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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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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대단한 곳에 와 버렸습니다!
글쓴이: Aranlike
작성일: 12-07-31 06:44 조회: 2,646 추천: 0 비추천: 0

0.

차가운 공기 아래 모자를 쓴 남자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볼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나와 마주친 시선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연이 아니다. 대략 3분 전쯤부터 나는 그의 행동에 내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채 이곳에 들어왔지만 나는 냄새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인식 한 후부터 그의 발걸음, 호흡,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의 움직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힘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이 시간 나의 임무다.

나는 재빠르게 그 남자가 앉아있는 위치를 파악했다.

앞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부터 두 번째. 39번이다.

나에게는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하지만 위치를 파악한 이상 그의 모든 것은 내 손에 들어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몇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정보들이 올라왔다. 그는 처음이 아니었다. 확인 된 것만으로도 두 번째. 그리고 지금 그는 세 번째를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면서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아주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그의 손이 입을 향하는 순간, 다시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빠르게 입으로 향하던 손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보았다.

자비는 필요없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그가 받게 되는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39번자리 이윤호씨. 음식물 반입 금지입니다. 이걸로 세 번째시네요.”





1.

기말고사가 끝나가는 학교의 컴퓨터실은 평소와 다르게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굳게 닫힌 창문 안쪽의 컴퓨터실은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가득 차 있었고 밖에서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은 쳐다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이글거리는 열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시험 때문인지 살을 태울 것 같은 태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운동장에는 걸어가는 학생 한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쯤 모두들 시험을 끝내고 자유를 외치며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났…을 리가 있나.


토익 930점 이상.

대기업 주최 봉사활동 또는 국토대장정 활동이력.

각종 공모전 수상이력 또는 행사 참가이력.

전 학기 성적이 바닥이라면 계절학기 수강.


대학생들이 방학 때 노는 거 봤나.

놀고 있다면 둘 중에 하나다. 아주 잘나서 이미 저런 스펙 정도는 쌓아두었거나 아니면 미래를 포기했거나.

대한민국의 대학생이라면 기말고사가 끝남과 동시에 유명 학원들의 토익 수업은 기본이요 형편에 따라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전 학기의 성적이 처참했던 학생들은 어떻게든 계절학기 에서라도 학점을 만회해 보고자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취업시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기 위한 각종 공모전과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그리고 나는…

“미안, 좀 늦었지?”

“많이 늦었습니다.”

내 대답에 다음 알바였던 선배는 머쓱했는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 오후는 아무런 알바도 없었기에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나는 내 시간이 다 되자마자 가방을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도 남았고 어차피 인터넷에서 볼 것이 있었으니 남아 있었을 뿐이다.

“이건 뭐야?”

관리자 테이블 한쪽에 있는 검은 비닐봉투를 가리키면서 선배가 묻자 나는 그것을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까 어떤 학생이 삼각김밥 먹다가 걸렸어요.”

“…또 잡아냈냐? 눈도 좋아.”

“눈이 아니라 냄새로 안 겁니다. 참치 마요네즈도 냄새가 나는 판에 무슨 배짱으로 전주비빔밥을 들고 들어오는지. 게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안 들리게 하기 위해서 포장도 벗겨서 화장지로 싸들고 왔더라구요.”

“그냥 먹고 들어오면 될 덴데. 너도 좀 봐주지 그랬냐?”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말하는 선배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나는 대답했다.

“청소 이모님이 한번만 더 컴퓨터실에서 음식물 쓰레기 나오면 학생관리처에 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배도 근로장학생 짤리기 싫으면 감시 좀 잘 하세요.”

청소 이모님이라는 말에 선배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긴, 선배는 저번에 컴퓨터실에서 왜 자꾸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냐며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라는 청소 이모님께 너무 깐깐하게 구시는거 아니냐고 말 했다가 빗자루로 허리를 강타 당했지. 교내 폭력이라고 신고하겠다고 하는 선배에게 이모님은 ‘할 테면 해봐라, 내가 이사장 동생이다!’라고 외치며 패기롭게 컴퓨터실을 나가셨다. 자기가 잘못한 것 때문인지 이모님의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선배는 이모님의 말이라면 군소리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저기….”

보고 있던 인터넷 사이트를 닫고 일어서려는 순간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프린트 좀 하고 싶은데요.”

“…학생증 주세요.”

좋은 향기가 났다.

여름에 어울리는 상쾌한 향기는 학교의 수목원을 지날 때 맡을 수 있었던 숲의 향기와도 비슷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여학생은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경영학부의 1학년 학년차석, 그리고 경영학부의 꽃, 또는 여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묶지 않고 그대로 내린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거리고 있었으며 작은 얼굴에는 어떻게 다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로 큰 눈이 깜빡거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TV속 여자 아이돌보다 더 하얀 피부에 살짝 홍조마저 띠우고 있는 볼은 보고있는 나 마저도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게 만드는 신기함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미모로 이미 교내에 소문이 자자한 경영학부의 여신이었다

정소라.

그 이름이 적힌 학생증을 건네받은 나는 프린터 옆의 카드리더기에 학생증을 긁었다.

-삐익!

짧은 경보음이 들리고 모니터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월 프린트 횟수 한도초과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학생증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월 한도 초과시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건네는 학생증을 돌려받은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마도 아직 한도가 남아있을 친구를 찾는 것 같은데…나는 슬쩍 손을 뒤로 돌려서 내 지갑을 잡았다. 나는 아직 한도가 한참 남아있을 것이다.

“내꺼 쓰세요!”

그때 내 등 뒤에서 어느 새 선배가 자신의 학생증을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써도 될까요?”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선배가 건네는 학생증을 잡은 그녀의 얼굴에는 누가 보아도 미안하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곤란해 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섞인 미소는 학생증을 건넨 선배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조금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이죠, 어차피 전 프린트 제한까지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 말고 쓰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 맞다….”

허리 숙여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더니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돈을 드릴수도 없고…괜찮다면 받아주세요.”

뽑은 지 얼마 안 된 캔 커피였던지 캔의 겉에는 송글송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선배는 귀까지 걸리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가면서 그녀가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뭐 이런 걸 다….”

“아니예요, 학생증까지 빌려주시는데 드릴게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하네요.”

말과는 다르게 냉큼 그 캔 커피를 받아든 선배는 차가운 캔 커피를 얼굴에 가져다대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진짜 시원하네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도 뭔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너무나 이 이후의 전개를 만들고 싶어하는 선배의 몸부림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때 컴퓨터실의 뒷자리에서 또 다른 여학생이 일어나 관리자 책상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도 프린트 좀 해야하는데….”

깊게 눌러 쓴 야구모자,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검고 두꺼운 뿔테안경이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긴 생머리는 검은 머리끈으로 질끈 묶인 채 야구모자 뒤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더운 여름이었건만 목이 조금은 늘어난 것 같은 검은 박스티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옆을 보니 선배는 소라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학생증을 받아들어 리더기에 읽힌 후 모니터에 허리를 숙인 채 바라보았다.

“남은 프린트 가능매수가 15장이시네요.”

“…두장만 더 할 수 없을까요?”

“곤란해요. 특정 학생에게만 편의를 봐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여학생 역시 곤란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역시 소라처럼 아는 학생은 없었는지 곧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 학생에게는 선배처럼 구원의 손길도 없었다. 사실 보통 여학생들은 방금 소라처럼 주변 남학생들에게 학생증을 빌리곤 했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은…

그런 시도를 할 것 같지도, 성공할 것 같지도 않은 타입이다.

“…그냥 제꺼 쓰세요.”

“네?”

“두장만 써야 합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어 학생증을 꺼냈다.

“2번 프린터로 보내세요. 두장 넘으면 돈 받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내 말에 그 학생은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서 열심히 뭔가를 클릭했다. 그 사이에 1번 프린터에서는 열심히 뭔가가 출력되고 있었다. 아마도 정소라의 프린트일 것이다. 잘 쓰지 않는 2번 프린트에 비해 1번은 레이저 프린터인지라 빠르게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2번 프린터를 바라보면서 빨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여학생의 프린트가 끝나기를 기대했다.

“…응?”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는 1번 프린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프린터 수십장을 계속해서 출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털털거리면서 2번 프린터가 한 장을 뱉어내는 사이 1번 프린터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뒤를 바라보니 선배는 아직도 정소라와 뭔가를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프린터는 계속해서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프린터에서 경보음이 들렸다. 저 소리는 한 달 사용 용지매수를 초과했다는 경고음이었다.

“어? 그럴리가…200장이나 남았었는데?”

“어머,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학생증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해 하며 선배가 프린터 쪽으로 다가가자 정소라는 자신의 프린트물을 집어들더니 빠르게 컴퓨터실 밖으로 나갔다.

“…정말 다 썼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선배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2번 프린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종이가 나오는 덕분에 프린트물의 내용을 대강 읽을 수 있었다.

[14세기 흑사병 확산이 도시국가에 미친 영향]…이라. 사학과인가?

아마도 기말고사 제출 레포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두장만 더 할 수 없겠냐고 물어봤겠군. 아마도 오늘까지 제출이라거나 하는 레포트겠지.

나는 출력이 끝난 프린트를 꺼내어 손으로 정리해 종이의 윗 부분을 스테플러로 집어주었다.

“여기 있어요.”

프린트가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관리자 책상으로 다가온 여학생에게 나는 프린트물을 건넸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제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

“됐어요, 프린트 두장으로 뭐 얻어먹으면 그게 더 민망하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그 여학생은 한번 더 인사를 하더니 가방을 들고 곧 컴퓨터실을 빠져나갔다.

“진호야!”

“뭐, 뭐예요! 이것놔요, 선배!”

스테플러를 제자리에 넣어두고 일어서려는 나를 갑자기 뒤에서 선배가 잡았다.

“나 프린트 열장만! 나도 레포트 내야한단 말이야!”

아무리 관리자라고 할지라도 프린터를 마음대로 쓰지는 못한다. 예전에는 프린트 매수 정도는 조정이 가능했다지만 저번 학기에 어떤 정신나간 근로장학생이 친구들꺼를 몇백장씩 계속 프린트하게 해 준 이후로 학교에서는 근로장학생의 아이디로 프린터 접속권한을 막아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학생증을 빼내며 말했다.

“…열장이니까 천원입니다.”

동방(동아리방)의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잠시 우리 동방의 문을 바라보았고 문 앞에 붙여진 [세계 경제 분석 연구 동아리]라는 종이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밑에 붙어있는 [이 동방에는 김석찬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종이를 보며.

이 남원대학교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세 가지 사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제3 구내식당의 밥이 제일 맛있다는 것. 두번째는 학생 기숙사에는 산 너머 고등학교 탈출한 공작새가 짜장면 그릇의 찌꺼기를 먹기 위해 출몰한다는 것. 세 번째는 경영학부 4학년 김석찬은 이 학교가 배출한 걸출한 미친놈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 유진호는 학교가 자랑하는 그 미친놈과 같은 동아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언제나처럼 42인치 텔레비전에 애니메이션 블루레이를 돌리면서 대사를 따라하고 있는 석찬선배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모오…콘나 다타카이와 야메룬다!”

“점심은 …드셨어요?”

“오레와…젯따이! 젯따이 카츠!”

“….”

이 쯤 되면 말을 걸 기운도 나지 않는다.

TV에 흘러나오는 애니메이션의 모든 대사를 따라하면서 그 동작까지 따라하는 선배를 뒤로 한 채 나는 동방 구석의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동방의 컴퓨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른 부팅. 저번달에 석찬 선배가 동방의 컴퓨터 하트를 죄다 SSD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몇초도 걸리지 않고 윈도우의 배경화면이 떴고 나는 크롬을 띄운 다음 요 며칠간 계속해서 보고 있는 웹사이트의 주소를 빠르게 입력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사이트가 뜨기 시작했고 나는 제일 위의 검색란에 다시 빠르게 내가 원하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남원대 단기알바]

곧 검색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전 컴퓨터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검색결과였던 것이다.

“…후.”

“알바 찾냐?”

“네.”

갑자기 어깨너머로 얼굴을 들이미는 석찬 선배 때문에 놀라며 나는 조금 몸을 옆으로 뺐다.

“너 이미 알바 충분히 하고 있지 않았어? 내가 아는 걸로만 세 개인데. 학교 앞 서점, 주말에 하는 카페알바, 학교 근로장학생 알바.”

“카페 사장님이 방학 때는 문 닫으실 예정이래요. 그래서 방학동안 할 주말알바가 없나 찾고 있었어요.”

“방학 때는 좀 쉬지 그래? 나이 먹고 나서 그때 몸 좀 아낄 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무슨 말씀.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석찬 선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말은 언제나 석찬 선배가 주변 사람들에게 주문처럼 해 대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럼 그럼, 벌 수 있을 때 버는 건 중요하긴 하지. 돈이라는 것은 운과 타이밍에 따라 버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운과 타이밍을 제일 잘 잡은 사람은 석찬 선배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남자 중에는 드문 단발형의 머리에 안경을 쓴 평범한 학생으로 보이지만 저 사람은 근 4년동안 대한민국 주식투자자들의 신과 같은 존재로 우뚝 일어 선 사람이다. 지난 4년간 대한민국 주식투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선배가 빠지는 걸 본적이 없다. 내가 선배를 처음 봤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 케이블 TV에서 ‘람보르기니로 등교하는 대학생’ 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 사람이 내 동아리 선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람보르기니로 등교하는 정도면 학교의 유명인 정도로 끝났겠지만 석찬 선배가 대 놓고 학교에서 미친놈 취급을 받는 것은 그가 사람들이 말하는 ‘십덕후’라는 것이었다.

이웃 섬나라에서 특정 서브컬쳐에 미쳐 사는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부르며 그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오덕후라고 인터넷에서 변형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십덕후’는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카나짱?”

선배는 의자에 올려 둔 베개를 끌어안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지 목소리와 눈빛만으로는 나름 그림이 되는 광경이었지만 상대가 베개다.

잠잘 때 베고 자는 그 베개!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나는 팔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런걸 다키마쿠라라고 한다던가.

처음 선배를 만났을 때 왜 베개를 끌어안고 다니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다가 회식 테이블을 뒤집고 날뛰며 ‘내 시키짱에게 사과해! 나의 시키짱은 그렇지 않아!’라고 외치는 모습을 본 이후로 나는 두번다시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퇴부서를 내밀었을 뿐. 물론 그건 오래전에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다.

“선배는 방학 시작했는데 어디 안 가세요? 학교에는 매일 오지는 않으실테고.”

“갈 곳이야 많지!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 아니겠어?”

다행이다. 이 사람도 조금은 정상적으로 놀 때도 있구나.

나는 동해안의 피서인파들을 떠올리면서 검색엔진에 [해변 축제]라는 검색어를 넣었다. 선배가 조금이라도 정상인이 될 수 있다면 검색 정도는 해 줄수 있는게 후배의 의리 아니겠는가.

“동해안으로 가세요? 아니면 남해안으로 가세요?”

선배 정도라면 돈은 썩어 넘치니 해외를 갈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바닷가를 왜 가?”

“축제 가신다면서요? 아, 어디 계곡?”

“계곡같은 소리 한다. 이 여름에 그런 곳을 왜 가냐?”

…뭔가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친다. 여기서 더 물어보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느낌이다.

“아, 그러시군요. 축제를 가시는군요. 즐겁게 노세요.”

“끝까지 들어 임마. 넌 도대체가 여름이 뭘 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하냐? 바닷가? 몇 명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더러운 물에 몸을 처박고 피부병이나 걸리면서 말도 안되는 바가지 요금의 싸구려 음식들을 먹은 채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음란하게 헐벗은 채로 돌아다니는 그런 곳을 왜 가야하는 건데? 천박해! 더러워!”

“…바닷가가 그런 곳이었나요.”

“여름에는 자고로! 만화 축제! 행사! 전국, 아니 전 세계의 동지들의 혼이 불타오르고 그 결정체들이 빛나는 만남의 장이 열리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거야!”

…이 이야기는 한번 들었던 것 같은데.

고2때 봤던 그 프로그램에서 휴가는 어떻게 보내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당당하게 도쿄 어딘가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분명 더 길어질 것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선배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내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선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왔네요!”

구세주와도 같은 전화의 진동에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선배에게 건넸다. 선배에게 건네는 순간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Cthulhu]

외국인인가?

아니 그 전에 저런 이름은 어느 나라 사람이야?

선배를 혀를 차며 내가 건넨 핸드폰을 받더니 이름을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지간히 반가운 사람인가보다.

“무슨 일이세요, 사장님?”

어느 나라의 말이 나올까 조금 기대했었지만 상대는 한국인인가 보다.

나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려 알바자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이트도 몇 번이고 뒤져봤지만 역시 조건에 맞는 알바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주말 알바라면 구할 수 있겠지만 단기로 구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수많은 대학생들이 알바전쟁에 뛰어들었을 테고 뒤늦게 참전한 나에게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역시 곤란하다. 카페 알바가 큰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 교재비 정도는 벌 수 있었는데. 방학이 지나고 나면 곧 새 학기가 시작될테고 후기 수업부터는 전공수업 교재들도 늘어날 것이다.

“물론 당연히 갑니다! 이번에 랑느님 부스 내신대요? 역시나! 어제 트위터에서 보니 신간 나올 거 같더라구요! 아슬아슬 마감 맞추신 모양이네요.”

선배는 뭐가 신나는지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 그런 선배의 모습을 보니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선배는 돈 때문에 고민 해 본적이 있으려나?

“어차피 저야 주말에는 늘 한가한걸요. 물론 가죠! 제가 빠지는 거 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주말은 오전에 선약이 있기 때문에 오후부터 가긴 할꺼지만…네? 헤에, 그래요? 여름이니까 그런 걸까요? 그래도 일급은 꽤 높은 편이긴 한데. 지금부터 행사 더 많아질텐데 큰일이네요. 그러게요, 주말 고정으로…잠깐, 사장님. 잠깐만요.”

잠시 전화를 중단한 선배가 내 어깨를 잡자 나는 멍 하니 선배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왜 이래?

“사장님, 일급 정확히 얼마였죠? 네, 네. 그렇군요.”

선배를 내 어깨를 잡은 채 나를 보면서 말했다.

“일급 13만원,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식대 별도 제공. 중간 휴식시간 있음. 주말에만 함. 알바 생각 있냐?”

“네!!!”

내 큰 대답에 선배는 씨익 웃으면서 전화를 계속했다.

“사장님, 쓸만한 알바 하나가 있는데 마침 하겠다고 하네요. 모레 아침 그쪽으로 보내면 되나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석찬 선배를 바라보았다.

이 미친 선배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네, 알겠습니다. 아니 뭘 이런걸로요. 써먹을 수 있는 녀석은 써먹어야지요.”

…응?

“그럼 걱정 마시고, 제 후배니까 도망도 못가요. 모레 뵙겠습니다.”

…도망?

“그러고보니 선배 무, 무슨 알바입니까?”

전화를 끊은 선배의 웃음이 매우 불길했다.




“코파?”

나는 손가락을 들어서 코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선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멋대로 줄여서 부르지 마! 다들 그렇게 부르긴 하지만 코믹파크라는 정식 명칭이 있단 말이다!”

전화를 끊은 후 선배는 나에게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이런 아르바이트 자리가 쉽게 나오는 것 아니다. 이런 착한 선배에게 밥 한끼 정도는 사야 염치가 있는 후배다 등의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알바냐는 질문에 선배는 자신의 다키마쿠라를 한번 바라 본 다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게 뭔데요?”

“이름 들으면 감이 딱 오지 않아? 만화행사야.”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 알바인데요?”

“별거 없어. 아침에 행사장 가서 테이블과 의자 설치 도와주고 행사 시작되면 본부석에 앉아서 아~주 편하게 앉아있다가 행사 끝나면 행사장 정리하고 돌아오는게 다야.”

수상하다.

아주 편한 알바가 시급이 높을 리가 없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서울 변두리에서 다이아몬드니, 사파이어니 하며 친구들에게 전화해 새로운 이 일은 네크워크마케팅이며 한달에 앉아서 수백을 벌 수 있다고 말하는 것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아니, 가끔 편하고 시급이 높은 알바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알바는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돌아오는 일은 아니다.

“정말 그게 답니까?”

“진짜라니까? 너는 무슨 어린 녀석이 그렇게 의심이 많냐?”

석찬 선배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껴안은 다키마쿠라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카나쨩…진호군 츠메따이.”

이 선배랑 같은 동방에서 붙어 지낸지 삼개월이 넘어가니 이제 간단한 일본어는 어지간해서는 알아들을 수가 있다.

“제가 뭐가 차갑다는 거예요? 선배가 워낙 의심 갈 만한 짓만 하셨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베…아니 카나…는 놔두시고 자세히 설명이나 좀 해보세요.”

정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쨔응~’하는 그 말만큼은 뱉어 낼 수가 없다. 그 말을 해버리면 왠지 나도 석찬 선배와 같은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화 행사라면 뭐 뽀로X라거나 둘X라거나 그런 인형 탈 쓰고 돌아다니고 아이들에게 손 흔들어주면 되나요?”

“…그게 만화행사냐. 어린이행사지.”

“그럼 만화행사에서는 뭐가 나오는데요?”

“그건 가서 보면 알아. 그래서 이 알바가 싫다는 거냐 뭐냐? 나도 싫다면 억지로 시키진 않을거니까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선배가 강수를 두었다.

“이번 주말만 일이 있나요?”

“행사는 자주 열리는데…사장님이 관리하는 행사는 만화 행사 뿐만이 아니니까. 네가 원한다면 주말에 하는 행사 전부 알바로 갈 수도 있어.”

“일급은 비슷해요?”

“내가 알기로는 전부 비슷할껄?”

사실 나쁜 조건은 아니다. 방학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주말만 하고 단기로 할 수 있는 알바인데다가 일급도 높은 편이니까. 사실 예전에 택배 상하차 알바 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알바가 편하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건 정말…해병대 막 제대했다는 형이 울면서 도망갔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하긴 할게요. 대신 그날 갔는데 근무시간 늘어났다거나 일급 다르다거나 하면 선배가 책임져요.”

“걱정 마! 행사는 딱 제시간에 끝난다고!”



“…여긴가.”

지하철에서 내려 출입구 위로 올라가자 넓은 광장 저편에 큰 건물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전시회장 같은 용도로 쓰일 것 같은 건물이었다. 사실 이름도 몇 번은 들어 본 적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입구의 위에는 큰 현수막으로 ‘제81회 서울 코믹파크’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 안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아, 저기 오늘 알바하기로 되어서….”

“아아, 학생이 데이곤이 보낸 알바구나?”

“네? 데이곤이요?”

그게 누구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석찬군이 보내서 온 사람 맞지?”

“아, 예.”

데이곤이라는 거 석찬선배를 말 하는 거였나.

내 대답을 듣고 상대는 미소지었다.

“자, 그럼 오늘 하루 동안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거―.”

고개 숙인 내 앞으로 뭔가가 내밀어졌다. 그것은 비닐봉투 안에 들어있는 하얀 티셔츠였다.

“이게 우리 스태프들의 유니폼이야. 안쪽에 탈의실이 있으니까 갈아입고 이쪽으로 와 줄래?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알려줄게.”

건네받은 티셔츠를 들고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 사람 말대로 한쪽 구석에 파티션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 ‘탈의실’이라고 써진 글씨가 보였다. 남자쪽임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옷을 갈아입고 있는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처음 알바 오신 분이죠?”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 말로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도 새 노예에게 잘 해주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군요…네? 노예?”

지금 뭔가 일상생활에서 절대 쓰지 않는 단어가 튀어나오지 않았나?

“노예계약서에 도장 찍었으니 이런 곳에 오신 거 아닙니까. 자, 이제 한 배를 탄 거니까 행사 끝날 때 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유명 부스들이 많이 참가하는 날이라서 많이 힘들 것 같으니까 각오 하시구요. 수영아! 테이블 도착했냐!”

“네, 형! 사장님이 빨리 옮기래요!”

“알았다고 전해!”

갑자기 큰 소리로 남자가 소리를 치자 탈의실 벽 너머 행사장 저편에서 대답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는 탈의실을 나갔고 나는 서둘러서 받은 티셔츠를 꺼냈다. 티셔츠의 등 쪽에는 STAFF라고 적혀져 있었고 앞을 돌려보자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카나…쨩?"

티셔츠의 앞면에는 석찬 선배가 매일 끌어안고 있는 베개의 여자가 웃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옮기겠어! 한 손에 하나씩 들어!”

트럭에서 내리는 긴 테이블을 어깨에 메려는 나에게 탈의실에서 만난 남자가 소리쳤다. 일이 시작되고 나서 알았지만 그 사람이 아르바이트생 전체를 관리하는 치프라고 했다.

치프를 바라보니 정말로 한 손에 테이블 하나씩을 들고 옮기고 있었다.

무거운 테이블은 아니었지만 워낙 길이가 길었기에 한 손에 하나씩 들자 걸어갈 때 테이블끼리 신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무슨 기차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내 스스로가 그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테이블을 잡은 손을 옮겨 균형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이블 두 개를 들고 가는 것에 익숙해졌고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는 속도로 옮길수가 있었다.

“데이곤이 말한대로 쓸만하네.”

내가 테이블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티셔츠를 건넨 여자가 말했다.

“…혹시 사장님이세요?”

“응, 그러고 보니 아까 말 안했구나. 내가 코믹파크의 사장 주수인이라고 해.”

사장이라면 생각되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사장님은 꽤 젊은 여자였다. 물론 젊다고 해도 20대는 아니지만 30대 중후반 정도의 느낌? 높게 올려 묶은 머리며 길고 늘씬한 몸매를 보면 아줌마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여기! 의자 좀 도와주세요!”

“지금 가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곧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시급이 높다 했더니 역시 몸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힘들지도 않을 것 같고…어차피 행사 시작하고 나면 크게 몸을 쓸 일도 없을 것 같다. 정말로 나중에 석찬 선배에게 밥 한번 사야 할 것 같은데?



“수고하셨습니다! 30분 후 동아리 입장이니까 그때까지 잠시 휴식하시고요 고정 멤버 외에 역할분담은 곧 제비뽑기 하겠습니다!”

줄에 맞춰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니 땀이 신나게 쏟아졌다. 전시장 안은 행사를 대비해서 에어컨을 풀로 틀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역시 여름인지라 몸을 쓰면 땀이 흐를 수 밖에 없다. 나는 본부석쪽의 의자에 앉아서 근처에 돌아가는 대형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맡겼다.

“이 다음에는 무슨 일 해야하나요?”

“곧 제비뽑기로 결정 할 거예요. 그거만 안 걸리면 좋겠는데….”

테이블을 나르면서 얼굴을 익힌 남자는 나와 함께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행사에 나오는 책들은 좀 그러니까요. 남성향도 있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책들이 좀 그런다고? 남성향?

우리가 바람을 쐬고 있자 알바들의 치프였던 탈의실에서 만난 남자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왔다.

“자, 하나씩 뽑으세요.”

“이게 뭔가요?”

“오늘 역할 분담이예요. 내일 행사는 내일 아침에 한번 더 뽑을 겁니다.”

나는 통에서 종이 하나를 뽑아들었다. 좀 쉬운곳이 걸리면 좋겠는데.

“앗싸! 구급팀!”

나보다 먼저 종이를 뽑았던 알바는 주먹을 쥐더니 외쳤다. 반응을 보아하니 편한 곳인가보다. 나는 종이 밑에 써진 글씨를 보았다.

“수위결정?”

이건 무슨 일이야? 알 수 없는 단어에 눈을 깜빡이며 치프와 다른 알바를 바라보자 두 사람의 얼굴에 잠시 경악의 표정이 스쳤다. 그리고 치프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요….”

“네?”

“앉아서 하는 일이니까…몸은 편할거예요.”

“네에?”

몸은 편할거다? 그럼 다른 건 뭐가 불편한데?

내가 주변을 돌아보자 사람들은 뭔가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더니 밝은 얼굴이 되며 말했다.

“사실 수위결정만 아니면 버틸만 하죠.”

“그럼그럼, 수위결정 말고는 시끄러워지는게 저작권 결정 정도인데 그건 항상 사장님이 담당하시니까.”

…나 뭔가 엄청난 꽝을 뽑은 것 같은데?




예상은 적중한다. 그것도 항상 좋지 않은 예상일 때 말이다.

동아리 입장이 시작되자 참가자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시작했고 곧 행사장이 사람들로 점점 채워졌다. 이곳에 오고 나서 들은 설명이었지만 이 만화행사는 어린아이들이 아닌 주로 청소년이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자기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와서 판다고 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만화가란건가? 대한민국에 만화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커다란 캐리어에 뭔가를 잔뜩 담아 온 여자, 붉은 색 가발을 쓴 채 가위질을 하고 있는 여자, 커다란 헤드셋을 쓴 채 흥얼거리면서 책상 위에 뭔가를 올려두는 남자 그리고…다키마쿠라를 의자에 앉혀두는 남자가 보인 것 같은데 무시하고 싶다.

부스를 장식하는 그림들이 걸리자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 눈이 이상하지 않으면 저기 키스를 하고 있는 그림은 둘 다 남자인 것 같은데…?

맞은 편 동아리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이 상대방의 가슴을 핥…는 것 같은데 둘 다 남자인 것 같은데?

그리고 제일 가까운 쪽의 동아리는 확실하게 키스하고 있는 그림은 두 사람 다 여자인데???

“이게…뭐야?”

만화 행사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 혹시 동성연애자들의 모임 같은거였나?

뭔가 이상함을 느껴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내 앞의 테이블에 갑자기 거대한 책 더미가 올려졌다.

“이게 다 무슨 책인가요?”

끙끙 거리면서 책을 올려둔 치프는 어깨를 주무르면서 대답했다.

“뭐긴요, 오늘 그쪽이 수위판정을 해야 하는 책들입니다. 동인지 읽어 본 적 있죠?”

“…부전공 수업으로 1930년대 한국 문인들의 동인지라면 읽어 본 적 있습니다.”

내 대답에 치프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만화 동인지 본 적 없어요?”

“선배의 책상 위에 있었던 것 같지만…저 원래 만화 별로 안 좋아해서 만화책 잘 안보는데요?”

내 대답에 이젠 치프는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알바가 처음이라고 듣긴 했지만…이런 거 잘 몰라요? 동인지라거나 BL이라거나 백합이라거나….”

“…백합은 꽃 아닌가요?”

치프만큼이나 나도 당황하고 있었다. BL은 뭐고 백합은 또 뭐야?

“잠깐 기다리세요. 이거 사장님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네요.”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두고 치프는 본부석에 앉아있는 사장님에게로 다가갔다. 뭐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더니 곧 사장님이 일어서서 이쪽으로 치프와 함께 다가왔다.

“방금 치프에게 들었는데…이쪽, 그러니까 동인 문화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는게 진짜야?”

“아, 저기 저 분명 만화행사라고 듣고 왔는데….”

사장님과 치프의 시선이 다시한번 마주치고 치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주저 앉았던 치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쌓여있는 책에 턱을 올렸다.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수위체크 하겠습니다.”

“…아니야, 수위체크는 원래대로 이쪽이 하도록 시켜. 너는 옆에서 도와주고.”

“네?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에게 어떻게 이걸 맡겨요?”

“그래서 더 시켜야 할 것 같아.”

사장님과 치프는 계속해서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계속해서 우리들이 수위판정 하다 보니 많이 익숙해져버렸잖아? 저번 행사때는 아이 따라온 학부모 항의도 있었고 뉴스에 안 좋은 쪽으로 나가기도 했고. 차라리 완전히 일반인의 관점에서 수위를 정하는 게 나을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 사람은 너무나 일반인이라구요!”

큰 소리로 말하는 치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사장님은 웃었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동인녀, 동인남이 되어가는거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 동인녀? 동인남?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차라리 계속해서 테이블과 의자를 날랐다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치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님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돌아갔고 치프는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나에게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지금부터 달릴겁니다.”

“…행사장을요?”

“…아니요, 이 동인지를 빠른 시간 내로 다 보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치프의 옆에 앉았다.

“이 동인지는 참자가들이 그린 만화입니다.”

“우와! 그럼 포켓 몬스X를 그린 만화가가 여기 온 건가요?”

나는 쌓여있는 책 가장 위에 그려진 피카X를 보며 대답했다. 그림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책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확실히 피카X와 지X다! 몬스터와 그의 트레이너!

내 말에 치프는 다시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원작자는 오지 않아요. 아, 뭐 가끔 오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저 작품은 일본 만화기도 하고…. 저런 책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겁니다.”

내 대답에 치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며 말을 이어갔다.

“이 동인지들은…음, 사람들의 망상? 환상? 원하는 것?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 자신들이 다른 내용을 그린 겁니다. 그 어릴적에 그런 적 있잖아요. 내가 용사가 되면 여기도 놀러가보고 싶어! 이런 마음으로? 설명 필요없이 몇 권 보면 알게 되겠지만…그런데 내용중에는 연소자관람가부터 미성년자관람불가까지 그 수위가 다양합니다. 우리끼리는 보통 전연령, 15금, 19금 라는 말로 정하고 있습니다.”

“전연령은 연소자 관람가…일테고 15금은 15세 이상, 19금은 19세 이상 인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말 그대로입니다. 한시간 정도 후에는 일반인 입장이 시작될텐데 그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전부 보고 동아리들이 제출한 수위와 이 책의 수위가 맞는지 확인 한 다음에 각 동아리에 심사 결과를 안내해주면 됩니다. 가끔 15금이라고 해두고 내용을 보면 19금인 것들이 있거든요.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르다보니 이 행사에서는 주최측인 우리가 그 수위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이 책을 보고 이 책의 선정도에 따라 등급을 결정하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여기 스티커 있으니 다 보고 나서 책의 오른쪽 위에 해당 수위의 스티커를 붙여주시면 됩니다. 저도 같이 볼 테니 애매하다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나는 조금 전에 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쌓여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긴장했지만 뭐, 결국 만화를 보고 수위를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좀 야한 만화도 있는 것 같지만…솔직히 기분 나쁘다기 보다는 조금 기대를 하게 되는것이 남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처음으로 집어든 책은 가장 위에 올려져 있던 피카X 책이었다.

“이건 보나마나 전연령…? 전연령 일 것 같은데요.”

“표지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치프의 말에 나는 다시 표지를 바라보았다. 표지가 왜?

“표지에 이상한 거라도…응?”

대강 보고 넘겼을때는 몰랐는데 피카X의 엉덩이 근처에 뭔가 모자이크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인 지X는 왜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는거지? 그리고 미묘하게 바지가 흘러내린 것 같기도 하고?

“빨리 읽어요. 일반 입장 전까지는 전부 수위판정 끝내고 판매허가 내줘야 한단 말입니다.”

치프는 초초한지 시계를 보면서 나를 재촉했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트레이너들이 사는 마을이 나오고 피카X가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박사를 찾아갔는데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트레이너와…

“어? 어?”

“왜 그래요?”

“저저저저저저기 가, 가 갑자기 지X가 피피피피피카X의 거거거거기에…!”

신이시여.

지금 제가 뭔가 무서운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 눈이 완전히 이상해진 것이 아니면…지금 이 장면은…이 장면은…

나는 옆에 앉아있는 치프를 돌아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저기막트레이너가이전기를쓰는축생의몸에자신의성기를꺼내서막덮치….”

“오케이, 거기까지. 수간은 무조건 19금입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가 다다닥 부딪히며 뱉어내는 말을 치프는 용케도 이해하면서 내 손에 든 책을 빼내어 표지의 위에 붉은색의 ‘19금 이상 관람가’스티커를 붙였다.

“다음! 시간이 없어요!”

치프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다음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책 위에는 ‘방과후의 농구연습’이라는 제목과 함께 농구부로 보이는 남자 아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래 농구…! 이건 분명 슬램X크 같은 그런 만화…

“왜 갑자기 옷을 벗기는건데!”

“벗지기 않으면 어떻게 덮칩니까!”

내 외침에 치프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 농구연습을 하다가…아냐, 안돼! 이런 일은 안돼!”

책 안에서는 수라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주인공과 친구가 방과후에 농구연습을 하다가 땀이 흘렀는데…왜 주인공 친구가…갑자기 너의 냄새가 좋다며…두, 둘 다 남자인데?

“책 왜 덮어요?”

치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멍해진 정신으로 책을 다시 펼쳤다

“…들어가버렸어요.”

“뭐가요?”

“그거가 거기에….”

“직접적인 노출 있어요? 모자이크는?”

“모자이크…있었나…있네요.”

“어디 봅시다.”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을 다시 가져간 치프는 내가 보다가 덮어버린 부분을 보고 뒤쪽을 빠르게 넘기더니 파란색 스티커를 붙였다. 거기에는 ‘15세 이상 관람가’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이게 15세?”

“삽입 부분은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았고 대사로만 묘사를 했네요. 이 정도는 15금입니다.”

…말세다.

말세야.

남학생 두명이 방과 후에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 이걸 청소년이 볼 수 있다고?

“안 됩니다! 이건 19금이예요! 무엇보다 왜 남자와 남자가…이런 거 게이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원래 만화책에 남자 둘이 나오면 게이가 되는게 당연하잖아요.”

“그건 어느 나라 상식입니까!”

덤덤하게 대답하는 치프를 보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서, 설마…?

“설마…당신도…게이?”

“헐, 저 여자친구 멀쩡하게 있습니다.”

내 질문에 치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안되겠네요, 이러다가는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사장님이 당신에게 맡기라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동아리 대표자들이 내 목을 조를 것 같으니…내가 수위 판단을 할 테니 당신은 그 다음에 책을 보고 결정해요!”

그렇게 말하고 치프는 빠르게 책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스티커를 붙여 넘겨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남자가 왜 남자 손등에 키스합니까?”

“아니 그럼 발등에 키스해야합니까?”


“왜 남자가 남자 바지를 벗깁니까!?”

“치마를 입었으면 치마를 벗겼겠죠!”


“왜 남자가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건데요!”

“그럼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해야해요? 호모물인데!”


“동물에게도 발정합니까? 어째서! 왜!”

“무생물에게도 발정하는게 동인입니다! 컴퓨터 본체랑 USB 커플링의 동인지 안 읽어 봤으면 말을 말아요! USB가 귀축공이었다고, 그 회지!”


“…안돼…더 이상은….”

“이십권 남았습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돼요!”


“헉헉퍽퍽츄핏츄핏파앗껄쩍껄쩍쥬르륵.”

“의성, 의태어 소리내서 읽지 마세요! 정신차려요!”

“좀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와 줘. 드디어 우린 하나가 되는거야.”

“대사도 소리내서 읽지 말아요! 빨리 스티커나 붙이란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가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하얗게 불태웠어…

이거 아마 유럽 발 경제위기로 주식시장이 하루아침에 바닥을 쳐서 선배 인생의 가장 큰 위기가 닥쳤을 때 했던 말 같은데.

“수고했습니다. 이제 이거 각 동아리에 돌려줘야 하니 일어나세요.”

“….”

나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지만 지금 내 몸은 아침에 테이블을 나를 때 보다 더욱더 지쳐있었다. 이래서 몸은 편하다고 했구나…정말로 몸만….

“이거 가져가서 저기 벽부스들에게 돌려주세요. 책 위에 자리 적어놨으니 그 번호인 곳에 가져다 주면 됩니다.”

“벽부스는 뭔가요?”

“인기가 있는 동아리들이죠. 책을 사기 위해서 항상 사람들이 몰리는. 사람이 너무 몰려 통행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기 있는 동아리들은 사전에 체크를 해서 저렇게 한쪽 벽으로 몰아둡니다. 관리하기 쉽거든요. 자, 빨리 가져다주세요.”

치프에게 받아든 동인지를 들고 나는 행사장 안쪽의 인기 동아리들쪽으로 걸어갔다. 들고가는 책들중에 가장 위에 있는 책을 바라보니 ‘마왕님의 금욕일기’라는 제목이 귀여운 글씨체로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글씨 옆에는 당당하게 ‘19금 이상 관람가’라는 붉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는 숨을 한번 삼키고 그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검고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이마에 뿔이 돋아있는 걸 보니 아마도 이 사람이 마왕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왕님이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당연하게도 남자였다. 왜 30분만에 남자가 남자를 안고 있는게 당연한 상식이 되었냐고 묻지 마라. 그런 질문 하는 사람은 이곳에 오면 아마도 나처럼 납득하게 될 것이다. 여기는 그런 곳이다. 오, 안돼. 내 상식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비록 남자가 남자를 안고 있는 그림이었지만 그림 자체는 꽤 예뻤다. 그다지 만화에 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수십권을 본 회지 중에서도 유독 그림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예쁜 그림이었다. 이 사람이 마왕이 여자를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려줬다면 아마 나도 이 동인지라는 것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회지를 넘겨보았다. 물론, 예상대로 안은 매우 낯뜨거운 남자들의 정사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기분 좋아! 하아앙!’라고 금발머리의 남자가 외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흠칫거리고 말았다.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냐! 도대체 그걸 거기에 어떻게 넣는거야? 미친거 아냐? 그림이 아깝다….

어느새 벽부스들이 있는 곳에 다 왔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정리하거나 부스를 장식하는 장식물을 세우거나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네? 아, 수위체크 끝나셨군요. 뭐 저흰 처음부터 19금으로 신청하긴 했지만.”

내가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여자는 내가 내민 책을 받아들고 재잘거렸다.

“레이카님! 수위 체크 끝났어요! 이번 그림도 예쁘게 잘 나왔네요.”

“그래요? 그럼 순대님 이쪽 권수 체크 좀….”

책을 받아 든 여자가 테이블 안쪽에 서 있던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안쪽에 서 있던 여자가 굽혔던 허리를 들고 이쪽을 바라 본 순간 나는 책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녀가 여기 있는거지?

남원대학교 경영학부의 1학년 학년차석, 그리고 경영학부의 꽃, 또는 여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정소라.


그녀가 석찬 선배가 갖고 있었던 것 같은 하녀복을 입은 채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좋은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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