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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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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영지의 아이들
글쓴이: 서하
작성일: 12-07-29 08:11 조회: 2,390 추천: 0 비추천: 0

섬.

섬은 본래 가진 이름과 달리 꾀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북태평양 무풍지대에 위치한 섬은 약 1300㎢정도 크기를 가진 작은 섬이지만, 그 겉면에는 완만한 산과 우거진 수풀, 꽃이 핀 초원과 초록빛 지평선이 펼쳐진 해변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여러 거주구역, 항구나 학교 같은 인공구조물들 또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실상을 들여다보면 섬은 분명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이 섬은 아무런 자원도 생산할 수 없었다. 우거진 수풀은 먹을 수 없는 열매들로 가득한 나무들과 풀들뿐. 사람들이 쓸 물도 부족한 판에 농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모든 식품과 생필품은 외부로부터 조달되어 분배되었다. 섬에 하나있는 항구는 섬의 주민은 이용할 수 없는 무인항구뿐. 누구도 나갈 수 없었다.

이 섬의 이름은 『JO특별격리수용소』

본래 가진 이름과 달리 꾀나 아름다운 이 섬은, 2만1천명의 초능력자를 가둬놓은 감옥이다.

첫 번째 발걸음 - 삶을 대하는 태도

1

악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고로 인간은 반드시 발전하고 악해져야 한다.

-차라투스트라

삶의 많은 것들은 아무런 신호도 없이 찾아온다. 비극적이게도, 우리가 아무리 많은 걸 대비해도 결국 진짜로 대비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내 능력이 그랬고, 전쟁이 그랬고, 패배가 그랬고, 섬에서의 생활이 그러했다. 하지만 가끔은, 분명히 신호를 가지고 오는 것들도 있었다. 번개 후에 오는 천둥이나, 밥을 먹으면 가야하는 화장실이나, 혹은 붉은 빛 후에 날아오는 파괴광선 같은 것들.

밤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직후, 붉은 광선이 내 옆구리를 스쳤다.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척추를 타고 치민다. 찰나의 시간동안 몸이 통제를 잃고 쓰러졌지만 나는 땅에 넘어지는 힘을 이용해 다시 땅을 박찼다. 동시에 왼쪽다리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이를 악 물었다.

심장이 지르는 비명이 머리를 울리고, 등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흐른다. 몸은 이미 한계라고 경고했지만, 머리는 멈추면 죽는다고 경고한다. 붉은 광선은 내 이동경로를 예측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내 목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각도가 조금만 틀어졌어도 즉사에 이르렀을 공격. 나는 발악하듯 뒤를 돌아 붉은 빛 광선을 쏘아낸 주인을 노려봤다. 저 멀리, 나무 위에 앉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미소가 아름다운 소녀였다. 달을 등지고 있는 금빛 머리카락은 달빛과 함께 녹아내리고, 그 주위로 섬뜩한 붉은 빛 무리들이 춤을 춘다. 모르는 사이라면 절로 눈이 갈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미쳤으니까.

“진짜로 죽이려고 했겠다!”

나는 악에 차서 소리 질렀다. 내 외침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멈춘 건 분명히 저쪽에서도 보일 것이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주변에 둥둥 떠다니던 붉은 빛 무리가 그녀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는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빛이 모인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여기까지 들리진 않지만 신나게 웃고 있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서 뺨이라도 한 대 쳐주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니, 아니지. 나는은 단호히 분노를 억눌렀다. 지금 그녀는 단지 나를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다. 아무리 험하게 다룬다 해도 장난감을 부수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그녀의 즐거움에 맞춰주는 편이, 가장 좋은 선택지다.

“...빌어먹을”

내 속삭임이 들렸을 리는 없지만 하늘에서 붉은 광선이 내 발치 앞을 스쳤다. 휴식시간 따위 주지 않겠다는 건가. 곁눈질한 그녀는 붉게 빛나는 손가락을 내게로 조준하며 환하게 웃었다.

뛴다. 살기위해 도망친다.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새빨간 빛의 비가 떨어져 내린다. 아무리 빨리 달려봤자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어깨에 한발. 붉은 피 대신 새하얀 빛줄기가 뿌려진다. 크으윽, 이를 악 물었지만 입술 사이로 고통이 비집고 나온다.

하지만 광선은 멈추지 않는다. 나를 쫓아 움직이는 빛의 광구들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동하며 광선을 쏘아댄다. 오른쪽에서 쏘아진 광선을 피해 허리를 뒤로 젖히자 왼쪽의 광선이 허벅지를 뚫었다.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광구들은 그대로 내 주변을 에워쌌다.

양팔을 모두 들어 항복을 선언하고 싶었지만, 광선에 관통당한 왼쪽어깨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들리는 오른쪽 팔만을 들어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러 올 때 까지 광구들은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가 내 머리맡에 도착해 내 상황을 보고나서야, 항복은 받아들여졌다.

"벌써 끝났어?"

그녀는 내 어깨에 난 구멍을 힐끔 쳐다보고 손을 휘저었다. 방금 전 까지 살벌하게 빛나던 광구들이 사라졌다.

"오늘은 좀 정도가 심해서."

나는 심사숙고 끝에 말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욕을 한바가지 하고 싶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니니까.

"응, 오늘은 죽이려고 했어."

그녀는 낙엽처럼 하늘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달빛처럼 얼굴을 감싼다.

"근데, 안 죽었어."

그녀의 홍채가 확대되듯 다가온다. 그 안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악의도, 욕망도 없는 순수함. 그래, 마치 벌레 날개를 때어내는 어린이 같은 눈동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감정을 억지로 추슬렀다.

“안 죽었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왜 내가 죽지 않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편으로 달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능력을 설명해주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무의미했다.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아침 배급을 못 받을 지도 모른다 생각이 스쳤다.

"이제 그만 가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척추를 타고 고통이 기어오르는 걸 티내지 않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줬다.

"조금 더 놀래."

그녀는 어린애처럼 투덜거렸다. 안 돼. 내가 단호히 거절하자 그녀는 일어서서 볼을 부풀렸다. 거듭해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삐친 듯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가버렸다.

절뚝거리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침내 그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무사히 넘긴 것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약을 꺼냈다. 새하얀 알약. 두알 정도를 단번에 삼킨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쉬자 약기운이 돌았다. 몸을 돌던 고통이 빠르게 멀어지고, 정신이 붕 뜬다.

고통이 사라지자 몸에 난 구멍에서 새하얀 액체가 흘러내렸다. 액체는 10초가량 끝없이 흘러내리더니, 옷과 상처 부위 주위를 전부 뒤덮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쉴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액체는 피부 속으로 흡수 되듯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난 피부에는, 몇 개나 되던 상처가 모두 사라져있었다.

"빌어먹을 관통상."

이것이 나의 능력? 『테스터』. 단순명료한 재생능력. 보통은 육체강화에 부가적인 효과로 존재하는 능력이지만, 나에겐 오로지 재생에 관한 능력밖에 없다. 공격능력도, 그렇다고 내 몸 자체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도 아닌, 오로지 생존에만 특화된 능력. 몇몇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구성과 촉감을 완비한 완벽한 샌드백. 덕분에 매일같이 능력연구란 이름하에 공격받고, 실험당한 결과, 얻은 이름『테스터』. 하지만 능력에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오늘도 이 능력덕분에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지 않은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달이 저물고 하늘이 파랗게 탈색되어 간다. 나는 그녀가 떠난 후 10분을 정확히 잰 뒤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임무는 끝났지만, 오늘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2

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배급소다. 섬 전체에 30개가 존재하는 배급소는 모두 학원구역 중앙에 존재하는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는 전자동화 시설이었는데, 공장 컨테이너 같은 곳에서 섬의 주민들은 매일 각자가 원하는 만큼 식재료나 포장된 음식, 약들을 배급받았다. 배급은 학교에서 신청하고 허가를 받아 배급의 받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음식을 제외한 옷이나 향수 같은 다른 생필품들은 한 달에 한번밖에 배급하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배급소는 거주구역 동쪽 끝 배급소였는데, 잦은 항쟁으로 기계가 고장이 난 것인지 다른 곳보다 배급되는 약의 양이 많은 곳이었다.

"오늘도 식사는 합성 단백질로 만든 고기와 방부제에 절인 야채란 말인가!"

기다란 머리카락과 얼마나 빨지 않았는지 누더기가 된 옷, 커다란 가죽가방과 기타를 맨 전형적인 히피 복장의 소년이 소리쳤다. 소년의 이름은 왓슨. 섬 유일의『천리안』사용자였는데, 배급이 올 시간만 되면 능력을 사용해 어떤 음식이 오는지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는 게 특기인 놈이었다.

"와, 왓슨님, 오늘은 무슨 과일이 나오나이까?"

왓슨을 보던 소년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소년의 질문에 배급소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를 향했다가 다시 왓슨을 향했다. 왓슨은 과장된 표정으로 팔자 주름을 잡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오늘 배급 과일은... 으음..!"

왓슨은 과장된, 그리고 뻔히 보이는 몸짓으로 이마를 짚어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열기가 적당히 달궈지는 순간.

"딸기다!"

왓슨의 외침에 아이들이 동시에 술렁거렸다.

"오오...딸기...오오"

"제철과일의 축복이로다!"

그냥 자기가 스스로 딸기를 신청해서 먹으면 될 텐데. 나는 이 유쾌한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섬의 대부분이 요리라는 걸 모르거나 알아도 어떤 이름인지 모르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신청방식에는 일일이 요리재료를 적거나 그냥 포장된 식사 배급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애들은 대부분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포장된 식사배급을 선택했다. 지금에 와서는 나처럼 그 랜덤성이 즐거워 식사배급을 선택하는 놈들도 많지만.

기계에서 벨이 울리며 배급이 곳 시작된 걸 알리자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동시에 줄을 서 배급컨테이너를 향했다. 각자의 번호를 따라 줄을 서서, 내 번호는 3번. 좋든 싫든 앞서 물건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나도 아이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한동안 혼란스럽다가, 컨테이너에서 배급이 나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줄이 만들어졌다.

커다란 기계음과 동시에 컨테이너에서 첫 번째 배급이 나왔다. 식판모양의 배급 상자는 플라스틱 뚜껑으로 봉해져있었고, 작은 종이 봉투하나가 접착체로 붙여져 있었다. 두 번째 배급도 똑같았고, 세 번째인 내 차례에서는 종이 봉투대신 동그란 플라스틱 통이 딸려 나왔다.

"오늘도 진통제인가?"

뒤에서 말을 건건 왓슨이었다.

"넌 6번이잖아."

"어차피 받는 건 똑같은데 몇 번이든 번호가 무슨 상관인가? 안 그런가?"

내 지적을 간단하게 넘긴 왓슨은 내 다음차례 배급을 받아들고는 나와 같이 배급소를 나섰다. 그 후에는 맛좋은 식사대신,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지루한 마라톤이 시작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배급으로 나온 딸기가 생기를 잃고 눅눅해질 쯤에야 사람이 없는 한산한 거리에 다다랐다. 왓슨은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길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아침식사는 조금 늦게 먹는 게 좋은 법이지."

“운동 후 식사가 더 좋다고 말하는 건 어때? 아니면 멍청하게 돌아다니면 뇌를 쓸 일이 없으니 더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 안 그래?”

나는 퉁명스러움을 가득 담아 답한 뒤 약통을 그대로 입에 부어넣었다. 한 번에 한 두 알 이 정량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와우, 어젯밤에는 아주 독하게 당했나보군."

나는 대답대신 일부러 약을 으그적으그적 씹었다.

"하이드로코돈의 부작용에 대해서 열거하고 싶지만 그대의 고생을 아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그래서 결국, 아이네양의 정체는?"

"예상이 맞았어, 그녀가 붉은 별이야."

내 대답을 예상 못 한 듯, 왓슨은 고개를 들이 밀었다.

"정말?! 증거는? 증거는 가지고 왔나?"

"집에 어제 공격받은 점퍼가 있어."

“맙소사, 윗대가리들이 예상해서 정말로 맞는 게 있을 줄이야”

왓슨은 미간 가득 주름을 잡으며, 포크로 합성 단백질 고기를 집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그것만 알아온 건 아니겠지?"

"아니, 몇 개 더 알아오긴 했는데. 여기서 보고할까?"

왓슨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쓰리 사이즈를 알아 온 건가! 알아왔다고 해주게! 그녀의 쓰리 사이즈를!”

“…그딴 걸 어떻게 알아오냐 이 관음증 환자놈아”

왓슨은 미간이 말려 올라갔다. 작위전인 슬픔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내가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그래, 이렇게 중요한 정보도 알아오지 않은 자네가 알아온 정보라는 게 어떤건지 어디 들어나 보지."

왓슨의 헛소리와 상관없이, 몸에 약기운이 도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가라앉고, 고통이 줄어든다. 스스로 더 침착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전쟁 때 보다 많이 약해졌어. 위력도, 범위도. 그런데 예전처럼 일정 기간마다 폭주하는 건 여전하더군. 안 그랬으면 절대 눈치 채지 못했을 거야“

내 설명에 왓슨은 먹으려던 고기를 내려놓고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외에도 있을 거 같은데?”

“능력을 쓸 때 리스크가 커졌어. 겉으로 보이는 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기억퇴행, 조울증, 몇몇 상황에 대한 병적인 공포. 감정조절장애… 능력이 기폭제가 돼서 그 순간마다 터지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움직이는 정신병원이 따로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녀가 안 걸린 건 인구에 비해 넓은 섬이 준 행운에 불과하다. 주거 구역이나 학원 구역을 제외하면 무인지대나 다름없으니까.

"치료는 받고 있나?"

"신경 안정제 소량."

"평범한 우울증 환자랑 똑같이 처방받는 다고?"

"능력을 안 쓰면 정상인처럼 보이니까."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내 고기를 포크로 찍었다. 식은 고기에서 기름이 삐져나온다.

"아하하, 그건 그렇군. 그래서 몇 년 동안이나 안 걸리고 잘 숨어있었다는 거군.“

왓슨은 어색하게 웃으며 식사로 눈을 돌렸다. 딸각, 딸각. 식사는 포크 소리 말고는 별 대화 없이 진행되었다. 샐러드 까지 모두 먹어서 식은 고기기름에 남은 야채 조각을 문지를 쯤이 되어서야, 나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를 카르텔 녀석들과 충돌시키자"

"호오?"

"그럼 그 녀석들이랑 적당히 서로 사라져 줄 거야. 카르텔에도 삼외가 있고, 그녀도 삼외 중 한사람이니 실패해도 우리 선에서 그녀는 처리되고, 성공하면, 위에 보고할 때 몇 줄 더 적어 올릴 수..."

왓슨이 포크의 넓적한 면으로 내 미간을 눌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M속성은 남을 공격하려고 하면 안 된다네, 캐릭터성이 붕괴되잖나."

"…농담은 권장되어 마땅하지만 때를 가릴 줄 알아야한다."

내 지적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답을 찾은 듯 빙그레 웃었다.

"무펜의 말이군. 그 인간은 별 뜻도 없는 말을 잘하곤 하지. 하지만 난 분명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다네. 왜 인줄 아는가?

“모르겠는데."

내가 왓슨을 노려봤지만, 왓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내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스커트에 새하얀 블라우스. 그 위에 걸쳐진 커다란 붉은 점퍼를 입은 채로, 뭐가 그리 신나는 지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뚫어 지 듯 나를 응시하고 있는 소녀.

"에헤헤"

나와 마주치자 소녀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비슷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왓슨의 눈을 마주했다.

“천리안이 언제부터 까막눈이 됐지?”

나는 왓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왓슨은 씨익 웃더니.

"사실 아까 전부터 자네를 따라다니던데. 안 물어 봐서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네."

"왓슨!"

"아까도 말했지만 M 속성은 남에게 화를 내선 안 된다네, 캐릭터성이 붕괴되잖나."

왓슨은 억지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 볼을 씰룩거렸다. 나는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어 참았다. 등 뒤의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즐거운 시간 보내게."

왓슨은 내 가슴을 한 대 툭 치고는, 그대로 도망가듯 자리를 떠났다.

"어, 가버렸다."

심호흡, 심호흡. 나는 최대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나, 둘, 셋.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그녀가 있었다.

콩, 콩, 콩.

그녀는 점퍼에 손을 넣은 채 두 다리를 모아 공이 튕기듯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현실이란 걸 절감했다.

"맨 정신으로는 처음 만나네."

그녀는 왓슨이 앉아 있던 자리를 꿰찼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저는 아이네 만프레드라고 합니다. 방금 어떤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움직이는 정신 병원입니다.”

가식적이고 작위적인 말투로 말하는 그녀를 보자 이질감에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내가 평소에 보던 그녀는 분명…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간신히 속을 다잡고 그녀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여러 번 뵙는 군요. 저는...”

“테스터. 맞지?”

“......”

역으로 조사 당한건가?

“흐음, 테스터. 동쪽 구역에선 유명하던데. 물어보니까 누구나 다 아는 듯 알려주더라고, 세상에 둘도 없는 호구라고.”

분명 모욕적인 언사였으나, 나는 말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으니까.

“나는 왜 쫓아다니신 걸까나?”

“아, 그건 말이죠. 첫눈에 반했습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씨익 웃었다. 항상 보던 미소처럼, 아름다운 미소.

“나 아까 뒤에서 다 듣고 있었는데 거짓말하기야?”

“다 듣고 있었는데 묻는 건 또 뭡니까?”

“글쎄, 산양이 왜 산을 타지?”

“할 수 있으니까요”

대화가 너무 술술 흘러가니 미쳤던 때랑은 또 다른 식으로 두렵다. 목 뒤로 차가운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린다.

“바로 대답하는 걸 보니 말해주기 싫은가 보네, 그럼 이 옷은 어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펄럭였다. 꾀나 귀여운 행동이었지만, 어깨와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보자 그런 감상은 금세 사그라졌다.

"그 점퍼…"

"너희 집 더럽더라."

환하게 웃는다. 그 안에 담긴 뜻이 너무나 섬뜩한, 그런 미소.

표정관리, 표정관리. 나는 얼굴의 미소가 일그러지지 않게 힘을 줬다. 누군가 제발 살려주세요. 이 여자가 나를 스토킹 했어요! 라는 외침이 입을 맴돌다 다시 내려갔다.

“무엇이 알고 싶으세요?”

내 친절하고도 비굴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다가온다. 내 땀 냄새와 그녀의 채취가 한데 뒤섞여 코를 간질였다.

“어디에서 날 찾으라고 시켰어? 카르텔…은 아니고, 학교 쪽 애들? 남쪽 패잔병 녀석들?”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전 그 히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분명 진실이었다. 정보가 흘러나온 곳은 조금 더 위쪽이었지만, 나한테 말해준건 왓슨이 분명하니까.

“가장 나쁜 거짓말은 진실에 가까운 거짓말이지.”

“앙드레 지드가 남긴 말이군요. 저도 그 사람 좋아하는데.”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어젯밤 그녀의 얼굴과 겹쳐지며 등골이 시큰거린다.

“저기, 그거 알아? 이 섬에는 말이지, 놀랍게도 우리를 여기다 가둬놓은 정부 녀석들하고 내통하는 놈들이 있다는 거?”

무지 위험한 발언을 참 다정하게도 말한다. 누가 잘못 보면 연인끼리 속삭이는 줄 알겠지.

“……아까랑 똑같은 말이지만, 알면서 묻는 건 또 뭡니까?”

“사형 제도의 단점이 뭔지 알아?”

“범인이 잘못 판단해서 무죄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거?”

“바로 그거야”

그녀가 웃는다. 웃음과 비례해서, 붉은 광구들이 그녀 주변에 피어났다. 하나…둘…. 이윽고 수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주변이 붉게 빛나자 그녀는 손가락을 나에게로 겨눴다.

“미안”

3

공통주택으로 가득한 섬의 사내 녀석들의 집 상태는 룸메이트라도 없는 이상 대게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더럽거나, 혹은 더러울 여지조차 없이 휑하거나.

내 집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화장실만 달린 원룸에는 버리지 않은 배식통과 약통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가구 대신 쌓인 책들과 옷가지 몇 개가 전부인, 더럽다고 말하기에도 뭐하고 휑하다고 하기에도 뭐한 곳이었다.

물론 그녀가 오기 전 까지만.

"칫솔은 따로 쓰고, 옷장은..."

아이네 만프레드. 타칭 『붉은 별』.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와 그녀가 가져다놓은 -집주인인 내 의사 따윈 상관없이- 가방 몇 개는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변화가 가져다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불은 큰 걸로!"

그녀는 명령하듯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붉은 파동이 되어 귀를 타고 머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한쪽 귀로 빠져나간다. 붕 떠오르던 정신은 가까스로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저, 아이네양?”

“응? 응?”

가지고온 가방에서 옷을 한 아름 들어 올리던 그녀의 미소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여긴 내 집인데.”

“아냐”

“그럼?”

“내 집이야”

왜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질 않나.

“남녀간의 동거는 금지 되어있는데.”

“어머, 그래? 그럼 쇠사슬도 하나 받아와야겠네.”

“어디에 쓸… 아니, 아니, 말하지 않아도 돼.”

집밖에 개처럼 묶여있는 자신을 생각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비참했다. 확인받는 다면 더 비참하겠지.

“별거 아냐. 그냥 집밖에 묶어 두려고.”

역시, 비참하군. 나는 애써 놀라는 척한 뒤, 그녀에게 사정했다.

“저기, 절대 보고 따윈 하지 않을 테니 그냥 서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처럼 뒤 돌아서 가는 건 어때?”

어느새 두 번째 가방을 열던 그녀는 내 말에 눈을 흘겼다.

“뒷조사나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아, 지당한 말이 나왔다. 너무 정론이라 말문이 콱막혔지만, 나는 뚫린 입이라고 다시 말했다.

“다르게 생각해보라고, 나는 방금 전 까지 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그랬다. 분명 그 벤치에서, 그녀는 나를 죽이려고 『붉은 별』을 사용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옆 위아래 가릴 것 없이 공격받았다. 물론, 죽지는 않았다. 죽었다면 거기서 우리 둘의 인연은 끝났겠지. 그녀에게는 아쉽게도 나는 그 모든 상처를 재생했다. 물론 내 능력이 그녀보다 상위에 있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그녀가 미쳐있을 때 도망 다니지도 않았겠지. 아무리 뛰어난 재생력이라도 회복되기 전에 피해가 누적된다면 죽음으로 귀결된다. 내가 살아난 것은 순전히, 그녀의 능력이 가진 치명적인 단점덕분이었다. 과거와 달리 그녀는 한 번에 길어봤자 10초 이상 맨 정신으로 『붉은 별』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 이상 전개한다면 아마도 내가 소위 정신병원이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 덕분에, 그녀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동안 미쳐버린다. 아마 내가 한계까지 그녀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건 15초가량. 아슬아슬한 세이프존이다. 물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능력을 전개했다면 날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생각해보라, 숨어있는 입장에서 자제력을 잃고 사람들 사이에서 폭죽쇼를 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안 죽었잖아.”

그녀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듯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징조다. 죄책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니까.

“내 능력은 목숨만 부지해주지, 고통까지 막아주지는 않아. 혹시 배가 뚫리는 고통 느껴 본적 있어?”

배가 뚫린 다는 말에 그녀의 뒷모습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 그렇지. 아무리 평화로운 나날 속을 보내고 있다 해도, 그녀 또한 전쟁을 겪은 ?.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남의 뒤를 캐고 다니다가, 불리해지니까 동정표를 사려고 하는 거?”

그녀는 홱 뒤로 돌아 눈을 마주했다. 아마 눈을 마주치면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눈은 마음의 창 따위가 아니다.

“…진심으로 믿기는 힘들겠지. 나도 이해해, 이미 서로 모른 척 하기에는 너무 멀리와 버렸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정체를 숨기는 거잖아?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모두 네가 불리해. 나는 동료도 있고,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우리가 적이라면, 너는 언젠가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말이야. 나는 서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

눈에 힘을 주고, 입을 굳게 다문다. 흔히 말하는 진심어린표정. 물론 진심 같은 걸 담지 않아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표정이지만.

“어떻게?”

좋아, 걸렸다.

“네가, 우리 조직에 들어오는 거야.”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내 제안에 고민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집에 있었고, 내가 배급신청서를 적어 나가는 것도 말리지 않았다. 남은 건 그냥 단순한 시간 끌기.

가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아까 왓슨이 가슴을 치면서 넣어두고 간 종이였다.

종이에는 간결하게 『붉은 별』탐색, 회유. 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그대로 종이를 입에 넣고 씹었다.

“이거 그냥 사막에서 바늘찾으라고 던져준거잖아?”

그런데 나는 운 좋게도 바늘을 찾은 거고. 자, 이제 위에는 뭐라고 보고할까? 과거의 전쟁영웅. 『붉은 별』. 이미 패배한 병사를 어디다 쓰려고 그녀를 다시 찾는 것일까.

아니, 아니지. 그녀는 병사가 아니다. 그녀도, 왓슨도, 나도. 우리는 무기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지던 말 던 계속 쓰이는 거다. 계속, 계속. 고장 나서 더 이상 수리가 안 될 때 까지. 새삼스럽게도, 입맛이 쓰다.

이 더러운 기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배급신청서 아래에, 작게 다음 보고를 적어넣었다.

『붉은 별』탐색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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