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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앞면과 뒷면 사이에서
글쓴이: 키르기스
작성일: 12-07-29 01:10 조회: 1,832 추천: 0 비추천: 0

[1일째 - 월요일]

어느날, 지상에 12명의 신들이 강림하다.

[2일째 - 화요일]

강림한 신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대륙을 주무르며, 12개로 공평하게 뜯어서 나누어가지다.

[3일째 - 수요일]

대륙이 뒤흔들리며 죽어간 인간들 대신, 신들이 새로운 신인류를 만들다. 그들은 편의상 '천사'라고 불린다.

[4일째 - 목요일]

살아남은 인간들과 신인류인 '천사'들이 자신들의 존엄과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

[5일째 - 금요일]

인간, 강대한 '천사'들의 힘 앞에 패하여 무릎꿇다.

[6일째 - 토요일]

'천사'의 지배하에 인간들은 신들이 살 12개의 성들을 짓고, 그 안에서 신들이 대륙에 군림하다.

[7일째 - 일요일]

마지막으로 신들은 자신들의 뜻에 걸맞게 세계의 법칙을 다시 쓰고, 영겁의 시간동안 꿈을 꾸길 반복하며 살아간다.

-'천사'들이 쓴 '신창세기'에서-

그들은 나누어졌지만 하나이며, 합치하지 않지만 뭉쳐져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외롭지 않다. 그런 상태로 그들은 영원을 보내고 있으며, 그렇기에 저주받았다. 신들에게 저주가 있기를!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금서 중 하나에서 발췌-

과거 지구라고 불리던 행성. 그 행성에서는 인류가 생성된 이래, 수많은 역사와 문명을 쌓아왔었다. 그것들이 위대한지 어떤지, 훌륭한지 어떤지, 옳바랐는지, 부조리했는지…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어떠했던 간에 그들 나름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마 별 일 없었다면 좀 더 오랫동안 무언가를 이루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인류의 역사, 정확히는 인류가 지구의 패권을 쥐고 있던 시대가 돌연 끝나고 말았다. 많은 인간과 문명이 사라졌고, 천사가 등장했다. 천사와 인간은 싸웠고, 인간은 패했으며, 세계의 문명과 법칙이 다시 쓰여지고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어서는 예전의 지구문명의 잔재따위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신과 천사들의 지배를 받아가며 천천히 자신들의, 자신들만의 문명을 되찾아갔다. 인간은, 인류는 나름 강했던 것이다. 잃어버렸던 것을 천천히, 조금씩 복원해가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행성의 주인이 되길 꿈꾸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을 신과 천사들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정 이상의 문명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제한했으며, 반항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들이 있으면 관련된 자들까지 끝까지 추적해서 모조리 살해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예상 외의 상황이라 유쾌하다고 해주어야 할까?]

지금 이곳의 상황이 그러했다. 신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즈베인(God's bane)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조직의 이름을 내걸은 이곳은 말 그대로 신과 천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움직이는 레지스탕스였다.

이러한 류의 저항조직에서는 1, 2위의 규모를 다툴 정도로 메이저에 속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집단이기도 했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는 테러도 서슴치않아 천사들 사이에서는 매우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인류의 적인 천사를 토벌할 뿐만 아니라, 의적처럼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몇 안되는 조직으로서 히어로 취급 받고 있기도 했었다. 뭐, 이제는 과거의 일로서 추억되다가 잊힐 일만 남은 듯하지만.

[아니면 나의 직속수하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 배신한 것에 대해 불쾌해야 할까?]

현재로서는 인간을 훨씬 초월하는 힘과 기술을 가진 천사들조차 섬멸은커녕 조직의 실체를 찾는 것조차 애를 먹고 있던 가즈베인. 근 10년동안의 인간으로서는 화려하다고 할 수 있던 활동의 종말은 단 한 존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주 먼 옛날 이 세계에 강림했었고,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12명의 지배자들 중 하나인 신(Great One). 그의 압도적인 오성과 힘 앞에 인간의 조직따윈 단숨에 들통나 부서지고 말았다. 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인간의 어떠한 힘과 무기와 단결력과 우정, 사랑, 집착, 희생 등등…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만큼의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신인 것이었다. 그런 신이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강대하고 위압감어린 목소리로 눈앞의 존재에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지?]

"…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지만…질문을 받은 대상은 인간이 아니었다. 천사였다. 천사라고는 해도 등에 하얀 날개가 달려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은은한 빛이 나는 하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남성이었다.

"결국…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역시…몰랐을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나에게 대항해봤자 맞이할 최후는 정해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눈앞의 천사가 천사의 몸임에도 인간들의 저항조직인 가즈베인에 들어와 일한 것은 대략 8년전. 그 당시에는 이름도 달랐고, 규모도 작았던 약소 레지스탕스 조직이 그가 합류함으로서 천사들조차 애먹일 정도로 강대한 거대조직으로서 변모할 수 있었다.

눈앞의 천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신도 나름 유능한 창조물로서 눈여겨보고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그런 신의 기대를 배신했다. 사실 맘만 먹으면 그 8년전에도 쓸어버릴 수 있었고, 언제든지 없앨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 8년을 기다려주었던 것은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지켜보는 것이 유쾌할 거 같다라는 신의 변덕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변덕에 의해 가즈베인은 멸망했다. 남은 조직의 구성원은 이제 눈앞의 천사뿐이다. 옛날에 조금 기대했던 눈앞에 천사에게 신은 이제 별 미련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애초부터 수많은 장난감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게 좀 더 재밌는 일을 벌였다 정도의 인상밖에 없었다. 그런 존재에게 지금 굳이 친근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와 어조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몸을 배신할 생각을 했지? 오늘날의 이 최후를 감수할 정도로 무언가 매력적인 거라도 있었나?]

"…"

그런 신의 호기심어린 질문에 눈앞의 천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신에게는 별 상관없었다. 짐작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런 모습을 보니…역시 저기에 숨어있는 녀석들 때문이려나?]

"…!"

신의 떠보는 말에도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신의 눈에서 마음속의 작은 동요를 숨길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럴 것이라는 것도 눈앞의 천사는 알 수 있었다. 신이 가리킨 곳에는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두 명의 아이들이 숨어있었다. 눈앞의 천사의 자식들이었다. 다만 그 아이들은 순혈 천사가 아니라, 인간과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이 천사와 인간의 혼혈이 생기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인간과 천사와의 사랑과 결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해도 발각되는 순간 죽음으로서 없는 것으로 만들게되는 것이 정상.

하지만 신의 인식에는 엄연히 혼혈인 아이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그렇다. 눈앞의 천사는 인간과의 사랑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감수하며 배신한 것이었다.

[크크크큭! 재미있구나. 인간이란 너 같은 고위천사조차 유혹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던가? 어쨌든 지금까지 나름 지켜보면서 유쾌했다. 이제까지 유쾌하게 해주었으니 단번에 보내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신의 입장에서는 나름 선심을 쓰며 손을 쓰려던 차에, 눈앞의 천사가 제지한다. 그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지만, 왠지 호기심 더 앞서서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뭐지? 혹시 목숨구걸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너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

신이 그렇게 정했다.

"저의 목숨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들의 목숨은 살려주십시오."

[그걸 목숨구걸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죽는다. 오늘부로 그 이상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했다. 그것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에게 자비를…정확히는 거래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호오? 거래? 네가 나한테 거래를 할 수 있는 게 있던가?]

창조물로서 창조주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가소로운 말이었지만, 눈앞의 천사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확신에 찼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흐응…그렇게까지 말하니 한 번 들어나보도록 하지. 말해보아라, 내가 질리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

그에 신은 응해주었다. 눈앞의 천사는 그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제부터는 도박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실패하면 그의 아이들의 미래조차 죽음으로 정해지고 만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하다못해 연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신께서는 저에 대해 8년을 기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찾아오신 것을 보면 이미 저에 대해서는 질려버리신 것이겠지요."

[그렇다.]

"하지만 저의 아이들은 아직 자라나는 새싹입니다. 8년간 당신을 즐겁게 한 저의 피를 이어받았고, 아직 무궁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부디 그 가능성을 믿고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못본척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흐응? 그러니까아∼! 네 아이들이 너 이상으로 날 즐겁게 해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것을 믿고 내버려둬달라?]

"그렇습니다."

[어쩔까나…]

그 제안에 신은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재밌을 거 같기는 했다. 뭐니뭐니해도 눈앞의 천사의 피를 이어받은데다, 천사에게도 인간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단인 혼혈인 것이다. 보통은 여기서 자신이 내버려둔다해도 얼마 안 가 죽어버릴 거 같지만, 왠지 여기서 자신이 내버려두면 끝까지 살아남을 거 같다는 확신이 신에게는 있었다.

굳이 눈감아줄 이유따윈 없고,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서의 후한 같은 것을 생각하자면 지금이라도 죽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아직 어린 혼혈 2마리를 죽여봤자 무슨 재미일까. 아무리 잔혹하게 갖고 논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다. 그런 것엔 너무 많이 해봐서 질려버렸다.

[그럼 일단 한 번 봐보도록 할까?]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흥미를 느낀 신은 일단 그 제안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견적을 뽑아보기 위해 그 대상을 눈앞으로 가져와보기로 했다.

콰앙!

“히익!”

“꺄악!”

신의 손짓 한 번에 요란한 폭음이 일면서 꼭꼭 숨어있던 두 혼혈천사 아이들이 비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신이 눈짓을 하자 순식간에 그의 눈앞으로 잔뜩 겁에 질린 아이들이 놓여진다.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네가 기대해볼 가치가 있다는 아이들인가?]

끌려나온 아이들은 정말로 작고 어렸다. 천사의 피를 이은 아이들답게 매우 아름다운 외견을 하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눈물과 공포로 인해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이 정도의 미모는 고위의 순혈천사들 사이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조차 잠깐 혹할 만큼의 미모였지만 그뿐이었고, 오히려 그 미모 때문에 너무도 눈에 뜬다. 신이 여기서 그들을 놔준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아이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언제까지고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에게 있어서 살아남기만 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아무래도 별로 기대할 것은 없는 모양이군.]

그런 결론에 도달한 신은 아까 받은 제안을 무시하고 눈앞의 아이들을 가지고 어떻게 가지고 놀면 재밌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서로 그 작은 체구를 얼싸안고 있는 조그마한 혼혈소녀들. 이 압도적인 힘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버티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자신보다 눈앞의 자신의 가족을 더 걱정하는 빛이 서려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 어린 두 자매의 관계가 매우 돈독할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렇다해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깝지.]

그 말과 함께 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이들 앞으로 작은 단검 2개가 놓여졌다.

[하나는 봐주도록 하지. 그것으로 서로 죽여라. 5분 내로 한쪽을 죽이고 살아남는다면 봐주도록 하지.]

“그런!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기다릴 필요 없다. 어차피 하나면 충분해. 게다가…]

말을 하면서 당황하는 천사의 표정을 즐기는 사악한 표정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줘서 가득 복수심을 가지는 편이 더 즐길 수 있을 거 같지 않나?]

“그런 말도 안 돼는…!”

[자, 어른은 입 다물고 있어라.]

뭐라 더 항의하려는 부모의 입을 신력으로 막아버리고 신은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았다. 5분 내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물론 어떤 경우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다. 아이들은 당장 눈앞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들의 상황이 이해가 되는 거 같았다. 그 때 깃드는 새로운 당혹과 공포. 과연 여기서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신이 말한대로 서로 죽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있을까? 또는 자기를 희생해서 어느 한쪽이 자살한다던가? 어느 쪽이던 5분 뒤에 두 아이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어느 한쪽이 살아남던 아니던 신은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으, 으아아아-!”

여기서 두 아이 중 하나가 단검을 집어 들더니, 가득 독기를 담은 눈으로 신에게 달려들었다. 가당치도 않게 그 조그맣고 여린 손에 든 자신이 만들어준 단검으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인가, 하고 신은 코웃음쳤다. 아니면 그저 소극적인 자살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던 이것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답례로 붙잡아서 죽여달라고 외치도록 만들 고통을 한 100년 정도 내려줄까,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며 손을 쓰려고 했다.

펑!

폭음이 일었다. 신이 한 것이 아니었다. 느긋하게 붙잡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신에게 달려들었던 아이가 들고 있던 단검을 신에게 던졌다. 그 자체는 놀랄 것도 없지만, 그 단검이 신에게 다가간 순간에 갑자기 폭발했던 것이다.

[호오, 마법인가? 놀랍군.]

본디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오로지 천사들에게만 신이 허락한 권능이었다. 그런 마법을 눈앞의 아이는 썼다. 물론 혼혈이라도 천사의 피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혼혈은 마법 자체를 쓸 수 있는 경우도 거의 없고, 무엇보다 성인식을 거치지 않으면 순혈 천사도 마법을 쓸 수가 없다. 그런 것인데 눈앞의 혼혈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마법을 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위력이 웬만한 수준의 성인천사 이상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 정도로는 신에게 어찌할 수 없다. 아이 나름으로는 의외의 기습이었을 모르지만, 그 혼신의 공격은 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그의 몸에 둘린 신력의 벽에 의해서 완전히 무효화되고 말았다.

[돌연변이인 건가?]

그것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으로서도 처음 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매우 희소성이 있었고,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좋다. 이 정도라면 일단 여기서는 눈감아주도록 하지. 미래를 위한 작은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말이야.]

그래서 신은 다시 마음을 바꿔 눈앞의 천사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별 생각 없는 변덕 같은 생각에서 말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를 즉흥적인 기분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리 그래도 창조물 주제에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벌은 내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 벌을 신은 강렬한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으아?!!”

[자, 그럼 이제 안심하고 죽도록 해라. 자신의 딸의 손에 말이지.]

“모, 몸이 멋대로…!”

신력에 의해 조종당하는 아이의 몸은 마찬가지로 신력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천사의 곁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그 손바닥으로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다.

“시, 싫어! 그만…제발 그만해!”

그에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 깨달은 아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싫어어어어-!”

펑!

신력에 의해 조종된 육신이 구성한 아이의 마법은 자신의 부친에게 용서 없이 날아가 그 몸에 박히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 신은 신력을 이용해 아이에게 여러 잔혹한 일을 시켰다. 마법을 사용하게 해 신체 일부를 천천히 태운게 한다거나, 단검을 쥐어줘 사지를 끝에서부터 잘게잘게 잘라내게 한다거나, 배를 갈라 해부하고 내장을 꺼내 피와 함께 뒤집어쓰게 한다거나.

“히, 히이…”

푹! 푹!

그러는 동안에도 신력에 의해 부친 쪽이 죽지 않고 그 모든 고통을 온전히 느꼈다는 것이, 그리고 고통이 담긴 뜨거운 피를 딸 쪽에서 온 몸에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더 비극인 것일까?

[그럼 가보도록 하지.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쿠쿡, 크크크쿠히히히햐햐햐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신은 마치 들으라는 듯이 과장스런 광소를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부서지고 황폐해진 공간에 남은 것은 신에게 대항했다는 죄로 딸에게 참혹하게 죽은 천사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친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만 아이,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둘은 한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1장. 이왕 생길 출생의 비밀이라면 재벌이 백배 나을 거 같다.

"다녀왔습니다."

12명의 신이 다스리고 있는 세계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위신은 오늘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아무도 없는 황량하고 어두운 방만이 자신을 반겨줬을 것이다.

"…"

하지만 그런 평소와는 달리 방 안에는 오늘 어디선과 보았던…그래, 낮에 위신이 만났었던 좀 이상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퍼억!

그리고 위신이 뭐라 말하려고 하기도 전에 재빠른 스트레이트 펀치가 작렬했고,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위신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18세 생일 바로 하루 전, 정확히는 2시간 17분 전 이야기였다. 본인은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잊고 있었지만.

전후사정을 살피기 위해 잠시 시간을 되돌려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시점은 위신위주로 관찰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위신은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 위신은 고아였다. 출생이 어떤지 본인도 모르는 애매모호한 상태였으며, 정신차려보니 지금껏 혼자서 그럭저럭 지내오고 있었다. 물론 형제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맘 편하게 자기자신만을 생각해오며 조금이라도 살만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해, 간신히 좁고 형편없지만 세를 든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학교는 다니지 않았고, 앞으로의 진로 같은 것도 불투명했으며,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바쁜 처지이기는 했지만 노숙이 아니라 세를 든 것뿐이라도 어엿한 집이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위신 그에게는 말이다. 빈말로도 순탄한 인생을 보냈다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빈곤한 삶에서도 최저한의 인성을 잃지는 않은 채 오늘도 위신은 나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빵집 점원 아르바이트였다.

띠링!

빵집 주인이 열심히 빵을 만들고, 새로운 빵을 연구하며 맛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가계에서 손님들에게 빵을 파는 역활을 맡는 일이었다. 제빵기술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배울 수 없고, 시급도 짠데다, 선반에 나열된 무수한 빵들도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것이었지만, 구수하면서도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빵냄새만큼은 위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면서도 즐겁게 하는 모순된 상태를 만들어주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빵집주인은 위신이 가끔 장사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구박하기도 하지만, 별로 위신 탓이 아니라 이곳 위치라던가 빵 맛이라던가 여러 가지 요인을 조합했을 때 딱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일 뿐이었다.

그냥 점원이 미인이 아니라 칙칙한 남자라서 한 소리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긴 위신이 아니라, 귀엽거나 예쁜 미소녀가 점원으로 있으면 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좀 더 손님이 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런 미소녀가 이런 시급도 짠 곳에 알바를 할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기는 하지만.

"어서오세요!"

문에 달아둔 작은 종이 울리면서 들어온 손님처럼 말이다. 그 손님이 들어오자 순간 가계 안이 확 밝아진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위신보다는 약간 연상인 듯싶은 성숙한 미인이었다. 지금까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위신의 인생동안 저만큼의 미인은 처음 보았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현실과 잡지 등을 포함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왠지…어디선가 본 듯도 싶었지만. 그런 기시감이 아주 약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위신으로서는 처음 본 것이었다. 그런 기시감이야 어쨌든 이곳에서 꽤 일한 위신이 오늘 처음 보는 것이 평소에 들르는 아주머니나 심부름 온 꼬맹이들 같은 이곳 주변에 사는 사람이 아닌 외지인인 모양이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에 녹색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여성은 잠시 가계 안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뭔가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그에 위신이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그에 엄청난 미인을 앞에 둔 남성으로서의 동요 같은 전혀 없었다. 미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위신은 이런 쪽으로 담담한 면이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런 침착한 면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반면에 둔하다라던가 고자라던가 하는 소리도 가끔씩 들었다. 어찌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

"…어, 찾으시는 것을 말씀해주시면 금방 찾아드리겠습니다."

위신의 친절한 말에 손님으로 들어온 미인은 시선을 돌려 위신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완벽하게 무표정. 아무런 감정도 표정에 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눈에는 뭔가 강렬한 빛이 떠올라 있는 거 같아서 왠지 부담스러웠다. 또한 그 눈빛에 약간 불쾌해졌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도 의아해했지만. 위신이 속으로 뭐라 생각하거나 말거나, 눈앞의 여성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위신만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음?”

그런 와중에 위신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뭔가 강렬한 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기분 탓일지 눈앞의 여성의 안색도 좀 창백해 보이는 듯싶었다.

“어, 저기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그에 위신은 혹시라도 눈앞의 미인이 가계 안에서 쓰러지면 얼마나 골치 아파질까 걱정하면서 무심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쫘악!

“만지지 마!”

그리고 위신의 손은 그녀에게 한순간 닿은 직후에 힘껏 쳐내어졌다.

“아야야, 죄, 죄송합니다.”

상당히 과민한 반응이라 생각되어 무심코 화가 나기도 한 위신이었지만, 상황이 어찌 되었든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했던 것은 확실히 실례였을 거라는 생각에 재빨리 사과를 하고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미인의 시선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보였던 눈빛이 좀 더 다른 색채로 강렬해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휙!

그러게 아주 잠시 더 위신을 노려보던 여성은 돌연 몸을 돌려 가계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간신히 위신은 방금 전 그녀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잔뜩 겁에 질린 고양이가 어떻게든 허세를 부리기 위해 몸을 곧게 하고 으르렁거리는 것과도 같은 모양새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저 추측일 뿐인 이유는 그 미인과 자신에게 전혀 접점이 없고, 그렇기에 그런 시선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추측이 사실일 거라는 것만은 이상하리만치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고 난 직후에 말도 안 된다고 잘라버리기는 했지만.

그러고 한동안 여성의 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별난 행동과 마지막의 말 때문에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별 일 없이 가계 일을 하는 동안 깨끗히 잊어먹은 위신. 역시나 그 일 외에는 별다른 일없이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쳤었고, 다음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위에서 말한대로.

위신이 일하던 빵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미인은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잠깐의 시간.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소모한 심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여기는 아이레. 그를 찾았어, 엘레티나.”

그리고 돌연 그녀는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미안, 아직 거기까지는 하지 못했어. 아니, 오히려 미안한 것은 나야. 됐어, 주어진 일은 확실하게 해낼 거야. 그것만을 위해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왔는걸. 그러니까 걱정해줄 필요 없어. 응, 그럼 수고해.”

그것을 끝으로 그녀, 아이레는 다시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겼다.

"으으…"

낮에 만났던 정체불명의 여성에게 자신의 방에서 갑작스런 습격을 받았던 위신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장소로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냥 본인방에서 차분히 깨어날 수 있었다.

"정신이 드셨나요?"

"아, 네. 물론 정신이…헉!"

위신이 깨어나자, 바로 눈앞에 그 위신을 때려눕혔던 정체불명의 여성이 무릎꿇고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놀라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겠지.

"아까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위신님."

위신이 놀라건 말건 간에 정체불명의 여성은 태연자약한 무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일단 사과하는 거 같기는 한데, 그런다고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개선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쨌거나 눈앞의 여자는 남의 집에 무단으로 불법침입해서 폭력까지 휘둘렀던 것이다.

아까하고는 달리 얌전한 태도에 성별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강도라 생각해도 할 말 없는 것이었다. 물론 위신의 집에는 훔쳐갈만한 것 따윈 없었으며, 여성이 풍기는 분위기도 강도나 도둑이 가질법한 분위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특히 한 자루의 잘 제련된 검처럼 바짝 날이 선 거 같은 느낌이. 하여튼 목적을 모르겠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불안함 맘에 침묵을 깨고 일단 신원파악부터 시작하는 위신.

"아이레라고 합니다."

그에 정체불명의 여성은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지만, 당연히 위신으로서는 그런거나 알고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고 싶은 것일까? 좀 더 생각해보니 위신으로서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그래서 일단 위신은 아까 한 방에 훅 간 것은 잊고, 최대한 담담하게 자기 할 말을 했다.

"아이레씨. 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제 집에 방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한 짓은 엄연히 불법침입입니다. 굳이 경찰에게 신고해 소란스럽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얼른 제 집에서 나가주세요. 저는 아침일찍 일어나 일해야 하니까 푹 쉬어야 한다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위신의 나름 정중하면서도 엄한 말에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달지 정체불명의 여성, 아이레는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 담겨있는 의사가 매우 확고해보여서 말로는 소용이 없을 듯 싶다. 여기서부터 위신은 난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지? 경찰을 불러? 부르는 것은 좋다. 피곤해죽겠는데 딱히 미인과 좁은 방 안에 단 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일은 다 잊어줄 수 있을만큼 메리트를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런 쪽으로 철저한 남녀평등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줄 수도 있다. 필요하면 여자라도 얼마든지 경찰신세를 지게 만들 용의도 충분히 있었고, 거기에 마음이 걸린다거나 할 이유따위 전혀! 없었다. 다만 위신이 경찰을 부르거나, 큰소리로 도움을 청하려고 하면 십중팔구 그 전에 다시 기절하게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성숙하지만 연약해보이는 외견과 달리, 눈앞의 여성은 진짜배기였으니까. 당연히 자력으로 가진 무력을 이용해 상황을 타파해본다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뭐 어쩌려고요?"

반쯤 자포자기가 되서 묻자, 아이레는 위신의 오른판을 가리켰다. 그에 위신은 의아해하면서도 경계심을 풀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오른팔을 들어 살펴보았다.

"뭐, 뭐야 이거…팔찌?"

지금까지는 눈앞의 아이레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분명 위신의 기억에는 없는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팔찌가 오른팔 손목에 차여져 있었다. 빈곤한 위신의 인생에서는 평생 연이 없을 거 같은 아름답게 꾸며진 팔찌였다. 그 아름다운 외견에 위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음미하듯이 감상했다. 이런 부분에는 지금까지 연이 없어서 무지한 위신이었지만, 그런 그의 감성으로도 이 팔찌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것인지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에 살짝 불쾌해졌었지만, 그보다 훨씬 강한 감탄에 묻혀 그런 희미한 감정은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왜 제가 이걸 차고 있는 거죠?"

분명 위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차고 있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제가 채워드린 겁니다."

마치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듯 대답하는 아이레.

"대체 어째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진짜 듣고 싶은 것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다. 솔직히 아름답고 훌륭하기는 하지만, 남자에 빈곤한 서민인 위신으로서는 이런 쓸데없이 대단한 팔찌따윈 차고 있기 부담스러웠다. 가능하면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었다. 실제로 벗어던지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빠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살짝 속으로 혀를 차게 되었지만, 자각하지는 못하는 위신.

"그에 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진정해주세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을…아니, 죄송합니다. 잘 경청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던 위신은 저도 모르게 항변을 하려 했지만, 다 끝맺기도 전에 아이레의 살짝 가늘어진 눈매에 압도당해서 극히 공손하게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또 갑자기 얻어맞기 기절하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다. 물론 죽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위신은 아이레에게서 잠깐 사이에 엄청난 살기를 느꼈었다.

"우선 뭐부터 말하면 좋을까요…당신은 혹시 가즈베인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가즈베인이라면…20년 전까지 활동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레지스탕스 조직 말인가요?"

가즈베인이라고 하면 위신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나이든 사람들에게서는 가끔씩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하나의 전설의 되었던 집단이었던 것이다. 위신도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가끔 하는 이야기에서 흘러나온 것을 주어들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즈베인의 간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눈 앞의 여자는 자신이 그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조직의 간부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물론 놀랍기는 해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는 몰랐지만. 좀 더 이야기하자면 아직 신빙성에 대해서는 반반이다. 하지만 왠지 위신은 마음 속으로 아이레의 말이 사실일거라고 이상할 정도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근거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다라고는 해도 20년 전의 가즈베인과는 엄밀히 말해 다른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 가즈베인은 20년전 그날 멸망하고 말았으니까요. 그럼에도 저희가 당당하게 가즈베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는 확실한 정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성?"

레지스탕스 조직에서도 그런 것을 따지던가? 왠지 빈정거리고 싶은 맘이었다.

"바로 당시 전 가즈베인을 이끌던 우두머리의 아들이 현 가즈베인의 보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라면 정통성 어쩌구도 이해못할 바는 아닐지도 모른다. 요컨데 부모의 유지를 이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어, 저…대단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그게…저하고는 무슨 상관인 거죠?"

솔직히 놀랍기는 한데, 위신으로는 뜬금없기 그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니, 불필요하다못해 해가 될 거 같은 정보인 거 같았다. 애초에 신과 천사에게 대항해서 싸운다는 레지스탕스 조직들의 이념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었고, 별로 신과 천사에 대한 반감도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천사들은 레지스탕스 조직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에게는 가차없었기 때문에, 이런 접근 자체가 민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 위신의 속마음따윈 아량곳하지 않고, 아이레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우리의 현 보스에게는 사실 형제가 있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말이지요."

그리고 이어진 설명에 왠지 전개가 보이는 거 같아 싫은 기분이 급격히 높아졌다.

"…으음, 그래서요?"

"전 가즈베인이 멸망하고 나서 두 형제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형제 중 형쪽인 저희 보스께서는 그것을 매번 안타까워하시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동생을 찾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수소문 끝에 드디어 동생쪽인 당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뭐라고요?"

"당신이 바로 저희 신생 가즈베인의 보스의 하나뿐인 남동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

참…난데없이 뜬금없는 전개다. 적어도 위신에게는 그랬다. 너무 뜬금없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흔한 귀족이나 재벌집의 숨겨진 자식이라던가…하는 진부한 전개는 아닌 거 같지만…음? 레지스탕스 조직 보스의 동생? 이건 또 뭔소리인 건지? 위신으로서는 그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농담하시는 거겠죠?”

“농담이 아닙니다. 분명히 당신은 저희의 보스 리온님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십니다.”

농담으로 얼버무려 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방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싶었다. 솔직히 위신으로서는 아이레에게 착각하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민폐스러운 이야기다. 확실히 위신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 잘 모르고, 물론 부모형제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너무 어릴 적 일이라서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가능성으로만 따지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곧이곧대로 들어줄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도 당연히 아니었다.

“아니,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고요. 그래서…대체 저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이야기 전개상 어떻게 돌아갈지 대강 짐작하면서도, 위신은 최후까지 발버둥을 멈추지 않으려 했다.

“당연히 위신님을 모셔가기 위해서입니다.”

“…허어.”

그렇게 말해도

“따라갈 리가 없잖아요? 그 당신들 수장이라는 사람이 진짜 제 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런 기억 하나 없다고요. 아주 오래 전부터 혼자서 지내왔단 말입니다. 이제와서 가족이라던가, 형제랍시고 굳이 찾아가볼 생각 따윈 없었다고요. 게다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레지스탕스 조직의 보스라니요! 솔직히 민폐라고요! 전 기억도 나지 않는 형이라는 인간때문에 천사들에게 끌려가서 연좌죄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

분명 여기서 순순히 따라가면 필시 나중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면 살아남아도 잘해봤자 반강제적인 레지스탕스 가입. 설사 형인지 뭔지와의 재회 이후로 천사들에게 들키지 않는다 해도, 그냥 보내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정말 농담으로라도 생각하기조차 싫은 미래다. 위신은 그저 평범한 일개 소시민으로서 무난평탄한 일상을 보내며, 기회가 되면 단란한 작은 가정을 꾸려 자식들을 키우다 평범하게 침대 위에서 제 수명대로 늙어죽는 것이 꿈이었다. 레지스탕스가 되어 무기를 들고, 언제 천사에게 죽을지 모르는 비일상에서 벌벌 떨다가 단명하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용건이 없으시다면 그냥 가세요! 아, 이 정체모를 팔찌도 풀어주시고요.”

레지스탕스의 물건이라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보면 볼수록 싫은 기분이 강해졌다. 이런 것을 언제까지고 계속 차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됩니다.”

“그러니까…!"

“안된다고 했습니다.”

파앗!

“우웃!”

그리 큰 음성은 아니었지만, 일순 강렬한 살기를 느낀 위신. 농담이 아니라, 어차하면 진짜 죽일 셈이라고 확신하게 만들 정도의 것이었다. 그에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차고는 좀 더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지 않으면 진짜 끌려간다. 위에서 말한 암울한 미래가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인생이 그렇게까지 맘에 든다고 자부하기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런 미래를 선택할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위신은 자부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부터 생각했는데 제가 당신들의 보스의 동생이라고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 겁니까? 아주 어릴 적부터 헤어져서 최근에 찾았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간격이 있는 거 아닌가요? 당시의 사진이 있다 해도 이미 단순한 외견만으로는 증거가 약할 거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위신님이 왜 그 팔찌를 차고 계셔야 하는지에 대해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게, 말인가요?”

나름 한 방 먹일 속셈으로 했던 반론이었는데, 의외의 것과 얽혀버렸다. 이 불쾌한 팔찌가 대체 뭐길래? 알 거 같기도 하면서도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또 불쾌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다른 질문입니다만, 위신님은 네피림에 대해서는 아시는지요?”

“…그거 천사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절대적인 격차로 나누어진 천사와 인간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둘 사이에 교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즉, 서로 교합하면 낮은 확률이지만 자식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네피림의 탄생은 신이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여나 발견당하면 그 네피림은 물론 네피림의 부모나 친척까지 끝까지 추적해서 말살하고 보는 잔혹한 조치를 취하는 엄격한 방침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보스께서도 그 네피림 중 하나이기도 하십니다.”

“그건 또 대단한…헉! 그럼…설마?”

천사들의 네피림에 대한 배척이 얼마나 심한지, 보통 네피림은 성인이 되기 전에 천사들에게 잡혀죽는 것이 대다수라고 한다. 그런 천사들의 끈질긴 손길을 피해서 살아남아, 반이라고 해도 천사의 피를 가졌는데 인간의 레지스탕스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일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야기대로라면

“그렇습니다. 위신님도 엄연히 저희 보스처럼 네피림이신 겁니다.”

“…허.”

그거 또 참 대단한 출생의 비밀이시다. 지금까지 인간으로 알고 그럭저럭 지내왔는데, 뜬금없이 천사와 혼혈인 네피림이라니? 듣고 있자니 기가 차다못해 왠지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위신은 침묵으로 계속 설명해보라고 촉구했다.

“전 가즈베인 말입니다만, 원래부터도 레지스탕스 조직이기는 했지만 현 보스의 아버님이 나타나지 전까지는 다른 이름의 소규모 조직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의 이름을 가즈베인으로 바꾸고, 지금까지 전설로 남을 정도로 급격하게 키우셨다는 겁니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만.

그 전 보스이자 현 보스의 아버님이 바로 천사이셨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고위천사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서 인간을 위해 조금이라도 발벗고 나서고자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고 신에게 대항해 싸우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위신이었다. 그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조직 가즈베인의 보스가 한 때 천사였다니.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레의 말에서 지금 하는 이야기만큼은 사실일거라고 위신은 왠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 보스께서는 현 보스와 당신을 포함한 두 아이, 즉 네피림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멸망의 순간이 가까워진 날, 전 보스께서는 당신들이 천사들의 눈을 피해 인간들 사이에서 숨어살 수 있도록 강력할 술식을 걸어 네피림으로서의 기척을 완벽히 감추셨던 겁니다. 덕분에 저희 현 보스는 물론, 위신님도 인간들 사이에서 별 문제없이 지내오실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야기는 그럴 듯한 거 같기도 하지만, 증거는요? 제가 네피림이란 증거는 있습니까?”

“마법에 대해서는 아시겠지요?”

“…예, 뭐 일단.”

편의상 마법이라고 하는 신의 힘을 모방한 듯한 능력은 신이 창조한 천사와 천사의 피를 이어받은 네피림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이 종이를 들고, ‘불타라’라고 해보세요.”

아이레가 주머니에서 꺼낸 기하학적 무늬와 글자가 새겨진 손바닥만한 종이. 그것을 잡고 위신은 아이레의 말대로 해보았다.

“불타라.”

화륵!

그렇게 말한 순간, 들고 있던 종이가 순식간에 불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위신에 의해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이건.”

“이제 잘 아셨겠지요. 당신이 네피림이란 사실을.”

“아니, 그야…”

확실히 소거법으로 따지자면 그럴지도 모른다. 위신은 천사 특유의 하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당연히 천사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실제 그의 손으로 마법이 발동된 이상 인간도 아닐…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상식적으로 네피림뿐.

이 정도까지 오면 납득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속에서 뭔가 걸린다. 그냥 눈앞에 드리대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맘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지만 뭐라 하고 싶어도 당장 뭐라고 해야 좋을지 지금의 위신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위신님의 아버님이신 전 보스의 마법으로 인해서 네피림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내오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슬슬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이 오늘 18세 생일을 맞이하는 것으로, 본래라면 천사로서의 형질이 각성해 강한 마력파동을 흩뿌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위신님의 팔에 그 팔찌를 착용시킴으로서 외부로 들킬만한 마력반응을 가리는 은신마법을 걸을 것입니다. 덕분에 쓸데없는 추적의 손길은 확실히 줄어들겠지요. 여기까지로 위신님이 저를 따라오셔야 할 이유와 팔찌의 존재의의에 대해 이해하셨는지요?”

“으음…잠시만요.”

우선…정리해보자. 너무나 갑작스러운 폭풍전개라서 위신은 많이 당혹스러웠기에 차분히 요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리해보자면

1. 위신은 아무래도 네피림으로 천사 아버지와 형이 있는 모양이다.

2. 천사인 아버지는 죽었지만 형 쪽은 살아있고, 현재 레지스탕스 조직인 가즈베인의 보스로 되어있다.

3. 그 형이 현재 어릴 적에 헤어진 자신을 찾아 사람(아이레)를 보냈다고 한다.

4. 본래 18세가 되면 네피림이라는 것을 들킬 수밖에 없었지만, 팔찌의 은신기능으로 그것이 막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일 것이다. 더 있다 해도 지금 봐야 할 건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럼 정리는 끝난 셈인데

“그래서…어쩌라고요?”

“따라오세요.”

결국 이런 식으로 나왔다. 위신은 전혀 바라는 전개가 아닌데도.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고 부조리한 전개라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레지스탕스 조직이라니 말도 안된다. 터무니없다. 위신으로서는 전혀 알바 아니었다. 위에서 정리한대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기억도 안 나는 아버지나 형 따위 알게 뭔가. 싫은 건 싫은 거다. 위신은 맹세컨대 절대 레지스탕스 조직 따위로 끌려갈 생각따위 전혀 없었다.

“싫은데요?”

“따라오세요.”

문제는 눈앞의 아이레라는 여성의 존재.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확실하게 거부의사를 밝히는 위신에게 매우 흉흉한 살기를 흩뿌리고 있다. 어차하면 진짜 위신의 의사따윈 상관없이 보쌈이라도 해갈 요량인 모양이었다. 그럴 의사가 매우, 매우 다분해보였다. 그리고 그럴만한 실력과 준비도 충분해보였다. 이대로는 졸지에 납치당하게 생겼다. 정말 제대로 걸린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본인 의사라는 게…”

“따라오세요. 더 이상 말하게 하면 이후의 일은 장담 못해드립니다.”

“…”

항변하려다가 더욱 짙어진 살기와 함께 최후통첩을 받고 조용히 찌그러져 침묵하게 된 위신. 여기서 섣불리 허튼소릴하면 죽지 않더래도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얻어맞고 의식이 날아갈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위신으로서는 위가 매우 부담스러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돌연 살기를 풀고 화제를 돌리는 아이레. 위신으로서는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경계하게 만들뿐이었지만.

“지금 위신님께서 차고 계신 팔찌가 위신님의 아버지이신 전 보스의 유품이라는 것은 아시겠는지요?”

“유품?”

유품이라는 말에 위신은 무심코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딴 거 알고 있었을 리가 없다. 다만 무심코 불쾌함을 드러내는 실소가 나올 거 같아 꿀꺽 삼켜야 했을 따름이다.

“오로지 자기 자식들을 위해 전 보스께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모든 기술과 정수, 사력을 다해 제작했던 것입니다. 죽어 사라지신 지금에도 여전히 지켜주고 계신 셈인 겁니다.”

“…그렇게 말해도.”

위신으로서는 전혀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런 전 보스께서는 최후에 자식들을 도망치게 하는 대가로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죽음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 정말 뭔가 느끼시는 게 없으신지요?”

“흐음.”

솔직히 저쪽에서 원하는 듯한 감정은 전혀 느끼고 있지 않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하면 졸지에 패륜아 취급당하며 대우가 끔찍해질 거 같아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해봤자 마이너스가 될뿐더러, 자신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감을 잡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 위신이 느끼고 있는 것, 아니 아까전부터 줄곧 느끼고 있던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가 막힘을 넘어선 짜증이었다.

뭐랄까, 잘 짜여져 있기는 한데 속이 뻔히 보이는 유치한 막장연극을 보고 있을 때라면 이런 느낌이 드려나? 하여튼 그런류의 감정이다. 이쪽에선 다 알고 있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처럼 뻔한 속임수를 쓰며 속이려 드는 사기꾼들을 볼 때 느낄 법한 짜증이다.

다만 그 사기꾼은 어중간한 3류가 아니라, 1류 이상의 사기꾼이라서…분명히 뭔가 아닌데 말장난과 궤변으로 뭐라 반론하기 힘들기에 드는 짜증이기도 했다. 이쯤이면 단순한 사기 이상의 조롱이다. 화가 나기 이전에 그저 기막힘과 짜증이 우선시된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대쪽에게 장난이 지나치다, 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뭔가 명백히 상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정말 상대의 말의 앞뒤는 맞아떨어지고, 자기 쪽에서 뭐라 반론할만한 근거도 빈약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눈앞의 아이레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어느 부분이 어떻게 거짓말인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신으로서는 어떻게 해도 절대 따라가고픈 맘이 들지 않았다.

퍼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폭음이 울려퍼졌다.

“이게 무슨…"

“생각보다 빠르군요.”

“아니, 생각보다 빠르다니…”

“혹시 위신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제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 팔찌의 힘으로 자신이 네피림이란 사실을 감출 수 있다면, 그냥 그대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

딱 그대로였기에 뭐라 반론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건 무르신 생각이십니다.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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