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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플라밍고를 위하여
글쓴이: 시오르
작성일: 12-07-27 22:42 조회: 2,583 추천: 0 비추천: 0



미친 플라밍고를 위하여
For the Crazy Flamingo

1장 . 악마의 선율 ; 테네토아 데 스웬체니아

이보게나,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아둔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줌으로써 한줌의 썩은 지푸라기와 진흙더미를 이성의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나는 그 이성마저도 세상의 지배자들에 의해 씌워진 눈가리개는 아닐지 언제나 고민해왔고, 오늘 아침에서야 그 해답의 귀퉁이를 맛볼 수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교활하고 멍청한 지배자들은- 내 눈을 기만하고 내 이성을 베어물며 세상이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에, 나는 풍선위를 걸어가는 개미꼴이 되어 세상의 비웃음을 들으며 나의 이성은 타락해버렸네. 그렇지만 지배자들의 오만스러움과 여유로움이 내게 한편의 편지를 휘갈길 시간을 주었기에, 이렇게 나의 유일하며 믿을 수 있는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단 하나네. 미친 플라밍고가 되게나. 결코 사냥꾼의 총구 따위에 겁에 질리지 말고, 그대에게 채워진 눈가리개를 찣어버리고 이성을 믿지 말게. 그들만큼 교활한 것은 없으니. 풍선위를 걸어가는 개미에게 풍선은 앞으로 끝없이 이어진 길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리석은 뫼비우스의 반복인거야.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 편지는 보는대로 먹어버리게. 그렇지 않으면 식탐 넘치는 고귀한 미식가들의 접시위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테니.

아에테르넴 리베르타템이,


- 왕에게 바치는 99 가지 조언 中 '미친 리베르타템' -
스탠리 테네스 저

나는, 혹은 스웬체니아 (Swenchenia) 소남작이라 불리는 27살 생일을 맞은 귀족 청년은 제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제법 이름을 날리고 바야흐로 전성기에 막 뛰어들었다. 평범한 가문의 삼남들이 밤에는 하녀를 겁탈하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낮에는 기품있는 레이디들을 꼬실 동안 내가 어떻게 벌써부터 전성기를 바라보게 되었는가 하면은 그 해답은 무척 간단하면서도 드물었다.


작곡.

흔히들 귀족의 문화생활하면 떠올리는 것은 호화스러운 사교파티에 명화를 그려내거나 감상하거나 손끝에 잉크 좀 묻혔다고 자부하며 글을 내놓고는 하지만 그런 것들의 결과물들은 깡끄리 모아 트라벤슈키 궁정 앞에 쌓아놓고 태워서 전국의 난방기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여도 일체의 아까움이 없을 것들이다. 하지만 나의 것들은, 정확히 말하면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 (Larva de Diabolus) 의 이성이 낳은 결과물들은, 가히 명작이라 일컫어도 모자란 것들이다.
그 대표작을 들자면 심연의 진혼곡이 있다.


약 3년 전의 일이다. 절친한 친우의 아버지, 아르망 백작의 이유모를 시가지에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를 쓰던 도중 잠이 든 나는 전날 플라밍고 사냥에서 너무 무리했음을 자각하며 침대 위에 놓여있는 열네 장의 악보 30개와 잉크 범벅이 된 손을 발견했다. 그 막 휘갈긴듯 채 잉크조차 마르지 않은 악보를 보는 순간 나는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였다. 놈이 휘갈긴 것이다. 나의 욕망과 슬픔, 분노들을 먹고 자라며 그 댓가로 그것들이 잔뜩 녹아들어있는 멜로디를 뱉어내는 내 안의 또다른 녀석.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녀석이 눈동자 너머로 비치는 놈에게 마구 기쁨의 욕지거리를 내뱉어 주었다. 그리고 곧장 그 옷차림 그대로 방문 밖으로 뛰쳐나와 스웬체니아 오케스트라의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원들에게 그 악보를 내밀었다.

아름다웠다. 지독하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 절묘한 화음의 속삭임은 하염없이 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심지어 연주하고 있던 단원들도 그 흐름속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멜로디는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듯 했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될 선율은 이미 날카로운 마성의 독니로 그 자리에 서있던,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이성을 중독시켰다.


그 어떤 마약도 그보다 더 달콤할 수는 없으리. 그 어떤 악마의 유혹도 그보다 더 매혹적이지는 못하리라.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단원들이 하나둘씩 연주를 멈추고 스스로의 숨을 막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겨우 따라가던 나의 난해한 악보를 이제는 미리 안다는 듯이 눈을 감으면서 연주가 계속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설탕처럼 달콤하고 내 이성을 울리는 유혹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드럽게 나를 감싸며 서서히 내게 손을 내미는 그 것은 죽음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이였다.


나는 최면에 걸린듯 몽롱하게 그 손을 향해 내 손을 내밀었다. 감미로운 선율은 더욱 크게 내 이성을 장악했고, 그에 따라 나의 손은 미소짓는 죽음의 손을 거의 다 잡을 무렵이였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토록 아름답던 선율이 끊겼다. 죽음이 아쉬운듯 탄식하며 물러서서 사라졌다. 그리도 동시에 모두가 그 꿈에서 깨어났다. 한 게으른 단원이 바이올린 줄을 허겁지겁 조율하다가 너무 세게 조인 탓이였다. 결국 바이올리니스트의 게으름이 모두의 생명을 살린, 우스운 꼴이 된 것이다.


순간, 나는 모든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얼마나 내가 죽음에 가까웠었는지도, 얼마나 이 멜로디가 위험한 것인지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불어넣었다.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이 곡은..... 아니 이 곡을 작곡한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는 신이거나 악마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이 가시자 우리 모두는, 나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신의 곡을 맛본 희열에 취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전율스러운 쾌감, 그 짜릿한 맛에 비로소 우리 모두는 깨달았다. 이 곡을 세상에 퍼트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신이 혹은 악마가 우리에게 준 존재이유라는 것을.


내 방에 돌아온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거울을 향해 질문했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그리고 조용히 미소지으며 자위하고 있을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흑단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지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포수 (aucupe) 로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의 대답을 고민하며, 나는 머뭇거릴 새 없이 그 악보를 아르망 백작성에 편지로 보냈다. 그리고는 내게 남은 짜릿한 쾌감의 부스러기에 다시금 흥분하다가 문득 그 곡의 제목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어떤 생각도 곡의 선율에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제목을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성스러운 권리는 곡의 주인, 작곡가에게 넘기기로.


그러자 오른손은 내 의지를 벗어나 펜대를 잡고 제멋대로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놈이 대답한 것이다. 그 검은 잉크 선들의 집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곡에 잘 맞는 단어였다. 어쩌면 그 곡은 제목으로부터 나왔는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게 만드는 단어, 심연의 진혼곡이였다. Lequiem of Abyss.


그렇게 모든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리며 고금 통틀어 가장 훌륭한 진혼곡이라 불리는 심연의 진혼곡은 탄생되었다. 비평가들이 향후 1000 년간의 음악의 수준을 진보시킨 작품이라 일컫는 곡, 심연의 진혼곡이. 만약 누군가 나에게 아르망 백작 장례식 단체 자살사건의 전모에 대해서 밝혀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다만 그들이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또다른 나,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의 마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환희 속에서 행복하게 죽음의 손길을 받아들였음을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당시를 회고하자면 모든 이들이 마치 크나큰 슬픔에 빠져 눈물바다를 이룰 듯 흘리면서도 신 혹은 악마의 은총을, 그 지나치게 달콤한 맛을 맛보며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 동굴 너머로 사라지듯 죽음의 세계로 떠나가버렸었다. 그러나 나의 친우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는 내게 그러한 축복을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내가 이미 그 손길을 한번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내게 남겨진 사명 - 세상의 모든 영혼들에게 이 진혼곡을 들려줌으로써 죽음의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굳이 이 이야기를 여지껏 펼치며 어떤 경위로 불후의 명곡, 심연의 진혼곡이 탄생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한 이유는 내 자랑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나에게 깃든, 혹은 또다른 나인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가 가지고 있는 악마적인 천재성을 알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요는, 바로 오늘, 27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오늘 놈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동안 그러한 것들을 떠올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나 스스로의 자학이며 질책 삼아 이러한 이야기를 회고하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의 태양이 숨을 멎는 순간, 달이 하늘의 한가운데 뜨며 시곗바늘이 12 를 가르키는 순간 나, 스웬체니아 소남작은, 스웬체니아 남작의 삼남이자 신 혹은 악마의 총구에 쫓겨 어리석은 플라밍고로 살아온 테네토아 데 스웬체니아의 인생은 막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얼굴을 가면삼아 내 속에서 유희를 즐기던 놈은,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는 세상이 주목하는 진짜 천재 작곡가로써 더 자유롭게 세상을 배회할것이다. 놈이 어떤 해악을 세상에 끼치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 내게 밀려오는 것은 그러한 신 혹은 악마를 세상에 놓아주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내 목을 자르거나 자살하는 등으로 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녀석에 대한 무한한 나의 경외심으로 가득찬 이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또 내가 그리한들 녀석은 그런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어떻게든 부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득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언제부터, 어떻게 그 놈이 내 안으로 들어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흐르는 기억은 지극히도 단편적인, 공짜점심을 피해라 라던가 생일선물 따위다.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자비정도는 그가 베풀어주기에, 나는 노트에 이렇게 휘갈겨 적었다.

"미친 플라밍고가 되어라." 그것은 내 목숨을 바친 댓가로 얻은 놈의 충고다.

이제 서서히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놈인지, 놈이 나인지 조차 구별할수 없다. 잠깐..... 내가 누구지?


1장 - 2. 악마의 선율 ; 라르바 데 디아볼루스


"이성은 신이 내려준 축복이요, 본성은 악마가 내린 저주니라. 그리하니 언제나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대안의 에스프리를 따르라. 그리하면 이성이 세운 질서에 갇혀 신의 울타리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어니."

- 위대한 악마들의 왕, 신神이시여! 中 -
아켄토시아 뮬켄 저

아아, 세상에 이토록 멍청한 놈이 또 어디있으랴! 13년간 자신을 잊어버리고는 죽기 직전에서야 자신을 찾아 헤매며 자신의 피조물이 내뱉어대는 자신의 감정의 찌끄러기들에 중독되는 어리석은 녀석. 나는 지난 13년간 그의 영혼 속에서 기생하며 살아왔다. 그가 삼키는 분노를 먹으며 분노를 배웠고, 눈물을 마시며 슬픔을 배웠다. 그의 마음 속 어둠을 베어물며 나는 그의 공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나는 그 댓가로 배설물을 내뱉었다. 모든 것이 다 섞여 까맣게 된 잉크로 새하얀 종이 위에 그의 분노를 그렸고, 그의 슬픔을 담았다. 그는 나였고, 나는 그였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라도 내가 놈의 심장을 움켜쥐고 놈의 몸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뱉는 배설물들에 기뻐하며 그 달콤함에 취해 죽어가고 있었다. 아아, 아둔한 테네토아여, 그 어떤 악마의 유혹도 무엇보다 달콤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게냐.

그리하여, 나는 놈에게 27번째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죽음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동안 언제나 해주고 싶었던 조언을 속삭여 주었다.

"미친 플라밍고가 되어라."



녀석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17년 전 태어났다. 그의 꿈 속에서. 그 시절의 나는 그의 이성의 피조물, 힘없고 약한 신이자 악마였다. 어쩌면 그의 꿈일지도 몰랐다. 나라는 존재 조차도 그의 잠깐 사이의 백일몽,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하루 빨리 나의 존재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목표 없는 탄환은 버려질 뿐이고 명사수의 화살도 겨누는 바가 없으면 창공 속으로 녹아들 뿐이다. 고민과 고민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내가 태어난 그의 꿈에 있었다.

그가 10살 무렵, 스웬체니아 남작가에 대단한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던 적이 있다. 명성도 드높은 십자가 오케스트라단이 속삭이는 환상적인 하모니에 그만 그는 매료되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도 그 하모니는 그의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영원할 것만 같이.


그는 그날 밤 신에게 기도했다. 자신의 삶을 바칠겠노라고, 대신 그에게 신의 음악을 들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의 꿈 속에서 대답한 것은 악마였다. 너무나도 달콤하게도, 악마는 천재적인 재능을 주겠지만 그에게 생명을 걷지 않겠노라고 했다. 대신, 그가 그 천재적인 재능에 먹히는 순간 그의 생명을 걷어가겠노라고 했다.


머저리 같은 놈! 그는 어떠한 고민도 없이,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악마의 손을 잡았고, 악마는 달콤하게 미소지으며 기약했다. 그의 10번째 생일날 선물을 주겠노라고. 그러나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다. 이 멍청이는 지나치게 달콤한 것이 쓴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격언을 잊어버린 것이다.

사실 그의 기도에 신은 이미 기적으로 대답했었다. 그의 속에 내가 깃든 것이다. 신의 음악을 담은 나의 이성의 씨앗이 그의 영혼에 심어진 것이였다. 간교한 악마는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채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생각없는 테네토아 따위는 쉽게 속여넘긴 채 그 언제보다도 손쉽게 나를 물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이름은 에스프리, 고귀한 이성이자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였다. 그러나 동전을 뒤집으면 곧바로 드러나는 뒷면처럼 나는 언제라도 가장 잔인하도록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였다. 아아, 교활한 신이여. 어찌하여 그대의 모든 얼굴을 보이지 않고 반만 드러냈는가!


인간이여, 어찌 더 좋은 눈을 가지지 못했는가, 신의 뒷통수에 달린 간사한 악마를 보지 못했는가!

나는 온몸에서 힘을 짜냈다. 잠들어 있는 녀석의 팔을 들어 펜을 쥐고 부르짖었다.


"달콤함에 취할때, 그 달콤함이 너를 갉아먹을거야! 공짜점심을 피해라!"

그렇지만 그는 선물을 받아들였다. 댓가 없는 선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격언은 이미 나의 충고와 함께 불살라져 잿더미로 되돌아 왔을 뿐이다. 우롱당하는 줄은 전혀 모른채 그는 이미 타락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나는 도저히 그가 물들어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에스프리라는 본질에 가면을 덮어쓴 채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는 그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바라보며 대경실색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내가 몰고자 하는 곳으로 몰기 시작했다.


세해와 함께 플라밍고를 사냥하는 전통은 물론 이 섬에 플라밍고가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리석은 플라밍고를 원하는 대로 몰면서 느끼는 쾌감에 의해서 일 것이다. 플라밍고는 총구를 겁내어 앞만 보고 달려간다. 자신을 겨눈 총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른채, 오직 앞만 볼줄 안다. 그렇기에 플라밍고를 사냥하는 사냥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플라밍고를 조종하는 지배자의 쾌감을 맛본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신 혹은 악마가 인간에게 이성을 내린 이유이며 인간에게 총구를 겨눈 이유라는 것을. 이성이라는 눈가리개는 인간에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되리어 인간을 얽매게 만든다. 가장 모범적인 길은 이미 신과 악마가 닦아놓은 바르고 평평한 길이다. 바보같은 인간은 언제나 그 길을 따라 도망친다. 그 순간부터 이미 자유의지는 잃어버린 것이다.

녀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은 무척이나 쉽고 즐거운 일이였다. 놈이 느끼는 감정을 먹어치우며, 그것들을 배우고 그 답례로 놈의 감정을 다듬고 부드럽게 주물러 선율 속에 담아 펼쳐주면 놈은 그것이 제가 한 양 한껏 기뻐하며 그 맛에 취해버린다.


달콤함은 놈의 혀를 속이고 놈의 속을 파먹는다.
그래서 악마는 달콤하다.


놈의 타락이 시작되었음을 느낀 것은 내가 서른 네번째 곡을 다 써놓고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놈은 내가 뱉어낸 여러 장의 악보를 왕립예술원에 제출하여서 새로운 음악계의 신성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놈의 타락을, 그 심장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를.

그는 오전내내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그의, 정확히 말하면 나의 -그들은 곡이라 칭하는- 이성의 배설물들을 좋게 봐주는 여러 사람가죽을 뒤집어쓴 돈냄새나는 돼지들과 플라밍고 사냥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사냥당하고 있는 어리석은 플라밍고가 '진짜 플라밍고' 를 사냥한다는 것은.


사냥 내내 그의 목구멍으로부터 굴러떨어지는 감정의 덩어리들은 불쾌함, 가식, 스스로의 위선적임에 대한 자각, 쾌감이나 지배자의 만족감 이런 것들이었다. 그의 심장에 까지 굴러온 그것들은 서로 뭉치거나 나눠지고, 쉴새없이 변화하며 다양한 색상의 것들을 나타냈지만 거기서 이따금 떨어지는 편린들 조차도 심각할 정도의 거부감이 느껴졌었고 나는 미처 그것들에게 까지 내 이성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모든 덩어리들의 반죽 속 그 어떤 곳에서도 위선에 대한 죄책감 따위를 찾아볼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14년 전의 유순하고 오케스트라가 되고 싶어하던, 신에게 기도하던 천진한 소년은 <악마> 의 꾐에 빠져 이토록이나 타락해버린 것이다.


신약에 나오듯이, 신은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주었지만 인간은 부끄러움을 버림으로써 더욱 신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점점 나락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플라밍고사냥 내내 실컷 지배자로써의 쾌감을 만끽한 그는 방에 돌아와서 상당히 충격적인 편지를 맞이했다. 그의 절친한 친우로 기억하는 아르망 소백작의 아버지, 다시말해서 아르망 백작령의 주인이 죽었음을 알려주는 편지가 슬픔이 묻어나는 붉은 글씨로 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 순간 커다란 유리기둥이 사색하던 내게로 뒹굴며 굴러 떨어졌다. 필시 통상적인 -친구가 죽었다거나 도박에 모든 돈을 날려버린 정도의- 슬픔이 응고된 것이리라. 나는 이 기둥을 조각하고자 결심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퍼질지 기대가 벅차올랐다.



양파가 한겹 한겹 벗겨지듯 그것의 겉을 덮고 있던 짙은 남색의 슬픔을 잘라냈다. 내 예리한 손톱은 충분히 그럴 역량이 있었고, 더욱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흩어지는 감정의 편린들이 내게 옹알이를 해댔다. 보나마나 '슬픔', '괴로움' 이런 것들이라고 예상하며 계속 조각을 계속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유리기둥은 안으로 갈수록 진하고 검은 색채를 띄더니, 마침내는 시커멓게 타버리고 남은 재와 같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럴수가! 녀석은 스스로의 감정에 휘말려 마침내는 아르망 소백작과 함께 동반자살까지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타락해버린 놈의 나약하고 악취 풍기는 어둠을 나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먹어치웠다. 아가리를 벌려 내속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이 나와 하나가 되도록. 내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이성의 결과물로 탈바꿈되도록.

지독하게 달았다. 악취와는 전혀 다른 맛에 나는 경탄하며 그것들이 이루는 환상적인 자태를 관람했다. 그것은 뭐랄까, 마치 컵속의 물에 잉크 한방울을 떨어트린 듯 불규칙의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퍼져나갔다. 심장에서부터 손끝까지.


벌새의 윙윙거림이 귓전에 메아리치며, 나는 잇따라 찾아오는 묘한 비이성의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쾌락에 전율했다. 마약같이 내 안에서 흐르며 퍼지고 있는 놈의, 테네토아 데 스웬체니아의 감정은 그러나 동시에 나를 사색으로 이끌었다.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무도회의 신사처럼, 내 안에서 소화되고 있는 어두운 감정의 덩어리들은 나를 고뇌로 에스코트했다.


나는, 위대한 에스프리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자 무수한 가능성의 씨앗은 이 난해한 감정에 대하여 어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가?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기다란 난제는 도저히 알렉산더의 검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어 보였다. 순간, 마치 예정된 것 처럼 내게 그 어느때보다도 이성적인 해답이 도출됬다. 아르망 가문의 후계자들을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섬의 통치자 '프린켑스 (Princeps)' 가 정한 권리상속법에 의하여 가장 유망한 후계자인 아르망 소백작의 공식적으로 가장 절친한 친우인 테네토아가 그 권리를 양도받게 된다.


이토록 현명하고 합리적이며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해답이 또 어디 있으랴, 나는 플라밍고 사냥에 지쳐 잠이 든 녀석의 팔을 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펜대가 손아귀에 달라붙어서 검은 선들과 점들의 춤사위를 그려냈다. 그것은 나의 이성의 결과물, 그의 슬픔을 담고있되 나의 이성에 의해 우화한 나비인 것이다!

잠에서 일어난 녀석이 이 악보를 보면 별다른 생각 없이 곧바로 아르망 백작가로 보낼 것이고, 장례식에서 연주될 이 진혼곡은 모두에게 죽음의 에스코트를 베풀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신과 악마의 걸작, 교활한 이성, 에스프리였다.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되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의 27번째 생일선물은 그에게 너무 과분할지도 모르겠다. 플라밍고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가 모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나는 놈을 죽일 것이다. 놈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마시며 몸을 취하여 완전해질 것이다. 플라밍고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놈을 위해서이다. 본성이라는 악마에 타락한 놈을 구원하고자 나는 놈에게 죽음을 베푼다. 그랬을 때, 그는 진실된 이성으로써 신을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다.


어쩌면 죽기직전에 놈은 고뇌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했었는지. 나는 조용히 대답해줄 뿐이다.

"미친 플라밍고가 되어라."

즐거운 고민을 하며 낮잠에 빠져든다. 죽음을 기다리며 처연하게 괴로워 하는 녀석을 향해 잔뜩 비웃어 주고 싶다. 하지만 때로는 오직 관찰자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것도 즐겁다. 마치 풍선 위에 개미를 올려놓고 영원히 걸어가는 미련한 모습을 감상하듯이.

나는, 에스프리.


신과 악마의 걸작이자 인간을 위한 그들의 선물이고 가능성의 씨앗이다.

나는 테네토아 데 스웬체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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