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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Y(오타쿠가 상담해주는 연애상담소)
글쓴이: 하소연
작성일: 12-07-30 00:47 조회: 1,973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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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7시부터 상담을 시작한다. 익숙하게 컴퓨터를 킨 뒤 고성능 헤드폰을 끼고 의자에 앉아 대기하며 잠깐 잡생각에 빠져본다. 내 이름은 정유진. 18살이며 진일고등학교 'OSY'의 ‘상담자’에 ‘오타쿠’다. 잠시 동안 어젯밤 한 미연시랑 오늘 할 미연시를 생각하며 시간을 때우자 얼마 안 있어 연락이 왔다.

[“상담이다. 상대방은 여성.”]

헤드폰에서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 장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히 대답할 필요는 없기에 무시하자 잠시 후 꽤나 차분함이 느껴지는, 그렇다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소녀의 미성이 들려왔다.

[“저, 저기…… 여기서 상담하면 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게 맞나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상담소에 상담을 하는 학생들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이 상담소의 존재의의인 ‘연애 상담’을 하기 위해서고 2번째는 학교 내에서 유일하게 익명성인 'OSY'의 특징 때문에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상담하는 것. 이 소녀는 아마 후자의 케이스인 듯 하기에 난 안심시켜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 상담자인 저조차도 당신이 누구인지 모를 만큼 장현 선생님은 비밀을 지킵니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모른다. 하지만 내담자도 상담자를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장난 전화가 수 없이 걸려올 수도 있고 막장이 될 수도 있는 이 상담소는 중개인인 ‘장현’ 선생님의 도움으로 지금껏 잘 운영되어왔다. 난 내담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장현 선생님은 알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장현 선생님에게 방금 한 내담자가 어땠다고 하기만 하면 장현 선생님이 휴대폰 번호를 추적해서라도 잡아버리는 것이다. 결국 그래서 장난 전화는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고 중개인인 장현 선생님은 자신들의 비밀이나 사랑 이야기를 모르니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저…….”]

내가 이렇게까지 긴 생각을 하는데도 입을 열지 않던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상담은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상담의 내용도 중요하긴 하지만, 먼저 입을 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상담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떳떳하지 못하거나 고백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내 역할은 그런 사람들의 ‘본심’을 끌어내주고 ‘용기’를 주입시켜주는 것이라는 게 타당할 것이다.

[“으으…….”]

역시 이 소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기부터가 내가 할 일이다. 난 상담자이고 상담을 해주지만 말만 거창할 뿐 사실 그냥 기운만 내게 해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여기 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했고 그럴수록 'OSY'의 위상은 높아져만 간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시면 상담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뭐든지 용기 있게 먼저 말한 사람이 앞서나가는 겁니다. 전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니 안심하고 말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저기.”]

소녀는 드디어 마음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아, 여기서 한 번 더 언급하겠지만 내 이름은 ‘정유진’이다. 왜 갑자기 언급 하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여기서 내 이름을 갑자기 언급한 이유는.

[“저, 정유진 학생을 좋아해요! 정유진 학생을 제 연인으로 만들 수 있게 어드바이스 해주세요!”]

이름도, 성격도, 나이도, 외모도 모르는 소녀가 ‘나’를 공략할 수 있게 ‘나’에게 어드바이스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유전이라고 해도 동명이인 일 수도 있기에 난 조금 더 안전하게 가기로 결정했다.

“……정유진이라 하면?”

[“의외네요. 정유진 학생이라고 하면 한 분밖에 떠올리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역시.”

[“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타쿠이면서 쓰레기 같은 변태이면서 누구에게나 경멸 받는, 그 정유진 학생이에요.”]

……솔직히 조금 욱했다. 내 평판이 학교 내에서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서 상담소도 익명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란 말이다! 가끔 선생님들이 대형 쓰레기 봉지를 가져오긴 하지만…… 그, 그래도 아니란, 아니, 인정하기 싫단 말이다!

[“……안되나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비수를 꽂은 지도 모른 채 소녀는 말했고, 살짝 욱한 나는 좀 황당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 오타쿠 정유진이 맞겠지요?”

[“네! 전 정유진 학생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솔직히 말해서 오타쿠라고 호의를 받아본 적 없는 내게는 살짝 기분 좋은 말들이었고 왠지 모르게, 아니 확실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살짝 갈등되기 시작했다. 이 ‘황당한 생각’을 실현시킬지. ……말을 덧붙이긴 전에는.

[“아무리 오타쿠에 쓰레기…… 아니, 인간쓰레기…… 아니, 재활용도 불가능한 폐기용 쓰레기처럼 성격이 꼬였지만 그래도 전 정유진 학생을 좋아해요!”]

……내 마음 속 뭔가 무너졌다. 날 좋아해주는 사람까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솔직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방금 이 말로 인하여 난 방금 떠오른 ‘황당한 생각’을 실현시킬 결심을 세우게 되었다.

“그럼, 정유진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오타쿠이다.

[“네! 뭐든지 열심히 할게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OSY'의 뜻은 ’오타쿠가 상담해주는 연애상담소‘의 이니셜이다. ……물론 나 말고 2명 정도만 알고 있지만.

“그럼…… 짧으니 메모할 필요는 없고 내일은 일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에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신 뒤에는 보고하기 위하여 그날 저녁에 상담을 걸어주시면 됩니다.”

난 오타쿠고 한 소녀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취할 행동은 과연 뭘까? 답은 간단했다.

고양이 귀를 끼고 말끝마다 이라고 붙이십시오. 반드시, 그 날 하루 동안 반드시 그렇게 말해야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정유진이랑 같이 다니십시오.”

내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오타쿠 욕구를 철저히, 충분히 방출하는 것이었다.

-1챕터-

솔직히 말해서 일요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토요일 저녁에 했던 상담은 내 인생에서 충분히 한 획을 그을만한 큰 사건이었고, 왜 큰 사건이냐고? 나, 누군가가, 그것도 이성이 날 좋아해준다고 해준 것은 처음이다……. 어쨌든, 일요일은 그 소녀에게 뭘 시킬까, 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전부 지나가버렸다. 게다가 토요일부터 기대감에 잠도 자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은 최악. 눈 밑을 완전히 덮은 다크 써클,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 초점이 반쯤 풀린 눈동자. 최악 오브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도 학교는 가야했기에 마치 한 만화에 나오는 송충이 눈썹처럼 몸에 각반을 단 듯 무거운 느낌이 드는 몸을 일으켜 기본적인 세면을 하였다. 세면을 끝마치고 거울을 보자 그럭저럭 괜찮아진 내 모습이 보였다.

양손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로 잠을 완전히 깨운 뒤에 교복을 입고 집 밖으로 나선다. 아침밥은 기왕이면 직접 해 먹고 싶지만 어제 저녁에 해둔 밥도 없을뿐더러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밥을 먹으면 늦고, 안 먹으면 조금 남는 애매한 시간이기에 학교 가는 골목에 있는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빵이라도 먹을 생각을 하며 돈을 약간 챙겨 나왔기에 걱정은 없다. 솔직히 돈이 아깝지는 하지만 지각보단 낫기에 참는다. 집 밖에 나오고 내가 살고 있는 허름한 건물의 작은 자취방의 문을 잠근다. 어차피 훔쳐갈 것도 없기에 예전에는 잠그지 않았으나, 얼마 전 ‘그 녀석’이 내 방에 멋대로 침입해 ‘청소년이 자라나면서 성에 대해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동영상’을 ‘전부’ 삭제해버리는 대형 사건이 일어났기에 그 이후로는 확실히 잠그고 있었다. ……사실 ‘그 녀석’에게 예비 열쇠가 있어서 의미도 없는 발악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자조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언제나 그렇듯이 누군가 내 등에 가볍게 틱, 택, 톡 아이D는 개뿔 진심을 담은 전력으로 찬 발차기를 작렬시켰다.

“으어억!”

“좋은 아침!”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진 채로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자, ‘그 녀석’, 내 10년 지기 소꿉친구인 아린이 서 있었다.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단발머리로 잘랐고 키는 나보다 대략 5~10cm는 작은 미소녀이다. 가슴은…… 솔직히 축복받지 못했……크억!!!

“잠깐! 왜 갑자기 머리를 차는 건데! 게다가 얼마나 세게 찼으면 3바퀴나 굴렀다고!”

“네가 먼저 기분 나쁜 생각했잖아!”

뜨끔해서 잠깐 말이 늦어버리자 아린은 그 기세를 몰아 계속해서 날, 속된 말로 말하자면 ‘깠다.’.

“또 마음속으로 축복 받지 못한 가슴이나 그런 말 했겠지! 내가 너 하루 이틀 봐? 그리고 나 한국 평균이거든?”

아린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다. 하긴, 미연시나 애니메이션, 만화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한 없이 작아 보이는 가슴이라 해도…… 어라?

“하지만 너…… 다른 또래에 비해서도 엄청 작은 편이잖아.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빨래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내 가슴은 작지 않다고!!!”

살짝 화가 났는지 목구멍이 터질세라 소리를 지르는 아린. 야, 지금 밖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가잖아……가 아니구나. 이 동네 사람들은 아린과 나의 이런 장면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좋은 한 쌍이구먼. 안 그런가 할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요. 영감…….’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훈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낯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훈훈하게 보고 있었지만, 소리를 외친 장본인은 달랐다.

“으으…….”

아린이 자신이 한 짓을 드디어 인식 했는지 토마토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학교 쪽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지금 저 상태의 아린을 가만히 냅둘 수는 없겠지. 아린이 상처 받았을 거란 생각은 아니다.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고 저 녀석은 고작 이런 거에 상처받을 녀석은 아니니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어라? 아린 부장님. 안녕하…… 으아아아!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쫓아오세요! 누가, 제발 살려줘요. 으아아아!”

저런 식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녀석에게 무차별적으로 달려든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공격은 안하지만 저건 저거대로 무섭다. 눈에 광기를 품고 전국 태권도 대회 우승자가 쫓아온다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뭐, 실제로도 우승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난 이 참상을 막기 위해 근처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어른들께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뜻으로 허리를 숙인 뒤 현재 학교 후배 2명을 탈진시키고 또 다른 표적을 삼은 아린에게 달려갔다. ……여담이지만 아린의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아린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버렸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약 5분 동안의 추격전 끝에 아린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했고, 어느새 통학로 중간쯤에 있는 편의점 앞에 도착하였기에 빵과 우유를 편의점에서 사왔다. 아린은 내가 너무 놀려서 토라져 있기에 용서해달라는 뜻으로 팩우유를 하나 사서 빨대를 꼽아주자 가만히 있었다. 겨우 팩우유 하나에 기분 좋아하는 걸 보니 상당히 모에하다.

“오늘은 이걸로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로 안 봐줄 거야…….”

빨대를 입에 대며 중얼거리는 아린의 귀여운 모습에 빠져 있다가 얼마 안 있으면 학교라는 것을 깨닫고 빵의 포장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빵 고유의 특유한 식감과 달콤한 크림의 맛이 조화를 이루어 편의점 빵 치곤 맛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사실 공복이라 김치만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겠지만. 너무 말이 없는 것도 그렇기에 난 씹고 있던 빵을 삼킨 뒤 아린에게 말했다.

“그보다, 이번 대회는 괜찮을 것 같아?”

아까도 말한 것 같지만 아린은 태권도 전국 대회 우승자이다. 그 실력은 이미 태권도 협회에서 인정했고 학교에서도 아린을 위해 태권도 부의 예산까지 늘릴 만큼 꽤나 VIP대우를 받고 있는 내 소꿉친구님이시다.

“살짝 불안불안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괜찮은 편이야.”

“에? 그럼 위험한 거 아냐? 지금까지 불안해 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참고로 아린이 출전하는 대회는 단 한 곳. 가장 유명하며, 가장 강한 상대들만 출전한다는 1년에 딱 한번 열리는 태권도 협회 공식 대회이다. 상금도 엄청나고 참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원금이 팍팍 오기에 아린은 딱히 다른 대회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게 말이야. 역시 널 때리지 않으니까 실력이 줄어든 것 같아서…….”

“난 샌드백이냐!”

내가 반박하자 아린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그치만……. 유진이 너 고등학교 들어오고서는 나랑 집에 같이 가는 거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적잖아!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후 ‘OSY’의 상담자가 되었고, 그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서 상담을 했어야 했으니. 뭐, 이번 것은 내가 사과해야할 것 같다. 아린이 나름대로 걱정을 해주고 있었을 테니. 난 이런 마음을 담아 아린에게 말했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내 말을 들은 아린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고개를 숙이며 빨대에서는 입을 때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걱정해준 거 아니다 뭐…….”

그 후로는 항상 같이 등교하다 보니 더 이상 말할 소재도 떨어져서 조용해졌고 그 사이에 난 편의점에서 산 빵과 우유를 다 먹었다. 쓰레기는 방금 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렸고 어느새 허전해진 빈손으로 터덜터덜 걷자 저 멀리 교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린 덕분에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2일 전 밤에 상담한, 날 좋아한다는 소녀.

분명 난 고양이귀를 쓰고 냥이라고 어미를 붙이며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으라고 조언, 아니 명령에 비슷한 상담을 해주었다. 소녀는 한다고 했지만 사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학교 내에서 오타쿠로 알려져 있고 그다지 평이 좋지도 않는 나다. 그런데 왜 미소녀가 날 좋아해주겠는가. 아마 그다지 레벨이 높지도 않는 소녀일 것이다.

“무슨 생각해?”

내가 골똘히 생각하며 아무 말도 안하고 있자 아린이 궁금한 듯이 지긋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아린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잠깐 바라보았으나 이내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하였으며 아린과 나는 어느새 교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2일 전 상담했던 소녀는 아마 점심시간쯤에 오겠지. 아니, 편지 같은 것으로 오히려 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부를 수 있다.

“저게 뭐야?”

교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린이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채우며 한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따라서 보니 거기엔 왜인지는 몰라도 학생들 수십명이 누군가 한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집단 학교 폭력이라는 것 같다. 3년 전까지는 내가 저 중앙에 있었지……. 그런데 교문 앞에서 대놓고 폭력을 할 수 있나? 갑자기 궁금해져 학생들을 보자 흔히 말하는 일진이 아닌 평범한 애들도 대다수 껴 있었다. ……궁금하다. 아린은 벌써 가보고 싶은지 날 바라보며 ‘우리도 가보자‘라고 계속해서 어필하고 있었다.

“궁금하니 무슨 일인지는 보고 갈까?”

“응!”

아린은 즐겁다는 듯이 내 팔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어이, 그렇게 궁금했으면 그냥 혼자 가보면 되잖아. 아린은 내 어릴 적 시절을 아니까 나한테는 특히나 조심한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런 사소한 배려를 받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좋은 편이니 그 배려를 굳이 거절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아린과 난 학생 무리에 도착했다. 으으, 뭐야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목숨 걸고 몰려 있는 거야. 참고로 지금 학생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도 아니다. “제, 제발! 나 한번만 더 보게 해줘!” “저리 꺼져! 나도 아직 몇 초 못 봤다고!” 등등 소리를 지르며 악착 같이 달려들고 있다. 몸싸움에서 밀려 밖으로 강제로 쫓겨난 학생들 중에는 훌쩍이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꼭 봐야 할까.”

“당연하지! 이렇게 재밌어 보이는 걸 무시하고 갈 내가 아니라고!”

아니, 가끔 쯤은 무시하자고. 이런 내 마음을 무시한 채 아린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학생들 무리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앗! 아린님도 오셨어!”

누군가 이렇게 외치면서 아린의 있던 학생들이 마치 모세의 기적이라도 되는 듯이 옆으로 흩어지며 직선의 길을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나는 그 인파에 밀려 옆으로 휘말려서 중앙에 있던 사람을 보지 못하고 겨우겨우 아린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아린의 표정은 경악과 감탄이 섞인 표정이었고 이내 근처에 들리는 말에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이걸로 우리 학교의 밸런스는 제대로 무너지겠지?” “당연하지, 이 정도면 전략 핵 폭탄의 수준이잖아.”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하셨을까.” “그건 모르겠어. 본래 인기투표 같은 거에 휘말리시는 분이 아니신데…….”

간간히 들려오는 말에 아린은 표정을 더욱더 찡그리며 불쾌하다는 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본래 시끄러웠던 이곳은 아린이 입을 여는 순간 수련회 때처럼 갑자기 침묵만이 남았다.

“……무슨 생각이시죠?”

처음 들어보는 아린의 싸늘하고 딱딱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아린의 목소리에도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상대방이 불쾌한지 아린의 표정은 더욱 더 찡그려졌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실망이군요. 당신이라면 절대로 그런 거에 안 얽매일 줄 알았는데.”

왠지 말이 심해질 것 같다. 난 더 이상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학생들을 밀치며 아린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학생들 몇 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날 바라보지만 나인 것을 알고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린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소꿉친구인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린이 바로 눈앞에 있다. 약 2명만 더 재치면 이제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다. 겨우겨우 1명을 더 제치고 앞 쪽으로 걸어 나간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나의 등을 밀었다.

“으아아아!”

아마 장난기가 발동했던 거였겠지만 밀려나간 난 패닉 그 자체였다. 아린과 상대방의 중간. 아린은 날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고 학생들은 내가 말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대체로 안심하는 표정, 그리고 상대방은 내 뒤에 있어서 반응을 보지 못했다. 난 아린을 보며 이제 그만 해라는 눈빛을 보냈고 아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찡그렸던 얼굴을 다시 풀었다. ……역시 아린은 찡그린 것 보다는 웃는 것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뒤로 돌아 상대방에게 사과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기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서웠기에 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시 돌아 기다리고 있는 아린에게 가려는 순간, 내 뒤에서 익숙한, 그렇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유진 학생!”

날 부른다. 사과로는 끝나지 않는 건가! 라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뒤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웨이브가 들어간 허리를 덮는 풍성한 연갈색 머리카락, 흔히 말하는 커다란 눈, 환상적인 이목구비. 아린이라는 미소녀를 통해서 단련된 나의 눈에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름답다고 느낄 그런 외모였다.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것만 아니면.

“아, 안녕하세요. 유진 학생! ……냥.”

순간 흐르는 정적, 그리고 이내……

“으아아아아!” “코, 코피가 멈추지 않아!” “여신의 강림인가!” “아, 이제 죽어도 좋아.”

엄청나게 시끄러워졌다. 그렇다. 슬슬 다 눈치,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상대방은 머리 위에 고양이 귀, 오타쿠 용어로 네코미미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사람을 안다. 이 아름다운 외모를 다른 사람과 혼돈할 수는 없으니. 이 사람의 정체는 우리 진일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인 이희원 선배이다. 중학교 때부터 엄청난 인기였다고 전해지며 아린과 함께 학교의 2대 미소녀로 추앙받고 있는, 어떤 학생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어떤 라노벨의 학생회장과 달리 로리도 아니고 뭐든지 완벽하며 교내에 팬클럽까지 존재한다고 전해지는 그런 사람이다.

“자, 잠깐. 뭐하는 짓이죠!”

아린이 당황하며 다가와 내 옆에 서며 외쳤다. 하지만 희원 선배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개를 숙인 채 학교 건물로 달려가 들어가 버렸다.

“…….”

남겨진 사람들(나와 아린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도망가는 희원 선배의 등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뭐였던 거야 도대체?”

오전 수업은 그냥 별 일 없이……가 아니라 내 옆으로 애들이 하도 모이는 탓에 정신없어서 시간 지나가는지도 몰랐고 식당에 갈 경우 사람이 엄청나게 모일 것이라는 계산 하에 먼저 빵을 사서 옥상으로 도망쳐와 있었다. 아린은 아직도 불만스럽다는 듯이 볼을 부풀린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왜?”

기계적으로 그다지 맛이 있다고 하기도 힘든 매점 빵을 씹으며 아린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린은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고양이 귀라니, 그거 네 취향에서나 나올 법한 거 아냐? 게다가 냥이라니. 도대체가 이건 널…….”

아린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살짝 빨개지며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아린이 하고 싶은 말은 나도 뭔지 안다. ‘널 좋아하는 거잖아.’가 아린이 끊은 말이겠지. 뭐, 사실 이런 말 안 들어도 희원 선배가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역시 솔직하게 말하자면 놀랐다. 그다지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학교 2대 미소녀 중 한 명인 희원 선배라니. 게다가 희원 선배는 성격도 좋기로 학교 내에서 유명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여기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사귀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부모님의 일도 있고 하니 일단 희원 선배를 조금 더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진심으로 희원 선배를 좋아하게 되면, 그때 내가 먼저 정식으로 고백할 것이다. 단지 얼굴이 예쁘다, 주변의 평판이 좋다는 것으로만 사귀기에는 어릴 적 일이 떠올라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다.

“별로, 네가 뭐라 할 일은 아니잖아.”

“…….”

아린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볼을 부풀리며 날 바라보지만 사실은 사살이었다. 희원 선배가 어떤 행동을 하던 아린에게 어떤 피해가 오겠는가. 아린은 할 말이 없었는지 우우……. 거리다가 갑자기 변명거리가 생각났는지 날 보며 말했다.

“상관 있…….”

아니, 말하려 했다. 아린이 입을 연 순간 옥상 문이 열린 것이다. 본래 이 옥상은 몇 명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아린 같은 경우는 운동 중 상쾌한 공기가 마시고 싶을 때 가라고 열쇠를 받았고 나 같은 경우는 장현 선생님께서 불가피하게 밖에서 상담을 하게 될 경우 와라고 열쇠를 주셨다. 뭐? 아린의 경우에는 말이 안 된다고? 솔직히 생각해봐라 아린은 전국 태권도의 우승자이다. 학교로 오는 지원금이 얼마인데 겨우 이 정도의 메리트도 학교에서 안 주겠는가. 어쨌든 옥상 문은 열렸고 아린과 난 살짝 긴장한 채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어온 순간, 아린의 표정은 굳어 버렸다.

“유진 학생. 여기 계셨네요. ……냥.”

여전히 냥냥 거리는 것은 부끄러웠는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희원 선배. 역시 미소녀다보니 이런 사소한 행동도 귀엽다고 느껴진다. 하긴, 10년 동안 친하게 지낸 아린을 지금도 귀엽다고 느끼니 당연한 걸까……. 왠지 대단하다 미소녀 파워.

“여긴 또 왜 오셨죠?”

내가 대답하기 전에 아린이 희원 선배를 과도할 정도로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희원 선배는 당황하지도 않고 말했다.

“유진 학생과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왔는데요? ……냥.”

“유진이랑요? 왜요?”

아린은 경계를 여전히 풀지 않았고, 솔직히 2일 전만 아니면 나도 경계했을 테지만 이미 희원 선배가 날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기분 좋은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린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당연히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

“이유요? 꼭 이유를 말해야 하나요. ……냥.”

“당연하죠! 지금까지 거의 안면도 없던, 학교의 인기인이신 학생회장님께서 학교 내의 쓰레기인, 재활용조차 못하는 폐기물 오타쿠 쓰레기를 찾아서 점심을 같이 먹자 하는데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같이 먹습니까.”

“전 그다지 아린 학생과 점심을 먹고 싶은 게 아니니까 재활용조차 못하는 폐기물 오타쿠 쓰레기 유진 학생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냥.”

“윽…….”

아린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살짝 물러났고 희원 선배는 그대로 말을 이어 왠지 디스 당한 기분을 느끼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유진 학생. 저도 같이 먹어도 되나요? ……냥.”

옆에서 아린이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지금 거절 안하면 죽이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지금 나에겐 겨우 목숨보단 연애 사업이 더 중요하다. 희원 선배를 좋아하기 위해서. 아니, 좋아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아린의 손가락이 내 몸을 관통할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연애 사업을 방해받을 수는 없다. 그런 결의를 담아 희원 선배 몰래 고개를 살짝 돌려 아린의 눈을 바라보자 아린의 눈동자는 왠지 불안해보였다.

“유진 학생도 드세요. ……냥.”

아린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하자 희원 선배가 어느새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안에 있던 도시락을 꺼냈다. 아니, 왜 3단 찬합인데……. 그런 표정으로 희원 선배를 바라보자 희원 선배는 볼을 살짝 붉히며 투덜거리는 듯이 말했다.

“저 혼자 먹으려고 이렇게 많이 싸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요……. 맛있게 드셔주세요. ……냥.”

희원 선배는 알고 있을까. 이건 누가 봐도 날 좋아한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도시락까지 싸올 행동력이 있었으면 상담하지 말고 그냥 희원 선배 페이스대로 날 공략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쯤 내 마음 속 호감도가 엄청나게 수직상승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날 좋아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도시락 같은 기습 이벤트에도 충격이 덜했고 그 만큼 호감도는 절감 돼서 올라갔다. 호감도, 호감도 거리니까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 설명하지만 호감도는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난 지금 도시락을 받았는데도 생각 외로 기쁘지 않다는 것이다.

“고, 고마워요.”

희원 선배가 주는 거라 기쁘게 먹으려 했지만 수저가 없었다. 오늘은 빵을 먹었고, 아니, 애초에 수저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도 않은 것으로 안다. 그리고 희원 선배는 전용 수저인 듯 수저통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꺼내 자신의 손에 쥐었다. 역시 자신이 먹는 것이 더 중요한가……라고 약간 푸념하고 있을 때, 내 멘탈이 붕괴했다.

“아, 아아아아…….”

희원 선배가 도시락에 있던 달걀말이를 들더니 나의 입으로 천천히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아린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당황한 체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와 희원 선배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고 희원 선배 역시 볼이 살짝 붉었다. 역시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거겠지. 애초에 이런 거에 면역이 거의 없는 난 거절할 수 없었다.

“아, 아아…….”

입을 천천히 벌려 달걀말이의 침입을 허용한다. 그리고 천천히 씹는다. ……맛있다. 어지간한 가게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고 게다가 매점 빵에 의해 무미건조해진 내 입안에 기운을 나게 해 줄 만큼 다정함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헤헤, 맛있어요? ……냥.”

희원 선배는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직접 만들었답니다. 냥!”

기분이 좋은지 희원 선배는 더 이상 냥냥 거리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말했다.

“……엄청나게 맛있었어요.”

긴 말은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맛있는 요리를 좋지도 않은 문장력으로 찬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요리에 대한 모독이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짧지만 내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해줄 수 있는 한 마디로 충분하다. 희원 선배도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해맑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고마워요. 냥~. 그럼 더 드세요. 유진 학생. 냥.”

희원 선배는 그 후 식사가 끝날 때 까지 직접 먹여주었고 결과적으로 희원 선배는 점심을 얼마 먹지 않았다.

“그 정도 먹고 괜찮나요?”

내가 살짝 미안한 감정으로 물어보자 희원 선배는 이제는 트레이드마크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해맑은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전 유진 학생에게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몸속이 꽉 찼는걸요.”

뭐로 찼는지는 물어보지 않겠다. 왠지 되게 민망할 것 같거든. 희원 선배는 그 말을 한 뒤 옥상 문을 열고 가셨다.

“……끝났어?”

희원 선배가 돌아가자 옆에 있던 아린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 응. 맛있더라. 무지.”

희원 선배가 내게 먹여 주실 때 아린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을 삐죽 내놓은 채 묵묵히 있었다. 중간에 희원 선배가 같이 먹자고 권유도 했지만 아린은 거절했다. 하긴,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쁜데 희원 선배의 도시락을 함께 먹을 리가 있나. 그보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쁜 걸까 이 둘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서 교실로 돌아오자 나보다 키가 살짝 큰, 모범생 스타일인 내 또 다른 소꿉친구 중에 하나인 임기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학생회장님이랑 사귄다며, 축하한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에? 아…… 모를 수도 있겠다. 너 지금 학교에 퍼져 있는 소문의 중심인 건 알아?”

“내가?”

“응. 유아린을 항상 옆에 끼고 다니는 오타쿠가 학생회장님에게까지 마수를 뻗었다는 소문.”

“그 근거 없는 소문의 정체는 뭐냐 도대체.”

“근거가 없어보이진 않던데 말이지. 애초에 다른 사람이랑 접점이 얼마 있지도 않던 학생회장님께서 갑자기 고양이 귀를 쓰고 교문 앞에서 대기.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가 네가 오자 말자 냥이라고 어미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그렇네. 그래도 사귄다는 건 헛소문이야.”

“음……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그보다 말이지. 너.”

기현은 귀찮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은 뒤 내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학생회장님의 행동. 네가 시킨 거지?”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움찔 해버렸다. 들킨 건가, 들켰어? 어디서?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당황할 필요는 없지 않냐. 애초에 난 네가 상담자라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지…….”

“어, 어이! 목소리가 커!”

“아아, 그랬지. 그건 일단 비밀이었지?”

이 녀석은 내가 당화하는 게 보기 재밌는지 짓궂은 미소를 띠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길…… 이 녀석은 나에게 있어서는 보험이다. 내가 어떠한 사정이 생겨 상담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상담자인지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를 위하여 보험으로 들어놓은 것이 이 녀석이다. 지금은 이렇게 보이지만 전교 1등이며 전국 1% 안에 드는 수재이다. 물론 이 녀석이 이 학교에 있는 것만으로도 학교에 지원금이 상당하게 들어와 이 녀석도 VIP 취급을 받지만.

“뭐, 어쨌든 이제 어쩔 거냐?”

내가 또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기현은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당연한 거 아니냐. 학생회장님과 유아린. 누구를 고를 거야?”

“에? 아린이는 또 왜 나와?”

“……일부러 그러는 거냐.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 왜 아린이가 나오는 건데?”

“……이 자식. 아니다. 알아서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단 말이지?”

기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저 자식.

남은 5, 6, 7교시가 끝나자 슬슬 집에 갈 때가 되었다. 우리 학교는 태권도부나 상담소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성적이나 다른 거에 약간 소홀한 느낌이 있다. 뭐, 그래서 야자가 없는 건 좋지만. 어쨌든 아린을 태권도 부실 문 앞까지 데려다 줄려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린도 내가 데려다 줄 것을 아는지 일어나며 살짝 미소를 지었고, 이내 그 미소는 다시 찌푸려졌다.

“안녕하세요. 정유진 학생. 냥.”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냥’이라는 어미와 고운 미성이 들려온 것이다.

“또 무슨 일이죠?”

아린은 희원 선배를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고 희원 선배는 잠시 위축된 듯 했으나 겨우 대답하였다.

“유진 학생이랑 같이 가려고요……. 그보다 그렇게까지 적개심 가질 건 없잖아요……. 냥.”

“어디까지 같이 가려고요?”

우와, 아린이 무서워. 지금 눈은 웃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찡그리고 있어. 같이 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러니까 아린이 너도 얼굴 좀 풀어.

“유진 학생의 집 앞까지요……. 냥.”

집 앞까지는 아무나 같이 간…….

“에엣?! 왜 집 앞까지?!”

아니,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하루 만에 집 앞까지 오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

“네. 오늘은 유진 학생의 집 앞까지 같이 가도록 하겠어요. 냥.”

“어, 어째서요?!”

아린은 어이가 없는 건지 너무 당황한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어느새 나 혼자 희원 선배에게 반박하고 있었다. 그러자 희원 선배는 깜빡했다는(내 눈에는 너무나도 어색한 연기)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했다.

“아, 미처 설명을 못 드렸네요. 학생회에 신고가 하나 들어왔거든요. 오타쿠인 유진 학생이 학교 밖에서 사고를 치면 학교에도 피해를 주게 될 거라고요. 유진 학생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학생회에서도 충분히 인정했고 유진 학생은 밖에서도 사고를 안치도록 감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학생회장인 제가 직접 감시하러 온 거랍니다. 냐냥~.”

제가 직접 온 걸 고마워하세요. 라고 말하는 희원 선배를 내버려두고 아린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음, 아린의 눈을 보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되잖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억지라서 오히려 반박을 걸기 힘들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의기양양하게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하는 귀여운 희원 선배에게 반박을 걸만한 용기가 나한텐 없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유진 학생의 집 앞까지 항상 데려다드리며 감시할 거예요. 냥.”

당당하게 날 감시하겠다고 말하는 희원 선배. 그 모습에 아린이 정신을 차린 건지 나에게 어쩔 거냐고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까지 억지스러운 준비를 해 왔으니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이번엔 내가 당해주도록 해야겠다.

“휴우, 알겠어요. 그럼 집 앞까지만 감시한다는 거죠?”

“네. 일단은요. 냥.”

내가 대답하는 순간, 아린의 눈에 점심시간에도 보았던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안한 눈동자가 되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으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문을 세게 콰앙!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열고 나가버렸다. ……왜 저러지?

아린이 그렇게 나가서 잠시 희원 선배랑 쫓아보았으나 아린은 제대로 태권도장으로 들어갔고 그제야 희원 선배와 난 안심하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린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내일 팩우유 하나 사주면 풀리겠지.

“헤헤…….”

희원 선배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보다 앞서 나가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화를 내며 가버린 아린과는 정 반대의 표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어딘지 압니까?

“즐거우세요?”

너무 즐겁게 웃기에 나도 모르게 이런 걸 물어보고 말았다.

“네. 즐겁답니다. 냥~.”

내 물음에 희원 선배는 나에게 뒤돌아보며 해맑게 웃으며, 윽! 방금 건 좀 기습이라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더니 희원 선배가 내 시선을 쫓아와 다시 내 시선 앞에 서더니 왜 그러세요? 라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물었다. 으윽! 위, 위험해. 이러다가 동요하는 것을 들키겠……. 그 순간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학교와 우리 집 중간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함께 기억났다. 아, 나 오늘 집에 밥 안 해뒀지…….

“희, 희원 선배.”

“네?”

내가 말을 걸자 희원 선배는 살짝 뒤로 물러나며 대답해주었고 난 그제야 겨우 진정하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저, 잠시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냥?”

윽, 귀여워! 모에라고 모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쳐버렸고 희원 선배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만 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묻고 싶은 건 확실히 물었다.

“편의점엔 왜요? ……냐.”

희원 선배는 왠지 괴롭히면 재밌을 거 같다는 감상은 뒤로 한 채 말했다.

“오늘 저녁에 먹을 밥을 안 해두었거든요. 그렇다고 집에 가서 직접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래서 그냥 사 먹으려고요.”

“그런 거라면 같이 가요. ……냥.”

음, 뭐랄까 지금 와서 생각든 건데 말이지. 저 냥이라고 붙이게 시킨 거, 의외로 잔인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유진 학생은 혼자 사시는 건가요?”

편의점에서 함께 나오며 어느새 냥을 붙이지 않는 희원 선배가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지 궁금하여 희원 선배를 보자 희원 선배는 내가 산 빵을 보고 있었다. 아아…… 밥이 없다면서 빵은 왜 한 개인지 궁금했나 보다.

“아, 네. 혼자 살고 있는데요?”

희원 선배는 내 대답에 고개를 숙이며 약간 아니, 아주 침울해지며 말하였다.

“죄, 죄송해요.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아아, 알겠다. 요컨대 희원 선배는.

“자취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아, 그런 거였군요…….”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자신이 괜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거로 내가 자취하는 중이라고 말하자 표정이 확 풀렸다.

“그러면 왜 자취하게 되신 거예요?”

의외로 희원 선배는 궁금증이 많으신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죄송해요. 이것만큼은 말해드릴 수가 없어요.”

말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사람들을 부모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증거로 생활비도 받고 있지 않으며 장현 선생님이 찾아 주신 학교의 아르바이트 중의 하나인 상담소 일을 하고 있다. 아, 말을 안했는데 우리 학교는 여러 가지 지원금으로 돈을 꽤나 많이 받기에 상담소는 자체적으로도 운영할 수 있지만 학교 소속의 상담소는 인기도와 만족도로 매월마다 돈도 받을 수 있다. 'OSY'는 최고 등급 상담소 중 하나이기에 돈도 매월 먹고 저금하고 살 만큼은 받고 있다. 적어도 고등학교 동안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그 사람들이 있는 지옥 같은 집으로 갈 필요도 없다.

“……죄송해요.”

희원 선배는 또 내 아픈 곳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휴, 별 수 없지.

“괜찮아요. 그리고 희원 선배.”

“……네?”

“오늘은 무지 감사했어요.”

“뭐, 뭐가요?”

“도시락요.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을 먹어본 건, 저한테는 정말로 오랜만이었거든요.”

사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의 사이가 좋았을 때이다. 다 같이 도시락을 만든 뒤에 공원에 가서 함께 먹는 것은 정말로 맛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지만.

“그래서 눈물이 날 뻔 했어요. 사실 도시락은 예전 추억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싫어 했는데요.”

이 말에 희원 선배는 내 아픈 곳을 건드렸다고 생각 했는 듯 살짝 움찔했기에 난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희원 선배가 싸주신 도시락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렇게 애정이 담긴 도시락을 다시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고마워요.”

희원 선배는 갑작스러운 나의 진지한 모습에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고 난 이 잠깐의 여운을 즐기고 싶어서 억지로 말을 꺼내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하였기에 난 희원 선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그럼 내일 봐요. 희원 선배.”

희원 선배는 잠시 멍하니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 건물을 보더니 이내 깜짝 놀라며 “앗! 네, 네! 내일 봐요. 유진 학생! ……냥.” 라고 말한 뒤 나와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밖에 있을 이유는 없기에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와 거리가 멀어지고 있던 희원 선배의 발소리가 가까워져서 다시 뒤를 돌아보니……

속눈썹까지 자세히 보일 정도로 희원 선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이내 희원 선배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라는 행복한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고 희원 선배가 내 앞까지 와서는 말하였다.

“저, 저기…… 죄송한데 길을 모르겠어요! ……냥.”

결국 반대로 내가 희원 선배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말았다. 희원 선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죄송하다고, 지금부터는 길을 아니까 혼자 가겠다고 말을 하였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미소녀랑 같이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끌고 싶은 게 당연지사다. 그러니까 난 당연하게도 지금은 많이 어두워졌으니 같이 가주겠다, 라는 변명으로 끌었고 결국 집 앞까지 데려다준 뒤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보니 시각은 8시. 슬슬 OSY(오타쿠가 상담해주는 연애상담소)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조금 피곤하지만 요즘은 예전과 달리 상담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의 전원을 넣은 뒤, 장현 선생님께 준비가 다 되었다는 문자를 보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헤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오고 이제는 익숙한 장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담이다. 상대방은 여성.”]

장현 선생님의 말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잠깐 진정하시죠.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들립니다.”

상담자는 긴장하고 있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말을 하였고 난 귀가 살짝 아팠지만 천천히, 하지만 부드럽게 상담자를 진정시켰다.

[“……미안해.”]

상담자는 이내 긴장을 풀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갑작스럽게 말을 놓은 게 맘에 안 들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런 사람들도 많았고 충분히 예의만 지켜준다면 반말하는 거에 불만은 없으니 무시하기로 하였다.

“그럼, OSY에 상담을 걸어주신 용건이 뭔지 말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무시하기로 하였지만 살짝 신경이 쓰인 탓에 의도하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말해버렸고 아차, 이 상담자 또 긴장해서 소리를 지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살짝 눈을 지끈 감으며 헤드폰을 빼려는 순간, 상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정상적인 상담 갖기에 헤드폰을 제대로 고쳐 끼며 대답하였다.

“네. 듣고 있습니다. 계속 말하십시오.”

내가 재촉하자 상담자는 마음을 굳혔는지 긴장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나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순수한 소꿉친구였어. 하지만 그 사람은 그때까지의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고, 난 3년 전 쯤에서야 그걸 알았어. 그리고 그걸 알자 난 7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친하게 지냈던 그 사람이 좋아지고 말았어. 하지만, 7년 동안 그저 친구로 친하게 지냈던 그 사람에게 고백하려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 사람도 지금까지의 나처럼 그저 평범한 소꿉친구로 보고 있었으면 어떡하지? 고백했다가 차이면 오히려 멀어지는 거 아냐? 라는 불안감이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거야.”]

상담자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난 생각을 정리하고 이 상담자에게 해줄 말을 정할 수 있었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겁먹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내가 가장 자주 해주는 말이기도 한 이 말. 난 개인적으로 이 말을 좋아한다. 왜냐, 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서 지금 행복하거든. ……가출이라는 부정적인 거긴 하지만. 어쨌든 난 부정적인 것을 하여 지금 충분히 행복해졌다. 그러니까 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많이 해주려 한다. 이 상담자의 경우에도 봐라. 고백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기만 한다면 다른 여자한테 뺏길지도 모를 것 아닌가. 차라리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기도 전에 겁을 먹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과 맺어지는, 그런 미래 밖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 외로 이 상담자는 너무 늦었었다.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좋아하게 된 뒤에도 3년 동안이나 내 마음을 전해지 못했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었어. 이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건 나 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 상담자는 너무 늦은 걸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상담을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이제는 지켜볼 수만 없다는 거겠지. 그 뜻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그 사람’에게 대쉬를 하는 것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난 최대한 빨리 머리를 굴려 그 동안 했던 미연시를 머릿속으로 전개하여 이런 상황이 있었는지를 찾아보았고 이내 가장 유사한 한 작품을 찾아내었다. 좋아, 이거라면…….

[“그런데 오늘, 한 여자가 그 사람에게 다가왔어. 그것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며 말야. 게다가 손수 만든 도시락까지 싸왔어. 나 말야, 그 사람이 도시락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 그 사람은 도시락을 거의 먹지 않아. 그래서 집에서 먹는 밥이 아니면 빵이나 다른 음식을 먹지. 하지만, 그 사람은 여자가 만들어 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어.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그 여자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애정은 진심이란 거야. 난 정말로 불안했어. 오늘 방과 후에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는 날 두고 둘이서 함께 갈 때도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아무리 둔감한 미연시 주인공이라 해도 이 정도 상황이면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 상황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너무나도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까부터 눈치 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최대한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며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다.

[“나, 그 사람을 좋아해. 그러니까 도와줘. 그 사람을 그 여자에게서 지킬 수 있게 날 도와줘. 제발.”]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곤란하다. 날 행복에 겨워 죽게 할 생각이냐 세상은!

“그…… 사람은……?”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이 이야기는

[“정유진. 유진이를 내 걸로 만들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자 최고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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