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절대자의 유산
글쓴이: galimede
작성일: 12-07-27 23:49 조회: 2,185 추천: 0 비추천: 0
= = =

세화는 입안에 들어온 모래 알갱이를 뱉어냈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당연한 반응이다. 봄이 찾아온 공원에는 노란 개나리가 수줍게 미소 짓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땅바닥은 겨울의 냉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그런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행동은 사춘기 시절의 치기(稚氣)로도 할 만한 일이라 하기 어렵다.

물론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권유하기 힘든 자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뼈 속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움을 느끼면서 세화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각도가 좋진 못했지만 어쨌든 '진짜 이유'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흐음.’

그러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지금 입장과 어울리는 반응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신체 건강한 남자 고등학생이 길게 뻗은 하얀 다리를 보고 만족감을 느끼는 건 일종의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리의 장본인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낮게 가라앉은, 그럼에도 날카롭게 귀에 박히는 엷은 목소리. 세화는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그러자 옅은 하늘색 치마와 같은 색깔의 단정한 교복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느낌이 남아있긴 하지만 어쨌든 꾸준히 보아온 복장.

그건 그녀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익숙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오늘 하루 동안은 함께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말로?’

세화는 입을 이죽거렸다. 분명 오늘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세화는 그 사실에 확신을 가지기 어려웠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인가.’

지금 그녀는 여태껏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선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이든 간에 연기력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하겠다.

그래, 학교 안에서의 그녀는 마치 난(蘭) 한 촉과 같았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은 청초함마저 물씬 풍기었다. 너무나 노골적이기에 다른 학생들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른 의미로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다. 청순함의 상징이던 긴 머리카락은 검은 날개처럼 무겁게 휘날리며 부드럽게 웃던 입술은 피가 날 정도로 질끈 물려 일그러져있다.

마치 전설 속 마녀와도 같은 형상. 마른 몸매 때문에 가녀린 인상이 강한 그녀였지만 지금 그 모습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랗게 느껴졌다.

[시간이라도 끌 생각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어서 말해!]

팔을 움직일 수 있다면 세화는 턱을 긁었을 것이다. 굳이 고집피울 생각 같은 건 없다. 가능한 빨리 현재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으르렁거리는 다그침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런 곳에 이런 기묘한 구도로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 지나가다 이 해괴한 광경을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으나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외딴 공원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세화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이미 한 번 실패했던 대답을 다시 내놓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 이름은 신세화고, 너와 같이 화진 고등학교 2학년 3반에 다니고 있는......]

[그만.]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모르겠어? 그런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저기, 그런 게 아닌데.]

[거짓말.]

[그러니까 거짓말이 아니라,]

[그렇다면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세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고함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너무 힘을 쥐어짰기에 오히려 제대로 터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쇠를 긁는 거친 목소리와 그 안에 담겨진 격한 감정은 그의 몸에 제대로 전해졌다.

‘이것 참, 정말로 곤란하게 됐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분노를 내보인다는 사실은 상대가 그리 강해보이지 않은 여고생이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일임은 분명하다. 차가운 냉기를 받는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정말이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나름 잘해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사이 그녀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면서 상체를 숙였다. 어느 순간 간간히 불던 봄바람마저 멈춰버리자 주변은 완벽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렇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작은 얼굴이 떠오르듯이 두 눈 가득이 들어오자 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얼굴엔 나이에 어울리는 앳된 자국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와 상반되게 눈꼬리는 이런 여건에서조차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큼 매혹적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

그 안에선 푸른빛이 서려있는 눈동자가 여우불마냥 번뜩이며 똑바로 자신을 응시한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을 지닌 커다란 두 눈.

거기에 집중하느라 세화는 놀라야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그래서 관자놀이 옆으로 서슬 퍼런 날붙이가 지나간 사람치고는 태연하게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일단 말하지만 이걸 단순한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긴 힘들다. 날붙이라고는 부엌칼 외엔 본 적이 없지만 그는 옆에 박혀있는 매끈한 칼날이 모조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길 바래.]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길 원해. 그는 이렇게 말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단순히 그녀가 흉흉한 기운으로 압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어떤 한기보다도 서늘한 차가움이 목으로 내려와 피부에 살며시 닿은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너 누구야?]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그녀의 말을 듣고서 세화는 자신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이름은 신세화, 나이는 18세. 화진 고등학교 2학년생이며 중견 기업에 다니는 아버지와 번역가인 어머니를 둔 외동아들. 성적은 중간에서 맴돌고 교우관계는 매우 무난함. 운동과 게임을 적당히 즐기며 딱히 특기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는, 평범함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그 자체.

사실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녀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객관적인 외부정보가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좀 더 내적이고 개인적인, 잊기 힘든 기억과 소중한 추억 같은 것을.

세화는 눈을 감았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감촉이 방해되긴 했지만 딱히 문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걸 일종의 도움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이란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차를 들어 올린다든가, 불구덩이 속을 뚫고 나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래, 그렇다면 잃어버린 기억이 갑자기 돌아오는 일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 = =

[기억상실?]

세화에게는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버티다 못한 그는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는 이상적인 격언을 떠올리면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 류시호는 딱 세화가 예상했던 만큼의 반응을 내보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하필 고를 핑계가 없어서 이딴 걸 이유라고 내놓은 거냔 말이 귓가에 울릴 정도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하긴 흔한 아침 드라마에서조차 폐기처분당한 그 단어는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긴 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걸. 그는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대응했다.

[믿기 어렵다는 건 이해하는데 분명한 사실이야.]

[헛소리!]

세화는 가뜩이나 차갑게 식은 자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흥분한 시호가 팔에 힘을 잔뜩 준 것이다. 그것 자체야 문제될 게 없지만 목덜미에 닿아있는 칼날이 희미하게 떨리는 건 분명 웃어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저기, 저기 말이지. 조금 침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난 충분히 침착해.]

[도저히 그렇게 보이진.......아니, 아니야.]

영 좋지 않다. 험악한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벌기 위해 어줍은 거짓말을 했다 여긴 건지 겉으로 내보이는 분노의 정도는 더 올라가버렸다. 세화는 뭔가 흐름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필요성을.

[저기, 한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을까?]

[말했지? 시간이라도 끌 생각이라면.]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좀 들어봐.]

[.......말해.]

[그러니까 넌 지금 내가 네가 아는 신세화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 이제야 제대로 말할 생각이 드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라도 좀 알고 싶어서. 단순히 옛날 기억 하나 못했다고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단순한 옛날 기억?]

으음. 아무래도 제대로 말실수를 한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자폭버튼을 눌렀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불꽃이 더욱 파랗게 치솟았다. 분화를 시작한 활화산처럼 시호의 검은 생머리 위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착각마저 들었다.

[단순한 기억이라고?!]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일갈. 동시에 박혀있던 칼이 허공으로 날아가듯이 치솟았다. 그것만으로 따지자면 한숨 돌릴 상황이라 하겠지만 그녀는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경 팔 곳도 없었기에 세화는 얼굴 바로 앞,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 검이 날아와 박힌 사람이 느낄만한 심정을 제대로 체험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좀 지릴 뻔 했다.

[잘 봐.]

아, 보라고. 근데 그러니까 도대체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무척이나 당황한 그는 시호의 말이 무슨 의도인지 도저히 파악하지 못했다.

[보여?]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의 눈동자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모른 채 이리 저리 떠돌기 시작했다. 모양새 좋은 하얀 무릎, 화사한 느낌의 말끔한 교복, 여전히 화를 잔뜩 머금은 곱고 작은 얼굴.

‘응?’

그리고 눈앞에 꽂혀있는 칼날. 그제야 세화는 시호가 뭘 보라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지니기에 눈치 채지 못했던 특징 하나가 반 강제적으로 집중한 지금 새로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빛나고 있어? 아니, 아니야.’

저녁 시간대가 다가오지만 아직 태양은 하늘에 걸쳐있다. 잘 벼려진 칼날이라면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코앞에 놓인 그것에는 단순한 반사광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 눈을 자극하고 있다.

뭐라 단언할 수 없는 묘한 붉은 색 기운, 마치 피가 흩날리는 것 같은 그런 불길한 뭔가가.

[이제 알겠지? 이건 보통 검이 아니야.]

애초에 검이란 물건 자체에 보통이란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이정도면 확실히 개성적이라 하겠다.

[근처에서 주술의 기운이 느껴지면 이처럼 반응하는 신물(神物)이지.]

아아, 그렇구나. 그런 영롱한 물건이기에 이런 기운을 내뿜는 것이........아니라. 무심코 수긍할 뻔했던 세화는 뭔가 지적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입을 열었다.

[주술? 주술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네가 어떤 술수로 세화의 모습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사실 자체는 숨길 수가 없어. 알겠어?]

[자, 잠깐만!]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리인지라 시호의 말을 해석하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실제로는 해석이고 뭐고 필요 없었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못하니까.

[잘못들은 건 아닌 모양인데, 그러니까 주술이라고? 아니 여기서 그런 초현실적인 단어가 왜 튀어나오는 거야?!]

[지금 시치미를 떼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아야야. 몸이 단단히 굳은 상태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다보니 여기저기가 어긋난 것처럼 쑤셔온다. 어쩐지 기운이 축 쳐지는 게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하긴 누구라도 꼼짝도 못한 상태에서 제정신일지 의심이 가는 상대에게 생명을 위협받는다면 정신 상담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주술이라니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말이지.’

하지만 세화는 잠시 그녀의 말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완벽히 부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건 사실이다.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게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래도 그 주술이란 단어를 일단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가 품고 있는 한 가지 의문에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 될지 모른다. 이 점을 세화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지금 헛소리하는 걸로 보여?]

[그래.......진심이란 말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잘은 몰라도 주술이니 하는 게 정말로 있다면, 그래 있다면 말이야.]

[있다면?]

[그렇다면 그 중에 갑자기 기억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종류도 있을까?]

[아직도,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도 이상한 소리인 줄은 알지만 네 말대로라면 나에게 어떤 주술이 걸려있다는 말이잖아. 그리고 단지 그뿐이라면 그게 기억을 잃게 하는 부류일 수도 있지 않아? 둘 다 황당한 이야기이긴 해도 적어도 모습을 바꾸니 하는 것보다는 덜 황당한 이야기 같은데.]

말을 마친 세화는 일단 그녀의 반응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시호는 그대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미 몇 번 한 행동이라 정말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제 코가 석자인지라 세화는 그 동작이 지닌 의미를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런 시호의 표정에 당황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런 식의 해석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그럼 먹혀드는 걸까.’

희망적인 관측, 이라고 세화는 믿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빨리 좀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서서히 눈앞이 가물가물해진다. 아무래도 몸에 한계가 온 듯싶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냉기는 이제 신경까지 파고들어 감각을 마비시켜간다. 이러다간 칼에 맞지 않아도 곧 죽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래도 결국 판단의 시간이 왔다.

[......속지 않아.]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 세화는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안면을 구겼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속삭이듯이 작은, 그렇지만 결단이 서려있는 중얼거림. 일종의 슬픔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내려다보는 시호의 눈빛에 세화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누가 보더라도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는 마음에 생각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

‘응?’

그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이나마 놀라움이란 감정이 떠오른 것은. 그리고 그런 변화에 세화가 뭔가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무척이나 재빠른, 끊임이 없는 간결한 하나의 동작.

시호는 검을 뽑아들어 그를 향해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세화는 순간 자신의 몸이 홀가분할 정도로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물론 죽어 혼이 되었다거나 하는 끔찍한 이유는 아니었다.

[어서 일어나!]

지금까지 이런 자세로 엎드리도록 강요한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화는 그녀의 말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근육이 놀라 꿈틀대기는 했지만 반은 죽은 듯이 축 쳐졌던 걸 생각하면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한 움직임이었다.

[뭐야 이건.]

다만 그런 부활을 딱히 기뻐하진 못하였다. 고개를 치켜든 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넋두리를 내놓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제대로 묘사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뭔가’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선 춤을 추고 있다. 아니, 커다란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하늘을 반쯤 뒤덮을 정도로 큼지막한 그것은 반투명한 촉수들의 군집(群集)이었다. 마치 파도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해파리 떼와 같은 모습.

꿈-정확히는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꺼기들이야.]

[찌꺼기?]

[그래, 영혼의.]

영혼이라니, 흐음. 하긴 주술이란 단어랑 언제나 붙어 다니는 녀석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다. 세화는 이런 말들을 납득하는 자신이 조금 미워졌지만 눈앞에 있는 광경은 억지로 무시할 만큼 만만하지 못했다.

[죽은 혼이 남기고 간 부정한 기운들이 뭉친 거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만큼은 세화도 절실히 동의했다. 저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보기에도 심한 불쾌함을 선사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것을 보자면 설명 불가능한 짙은 혐오감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욱신거린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데 자주 나타나는 건 아니지?]

[희귀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음(陰)의 존재, 해가 떠있는 지금은 녀석들이 나올 때가 결코 아닐 텐데.......조심해!]

시호는 그대로 손을 뻗어 세화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섬세하다고는 하기 힘든 거친 손놀림이었으나 세화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서늘한 뭔가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낀 입장인지라 확실히 그러기는 힘들었다.

[아, 고마워.]

거리가 가까워지고 눈과 눈이 마주친다. 왠지 모르게 슬쩍 얼굴을 붉히면서 ‘딱히 네가 걱정 되서 도와준 건 아니거든?’라고 대사를 칠만한 장면 같았지만 당연히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조심해. 저건 살아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생명력을 뺏어가니까.]

그저 이런 말을 꺼내면서 무덤덤하게 다시 그를 밀어버릴 뿐이다. 어차피 색다른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세화는 그녀가 말한 내용에 집중했다. 역시나 일반생활에서 사용할 만한 용어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빠르게 이해했다.

직접 몸으로 체험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아무래도 아까의 오한은 그저 바닥에 오래 엎드려서는 아닌 것 같네.’

그러니까 죽을 것 같았던 아까의 느낌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었고 정말로 죽을 뻔 했었단 소리다. 더욱이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행복한 식사시간을 방해받아 열 좀 받았는지 그것-혹은 그것들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격해졌다.

세화는 그런 변화가 도저히 맘에 들지 않았다.

[저기, 지금 우리 꽤나 위험한 거 아니야?]

[핑계를 대고선 도망갈 생각이라면 조금도 하지 마.]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난 여전히 너를 의심하고 있고 그런 태도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면 안 될까? 기왕이면 자리를 좀 옮기고선.]

[그럴 필요는 없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잡혀 죽는 거나 피하도록 해.]

[처리한다고?]

[그래, 도망치면 너부터 처리할 줄 알아.]

뭔가 더 말을 꺼내려던 세화는 그녀가 굳게 쥐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을 보고선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딱히 어려운 유추과정 따윈 필요 없다. 여전히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 그 검에다가 저것에 대한 그녀의 지식을 더해보면 대충 견적이 나온다.

'그러니까 사냥꾼과 사냥감이란 말이지?'

조금은 지루할 정도로 흔한 이야기.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만화 속 내용일 경우에나 할 이야기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치고는 고약하다 하겠다.

'그래도 이제는 놀라는 것 자체가 좀 새삼스러울까.'

도저히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세화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를 따라 이 공원에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 이미 상식과는 거리가 먼 세계로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로 눈을 떴을 때부터 깊은 토끼굴 속으로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크르르르르.]

다만 그의 뒤편에 새로이 나타난 존재는 두 발로 달리는 토끼같이 귀여운 부류가 아니었다. 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기괴한 위험요소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태에선 추천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제약이라도 없는 한, 낮게 깔린 짐승의 으르렁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저기 시호, 혹시 이것도 처리할 수 있는 거야?]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세화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을지 의심했다. 하얗게 드러난 커다란 이빨 앞에서 얼마나 똑바로 말할 수 있었을까.

그건 개였다. 단순히 이렇게 말하면 나름 귀여운 맛이 있어 보이지만 세화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몸집에 온갖 맹견의 유전자를 조합하여 만든 것 같은 생김새를 지닌 이 짐승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더욱이 그를 아련하게 만든 건 정작 다른 특징이었다. 세화는 자신을 향해 살기를 울부짖는 두 개의 머리를 보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반쯤은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냄새 때문이기도 했다.

[저기?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절실한 마음으로 다시 말해보지만 반응이 없다. 자신을 맛있게 바라보는 마견(魔犬)부터 눈을 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세화는 용기를 쥐어짜고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시호가 눈매를 잔뜩 치켜 올리고선 하늘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여전히 반투명한 영혼의 찌꺼기에 집중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곧바로 그녀의 시선이 향한 장소가 정 반대방향임을 눈치 챘다. 그가 알기에 분명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던 공간.

세화 역시 그녀를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는 한 여성이 그를 반겨주었다.

= = =

‘이거야 원.’

세화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평소라면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공중에 떠있든 뭐하든 적어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호의 표정이 영 탐탁지 않았다. 속이 울렁이는 영혼의 찌꺼기나 소름 돋는 쌍두(雙頭)의 맹견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다.

‘그런데 왜 저 여자를 보고선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보이고 있단 점에선 아까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과 비슷하다. 다만 그 안에서 보이는 딱딱한 긴장감은 새로운 맛이 있다. 어느 쪽이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세화는 앞뒤로 존재하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들여 공중에 떠있는 여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눈에 띄는 특징을 꽤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로 햇빛을 반사시키는 밝은 황금색 곱슬머리나 얼굴의 반 정도를 뒤덮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는 그것만으로도 첫인상을 강렬하게 해주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위협적이란 말이 어울리는 특징은 따로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녀를 본 여자들의 자존심과 남자들의 심장을 모조리 녹여버릴 정도다. 말 그대로 대량학살병기 수준.

탱크탑에 짧은 반바지란 노출 심한 차림새 밖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는 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세화는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체온이 몇 도는 올라갔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것이 그가 품었던 질문의 대답이 되어주지 못한단 사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설마 질투는 아닐 테고.’

세화는 슬쩍 눈을 돌려 시호를 훑어봤다. 확실히 볼륨이란 측면에선 많이 부족하긴 하다. 그래도 고등학생답지 않게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라인은 나름대로 뛰어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쪽을 더 선호하기도 하기도.......

‘아니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세화는 어쨌거나 공중에 떠있다는 점을 제외하면-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상한 존재지만-그녀에게서 딱히 특이한 점을 찾기 어렵단 점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알고 보니 악의 세력에 넘어간 옛 친구라든가 등등. 뭐 이런 이야기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존재한다면야 지금 상황도 충분히 이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대와 달리 여전히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결 같은 눈빛으로 계속 응시할 뿐이다.

[저기 말이지, 심각한 게 아니면 좀 더 시급한 쪽으로 관심을 돌렸으면 싶은데.]

그렇지 않아도 양쪽에 포위하듯이 자리를 잡고 있는 두 개의 이질적인 존재가 타이밍 좋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 전해지는 빈틈없는 동작에 세화는 초조함을 느꼈다.

하지만 시호는 끝까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곧바로 초조함은 정도를 넘어서 절박함으로 바뀌었다. 결국 참다못한 세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뒤로 감싸여 있다 해도 공원은 넓게 트인 장소다. 도망갈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존재한다.

과연 저것들-그리고 시호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아있지만 가만히 앉아서 먹히는 것보다야 일단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죽을 고비를 두 번 정도 넘긴 몸이다. 그렇다면 오늘따라 운이 따른다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세화가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시호가 먼저 번개같이 움직였다.

[어헉!]

데자 부(Deja vu)라고는 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세화의 멱살을 움켜쥐고선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속셈을 알아차린 것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이유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였기에.

‘아니야.’

그래, 그 정도가 아니다. 시호는 잡아당기는 걸 넘어 그를 완전히 집어던져 버렸다. 그렇지만 험하게 땅을 나뒹굴면서도 세화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본 것이다.

폭풍이 부는 것을.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며 흙바닥을 뒤집고 쪼개놓는 것을.

[이거 장난이.......아니잖아.]

그 어떤 태풍이 온다한들 이 바람과 비할 수 있을까. 형태를 지닌 모든 것을 분쇄하는 뒤틀림이 좁은 공간을 완벽히 장악했다. 흙먼지가 용트림처럼 솟아 우박처럼 쏟아진다. 그렇게 하늘과 땅이 몇 번이고 뒤바뀌며 중간에 낀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광경을 보며 세화는 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바로 그 장소에 시호가 있었단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그녀가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저 공간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그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남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대참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세화는 익숙한 한기가 몸을 뒤덮는 걸 느꼈다. 신경줄기를 통해 감각이 빨려나가는 탈진감. 그제야 그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빌어먹을.’

그리고 다시 한 번 빌어먹을. 어느 새 반투명한 줄기들이 그의 몸에 잔뜩 달라붙은 것이다. 세화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용을 써보았지만 애초에 힘이 많이 빠졌던 상태, 결국 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큭!]

차가운 바닥이 얼굴에 맞닿는다. 하지만 그 감각마저 마취가 되듯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입안이 마르고 눈앞이 컴컴해진다. 단순히 지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생명 자체가 줄줄 새어나가는 아찔함.

과다출혈로 죽을 때 기분이 이런 것일까. 위험하다.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고음마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져 갈 무렵,

그건 갑자기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그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직접적인 음성이 아니라 머릿속을 파고드는 고약한 굉음. 갑작스런 충격에 세화는 눈을 번쩍 떴다.

[시호?]

그녀였다. 온 몸에 생채기가 나고 교복도 너덜너덜해졌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모습의 시호가 그 찌꺼기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도륙'하고 있었다.

'아아, 저거구나.'

세화는 그제야 그녀가 말했던 '처리'란 단어가 어떤 의미였는지 제대로 알아차렸다. 싸움이니 전투니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도살장에서 가축을 다루는 것과 같은 일방적인 학살.

춤을 추는 것처럼 경쾌하게 발이 움직인다. 그녀의 검이 스스로 의지를 지닌 듯 기묘하게 움직이면서 검광을 아로 새긴다. 찌꺼기 역시 이리저리 움직이고 가지를 뻗어가면서 저항해보지만 단지 그뿐.

결국 몇 초도 되지 않아 커다란 군집체(群集體)는 정신을 쥐어짜는 비명과 함께 잘게 썰려버렸다. 아무리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 한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지 조각난 파편들은 저녁 노을빛 아래에 그대로 먼지처럼 사라져갔다.

[조심해!]

다만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는 틈을 타 머리 둘 달린 개가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야말로 땅을 울리는 맹렬한 돌격. 거대한 몸체는 그대로 그녀를 짓밟아 터트려버릴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였단 말이다.

[개하고는 나름 친한 편이지만.]

그녀와 그 괴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둘이 격돌했을 때 체격과 체중에 비례하여 힘이 좌우된다는 물리법칙을 시호는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오르토스(Orthus), 너와는 놀아주기 힘들겠네.]

울부짖으면서 앞발을 휘둘러보지만 역시나 소용없다. 호랑이 머리라도 박살낼 일격을 가벼이 막아낸 그녀는 그대로 검을 비틀어 녀석의 앞발을 흘려보냈다. 그 개, 오르토스는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시호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유 있게 뛰어올라 검을 치켜든 후에 그대로 한 쪽 목에 박아버렸다.

단단한 껍질이 찢어지는 둔탁한 소음이 퍼지고 붉은 피가 솟구쳐 눈을 어지럽힌다. 이게 정상이겠으나 이 공원을 둘러싼 비상식의 향연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반쯤 절단된 목에서 튀어나온 것이라곤 거무튀튀한 점액이 전부였다. 역겹다는 점에선 피보다 한 수 위인.

그래도 치명상을 입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생각에 세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시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요란하게 쓰러지는 거체(巨體)에 눈 한번 돌리지 않고선 다시금 위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번에는 세화도 그 동작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방해된다, 너.]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금발의 여성은 어설픈 발음으로 그렇게 툭 내뱉었다. 시호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들면서 공격태세를 취했다. 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외모의 시호와 상당히 자극적인 굴곡을 지닌 금발 여성. 이 둘이 마주보는 광경은 나름 흐뭇한 광경이라 할 수 있으나 세화는 멀찌감치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외모와 달리 두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버렸기에. 남자의 자존심이고 뭐고 도저히 배짱부릴 자리가 아니었으니 누구도 그를 향해 뭐라 하긴 어려울 것이다.

'응?'

그렇게 휘말린 제 3자의 위치를 고수하던 세화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대립하고 있는 건 저 둘이고 그는 단지 운 나쁘게 엮여버린, 이런 기괴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나를 보고 있는 거지?'

착각이 아니다. 몸은 시호를 향해있으면서도 금발여성은 분명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다.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저 검은 장막 너머에서 그녀는 어떤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이번에도 세화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설마 쉬운 녀석 먼저 해치우고 보자는 생각은 아니겠지.’

.......과연 아닐까. 힘껏 달려 도망간다는 선택지가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속에서 번쩍였다. 스스로도 그걸 누르지 않을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기에 세화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끌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대 쪽이 더 빨랐다. 그가 움직이기 직전에 금발의 여성은 재빠르게 손을 치켜들었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세화는 가슴을,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애초에 그런 행동을 했단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 가슴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고개를 숙인 세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분명 말이 안 된다. 세화는 자신이 느끼는 기시감에 혼란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 기억이라고는 삼 일치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래, 단 삼 일치 밖에.

그 짧은 기간 동안 만난 누군가를 자신이 모를 리 없다. 비록 스쳐지나간 인연이라 한들 저 바람에 흩날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작은 얼굴을, 차갑게 다물어져 있는 분홍색 입술을 모를 리가 없다.

금색과 은색으로 서로 달리 반짝이는 저 눈동자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이 지독한 공포와 그리움은.

[당신 누구야?]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대답할 맘이 있었다고 한들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호가 높이 뛰어올랐기에. 여전히 붉게 타오르는 검이 공중에서 번뜩인다. 앞에 있는 건 괴물이나 짐승이 아닌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는 어떤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상대도 마음씨 좋게 순순히 맞아주지는 않았다. 금발 여성은 서있는 자세 그대로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서면서 치명적인 일격을 피했다.

동시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녀의 빈자리를 채웠다.

[어이, 시호!]

돌풍에 휘말린 연처럼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보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의 추락. 무심코 소리를 지른 그가 무색하게도 시호는 곧장 몸을 일으켰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충격은 받았는지 얇게나마 피 한줄기가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거친 바람은 시호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녀의 뒤를 쫒으면서 휘몰아쳤다.

아까 같이 땅과 하늘을 뒤집는 그런 폭풍은 아니었다. 그래도 치명적이란 측면에선 다를 바 없다. 시호는 분주히 움직이면서 바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매서운 칼날은 꾸준히 그녀를 추격해갔다.

거대한 강철 뱀이 날뛰는 듯 무수한 상처들이 길게 공원에 새겨졌다.

[........!]

벤치도, 나무도, 가로등도 모두 산산조각 허공으로 흩어져 간다. 그런 초현실적인 참상 속에서 세화는 정신을 바로 잡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시호가 자신을 향해 뭔가 고함을 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만 바람의 장벽에 막혀 있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난장판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낚아챈 것 자체가 용할 정도니까.

[.......!]

하지만 피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와중에 계속 저런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런 생각에 세화는 정신을 집중했고, 그러자 조금이나마 그 음성의 자취를 낚아챌 수 있었다.

[세화!]

순간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도망쳐!]

동시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세화는 눈을 감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 뒤를 돌아보지만 온 것이라고는 무너지는 절망감이 전부.

그를 뒤덮어버린 그림자가 커다란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 한쪽 머리는 반쯤 절단된 상태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다. 길게 축 쳐진 혓바닥과 생기 잃은 눈은 영락없는 시체의 그것. 그렇지만 다른 쪽 머리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살기를 지니고선 세화를 노려보았다. 오히려 그 흉흉한 기세는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정말로 하나는 예비용이었단 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런 혼탁한 기분 속에서 본능이 어서 도망치라 외쳐댔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짙은 죽음의 채취에 짓눌린 몸은 굳게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서서히 다가온다. 시호가 뭔가 계속 소리치고 있지만 뭐라는지 알 수가 없다. 귀를 찢을 것 같았던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단 하나, 녀석의 발걸음 소리만이 홀로 남아 그의 고막을 자극했다.

후각도 마찬가지. 고기가 썩어가는 지독한 악취가 신경을 마비시킨다. 커다란 몸체는 시야를 가득 메워 주변 풍경을 지워버린 지 오래.

그렇게 그 괴물은 그의 모든 것을 장악해버렸다.

그때,

[내밀어.]

순간 세화는 경기(驚氣)를 일으킬 뻔 했다. 실제로 발이 허공에 조금 뜨기도 했다. 그나마 시선을 돌리지 않은 것은 눈앞의 존재가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 그래도 목소리가 들린 위치 덕분에 말을 걸어온 게 누군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 내밀어.]

‘손을 내밀으라고?’

무심코 그녀의 말을 되풀이해본다. 무슨 의미일까. 손을 내밀어 저걸 막으라는 소리일까. 하긴 시호가 한 번 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세화는 곧바로 그게 헛된 다짐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체격 문제가 아니다. 악취 가득한 몸에서 풍기는 단단한 살과 뼈의 기운은 그로 하여금 애초에 저항 자체가 무의미하다 느끼도록 만들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쥐와 같은 무기력함. 그걸 아는지 오르토스는 포식자의 지위를 맘껏 누리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날카로운 이빨은 연한 피부를 꿰뚫어 찢어발길 것이다. 강인한 턱은 뼈마저 산산조각 으깨버릴 것이다.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필연적인 결말.

‘그러고 보니 내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기억이란 게 없구나.’

아아, 하필 마지막 생각이 이런 거라니. 세화는 차라리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포근함을 느끼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손을 내밀어.]

다시 한 번 천사의 것과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세화의 귀로 흘러들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