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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데네브 ~멈춰진 소년과 멈춘 소녀~
글쓴이: 루니마 씨
작성일: 12-07-28 15:06 조회: 2,225 추천: 0 비추천: 0
밑줄친 부분에 커서를 올리시면 주석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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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네브 chapter.1 - 초여름

0

백조자리가 날아오르던 그날 밤, 소년은 두 날개를 잃은 작은 비행기 안에서 이제 막 떠오른 데네브¹를 보았었다. 그 선명한 아름다움 때문인지,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말없이 조종간을 놓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소년은 조용히 손을 모았다. 신을 믿지 않았기에 소년은 자신의 운명에게 기도했다. 차라리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즉사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소년의 그 짧은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는 무참히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는 날아오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1

하늘이 한 차례 비를 퍼부었기에 조금은 선선한 날씨가 되어야 했다. 적어도 진성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PBS²의 일기예보도 평년보다 낮은 기온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판월도의 날씨는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높은 6월 온도, 38도를 기록' 하며 진성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고온의 날씨는 어느 정도 버틸 만 했다. 하지만 판월도는 바다 위의 인공섬이라 여름에는 가만히 있어도 짜증날 정도로 습하다. 이상고온과 높은 습도의 콤비네이션 어택. 처음 며칠간은 에어컨에 의지해 버텨냈지만 에어컨이 고장나버린 지금 진성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지랄 맞은 더위에 지쳐 쓰러진 진성은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더위는 잘만 느끼는, 애꿎은 자신의 다리를 원망했다.

약 1년 전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날 밤, 진성의 허리는 비행기의 연료탱크에 의해 으스러졌었다. 그 어떤 의사라 하더라도 살 가망이 없다고 할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하지만 실험정신 강한 판월도의 의사들은 수십 번이 넘는 대수술을 통해 내장과 근육을 되살리고, 척추 뼈를 붙였으며 끊어진 중추신경을 연결했다.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진성은 마취가 풀리며 다리의 감각들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그는 다시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다시 명탐정을 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난 것은 그의 감각뿐. 모든 수술이 성공적이었고, 의사들은 그의 몸이 사고 이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리에 힘을 줘보려 해봐도 그의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의 근육은 멀쩡히 살아있는데 다만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이 어중간한 상황과 끝없이 자신을 매질하는 실망감이 진성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지나며 진성은 점차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오직 체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변한 것은 진성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뿐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들도, 창밖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도 하나 변한 것 없었다.
심지어, PBS방송국의 정책조차도 바뀌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더위를 잊어가던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앳된 소녀 하나가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6인 병실에 머물고 있는 환자는 공교롭게도 진성 혼자뿐이었다. 때문에 진성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고도 누가 들어왔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류소이 아니면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밖에 없다.

“진성 오라비! 내가 왜 왔을까? 내가 왜 왔게? 내가 왜 왔을 거 같아?”

진성은 천장을 바라보며 ‘역시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의 병실을 찾아온 사람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진성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 냉장고 털러?”
“엑, 내가 겨우 그런 이유로 왔을 거 같아? 태현 오라비는 단번에 알아맞히던데! 너무해!”
“네가 내 병문안 와서 냉장고 안 털어간 적 있었니?”
“그…그건, 언젠가 한번은 그냥 간 적이 있었을 거야! 적어도 한번은!”

여동생의 말에 진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여동생은 병문안을 올 때마다 성장기의 소녀는 잘 먹어야 한다며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이나 과일들을 몽땅 휩쓸어갔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무수히 많은 선물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진성은 언제나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냉장고 털러 온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냐?”
“아, 맞다. 이거야 이거. 오늘은 이걸 보여주려고 왔어.”

여동생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흰 색의 서류봉투였다. 봉투의 겉에는 익숙한 판월국제학교의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진성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월국제학교의 문장이 찍혀있는 봉투를 학생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판월국제학교 학생회 산하 징계위원회에서 학생에게 징계통보를 받았다거나, 아니면 시험이 끝나고 그 성적이 나왔다거나.
진성은 아마 징계가 아니라 성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최근에 판월국제학교의 시험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서류봉투에 찍혀있던 밀랍봉인이 뜯어져있었다. 그 말은 이미 여동생이 내용을 알고 있다는 말인데, 징계를 받은 녀석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웃을 리 없었다. 게다가 여동생은 그의 형 유태현은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단번에 맞췄다고 말했다. 여동생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형이 처음부터 ‘징계’를 생각했을 리 없다.

“뭐, 전교 1등이라도 했어?”
“아니, 징계!”
“뭣…!”

진성은 벌떡 일어나려했다. 하지만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아준 덕분에 진성은 힘차게 꿈틀거리는 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의 여동생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에헷, 농담이야. 나같이 훌륭한 학생이 징계를 먹을 리 없잖아?”
“네가 훌륭한 학생이라니, 믿기 힘드네. 하여튼 징계는 아니라 이거지?”
“아니라니까. 자, 보라고.”

진성은 꿈틀거리는 것을 멈추고 두 팔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곤 여동생이 건네는 서류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꺼내었다. 내용물은 몇 년 전 진성도 받아본 적 있는 판월국제학교의 성적분석표였다.

“어때, 어때, 어때? 나 짱이지?”

성적분석표의 최상단에는 여동생의 이름은 ‘유아리’ 와 함께 그녀의 전체등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등수를 확인한 진성은 여동생이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들떠있는 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전교 1등이라… 뭐,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물론이거니와 형도 줄곧 전교 1등만 해왔다고. 겨우 전교 1등 가지고 들뜨다니. 역시 아직 어리구나.”
“쳇, 그래도 태현 오라비는 칭찬해줬다고.”
“형이야 사람이 좋으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안타깝게도 난 탐정 지망생이라 현실을 직시하게 해줘야 한다고.”
“흥, 만날 탐정 지망생 타령이나 하고 있고. 그런 몸으로 뭘 어쩐다는 거야?”
“몸은 망가졌어도 명석한 두뇌는 그대로라고. 추리는 몸으로 하는 게 아니거든.”
“말은 잘해요. 입만 살아가지고는.”
“이…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냐!”
“그럼 진성 오라비는 여동생한테 칭찬 한번 못해줘?”

여동생의 반격에 진성은 말문이 탁 막혔다. 칭찬은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을 때 그의 여동생이 한 것들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모두 진성이 해본 것들이거나, 진성이 한 것 보다 더 못한 것들일 뿐이었다.
그의 형 유진성도 그에게 ‘자신보다’ 라는 기준을 세우지 말고 칭찬해줘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게 자신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철저히 계산하고 어떠한 기준을 세워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칭찬을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겠고.’

연이은 여동생의 거센 공격에 진성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그를 구한 것은 병실로 들어온 새로운 문병객이었다.

“오, 여동생과 오빠의 화기애애한 타임을 망친건가? 나 다시 나가야 하나?”
“그럴 리가, 오히려 오빠와 여동생의 살기 만연한 타임이었거든. 마침 잘 왔어.”
“흥, 누가 할 소린데. 하여튼 소이 누나는 왜 진성 오라비 같은 사람이랑 사귀고 있는 건지.”

병실의 단골 문병객 류소이는 작은 과일바구니를 소형냉장고 위에 올려두고 진성의 침대 바로 옆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진성과 그의 여동생이 과일바구니를 가지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말리며 아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음, 내가 왜 이 녀석이랑 사귀고 있냐고? 나 이 녀석이랑 안 사귀어.”

소이의 의외의 대답에 진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이는 그런 진성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때문에 진성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역시, 언니같이 완벽한 사람이 진성 오라비 같은 사람과 사귈 리 없죠.”
“자…잠깐 기다려봐! 그럼 그때 그건 뭐야? 왜, 그때 침대에서…”
“침대에서라니? 설마 진성 오라비, 하반신불수면서 소이 언니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류소이한테 뭘 어쨌다고!”
“침대에서…”
“침대가 자는 곳이지 이상한 일을 하는 곳인 줄 알아! 고등학생 주제에 별 소리를 다하는구나!”
“자는 곳…설마?”
“그런 게 아니라고! 며칠 전에 저녁 늦게…”

저녁 늦게, 라는 말에 소이는 진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때문에 소이는 눈빛으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하지만 소이의 ‘안 사귀고 있다’라는 말에 이성을 상실해버린 진성은 소이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성이 눈치를 못 챘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 소이는 진성이 뒷말을 잇지 못하도록 그 즉시 진성의 얼굴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평소 같았으면 처음 한두 방 정도는 피할 법 했다. 하지만 이성을 상실하면서 민첩성도 상실했는지 진성은 소이가 날린 주먹을 그대로 맞았다. 소이가 휘두른 스트레이트 펀치 단 한방에 진성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아리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리의 표정에 소이는 자신도 멋쩍었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아리에게 말했다.

“이런 게 어른의 세계란다.”

아리는 진심으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2

“환자분,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진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있는 병실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녁 먹을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성은 안심했다.

“으…, 저녁 먹을 시간인가요?”
“아니요, 저녁식사는 이미 끝났어요.”
“네? 그게 무슨…”
“오늘은 조리실의 사정으로 한 시간 일찍 배식을 시작했거든요.”

이럴 수가. 진성은 간호사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몸이 망가진 이후 진성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은 천체관측과 의학 논문들, 그리고 맛있는 식사뿐이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식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게 귀찮아진 진성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침대에 누우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그럼 절 왜 깨운 거죠?”
“스턴 선생님께서 환자분을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급한 일이라 하시기에 환자분을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턴 선생님이라니. 진성은 손바닥으로 미간을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 여기 신입이지요?”
“에, 그걸 어떻게 아셨죠?”
“한 가지 말해줄게요. 스턴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급하다고 하는 일의 대부분은 사실 별거 아닌 일이에요. 이 병원에서 잘, 유연하게 살아가려면 알아둬야 한다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중요한 일이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꽉 막힌 간호사 같으니라고. 진성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간호사가 그냥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휠체어를 준비해줘요. 그리고 스턴 선생님 방까지 수고 좀 해줄래요?”
“알겠습니다. 당장 휠체어를 준비하지요.”


3

스턴은 판월도의 여타 기괴한 의사들보다도 한층 더 기괴한 의사였다. 어느 쪽이 기괴하냐고 묻는다면, 진성은 늘 이렇게 말했다.

“전혀 의사 같지 않은 점이 기괴해. 그렇게 의사처럼 보이게 차려입고도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은 스턴 선생님 하나뿐일 거야.”

의사인데도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외과 전문의 ‘마를레이 빈 스턴’의 고민거리였다. 신경에 관한 한 이미 세계 제일이었지만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때문에 빈 스턴 선생님은 의사처럼 보이기 위해 흰 가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비들을 몸에 매달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스턴의 노력에도 사람들은 스턴을 의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사 코스프레를 하는 정신병자로 생각하는 사람만 늘어났을 뿐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말하는 게 너무 가볍다니까요. 그래가지곤 의학 오타쿠로밖에 안 보인다고요.”
“말하는 게 가볍다는 건 믿기 힘드네. 내가 뭐 청춘여고생도 아니고 말이야. 일단은 산전수전 다 거친 전문의란 말이지. 그것도 판월도 신경전문의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의사라고.”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의사라니. 스턴의 말을 통해 진성은 ‘역시 스턴 선생님은 가벼운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말이야. 오늘은 너에게 두 가지 알려줄 소식이 있어.”
“보나마나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하나는 나쁜 소식이겠지요?”
“어머머, 어떻게 알았어? 역시 탐정 지망생이네!”
“선생님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죠.”
“패턴 파악이라는 거냐? 신명나는 녀석 같으니라고. 어쨌든 네 말대로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하나는 나쁜 소식이야. 어느…”
“좋은 쪽 부터요.”

완벽하게 패턴을 파악했다고 자랑하기는. 스턴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진성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었다.

“축하해. 드디어 판월도의 의사들이 널 놓아줄 작정인가 봐. 이제 퇴원해도 된데.”
“쳇, 어차피 제가 퇴원하지 못하는 거 알고 있잖아요?”

스턴이 건네준 서류에는 어려운 전문 용어로 진성의 상태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잡다한 용어의 산맥 밑에는 더 이상 시험해볼 치료방법이 없으므로 퇴원해도 좋다는 각 전문의들이 사인이 멋들어진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럼 나쁜 소식은 뭔가요? 혹시 스턴 선생님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요?”
“엇, 너 진짜 족집게냐? 나 다음달, 그러니까 7월 31일에 결혼해.”
“축하해요. 근데 그게 왜 나쁜 소식인건데요? 전 여자 친구도 있는…”

진성은 말을 마저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소이로부터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당했고, 스트레이트 펀치를 얻어맞아 기절해버렸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진성은 자신이 소이와 사귀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아, 그게 나쁜 소식이라는 게 아니야. 너 tuberculous spondylitis의 증상을 보이고 있어.”
“척추카리에스요?”
“아니, 결핵성 척추염.”
“그게 그거잖아요.”
“하하하, 어떻게 알았어? 일부러 어렵게 말했는데.”
“병원에 1년 동안 처박혀서 의료논문들을 훑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어떻게 치료할 생각이에요?”
“일단 석고붕대를 하고, 항결핵제를 투여할거야. 그리고 몇 가지 수술을 하겠지.”
“안하면 죽고요?”
“하하, 네가 나보다 더 잘 아네. 네가 수술해라.”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리. 어쨌든 스턴 선생이 말한 ‘나쁜 소식’은 '퇴원해도 된다는 말은 사실 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성에게 있어 아직 탐정사무소를 열 수 없다는 뜻 이상이 되지 않았다.
척추카리에스는 수술 몇 번 하면 대충 병세를 잡을 수 있다. 진성에게 수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수십 번의 수술을 거친 진성에게 수술이란 건 그저 잠자고 일어나면 칼자국이 생기는 것일 뿐이었다.

“어쨌든 당장 수술하지는 않을 거야. spinal irritation일 가능성도 있거든.”
“그냥 척추과민증이라고 해줘요. 뭐 하러 환자한테 전문 용어로 말해요?”
“그래도 넌 잘 알아듣잖아.”
“나니까 알아듣는 거죠.”
“그래서 너한테만 전문 용어로 말하는 거야.”

음, 할 말이 없네.

“어쨌든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다 말해줬어. 가도 좋아.”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간단한 것들은 간호사 편으로 알려줬어도 괜찮았잖아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간호사가 신입인지 ‘환자에게 직접 말하세요.’ 라고 하더라고.”
“그 간호사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진성과 스턴은 그 간호사에 대해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좋은 내용은 별로 없었지만.


4

스턴과의 가벼운 잡담을 끝내고 진성은 뒷담화의 주제였던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성은 병실 안에서 이상한 여자를 발견했다. 진성이 사용하는 병실은 6인실이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현재는 진성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병실을 찾아온 문병객은 모두 진성의 문병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여자는 진성의 침대가 아닌 그 건너편 침대에 머리를 박고 울고 있었다.

진성은 그 침대가 '키온 레이크'의 것임을 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키온이 죽기 전까지 제법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울고 있는 여자가 키온 레이크와 아는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추리의 영역이지.'

가장 먼저 떠오른 가설은 여자 친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성은 키온 레이크가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팔다리에 복합골절을 당한 사람이 며칠 만에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친구일 리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냥 친구라면 죽은 당일에 오열해야 한다.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면서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 병실로 쳐들어와서 오열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렇다면 가족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가족이라면 지금까지 제시해왔던 모든 반론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성은 울고 있는 여자가 키온 레이크의 누나, 혹은 여동생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키온의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 너무 젊었기 때문이고, 전에 키온이 자신에게는 'sister'가 한명 있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 sister가 수녀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누나, 혹은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였다.

진성은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졌고, 때문에 여자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너무 심각하게 울고 있었다. 때문에 진성은 여자의 울음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 까지 기다렸다.

"저기, 키온 형의 여동생이신가요?"

여자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진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게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서둘러 대답했다.

"네? 에, 예. 티온 레이크라고 합니다."

역시 난 명탐정이 될 자질이 있어! 진성은 자신의 추리력에 감탄하면서도,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티온에게 말했다.

"형의 일에 대해서는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 입니다."

진성은 살짝 목례를 했다. 그런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티온 레이크의 표정이 애매했다. '조의를 표한다.'라는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진성은 하는 수 없이 영어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문득 키온 레이크가 러시아 사람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진성은 러시아어로 다시 말했다. 진성이 러시아어로 말하자 티온은 신기하다는 듯 진성을 바라보았다.

"대단하시네요. 3개 국어를 할 줄 아시나 봐요."
"사실 불어, 독어, 일어, 라틴어, 에스페란토도 할 줄 안답니다."

진성의 말에 티온은 뭔가 기억났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더니, 그 기억난 것을 확인하듯 진성에게 물었다.

"당신이 유진성이군요? 오빠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키온 레이크와 친하게 지내두길 잘했어. 진성은 기대감에 부풀어있다는 사실을 열심히 숨겼다. 그리곤 실제로는 엄청 궁금해 하고 있으면서도 예의상 묻는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키온 형이 뭐라고 했나요?"
"잘난 척이 심한, 밥맛없는 녀석이라고 했었어요."

우왁 스트레이트 펀치를 급소에 날리다니. 기대가 컸던 진성은 그 높았던 기대치만큼이나 빠르게 실망했다.
표정관리가 안 돼 급격한 심경변화가 얼굴로 다 드러나고 있는 진성을 보며 티온은 살짝 웃었다.

"하지만 오빠는 그게 당신의 멋진 점이라고 했어요. 잘난 녀석이 오히려 머리를 숙이면 그게 더 재수없다나요. 오빠는 잘난 녀석이라면 어느 정도는 잘난 척도 하고, 목에 힘도 주고, 조금 더 우월주의에 휩싸인 듯 행동해야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판월도 최고의 두뇌인 당신은 그렇게 잘난 척을 해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고도 말했지요."

이것은 욕인가 칭찬인가. 판월도 최고의 두뇌는 티온의 말을 해석하다가 에러가 나 버렸다. 그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에 티온은 간단하게 요약해주었다.

"칭찬이에요."

아 그렇구나. 하고 진성은 간단히 납득했다.

그렇게 다리를 잃은 소년과 오빠를 잃은 소녀의 대화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그래봤자 면회허용시간까지였지만 말이다.

1. 데네브
백조자리의 꼬리에 위치한 알파성. 베가(직녀성)와 알테어(견우성)과 함께 여름철 대 삼각형을 이루는 별이다.

2. PBS
Panwaldo Broadcasting System. 판월도의 지역방송. 24시간 내내 뉴스만 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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