에게 제출하면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것을 나는 철저한 조교, 가 아니고 교육을 통해 배웠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할 필요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본문에서는 남을 돕는 일이 꽤 불만인것 처럼 적어놨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내가 싫은 일을 하면서까지 돕는일은 거의 없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남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내가 재밌기 까지 하다면 기꺼이 할만하다. 다만 내 경우에는 싫어도 거절할 수 없는 때가 종종 있고, 가끔 악용되거나 한다는것 뿐일까. 악용이라고 해도 진심으로 부탁하는 것이니 악용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런 복잡미묘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 저녁 메뉴로 생각을 옮겼다. 결코 내가 호구라는 사실을 의도적으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야근이 잦은 부서의 공무원이시고 어머니는 역앞에서 꽃집을 하는, 거의 풀타임 맞벌이인 우리집에서 밥이라는건 배고프면 스스로 차려먹는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저녁 메뉴를 미리 생각해두지 않으면 결국 밥에 고추장 비벼서 참치캔이랑 먹게 된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생이란 꽤나 그런것이라고 생각한다.

버스에서 내리며 재료를 체크하다가 우유가 간당간당하게 남았던걸 떠올린다. 버스 두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는 마트를 가도 괜찮았겠지만 이왕 내린거 가는 길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기로 했다. 요즘은 너무 마트만 갔던것 같기도 하고, 비도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 편의점, 먹고 살만큼 장사는 되는 걸까. 위치도 별로고, 손님이 자주오는것 같지도 않던데. 약간 비싸더라도 자주 가볼까, 하고 생각을 한다. 마트는 내가 사주지 않아도 망하지 않을테니까.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에 문밖에서 철저하게 물기를 털어낸 우산을 우산 꽂이에 넣고 신발에 묻은 흙탕물은 티슈로 깔끔하게 닦아낸 뒤에 들어간다. 지치고 피곤해보이는 알바 누나의 표정과 눈동자는 나에게 그런 모든 행동을 명령하는 듯 했다. 나는 살짝 놀란듯한 그녀의 표정에 어설픈 눈웃음이나 보내며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삶의 방식인 것을.
우유는 즉석 식품과 함께 놓여있었는데 1.5L 팩 하나를 제외하면 500ML짜리도 하나 안남기고 전부 팔려있었다. 편의점에서 우유가 그렇게 인기 있는 상품이었나, 해서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4일전. 안팔려서 안가져다 놓은게 틀림없다. 뭐 어차피 오늘 반정도는 쓸거고, 정 찜찜하면 남는건 닭가슴살 재우는데라도 쓰자. 그렇게 생각하며 집어든다. 그 뒤 남의 가게에 와서 물건을 하나만 사는건 좀 미안해져서 뭐 더 살게 없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때,
그러니까 그때, 편의점 문이 부서질듯 열렸다.
들어온 것은 여자였다.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다. 좋은 천으로 만든듯한 검은 롱코트가 빗물을 잔뜩 먹어 축 가라 앉았다. 밝은 금색 스트레이트 롱헤어도 물을 잔뜩 먹어 살짝 상기된 하얀 볼에 눌러붙었고 솜털처럼 엷은 빛을 띈 긴 속눈섭 밑에 자리잡은 깊은 까아만 눈동자는 밑을 바라본채 찬찬히 떨렸다. 파리한 안색에 어깨로 숨을 쉬는걸 보아하니 한참 뛰어와 깊이까지 지친 행색이다.
아마 외국인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까만 눈동자나 동글동글하고 조막한 얼굴이나 작은 체구 같은건 묘하게 동양인 같았다. 혼혈인걸까. 그녀는 물을 뚝뚝 흘리며 거칠게 숨쉬며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왔고 살짝 눈이 마주친 나는 머슥해져 냉큼 우유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간다. 저렇게 뛰어왔는데 원하는게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우산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현관 앞에 놓여있는 우산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쓱 스치고는 성큼성큼 냉장실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와 나는 아주 잠시 엇갈렸고, 나는 그녀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던 몇초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를 스쳐지나가고 나서 그녀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을 어찌 아냐면, 난 꽤 오랬동안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심하게도.
우유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나는 이 편의점이 인기가 없는 이유를 확실히 깨달으며, 우산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섰다.
내가 나올떄쯤, 그 외국인은 초조한 기색으로 가게를 한바퀴 다돌고 알바누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외국어를 잘 못하는지 알바는 꽤 곤란한 표정을 해보였지만 도움이 필요해보이진 않았다.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면 상당히 예뻣지 그 외국인, 얼굴이 조막만해서 그런가 키는 평범한데도 왠지 훤칠하게 비율이 잘빠져보였다. 비를 흠뻑 맞은 비참한 꼴인데도 불쌍해보이기 보다는 섹시해보일 수 있다는건 꽤 대단한게 아닌가. 역시 금발 미녀, 가슴도 크겠지. 금발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나를 유심히 보던 그 묘한 눈빛을 떠올렸다.
"음....혹시..."
혹시...! 까지 생각하고 얼굴을 쓱쓱 문지르자 히죽히죽 웃고있는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야, 야, 정신차려 정재현! 이국적인 미소녀가 유심히 본정도로 설레이다니! 정신차려 임마! 나는 벽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삼키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주택가로 이어진 이 한적한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 사춘기 남자에게는 이렇게 분별없이 날뛸 때가 있는거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참을 발작을 하던 내가 간신히 안정을 취하고, 내 고장의 한적함을 사랑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때, 그때. 철퍽, 철퍽하는 물을 박차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고, 멈출 생각은 없어보였으며, 나는 피할수 없는 위치였다. 그리고 그 다음 결과는, 프롤로그에서 보신 그 상황이다.
기억이 안난다면 다시 펴봐도 좋다.

그렇다, 그런 연유로 나는 협력하기로 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천천히 총을 떼고 일어났다.

"뭘, 하면 됩니...까?"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자진해서 배반하는건가. 굿바이 나의 애국심.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절박해 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다면 내가 아니다. 그 부탁이, 집에 몇일 숨겨달라거나, 관공서에 수상한 가방을 놓고 오라거나, 특정 인물을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위치로 데려오라거나, 그런거라면(마지막을 제외하면 전부 내가 할수 있는 것들 뿐이지만, 그래도) 거절하려고 노력해봐야겠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을 몇번 깜빡이며 나를 살피다가.
"그 우유를 넘겨라. 긴급사태다."
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제는 북조선 말투도 아니었다. 어조는 조금 북쪽 느낌이 나지만, 그래도!
그래서 내가 택한 행동은 뭐냐면,
"기껏 우유냐!"
딴죽을 거는 일이었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과 떠나보낸 애국심 물어내.
"그렇다. 매우 긴급하다."
그녀의 표정이 매우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우유가 들어있는 편의점 봉지를 내밀고 말았다. 그녀는 그것을 제빠르게 받아들고는,
"협력에 감사한다. 그럼-."
벌떡 일어나 빗속을 달려 나갔다. 이제까지 전력질주를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달리기.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면 스포츠 만능이라고 초장부터 단언한, 내가 열심히 뛰는 것하고 비슷한 속도가 아닐까.

나는 그녀를 쫓아 달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왜 달리고 있을까? 그건, 그래, 그 권총. 그 권총이 수상한거야. 말투도 수상했고.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로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데 나는 왜 우산도 못쓰고 달리고 있을까? 그거야, 그래, 우산을 쓰고는 도무지 못따라 잡을정도로 빠르니까. 전력으로 뛰고 있지는 않지만 오래 달리기 할때 정도 속도로는 뛰고 있는데도 거리가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진 않는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왜 나는 비오는날 우산도 못쓰고 뛰고 있을까? 그건 아무래도, 그래, 그 다급해 보이는 눈이 내게 끝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듣진 않았지만, 그 곤란함이 내게 깊게 스몄다.
결코, 예뻐서가 아냐. 물론 예쁘긴 했지만.
그런 변명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이며 달리다 못해 숨이 차서 쓰러질것 같은 현기증이 오기 시작할때 즈음, 그녀는 멈춰섰다. 그녀는 빗속에서 무릎에 손을 올린채 어깨로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멈춰 선곳은 평범한, 주택가의 한중간에 있는 갈림길이다. 전선이 엉킨 전봇대가 가운데 놓여있고 갈림길 주의 표지판이 낡게 들러붙어있다. 전봇대에 메달린 노란 등이 비안개에 빛무리를 토해냈다.

좀 특이한게 있다면 그래, 그곳에 굴러다니던 우산 하나 정도. 골프용으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우산은 빗물을 45도로 막아서며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었다. 그녀는 우유를 들고 천천히 그곳으로 가서 쭈그려 앉는다. 나는 생각했다. 우유가 필수적인 고성능 폭탄이라도 만들고 있었던건가. 안정화 되지 않은 상태로 집에 두는건 위험할테니 밖에서 작업하고 있는것도 이해가가...기는 개뿔. 나는 패닉에 빠진 머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그 우산 아래에는,
"냐~."
왠지 시가와 중절모가 어울릴것 같은 뚱뚱한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골판지 상자에 들어앉았는데 가증스럽게도 '주워가주세요♡' 라고 적혀있다. 고양이의 뻔뻔하고 비만한 면상과 마주하자 힘껏 발로 차고 싶은 기분이 몹시 들었다.
"그런 얼굴을 해도, 물건은 돌려주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살짝 흘겨본뒤에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우유지만 '물건' 이라고 말하자 뭔가 거창한것 처럼 들렸다.
"그게, 아니고요..."
"그럼 무슨일이지?"
무뚝뚝한 목소리에 긴장이 담겼고,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몹시 경계하는 태도. 마치 상처입은 맹수를 건드린듯한 긴장감이 어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도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푸는게 좋다, 고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왔는지, 모르기 떄문.
"알고 있다."
그녀는 망설이는 나를 보며, 똑바로 말해왔다. 마치 내 미혹을 모두 간파한듯이.
"예?"
"알고 있다. 그러니 냐- 는 이제 동무가 맡아라."
"무슨... 말입니까?"
냐- 라니. 혹시 이 고양이의 이름인걸까.
"그 점원을 사살하지 않은것이 실수였다. 그 수상쩍은 시선은 분명히 밀고를 하려는 자의 그것이었다. 이제 곧 군관들이 들이닥치고 나는 체포될 것이다. 협력해줘서 고마웠다. 어떤 고문을 당하더라도 동무에 대한 이야기는 발설하지 않도록 하지. 그러니 부탁한다."
나는 그녀를 빤히봤다. 100% 진심, 농담이 아니다. '진심인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내가 보증한다. 저 부탁은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과 동급 정도의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부탁은 한번도 받아본적은 없지만, 어쩄든 무뚝뚝한 저 표정 밑에는 신성할 정도의 엄숙함 마저 깃들어있었다.
"어이, 어이."
나는 극도의 피로감에 쩔어서 한숨처럼 말을 내쉰다. 땀과 뒤섞인 미지근하면서도 차가운 빛물이 머릿속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왠지 으슬으슬하고, 전신이 끔찍하게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그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실상 이런 타입의 전파소녀도 있을 수는 있는거겠지. 새롭고 다르지만 기쁘진 않은 현지화다.
"나 말인가?"
"그래, 너 말야."
내 피로감 가득한 말에 그녀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살폈다. 에효.
"아까 그 총꺼내봐 총."
나는 품속에 손을 넣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못알아들을리 없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작전중이 아니다."
아까는 작전중이었단 말이냐 그럼. 작전명은 '우유 탈취 대작전' 정도 되려나.
"너, 그거, 모델건이지."
"...아니다."
아니긴 뭘 아냐.
"내 후배 하나가, 그런거 진짜 좋아하거든. 그래서 꽤 자주봤는데 역시 그랬어."
어느 후배인지는 그 후배의 명예를 위해서 밝히지 않겠다.
"..."
그녀는 무뚝뚝하게 나를 계속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약간이지만 홍조가 도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뭐, 좀 당황하긴 했지만 지금은 별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무슨 생각인가 하면, 부끄럽게도 '진짜 간첩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모델건을 든 전파계 여자애에게 위협당했다고 금새 그런 망상을 해버리다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음?"
하지만 그녀는 나의 그런 태도를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보다, 그 고양이, 키울 생각?"
"내 생활은 불안정하다. 냐- 에게 좋지 않다."
그러십니까.
"그래도, 길바닥에 내놓는것보다는 백배는 나을텐데."
물론 '냐-' 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냥 길바닥에 내놔서 적당히 살아가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지만, 그래도 동물은 상냥한 주인에게 거둬져 거세 당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동무가 키우면 좋다."
"그건 좀, 어머니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으셔서."
안 그랬다면 우리집은 동물원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동물을 진심으로 맡기고 싶어했던 사람은 두자리수에 이른다.
"그런가..."
그녀는 한참을 연민 어린 시선(여전히 무표정 했지만, 왠지 알수 있었다)으로 고양이를 바라만봤다. 비는 내리고 있었고, 나는 끝없이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난 왜 따라온걸까.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졌고, 나는 슬슬 호흡이 곤란할정도의 압박감을 느낀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맡겠다고 말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 였다.
"그럼 처음 계획대로 하는 수 밖에."
그 지옥같은 시간의 끝에서, 끝내 그녀는 결정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우유팩을 뜯고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고양이는 너무나도 얌전하게 안겨올라서 마치 그래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던것 같았다. 밉살맞기 그지없다.
"먹이려고?"
나는 그녀가 우유팩을 단호하게 들어올리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 냐- 는 먹을 권리가 있다."
그릇에 따라주고 햝아먹게 하는게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고양이의 입에 우유를 퍼부으면 어떻게 되는지 학술적 호기심도 있었기 때문에 별말은 안했다. 결코 밉살맞은 고양이가 물고문 당하면 고소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곧 고양이가 전신을 경련하며 단단하게 붙잡힌 얼굴을 어떻게든 입과 코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우유 줄기로 부터 틀어내보려고 발작을 하자, 내 입이 절로 열렸다.
"일단 진정해! 내려놔!"
"냐- 의 우유를 뺐을 생각인가?"
그녀는 나를 무뚝뚝하게, 하지만 날카롭게 바라봤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주저없이 발포할 기세였다.
"고양이한테 우유는 그렇게 주는게 아냐. 일단 넓적한 그릇에다가 우유를 담은 다음에, 햝아먹게 하는거야. 알겠어?"
"냐-에게 묻겠다. 사실인가?"
아니 고양이한테 물어도...라고 생각했지만 고양이는 기침을 콜록이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의 위기가 닥치면 종종 엄청난 능력이 생긴다는데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 이렇게."
나는 급한대로 도시락통 뚜껑을 뒤집어서 우유를 따랐다. 엄청 조금밖에 안따라졌지만 그래도 물고문을 하는것 보다야 훨씬 나을것이다. 그건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지친 기색으로 다가와서는 햘짝햘짝 햝아먹기 시작했다.
"동무는 대단하다."
그래, 대단하지. 난 한숨을 쉬며 고양이가 비를 맞으며 우유를 햝는 모습을 본다. 몹시 괴롭고, 지쳐보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거?"
"공화국에서 무능력은 총살이다."
"총살?!"
"정해진 수순대로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니 냐-도 더 이상 미련이 없을거다."
그녀는 철컥, 하고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맛있게 우유를 햝고있는 고양이의 미간을 정조준했다.
"어이, 어이! 그걸론 쏴도 안죽어, 고통스럽기만 해, 그래도 쏠거야?!"
"어리석은 질문이다. 죽을때까지 쏘면 죽는다."
그거야 그렇지만!
"냐-의 부모님에게 편지는 내가 쓰겠다. 냐- 는 위대한 전사였다. 모두 냐-를 잊지 못할거다."
그녀는 눈을 지긋이 내려감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진심임이 팍팍 묻어났다.
"알았어, 내가 키울게! 라고 말은 못하지만! 도와줄게! 키우는거 도와줄테니까! 쏘지마! 쏘지마아!"
결국 그 진지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몸으로 고양이를 막아섰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기분이 들었다.
"진심인가?"
"어, 응, 집에서 키우는것만 빼고 뭐든 다 도와줄테니까!"
"그럼, 내가 떠날때 냐-를 맡아줄 수 있나?"
"그때는 다른 주인을 찾아볼테니까. 아니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마."
"냐- 다행이다."
고양이는 멍청하게 우유만 계속 햝았다. 나와 그녀는 한동안 고양이를 보고 있다가, 추위가 뼛속까지 스밀떄쯤 헤어졌다. 내가 돌아서자 그녀가 작게 말했다.
"동무, 나를 만났던건, 잊어라. 동무를 위해 하는 말이다. 나는, 없는 사람이다."
진심이었다. 내가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오늘 만났던 이 기억은, 가보로 간직할게."
대답은 없었다.
그게, 나와 수상쩍지만 아름다운 전파소녀와의 첫만남이었다.

"얏호호!"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멍하니 음악에 마음을 맡기며 걷고 있었는데 왼쪽 귀에 엄청난 성량이 갑자기 들이 닥친거다. 나는 그저 학교에 등교하고 있었을 뿐인데, 왜 이런 테러를 당해야되는거지. 국제 사회는 뭘하고 있는거냐.
"시끄러, 뭐냐?"
난 속으로 국제사회를 가열차게 매도하며, 먹먹한 귀를 꾹꾹눌러댔다.
"알로하!"
여기가 하와이냐.
"그래, 안녕."
"선배, 오늘도 변함 없이 맥빠진 태도네요!"
맥빠진거 보이면 좀 자중하라고.
"니가 너무 업되어있는거야 임마."
난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는 MP3를 끄고 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머릿속에 꽃밭이라도 핀것 같은 텐션의 이 민폐덩어리는, 숨겨 무엇할까, 과거 인간불신이라고 까지 불리웠던, 부정적이며 사색적인 성격을 지녔던 나의 경애하는 후배, 이수지 양 되시겠다.
"으- 저 같은 미소녀가 선배너처럼 음침~ 하면 왠지 그늘있는 부자집 아가씨 같아서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잖아요. 아~ 이 넘치는 배려심!"
다른 여자애들보다 머리 하나정도는 작은 키에 뻬뻬 마른몸, 어딜봐도 중학생 같은 동안, 본인의 말로는 일부 특정 수요를 핀포인트로 겨냥한 이 시대의 트랜드 아이템, 소악마계 미소녀. 라는 모양이다.뭐, 말끔한 피부나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커다란 눈같은건 말이지. 하지만 태도가 저 모양이어서 그냥 자칭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실재로 음침했던 시절에도 그늘있는 부자집 아가씨 취급은 못받았다. 아무도 접근하진 않았지만. 슬프게도.
"그거, 어제꾼 꿈 이야기냐?"
"현실이에욧!"
"그래? 근데 그거 아냐? 실은 지금 이거 니 꿈속이다."
"그, 그렇구나. 왠지 오늘따라 선배가 좀 괜찮아보인다 했어요! 꿈이라면 설명가능해!"
꿈이 아니라도 난 언제나 괜찮아보이거든!
"아쉽게도 현실이다."
"아- 괜찮아요. 갑자기 평소처럼 안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수지는 재미없다는듯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중얼거렸다.
"너 진짜 빨리 질리는구마."
"아~그거야 선배가 시시한 남자니까요!"
"와나-, 이거,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남자인지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냐?"
"오~ 뭔가 내보일거 있어요? 복근이라도?!"
있기야 하지만 보여줄까보냐. 이런건 비장의 카드로 남겨둬야 하는 법이다. 대신 나는 내 매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그건 어제 저녁의 일이었지."
"모노로그부터 시작?! 오오~ 선배 주제에 뭔가 거창해요."
시끄러, 내 회상을 망치지마.
"끝내주는 미소녀가 내게 도움을 애타게 요청해서 내가 또 멋지게 위기에서 구했다 이거 아니냐."
"그걸로 끝이에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두근두킁한 러브스토리 아니냐. 러브는 없었지만.
"에~ 예를들면 반전, 실은 그 미소녀가 남자였다던가 하면 재밌겠는데요~."
그래서는 호러 스토리잖아.
"현실은 그런거야. 재미없더라도 어쩔수 없어."
"우와~ 이 사람 당당하게 각색된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하고 있어!"
수지는 과장되게 놀라며 나를 손가락질 해댔다. 등교길을 걷던 학생들이 나에게 미적지근한 미소를 던졌다. 하루 이틀일은 아니지만, 역시 부끄럽다.
"각색된거 어떻게 알았냐?"
"선배 주위에 저 이외의 미소녀가 있을리가 없잖아요?"
아니 널 포함해서 미소녀는 없다만.
"아쉽게도 미소녀였거든, 위기 부분이 각색됐지, 버려진 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이었거든."
"뭐에요 그거, 재수 없잖아요!"
"뭐가?"
"버려진 고양이한테 우유를 먹이는 미소녀라니! 고전적이다 못해서 가증스러울 정도로 뻔한 연출이잖아요! 틀림 없이 다른 사람이 안보이는 곳으로 가서는 그 고양이에게 갖은 고문을 했을거라고요, 그런 재수 없는 여자."
나는 문득 '죽을때까지 쏘면 죽는다' 고 단언했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진...않을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는 곳 앞에서 했으니까. 고문.
"그러니까 선배가 나쁜 여자한테 속고 사는거에요."
아, 그거 너 말하는거 맞지?
"내 추억속의 그녀를 더럽히지마라. 이 현실녀."
"와- 드디어 망상속에서 살기로 해셨군요 선배! 축하해요!"
"시끄러. 어차피 평생 다시 못볼 그녀인데 좀 미화해서 기억하는게 어때서 그래."
'잊어라' 라고 했지만 위험한 전파라도 수신하고 있는듯 했으니까, 믿어서 좋을게 없다는건 확실하다. 그리고 가보로 간직하겠다 했으니 좀더 빤짝 빤짝한 기억으로 남기는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어제 헤어진 이후로 계속 그녀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계속 미화되고 있으니까, 슬슬 위험한가 싶긴 하지만.
"그래그래, 인기 없는 남자는 결국 그렇게 되는거죠~."
수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전세계의 모든 인기 없는 남자들에게 사과해라.
"야, 그런데."
"네?"
"어제는 아무도 없더라?"
"아... 맞다, 선배한테 말해놨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뭔데, 이제 드디어 너희도 죄책감이라는 귀중한 감정을 배워서 더 이상 집단괴롭힘이나 학교폭력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던가.
"지금 진행중인 중요한 작전이 있어서, 한동안 방과후 활동은 없어요. 대신 모든 지령은 점심시간에 전달할테니 반드시 와요. 안오면, 총살!"
수지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 뒷쪽에 차고있는 권총 홀스터(물론 모델건이지만, 충분히 흉흉했다)를 툭툭 쳐보였다. 수준이나 말하는거나 어떻게된게 북괴랑 똑같았다.
"살려줘라, 좀."
"헤헹, 봐서요."
수지는 의기양양해 했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에 수지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잡고 빙빙 돌려줬다.
"꺄~ 선배가 후배 여학생을 폭행한다~."
왠지 좋아하는 것같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수지는 팔다리를 퍼덕였다. 주위의 '아, 쟤들 또 저러네' 라는 미적지근한 시선을 받으며 몇바퀴 더 돌려주다가, 놔줬다. 아니 솔직히, 힘들고, 처벌은 커녕 좋아하고 있는것 같고.
"아~ 오늘은 뭔가 부족하네요. 선배. 조금더 분발해요."
수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역시 즐기고 있었던 거였어.
"시끄러."
그런 아침이었다. 나는 이때, 수지가 계획하고 있는 '중요한 작전'에 대해 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런 비참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프린트 물 받고 뒤로 넘기고, 남는건 앞으로 다시 보내줘."
나는 정문에서의 업무를 끝마치고, 보고겸 해서 교무실에 들릴때 받아온 프린트물을 돌리며 나는 몇번의 심호흡을 했다. 후-하, 후-하. 그래 좀 진정이 되...기는 개뿔.
"아, 동아리하는 친구들한테 전달 사항있어. 무려 교장이 직접 하달한건데, 자, 보자, 음, 동아리관 2층에 끝방에 멋대로 물건 넣어둔거 다 다음주까지 가져가라고 하더라, 다음주 딱 시작했는데 들어있는 물건은 전부 폐기한단다."
소란, 일방적인 명령에 대해서 항의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명령 자체는 정당하다. 다만 그 방이 창고로 쓰인 역사가 꽤 되고, 여러부가 같이 쓰고 있었던 만큼 치우는게 쉽지는 않을 거다. 그 창고의 바로 옆방에 자주 불려가는 입장으로서 잘 알고 있지만 동정은 별로 들지 않는다. 누가 거기에 처치 곤란한 물품을 버려두면 치워야 했던건 당연하게도, 나였기 때문이다.
"아, 고마워, 혹시 프린트 부족한 줄? 어, 여기."
나는 뒤에서 다시 넘어온 프린트를 다른 줄로 넘기며 아까 교무실에서 봤던 광경을 살짝 되세겼다. 그것은 금발이었다. 물론 교복도 없고, 두발도 완전히 자유화된 우리 학교에서 염색한 머리 정도는 흔한것이지만, 저 정도로 철저한 금색은, 차마 하지 못한다.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나는 저 머리를 기억하고 있다. 떨어져 내리는 체온에 의해 미지근해진 빗물의 감촉, 총구의 차가운 감촉, 북쪽 바람의 냄새가 섞인 딱딱하고 무뚝뚝한 목소리.
"재현아?"
부르는 소리.
"어, 아, 예, 예."
깜짝 놀라 눈을 돌리자 담임이 있었다. 내가 교탁에 서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돌아왔나보다. 나는 반사적으로 담임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없다. 나는 안도와 실망감을 동시에 맛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하니? 양호실 가서 쉴래?"
담임은 사뭇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그렇게 얼이 빠져있었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평정을 가정한다. 내 언동이나 행동은 묘하게 이슈가 되는 일이 많으니까 조심해서 나쁠게 없다. 본격 황색 언론을 자처하는 우리학교 방송 부 및 선동부의 촉각은 교사들에게까지 깊숙히 퍼져있다. 눈앞의 이 사람도 정보원이라고 생각하는게 타당하다.
"정말 괜찮니?"
"네, 물론입니다. 건강한게 최대의 장점인 남자, 정재현 아닙니까."
내가 알통을 만들며 웃어 보이자 그제서야 담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심한것 같지는 않다. 내일자 아침 방송에 게스트로 불려나가서 좌담회라는 명목의 청문회를 당하지는 않아도 될듯 하다.
"그래, 그래도 힘들면 바로 양호실로 가, 알았지?"
그럽죠, 그럽죠.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가,
"그럼 들어오렴. 얘들아, 전학생이야. 힘찬 박수로 맞아주자."
려다 말고 교탁에 굳어선채로 담임이 열어 제낀 앞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문을 가르며 전학생은 들어온다.
"이 친구는 일본에서 전학을 와서 한국은 아직 잘 모르니까 다들 잘 보살펴주렴. 그럼, 현희야 간단하게 자기 소개좀 해줄래?"
"알겠습네다."
네다, 와 니다. 의 사이의 발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표준어로 좀 적어줬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 채로 나의 청각과 협상을 벌였다.
"최현희 입니다."
나는 내 청각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계속 수세에 몰려있었지만 끝내 극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그 증거가 이곳에 있다. 나는 교양있고 일반적인 서울 시민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표준어를 지켜낸것이다. 이곳은 서울도 아니고, 지금 들리고 있는 말의 억양은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서울말씨는 아니었지만. 었지만. 최소한 적는것 만큼은. 기록으로 남는것 만큼은. 표준어를 사수하고 싶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금발의 일본인라, 참신한 설정, 이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그래 일본에는 저런 말씨를 쓰는 조선인이 꽤 살고 있다. 흔히 재일교포 그중에서도 조총련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말씨는 오히려 남한보다는 북한쪽에 가깝다고는 들었다. 음, 그래 설득력 있어. 현희는 조총련인거야. 비록 금발이지만, 비록 총(모델건)을 가지고 민간인을 협박 하지만. 응, 하지만.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런 현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현희의 빛나는 외모에 넋이 나간 남자놈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듯 했고, 그 생각이 돌아올 일은 자손 만대, 혹은 기적적으로 남북 통일이 이뤄지는 그날까지도 없을듯 하니까 아무 신경을 안써도 될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리고 그 미모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법한 여성동지들은, 현희의 말투같은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녀들은 현희의 롱 스트레이트 금발이나, 늦봄치고는 상당히 더워보이는 검은 롱코트, 그리고 동양적인 이목구비와 대조되는 서양적인 비율의 몸같은것에 시선이 완전히 꽂혀있었다. 이상형의 알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남자 중학생이라도 그렇게까지는 집요하게 안볼만큼 햝는 듯한 시선이었다.
"맛있겠다..."
엄청 작은, 그야말로 실수로 입밖으로 나온 소리였지만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있던 내게는 똑똑히 들렸다. 나는 그쪽을 반사적으로 봤고 약간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적은데다가 약간 전문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걸로 기억되고 있는 수수하게 생긴, 흉부 위주로 다이어트가 확실히 된 여자애가 군침으로 흥건한 입가를 교복으로 쓱 문지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느 부위(?)에 입맛이 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최소한 현희를 111(간첩신고, 국번없이 111번. 수상한 사람이 보인다면 부담없이 누릅시다. 국정원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에 신고할만한 사람은 없을듯 했다.
"남조선 동무들과는 잘지내고 싶습네다."
없을듯, 했다.
"이만."
현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잘 훈련받은 군인처럼 꽂꽂 하지만 각잡힌 동작으로 좌측으로 정확하게 90도 회전했다. 좌향앞으로봐. 의 교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 기백을 정면으로 마주한 담임이 뒤로 몇걸음 물러선건 당연하다.
"재, 재현아 전학생 학교 안내 잘 부탁해! 현희 자리는 재현이 옆이면 되겠지? 그럼 선생님은 수업준비하러 이만~ 다들 현희 잘 대해주렴~."
도망쳤다. 현희는 그런 담임의 퇴각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절도있게 돌아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동무."
나도 도망치고 싶었다. 몹시.

당연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동무가 위원장입네까?"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아서 잠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현희는 '처음 보는 사람인것 처럼 행동해라, 어색하면 총살이다.' 라는 시선을 팍팍 보내며 내게 물었다.
"어, 응, 그렇지."
난 현희의 박력에 압도되어 몇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위원장은 남조선의 정세에 밝습네까?"
전학 오자마자, 그 반 반장에게 물을 만한 질문으로는 정말 베스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쪽 베스트냐면 어색함과 수상함이다.
"어, 뭐, 그렇지."
"그럼, 질문하겠습네다. 위원장 동무의 성적취향은 어떤 것입네까?"
"........예?"
"예?"
아. 현희의 눈초리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만큼 경멸적으로 변했다. 매져키스트라면 단박에 헤븐으로 떠날 정도다.
"잘 못들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고쳤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똑바로 듣습니다. 위원장 동무의 성적 취향은 어떤 것입니까?"
예? 나는 속으로만 민간인 다운 얼빠진 대답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리반 급우들이 이 당혹스러운 문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끄러움만 가지고 죽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만번은 죽었을듯한 부끄러움이 충만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김아무개(17세, 여자 고등학생)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서 내게 뭔가를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해'.아아, 대한민국의 미래여. 나는 거국적으로 한탄했다.
"성적 취향 말...이지."
나는 한참 고민했다. 아니, 내 취향이 그렇게 숙고를 해야할만큼 델리케이트 하고 컴플랙스 한것이라는게 아니고. 대체 이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전학생의 반장 길들이기인가. 텃새를 부릴틈도 없이 수치심을 마구 가해서 내 멘탈을 박살내고, 마운드에 주저앉게 만드는것이 목표인가.
"대답합니다 위원장, 아니면 이런 공개적인 곳에서는 대답할 수 없습니까?"
"예, 당연하지...가, 아니고, 잠깐, 잠깐!"
"위원장의 성적 취향은 공개적인 곳에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다. 확실히 기억했습니다."
현희는 엄청 성실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넋놓을만큼 아름답고, 성스러울 정도로 올곶았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나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변의 갤러리들의 다양한 면면들이 가득 눈에 들어왔다. 야, 너, 엄지 들지마! 흐뭇한 미소 짓지마! 다 이해한다는 표정 짓지마아! 수치심에, 죽을것 같다.
"그럼 다음 질문입네다, 위원장은 평소 정부에 반감을 품고 있거나, 야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합니까?"
후반부가 엄청 이상해. 심각한 문제가 있어!
"그런일 없어, 없어요. 없다니까."
"그럼 가끔씩 야한 생각이나 반감을 품고 있습니까?"
"아뇨!"
"위원장은 언제나 야한 생각을 하고 있다. 확실히 기억했습네다."
너 일부러 그러는거지. 어제와는 이미지가 너무 다르잖아! 거기다가 내 청각과 도덕률이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올정도로 리얼한 북괴 말투인주제에 반감은 어디다 갔다 버렸어? 왜 야한 생각만 자꾸 물고 늘어지는건데!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떤 ero한 talk가 나오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가 아니고, 반드시 야한 소재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걸로 정해져있는건 아니잖아?
"저기, 저기, 하루에 몇번 스스로 위로하는지 물어봐주지 않을래?"
이봐요 거기 청순하게 생긴 아가씨, 그런거 궁금해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하루단위로 세지 말아줘. 남자의 강함은 횟수가 아니라고.
"그 가슴납작한 1학년이랑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줘, 그 납작한 가슴만 보면 참을수가 없어서 말이지."
너 있다가 조용히 나 따라와라. 목소리 외워뒀으니까 반드시 찾아내서 수지 앞에서 그 말 반복하게 만들어주겠어. 5분내에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거다.
"위원장,"
현희는 주위의 소란에 위축된건지, 답지 않게 주저하듯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침묵, 그 묘한 긴장감에 주변의 소란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그 긴장감이 최고조가 되었을때 현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밤, 나와 사귀어주겠습니까?"
소리가. 사라졌다. 어 그러니까, 내일 청문회는 몇시입니까. 등교 거부하면 봐줍니까? 대국민 사과정도로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국민 사과정도로 어떻게 안되었다. 학교 마크 위에 견장("리포터")을 붙인 소형 녹음기를 앞세운 각계 각층의 취재진이 2분만에 교실로 밀어닥쳤고, 나는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적 없습니다.' 로 일관하며 어떻게든 수업시간까지 버텨냈다.
수업이 시작되는게 이렇게 고마운건 처음, 이라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핸드폰이 쉬지 않고 진동을 울려댔다. 배터리를 분해하고 간신히 마음의 평화를 얻자.
"..."
옆자리의 현희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소란스럽지, 우리 학교가."
"남조선은 원래 다 이런가?"
나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학교도 금발 미소녀 북괴 전학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해서 평소보다 훨씬 심각하게 흐트러져있다. 물론 평소에도 남조선의 평균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흐트러져있는 학교지만.
"그런데, 음, 그게, 저기."
오늘 밤에 사귀어 달라니 대체 무슨 뜻이냐. 라고 직구 승부를 하고 싶었지만 현희와 눈을 마주친채로는 도무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북괴 전파 소녀라는 새로운 인간형에 대응할만한 메뉴얼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같은건 그냥 변명이고, 조금, 기대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주저하지 말고 말해라, 위원장. 더이상 수상한 거동을 보인다면, 신뢰할 수 없다."
현희는 내눈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전반적으로 무뚝뚝하고 무감각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완전히 무표정하기 때문에 감정을 잘 알수는 없지만, 심기가 불편하신것 같긴 했다.
"아... 음... 그래, 아, 아까 말이야."
"?"
현희는 무표정을 유지한채로 눈썹만 살짝 움직여 의아함을 표현해냈다. 솔직히 몹시 언짢아보였다. 방금 고백을 한(심지어 아직 대답도 못들은) 대상을 앞에 두고 여자아이가 취할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북괴 전파 소녀, 방심할 수 없다.
"그, 밤에, 사귀어, 달라는 거 있잖아. 무, 무슨 의미냐."
남사스러움에, X이 빠진다.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한마디 한마디 입밖으로 내 뱉을때 마다 목소리가 막, 울렁울렁하고 울컥울컥한것이, 스스로가 말을 하면서도, 아 이놈이 드디어 갔구나, 갔어. 끝장이 났어. 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현희는 나의 이런 모습을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하지만 역시 무표정하게) 보다가,
"말 그대로다. 오늘밤에, 사귀어 달라. 정확한 장소와 시간은 추후에 별도로 통보하겠다. 명확한 지령이 아닌것에 불안함을 느낀것이라면, 이곳에서의 나의 생활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고려해줬으면 한다. 이상."
이상. 나는 고개를 들고, 앞자리에 앉아있는(하지만 어느새 뒤돌아 앉아있는, 수업중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과 눈을 마주쳤다. '이상이라는데?' '이상이래.' 우리는 눈으로 대화를 주고 받은 뒤,
"대체 무슨 의미냐고...."
머리를 감싸쥐고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수업시간중의 현희와의 대화가 유출된 탓인지, 더욱 극성으로 몰려들어오는 견장 무리들을 피해서 나는 쉬는 시간마다 사람의 눈길을 피해 이곳저곳 도피행을 해야만 했고, 현희는 현희대로 견장무리에게 도저히 그 의미를 헤아릴수 없는 전파적인 이야기(심지어 반이상이 에로한 토크인)를 해댔기 때문에 두고 도망칠 수도 없어서 끌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현희는 이 도피행각에 비협조적이진 않았지만 또한 협조적이지도 않았기에, 내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는 점심시간에 이르러서 이미 한계에 다달아 있었다.
다행히도 현희는 점심시간이 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집요하기로는 사냥개보다도 더한 견장 무리들조차 찾지 못할정도로 홀연히.) 나는 우리학교 최고의 요새로 도망쳐온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쓰레기차 피하다가 똥차에 받힌 기분을 알게되었다.
"할말 있어요?"
나는 칠성판(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사용하던 바로 그것, 거짓말이지만 애국적인 도구로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속마음이나 비밀을 남에게 말하고 싶게 해주는 영험한 효과를 지녔다. 거짓말이다.)에 천장을 본채로 눕혀진 채로, 배위에 올라탄 수지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흐-응. 끝까지 발뺌하겠다. 회장님,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수지는 내 베에 체중을 실은채, 칠성판 앞에 떡하니 앉아 계신, 보송보송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여자사람에게 물었다. 참고로 이 분이, 우리학교의 무일 무이한 학생들의 대표자이자, 선거로 선출된 최고 지도자이신 학생회장님 되시겠다. 더해서 내가 묶여있는 칠성판이 마치 가구의 일종인양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이곳은 학생회실, 수지는 학생회 회계이자 서기이자 기획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학생회는 수지와 회장님, 그리고 정식 직함은 없지만 대부분의 일을 하고 있는 나, 이 세명으로 이루어져있다.
"저의 학교는 교칙으로 자유연애를 보장하고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부드럽게 정론을 말하고는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아니 눈에 들어간 힘만으로도 내 모가지 정도는 가볍게 꺾을 수 있을듯 했다. 그것보다, 연애라니, 어떻게 그 엉망진창인 발언을 연애로 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판결은?"
하지만 내 이런 복잡한 심경과는 관계없이 수지는 재판을 속행했다. 인민재판도 이것보다는 절차가 있고, 이것보다는 민주적일것이다.
"음...사형으로 하죠."
판사, 회장은 상쾌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고, 참심원 겸 처형인인 수지는 수건과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야야야야야!"
"왜요?"
"이런 리얼한 학교 폭력을 보여줘서, 애들이 따라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 그래? 끝장 난다고 끝장."
안그래도 장르문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안좋은 판에.
"괜찮아요, 방법은 묘사안할 모양이니까요."
그런식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될일이냐. 그건 그렇고 어제의 그 현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죽을만큼 괴롭히면 죽는다는 발상은 너무 비 인도적인거 아니냐. 죽음에도 격이라는게 있어요. 격이라는게.
"자, 그럼 일단 심호흡 하시고."
하지만 수지는 내 절실한 애원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착실히 준비를 해나갔다. 그리고,
수건이, 얹어졌다.
.
.
.
"회장님, 장난이,. 지나치시지, 말입니다."
칠성판에서 간신히 풀려난 나는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말을 했다. 솔직히, 죽는줄 알았다. 진짜. 농담 안하고. 학교는 인권의 사각지대라는데, 정말 그런것 같다.
"어머나, 안 죽었네요?"
회장은 '신기하네' 라고 써붙인 얼굴로 생글거렸다.
"장난에도, 사람은 죽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호흡을 안정시키며 원망스럽게 회장을 바라보았고,
"아~ 정재현 학우님에게는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시나요?"
생글생글. 안돼, 지뢰를 밟았다. 까딱 잘못하면 이번엔 고추가루를 듬뿍친 설렁탕을 얼큰하게 들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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