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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마법소녀 퓨어하트!
글쓴이: FlowDuet
작성일: 12-07-30 03:23 조회: 2,578 추천: 0 비추천: 0
#00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긴 깊은 밤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도심의 광채는 잦아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시계탑은 벌써 날짜가 바뀌었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조명이며 간판은 여전히 휘황찬란하기만 하다.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 역시 그 수가 줄어들지언정 지친 기색은 없다.
한쪽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내가, 또 한쪽에서는 다정하게 달라붙은 연인이, 모두가 밤을 잊고 활기에 몸을 맡긴다. 도심의 번화가는 오늘도 어둠을 가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짓밟을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도심의 창공을 흐르는 나지막한 목소리.
따스한 봄바람 속에, 문득 안개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지나간 겨울의 냉랭함처럼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미성은, 평화로운 도시의 공기를 꿰뚫고 싸늘하게 얼어붙였다. 번화가를 향해 흘러가는 남성의 목소리에는 한껏 비틀린 희열과 조소가 담겨있다.
……까마득한 높이의 마천루 위, 검은 형체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다, 온몸이 칠흑처럼 검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망토와 그 안에 걸쳐 입은 중세풍 의복은, 마치 번화가로부터 쫓겨난 어둠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커멓게 치장되어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역시 짙은 암흑을 머금고 있어서, 그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뜬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하였다.
윤기 있는 머리칼 아래로 펼쳐진 것은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이목구비.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한 코, 형태 좋게 뻗은 입가가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일견 시선을 빼앗길 만큼 수려한 미소년이었지만, 그 얼굴에선 결코 아름다운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검은 소년은 한껏 비틀린 얼굴로, 비웃음을 머금은 채 반짝이는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을 둘러싼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만이 새빨갛게 번뜩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에는 발을 디딜만한 장소도 없건만, 소년은 지붕 끄트머리에 서서 재주도 좋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까마득한 탑의 정상에서, 조용히 바람을 마주하던 소년은 이내 망토 아래 감추었던 오른팔을 꺼내들었다.
"……."
새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이 망토의 실루엣을 헤치고 나타난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흰 손은, 몸을 뒤덮은 검은색과 대비되어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순결과 성스러움의 상징이 아닌, 창백하게 죽음의 침묵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흰색……. 광적인 가학을 물들인 하얀 손길은 핏빛보다도 잔혹하게 불안감을 조성해간다.
휘몰아치는 고층의 대기 속에서 조용히 팔을 뻗은 소년은 이내 기척도 없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새하얀 손바닥 위에는 매끄러운 면이 반들거리는 작은 흑색 돌조각들이 칠흑 같은 어둠보다도 어두운 색으로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후, 후후, 후후후후후……."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낮고 차가운 미성.
손 안의 물체를 틀어쥐며,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웃기 시작하였다. 희미하게 떨리던 소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이내 커다란 웃음이 온 도시로 퍼져나갔다.
"아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소년의 웃음은 더없이 싸늘한 울림을 퍼뜨렸지만, 그 안에 타오르는 열기는 마치 불꽃과도 같은 기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냉랭함과 열기가 뒤섞인, 형용하기 어려운 광기는 도심의 밤하늘을 위협적으로 물들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웃음을 멈춘 소년이 다시금 번화가를 내려다본다. 그의 눈동자에 드넓은 도심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도시는, 이 세상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공포에 떨라, 인간이여… 바로 나, '검은 남작 그람'의 무한한 힘 앞에 절망하여라!"
'검은 남작 그람'… 자신을 그렇게 칭한 소년은, 익숙한 동작으로 들어 올린 팔을 몸 안쪽까지 끌어당겼다. 당긴 팔을 다시금 거칠게 휘두르자, 손 안에 있던 돌조각이 일제히 공중에 흩날린다. 이윽고 소년의 입에서 주문과도 같은, 알 수 없는 언어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소년의 입꼬리가 씨익 비틀린다. 그는 두 팔을 펼치고, 엄지와 중지를 맞물린 뒤 넓게 뻗은 하늘을 향해 광기 가득한 외침을 내질렀다.
"울려라, 디스코드(Discord)─!!"
쩌렁쩌렁 퍼져 나가는 외침과 팔이 가르는 바람 소리, 마지막으로 손가락이 마찰하며 진동하는 울림이 하나가 된 순간…….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추락하던 돌조각이 낙하 운동을 멈춘다. 다시금 천천히 떠오른 돌조각은 이내 붉은빛을 발하며, 매끄러운 면 위에 핏빛 선을 새겨갔다.
키잉─! 머릿속을 휘젓는 듯 불쾌한 울림.
떠오른 돌조각 중 하나가, 원형의 충격파와 함께 만들어낸 소음이었다. 이윽고 돌조각들은 연쇄 반응이라도 일으키듯 차례차례 소음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몸체를 변형해가기 시작했다.
분명 단단한 고체였을 그것은, 마치 찰흙처럼 꿈틀대는 형상으로 변해 천천히 부피를 키워나갔다. 그 색상은 밤하늘을 포함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어두워서, 마치 주변의 어둠을 끝없이 흡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무한한 심연 속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등장한 것은 팔이었다. 십여 척이나 될 듯한 근육질 팔이 검은 고무 같은 질감을 번들거리며 튀어나오고, 이윽고 이목구비 없는 두상이 한 쌍의 뿔을 달고 나타난다. 흉물스러운 날개와 건장한 상반신, 두 다리 아래엔 가시가 박힌 꼬리…….
전체적으론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지만, 온몸이 석유를 뒤집어쓴 듯 기분 나쁜 검은색으로 번들거린다.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곳엔 깊게 팬 눈두덩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결코 인간적인 기관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비정상적으로 긴 팔과 어깻죽지 뒤로 펼쳐진 박쥐와도 같은 날개가 기형적인 형체를 그려낸다. 구부정하게 굽힌 허리를 따라 돋아난 가시투성이 꼬리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가 될 듯하다.
그것의 형태는 결코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존재해서도 안 될 생물의 모습이었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형상…….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악마'는 이내 매끄럽게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얼굴에 균열이 일어나고, 인간이라면 턱부터 시작해 입이 있어야 할 부근이 쩌억 벌어졌다.
벌어진 틈새로부터 새어나오는 끔찍한 바람 소리.
"■■■■■■■■■─!!"
인간의, 혹은 지구상의 어떠한 언어로도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포효가 대기를 뒤흔들며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인지(認知)를 뛰어넘어 원초적인 불안감을 불러오는 소리에, 바쁘게 걸어가던 행인들이 하나둘 자리에 멈춰 서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포효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허공에 떠있는 나머지 돌조각들은 차례차례 또 다른 '악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나 둘 수를 늘려가던 '악마'는 이윽고 새까맣게 밤하늘을 뒤덮기에 이르렀다.
소년이 탁한 숨결을 내쉰다. 소년의 표정은 다시금 싸늘하게 굳어있었지만, 미묘하게 씰룩거리는 입가는 그의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차례차례 울리던 포효가 멎고,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마침내 소년은 한 지점을 향해 하얀 손을 뻗어보였다.
곧게 뻗은 손끝이 가리키는 장소는─
도심의 중앙, 인파가 몰려있는 사거리.
행인들의 비명을 배경음으로, 소년이 광기에 젖은 외침을 내뱉었다.
"자… 영원한 밤의 마수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도다! 저 멍청한 인간들을 짓밟아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알려주어라!!"
곧이어, 하늘에서 검은 악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 ♬ ♪


어두운 밤거리, 낮게 깔린 공기 속에 급박한 발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탓, 탓, 경쾌하게 끊어지는 발소리는 빠른 템포를 유지하면서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은 채 노래하듯 박자를 이어나간다.
소리의 진원지는 주택가 지붕 위. 눈부시게 붉은 형체가 빛을 발하며 건물 위를 넘나들고 있다. 새빨간 빛의 잔향을 이끌고 유성처럼 활공하며, 빛의 형체는 한 방향을 따라 끝없이 도약하고 도약하였다.
인간의 눈으론 쫓기조차 어려운 속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종 장애물을 기민히 피해 가는 동작은 마치 한 편의 곡예 체조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런 광경이 몇 분이나 펼쳐졌을까, 까마득한 거리를 단숨에 주파하던 빛의 형체가 문득 동작을 정지하였다. 꼬리처럼 따라오던 붉은 잔상이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천천히 하강 운동을 개시한다. 마침내 한 가정집 지붕에 우아하게 착륙하자, 형체를 둘러싸던 광원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
흩어진 빛의 안에서 드러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치장한 소녀.
마치 한 점의 보석과도 같다. 선명한 붉은색 머릿결이 바람에 따라 풍성한 양 갈래로 흔들리고, 그 아래로는 다부지게 뻗은 눈매가 반짝이고 있다. 곧게 뻗은 코와 굳게 다문 입술은 얼핏 강인한 인상을 주면서도, 동시에 소녀적인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여주고 있었다.
가냘픈 목 아래로는 곧은 선을 그리며 쇄골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이었다.
의상은 화이트를 기조로 붉은색 장식이 더해진 복장이었다. 곳곳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프릴과 리본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은근히 드러나는 활동적이고 과감한 라인이 척 보기만 해도 잘 만들어진 의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짧은 스커트와 상의 끝단에는 소녀 취향의 장식이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고, 팔꿈치를 뒤덮는 긴 장갑과 스커트 아래 펼쳐진 사이하이 삭스에도 새빨간 리본과 루비 보석이 반짝이며 화려함을 더해준다.
도무지 현실감이 드는 의상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소녀는 비현실적인 매력을 가득히 흩뿌리며 자신 주위에 이질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희미한 후광을 펼치며, 가만히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루비!"
그런 그녀의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 소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소녀의 시야에 푸른색 빛의 형체가 나타났다. 청량한 고음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그 모습은, 일순 긴장하던 붉은 소녀의 표정을 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소녀는 다정함이 가득 느껴지는 어조로 푸른색 빛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쿠아."
척,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르른 빛을 뿌리며 '아쿠아'가 착지한다. 그 모습 역시 '루비'와 마찬가지로, 기품과 절도가 어우러진 우아한 동작이었다.
루비의 붉은빛과는 대조적으로, 아쿠아는 물빛처럼 투명한 푸른색의 소녀였다.
그녀 역시 루비 못지않게 아름답다. 물결처럼 찰랑이는 하늘색 머릿결은 골반 부근까지 흘러내리고, 물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인다. 나비가 앉을 수 있을 듯 길게 뻗은 속눈썹과 복숭앗빛 입술. 그 얼굴엔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이 기품 있게 내리앉아 있다.
루비가 활동적인 미소녀라면, 아쿠아는 조신한 아가씨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급하게 오다가 옷이 찢어졌어……."
아쿠아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루비에게 자신의 의상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복장 역시 루비와 같은 종류로, 디자인은 같지만 차분한 푸른색 리본과 아쿠아마린 보석이 장식된 점에 차이가 있다.
"뭐 어때, 나중에 원래대로 돌아오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루비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곤, 아쿠아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먼 길을 달려온 탓인지 호흡이 흔들리는 아쿠아의 질문에, 루비는 말없이 한 지점을 가리켜보였다.
아쿠아가 오기 전까지 그녀의 시선이 향하던, 높은 빌딩이 펼쳐진 먼 저편.
소녀들이 서 있는 도시의 중심─ 즉, 도심이었다.
"막 자려고 하던 참에 느낌이 안 좋아서…… 분명 '녀석'이겠지."
소녀들이 서 있는 주택가와는 다르게, 도심 부근에는 높고 커다란 빌딩이 수없이 세워져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눈부신 자태는 24시간 쉬지 않는 도시의 심장부로서 얼핏 이상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루비는 그 풍경으로부터 희미하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평소와는 다르다. 밤하늘을 밝히는 불빛 속, 왠지 모를 위태로운 느낌은 그녀의 '감'을 불길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 좋지 않은 예감이 어떤 정보보다도 확실함을 알기에, 이렇게 늦은 밤까지 나서 도심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곤란하네, 하필 이런 시간에……."
"뭐, 그 녀석 하는 짓이 항상 그렇지."
아쿠아의 혼잣말에 퉁명스레 대꾸하며, 루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듦에 따라 풍성한 양털 뭉치 같은 양 갈래 역시 찰랑이며 흔들렸다.
하아, 뽀얀 숨결을 내뱉은 뒤, 루비는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체를 꺼내었다.
역시나 소녀 취향의 장식이 가득한 달걀형 물체는, 얼핏 보면 휴대폰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잘 세공된 화장품 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정체를 알기 힘든 물체의 측면을 조작하자, 이내 끝 부분으로부터 홀로그램 비슷한 영상이 투과되며 현재 시각을 표시해주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가서 해결하자!" "응!"
짧게 말을 주고받은 루비와 아쿠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이내 도심을 향해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의 주위로 눈부신 빛이 모여들고, 유성 같은 꼬리가 형성되어 주택가 위에 포근하게 흩뿌려졌다.
밤하늘 위로 입자를 퍼트리며 도약하는 붉은색과 푸른색 빛의 형체. 그것은 결코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빛이었지만, 동시에 아주 그립고 익숙한 느낌을 불러오기도 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도시의 하늘을 질주하는 눈부신 빛의 미소녀. 여성이라면 어린 시절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뭇 소녀들의 영원한 헤로인(Heroine).

그것은 마치, TV에서 보았던……
─마법소녀.





#01

짓밟혔다. 한없이 짓밟혔다.
저 멍청한 인간들을 짓밟으라고 기세 좋게 명령한지 8분 23초, '검은 남작 그람'은 처참히 짓밟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채 5분도 버티지 못하던 평소에 비하면 한층 진보했다는 느낌도 들지만, 결국 그만큼의 힘을 더 쏟아 부었으니 오히려 효율은 나빠진 셈이다.
아아, 도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걸까. 처참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자신의 몰골에, 눈물 섞인 패배의 쓴맛을 맛보는 그람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굴욕을 선사했냐고? 그야 당연히…
"…마법소녀, 퓨어하트으으……."
……이다. 타오르는 분노를 담아 으르렁거리는 그람이었지만, 위협이 되기는커녕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정수리에 얹힌 발에 한층 더 무게가 실리며, 그람을 향해 짜증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뭐, 불만 있어?"
"아뇨, 없습니다."
재빨리 대답한다. 생명의 위협 앞에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그렇게 순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람이었지만, 상대의 화는 결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도대체가 말이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기나 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목소리. 드센 소프라노 보이스에 담긴 열기는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듯 매섭게 이글거리고 있다. 그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은 반발심으로 머리 위 상대를 힐끗 노려보았다.
……붉다. 딱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붉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간 소녀였다.
그 어떤 염색약으로도 재현할 수 없을 선명한 붉은빛, 양 갈래로 묶어 올린 머리칼은 양털 뭉치처럼 풍성하게 흔들거린다. 열기를 가득히 품은 눈동자 역시 이글거리듯 붉고, 프릴 가득한 의상 곳곳에 달린 새빨간 리본 장식 역시 화려하니 눈에 띈다.
무엇보다 현재 그람을 향해 뻗어 내린 두 줄기의 각선미가─
"……어딜 보는 거야!"
콰직. 어느새 시선을 알아챘는지, 소녀가 발을 들어 그람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방금 뒤꿈치로 찍지 않았나. 거기다 네 신발 하이힐이잖아.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냐. 울먹이며 바닥을 뒹구는 그람이었다.

"아하하, 루비… 아무리 그래도 밟는 건 좀……."
묵사발이 되어가던 그람에게 구원의 빛을 내려준 건, 뒤에서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였다. 산뜻한 청량함이 감도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내 자신이 '루비'라 칭한 붉은 소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자, 그만하자."
"하지만 이 녀석은…"
"루비."
"……알았어."
아이를 달래듯 어르는 목소리, 하지만 거기엔 거역할 수 없는 엄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람의 느낌이 기분 탓만은 아니었는지, 루비 역시 투덜투덜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마지못해 올렸던 발을 거두어들였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람의 앞에, 문득 꽃처럼 달콤한 향기가 흘러든다. 고개를 드니 시야에 들어오는 물빛 머릿결. 잔잔히 미소 짓는 소녀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퓨어 아쿠아'. 퓨어 루비와 달리 온몸을 푸른색으로 치장한, 또 다른 마법소녀이다.
"뭐… 뭐야."
본래라면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지만, 쓸데없는 자존심과 당황 때문인지 냅다 퉁명스런 말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쿠아는 언짢은 기색도 없이, 예쁜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람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야."
"……."
속셈이나 계산이라고는 일말의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눈빛. 그 순수한 선의가, 악당인 그람에게 있어선 한없이 낯간지러우면서도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피하자니, 갑작스레 차가운 무언가가 왼쪽 뺨을 간질였다.
뭐야, 싶어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아쿠아가 자신을 향해 손수건을 갖다 대고 있었다.
"뭐, 뭐뭐뭐뭐, 뭐 하는 거야!?"
손발을 버둥거려 필사적으로 물러나곤, 한껏 당황하여 소리친다. 아쿠아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윽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뺨에 상처가 있어서."
"그…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거칠게 소리친 건, 높아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지금이 어두운 밤이어서 다행이다. 이런 모습을 녀석들에게 보였다간 비정한 악당의 권위는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말리라.
……아니, 이미 무너진 지 오래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일단은 돌아가자. 시간도 늦었고."
루비가 그렇게 말하였다. 그람을 흘깃 노려보는 눈길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아쿠아 때문인지 더 이상 어찌하지는 못하고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람은 안도한 듯 한차례 한숨을 내쉬고, 이내 일어나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하였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자, 그람의 시야에 폐허가 다 된 도심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으레 그렇듯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으로, 도로와 건물은 폭격이라도 당한 듯 깊게 파이고 금이 간 모습이었다. 복구하려면 힘 좀 들겠군.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이 싹트는 그람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떠날 채비를 마친 두 소녀가 그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싸늘하게 노려보는 루비와, 방긋 손을 흔드는 아쿠아. 그 태평한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뒤, 그람은 자신 또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돌아가는 길 역시 평범하지는 않다.

─눈을 감는다.
'마법'이라는 힘이 무한정으로 만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대 기술에 비한다면 만능에 가까운 능력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폭발물 없이 폭발을 일으킨다든가,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을 불러내는, 그런 신비한 힘. 인간의 몸속을 흐르는 숨겨진 에너지인 '마력'을 이용해, 세상의 이치와 법칙을 왜곡하는 초현실적 기술이 바로 '마법'이다.
그람이 지금 사용하려 하는, '공간을 이동하는 힘'역시 수많은 마법의 권능 중 하나였다.
단숨에,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소모하는 마력도 증가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편리한 능력임에는 변함이 없다.
"……."
눈을 감고 마력의 흐름을 그린다. 검붉게 빛나는 선명한 마력의 파동이 그람의 발치로부터 원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지난날의 굴욕적인 후퇴들 때문에 익숙해진 주문을 중얼거리자,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마력의 빛이 바닥에 복잡한 문양을 새겨나갔다.
천천히 눈을 뜬다. 자신의 주변에 떠오른 검붉은 마법진을 확인하곤, 고개를 들어 마법소녀들의 행방을 쫓았다. 소녀들은 이제 막 그람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참이었다.
……퓨어하트를 바라보며 눈을 감은 시점으로부터,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는데, 일촉즉발을 다투는 전투 상황에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방어력의 약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떠안고 있는 마법사들이기에,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 즉 '시전 시간'의 길이는 한 마법사의 실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는 한다.
일반적인 마법사의 경우 한 마법을 사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5~6초. 시전 시간을 3초 이내로 줄이기만 해도 베테랑 마법사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즉, 불과 0.4초 만에 떠오른 발밑의 마법진은, 그람이 얼마나 우수한 마법사인지를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모양인지."
초췌하게 얻어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뒤늦게 설움이 복받쳐왔다. '마법소녀 퓨어하트'에게 패배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자존심에 새겨지는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후회하느니 어서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다.
'공간 이동' 마법이 준비된 만큼, 그람은 이제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 따뜻한 온수와 폭신한 침대를 그리며 집을 향해 이동하려는 찰나……
─머릿속에, 번개와도 같은 묘안이 스쳐 지나갔다.
"…………."
패배의 굴욕을 만회하고, 악당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마지막 한 수.
급히 마법의 발동을 멈춘다. 소녀들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람은 뒤돌아선 소녀들의 등을 가만히 노려보며 두뇌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위험성은, 있다. 까딱하면 생명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람 역시 이래봬도 수십 번의 전투를 겪어본 베테랑이다. 목표와의 거리가 저 정도라면, 설령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대처할 순 있을 터였다.
더불어 이쪽엔 0.4초 안에 발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이 있다. 문제가 생긴다 해도 도망치면 그만 아니겠는가.
……좋았어.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들어 입을 연다. 목표는 빨강, 조금 전까지 그람에게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주었던 양 갈래 마법 소녀였다.
"야, 루비!"
"……뭐야."
그람의 외침에 루비가 돌아본다. 여전히 살벌한 표정은 흠칫 오한이 들 정도였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람은 약간 떨리는 손을 쥐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 그럼 긴장을 가다듬고… 가볼까.
"…………너 아까 나 밟고 있을 때 팬티 보였다."
움찔. 루비가 경직된다. 행동이 멎고, 이후 표정이 굳는다. 석상 같은 모습으로 한동안을 멈춰 있더니, 이내 손끝부터 어깨, 허리,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였다. 용솟음치는 마력에 주변의 돌조각이 떠오르는 모습은 실로 공포 그 자체. 아마 곧 있으면 치사량의 공격이 날아오리라.
하지만 여기서 겁먹고 물러날 수는 없다. 그람은 한쪽 입가를 씨익 끌어올리곤 조소하듯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핑. 크. 색. 그리고… 토. 끼. 무. 늬."
말은 쉽지만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발언이었다.
─그야 눈앞에서 타오르는 루비의 마력에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고 있고. 응, 비유가 아니고 정말로 타오르고 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위압감이 전해져온다. 이런 루비와 대적하다니,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살행위라고나 할까.
……그람은 자살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을 닦으며, 그람은 필사적으로 떨리는 다리를 바닥에 붙들었다. 이제 0.4초안에 발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마법만 사용하면─

"…………이 변태자시이이익……."

그것은 마치… 빛과도 같은 속도였다. 한순간의, 0.001초의 오차도 두지 않고서, 어느새 코앞까지 파고든 붉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신경의 반응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에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수라(修羅)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그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그람의 얼굴에는 루비의 킥이 파고들고 있었다.
……아듀, 세상.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새벽녘 도심의 거리에, 둔탁한 파열음이 수십 차례 울려 퍼졌다.


♪ ♬ ♪


'검은 남작 그람'은 악당이다.
통칭 그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조직 《나락 제국》의 간부로, 무시무시한 힘을 구사하는 어둠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악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목표는 세계 정복.
이는 그람 개인의 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소속된 《나락 제국》의 비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단순하고 명쾌한 목적을 위해 오늘도 그람은 불철주야 세계를 위협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물론, 입만 살아있는 건 아니다. '검은 남작 그람'이라고 하면 마법사 세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람은 '마스터 매지션'이라 불리며 수많은 어둠의 마법사 사이에서도 공포와 경외를 한 몸에 모으는 존재였다.
세계에는 강자가 수도 없이 널려있다. '60억 분의 1의 사나이'라든가, '목 꺾기의 달인' 같은, 누구나 알만한 '세계 최고의 사나이'들 말이다.
하지만 그람의 힘은 그러한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만일 그가 진심을 발휘한다면, 설령 전 세계의 군대가 나선다 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이다.
농담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 힘이지만, 그렇기에 세계정복이라는 야심찬 꿈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람에게 있어 세계 정복은 말 그대로 식은 죽 먹기. 두 눈을 감고도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두 눈을 감고도 가능했어야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이란 녀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이다.
'인과의 의지'라는, 세상의 균형을 관장하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힘. 그러한 의지가 선택한 두 명의 소녀…….
'마법소녀 퓨어하트'가 나타난 것이다.
바람처럼 나타난 퓨어하트는 그람의 세계정복 계획을 초장부터 가로막았고, 그 힘은… 실로 강대했다.
강하다. 지나치게 강하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미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그람조차 가볍게 넘어서는 그녀들의 힘은 가히 우주적 공포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힘. 나날이 진화하는 능력. 만약 그녀들이 악의 세력이었다면 지구는 하루 만에 멸절의 길을 걷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람의 세계정복이 요원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악당 그람은 마법소녀라는 세계방어 시스템에 끝없이 깨져나가면서도, 실낱같이 새어 들어오는 가능성의 빛에 하루하루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주아주 평범한 비일상.
……물론 그 이면엔, 인간으로서의 일상 역시 존재하고 있다.


♪ ♬ ♪



"……늦었군."
늦어도 대차게 늦었다.
한 명의 소년이 질린 듯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년의 앞에 서있는 것은 '공립 새빛고등학교'. 교문 앞 명패가 인상적인, 반대로 말하자면 명패 말고는 뭐 하나 인상적일 것 없는 평범한 고등학교이다.
녹슨 철제 창살문을 넘으면 보도블록으로 이루어진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고, 그 옆으론 모래가 흩날리는 운동장이 있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5층짜리 교사가 보이는데, 이 역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평범한 공립학교 건물이었다.
교사 꼭대기에 세워진 커다란 시계는, 어느새 정오를 넘어 점심시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 시간에 등교를 하는 다른 학생은 없다. 평소라면 시계 대용품이나 다름이 없는 휴대폰이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는 것도, 분명 화난 담임이 계속해 전화를 걸고 있기 때문이리라.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소년은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시선을 돌려 교문 안쪽을 훑어보자, 다행히 한가롭게 교정을 거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학주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단 말이지……."
무단 지각이라는 죄목 때문에 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기서 괜히 발각되어 지독하게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는 건 사양하고 싶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다시 한 번 교정을 두루 살피고서야, 마침내 소년은 교문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독특한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일단 미남이다. 여학생들이 까르르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지만, 잘생겼는지 아닌지를 논한다면 충분히 미소년의 축에 낄 수 있을만한 외모였다.
그러나 그런 외모가 무색하게도,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과 생기 없는 눈동자는 기껏 준수한 소년의 이미지를 기준점 이하로 끌어내리고 있다. 칠흑색의 머리를 헤집으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하품을 내뱉는 모습은 마치 수산시장 한편에 팔다 남은 동태를 연상시켰다.
소년이 입은 와이셔츠는 손질 한 번 하지 않은 듯 구깃구깃한 주름이 가득하고, 그 위에 대충 걸친 블레이저엔 교칙에 따라 착용한 금속 재질의 명찰이 흔들리고 있었다. 명찰 위에는 알아보기 쉬운 명조체로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민 해인'. 그것이 바로 소년의 이름이었다.
"좋아… 일단 현관까지는 어떻게든 OK."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며 코끝에 걸친 안경을 들어올린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뿔테 안경은 다소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평소 눈이 나쁜 해인에겐 어쩔 수 없는 동반자이다. 물론, 해인의 입장상 안경은 훌륭한 변장 도구이기도 하다.
"…뭐, 어찌됐건."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긴 하지만 아직은 수업시간이기에, 드넓게 펼쳐진 복도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해인은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1층, 2층… 이제 두 층만 오르면 도달하는 4층. 해인이 있는 중앙 계단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머지않아 <2-3>이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 서바이벌 잠입 액션의 목적지이자 세이브 포인트인 해인의 학급이었다. 언제 선도부 교사와 마주칠지 몰라 마음 같아서는 빈 상자라도 뒤집어쓰고 싶다.
후우, 일단 한숨을 내쉰다. 다행히 아직까지 누군가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교사들로부터 평판이 나쁜 해인이기에, 지금처럼 지각하는 모습을 들켰다간 온갖 잔소리를 뒤집어쓸 게 뻔하였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자각하라느니 뭐니… 상상만 해도 지겨운 말들이다. 어쨌든 일단은 세이프라고 생각하며 한층 가볍게 계단을 오르는 해인이었다.
그 순간……

"……민 해인."

……아아, 그래. 꼭 이렇지. 인생이란 놈은 한없이 고약해서,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두고 곱게 넘어갈 리가 없다. 마치 맛 좋은 고기에 몰려드는 한 무리의 하이에나처럼, 비껴갈 수 없는 불행은 반드시 발목을 붙잡는 법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린 뒤, 마침내 결론을 내리곤 18년 인생 최고로 살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등 뒤의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아, 저기.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아침 일찍 등교하려고 보니 열이 45도를 넘어가지 뭐에요! 하하, 참, 이거. 아시다시피 저는 성실하게 시간을 맞춰 등교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뭐야, 너였냐."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함께 굽실대던 해인의 태도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어느새 평소처럼 낮은 목소리와 부루퉁한 표정으로 돌아온 해인은 험악하게 계단 밑을 노려보았다.
계단 아래의 상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비수처럼 날카로운 일침을 던져왔다.
"이제 와서 등교야? 팔자 좋네."
투명하고 낭랑한, 동시에 냉랭하게 얼어붙은 싸늘한 목소리.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소녀의 얼굴에선 해인에 대한 온정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보랏빛 흑발을 양털 뭉치처럼 풍성하게 올려 묶은 포니테일 소녀가, 종이 다발을 잔뜩 떠안은 채 계단 밑에서 해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 신혜."
해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해인의 떨떠름한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결코 반갑게 인사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소녀… 신혜는 가볍게 코웃음을 내치곤 가시 섞인 말들을 내뱉었다.
"뭐, 알만해. 보나마나 퍼질러 자다가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왔겠지."
"너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그래? 유감이네. 네 한심한 몰골을 볼 때마다 한 마디씩 던져주지 않으면 기분이 몹시 불쾌하거든."
…가시가 섞인 수준이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공격적인 어투였다.
해인은 대답 대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더더욱 의기양양해진 신혜가 계속해 독설을 던져왔다.
"혹시 학교에 지각하는 걸 멋있다든가 쿨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하긴, 중2병이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네."
…아아, 짜증나. 어른스럽게 무시하려 했건만, 저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솟아오르는 열불을 주체할 수가 없다. 침착하게 대응한다곤 했지만, 어쩌면 해인 역시 조금 흥분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금기로 여겨지는, '그 화제'를 꺼낸 것이다.
"시끄러워, 그 나이나 먹고 마법소녀 놀이하는 녀석한테 듣고 싶지는 않다. 퓨어 루비."
"뭐, 뭐… 잠깐! 왜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오는데!?"
예상대로,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신혜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음정 잃은 노래처럼 새된 목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만족스럽게 한쪽 입가를 끌어올렸다. 과연, 이래야 제맛이지.
방금 오갔던 말대로, 해인의 눈앞에서 허둥대고 있는 이 녀석이 바로 그 유명한 마법소녀 퓨어하트, '퓨어 루비'였던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던 일전의 모습과는 달리 어딜 봐도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 하지만 일견 연약해 보이는 모습 안에는 무지막지한 힘을 숨기고 있다.
덧붙여 그런 신혜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해인은 다름 아닌…
"그, 그러는 너도 다를 거 없잖아! 이 중2병 남작 그람이!"
"검은 남작 그람이다. 자랑스러운 이름이지."
신혜와는 달리 해인은 자신이 '검은 남작 그람'이라는 사실에 거리낌이 없다. 아니, 거리끼기는커녕 오히려 광장 한복판에서 '나는 그람이다!'라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네가 중2병이란 거야."
신혜가 부루퉁하게 투덜거렸지만, 기세가 죽었는지 조금 전만큼의 독기는 없다. 해인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건 그렇고 말이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건데.
"너는 왜 여기 있냐?"
지금은 수업시간이다. 아무리 수업이 일찍 끝났다고 해도, 종이 울리기 전까지 학생이 복도를 거닐도록 놔두는 교사는 없다.
그런데도 신혜는 분명 계단 아래쪽에서 나타났고, 이렇게 해인과 함께 한가롭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
"아아아아앗!? 잊고 있었어! 심부름하고 있었는데!!"
"뭐… 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뛰어 이 바보야─!!"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신혜가 발을 구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왠지는 모르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나란히 달리게 된 해인은, 그제야 신혜가 잔뜩 들고 있었던 종이 다발이 학습용 프린트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 때문이야! 하필 네가 눈앞에 나타나선!"

"그게 왜 내 탓이냐!? 정의의 편 주제에 책임 돌리지 마!"
"어떡해, 어떡해! 이러다 종 치겠어어어어어~~!!"
이제는 울먹이기까지 하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반은 네 책임이니까!'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해인에게 종이 다발을 넘기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조금 전까지 독설을 날렸던 냉랭한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해인은 다급히 달리는 신혜를 쫓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새어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늦었~어~~!!"
"……그래, 늦었네."
두 사람이 2학년 3반 교실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전교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진 뒤였다. 담당 교사도 숨이 턱에 차오른 두 사람을 나무라기는 뭣했는지, 다행히 사건은 점심시간 이후에 두 사람이 프린트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도대체 왜 내가……."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고 있자니, 쫙 하고 노려보는 신혜의 눈빛이 매섭다. 애초에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너인데요.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미 기운도 없어 한숨으로 대신하는 해인이었다.
"어머… 둘 다 녹초가 돼 있네."
반쯤 쓰러지듯 주저앉아있는 두 사람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을 소리로 바꾼다면 이런 느낌이 될까.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미성이, 해인의 귓가를 간질이며 사뿐하게 흘러들었다.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아쿠… 아니, 이 세나……."
당황하는 해인에게 빙긋 미소를 짓는 눈앞의 소녀. 날카로운 분위기의 신혜와는 달리, 이쪽은 그야말로 양갓집 아가씨라는 느낌이다.
옅은 브라운 계통의 머리칼은 허리 부근까지 흘러내려 물결처럼 찰랑이고, 긴 속눈썹이 인상적인 눈동자는 자애로운 미소로 가득하다. 분명 동급생이건만, 넘쳐나는 모성애가 느껴지는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만면에 다정한 웃음을 띠면서, 세나가 말하였다.
"그런데 동시에 들어오다니, 꽤 사이가 좋아졌구나."
""어딜 봐서!?""
환상적일 정도로 호흡이 맞는 하모니. 말로는 부정해도 죽이 잘 맞는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신혜와 해인은 결코 인정하지 못하며 서로를 노려보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콧김을 내뿜으며 홱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재롱을 부리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 바라보며 웃음 짓는 세나였다.
"내가 보기엔 항상 사이가 좋은걸. 왜, 어제 일만 해도……."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해인이 새파랗게 질려 손사래를 친다. 어제 일이라면, 분명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전날 밤, 이제는 일례행사로 굳어버린 '검은 남작 그람'과 '마법소녀 퓨어하트'의 대결이 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그람의 참패. 하지만 패배의 울분을 풀지 못한 그람이 기어코 '퓨어 루비'를 도발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의 결과는… 해인에게 있어선 더 이상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기억이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몸이 아니었다면 전신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질겅이며, 해인은 나지막이 불평을 중얼거렸다.
"그까짓 토끼 팬티 본 게 뭐가 대수라고……."
"……더 맞아볼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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