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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너무 없다!
글쓴이: 소이
작성일: 12-07-31 14:23 조회: 2,062 추천: 0 비추천: 0

여자가 너무 없다!



라그너 실보크는 결국 상자를 발견했다. 지하실을 샅샅이 뒤진 끝에 발견한 비밀문을 열고 끄집어낸 것이다. 그 지하실도 숨겨져 있었으니 이런 곳에 둘 물건이라면 어지간히 소중한 것이리라.

뭐가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라그너는 기대를 담아 상자를 확인했다. 내용물의 안전을 고려해 만든 상자였다. 낡았지만 견고한 재질에 크기도 크다. 기대감이 점점 커져간다. 다행히 상자는 잠겨있지 않았다.

탄약과 연료는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식량이라도 있다면.

일전에 숨겨진 군사기지의 지도를 얻어 그곳을 찾아갔던 라그너는 “이곳까지 도달하는데까지 네가 흘린 땀과 노력, 동료들과의 우정이 보상이다!”라는 쪽지만 발견할 수 있었다.

라그너는 기지를 폭파시켜버렸다. 동료들과는 총부림이 일어났다. 라그너는 그 이후 비밀공간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

. 덮개는 제법 육중한 무게였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식량, 식량, 식량!

라그너는 주문을 읊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라그너의 바람을 짓밟기라도 하듯 상자 안에는 넓적한 플라스틱 케이스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에에…….”

실망이 절로 터져나왔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다.

라그너는 상자를 닫고 지하실을 떠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천장의 균열로부터 들어오는 빛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본다. 코트는 먼지투성이. 치마 끝단은 살짝 찢어졌다. 라그너의 자랑인 금발의 포니테일은 완전히 헝클어져있다. 지하실은 부서진 석재와 철골로 가득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러워졌을 것이다.

무슨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헛수고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그너는 상자에서 케이스를 끄집어냈다. 케이스에는 딱 케이스 크기만한 종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는데, 어두워서 뭐라고 써져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세계… 사… 동… 생? 이건 무슨 마크지. 별?”

글자나 그림이 있지만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는 건 나가서나 가능할 것 같았다.

라그너가 케이스를 품에 넣으려는 순간 열려있던 지하실 문으로 누군가가 뛰어 내려왔다. 들짐승처럼 잽싼 몸놀림이었다.

“꼼짝마! 그건 내 물건이야!”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앙칼진 목소리. 하지만 우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라그너는 뒤를 돌아보았다.

빛을 등졌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인 것 같았다. 나이는 십대 초반 정도. 하지만 손에는 여행 도중에 진저리나게 보았던 물건이 들려있다.

권총이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어른 못지 않게 잔인한 법이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경험이 준 교훈이다.

소리가 들린 순간 무기를 꺼냈어야 했다. 라그너는 허리춤에 있을 총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권총은 라그너를 겨냥하고 있었다.

“손들어!”

일단 상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라그너는 아이의 지시에 따랐다. 아이는 얼굴에 미소를 띄고 라그너에게 다가왔다. 아이가 가까워짐에 따라 모습이 자세히 보이게 됐다.

누더기 같은 상의에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를 입고 있다.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티가 역력한 얼굴에서는 중성적인 인상이 느껴졌다. 다듬지 않은 붉은 색의 산발한 머리는 아이의 성별을 짐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물건을 넘겨!”

분명 총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라그너의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라그너는 직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엉터리 정보나 감각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덜 후회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원망하게 된다면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쪽이 나았다.

아이에게선 어린 살인마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어느쪽이냐하면 장난꾸러기 쪽이다.

“이 케이스 말이야?”

라그너는 케이스를 흔들어보였다. 아이의 눈이 귀중한 보물을 발견했다는 듯 반짝거렸다. 눈동자가 케이스를 따라간다. 문득 라그너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다.

라그너는 손을 높게 든 다음 케이스를 왼쪽으로 움직였다. 아이의 시선이 케이스를 따라 움직인다.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역시 마찬가지다. 먹을 것을 보는 강아지 같다. 다음에는 케이스를 빙글빙글 돌린다.

“으, 어지러…….”

케이스를 따라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아이는 현기증을 느꼈는지 휘청거렸다.

“……….”

사실 저 총도 가짜가 아닐까? 의심을 품은 시선을 느꼈는지 아이는 버럭 화를 냈다.

“뭐, 뭐하는 짓이야! 빨리 케이스를 내놔!”

“흥, 글쎄다.”

아이가 케이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라그너는 무기를 꺼내두었다. 총기는 아이의 머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흐갹!”

자신의 머리를 겨눈 총구에 아이는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고 자신의 총을 꾹 부여잡았다. 하지만 손이 떨리고 있다. 아이는 서로 총을 겨누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는 상대방이 무기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어, 에, 으음. 저기, 그러니까.”

“안됐지만 강도짓이라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라그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라그너보다 머리 한 개 크기는 작은지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라그너를 노려보는 것이 우습기 그지 없었다.

더군다나 노려보는 정도로 가진 물건을 내놓을 정도라면 진즉에 황무지에서 죽었을 것이다.

“저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안 치워?”

라그너는 케이스를 쥔 손으로 총을 가리켰다.

“우, 으, 그, 그 물건은!”

“그 물건은?”

“그……”

아이는 잠깐 숨을 들이키더니,


“세계에서 정말 사랑해! 여동생 너무☆좋아!는 내 꺼란 말이야!”


“뭐?”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아이의 말에 라그너는 당황했다.

세상에서 정말 사랑? 여동생 좋아? 그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이야.

마침 케이스로 빛이 비춰지고 있었고, 라그너는 종이에 인쇄된 글자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정말 사랑해! 여동생 너무☆좋아! 초회 한정판 DVD]

분홍색의 둥글둥글한 글씨 아래로 여자아이 그림이 있었다.

‘아마도’ 여자 셋.

그림 속의 여자아이는,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머리는 기이할 정도로 컸다. 더군다나 머리카락이 형형색색이다.

가슴 부분이 유별나게 돌출된 것은 여성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걸까? 하지만 라그너에겐 가슴이 있어야 할 부분을 소형 폭탄이 채우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라그너가 봤던 인간 여성의 가슴은 저렇게 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저 그림이 인간 여성을 그린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피폭됐다면 이렇게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납득하게 됐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정말 사랑해! 여동생 너무☆좋아! ……는 무슨 뜻일까.

라그너의 동요로 총끝이 흔들렸다. 아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내놔!”

아이가 라그너에게 달려왔다. 라그너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너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구나!”

아이의 이름은 미우였다.

기세 좋게 달려든 미우는 단박에 제압당했다. 급습해봤자 라그너가 이기지 못할 리 없다. 체구도 경험도 라그너가 위였다.

하지만 라그너는 ‘세상에서 정말 사랑해! 여동생 너무☆좋아!’ 같은 글자가 써져 있는 물건은 조금도 탐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종의 혐오감이 든 나머지 미우를 제압하고 난 다음 케이스를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미우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결국 헛수고를 했다셈치고 도시로 안내해주는 대가로 미우에게 넘기기로 했다. 미우는 대단히 감격했는지 케이스를 소중하게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 말에 미우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라그너를 보았다.

“몰라? 정말?”

“어.”

라그너의 말이 끝나는 순간 미우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설명해줄게…… 설명해줄게…… 설명해줄게……

라그너는 미우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는 채 하고 싶어하는 게 완전히 어린애다. 라그너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알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자, 그럼 어디서부터 말해볼…… 어?”

“알고 싶지 않다고.”

“어째서어어어어!”

미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괴물 같은 그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장을 봤을 때 모르는 게 나아.”

“괴물이 아냐!”

미우는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저 케이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소중한 물건일 것이다.

“자, 자세히 봐. 어두워서 제대로 못 본 게 틀림없어.”

그러면서 케이스를 라그너에게 들이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해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는지 거리낄 것 없는 태도였다.

라그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혼자 황무지를 방황하더라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친하게 군다.

라그너의 삶에서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이 지방은 이토록 평화로운걸까.

“왼쪽에있는애는민지란애야고아가된걸주인공네부모님이거둬줘서함께살게된애인데자신이얹혀산다고생각해서주인공을오빠라고못부르는마음이여린애야가운데있는애는사유라고하는데주인공의동생이지만친동생은아냐피가이어지지않아서오빠를좋아하는자신의마음을깨닫고는매일밤을눈물로지새운다고오른쪽애는유림이라는애인데사실은마법…….”

미우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뱉었다.

미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일종의 소설 같은 것이고 저 그림은 삽화인 건가?

라그너는 전자기기나 그와 관련된 물건은 다뤄본 적이 없지만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미우가 가지고 있는 케이스 속 물건이 그와 흡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라그너는 소설을 좋아했다. 많이 읽을 수는 없었지만 같은 책을 스무 번이나 넘게 읽은 적도 있다.

라그너는 미우가 말해준 배경설정을 생각하며 그림을 보았다.

………

여전히 괴물들이 있었다.

안면의 절반이 눈이다. 눈깔괴물이다.

라그너는 혼란에 빠졌다. 효과는 굉장했다.

“저기, 듣고 있어?”

그 뒤로도 미우는 ‘여동생 너무☆좋아’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라그너의 귀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라그너는 즉답했다.

“아니, 전혀.”

“그럼 좀더 자세히 봐!”

그러면서 미우는 자신의 몸을 라그너에게 바짝 붙였다. 라그너는 그림이 보기 싫어 몸을 빼버렸고, 그와 동시에 미우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꺅!”

미우는 라그너의 품에 뛰어든 꼴이 되었다. 잠시 라그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미우는 화들짝 놀라며 라그너에게서 떨어졌다.

얼굴은 완전히 빨갛게 되어 있었다.

“와…….”

미우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라그너는 마치 여자아이 같아.”

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미우가 했던 수많은 발언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라그너였지만 이 말만큼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라그너는 자신의 복장과 머리카락을 점검했다.

어깨를 넘는 길이의 금발은 포니테일 형태로 묶고 있다. 이렇게까지 기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머릿결은 누구보다도 좋다. 관리도 꾸준히 하고 있다.

비록 코트를 입고 있다지만 치마를 입고 있는 것도 충분히 볼 수 있고 가슴도 크지는 않지만 나올 부분은 확실하게 나와있다. 즉 스타일도 나쁘지 않다.

얼굴은,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들이 봤을 때 자신은 ‘쿨하고 뷰티한 여자아이’일 것이다. 라그너는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저기, 방금 그 말 무슨 의미야?”

어린아이에게는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통찰력이 있다는 건가? 라그너는 자신의 ‘직감’과 같은 것이 이 말괄량이에게도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미우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솔직하게 말해도 될 일이다. 기를 쓰고 숨길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미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외였다.

“에? 아, 미안! 라그너는 충분히 훌륭한 남성이야! 그렇지, 마초, 마초맨이야!”

‘마치 여자아이 같다’ 발언 다음에는 ‘마초맨’.

어째서인지 방향이 완전히 엇갈린 기분이었다. 여자아이와 마초맨은 비슷한 존재였던가? 라그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절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 직감이 아니어도 이건 아니다. 아닌 건 아니다.

이렇게까지 꾸미고 다니는데 여자 같지 않다, 마초맨이다, 라는 소리를 듣자,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라그너는 오기가 생겼다.

“잠깐, 꼬마야.”

“꼬마가 아니야. 미우야. 뮤라고 해도 좋고.”

“꼬마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라그너는 한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가슴을 강조해보이도록 자세를 취했다. 나름대로의 필살기다.

뇌쇄포즈 넘버 쓰리. 넘버 원은 너무 강력하고, 그리고 너무 수치스러워서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이걸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음, 여자아이?”

미우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뭘까?”

“……….”

미우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라그너는 잠자코 기다려줬다.

몇분 후 미우는 갑자기 깔깔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그너가 여자아이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내가 여자아이일 리가 없지.

라그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되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야?”

“왜냐하면.”

미우는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


너무도 상쾌하게 단언했기에 라그너는 “그렇지. 여자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라고 긍정할 뻔 했다.

“자, 잠까…….”

라그너가 말을 꺼내는 순간 미우가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봐! 멀지 않았어!”

멀리 능선 너머로 황폐화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층 건물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도시 전체가 음침한 회색빛이었지만, 군데군데 불빛이 보였다.

반은 죽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도시다.

원래 미우와는 도시에서 작별할 작정이었지만 새로운 지방에 대해 라그너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미우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상식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문구가 쓰여진 소설(?)에다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는 발언까지.

단순히 미친 계집아이로 생각하면 끝날 일이지만, 라그너의 직감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좀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라그너는 한숨을 쉬며 미우의 뒤를 따라갔다.



라그너는 도시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했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로지 외관 뿐이었다.

무장한 경비병이 노려보는 일은 없었다. 신분을 증명하거나 소지품을 검사당하지도 않았다.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이 제법 있었고 무장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드문드문 늘어선 가판에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모습이 보였다.

미우는 신이 났는지 케이스를 안은 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라그너는 외지인이야?”

“빨리도 묻는다.”

도시까지 안내해달라고 했을 때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우는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라그너는 공화국을 떠올렸다.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난민은 노예가 되던가 외벽에 교수형당하곤 했다. 이 지방은 그런 면에서 공화국보다는 나은 듯했다.

“다른 곳에서 왔어. 이곳은 처음이야.”

“아, 역시!”

미우는 잠시 손가락을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라그너는 일자리가 필요한 거야?”

“그런 셈이지.”

“그럼 ‘마담’에게 소개시켜줄게! 라그너는 분명 좋은 여자남자아이가 될 수 있을 거야!”

‘마담’. 라그너는 그 뜻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추측해볼 수 있었다. 아마 미우를 지원하는 인물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여자남자아이는 뭘까.

라그너는 미우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곧 ‘마담’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미우가 한 정체불명의 발언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주면 고맙겠어.”

“‘반납’을 도와줬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다시 라그너보다 앞서나갔다. 미우의 뒤를 잠자코 따르던 라그너는 불현듯 거리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의 반응. 지금까지 몇 개나 되는 도시와 마을을 거쳤고 최소한 한 번은 자신에게 수작을 거는 얼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라그너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보내며 피하는 기색이었다. 자의식과잉일지도 모르지만 라그너는 아니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또 미우가 했던 말.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가 사실로 느껴질만큼 여자가 적었다.

아니, 없었다.

거리에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근육질의 남자, 털복숭이 남자, 갸름한 인상의 남자, 키가 큰 남자, 키가 작은 남자, 불길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 남자, 남자!

오로지 미우만이 이 거리를 걷고 있는 여성이었다.

라그너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저기, 꼬마야.”

라그너는 미우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꼬마야?”

여전히 대답이 없다.

“미우야?”

“왜?”

꼬마라고 불렸던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우릴 보는 시선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라그너는 어떤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남성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하며 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인간 쓰레기, 변질자, 변태를 보는 시선…….

라그너는 살짝 상처를 입었다.

“우리가 ‘마담’네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래.”

그렇다면 ‘마담’이라는 사람은 어지간히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듯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저런 시선이라니. 하지만 덤벼드는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마담’의 힘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질문. 왜 거리에 여성이 아무도 없는 거야?”

“말했잖아. 여자아이는 이 세상에 없는걸.”

또 이 대답이다.

라그너는 공화국에서 많은 여성들을 보았다. 차라리 남성인 게 나을 것 같은 이도 있었고, 온실 속 꽃마냥 다소곳한 이도 있었지만 어쨌든 다 여자였다. 공화국을 떠나 남하할 때 보았던 도시나 부락에도 여자는 있었다.

더군다나 미우는 여자아이가 아닌 걸까. 라그너가 보기에 미우는 꽤 귀엽게 생겼다.

살짝 탄 피부에 빨간 머리, 허벅지가 드러나는 숏팬츠. 미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활기 있는 미소녀다. 가슴은 나와있지 않지만 아직 성장기인 어린아이니까 얼마든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라그너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너는 여자아이잖아?”

“라그너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나는 남자아이야.”

“……….”

즉답했다. 미우가 그저 좀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일 수도 있었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여자아이 같은 목소리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라그너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 같이 생긴 남자아이가 정말로 남자아이인지 확인하는 방법. 라그너는 자신으로서는 꽤 그럴듯한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만져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미우를 보았다. 미우는 라그너의 시선을 깨닫고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다. 죄악감이 샘솟는다. 라그너는 나름대로 건전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라면 남자아이인거겠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곧 마담의 가게가 나올 거야.”

도시는 여느 도시처럼 파괴되어 있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희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열심히만 일하면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리라. 확실히 공화국보다는 좋은 곳이다.

라그너는 ‘마담’이라는 사람에게 신분을 의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라면 머물러도 좋겠지. 두 달이 넘는 여행은 몹시 지치는 일이었고 식량도 바닥났다. 어차피 라그너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십여 분 후에 도착한 곳은 네온등이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이었다. 네온등은 치렁치렁한 의복을 입은 여자의 형상이었는데, 라그너는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네온등은 공화국에서도 지배계층이나 사용할법한 기술이다. ‘마담’은 높은 지위에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미우 같은 아이가 따르는 것으로 보아 악인은 아닐 것 같았다.

네온등 위쪽에는 고풍스러운 글씨체의 간판이 있다.

[여자아이의 길]

의미불명이다.

“어머, 미우야.”

입구 앞에서 서있던 여성이 미우에게 아는 채를 했다. 여성은 20대 초반의 미인이었다. 정갈한 드레스를 입고 입구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라그너는 안심했다. 거리에 여자아이가 없었던 것도 신경이 과민한 나머지 착각을 하고 만 것이겠지. 라그너는 그렇게 납득하기로 했다. 미우가 마가릿을 알아보더니 반갑게 달려들었다.

“마가릿 !”

이라니. 못된 아이네. 여기서는 언니라고 부르랬잖아.”

품에 뛰어든 미우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타이르는 마가릿.

“네! 마가릿 언니!”

“……….”

라그너는 눈을 비볐다.

“안녕하세요. 미우의 친구인가요?”

마가릿이 라그너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후광이 비추는 듯한 미소였다.

긴 머릿결에 풍만한 가슴, 단정한 얼굴. 마가릿은 라그너가 지금까지 봤던 여성의 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미인이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남자아일 리가 없잖아! 라그너는 마가릿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우의 머릿속에는 언어적인 장애도 있는 것 같았다. 가엾은 아이.

“라그너 실보크라고 합니다. 마담을 만나러왔습니다.”

“마담은 지금 안쪽에 계세요.”

그렇게 말한 마가릿은

“라그너 씨는 일자리를 구하러 오신 건가요?”

하고 물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라그너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다. 라그너의 남하하면서 가진 것을 식량과 연료로 바꿔버렸다. 돈은 한 푼도 없고 설령 가지고 있더라도 이곳에서 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거라곤 권총 한 정과 약간의 육포가 다다.

“예.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어머! 잘 됐어요! 라그너 씨 같은 미인이라면 인기가 아주 좋을 거에요!”

인기가 좋을 거라는 말을 라그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기에 라그너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윽고 입구가 열렸고, 미우가 뛰어들어갔다.

“마담!”

자, 드디어 마담이다. 이 지역을 지배하는 실세 중 하나일 ‘마담’.

첫 만남인만큼 좋은 인상을 주자.

그렇게 생각한 라그너는 미우가 ‘마담’이라고 부르며 뛰어가는 대상을 보았다. 거기에는 엄청난 근육질에 구릿빛으로 피부를 그을린 마초게이가……


라그너는 복부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공격당했나?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라그너, 괜찮아?”

어린 소녀의 목소리. 아, 미우다. 자신이 길안내를 부탁했던 아이다. 라그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던 것 같았다.

통증은 곧 사라졌다. 라그너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미우에게 말했다.

“아, 괜찮…….”

미우는 꽤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 미우의 옆에는, 근육의 마초게……


라그너는 눈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불쏘시개로 양 눈을 쑤셔진 느낌이었다. 비명을 지를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라그 너는 이를 꽉 물고 끅끅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담! 라그너가 이상해요!”

“아, 아냐. 괜찮아!”

이제부터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할 마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라그너는 눈물을 훔친 다음 미우와 그 옆에 있는 마ㅊ……

라그너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귀여운 애잖아. 무슨 일이니?”

걸걸하고 거친 중년 남성의 목소…… 아니, 보통 중년여성의 목소리였다. 미우의 옆에는 마ㅊ…… 가 아니라 그냥 근육이 좀 우람하고 키가 2미터는 넘어보이는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보이는 검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남…… 아니 여성에게서는 요염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마담’. 라그너는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길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라그너는 그렇게 말하고 건물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때 미우가 말했다.

“라그너는 일자리를 구하러 왔어. 마담이 라그너를 고용해줘!”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저는 갈 길이 바빠서.”

순간 라그너는 어깨가 떨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마담의 손이 라그너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마담과는 몇 미터나 떨어져있을 터였다. 엄청난 속도. 여러 가지 의미로 라그너는 전율했다.

“젊은 아이가 왜 성질이 그렇게 급해서야 쓰겠니. 이야기 할 시간도 없어?”

어깨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라그너는 손을 뿌리치고 권총을 뽑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다음은? 자신은 피떡이 돼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라그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와! 잘 됐어. 라그너! 분명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라그너의 속은 모르고 미우가 환호성을 질렀다. 라그너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두 달 전 라그너는 남하하기로 결정했다. 남쪽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쪽이나 서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공화국에서의 삶에 진저리가 났고 태평양 전선이나 중앙 제국도 공화국처럼 진흙탕일 게 뻔했다.

짐은 많았지만 떠날 때는 바이크가 있었다. 보조차에 짐을 싣고 라그너는 떠났다. 목적지는 없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부락은 적어졌고 길은 험해졌다. 피폭지 세 곳과 약탈자 소굴 두 곳을 거쳤다. 바이크를 포기할 수 없어 여러번 우회했지만 연료가 떨어지고 나서는 미련 없이 버렸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고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식량이 거의 떨어지고 마실 물도 바닥을 보일 때에 라그너는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길가에 거적마냥 쓰러져 있었고, 죽어가고 있었다. 라그너는 노인의 임종을 지켜주었다. 라그너가 친절해서라기보다 근처에 마을이 있다면 그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인은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두고 왔다’는 말과 함께 약도를 주었다.

망령든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라그너에게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그너는 약도를 지침으로 폐허로 향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케이스와 미우를 보게 된 것이다.

라그너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마담에게 설명했다.

마담은 건너편 소파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라그너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흐응.’이나 ‘응.’ 같은 콧소리를 낼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라그너는 마담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마담은 팔짱을 킨 채 두 눈을 감고 있었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서 미우와 마가릿이 장난을 치고 있는지 꺅꺅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초게……와 같은 방에서 마주앉아 있다는 것으로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라그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눈치를 살폈다. 그때 마담이 눈을 뜨며 말했다.

“감동적인 이야기네!”

마담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라그너에게 육박했다. 두 팔은 활짝 펼친 채.

“이리오렴! 누나가 안아줄게!”

라그너는 위압감과 공포를 느꼈다. 1년 전 황무지를 방황하다가 백 여 명이 넘는 약탈자 무리에 포위되었을 때에 느낀 이래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마담은 라그너를 넓고 울퉁불퉁한 가슴으로 꼭 껴안았다. 라그너는 비명을 질렀다.

“놔! 놓으라고! 나는 그런 취향이 아냐!”

마담의 넓고 강인한 어깨는 라그너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라그너의 얼굴은 구릿빛 대흉근에 푹 파묻혔다.

참을 수 없었던 라그너는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고 외쳤다.

“그만해! 이 마초게…….”


그리고 세상은 멸망했다.


라그너는 소파에 앉은 채로 정신을 차렸다. 전신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기억에 혼선이 있는 듯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무서운 일을 당했다는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멋진 이야기였어.”

건너편에 앉은 마담이 말했다. 어지간히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라그너는 기시감을 느꼈지만 넘기기로 했다.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 여행이라니. 정말, 요즘 아이들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겠네.”

성정체성?

라그너는 그 단어에 불쾌감을 느꼈다. 이야기의 핀트가 엇나가고 있었다.

“성정체성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였습니마는.”

“어머, 아니었니?”

“예.”

“이상한데…….”

마담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럼 소년은 왜 여장을 하고 있니?”

그렇게 물어왔다. 역시 간파하고 있었다. 하긴 마담 스스로 ‘여장’을 하고 있을 정도니 눈썰미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그너에게 있어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개인사정입니다.”

딱 잘라 말했다.

“개인사정이라니 어쩔 수 없네. 하긴 누구에게나 개인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마초게……를 마담으로 만들었을 개인사정이 궁금해졌지만 대신 라그너는 더 중요한 것들을 묻기로 했다.

“제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마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미우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신경쓰이는 게 있었습니다. 여자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마담이 입을 다물었다. 라그너는 마담의 얼굴색을 살폈다.

“역시 미우는 정신이…….”

가엾게 됐다. 미우는 정신이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납득하려는 라그너에게 마담이 말했다.

“라그너 군이 온 곳에는 여자가 있었니?”

라그너는 마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가 있었냐니. 라그너는 잠깐 생각한다음 질문을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 있었습니다만.”

“흐응. 그래.”

마담은 잠시 뜸을 들였다. 라그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담을 지켜보았다.

“이곳에는 말이지. 여자아이가 없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라그너가 되물었다.

“말 그대로란다. 이 도시에는 여성이 없어.”

마담은 설명했다.

대전 이후 인류의 삶은 급격히 악화됐고, 그것은 이 도시도 피해갈 수 없었다. 계속된 전투와 화학탄, 핵오염 등은 도시를 오염시켰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 지방은 북부에 비해 파괴가 심한 편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이상이 발견된 것은 십 수 년이나 지난 후였다. 여성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급감했다. 여성들만 걸리는 병이 돌았고, 몸이 쇠약해져 죽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원인도 해결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지방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 거란다.”

라그너는 마담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그렇다면 미우는요? 그 아인 분명 여자아이였습니다.”

“남자아이란다.”

그 말은 미우 본인이 한 말이기도 했다. 라그너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마가릿 씨는요? 아무리 봐도 여자였습니다!”

마담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손뼉을 쳤다. 문을 열고 마가릿이 들어왔다.

“마담, 부르셨나요.”

“마가릿 양. 잠시 스커트를 올려보지 않겠니?”

마담의 말에 마가릿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마, 마담! 손님도 계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마가릿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라그너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왜 이 지방 사람들은 다 정신이 좀 이상한걸까. 마담은 망설이는 마가릿을 부추겼다.

“마가릿 야앙. 내 말이 들리지 않니?”

“흑! 마담, 너무하세요.”

눈물을 글썽이는 마가릿. 라그너는 마담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그너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마가릿이 천천히 스커트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는 마가릿의 스커트. 니삭스 위로 보이는 마가릿의 허벅지는 뽀얀 하얀색이었다. 하얀 피부 위로 혈관이 도드라져보였다. 스커트가 올라가며 허벅지 위쪽 살결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라그너의 머릿속에서는 막아야한다는 생각만 맴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렸다.

그리고 스커트가 다 올라갔다.



라그너는 죽기로 작정했다.


“라그너 군에게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

라그너는 대답이 없다.

“이 생선 보이니? 암컷인지 수컷인지 모르겠지? 그런 것 아닐까. 겉모양이 어떻든 맛만 좋으면 되는 거야.”

마담은 방 한켠의 수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그너는 대답이 없다.

“나로서는 라그너 군, 아니 양이라고 해야하나? 라그너 양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단다. 보다시피 우리 가게는 여자가 없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여자아이의 꿈과 희망’을 모두에게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지. 라그너 양 같은 미인이라면 분명 한 달 안에 마가릿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라그너는 대답이 없다. 단순한 시체인 듯하다.

“흐응.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 자, 마가릿 양! 라그너 양을 2층으로 데려가렴. 드레스가 무척 어울릴 것 같구나.”

마가릿이 라그너에게 다가왔다. 라그너의 팔을 잡아끌며 마가릿은 작게 속삭였다.

“라그너 양. 우리 함께 여자아이의 궁극을 찾아봐요.”

여자아이의 궁극… 궁극…… 궁극……… 궁극…………

그 말이 라그너의 머릿속에 맴돌았고, 라그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나는 변태가 아냐아아아아!”

라그너는 절규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마담의 집무실을 나서자 미우가 이상한 표정을 한 채 서있었다.

“라그너? 왜 그래?”

그 순진무구한 눈빛이 라그너에게는 너무 따갑게 느껴졌다. 온 세상에 변태, 나도 변태, 너도 변태, 모두가 변태. 라그너의 윤리관은 휘몰아치는 변태의 폭풍을 버틸 수가 없었다.

라그너는 미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라그너?”

“가자! 여기는 변태 소굴이야!”

라그너는 미우와 함께 마담의 가게를 줄행랑쳤다.



미우가 더 달릴 수 없게 될 때까지 라그너는 달렸다. 미우는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르면서도 라그너에게 질문을 했다.

“헉헉. 헉. 라, 라그너. 후우. 무, 무슨 일이야?”

라그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저, 저기는 안 돼. 아니야. 저런 곳에서 일할 수는 없어.”

그리고나서 계속 숨을 골랐다. 긴 여행 이후 겪은 긴장과 당황으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간신히 진정이 되자 라그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통행인이 라그너와 미우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혐오를 담아, 누군가는 넘쳐나는 애욕을 담아.

라그너는 소름이 돋았다. ‘마담네 사람’이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여장한 것을 알고 있던 동료는 자신을 저런 시선으로 보았던 것일까. 라그너는 이제까지의 삶을 후회했다.

“마담이 고용해주지 않은 거야?”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미우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저런 변태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이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미우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미우는 적어도 여장을 하고 있지는 않아보였다. 그렇다면 구제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구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그너는 자신의 차림새를 다시 보게됐다.

스커트는 밑자락이 살짝 찢어져 허벅지가 드러난다. 긴 머리에 가슴은 살짝 나와있다.

“끝장이야.”

구제할 여지가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라그너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괜찮을 거야. 쓰담쓰담.”

미우가 라그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냥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라그너는 당장 갈 곳이 없지? 그럼 우리집으로 가자.”

뜻밖의 말에 라그너는 감동을 받았다. 이런 변태에게 저런 마음씀씀이라니. 라그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으로 힘이 너무 들었다. 더군다나 정신적 충격이 컸다. 일단 어디로든 가서 쉬고 싶었다.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거야.”

미우의 집으로 가는 동안 미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라그너에게 해주었다. 미우는 마담이 돌봐주긴 하지만 지금은 독립해서 따로 사는 듯했다. 마가릿은 화가 나면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라그너는 이 지방에 다른 도시가 있나 물어봤다. 남동쪽과 정남쪽에 각각 한 군데씩 있는 모양인데 하루만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어찌됐건 이 도시에서 당분간 생활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단 미우의 집에 도착하면 머리부터 자르, 아니 머리는 놔두자. 대신 모자를 쓰면 되겠지. 그리고 바지를 입자. 치마는 평생 입지 않으리라.

심부름꾼 같은 일로 시작해보자.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니까. 그리고

마담네 가게로는 다시 가지 말자.

“라그너는 일자리가 필요한 거였지?”

앞으로의 생활을 구상하는데 열중하던 라그너에게 미우가 말을 걸었다. 마담을 찾아갔던 것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렇겠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말처럼.”

“그럼 말이야. 미우가 고용해줄게!”

분명 고용해준다는 말은 낙담한 라그너를 격려하기 위해 했을 말일 것이다. 라그너는 힘없이 웃었다.

“미우는 무슨 일을 하는데?”

그 말에 미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미우는 포주야!”

“……….”

라그너는 마담을 저주했다. 애한테 무슨 말을 가르친 거야.

“그건 마담이 하는 일을 말하는 거겠지.”

“아냐! 미우는 훌륭한 포주인걸.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

“그럼 포주가 무슨 뜻인지 알아?”

분명 얼토당토 않은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라그너는 생각했다.

“여자들을 팔고 관리하는 사람이야!”

“……….”

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 하지만 여자는 없다고 말했잖아? 그럼 팔 물건이 없는 거잖아.”

“아냐, 미우는 여자아이를 팔아.”

그렇게 말한 미우는 멈춰서더니 허름한 건물을 가리켰다. 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미우는 망설임 없이 건물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벽에는 금이 가고 계단에는 부서진 돌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계단 끝에는 육중한 문이 있었다. 미우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겼다.

“미우가 파는 건 말이지.”

문이 열리며 내부에서 빛이 쏟아져나왔다. 라그너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벽에는 종이가 붙어있다. 색이 좀 바랬으나 노골적인 원색, 글자를 강조하는 구도의 그림이었다. 그 내용은.


눈깔괴물이 얼굴을 들이대고 미소 짓고 있는 그림 [일편단심! 소꿉친구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 눈깔괴물 여럿이 남자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 [내 여자친구가 인간☆실격일 리가 없어!], 모포를 둘러쓴 눈깔괴물이 수줍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림 [손만 잡고 잔 게 아니니까! 책임 꼭 져야해☆].


“전자계집이야!”

미우가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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