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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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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절세가인
글쓴이: 정글괴수
작성일: 12-07-31 17:39 조회: 1,944 추천: 0 비추천: 0

절세가인


0.

눈앞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름답지만 인형처럼 무표정한 여자는 티에였다. 웃으면 예쁘겠지,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니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억지로 울음을 찾는 얼굴로 티에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티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귀마저 맛이 갔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눈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내 포기한 듯 어깨를 떨구고 나를 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덜컹거렸다. 그러다가 걸음이 멈췄다.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다.
티에가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맞닿은 손이 뜨거웠다. 아아, 체온이란 이렇게 뜨거운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니 돌연 그녀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뚝뚝 눈물을 흘리며 티에는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티에는 나를 안던 팔을 놓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문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쿠르르르!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컨테이너 벨트에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다가 덜컹! 뭔가 끼인 건지 벨트가 크게 철렁거렸다. 그 바람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래서 나는 벨트가 어디로 향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눈앞에는 시커먼 어둠이 있었다. 벨트는 십여 미터 앞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폭포에 던져진 것처럼 눈앞은 낭떠러지였다. 쿵쿵거리는 굉음을 들어보면 종착역에는 그라인더가 열렬한 환경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절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젠장!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고!!!
간신히 놈의 몸을 얻었다!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열 표를 뽑아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어찌어찌 참고 견뎌서, 간신히 버텨서 이제 좀 살겠구나 했는데, …그런데 젠장! 이건 너무하잖아!!
일단 몸을 지배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이라는 감각이 없었다. 눈이, 그리고 이제 귀가 간신히 회복되었다. 이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젠장! …망할 새끼가 제대로 미친놈이라서 바로 그라인더에 던져 버렸다. 인내심이 콩알보다 작은 놈이었다. 쿵쿵 하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미칠 것만 같았다.
움직여, 이 빌어먹을 몸뚱이야!
주인 닮아서 말도 지랄같이 안 처먹기냐?!
빌고 화내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간신히 붙잡았다고 생각한 희망이 모래알이 되어 스르르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어느새 종착지가 눈앞이었다. 눈앞에는 그라인더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일어나!
제발 움직여!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 목숨이 아까운 게 아냐!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잖아!
이 끔찍한 세계에 하영이 온단 말야!
"내가 아니면 누가 하영을 구해?!"
빛이 터졌다.
새하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번쩍! 하고 섬광이 눈을 가렸다. 일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빛이 수그러들었을 때에는 컨테이너 벨트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멈춰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벨트 끝에 다리가 매달린 채로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큭!"
나는 팔을 뻗어 벨트의 끝을 잡았다. 당장 추락하는 것은 면했지만, …틀렸다! 손아귀에 생각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서히 손끝이 미끄러졌다. 이대로 버텨봤자 몇 초였다.
"……!"
있는 힘껏 티에의 이름을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손을 뻗었다. 팔을 잡고 뒤로 쓰러져 나를 끌어 올렸다.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숨을 헐떡거렸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티에! 티에라고 불러! 절대로 티에야!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마! 한번만 더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면 죽여버릴 거야! 죽여! 죽인다!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죽여버릴 거라고, 이 멍청아!!"
티에는 두 팔로 나를 밀치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티에를 보았다. 가만히 보자니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아냐!!"
티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
"미안해."
"웃지마, 이 바보!!"
티에는 홱 토라졌다. 그래서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아아, 진짜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자니 어디선가 짝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렌이 손뼉을 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놈의 모습을 보자마자 티에는 돌변했다. 어느새 뒤로 물러선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인형과 같이 동공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녀는 놈을 보았다.
"이야! 설마 성공할 줄은 몰랐네요. 놀랐어요. 진짜 깜짝! 정말이지 다시 봤어요. 진짜 대단합니다. 거의 기적이군요."
"아렌."
나는 놈의 이름을 불렀다.
팔짱을 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뭐죠?"
"네 과거를 봤다."
아렌은 허어, 하고 웃었다.
뱀처럼 가는 실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녀석, 죽여버릴까? 하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왼손으로 놈을 가리켰다. 그러자 바람이 불었다. 내 왼손을 중심으로 방안의 공기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앗!"
"헐."
티에는 경악했지만 아렌은 그저 히죽거렸다.
"부서져!"
나는 바람을 아렌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놈의 몸이 순간 붕 떠올랐다가 사정없이 뒤로 날아갔다. 그대로 벽에 처박힐까 했지만, 그러기 전에 놈은 허공에서 멈췄다. 녀석의 입가에 뱀을 닮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무시하고 힘을 더했다.
"부서져! 부서져! 부서져!!"
바람은 모이고 모여 태풍이 되어 몰아쳤다. 순식간에 벽이 무너졌다. 티에의 비명이 들렸다. 끔찍한 굉음과 함께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힘으로는 아렌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는 것을.
"과연."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다. 예상대로 아렌은 멀쩡했다. 녀석은 툭툭 옷의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보았다.
"사이코키네시스인가?"
"아마도."
"나쁘지 않군. 좋지도 않지만."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실망했다. 내 몸을 가져간 너라면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나 보군. 짜증이 나는걸.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어떻게 죽여줄까? 자비를 바라지 마라. 나는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 실망할거 없어. 그냥 인사였으니까."
"인사였다고?"
"그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렇잖아, 이 몸은 네 몸이었잖아. 그러니 알 수밖에. 나는 네 기억 또한 물려받았으니까."
나는 아렌의 몸을 받았다. 그걸로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렌의 무서움을 알았다. 그의 힘은 상상도 못할 만큼 강했다. 이제 이 몸에는 찌꺼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세계를 바꿀만한 힘이 있었다. 그 본체인 놈이라면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걸로 나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육체의 기억은 그저 편린에 부족하다. 버리고 남은 찌꺼기지. 쓰레기는 아무리 긁어모아도 쓰레기일 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 이 몸의 가치는 내가 정해. 갈고 닦아주지. 그래서 버렸던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어."
"그건 기대하지."
그러면서 아렌은 쿡쿡 웃었다.
"하지만 말야 그래도 부족해. 약점은 잡히면 끝장이잖아. 네가 원하는 것은 그녀지? 하영이잖아. 선하영이라는 여자애잖아. 네가 살려고 했던 게 아니잖아. 그 여자애 때문에 기꺼이 네 몸을 내놓은 거잖아. 그걸 내가 아는데, 싸게 넘겨줄 거 같아? 비싸게 팔아 넘길 거야. 아주 비싸게 눈물을 쏙 빼도록 이자 팍팍 쳐주지."
"……."
"뭐가 좋을까? 뭐가 그럴듯할까? 자, 생각해봐 뭐가 좋을 거 같아? 대답 안 하면 내가 정하지. 가만있어 보자. 여자애 목숨 하나를 구하는 거니까, 뭐가 좋을까? 음, 뭐가 좋겠어? 아, 그래! 좋은 게 생각났어. 사람을 죽여. 한 천만 명 정도 어때? 왕국을 서넛 정도 쓸어버려도 좋고. 그것과 그녀를 맞바꾸는 거야."
"좋아."
"…어? 뭐라고?"
"기꺼이 해주지. 죽여주겠어. 천만 명? 뭐, 별거 아니네. 1억 명도 좋아. 다 죽여주겠어. 싹 다 죽여주지. 말만 해, 문제없어."
놈의 표정이 바뀌었다.
"너, 미쳤구나. 제대로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여자 하나 때문에 수천만 명이 죽어도 괜찮다는 거야? 이 세계가 멸망해도 좋다는 거냐? 그렇게 그녀를 구해도 너는 행복해지지 않아. 너는 비참하게 사지가 녹아내려 죽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다. 내기를 해도 좋아. 자, 이제 어때?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자신을 버리겠나? 그래도 너는 그녀를 구하고 싶어?"
"그래."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렌은 킥킥 웃었다.
"그래, 좋아. 훌륭해. 아주 좋아. 그걸로 충분해. 그 정도로 미쳤다면 나와 내기를 해보자. 룰은 간단해. 땅따먹기야."
"…전쟁을 일으키란 건가?"
"그래. 왕이 되든 뭐가 되든 상관없다. 이 땅을 피로 물들여라."
"그래서 천만 명쯤 죽이라고?"
"아니지. 그래서는 재미가 없다. 애초에 상품이, 그녀가 이 땅에 없잖아.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으니까. 더구나 나 또한 그녀가 언제 나타날지, 어디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애초에 내 손에 없는 것을 건다는 건 공평하지 못한 내기지."
차원을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똑같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에 납치되어 이 세계로 보내졌어도 하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 그리고 어디에 도착할지는 놈마저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언젠가 그녀가 도착한 곳이 네가 빼앗은 나라 안이라면 나는 그녀를 포기하겠다. 절대로 손을 안 댄다고 약속하지. 그러니 너는 세계를 전부 빼앗는 것이 좋을 거다. 그게 내기다. 그래서 땅따먹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네 목숨은 길어야 3년이다. 쓰다 버린 몸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어쩌면 올해를 못 넘길지도 모르지. 그러니 서둘러야 할거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오기 전에 네가 먼저 죽을 거다. 그러면 안타깝지만 내기는 끝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 같나?"
"……."
"물론 그녀는 내 꺼다. 내 소유다. 그러니 귀여워 해주지. 잔뜩 귀여워 해주겠어. 네가 봤던 그 모든 광경을 전부 재현해 줄 거야. 하하! 너 지금 표정이 멋진데? 그래, 네 상상대로 하영은 망가질 거다. 그렇다고 거기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망가진 것은 망가진 대로 귀여워 해주는 방법이 있거든. 여기까지 가면 내가 생각해도 좀 끔찍해지지. 그래도 뭐, 나는 즐겁지만 말야."
아렌은 그러고도 한참을 떠들었다.
역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또 지껄였다.
"그게 싫으면 힘내라고. 열심히 해야 할거야. 네 목숨이 끝장나기 전에 이 세계를 빼앗아야 할 테니까. 그래서 네가 빼앗은 땅에 그녀가 나타난다면 네 승리다. 깨끗하게 그녀를 포기하지. 절대로 손을 안 댄다고 약속하겠다. 어때?"
"좋아, 다 죽여주지."
"오!"
"너도."
나는 아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놈의 눈이 커졌다. 표정이 변했다. 깜짝 놀란 듯이 휘둥그래졌다가 천박한 웃음을 지었다가 이윽고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놈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등을 돌렸다. 출구를 찾다 티에를 보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나는 무시하고 출구를 나왔다. 새까만 복도를 걷고 걸어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남았다. 모두 죽고 오직 나만이 살았다. 하지만 이 몸으로는 3년도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갈 거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았다. 그 3년으로 하영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도리어 값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언젠가 하영도 차원을 넘어 이 땅에 오겠지. 나는 반드시 그녀를 되돌려 보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다시 지구로 가게 하겠다. 추악한 진실 따위는 몰라도 됐다. 하영은 하영인 채로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하영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살아남은 이유니까.
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1.

이따금 꿈을 꿨다. 그때의 기억이 아스라하게 꿈처럼 떠올랐다. 이제는 너무나 빛 바래 아스라한 추억인데도 가끔씩 그 때가 생각나면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악몽일 뿐이다.
"유빈아, 이제 일어나."
달콤한 향기가 난다 싶더니 예쁜 얼굴이 다가왔다.
"벌써 저녁인걸. 그러니까 영차!"
바로 이불을 당겨버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아래로 굴렀다. 밟힌 개구리처럼 뻗은 나를 보며 여자애는 생긋 웃었다. 녀석의 이름은 하영이다. 흔하게 말하는 내 소꿉친구로, 누가 봐도 미소녀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다지 뭐, 매일 보는 입장으로는 새삼스러울 뿐이다.
"계속 자면 이불 치울 거야."
"이미 치웠잖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뒤늦게 엄청난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뭘까 싶어 빤히 쳐다봐도 녀석은 생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시치미를 딱 떼고 있었다.
"그거 뭐야?"
녀석은 한 손에 국자를 들고 생긋 웃고 있었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말이지 교복을 입고 에이프런이라니? 스커트를 최대한 말아 올려 밖으로 안 보이게 안 점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흉악한 음모가 느껴졌다. 거의 엑스파일 급이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누나, 거기 있지?"
"왜 부르느냐, 동생?"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인간이 고개를 디밀었다.
"누나가 시킨 거지? 아침부터 나 놀리면 재밌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내가 뒤에서 몰래 이런 일을 꾸미며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치사하게 숨어서 이런 일이나 벌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냐?"
딱 이 인간이 할 짓인데?
"물론 당연히 대놓고 시켰지."
어라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으스대듯 말했다.
"…됐으니까 이제 둘 다 나가. 옷 갈아입을 테니까."
"싫은데? 볼 것도 없는 주제에 뭘 새삼스럽게."
"어머, 유빈이 빈약해요?"
"몰랐어? 완전 갈비야."
"그렇구나."
하영의 동정 어린 시선이 따갑다.
나는 말없이 베개를 들어 누나에게 던졌다.
"더 있으면 눈 버리겠다, 얘. 나가자."
"네, 언니."
총총거리며 두 사람은 문을 닫고 나갔다.
문 밖으로 누나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화상이,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일단 참는다. 아니, 참자. 솔직히 내가 참아야지 별 수 없다. 싸워봤자 나만 손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집에 들어온 것이 새벽 6시니까 꼬박 12시간을 잔셈이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스타트가 엉망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내려오니 1층 거실에 누나가 하영이 데굴거리고 있었다.
"밥은?"
그러자 누나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동생아."
"어?"
"모처럼의 휴일이라고 친구들과 밤새 노래방과 PC방을 전전하고, 끝내는 새벽 6시에 기어 들어온 동생 녀석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지 않은 이 누님의 관대함에 마음 속 깊이 찬양을 하며 머리를 조아려도 한참 부족할 것 같은 상황에 저녁까지 퍼 자다가 이제 깨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밥?"
아차! 그러고 보니 그랬다. 생각해보니 보호자인 누나에게 밥 차려놓으라고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 더구나 하영이 지금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혹시 어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 그렇다면 지금 누나는 엄청 열 받아 있는 건지도?!
"유유빈."
누나의 두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어제 하영을 버리고 혼자 갔다며?"
"어? 아, 아닌데? 버리고 같건 아니야. 아, 아니라고!"
"그럼?"
"애초에 같이 가질 않았으니까아악!!"
마지막 말이 비명이 된 것은 어느새 달려온 누나가 내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누나는 고꾸라진 내 목을 잡고 일으켜서는 가차없이 목을 졸랐다. 한치의 용서도 없는 무자비한 조르기였다.
"죽어, 이것아."
"컥, 컥컥! 그, 그만해! 아파, 아프다고!!"
진짜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누나의 팔이 풀렸다. 살았다 싶어서 안도하려니 별안간 누나는 발을 뻗어 내 머리 뒤로 집어넣어 목을 붙잡고, 다른 발을 한팔 아래에 내려서 몸을 못 빼게 꽉 조였다. 이거 암바잖아!
"너 때문에 하영이 시무룩했다고!"
"그, 그건 잘못했지만! 악! 아파 죽어! 힉! 죽는다고, 진짜 죽어!!"
비명을 지르며 도미처럼 퍼덕거리자니 하영이 다가왔다. 녀석은 스커트를 얌전히 접고는 내 옆에 앉았다.
"언니."
"앗! 조금만 기다려. 이제 다 죽어가니까."
"죽으면 안되잖아! 도와줘, 하영아! 나 죽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싹싹 비는데도 어쩐지 하영의 반응이 차가웠다. 녀석은 얼굴을 마주 대듯 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있잖아, 하며 말을 꺼냈다.
"아까 전화로 다 들었어. 여자애들도 있었다며?"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해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하영은 라파엘로의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척살."
"끄아아아악!!"
무자비한 암바가 들어왔다.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누나가 기술을 풀어준 것은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뒤에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하영에게 빌어야 했다.


"금방 만들어요, 잠깐만요!"
명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하영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저녁 겸 술안주 준비다. 제안은 누나였고 하영이 찬성표를 던졌다. 나는 반대했지만 다수결의 폭력으로 쿠데타는 진압되었다. 그래서 하영이 요리를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간 것이다. 누나도 돕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사실 도움도 안 된다.
"그런데 저 녀석, 왜 아직도 교복이야? 바로 옆집인데?"
"어제 너 찾으러 헤매다가 밤늦게 우리 집에 왔는데 어떻게 돌려보내? 결국!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보호자 된 도리로 내가 꼭 껴안고 잘 수밖에 없었지."
"…안고 자니 좋아?"
"조아 주금."
누나는 힘차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겉은 미인인데 속은 변태 아저씨였다.
"근데 엄마, 아빠 다 어디 갔어?"
"어? 몰랐냐? 알고 외박한 줄 알았는데."
"그냥 다들 분위기가 그래서 휩쓸렸었어."
"너도 참 너다."
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여행을 가셨어.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일요일 저녁이나 되어야 오실 걸. 그래서 오늘은 하영에게 부탁한 거야."
"누나가?"
"맘이."
엄마였냐?!
"어휴! 진짜 우리 가족은 하영한테 왜 이리 민폐야?!"
"그렇긴 하지? …특히 멍청한 동생 놈이."
"윽!"
나는 심장에 비수를 맞고 쓰러졌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그런데 멍청한 동생 놈아."
"왜?"
"하영이 참 귀엽지?"
누나는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셔벗 마냥 상큼한 미소를 단번에 알았다. 이 인간이 지금 나를 놀려먹을 생각임을.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가운 도시 남자의 감성으로, 청바지와 터틀넥이 몹시 잘 어울릴 듯한 느낌으로, 별일도 아닌데 떠들면 귀찮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는 뉘앙스를 담아서 가볍게 대꾸했다.
"벼, 별로! 전혀 평범하다고 할까, 그냥 흔해빠진 외모라고 할까나? 평범 그 자체라고 봐야나? 뭐랄까, 그러니까 대충! …그, 그다지 귀엽진 않으려나?"
…망했다. 누나는 엄청 열 받게도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그냥 비웃어."
"그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누나는 깔깔댔다.
그때 하영이 요리가 다 됐다고 불렀다.
"로스트랑 연어구이를 좀 해봤어요. 정확하게는 라임 풍 크림조림 로스트랑 베이컨 연어구이. 참! 반찬도 이것저것 해봤어요."
"이것도?"
"그건 아주머니가 해놓은 거야. 냉장고에 있어서 꺼냈어."
"역시."
너무 맛없어 보인다 싶더니 그랬다.
"술 가져올까?"
"안 마시면 안 돼?"
"어제 잔뜩 마셔서 숙취가 심하심?"
"난 안 마셨거든요. 그리고 누나도 동생이랑 집에서 술 마시는 게 뭐가 재밌어?"
"아니, 너랑 마시는 게 아니라 우리 귀염이 하영이랑 마실 거거덩. 하영아, 맥주는 되지?"
"네, 언니."
주거니 받거니 떠들더니 맥주랑 양주를 들어와서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진행에 어색함이 없다. 누나는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고, 그걸 하영은 웃으며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내일은 둘 다 쉬는 거지?"
"네. 그러니까 술 마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누나는 그런 거 신경도 안 쓰면서."
"무슨 헛소리냐? 바보 같은 동생 놈은 몰라도 하영의 성실한 학교 생활은 지켜주고 싶다고."
"그럴 거면 고교생에게 술 먹이지 말라고 이 인간아."
"헐!"
누나는 코웃음을 치더니 별안간 달라붙어 내 턱을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착한 아들 흉내라도 낼 생각이냐? 그럼 그 착한 아들은 이번 기말 고사 어떻게 봤어?"
윽!
"응? 몇 등?"
흉폭한 빛을 번뜩이며 누나는 다그쳤다.
은근슬쩍 기술을 걸기 시작해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알았어! 말할게, 말할게! 15등! 15등이야!"
"풋!"
"아악! 그, 그래도 전교 등수는 75등이니, …그, 그러니까!"
"그래서 만족함?"
웃는 낯으로 힘껏 비수를 꽂았다.
나는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다. 부글부글 거품이 떠오른다.
"성적 올랐잖아!"
그때 하영이 와! 하며 끼어 들었다.
"반 등수는 3등 올랐고 전교 등수도 15등이나 올랐잖아! 대단해. 나 기쁜걸. 응! 무지 기뻐."
하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하려면 할 수 있는 아이잖아. 응! 사실 뭐든지 할 수 있는걸. 나, 아직도 기억하는걸, 그때. 어릴 적에 그 일이 아직도 생생해. 그때 진짜 멋졌어. 응! 유빈은 늘 최고였어. 생각하고 노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정말 멋져!"
그러더니 만세! 하고 두 팔을 활짝 편 채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녀석을 소파에 눕혔다. 혹시 싶어서 모포도 덮어 주었다. 누나는 옆에서 얄밉게 히죽거렸다.
"뜨거운걸."
"시끄러."
"그런데 동생아."
"왜?"
"하영 네 아저씨, 아주머니 말야. 역시 틀린 게 아닐까?"
누나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신중해지는 문제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영의 부모님이 실종된 것은 재작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중학생일 무렵. 업무로 해외에 가셨다가 사라진 것이다. 마치 마술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찾을 단서가 없었다. 그때 하영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영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지?"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겠네."
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하영이한테 그만 신세지라고."
"멍청한 놈."
딱!
"아파!"
"시끄러, 이 바보 같은 동생 놈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하영은 아직 여자애란 말야. 사춘기라고. 그것도 미소녀! 그러니까 너처럼 삐딱한 녀석과 취급이 다르다고. 매뉴얼 첨부! 취급에 주의해 주세요, 라고."
"그, 그래?"
"즉! 그러니까 외롭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단 말야."
토끼 취급이냐? 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누나의 생떼에 그런 깊은 뜻이!
"그러니까 너도 신경 써 주란 말야, 이 바보 같은 동생 놈아. 알겠어?"
"하지만 말야, 그렇게 말해도 곤란하다고. 하영이 녀석과 나는 수준이 다르니까. 저쪽은 항상 친구들을 반 하나 레벨로 끌고 다닌다고. 옆집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시선이 장난이 아닌데, 내가 여기서 친한 척 굴기라도 하면 눈치가 장난 아닐 걸. 도리어 민폐라고. 쓸데없는 참견이야."
내가 푸념을 하자 누나는 어깨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 아침이 걱정이다, 얘! 뭐, 뭘 먹을까?"
"말 돌리기 어려운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고."
"아우! 쏘리."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자니 하영이 깼다. 녀석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서더니 누나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헤실 거리며 말을 걸었다.
"언니, 왜 웃어요?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했어요?"
"응. 내 바보 같은 동생 놈이 요즘 발정기래."
"푸웁!"
나는 마시던 콜라를 코로 뿜었다.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하자니 하영이 팔을 당겼다.
"발정기야?"
"…야, 임마."
"그러니까 속옷이 사라져도 이해해. 그래도 핏줄이니 내가 대신 새로 사줄게."
"그래도 언니, 떳떳하지 못한 건 싫어요."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있잖아, 유빈아. 나는 네가 도둑질 같은 거 하면 싫어. 나쁜 짓 하지마. 필요하면 말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말하면 줄게. 어디에 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줄 거야!"
"그런 짓 안 해!!"
피맺힌 절규를 해도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시치미를 딱 떼는 얼굴로 자리에 일어섰다.
"이것저것 사러 좀 나갈까? 술도 슬슬 부족하니."
"그래요, 언니."
쌩 무시를 하고 문까지 걸어가더니 돌연 돌아보았다.
"변태 같은 놈."
"유빈이, 야해."
그리고 쾅!
문이 닫혔다.
나는 돌이 되었다.


"쳇!"
누나와 하영이 나간 뒤에 청소를 시작했다. 빈 술병이랑 접시를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거실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청소기를 돌리고 지저분한 것들을 좀 치웠다. 대충 정리가 되니 할게 없어서 소파에 널브러졌다.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도 두 사람이 없으면 심심하고 외롭다.
"시간 걸리네. 빨리 안 오려나?"
멍하니 있자니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누나는 물론이고 하영도 스페어 키가 있으니 벨을 누를 이유가 없었다. 누구지?
"누구시죠?"
"피자 배달 왔습니다."
인터폰으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가 가다가 시켰나? 술 퍼먹고 피자라니 제 정신인가 싶었다. 어쨌든 배달 온 거니 할 수 없었다. 문을 열러 현관으로 나가자 피자박스를 든 배달원이 보였다.
"34900원입니다, 고갱님."
"헐."
말이 안 나왔다.
"돈 안 냈어요?"
"집에 가면 줄 거라고 하던데요."
이, 이 인간이!
"잠시 기다려 줄래요?"
"괜찮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왠지 예감이 안 좋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남자의 손은 무척 억셌다. 당황한 내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남자는 내 팔을 잡아 당겼고 나는 자세를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남자는 그 상태로 내 왼손을 비틀어 뒤로 꺾었다.
"큭! 당신, 뭐야?!"
팔이 부러질 듯 아팠다. 하지만 누나에게 비슷한 것을 자주 당한 덕분에 어찌어찌 참을 만은 했다. 남자는 내가 의외로 버티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팔이 돌아갈 만큼 비틀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금방 끝납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세요."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남자는 무릎으로 내 등을 누른 채로 내 팔을 교차시켜 뭔가 차가운 것으로 나를 결박했다. 등뒤라서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낌이 수갑 같았다. 남자는 그리고 내 입에 손수건 같은 것을 비틀어 넣어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게 목안에 들어오자 숨이 벅차고 토할 듯이 헛구역질이 났다.
"이제 끝입니다."
남자는 피자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주사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남자는 그걸로 내 팔을 찔렀다. 따끔하다 싶더니 팔이 불에 댄 것처럼 뜨거웠다.
"아이고. 팔에 힘 빼세요. 아프지 않습니다. 잠깐 뜨끔하고 말죠. 네? 뜨겁다고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별거 아닙니다. 이거 에이즈나 페스트 주사 같은 거 아니거든요. 진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안녕 주사죠."
"읍! 읍, 으으읍!!"
바동거리는 나를 짓누르며 남자는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이건 선택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선별 받았다는 게 맞을까요? 어쨌든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유전자적인 레벨로 나름대로 다 검증이 되어 있으니까요. 아니, 검증이 안되었던가? 에이, 뭐 어때요? 내가 가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어요. 별 문제 없죠. 어찌 될 거면 다 어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진짜 문제없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저는."
이상한 헛소리를 횡설수설하며 남자는 히죽거렸다. 나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참아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겁고 손발이 심해에 가라앉는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남자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여행이 되시길."
나는 정신을 잃었다.


머리가 멍하고 눈앞은 캄캄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앞을 보며 다시 눈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발목이 뜨끔했다. 뭔가 발을 꿰뚫었다고 생각하니 몸이 질질 끌렸다. 누군가 발을 잡고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끌려갔다.
그래서 끌려갔다.
계속 끌려갔다.
"……."
소리가 들렸다. 중얼대는 듯한,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멍청해져서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들었다. 간신히 여자 목소리라는 것만 알았다.
그러다가 간신히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빛이 눈 안에 퍼졌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나는 발목을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이어서 나는 앞을 보았다. 그러자 사람이 보였다. 그는. 아니, 그녀는 내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걸려 하자 여자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서서히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입을 가린 채로 쿡쿡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여자는 내 귀에 입술을 갖다댔다. 향기가 날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여자는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죽을 거야."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새하얀 천장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금방 알았다.
"드디어 일어났군!"
일어나자마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돌리니 남자애가 보였다. 나이는 대충 내 또래일까? 평범한 외모의 곱슬머리 소년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히죽거리며 웃었다.
"오! 반가워."
"누구지?"
"태민이야. 김태민."
자칭 태민은 빈손을 내게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녀석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 어? 왜 그래?"
"외국인이냐?"
"뭐?"
"이거."
나는 손을 가리켰다.
그제야 태민은 아! 하고 알아챘다.
"아이고."
멋쩍어 하며 녀석은 손을 배로 뺐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보면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상한가?"
"이상하지."
"악! 그리 이상한가?"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헐! 너무하삼."
그리고 뭐라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는데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녀석이 별안간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인상을 팍 썼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이 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야! 그래도 분위기를 좀 맞춰보자고. 이런 곳이니까."
태민은 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술 마시고 있었다. 이놈 아무리 봐도 내 또래인데. 혹시 싶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역시 술이 맞다. 와인이었다.
"야."
"어?"
"너 학생이지? 잘해봐야 고 1같은데, 낮부터 어디서 술을 퍼마셔?"
"으! 어어? 고 3인데?"
…헐.
형님이었다.
"젠장."
영락없이 동갑인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엄청 짜증난다는 표정이야?
"됐고, 그보다 너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냐?"
"어라?"
그러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갑자기 왜 말을 돌려? 뭔가 이상한데? 앗! 혹시 너, 나보다 어리냐?"
"멍청아. 일의 순서를 헤아려."
신나서 눈을 반짝이는 녀석의 눈을 콱 찔러 주었다.
녀석은 끄악! 하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뭐, 살짝 위를 찔렀으니 괜찮을 거다.
"히익! 아파, 아파! 진짜 아파! 갑자기 왜?!"
…아, 아마도.
오두방정을 떠는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주변을 살폈다.
방안은 호텔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장자리에 침대가 있었고 중앙에 테이블이 있었다. 한편에는 옷걸이도 있었는데, 그 위에는 갈아입을 카디건과 파자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 방처럼 생기긴 했는데, 뭔가 이상하군."
"으, …어어? 이상해?"
내가 상대를 안 해주자 태민은 스스럼없이 일어서더니 내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걸 도로 밀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것보다, 너는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 자의냐, 타의냐?"
"…무슨 소리임?"
"스스로 온 거냐, 끌려 온 거냐고."
"아아, 그 소리였군. 그 소리라면 그냥 말로 해줘도 되잖아. 왜 이상한 말을 써?"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줘."
내가 질려하자 태민은 흠! 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금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을 당했어. 야자 끝나고 집에 가던 길인데 누군가랑 마주쳤거든. 남자였나, 여자였나? 아무튼 부딪쳤나 싶더니 순간 팔이 따끔하더라고. 그러니 엄청 졸리데. 자고 일어나니 여기였다는 거야. 바로 옆방에."
태민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구석에 섰다.
침대가 놓인 가장자리였는데, 이제 보니 문이 하나 있었다.
"가봐야겠군."
"가봤자 그게 그거야."
"무슨 소리야?"
"똑같아. 침대랑 테이블이 다야. 뭐, 그렇다니까. 아참! 테이블에 와인이 놓여 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마시고 있었지."
태민은 그러더니 다시 술을 홀짝거렸다. 나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방의 구조가 같다는 말이지? 똑같은 방이 이어져 있다? 이상하군. 여긴 네가 말하는 방 외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그쪽도 그래?"
"어? 아냐. 거긴 문이 두 개야. 그 중에 하나가 여기고."
"그럼 다른 쪽은 출구인가? 거기로 가보지."
"그런데 그거 잠겨 있더라. 그래서 여기로 온 거라고."
"그런가?"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리 눈에 띄는 게 없다.
"그래도 가보자."
나는 문을 열고 태민의 방으로 갔다.
녀석도 뒤따라 들어왔다.
"확실히 구조가 비슷한데? 아니, 똑같군."
"그치?"
들어가니 건너편에 문이 보였다. 다가가 당겨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발로 차보고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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