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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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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기억이 쫓는 흰 꽃
글쓴이: 개화
작성일: 12-07-31 16:42 조회: 1,874 추천: 0 비추천: 0

1장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시그무 프로트프 고그(1965~?)

회색 하늘을 무겁게 머리에 씐 두 남녀가 멸망한 도시의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적막했다. 문득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을 펼쳐서 가슴 앞으로 내밀어보았다.
“비 온다.”
여자가 올려다보자 오른 눈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곧바로 찡그리더니 두 번 깜박였다.
“뭔가 걸칠 것을 찾아야겠어. 비닐 같은.”
남자가 걸음을 멈추자 뒤이어 여자도 섰다. 남녀는 두리번거렸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깨진 가로등 아래에 덩그러니 놓인 승용차를 발견하고 가보기로 한다. 오른발을 떼어 걷는다. 활짝 열려있는 운전석 문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쏴아.
거세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차 안에는 쓸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운전석 문에서 상체를 뒤로 뺐다. 허리를 세우면서 숨을 들이켜자 비 냄새가 났다. 빗방울이 은테 안경알을 때렸다. 그 속에 푸른 눈은 공허하다. 뒤돌아서 걸어갔다.
두리번거리다가 여자는 근처 쓰레기통으로 다가가서 안을 뒤졌다. 헛수고로 끝났다. 홧김에 오른발로 쓰레기통을 힘껏 찼다. 쓰레기통이 날아갔다. 공중에서 잡다한 쓰레기가 흩어지더니 떨어져서 길바닥을 굴렀다.
남자는 빗속에서 힘없이 웃었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기력이 없다. 여자가 무슨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남자는 왼손 중지로 은테를 밀어 올리며 걸으면서 여자의 시선을 쫓았다.
화재로 타버린 듯 온통 새까맣고 황폐한 3층 건물. 벽면 왼쪽으로 골목길이 나있었다. 오래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여자는 골목길로 걷기 시작했다.
쏴아.
와보니 골목길 구석 바닥에 아기가 맨몸으로 놓여있다. 찰박찰박 뛰어가는 소녀의 등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여자의 갈색 두 눈이 울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다가가서 앉았다. 두 팔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품에 안고 일어섰다.
“흔한 일이야. 그냥 놔둬.”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공허한 푸른 눈이 새까만 건물 안에 서서 비를 피하며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가 끊임없이 울었다.
여자는 부서져 떨어져나간 문을 밟으며 새까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걸어가서 남자 곁에 섰다.
“그러기에는 아기가 너무 불쌍해. 세 번째 이름도 벌써 정했어. ‘테미샤’ 가 좋아.”
여자가 어르자 이내 울음을 그쳤다. 남자는 테미샤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보랏빛 눈동자였다. 테미샤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 방금 봤어? 귀여워라….”
여자는 웃었다. 공허한 푸른 눈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못 살 거야.”
남자가 중얼거리자 여자의 웃음에 그늘이 졌다.
“알아. 하지만 살 수 있을 지도 몰라.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한테 거짓말을 하는군. 그 여자아이는 시체나 마찬가지야.”
“아니야! 멀쩡히 살아있어!”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남자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지금은. 그러나 앞으로 1주일이 지난 후에는 썩어서 길바닥을 굴러다니겠지. 날이 지날수록 우리 아들처럼….”
찰싹!
오른손으로 남자에게 따귀를 날렸다.
쏴아아아.
회색 하늘 아래 바깥에서는 비가 그치지 않았다.

“미안해.”
침묵이 끝났다. 남자는 맞은 뺨에 왼손을 올려두고 있더니 속삭였다. 내리깐 두 푸른 눈동자는 건물 바닥의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대답이 없자 이상하게 느꼈다. 살며시 조금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테미샤의 얼굴로 자꾸만 떨어졌다.
남자의 눈살이 심적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남자는 애써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살 수 있을 지도 몰라. 아니, 반드시 살려내겠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한순간 사이를 두고 속삭임이 이어졌다.
“울지 마.”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느릿느릿 세 번 끄덕이며 왼손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남편이라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너도 참 변했구나. 스무 살의 고고한 여왕님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지켜보던 남자가 근심에 빠져들면서 농담을 툭 던졌다.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왼손 손등 아래에서 미소를 지었다.
“몰라, 바보야.”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지켜야할 사람이 하나 늘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래도 여전히 예뻐.”
“시끄러워!”
여자가 기뻐서 웃으며 작게 외쳤다. 남자는 걱정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발견했다. 여자의 갈색 머리 너머로 한 남자가 빗물을 뚝뚝 흘리면서 오른손에 권총을 겨누고 서있다.
“래아!”
외치며 두 손으로 래아를 밀쳤다. 래아가 새까만 바닥에 엎어졌다. 테미샤가 울음을 터트렸다. 총구에서 탄알이 발사되었다. 한 발의 총소리가 멀리 비 오는 바깥으로 울렸다.
“시, 시그무!”
시그무는 옆으로 쓰러졌다. 탄피가 떨어지더니 튕겨서 맑은 소리를 두 번 냈다.
“네놈이 갑자기 움직이니까 놀라서 쏴버렸잖아.”
남자는 테미샤를 향하여 닥치라고 고함쳤다. 겁먹은 표정을 한 래아가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테미샤는 더욱 목청껏 울었다.
“여흥을 위한 여자가 피, 필, 필요해.”
총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쏠 생각은 없었어. 이해해줘. …네 탓이야! 네가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거라고, 제기랄!”
테미샤의 울음과 남자의 고함이 섞였다.
숨을 빠르고 거칠게 몰아쉬며 초조해하더니, 남자의 두 발은 래아를 향하여 직선으로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그러자 래아가 고개를 마구 저어 울면서 절규했다.
“입 닥쳐!”
팔을 휘둘러서 손잡이 밑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고개가 꺾이며 비명이 터졌다. 오른 눈에 피멍이 들었다. 테미샤는 더욱 더 목청껏 울었다.
“그… 만, 해.”
남자의 등 뒤에서 시그무는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남자가 빗물을 뚝뚝 흘리며 뒤돌아섰다. 왼쪽 허벅지에 옷을 관통하여 뚫린 구멍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새까만 바닥 위를 새빨간 피가 뒤덮어가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피바다에 오른쪽 얼굴을 처박은 두 푸른 눈이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는 다가가서 걷어차고 짓밟았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짓밟았다.
“전부 너 때문이야. 너는 네 잘못으로 죽게 되는 거야!”
밑을 향한 눈동자는 광기에 휩싸여있었다. 래아는 덜덜 떨면서도 그만두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흠칫 놀란 남자는 세 걸음 물러났다.
“나는… 나는 그저 여자가….”
남자가 중얼거리며 시그무와 래아와 테미샤를 순서대로 바라보았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전혀 아니었다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잠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당황하더니, 래아에게 거침없이 걸어가서 갈색 머리 위로 총구를 들이댔다.
“일어서. 빨리!”
래아는 총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움직였다. 일어서다가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멍청하기는! 일어서라고!”
남자는 몸을 숙여 왼손에 머리채를 움켜쥐고 억지로 일으켰다. 래아가 울부짖었다. 가까스로 일어섰다. 다리는 위태로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 지… 마.”
푸른 눈동자는 입김을 조금만 더 세게 불면 꺼질 듯한 촛불처럼 약했다. 애완견 목줄처럼 래아의 머리채를 끌고 시그무에게 다가갔다. 테미샤의 울음과 래아의 비명도 끌었다.
넘어졌다. 질질 끌려갔다.
“하지 말라고?!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전부 네놈 때문이잖아!”
내려다보면서 침을 튀기며 고함쳤다. 남자를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차디찬 죽음이 새겨지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 거야! 죽어야해, 네놈은 죽어야해.”
턱으로 침이 흘러내렸다.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더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총구가 시그무의 정수리에 날쌔게 부딪쳤다. 남자의 눈동자는 실처럼 가느다랗게 웃었다. 가늘어질수록 방아쇠가 당겨지고 있었다.
“…주세요… 려… 살려주세요.”
눈물방울이 연속해서 어둠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울음 섞인 애원이 조그맣게 흘렀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이 방아쇠에서 황급히 벗어났다.
“나는 이럴 생각이… 이러려는 생각은 없었어. 야, 약 때문이야. 약 때문이야!”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말하더니 절박하게 외쳤다. 손에서 머리채를 놓고 뒷걸음질쳤다. 이리저리 바삐도 병적인 시선을 옮기면서 약 때문이라고 중얼거렸다.
시그무의 반전된 시야 앞에 은회색 살덩어리가 가만히 놓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테미샤였다.
“약속….”
“너 때문이야!”
고함과 동시에 머리채를 잡혀 말이 끊겼다. 남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뒤로 꺾었다. 다음 순간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을 이빨에 물렸다.
래아가 건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한발 늦게 총소리가 터졌다. 남자는 왼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눌렀다. 살가죽이 뜯겨나가서 피가 철철 흘렀다.
“죽여 버릴 테다. 반드시 죽인다.”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서있다. 래아를 쫓아서 남자도 건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찰박찰박 뛰어가는 소리가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푸른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 공허하게 멈춰있었다.
쏴아아아.
회색 하늘 아래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터졌다.
그러고는 연이어 두 발 터졌다.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양옆으로 빌딩을 둔 한적한 골목길.
빌딩 사이로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푸르른 하늘을 한 마리 매가 스쳤다.
나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견딜 수 없게 차오른 숨을 고르며 등 뒤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정된 호흡을 되찾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깃털 같은 모자를 고쳐 쓴다. 다시 한 번 등 뒤를 살펴보았다. 좌우로 빌딩들이 늘어선 골목길의 소실점에는 가로줄 도로. 차들이 빠르게 오갔다.
바라보며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옆을 노려보았다. 무표정한 일행이 빌딩 벽면에 등을 기댔다. 왼손에 든 풀잎을 살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 미쳤어?”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옆으로 뉘인 칼날 같은 외눈이 나를 향하여 조용히 한 번 움직였다. 손가락이 풀잎을 놓았다. 팔랑팔랑 회전하며 낙하하더니 왼발 앞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순간, 단숨에 도약하여 창끝으로 내 목을 꿰뚫는 환상을 보았다. 외눈은 변함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미쳤냐니까?”
내심 겁을 먹었지만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재차 물어보았다.
“슬프고, 불쌍한 녀석아.”
벼랑 끝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동정을 던졌다.
“애써 자제하여 지금 너를 살려둘 만큼은 미쳤는데 뭐가 불만이냐?”
안경알이 없는 은테 속에 보랏빛 눈동자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사람들을 죽여서 불만이다. 그로 인해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정파 애들에게 쫓기게 되어 불만이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셀 수 없이 많지만….”
오른손을 뒤집어서 들었다. 시선을 내렸다. 손목시계의 시침과 분침과 초침을 확인했다.
“오늘 오전 약 10시부터 11시 32분 41초까지의 불만이라면 이 정도로군.”
왼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바보의 불만 해결에는 죽음이 가장 빠르고 편리하다던데. 두렵다면 대신 해주지.”
“요즘에는 가슴 성형도 일반화되어 있다. 한 번 해보면?”
“내 가슴은 찬란해. 태양이다. 직접 보면 실명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선례도 있어.”
“네, 네, 네, 네.”
고개를 마구 끄떡였다. 보랏빛 외눈이 정색했다.
“잘 알겠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상담이라도 받아봐. 더 늦기 전에 정신병원 의사를 찾아가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지?”
“그래.”
테미샤는 노려보다가 외눈을 감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등 뒤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칼 손잡이를 잡고 힘껏 쥐었다.
칼집에서부터 정면으로 ‘가벼운 침묵’을 벼락처럼 내리쳤다. 정수리를 향하여 질주하는 창끝이 불꽃을 튀기면서 왼눈 옆으로 튕겨나갔다. 두 다리를 굽혔다. 수평 베기가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하늘로 흩날렸다.
앉은 채로 가벼운 침묵을 휘둘렀다. 그보다 앞서 테미샤는 두 걸음 물러났다. 불꽃 모양의 바다색 창날이 아스팔트를 뚫고 박혔다.
뒤로 뜀뛰기해서 착지한 내가 왼손에 칼날을 받치고 이마를 방어했다. 칼날 정중앙을 창끝이 금속음을 내며 부딪쳤다. 균열이 한 줄기 새겨졌다. 나는 불안해졌다.
“또 부러지면 이걸로 벌써 135번째다! 멈춰, 이 무식한 여자야!”
“135번째에야말로 죽어라.”
내려다보는 보랏빛은 독사의 비늘 색깔 같다.
“질기고 추하고 짜증나는 인연이었다.”
균열이 세 줄기로 늘어났다.
“죽어라, 어서. 종지부를 찍자.”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 양손이 떨리는데도 칼날은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콧등에 땀이 흘렀다.
“일단 진정해라. 네 더러운 성질 때문에 남자들이 외면해서 화난 거냐?”
“닥쳐.”
“그래? 역시 가슴이냐? 성형외과에 혼자 가기 창피하면 같이 가줄게.”
하나뿐인 눈빛이 바뀌었다. 하강이 멈췄다. 보랏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움직였다.
“여유롭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서, 유해곤충. 지금은 우선 적과의 싸움이다.”
테미샤가 칼날 정중앙에서 창을 거두며 말했다. 왼손 팔뚝으로 콧등의 땀을 닦고 일어서서 뒤돌아보았다. 여섯 명의 장정 앞에 한 여인이 서있었다. 여인은 왼손을 들고 흔들었다.
하늘색 머리는 귀밑까지 내려오고 두 귓불에는 조그마한 다이아몬드 귀걸이. 왼쪽 눈꼬리 끝부터 직선 아래의 턱까지 깊고 투박한 상처가 흐르는 눈물처럼 나있다.
“전부 핑크빛 정장을 입었는데 그건 무슨 규율인가?”
무시하고 물어보았다. 여인은 왼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예쁘고 깨끗해서 좋아할 뿐이다. 안 그래, 다들?”
여인의 등 뒤에서 장정들은 제각각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계집애 자식. 그만 쫓아와. 하다못해 나는 제외시켜줘라.”
“방조죄도 용서할 수 없어. 죄질은 똑같이 깊다. 대낮 거리 한복판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면 마땅히 목을 내놔야지 왜 도망치나?”
“그건 다 테미샤가 선천적으로 심각한 시력 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다. 나하고 관계없어.”
“죽어라.”
허리를 직각으로 휘었다. 두 눈 앞을 창끝이 지하철처럼 달렸다. 자세 그대로 두 발을 교차하며 멀찍이 뒷걸음질쳤다. 내 경공 최대 한계인 시속 200킬로미터로.
휜 허리를 쳐들고 오른손 검지로 휘두르듯이 삿대질했다.
“이봐, 모두 방금 봤지? 이런 미친 여자라니까! 적과 아군, 악과 선을 같은 단어로 인식한다고! 시간이 더 지나면 똥과 음식도 같이 취급할 거다! 벌써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애정표현은 솔직하게 해. 부끄럽냐?”
테미샤가 웃었다.
“게다가 뻔뻔하고 역겨운 공주병이다! 완전히 파멸한 정신세계야!”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교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니라던데 과연….”
“그래, 사실이었군.”
장정 둘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인이 왼손 검지 손톱으로 두 눈가를 차례차례 훔쳤다.
“거기 두 명!”
외침에 장정 둘은 움찔했다.
“편견이야. 마교 사람도 사람이다!”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다니 이건 참을 수 없어.”
순흑색 입술이 분노로 비뚤해졌다. 나는 한순간 과거를 돌이켜보고 입 언저리를 끌어올리며 비꼬았다.
“네가 언제는 참은 적이 있었던가?”
“입 닥쳐!”
벼랑 끝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외쳤다. 외침과 동시에 창을 최고신의 번개처럼 던졌다. 테미샤의 양날 창 ‘겉과 속’은 멀뚱하니 눈 한 번 깜박일 사이 오른쪽 어깨 죽지를 스치고 굉음을 터트렸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분진 속에 아스팔트가 함몰되어 있었다.
더러운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던진 것이다. 오른쪽 어깨가 뜨거워서 내려다보니 피가 소매에서 뚝뚝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테미샤의 욱하는 성질에는 세 단계가 있다. 닥치라고 욕할 때에는 화났다는 뜻. 일상적이다. 입 닥치라고 욕할 때에는 많이 화났다는 뜻. 본격적이다. 아무 말도 없으면 돌이킬 수 없이 화났다는 뜻. 친구가 충고해서 듣기는 들었지만 나도 모르기 때문에 솔직히 두렵다.
“어느 정도인데?”
“3일 동안 내내 싸웠다.”
친구와의 대화가 뇌리에 살아나서 스쳤다.
“화나면 제정신이 아니니 주의해라. 특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를 찾아라.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나와 핑핑은 거의 동등한 실력을 가졌으니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별명이 왜 핑핑이지?”
친구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평평이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들으니까 핑핑이다.”
“데이지로 불릴 때에는?”
“돼지.”
“아.”
─테미샤가 손가락에 구슬이 튕겨나가듯 질주하여 곁을 스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제자리에서 1미터가량 뛰어올랐다. 뒤쪽 아래에서 불꽃 모양의 바다색 창날이 쑥 튀어나왔다. 위치로 보아 노린 것은 심장.
새까만 창대를 오른발로 밟고 더욱 뛰어올랐다. 가벼운 침묵의 칼날을 살폈다. 상태를 확인하고 착지했다.
곧장 엉덩이를 낮췄다. 중단 찌르기가 후퇴하여 회수되고 하단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굴러서 피했다. 아스팔트가 함몰되며 굉음이 터졌다. 몇 번이고 들으니 귀가 아프다.
일어서며 뒤돌아보면서 쏟아지는 창끝을 일일이 쳐내고 있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기세에 밀려 한 걸음씩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이봐, 얼빠지게 보지 말고 빨리 와서 정의의 심판을 내려라!”
어떤 장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자 여인은 장정의 가슴 앞에 왼손바닥을 펼쳤다. 고개를 돌린 장정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려고 왔지만 조금 구경할래. 재미있네.”
천하태평하게 웃으며 실력을 가늠하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1년 안으로 축 늘어진 가슴이 되라. 대대손손 할머니 가슴이 되라.”
나는 저주를 중얼거렸다. 몸을 틀었지만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왼쪽 어깨 죽지가 핏방울을 아스팔트에 후두두 뿌린다.
테미샤의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뒤돌아서 착지하여 거리를 두고 대치. 이 노란색 셔츠는 아끼는 옷인데 너덜너덜 찢어지고 피로 더러워졌다.
“유해곤충, 용케 떠드는군. 딴 데 신경 쓰다가는 죽을 텐데.”
은테 속에 독사의 비늘 색깔 같은 보랏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창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테미샤가 머리 위로 창을 들고 연속해서 회전시켜 피를 털어냈다.
“너는 적이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까 셔츠를 내려다보고 화가 치밀어 얼굴이 뜨거웠다.
“네 아군은 지옥에 있다. 외로우면 지옥으로 가.”
맞은편에서 벼랑 끝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지상에 있어도 미움만 받을 거야.”
“나라고 좋은 줄 알아? 서로 맞춰가는 게 동료라는 것이다.”
“닥쳐.”
나는 얼굴을 힘껏 찌푸렸다.
“좋아, 싸우자고.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단전을 해방하면 강해.”
“안타깝지만 제2의 적이 먼저야.”
테미샤는 뒤돌아서 그들 무리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져서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하건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전부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따지려고 입을 여는 순간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에 시선이 반응했다. 핑크빛 여인이 오른발 앞에 장검을 거꾸로 꽂아놓은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재미있었어. 역시 거칠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기대할 수 있겠어.”
“솔직히 테미샤는 엉덩이만 크지 칭찬할 부분이 없다. 집 근처 안과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
“재촉하지 않아도 금방 죽게 될 테니 닥치고 기다려.”
박수가 멈췄다.
“그럼 장난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가지.”
여인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고 자기 허리처럼 날씬한 장검을 뽑아들었다.
쨍.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
“135번째로군. 꺾이기가 한낱 꽃보다 나약한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역시 쓰레기다.”
내려다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지? 부러진 검으로는 싸울 수가 없다.”
“간단해. 죽으면 돼.”
옆으로 뉘인 칼날 같은 외눈은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칼날을 주워서 힘껏 던졌다. 테미샤가 창을 휘둘러서 튕겨냈다. 칼날이 빌딩 벽면에 박혔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니, 확실히 곤란할지도. 쓰레기의 머리는 내 손으로 터트려야 속이 개운하게 풀릴 터. 빈손으로 싸우다가 혼자 멋대로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테미샤는 말꼬리를 흐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양손으로 창을 넓게 잡았다. 왼손은 앞으로, 오른손은 뒤로 손목을 돌렸다. 금속음을 내며 분리, 왼손에 든 창을 나에게 던졌다.
“써라.”
전력으로.
콰앙!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여 아스팔트로 날아갔다. 나는 왼손으로 분신을 만지작거렸다. 내려다보기가 두렵다.
“너에게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와. 요새 수면제까지 복용하고 있어.”
분신의 무사태평을 확인하고 왼손을 뗐다.
“훌륭해. 그래서 뭐?”
“아니, 됐다. 말을 말자. 평소에 시간나면 엉덩이 살이나 빼라.”
내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마교 애들아!”
테미샤의 어깨 너머로 여인이 웃으며 두 손 모아 불렀다. 테미샤가 뒤돌아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오해가 있어. 우리는 그냥 돌아가겠다.”
여인은 왼쪽 허리에 찬 기다란 칼집에 장검을 넣고 있었다. 여섯 명의 장정이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서라. 일개 수습생의 발언은 거기까지다.”
찰칵, 장검이 완전히 들어가며 칼집에 부딪쳐서 소리를 냈다. 따지고 들던 장정이 입을 닫았다.
“나중에 또 보자.”
핑크빛 여걸은 호박색 눈웃음을 지었다.
“마저 싸우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핑크빛 엉덩이를 요염하게 흔들며 걸어갔다. 장정들도 뒤돌아서 걸어가며 무기를 제각각 넣었다. 어떤 장정은 미련이 남은 듯 걸음을 멈췄으나 곧 계속해서 걸어갔다.
“내 이름은 곤호르다!”
여인이 등 뒤로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세 번 흔들며 외쳤다. 뛰어올라서 왼쪽 빌딩 벽면을 밟고 반대편으로 더욱 상승했다.
반복하여 지그재그로 이어지고 있었다. 장정들은 제각각 지면에서 벗어나 여인을 따라나섰다. 혼자 남아 등 뒤로 고개를 돌려서 우리를 노려보던 장정도 뛰어올랐다.
한적한 골목길에는 나와 테미샤가 그들을 올려다보며 서있었다.
“테미샤만큼은 아니지만 저 여자도 뭔가 수상해. 앞으로 괜찮을까?”
마지막 한 명이 빌딩 옥상 위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걱정이냐? 너만큼 이상한 얼굴은 세상에 바퀴벌레뿐인데.”
시선을 내리니 순흑색 입술이 코웃음 쳤다.
“동문서답의 흠잡을 데가 없는 모범이로군. 어째서 우리는 서로에게 욕을 퍼붓지 않으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질문밖에 모르는 저능아. 쓰레기.”
순흑색 혀가 뱀처럼 움직이며 증오를 내뱉는다. 내내 노려보는 테미샤를 눈을 피하지 않고 맞부딪쳤다.
“남자들의 무관심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지 마.”
가녀린 턱, 죽음을 닮은 입술, 여배우의 콧날, 동양의 칼날 같은 눈매, 선이 길고 가느다란 눈썹은 묵화의 난초, 이마를 덮은 섬세한 붓질, 악마의 뿔처럼 솟은 두 갈래 머리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취향에 따른 문제겠지만 나도 네가 못생겨서 싫다.”
시선을 수직 상승하며 오목조목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애정표현은 솔직히 하라고 말했을 터다.”
은회색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솔직하게 내 얼굴을 품평해서 나도 똑같이 말했을 뿐이야.”
또 흥분하게 만들면 귀찮아지니까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나는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서둘러 찾아내서 숙청을 하자. 실로 오랜만에 한 도시 방문이다. 발 빠르게 끝내놓고 즐겨야 되지 않겠냐. 마교에 돌아가서 후회해도 그때는 늦어.”
고개를 내리니 보랏빛 외눈은 나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 취향이 어떻게 되었던가? 어쩌면 내가 너에게 몇몇 남자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지. 내 연락처에는 괜찮은 친구 녀석들이 많아. 말만 해.”
살짝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테미샤가 정면 위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늘에서 날아와 금속음을 터트리며 겉과 속이 붙어졌다. 반대쪽을 왼손으로 잡고 돌려서 결합한다.
“나는 나대로 사냥한다.”
테미샤는 새까만 창대를 오른쪽 어깨에 들쳐 멨다. 황토색 악어가죽 재킷이 무게에 눌렸다.
“너는 너대로 알아서 해라.”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주황색 악어가죽 3부 스커트의 커다란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던 엉덩이가 걸음을 멈췄다.
“김슬.”
이름이 불려 뜨끔한 내가 초인적 반사 신경으로 시선을 옮긴다. 오른쪽 위로 피했다.
“너처럼 걸레 같은 남자만 아니면 돼.”
슬쩍 바라보니 다시 엉덩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이 엉덩이로 몰렸군.”
왼손으로 반대쪽 팔꿈치를 지탱, 오른손을 턱에 대고 중얼거렸다. 테미샤는 금방 멀어지더니 그늘져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가 밝은 거리의 인파에 섞여서 사라졌다.
인파를 보고 문득 오늘이 주말임을 깨달았다. 도시의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시골 촌구석하고는 달라.”
새로 옷을 사서 갈아입어야겠지. 뭐라도 사먹자. 찝찝하니 보이는 대로 사우나에 들러서 깨끗이 씻고 선물도 미리 사놓자.
다가가서 빌딩 벽면에 박힌 칼날을 뺐다. 챙기려다가 내다버리고 가벼운 침묵을 등 뒤의 칼집에 넣었다.
팔을 움직이니 어깨의 경상이 따끔따끔하다. 가만히 서서 의식을 집중하자 찢어진 근육이 이어지고 새로 피부가 돋아나 순식간에 덮어갔다.
나는 일의 순서를 생각하며 양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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