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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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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그녀들의 옥상마을
글쓴이: 일이삼사
작성일: 12-07-30 00:29 조회: 2,257 추천: 0 비추천: 0
???

그녀들의 옥상마을

1234, 作




EP1. 공주





0

어느 날, 집 앞에 금발벽안의 미소녀가 쓰러져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더구나 그 미소녀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친다면?

“얼른 피하세요! 지금 메테오가 이곳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1

햇볕이 대지를 따갑게 내리쬔다. 가만히 있어도 웃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덥다.
택배 기사가 땀으로 푹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사인하면서 발송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진희. 무려 미국에서 보낸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반송해달라고 말할 뻔했다. 그렇지만 반송한 뒤 후폭풍을 견딜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여동생이 보낸 택배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을 닫고 마루에 앉았다. 회전하는 선풍기를 고정시키고, 택배 상자를 살짝 흔들어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영 께름칙했다. 여동생이 보낸 거니 보통 물건은 아니겠지. 폭탄? 생화학 무기?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침을 꿀꺽 삼키고 박스 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다행히도, 개봉하자마자 불꽃이 튀어 오른다거나 갑작스럽게 숨이 막힌다거나 하는 상황은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내용물이 든 택배였다. 분홍색에 하트 무늬 스티커로 밀봉된 편지, 그리고 주먹만 한 파란색 돌멩이가 전부였다.
[Dear my brother.]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 사실 첫 문장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필기체는, 물론 세련되었지만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편지 한 쪽 전체가 영어였기 때문이다.
비참하게도, 고등학교 1학년인 내게 이 편지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았다. 뉴욕으로 떠난 지 삼 년 만에 여동생은 영어만큼은 내가 꿈도 꿔보지 못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혹시나 뒷면까지 내용이 이어지나 싶어서 뒤집어 보았다.
[여동생이 쓴 편지도 제대로 못 읽는 멍청한 오빠에게.]
뺨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영어 성적이 달리는 오빠를 위해 번역까지 해주는 이 친절함! 눈물 나게 고맙지?]
정말 눈물 나게 고맙네요.
[나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있어. 사람들도 좋고 다 좋지만, 가끔 한국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우리말을 사용할 때면 더 그래. 향수병이랄까? 가끔 우리나라 음식을 먹고 싶고, 우리나라 노래를 듣고 싶고,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싶어.
물론 오빠는 아냐. 내가 미쳤다고 오빠를 그리워하겠어?]
목이 말라 부엌에서 찬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돌아왔다. 해가 기울어가면서 마루를 향해 진영을 넓히고 있었다. 나는 괜히 원망스러워서 마루에 드리운 햇살을 노려봤다. 결코 여동생의 무심한 말에 열 받은 게 아니다. 정말로.
[장난이야. 사실 여동생님은 오빠가 너무 보고 싶답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맘 알지?]
이쯤 되면 나도 달관하게 된다. 죽이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진희한테 얹혀사는 입장인 것을. 이런 자그만 투정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감당은 못하겠지만.
[본심은 이 정도로 접어두고, 아마 오빠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돌을 하나 보냈을 거야.
그 돌을 내 분신이라고 생각하고, 잘 보관하고 있어줘.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야.
왜, 퀴리 부인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돌 있잖아?
……그거만큼 중요한 거야.]
라듐 덩어리냐! 나는 질겁하면서 상자에서 멀찍이 떨어졌다가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과연 여동생의 언어폭력은 웃으며 넘길 수 있었지만, 방사능급 투정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집을 옮겨야 할 것 같아. 서울 땅값이 올라서……가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 그래. 정말이야. 정말.
주소를 아래에 적어뒀어. 25일까지 오빠 짐만 들고 찾아가면 돼.
나머지 짐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찾아갈 때까지 부디 살아있길 바라. 나 말고 다른 여자 손에 죽으면 안 돼. 알지?
그 때까지 부디 건강하기를.
오빠의 귀여운 여동생 진희가.]
안부 인사로 소름 끼치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에 내 여동생 하나뿐일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베란다를 쳐다봤다. 정말이지 지독한 날씨다. 실내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음에도 땀이 삐질삐질 흐를 정도다. 어, 방금 참새가 날아가다 땅바닥에 엎어졌다.
이런 날씨에 이사를 가야 한단 말이지.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2

다음날.
“야! 치사해!”
이송아가 귀여운 얼굴을 팍 찡그린다. 연분홍색 투피스에 구두를 신고 나온 송아는 오락실에서 투피스의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격투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레버를 당길 때마다 뒤로 가볍게 묶어서 넘긴 까만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린다.
오락실과 그녀의 차림새는 몹시 어색했지만, 기묘하게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표정이었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물론 표정은 표정이고 게임은 게임이다. 나의 남자 격투가가 치파오를 입은 중국소녀를 철저하게 농락하고 있었다. 하단 발차기로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어퍼컷을 날려 공중에 띄운 다음에 주먹질 두 번, 발차기 한 번, 곧바로 필살기! 순식간에 중국소녀의 체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게임은 내 승리로 끝났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송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게임을 그렇게 많이 하는 녀석이 왜 이렇게 못할까.”
“씨.”
잠깐 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나에게 500원을 꺼내준다.
어렸을 적부터 같이 게임을 해온 우리들 사이엔 기묘한 규칙이 하나 있었다. 오락실에 놀러 오면 언제나 시작은 격투 게임. 진 사람은 이긴 사람한테 500원을 줘야 하며, 이긴 사람은 다음으로 하는 게임의 돈을 내야 한다.
서로가 승부욕에 취해서 매일 발끈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런 득도 실도 없는 내기다.
“다음은 이거!”
송아는 바로 표정을 풀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좀비 게임 앞으로 향한다. 우리는 각자 총을 들고 게임기 앞에 섰다.
게임이 시작된다. 학교에서 좀비가 된 학생들이 등장하고, 학생들의 습격을 피해 탈출하는 것이 스토리였다. “재장전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음성이 들린 뒤 좀비 한 마리가 화면 속 교실에 등장했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송아는 총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어디로 가?”
처음엔 무슨 질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이사 말이야.”
어제 문자를 보냈었지. 소꿉친구인 송아한테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를 가게 됐다고 말했더니, 느닷없이 점심 먹고 오락실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아. 그렇게 멀리 가진 않아. 변두리로.”
나는 화면 구석에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좀비를 향해 총을 쐈다. 시원시원한 총소리와 함께 좀비의 몸통이 터져나간다. 스토리만 봐서는 그저 그런 삼류 오락실 게임이지만, 좀비를 죽일 때의 쾌감이 제법 강렬하다. 내 또래의 학생들이 좀비로 나와서 더 그런 걸까?
그녀는 게임에 몰입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총을 들다 말고 다시 물어왔다. 태도가 무척 조심스럽다.
“전학 가는 거야?”
“모르겠어. 아직은 전학 갈 생각은 없는데, 교통편도 잘 모르니까. 만약 교통편이 안 좋다고 하면 전학을 해야겠지. 내 돈으로 다니는 게 아니잖아.”
“네 돈이 아니지. 진희는 잘 지내?”
“팔팔해. 바로 어제도 협박 편지를 보내와서는…….”
흐으음. 송아가 기묘한 콧소리를 냈다.
첫 번째 판의 보스가 등장했다. 지금까지는 어영부영 혼자서 좀비들을 물리쳐 왔지만, 막 등장한 보스는 과연 혼자 물리치기엔 힘이 달렸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생긴 좀비였다. 머리 위에 이름이 떴다. ‘<BOSS> 화학실 담당교사’.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송아야! 빨리 총질 해!”
그러나 송아는 줄곧 게임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송아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나는 호들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예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꼭 죽을 사람 대하는 것처럼. 아. 죽었네.”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화학실 담당교사가 우리들의 체력을 모조리 갉아먹었다. 나는 500원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송아를 쳐다봤다. 그 눈이 잠깐 반짝인 것 같았다.
“지, 진우야!”
송아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송아의 비장한 표정에 어느 순간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잠깐만 지, 집에 들렀다가 가!”
“그래.”
대답이 시원시원하게 나온 이유는 내가 맥이 풀렸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네 집에 간다고 하면 긴장할 지도 모르지만, 송아네 집에 간다고 긴장하진 않는다. 어렸을 땐 송아 집에서 게임도 많이 했고, 자라서도 몇 번이나 들린 적이 있으니까.
송아는 얼굴을 붉힌 채 묵묵히 앞장서서 오락실을 나섰다. 나는 일단 뒤를 따랐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부끄러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끔하게 정리된 구두와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 걸린 서양풍 그림이 집안 풍경을 더욱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다. 송아네 아주머니의 취향이었다.
“부모님 안 계시니까 편하게 있어도 돼.”
송아가 먼저 들어가면서 말했다. 뒤를 따라 거실에 들어서니 주홍색 소파와 널찍한 텔레비전, 그 옆으로 분홍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방문이 보인다. 송아가 지독히도 아끼는 보물들이 모여 있는 방이다.
“거실에 있으면 돼?”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부엌으로 간 송아에게 슬쩍 물어봤다. 송아는 음료수를 담은 컵 두 잔을 들고 나왔다.
“방으로 들어가자. 줄 게 있어.”
“게임?”
“어떻게 알았어?”
송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손가락을 내뻗어 분홍색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엔 게임밖에 없으니까.”
“아냐! 컴퓨터도 있고 게임기도 있어!”
얼굴을 붉히고 변명하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근데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송아한테 잔을 받아들고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당황스러웠다. 방의 왼쪽 벽면에 책장이 있었는데, 책장이 게임 패키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도 게임은 많았다. 하지만 기껏 해야 수십 개뿐이었는데. 이게 다 얼마야? 어림잡아 삼사백 개는 되어 보인다.
송아는 곧장 책상으로 향했다. 우리 집 거보다 두 배는 큰 모니터 옆에 정사각형 모양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것이, 딱 봐도 게임이다.
“이거 빌려줄게.”
빌려준다고 하니 우선 받기는 받았는데, 표지가 영 심상치 않다.
오른쪽 어깨가 불쑥 튀어나온 소처럼 생긴 생물체가 패키지 상단에 그려져 있었다.
패키지 왼쪽에는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간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성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몸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쓴 사람이 손에 불꽃을 휘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패키지 하단에는 은색 투구에 은색 갑옷을 착용한, 심지어는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마저도 은발인 사람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쓰인 「용사가 보는 세계 ~마왕과 공주와 마법사의 사정」라는 제목.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송아를 봤는데, 표정이 이상했는지 송아가 웃음을 참고 있다. 조금 있으니 진정됐는지 헛기침을 흠흠,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용사가 돼서 세상을 구하는 게임이야. 주인공은 물론 용사고, 동맹을 맺거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하거나…… 어떻게든 나머지 세력을 없애면 이기는 게임이야.”
“얘들이 다 세력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용사를 둘러싸고 있는 두 사람과 한 마리를 가리켰다.
송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세력을 전부 통합해서 어찌어찌 하다보면 엔딩이고. 신생 제작사인데도 엄청나. 전반적으로 일본 게임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는데. 아, 그래서 2D인 걸까? 아무튼 3D RPG보다 몰입감도 뛰어나고……”
어쩌고저쩌고. 알 수 없는 용어가 무더기로 튀어나온다. 동인이니, 서코니, 크랙이니,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느니. 나는 필사적으로 설명을 이어가려는 송아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읍!”
“결론만 간단하게 말해줘. 재밌어, 재미없어?”
“으으으읍!”
아. 부랴부랴 손바닥을 뗐다. 송아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째 방이 좀 더워진 것 같다. 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나는 재밌었어.”
겨우겨우 진정한 송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이사 가서 해볼게.”
송아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낯선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문득 아래로 눈길이 갔다. 송아가 손을 불끈 쥐고 있었다.
“다 하고 나면 꼭 돌려줘야 해?”
“응. 당연한 소리를 다 하고.”
오늘따라 송아가 조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답했다.
안심했다는 듯 송아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내일 짐 싸들고 가는 거야?”
그제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다섯 시 반이 넘었다. 내일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하는 만큼 오늘 저녁에 대강의 짐은 챙겨놔야 한다.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송아가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봐. 이사 준비해야지.”
“또 놀러 올게.”
“빌려준 거니까 꼭 반납해야 해! 연체되면 알지?”
“기한은?”
송아가 멈칫하더니 재빠르게 답을 내놓는다.
“개학식날까지!”
“오케이.”
나는 기분 좋게 현관을 나섰다.
인사하기 직전에 본 송아의 손끝은 편안하게 뻗어 있었다.


3

당차게 집을 나선 것까지는 좋았다.
가방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래도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려 이리저리 헤매기를 30분. 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게 뭐야!”
나는 무심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벽에 간 실금, 삭아서 떨어져나간 페인트, 목 윗부분이 잘려나가고 없는 검은색 마네킹, 그 마네킹에다 보란 듯이 옷을 입혀놓은 옷가게.
옷가게 옆에 1층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옆 반쪽짜리 문패에는 상가라고만 적혀 있었다.
나는 다시 손에 든 주소지를 확인해봤다. 주소지는 맞았다. 그 여동생이 잘못 적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독설이 가득 담긴 편지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올라가면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2층에 올라서자 좌우로 불 꺼진 복도가 보였다. 아침 열한 시에 불 꺼진 복도라니. 가게들도 하나같이 셔터를 내린 상태였다. 바닥에 가득 쌓인 먼지 탓인지 공기가 뿌옜다.
2층이 좀 더러우면 어떠랴. 주소지가 가리키는 집은 3층이다. 3층은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깨끗하겠지?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고 되뇌면서 3층 계단을 돌아봤다.
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보인 것은 분명 하늘이었다. 이렇게 다 무너져 가는 상가 건물 천장에 하늘을 그려놨을 리는 없으니까.
일단 올라가봤다. 3층에 올라서서 본 경치는 제법 근사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3층이 아니었다. 내가 선 곳은 옥상이었다. 건물의 가장자리는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태양빛은 강렬하게 모공을 찔러댔으며, 잠자리가 더운 줄 모르고 뻘뻘거렸다.
확실히 풍경은 그럭저럭 볼 만하다. 빌딩숲은 없었고, 간간이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했으나 주변에 자리한 산이나 공원과 제법 잘 어울렸다. 특히 내가 서 있는 주변의 건물은 온통 낮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마다 장독대를 쌓고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점은 딱 여기까지. 나는 주뼛거리며 뒤를 돌았다.
피하려고 했던 현실이 시야 정면에 들어온다.
산 중턱을 깎아서 마을을 만들거나, 산 정상에 돌로 집을 쌓아 살거나, 부유하는 섬에 마을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옥상에 느닷없이 골목길이라니.
평평해야 할 옥상에 시멘트벽이 불쑥 솟아 있었다. 좌우로 평행하게 솟아오른 시멘트벽 가운데에, 흡사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길이 나있었다. 벽에 큼지막한 우체통이 달려 있는 것으로 봐선 옥상 전체가 하나의 동네를 이룬 모양이었다.
올라온 계단 우측으로 돌아서서 골목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사람이 살기는 하는 모양인지 골목길은 깨끗했다. 가끔 쓰레기가 뒹굴기는 했어도 음식물쓰레기가 버려져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은 상황이 달랐다. 안으로 들어가던 중 처음으로 문을 발견했는데, 잔뜩 녹슨 철제 문 너머로 인적 없는 집이 보였다. 문은 열려 있었고 벽지도 없고 장판도 없는 황량한 시멘트 방이었다.
드문드문 멀쩡한 집이 보였지만, 대부분이 폐가였다. 에이 설마. 나는 쓰게 웃었다. 진희가 나를 싫어한다지만 설마 사람이 못 사는 집을 골라줬을라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쭉 들어가니 드디어 주소지와 똑같은 번지수의 집이 나왔다.
귀신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다 무너져가는 흉가가 현관문을 활짝 열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런 씨, 발라먹을 여동생!”
차마 여동생을 욕할 수는 없고, 대신 편지를 구겨서 다 떨어져 가는 문짝을 향해 집어 던졌다. 종이에 맞은 문짝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집수리가 급선무였다.


포기.
어떻게든 세워만 놓으려고 했던 문짝은 내가 손을 대자마자 조각조각 부서졌다.
우선 짐부터 풀자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부엌이 나왔다. 오른쪽에 방문이 보이기에 몸을 돌렸는데, 부엌 선반이 가방과 부딪쳐서 무너져 내렸다. 덩달아 천장도 푹 꺼졌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놔두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딱딱한 돌바닥 때문에 가슴팍이 아팠지만 그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강했다. 하는 것마다 이상하게 꼬이는 이 상황이 정신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진희 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사정이라는 게 날 말려 죽이려고……”
목소리가 아주 가늘게 새어나왔다. 큰 소리를 낼 기운이 없다. 밥 먹어야 하는데, 샤워도 해야 하는데, 샤워를 하려면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데, 화장실은 이 건물에 없는데.
그나마 장판 너머 시멘트의 냉기 덕분에 등은 조금이나마 시원했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정리를 해볼까 생각하던 찰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귀퉁이만 살짝 튀어나온 게임 상자가.
어차피 잘 거면 조금 해보고 자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가져온 노트북을 꺼낸다. 12인치 화면은 게임을 하긴 너무 작았지만 별 수 없다. 이 방에 데스크톱 컴퓨터까지 가져왔다가는 잠자리마저 없어지니까. 게임을 설치하는 동안 동봉된 설명서를 대강 훑어봤다.
설치가 끝나고, 프롤로그가 떠오른다.
스토리는 참 단순했다. 마을 촌장이 어느 날 신내림을 받아 용사를 지목한다. 용사로 뽑힌 사람이 바로 주인공.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던 무구를 뒤집어쓰고 악을 퇴치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쫓겨났지만, 돈도 없고 실력도 부족한 탓에 악을 이기기란 요원해 보였다.
여기서 게임이 시작된다. 신체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언변에 좋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돈이 없어서 내가 처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르바이트뿐이었다. 용사가 아르바이트라니. 여관에서 열심히 접시를 나르는 용사를 보면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르바이트를 시켜 놓고 설명서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어쩌면 정공법이 가장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는 방법일 지도 모릅니다. (웃음)”
제작자가 적어놓은 팁이었다. 나는 표지와 설명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용사라면 우선 공주와 친해져야지! 장차 신부가 될 사람인걸.
분명 공주부터 공략하는 게 정공법일 것이다. 천사 같은 미소를 띠고 있는 공주 일러스트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으아아아악!”
나는 괴성을 지르며 노트북 덮개를 덮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공주를 향한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금발벽안에, 엄청난 미모에, 뽀얀 피부에, 말투부터가 점잖아서 좋은 예감이 들었었다. 중세 서양을 배경으로 했으면서 얼굴 형태는 동양인이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어도 사실 어찌 돼도 상관없었다. 숙식을 제공해줄 테니 힘을 조금만 빌려달라는 공주의 부탁에 나는 실실거리며 승낙을 클릭했다.
첫 만남까지는 그랬다.
공주는 처음엔 하급 몬스터 퇴치나 조폭 정리 같은 잡일을 맡겼다. 용사의 실력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일은 점차 험악해졌다. 용사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퀘스트 난이도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보상은 쥐꼬리만큼 주고, ‘능력이 모자라니 그 정도 보상에 그치는 거예요!’라면서 용사를 간사하게 놀리더니, 공주는 이윽고 마왕 세력과의 전쟁에서 팔 한 짝을 잃은 용사를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젠 정말로 쓸모없어졌군요. 당신에게 남은 건 명분밖에 없어요. 하긴, 그나마도 촌구석 촌장 나부랭이가 받은 신탁이었죠? 신탁의 파급력은 대단하지만, 그 신탁이 별 볼일 없는 거면 얘기가 달라지죠. 다음 전쟁에서 당신의 가치를 보여야 할 거예요. 그렇지 못하면, 정말 안타깝게도 당신을 버릴 수밖에 없답니다.”
분노에 차서 게임을 꺼버린 게 이 때였다. 지금도 화가 가시질 않는다.
천사 같은 미소로 접근해서 악마 같이 뜯어먹고 내치는 간사함!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마법사는 자기 방에서 마법만 연구하고 있고, 마왕 세력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하급 마물만 간간이 나와서 인간들을 괴롭힐 뿐이다. 그런데 이 공주라는 여자는, 자기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마왕 세력을 공격하고! 스파이를 시켜 마법사가 공들여 연구한 마법을 훔치고!
……쉬려고 시작한 게임인데 왜 이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우선 샤워를 하려고 부엌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그 때문인지 날벌레가 무섭도록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장실을 찾다가, 부엌 쪽 외벽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수도꼭지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집을 지은 걸까? 설계한 사람은 대체 누구지?
그 때였다. 또 빠직,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노트북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나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둠 가운데 낮에는 보지 못했던 둥그스름한 둔덕이 올라 있음을 발견했다. 꼭 길바닥 한가운데에 사람이 드러누운 모양새였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긴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근처까지 다가가 얼굴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하려고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줄도 모르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크게 뛰고 있다.
“너, 너 뭐야!”
내가 당황해서 내뱉은 말소리에, 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어깨에 뽕이 살짝 들어간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빨간색과 노란색이 번갈아 배합된 드레스는 소녀의 금발과 무척 잘 어울렸다.
그래, 금발이었다. 자연스럽진 않았지만.
먼지가 덕지덕지 뭍은 몰골로 일어난 소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더니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푸른 눈동자가 밤중에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벽안이었다. 렌즈 같기는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듯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나를 올려다본다.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키는 크게 봐야 백육십 언저리인 듯, 정수리가 내 가슴팍 부분에 겨우 닿는다.
문제는 소녀의 키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공주님 드레스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사람마다 취향이야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동양인인 주제에 서양 풍 공주님 패션을 고집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것도 취향인가? 물론 문제가 될 리는 없다.
문제는, 내가 이 소녀를 본 적이 있었다는 거다.
“얼른 피하세요! 지금 메테오가 이곳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안다.
시대를 역행하는 말투, 과장된 몸짓, 급박하게 변하는 표정, 그 와중에 먹잇감을 노리듯 빛나는 눈동자. 뱀처럼 움직이는 혀, 그 혀가 만들어내는 거짓말.
이 소녀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정말로요? 그럼 얼른 피해야겠네. 자, 당신도 얼른 도망쳐요!”
나 역시 과장된 몸짓으로 소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일순간 소녀가 불쾌한 표정을 보인 것 같았다. 분명 불쾌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소녀는 역시 숙련된 솜씨로 표정을 잽싸게 바꾸었다. 그러더니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말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 마시고, 먼저 도망치세요.”
나의 가슴팍을 슬쩍 밀치면서 하는 말이다. 나는 “그럼 먼저!” 라고 말한 뒤 도망치는 척하다가 다음 모퉁이에서 바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소녀의 동태를 살폈다.
“뭐야, 뭐하는 놈인데 갑자기 여자 손을 만져? 변태새끼. 그래도 그 여자와는 다르게 멍청해서 잘 속아 넘어가네? 후후후.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는 거야. 드디어.”
소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집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은, 분명 게임 속에서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싸가지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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