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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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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여름 님,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글쓴이: 청율
작성일: 12-07-31 16:06 조회: 1,852 추천: 0 비추천: 0

"'여름' 님.. 부디 제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아영은 두 손을 모아 파아란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내 마음이 그 아이에게 전해지기를, 그렇게 빌었다. '여름'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건 떠도는 소문일 뿐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전하고 싶었다. 이제 서야 알게 된 자신의 진심을.

때마침 지나가는 산바람에 그녀의 고동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흐트러졌고 아영은 감았던 눈을 지그시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색 여름 하늘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아영의 입가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이내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 널 좋아해..."

그녀의 희미한 속삭임은 지나가던 바람에 휩쓸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소원을 빈 그녀와 파아란 여름만큼은 그 이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 * *


그녀가 바로 코앞에 있다. 그것도 곤히 잠든 무방비 상태로.

지점토로 빗어놓은 듯 뽀얗고 조심스런 얼굴에 감긴 눈 사이로 가지런히 뻗은 속눈썹, 조각같이 오똑한 코와 발그레한 두 뺨, 마지막으로 벚꽃잎 색으로 촉촉이 젖은 입술이 내 시선을 끌었다.

예쁘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소꿉친구인 '서아영' 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래 어릴 때부터 다른 애들에 비해 예쁘장하게 생긴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예쁘다는 생각을 한건 중학교 이후 처음이라고 할까.

그 순간 두근두근, 하고 심장이 보채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키스...'

마음속 구석에서 기어 나온 본능이 소리쳤다. 키스라- 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면 어떤 느낌이들까, 아마도 폭신폭신하면서도 촉촉하게 젖는..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신이현! 상대는 서아영이라고. 이런 녀석하고 키스라니, 있을 수없는 일이잖아? 그래.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잠시. 아주 잠시.

나는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변명하며 잠든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 흣."

그 순간 그녀가 입술을 찡그리며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고 그녀의 폭신한 무엇인가가 잠시 동안 내 손에 물컹하고 닿았다. 혹시 놀란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가 아영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그랬을 리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아영이가 겨우 이런 걸로 놀랐을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나도 이번에야말로!

"후우.."

나는 작게 심호흡을 내뱉고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갔다. 달콤한듯하면서 은은한 그녀의 향이 코끝을 맴돈다. 그리고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 즈음 그녀의 입술이 가까워 졌을 때, 갑자기 그녀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나 도저히 못하겠어!"

"응? 야, 잠깐만. 그렇다고 갑자기 머리부터 쳐들면.."

쿵-

부딪힌다고 이 바보야! 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녀와 내 이마가 사이좋게 박치기했다.

"아흑.."

그녀는 부딪힌 부분을 잡고 책상 위에 누워 괴로워했고 나도 갑작스런 헤딩의 충격으로 책상위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이 바보야. 그러니까 일어나지 말랬잖아!"

"으으.. 네가 언제 그랬어?"

아영이가 투덜거리며 부딪힌 부분을 문지르고 있다.

뭐, 일어나지 말라고까지 말하기도 전에 박치기를 해버리긴했지만.

"그런 건 딱 보면 알거 아냐."

"네가 색한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들이밀 줄 몰랐단 말야."

"누구더러 색한이래? 애초에 너한테 그런 매력을 느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솔직히 나도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말 그대로 방금 전 키스 시도는 내 의지로 한 게 아니다. 물론 내 의지로 움직이긴 했지만 내 말은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건 아니라는 뜻, 즉 '어쩔 수없이' 한 것뿐이다.

"하고 싶었던 주제에. 안 그러면 연극 연습인데 진짜 하려고 했겠어? 이 말미잘 같은 호색한!"

말미잘 같은 호색한이라니, 진짜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네. 하여튼간에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말싸움으로 지기 싫어하는 건 여전하구나.

"진짜 하려고 한적 없거든? 그리고 그런다고 박치기를 하냐?"

"누가 너 같은 거랑 박치기하고 싶어서 한줄 알아? 그리고 너보다 내가 더 아프거든!"

아영이가 앞머리를 쓸어 넘겨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보여주며 투덜거렸다.

정말로 우윳빛처럼 하얀 이마가 빨갛게 달아올라있다.

어, 정말 빨갛네. 그 정도로 아픈 걸까? 난 이제 별로 안 아픈데. 설마 내가 그 정도로 돌머리라는 뜻?

"당연하지. 이 돌머리야."

그 때, 아영이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다.

"에? 너 그걸 어떻게.. 아니 무엇보다 넌 내가 무슨 생각을 한줄 알면서 그러는 거야?"

내가 당황해서 묻자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런 건 안 봐도 비디오지. 네 생각쯤은 지나가던 박테리아도 다 알걸?"

"지나가던 박테리아라니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 마. 이 끓는 냄비 뚜껑아!"

"뭐? 내가 끓는 냄비 뚜껑이라고 하지 말랬지? 이 기어가던 아메바만도 못한 놈아!"

이젠 지나가던 박테리아도 모자라 기어가던 아메바인거냐.

"오냐. 그래. 너 오랜만에 기어가던 아메바한테 맞아볼래?"

"그래. 싸우자 이거지? 오늘이야말로 너 같은 건 끓는 냄비 속에 투하시켜서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주겠어!"

아영이는 꽤 자신 있는 표정으로 팔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고 나도 그녀의 공격에 대응할 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다다다, 하고 그녀가 나에게 달려들었고 그녀의 주먹이 나를 향해 스트레이트로 날아오는 그 순간이었다.

"자아, 부부싸움은 이쯤에서 그만~"

맑게 울리는 고운 목소리, 시선을 돌려보니 채은 선배가 아영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가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을 제지하고 서있다.

"이, 이거 놔요. 선배! 저 아메바 녀석을 오늘이야말로 삶아버리겠어요!"

아영이가 선배의 품에 안긴 채로 팔을 붕붕 휘둘러댔지만 선배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싱긋 웃고만 있었다.

"있지, 아영아?"

"네? 왜요?"

"서방님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푸앗, 누가 누구 서방이라는 거야? 그 순간 빠직,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아영이한테서 난 소리겠지. 끼어들면 괜히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이제부터 잠자코 지켜나 보자.

"대체 누가 저런 걸 서방으로."

"그야~ 아영이, 너지."

"..., 제가 어째서 저런걸..."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영이는 현이가 싫어?"

"윽..."

순간 아영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멈칫했다.

"......, 흥. 그야 당연히 싫은 거 아니에요? 싫어요. 싫어. 어릴 때부터 저 아메바가 제~일 싫었어요."

우와, 이제 대놓고 아메바라고 지칭하는 거냐? 사실 나도 어릴 때부터 네가 제~일 싫었거든? 순간이라도 혹시나 했던 내가 바보지. 역시 저 녀석은 내 인생 최대의 악연인게 분명해.

"흐음, 그럼 '소원의 장소'는 뭐였을까?"

"네? 서, 선배... 혹시.."

순간적으로 아영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응? 그건 또 뭐야. 그 때, 선배가 싱긋 웃으며 날 불렀다.

"현아 궁금하지?"

조금 찝찝하지만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지.

"네."

"그게 말이지. 아영이가... 우웁!"

"그만! 선배, 잠깐만 우리 이야기 좀 해요."

아영이가 황급히 선배의 입을 틀어막더니 이내 뒤돌아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같긴 하지만 내 앞에서 수근거리니까 무지 찝찝하잖아. 이거.

그렇게 몇 분 동안 둘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더니 잠시 후 아영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선배에게 물었다.

"서, 선배... 진짜예요?"

"응~ 진짜지 그럼."

선배가 평소처럼 환하게 웃자 반대로 아영이의 얼굴이 조금씩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한다. 가녀린 어깨와 복숭아빛 입술이 겁이라도 먹은 듯 움찔움찔 떨고 있다. 뭐야 대체. 너무 광속으로 전개된 상황에 전혀 적응을 못하겠잖아.

".... 이제 난 끝이야... 어떡해. 정말.."

아영이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 같이.

"자아, 자아~ 기운 내. 아영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깐? 난 이래 뵈도 입이 무거운 여자라구."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물어봐야겠다.

"저어, 선배.."

내가 부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방금 그거."

"그야 당연히 비.밀.이지~ 아영이랑 약속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쉽게 말해줘 버리면 재미없잖아?"

선배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봐야,

정말 귀엽지만..

"네에.. 그런가요..."

딱히 말 안 해주셔도 재미있진 않은데 말이죠. 뭐, 지금 아영이 상태를 봐선 그 약속, 꼭 지켜야 하는 거겠지? 어찌되었건 아영이와의 싸움을 일단락 시켜준 점에 대해선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선배.. 저, 감사해요."

"응?"

"싸움을 말려주셔서 감사해요."

"우, 우와? 현이가 방금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거지? 놀라워!"

갑자기 선배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얼레, 근데 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이유는 뭣 때문일까.

"아아, 현이가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 이 서프라이즈한 상황을 녹음했어야 했는데!"

"....,"

대체 이 선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겨우 고맙단 말 한 마디에 방방 뛸 정도로 놀라운 건가.

"여기, 녹음은 해뒀어요."

그 때,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가연이가 담담한 어조로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놓았고 그것은 다름 아닌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핸드폰이었다.

"뭐, 뭐예요? 이게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인가요?"

내가 당황하며 묻자 부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 패닉상태인 아영이를 제외하고.)

"이현 선배님이 그런 말을 하시는 건 매우. 드문 현상이니까요."

가연이가 책장을 넘기며 '매우'를 강조해서 말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가연이까지 말을 할 정도로 정말 드문 현상이었던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지난 4달 동안 그녀들과 함께 부활동을 하며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실상 내가 그녀들에게 고마움 같은 것을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영이야 매일 싸우기만 하지, 채은 선배에겐 그런 말을 할 일이 없었고 심지어 가연이랑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다. 그나마 나를 제외하고 유일한 남자 부원인 지우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지만 그 녀석은 여러 가지 핑계로 부활동엔 거의 출석하지 않으니까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현아?"

"네, 네?"

채은 선배가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혹시 어제 본 야동이라도 떠오른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야동이라니, 지금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할리가 없잖아. 여기서 그런 생각을 했다간 정말 사회적으로 인간쓰레기 취급 당해버릴 거라고.

"그럼 왜 그래? 혹시.. '그게' 하고 싶어서?"

선배가 이번엔 살짝 뺨을 붉히며 묻는다. 무엇보다 어째서 방금 전보다 수위가 더 높아진 건데, 혹시나 가연이와 아영이가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있진 않을까 싶어 슬쩍 살펴보았지만 예상외로 모두들 나와 선배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에요. 전 그냥 그동안 제가 동아리에 조금 무심했나 싶었던 것뿐이라구요."

무심했다. 그런 표현이 맞는 걸까? 하지만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그녀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려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동아리? 무심했다니 뭐가?"

"저..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막상 질문 받고나니 당황스럽네.

"혹시..."

채은 선배가 갑자기 웃음기가 멎어버린 진지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혹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걸까?

"우리들을 '공략'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 네?"

갑자기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선배가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상황이 더욱 이해가 안 간다.

"'공략'이라니.. 그건 또 무슨.."

"다른 여자 애들을 '공략'하느라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들을 '공략'할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거지? 걱정하지 마. 응. 난 현이가 날 '공략'하러 오는 그 날까지 기다릴 테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그 '공략'은 뭐고 또 다른 여자애들은 왜 나오는 거냐구요."

그걸 설명해달라는 거잖습니까.

"에? '공략' 몰라? 왜 그 있잖아. 미연시 같은걸 하다보면 히로인을 마구잡이로 범해서 내 걸로 만드는 그런 거."

그건 왠지 '공략'이라기 보단 성범죄라고 생각하는 건 나 뿐인걸까. 근데 여자 입에서 '히로인을 내 걸로 만든다'라는 말을 듣고 나니 상당히 묘한 기분이다.

"어디서 접점이 있었다고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가요.."

"응? 우리들에게 무심했다며, 그런 뜻 아니었어?"

"...,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무슨 하렘물 주인공도 아니고 현실에서 '히로인 공략' 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게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만약 내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난 그럴 능력도 없다.

"에? 그럼 대체 뭔데?"

선배가 뭔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바짝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라즈베리 향기가 내 주위를 휘감았다.

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아영이보다 좀 더 탄력 있어 보이는 깔끔한 피부에 복숭아빛으로 살짝 물든 두 뺨, 촉촉하게 젖어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흐르는 분홍색 입술과 가녀린 목선 밑에 벌어진 교복 셔츠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우월한 가슴라인이 선배만의 어른스러운 매력을 어필하고있다.

우앗! 나 대체 어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지금. 안 돼. 진정하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되도록 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고 그 순간, 날 빤히 바라보고 있던 가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

가연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몇 초간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설마 방금 다 보고 있었던 걸까? 전부 눈치 챘으면 큰일인데...

그때였다.

"신이현!"

"아, 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채은 선배가 아직도 그 자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앗 선배.. 제발. 이런 괴로운 고문은 하지 말라구요. 본능적으로 자꾸 보고 싶어지잖아요.

"뭐야, 내 말 들었어?"

"아, 네.. 들었어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에? 흐음.. 뭐야, 싱거운 남자."

채은 선배는 흐응, 하고 뾰루퉁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놓아둔 게임기를 집어 들어 자리에 앉았다.

후우,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선배는 게임에 빠지면 한동안 다른 일엔 신경을 안 쓰니까.

이제야 조금 맘 편히 쉬려던 그때, 문득 패닉상태에 빠진 아영이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러고 있으려나.., 조금 걱정이 되서 살펴보니 이미 그곳엔 아영이가 없었다. 얼레, 어디 갔지?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우왓!"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아영이가 서있었다.

"놀랐잖아!"

아영이가 불만스러운 듯 소리쳤다. 야, 나도 놀랐거든.. 이라고 말했다간 또 괜히 싸울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그냥 남자답게 내가 먼저 사과하자.

"미안.."

"응? 뭐, 알았으면 됐어."

끝까지 너도 미안하단 말은 안 하는 거냐. 그래도 평소처럼 더 신경질 안 내는 게 어디야, 아마 방금 전 패닉상태의 여파겠지. 평소에도 이정도로만 차분하면 참 좋을텐데 말야.

"그보다.. 정지우는 오늘도 결석?"

"응.. 그 녀석이야 늘 그렇잖아.”

오늘도 야구부 훈련이 있다던지 여자친구들과 데이트 약속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결석했을 게 뻔하다. 그 녀석에겐 그게 일상이니까.

"진짜 무능해. 왜 그런 녀석이 우리 부에 있는 거야?"

그야 입부 신청서를 냈으니까.

"잉여스러워! 색한인 신이현보다 더 쓸모없잖아!"

방금 그 말, 은근 돌려말하기 식으로 나까지 공격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그래도, 우리 부가 이 모양이니 쫓아내 버릴 수도 없고."

아영이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우리 '연극 문학부'는 부원이 겨우 5명밖에 안 되는 최소규모 동아리라서 당연스럽게 지우를 잘라버릴 처지가 아니다.

학교 규정상 동아리 개설시엔 부원은 최소 7명 이상이지만 운 좋게 우리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예외적으로 개설에 성공한 건데, 여기서 한 명이라도 줄어들어버린다면 우리 '연극 문학부'는 정말 폐부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잖아. 지우 그 녀석, 처음부터 입부하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흥... 누가 그런 녀석보고 들어와 달랬대?"

어이, 그 때 지우라도 얼른 데려오라고 했던 건 너였잖아. 그 부분은 잊어버린 거냐.

뭐, 부장인 네 입장에서 그 기분이 어떤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흠... 정 그러면 내가 일단 내일 그 녀석하고 이야기 해볼게."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뭐, 어차피 그 녀석은 아무리 말해봐야 안 올 것같지만 말야."

아영이는 이젠 별 기대도 하지 않는 표정이다.

애초에 정지우는 그런 녀석이니까. 야구와 마음에 든 여자들 외엔 전혀 관심이 없는 녀석이다.

"후우."

아영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 때 그녀가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나를 슬쩍 노려보았다.

"뭘 봐?"

"아니. 아무것도.."

"흥. 훔쳐 보지 마. 변태야."

내가 무슨 탈의 장면이라도 훔쳐본 것처럼 말하지 마. 그런데 역시 아까 그 표정은 조금 신경 쓰이네. 어차피 또 괜한 걱정이겠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저 녀석에게 미묘한 변화가 있는 것 같다고나할까,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본인도 별 내색하지 않지만 소꿉친구의 감으로 어렴풋이 눈치 채고있다. 저 녀석, 분명 이상해졌어.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그 때 아영이가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가려고? 잠깐만 기다려. 같이 가자."

"싫어. 변태랑은 안가."

"....,"

단칼에 거절당해버렸다. 말은 저래도 결국은 같이 가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느긋하게 가방을 매고 나서 남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다들 집에 안 갈 거예요?"

"아, 난 조금만 더."

"저도."

채은 선배와 가연이가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선배는 게임이 끝나야 집에 갈 분위기고 가연이는 책을 거의 다 읽은걸로 봐서 아예 반납하고 갈 생각인가보다. 그래도 가연이는 이해가 되지만 게임을 깨고 가겠다는 선배의 생각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나 할까.

"선배는 그걸 꼭 여기서 깨야겠어요?"

집에 가서 깨도 될 텐데. 어차피 그 게임기는 선배가 가져온 거였으니까.

"안 돼. 안 돼. 집에서 고3이 게임기를 잡고 있다니 그런 불효자식 같은 모습을 부모님께 어떻게 보여 드리냔말야."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하는 게 더 불효자식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저 게임기도 부모님이 폐기처분 시켜버리려던걸 겨우 학교에 가져왔다고 했었나, 하여튼 게임에 대해선 참 지극정성인 선배다.

"뭐.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내일 뵈어요."

나는 남은 두 사람에게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나서 부실을 나와 저 앞에 먼저 가고 있는 아영이의 뒤를 쫓았다.


* * *


자줏빛 저녁놀이 짙게 깔린 길 위로 두 사람 분의 그림자가 나란히 걷고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아영이의 갈색 머리칼이 마치 노을에 물든 해수면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둘이서 하교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로 처음인건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영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또 무슨 변태적인 생각중이지?"

"아니거든."

멋대로 생각하지 마. 그리고 오히려 입만 열면 '변태' 소리나 하는 네가 더 변태 같다고.

"그럼 말고.."

예상외로 돌아온 대답은 평소의 당당한 태도가 아닌 피곤에 지친 듯한 목소리였고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뭐가?"

"음... 연극 문화부도, 연극 연습도, 그리고..."

아영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일부러 끊은 느낌이다.

"그리고 뭐?"

"됐어.. 넌 몰라도 돼."

"몰라도 되는 거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마."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영이는 저런 식으로 말했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아마도 말하지 못한 부분엔 내가 느낀 그녀의 '미묘한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싶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느덧 평소에 우리가 헤어지던 두갈래길에 도착했다. 여기서 왼쪽이 우리 집, 오른쪽은 아영이네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럼 난 갈게."

아영이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순간 나는 서둘러 그녀가 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보드랍고 따스한 그녀의 손목에서 은은한 온기가 내 손으로 옮겨져오는 것만 같다.

"어디 가는 거야. 그 쪽이 아니잖아."

뒤돌아선 그녀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집 방향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아?"

아영이는 뒤돌아서 강하게 내 손을 뿌리쳐냈고 이내 살짝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날 올려다본다.

옆으로 가늘게 뜬 눈빛이 왠지 모르게 무섭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꼬리를 내릴까보냐.

"그게 아니라 오늘 '그 날' 이라고. 너 우리 집에서 자는.."

"뭐? 내, 내가 왜 너네 집에서 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아영이는 갑자기 내 말을 잘라먹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은 노을빛보다 붉게 물들었고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가느다란 두 팔로 가슴 부위를 가리듯 어깨를 꼬옥 감싸 안아 웅크린다.

"...., 너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오늘은 금요일이라고. 금요일. 설마 잊어버린 거냐?"

매주 금요일은 아영이 집 사정상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묵는 날이다. 그 사정이 대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 말로는 어른들의 이야기라고 하니 나도 굳이 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나저나 방금 아영이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까먹은 모양이다.

"너 혹시...,"

그렇고 그런 걸 상상한 거냐, 대체 날 뭐로 보고. 적어도 난 절대로 너한테 그런 욕정을 품지 않을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아, 아니거든, 이 성추행범아!"

이번엔 성추행범이냐,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성추행이라도 한줄 알겠네.

아영이는 큰소리로 떵떵거리더니 부끄러운 듯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홱 가려버린다.

"그만하고 가지?"

"시끄러! 너나 가버려!"

넌 안 갈 생각인거냐,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시끄러운 건 네 쪽이라고 생각한다만.

"난... 천천히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너 먼저 가버리라고."

아영이는 그 말을 끝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절대 움직이려하지 않았고 나는 하는 수없이 그녀를 내버려둔 채 먼저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끄러운 건가, 그치만 이런 식이면 처음부터 같이 가는 의미가 없잖아. 이 바보야.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외로이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에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현관에 나와 있던 엄마가 날 반겨주었다.

"어, 아들 왔어? 지영이 이모한테 인사해."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실 쪽 방향에서 부드러운 이미지의 중년 여성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이 분은 지영이 이모, 아영이네 어머니시다. 아영이네 어머니는 우리 엄마보다 겨우 2살 젊으신데 우리 엄마와는 다르게 아직도 30대 중반 정도로 밖엔 안 보이는 일명, 동안 외모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지영이 이모도 기분 좋게 화답해주신다.

"그래. 이현이도 잘 지냈지? 이번 주도 신세 좀 질게. 그런데 우리 아영이는? 같이 온 거 아니니?"

"아.. 그게."

혼자 변태적인 망상을 한 게 부끄러워서 머리 좀 식히고 오겠대요. 라곤 절대 말 못해. 말했다간 서아영한테 정말로 맞아죽을지도 몰라.

뭐라고 얼버무려야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현관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굿 타이밍. 예상대로 아영이였다. 그럼 상황 설명은 너한테 맡길게.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은근슬쩍 2층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그래. 아영아 어서 오렴."

우리 엄마가 먼저 반갑게 아영이를 맞이해줬다. 목소리가 왠지 나보다 아영이를 더 반가워하는 것같은데. 그리고 이번엔 지영이 이모가 아영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현이랑 따로 왔어? 평소엔 같이 왔잖니. 혹시 둘이 싸운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은 내가 잠깐 일이 있어서 좀 더 늦었어."

그녀가 아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솔직하게 답하는 건 우리 둘 다 곤란해질 테니까 차라리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 쪽이 낫겠지. 역시 서아영이다.

"자, 그럼 아영이도 이리 들어와서 차라도 마시렴."

엄마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아영이와 지영이 이모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쳇,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는 건가, 어차피 난 안 마실 거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다.

나는 터덜터덜 2층, 내 방으로 올라와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폭신폭신한 느낌이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아아, 피곤해.. 그냥 잠이나 자버릴까..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창밖에 샛노란 달이 밤하늘의 중천에 걸려있을 때였다.

"으으.. 잠들어 버린건가."

오늘 잠자기는 다 글러먹었다. 시간을 보니 오전 12시, 한밤중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시간에 깨어버린 거야. 한심하다. 정말. 하지만 이미 자버린걸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겠지. 기왕 깨 버린거 베란다에 나가서 잠깐 노래나 듣다가 잘까?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에 이어폰을 꽂고 어제 새로 넣은 노래들을 재생시켰다. 이어폰 너머로 적당히 분위기 있는 선율이 흘러나온다.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내 방 베란다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별은 없네.."

실망스럽다. 도시에서 별이 안 보인단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다고나할까. 이런 밤엔 정말 별이 간절히 보고 싶은데.

그 때 마침 전에 넣어둔 별에 대한 노래가 떠올라 그 노래를 찾아 재생시켰다.

♪-

이어폰을 통해 부드러운 음색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매력적인 보컬의 목소리와 조금 특이한 곡의 멜로디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클라이맥스 부분이 재생되며 조금씩 곡의 분위기에 빠져들 때 즈음, 옆에서 무엇인가 날아와 내 머리를 툭하고 때렸다.

"응? 이게 뭐야."

받아보니 작은 지우개였다. 대체 누가 이런걸. 지우개가 날아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옆방 베란다에서 파자마 차림의 아영이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옅은 유록색 슬리브리스와 숏팬츠 파자마, 평소에 그녀에게 느낄 수 없었던 청순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뭐야."

"잠이 안 와서."

"네가 잠이 안 오는 거랑 나한테 지우개를 던진 건 대체 무슨 상관관계인데?"

"글쎄."

아영이는 건조한 대답을 던지고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잠시 후 잔잔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진짜 시간 빠르다.."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제멋대로 분위기를 좌지우지해버리고. 하지만 이 분위기에 차마 태클을 걸 수도 없어서 그냥 그녀의 말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으음.. 그렇네."

"내년이면 우리도 벌써 고3이고."

".... 후우, 그렇지. 끔찍하게도."

정말 끔찍하다. 엊그제 중학교를 막 졸업한 것 같은데 벌써 고3이라니, 이제 꿈도 희망도 자유도 없다. 누군가 오버한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미래가 캄캄한 내 입장에선 정말 끔찍하단 말밖엔 안 나올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다.

"응.. 그렇겠지? 고3은 끔찍할 거야.."

갑자기 아영이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더니 그녀는 어느새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생기 없는 갈색 머리칼이 지나가던 밤바람을 따라 그녀의 뺨에 몸을 부비며 부드럽게 춤을 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조금 걱정이 되던 참에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그녀를 불렀다.

"아, 맞다. 저기 말이지.."

"응?"

"낮에 그 '소원의 장소' 라는 건 대체 뭐야?"

"그, 그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응? 아니. 그냥 소원이라는 소재에 흥미가 생겨서."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지만. 일단은 아영이에게 그렇게 말해둬야겠지.

"그, 그건.. 그냥 떠도는 소문이야. 나도 그것밖엔 몰라.."

아영이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수그렸다. 조금 어두워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하는 걸로 봐선 방금 그건 분명 거짓말일거다.

뭐, 나도 먼저 거짓말을 해버렸으니 아영이에게 따질 생각은 없지만, 역시 아영이가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해져 버린건 그 '소원의 장소' 라는 곳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구나.."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역시 난 남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억지로 사실을 캐내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리 소꿉친구라도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응.."

아영이는 그제서야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쓴 미소를 짓는다. 그녀답지 않은 침묵, 정말 지금 내 옆에 서있는 서아영이 가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조용하다. 평소에 그토록 바랐던 얌전한 아영이인데도 왠지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우리 둘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머물렀고 때마침 마당 쪽에서 잔잔히 우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리도 들리고 정말 여름이구나. 그 때 문득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고 나는 곧바로 그녀를 불렀다.

"있잖아. 우리 여름 방학 시작하면 다 같이 바닷가로 놀러가지 않을래?"

바닷가다. 여름하면 바다고 바다하면 여름이다. 넓디넓은 바다를 보다보면 이 녀석의 우울한 기분도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고 게다가 수영복 차림의 여자 부원들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니까. 이런 걸 바로 '일석이조' 라고 하던가, 역시 난 이런 쪽으로 정말 대단하다. 혼자 흡족한 기분에 빠져 그녀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으로 정곡을 찔렀다.

"..., 변태."

윽. 설마 이번에도 내 속마음을 읽은 걸까? 하지만 나, 이번엔 꼭 그런 생각만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 구경하러가는 네 검은 속을 누가 모를까봐?"

"....,"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생각해 버린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역시 그런 거였어. 변태."

아영이가 뻔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와아, 이대로 가다간 정말 나 바다에 비키니나 보러가는 걸로 찍혀버리겠다. 본 취지는 그게 아니라고!

"아니거든. 그냥 가기 싫으면 가지마. 나도 딱히 가고 싶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니까."

거짓말 해버렸다. 그것도 어느 정도 정색까지 타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대로 가다간 본 취지 따윈 무시당해 버릴 테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 삐졌지? 속 좁은 남자."

사실 전혀 삐지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하게 정색타면서 거짓말해서 미안한데.

속으로 미안한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는데 순간 날 바라보는 아영이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

"...., 좋아.. 같이 가자. 오랜만에 바다가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는 아영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근래 들어 처음 보는 것 같은 맑고 푸근한 웃음이었다.

다행이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나도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희미하게 웃으며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을 때 눈앞에 반짝이는 무엇인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비눗.. 방울?"

정말로 비눗방울이었다. 그것도 탁구공만한 크기의 비눗방울이 까만 밤하늘 위로 수없이 날아오르고 있다.

"우와.."

아영이도 놀란 듯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다. 비록 밤하늘에 보이는 별은 없었지만 맑고 투명한 비눗방울들의 대행진은 별을 보는 것만큼의 감동을 우리 가슴속에 심어주었다.

"있지. 우리 소원 빌어볼래?"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별똥별도 아닌데 소원은 무슨."

그거야 그렇지만.

"뭐 어때? 이것도 이것 나름 별똥별만큼 보기 힘든 풍경이잖아?"

"...., 흥. 그럼 그러던지."

아영이는 퉁명스레 답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은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럼 나도.."

이런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어제 본 비눗방울의 풍경은 하루가 지난 오늘이 되어서도 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검은색 밤하늘에 흩어지는 투명한 비눗방울 알갱이들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그 늦은 시간에 누가 거기서 비눗방울을 불었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어서 좋았달까, 다음에도 그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녀석도 함께.


* * *


"어이,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냐?"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앞자리에 앉은 지우가 자세를 돌려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다..."

어차피 말해줘 봐야 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짜식, 가을도 아닌 한여름에 한껏 분위기 잡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거냐? 혹시 아영이한테 차이기라도 한 거야?"

푸웃,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지우는 나와 반대로 진지하게 걱정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묻고 있다.

뭐야 그 표정, 진심으로 있지도 않을 일 따위를 걱정해주지 말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남의 일에 신경 꺼. 그나저나 넌 어제도 데이트했냐?"

내가 화제를 돌려 묻자 지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젠 또 누구였냐?"

그냥 궁금해서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수현이."

수현이라면, 2살 연하라고 했던가. 그 발랄한 이미지의..

머릿속에 저번에 본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도 데이트 갈거냐?"

"당연한 걸 뭘 물어? 오늘은 주영이 차례. 근데 그건 왜? 혹시 미행이라도 하려고?"

날 친구 데이트나 미행할 만큼 한가한 녀석으로 보는 거냐, 솔로가 남의 데이트 구경하는 게 뭐가 재밌다고.. 오히려 심장이 거덜나서 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게 아니라 너 연극 문학부는 안 나올 거냐고."

"연극 문학부? 그게 어디.., 아아~ 맞다. 나도 거기 부원이었지. 참."

아예 부원이란 사실조차 전부 까먹고 있었던 거냐, 설마설마 했지만 대체 얼마나 우리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야. 이 녀석. 혹시 야구부까지 까먹고 안 나가 는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너, 그럼 야구부는 나가냐?"

"응. 그것도 당연. 나한테 야구는 여자만큼이나 중요한 거라고."

이 녀석이 야구에 어느 정도 열광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설마 야구가 여자만큼 중요하다고 할 줄이야. 지난 2년간 베스트 프렌드였지만 방금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럼 왜 연극 문학부는 까먹어버린 건데?"

이번엔 대놓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음... 그야, 거긴 나한테 무의미하니까."

지우는 지겹다는 듯 쓴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극 문학부는 이 녀석에겐 무의미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우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지우에겐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 애초에 부활동이란건 애정이 없으면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녀석에겐 아직 연극 문학부는 형식상 속해있는 부서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더 이상 녀석을 설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얼른 다른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 내 머릿속에 바로 다음 화제가 떠올랐다.

"맞다. 야, 너 혹시 '소원의 장소'라고 아냐?"

"'소원의 장소'?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수현이가 소원이 어쩌고저쩌고 말하던데.. 혹시 그건가?"

"응? 뭔데 얼른 말해봐."

저번엔 딱히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아영이가 조금씩 이상해지는 모습을 보다보니 왠지 그 '소원의 장소' 라는 곳이 마음에 걸린다.

"그게... 무슨 여름한테 소원을 빌면 된다고 하던데.."

여름? 혹시 내가 아는 그 사계절 중 하나인 여름을 말하는 걸까? 둘 다 소재가 소원인 점을 보면 그것과 '소원의 장소' 는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름한테 소원을 빌어? 그리고?"

"으... 나도 그거밖에 몰라. 짜식아. 그리고 징그러우니까 좀 뒤로가."

지우가 자신에게 바짝 들이민 내 얼굴을 뒤로 밀어내버린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앞으로 튀어나간 건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냐?"

지우가 이번엔 자기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응? 그냥.."

"흐음.. 아무래도 수상한데 이거."

지우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찬찬히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이내 흐흠,하는 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마 여자애들이라면 뭔가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자애들은 원래 그런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소문을 무지 좋아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짜식, 간만에 좋은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아는 여자가 연극 문학부를 빼면 전혀 없다는 점인가.

갑자기 뭔가 허무해진다. 내 나이 고등학교 2학년, 그 동안 아는 이성친구도 없이 뭘 하고 지낸 거지. 평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오늘따라 후회가 된다. 혼자서 신세타령을 하고 있자니 그 때, 스피커 너머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시간표를 보니 이번 시간은 국어, 점심시간 전인데 하필 제일 졸린 시간이다.

잠시 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자 수업은 바로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내 눈꺼풀도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벌써 한계인가. 아직 1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정신이 혼미하다. 역시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는 사람을 수면 상태에 빠뜨리는 엄청난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해... 하여튼 졸리다. 더 이상은... 무리.


* * *


"우왓, 초코 케이크!"

내 눈앞에 엄청나게 커다란 초코 케이크가 있다. 신이 나서 곧바로 케이크로 달려들어 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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