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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영구보존 소녀와 세상의 끝
글쓴이: 얀개
작성일: 12-07-27 00:11 조회: 2,227 추천: 0 비추천: 0

나는 호흡을 골랐다.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지 모른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한걸음 내딛기로 했다. 다시는 뒤처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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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선배. 아니, 누나.”

실은...”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말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런 말들이 잘도 입에서 튀어나왔는지. 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자 다시 가슴 속에 파르르, 전율이 지나갔다.

선배는 놀랐는지 눈동자가 커졌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미묘한 긴장감이 서린 순간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선배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는-”

학교가 끝났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은 마치 한바탕 쏟아질 듯이 우중충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방과 후에 서로 놀자고 뭉치지 않았다. 대부분 교문 앞에서 인사하며 헤어진 뒤 그저 우산을 챙겨들며 집으로, 학원으로, 각자의 목적지로 바삐 흩어질 뿐이었다.

그런 그들과는 달리 딱히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은 나는 동네 주위를 한 바퀴, 어슬렁어슬렁 배회했다. 학원에 다니지도, 과외 수업을 받지도 않기에 마음이 급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 바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딱히 내키지 않았다.

지쳤다.

동네 전체를 한 바퀴 돌았을 무렵, 옆 반 소꿉친구가 눈에 띄었다. 나와는 거의 지난 십 년간 알고지낸 사이였기에, 우스갯소리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약혼한 관계라고 놀리기도 할 정도로 허울 없는 사이였지만, 오늘은 그다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또 저번처럼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싸돌아다니고 있느냐고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뒤, 같이 집에 가는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지겹다.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서 골목 사이로 빠져나갔다. 역시 이 주변에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아는 얼굴을 만날 위험성이 너무 컸다.

나는 동네 어귀를 지나쳤다. 앞으로 몇 걸음만 더 내딛으면 이 동네를 벗어나게 된다. 20년 전에 지정된 구획법에 의해 동네 간 구획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인지, 어디로 가야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지 정도는 나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다음 동네로 넘어가지 못했다. 통행증을 깜빡 잊고 집에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검문관이 가로막고 서 있는 게이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문관의 초소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동네 너머의 풍경까지도 잘 보였다.

동네 넘어 동네, 그 뒤에 또 다른 동네... 그리고 그러다가 도시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몇 개의 대도시를 지나면 수도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위치에 섰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옆 동네, 그리고 그 구획을 넘어서서 다음 동네, 그리고 그 다음 동네, 그리고... 반복, 반복, 반복. 마치 비슷한 풍경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 놓은 것만 같았다. 작은 동네들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차피 수도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발급되는 특수한 통행증이 필요하다. 그 외에는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수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경우 시민으로서의 거의 모든 권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주위의 몇몇 동네를 오갈 수 있는 평범한 통행증만이 주어지기 때문에, 평생 멀리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어릴 때는 혹시 수도란 건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반복되는 나날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지루하다.

검문관의 잔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결국 옆 동네로 가보지도 못한 채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벌써 저녁 때가 다 되어갔지만, 아직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올 듯 말듯 내리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괴로울 뿐이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함께 걸었던 거리,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줬던 육교, 그녀와 자주 식사를 같이 한 식당... 모든 것이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들을 완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와의 추억들이 잊혀지고 그때의 감정이 퇴색될 것만 같아서.

선배, 선배, 선배, 선배, 선배.......누나.

비가 드디어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가늘었기에 옷이 젖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설령 거센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동네 안에서도 잘 안 오게 되는 골목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아마... 쓰레기장. 그래,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장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쓰레기장이지, 실제로는 지난 반세기 정도 동안, 아니,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쌓인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어느 정도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하면, 전혀 어디에 쓰이던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나는 이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이제는 쓰이지 않을, 영원히 잠들어있는 물건들의 무덤을 눈앞에 두고 이유모를 경외심과 호기심이 생겨났다. 나는 이 쓰레기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물건들도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었다. 소리를 내는 유희 도구의 일종이라고 추정되는, 가는 실이 한쪽에서 다른 쪽까지 이어진 물건, 유비쿼텔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모든 가정에 한 대씩 있었다고 하는 TV, 사고가 너무 많이 나 금지되기 전까지 무척 유행했었다는 보급형 비행차 등...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이유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뒤쳐진 물건들, 버려진 물건들. 결국 모든 역사는 반복된다. 물건은 발명되고, 보급되어 쓰이다가, 어느새 구식이라는 이유로 버려지고, 결국은 잊혀져 역사 속의 작은 사실로 남을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태어나 자라고, 언젠가는 자립을 해서 바쁘게 살아가다가, 어느새 자신이 뒤쳐져있음을 깨닫고, 결국은 죽어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삶과 죽음을 커다란 순환의 하나로 본다면, 모든 사람의 일생은 그에 앞서 살았던 어느 다른 사람의 일생과 다를 것이 그다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삶을 비춰볼 때 그 삶이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 차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사람의 인생이란, 비슷한 나날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나는 쓰레기장 속, 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곳에는 어릴 때 외에는 와본 적이 없다. 그나마도 어릴 때는 어른들이 위험하다면서 안쪽까지 탐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었다. 그래서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잡동사니 언덕의 안쪽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는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가방을 잠시 쓰레기장 입구에 내려놓은 채,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쓰레기장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신기한 물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쓰레기장에 매료되어 더욱 깊이, 쓰레기장을 둘러싼 담장의 반대편 끝에 도착할 때까지 들어가려고만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작은 잡동사니 언덕을 넘었을 때, 나는 바퀴달린 판때기를 밟고 뒤로 자빠져 쭉 아래쪽까지 밀려갔다. 계속 내리던 비 탓에 꽤 미끄러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한눈을 팔며 방심한 탓이다.

나는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착지했다. 잠깐 숨을 고르던 나는 이윽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다지 멀리 떨어진 건 아닌 듯 했다. 다시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나는 고물더미 속에서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사람인 것 같기는 했으나, 조금 희한하게 생겼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본다. 무슨 인종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검정이라고는 하나, 블라니(흑인)의 갈색과는 다른, 더 짙은 검은 색이었고, 블라니와는 달리 피부가 백옥같이 하얬다. 그렇다고 카우휘(백인)와 같은 창백한 피부였느냐면 그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피부를 제외한 다른 곳의 색은 카우휘와는 전혀 달랐다. 미블(혼혈인)이나 네오인(신인류) 중에서도 이런 피부색이나 머리색은 본 적이 없다. , 그 외양을 살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단연 검정이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마저 검정색이었다. 저 누더기에 가까운 것을 옷이라 불러도 된다면 말이다.

머리카락, 눈썹, 눈이 전부 검은 색인 사람이 어떻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런 의문보다는 그 아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앞섰다. 어째서 이런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가녀린 소녀가 혼자서 비오는 날에 이런 곳에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살며시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도인지, 괴로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를 담은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상한 일이다. 두 가지는 상반된 감정인데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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