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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세계의 마술사와 소녀의 소년
글쓴이: 창가의하늘
작성일: 12-07-26 20:59 조회: 2,670 추천: 0 비추천: 0

무한히 뻗어진 지평선 너머까지 뒤덮는 새하얀 눈송이. 이 세계의 근원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라 부르기엔 보잘것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딱히 달리 생각할 것도 없게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언제 어느 때나 한겨울과 같이 새하얀 눈이 내려─순백의 세계, 라고 부른다.

그건 시계가 닿는 머나먼 곳까지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곳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나는 여백의 세계─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듯해 보여 그리 부르고 있었다. 사실상, 느끼는 바와 다르지 않게─그런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런 점에서 나 또한 다르지 않겠지…….

눈처럼 고요하고,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잊어버릴 만큼, 수없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왔음에도 시계(視界)로 비추는 세상은 한결같다.

그치지 않는 눈송이는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답고, 그 위로 보이는 하늘은 항상 구름이 져있어 바라보나마나 새벽과 같은 푸른빛을 머금는다.

현세에서도 맑고 푸른 하늘은 아니었기에 그리워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그리운 게 흠이라면 흠이다.

아니, 세상의 하늘은 되레 이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별조차 보지 못하는 하늘은 이렇게 감추어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럴 마음조차 들지 못하도록 이리 숨겨놓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까, 괜스레 우산너머로 올려다보는 행위는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볍게 쌓이는 하얀 눈에서 시선을 하늘로 옮긴다.

역시나, 차가운 건물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변함없이 구름이 메우고, 그 아래로 내리는 눈은 시계를 가득히 채운다.

이쯤 되니 무엇을 바라며 이토록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나, 그저 넘쳐나는 시간에 비해 이렇게 눈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지 싶다.

한숨에 가까운, 작게 숨결을 내뱉으며 열린 입으로 눈을 삼킨다.

입안에서 녹아 맑은 물이 되는 눈은 이렇다 할 맛도 없고, 차갑지도 않다.

단 하나의 눈은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공허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오늘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세상을, 새하얗게 덮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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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삐비빅─삐비빅─삐비빅─

어떠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되는 잠결에, 갑자기 들려온 소음으로 그 내용에 생각할 여지를 잃었다.

방안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전자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허공을 한두 번 허우적거린 손은 이내 알람시계를 찾아 소음을 껐다.

“으음……”

항상 그렇듯이 부족한 잠을 신음으로 호소해내며 베갯속으로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이제는 이런 여유도 사치스러운 것이라며 잠에서 일어났다. 그렇긴 해도 역시나 피곤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라 잠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것도 잠시─창가로 스며드는 아침을 받으며 하품을 늘어지게 한 번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실로 향한다. 여전히 졸린 눈으로 다시금 하품을 하며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세면실을 열면, 별로 특이할 것 없이 욕실로 이어지는 문과 반들거리게 빛나는 새하얀 세면대, 그 옆의 한구석에는 항상 청결한 옷차림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세탁기가 주된 세간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에 부가적인 요소로 소녀가 붙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제야 잠자리에서 깨었는지 허리께로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리가 부스스하지만 머릿결은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파자마 차림을 한 채─푸른색바탕에 아기자기한 캐릭터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살짝 졸린 눈으로 양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소녀는 이쪽에 시선조차 두지 않고 한가로이 손으로 눈을 부비적, 하며 칫솔질하는 것 외에는 여념이 없다. 허술한 곳이 넘쳐나는 모습에 살짝 웃음을 머금고 인사조차 생략한 채 나 또한 그 옆에 자리 잡고 양치질을 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거기에 덧붙여 얼굴선이 가늘고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분위기는 남매로 봐줄만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촌지간이다.

정확히 나는 고아다.

오래전 해외에서 살다가 교통사고로 인해 부모님 두 분이 타계하시고, 나 혼자만이 남았다. 그 직후 어떤 보호시설에 맡겨져 한동안 그곳 생활을 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안경을 쓴 남성. 먼저, 어머니의 친오빠라고 밝힌 그는─앞서 자신을 백성현이라고 말했다─나를 보자마자 품안으로 이끌어 안았다.

처음 본 그의 품안은 거부감은커녕 무척이나 따스해서 순간 왈칵하고 눈물이 날 뻔했으나, 당혹스러움에 그만두었던 것 같다. 미세하게 전해져오는 떨림에 아… 이 사람은 슬퍼하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났을 당시부터 무척이나 서글픈 눈을 하고 있어 떨떠름하게 느낀 것은, 그가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해서였으리라.

──나를 대신해, 마음 속 깊이 사무치도록 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호자인 그에게 인계되어 떠나온 곳은 하나의 단독주택으로,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이었다. 그곳에는 허리께로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묶은 이제 갓 방년의 나이를 지나 이제 30대 초반으로 접어드는 여성과, 억지로 마중 나온 듯해 보이는─뒤의 여성과 같이 묶고 싶었으나 무리였는지 옆머리 한쪽만 묶어진, 작고 귀여운 단발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여성은 자애롭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앞의 소녀는 그렇지 않은지, 재빨리 어머니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것도 이내 여성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에 서린 빛은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낯설음과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초조하게 살며시 내민 손은 자신보다도 가늘고 연약해 보였다. 마침내 옷자락을 붙드는 소녀의 목에서는 고양이 울음과 같은 맑고 귀여운 소리가 나와 공기를 울렸다.

“서리의 오…빠야?”

서두 없이 대뜸 말하는 어린이 특유의 대화체. 나는 이해 못하고 난처함을 표했다. 그러자 뒤에서 성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오늘부터 서리의 오빠가 될 사람이야.” 하는 것이었다.

“와아, 오빠다─ 나도 오빠가 생겼어.”

어린아이의 생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피가 섞인 친오빠도 아니건만, 처음 본 상대가 오늘부터 오빠가 되어준다는 한마디에 이리 진솔하게 기뻐하는지──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이래로 새로운 이름─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자리에 알맞은 백수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출생은 타국에서 이루어졌기에 자국이라 함은 그쪽이 옳겠지만, 부모님은 모두 이곳의 태생이므로 정확히 단정 짓지 못하겠다.

조금 낯선듯하면서도 그렇지도 않게 익숙한 기분이 드는 이곳에서─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게, 만 16세로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곳에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나는 칫솔을 입에 머금은 채 전면의 거울에서 서리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제 그만두어도 될 텐데 여전히 눈을 감고서 힘없이 팔을 움직이고 있다. 설마하니─그대로 잠에 들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소를 금하지 못하고 숨죽여 웃던 나는, 서리가 컵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물을 뱉어낸 후 세안까지 마친 서리는 그제야 자신을 발견했는지 한동안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불현듯이 옆구리 쪽을 향해 보디블로를 날려 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방심한 대가로 회피도 못한 채 정확히 가격당한 나는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아니, 왜? 어째서?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곧 별것도 아닌 듯 읊조리는 서리의 모습에 나는 억울해 할 수밖에 없었다.

“아… 뭐야─ 오빠였어?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 있으니 놀랐잖아.”

네가 몰랐던 것 뿐, 난 분명히 소리를 냈다……

고통에 입 밖으로 변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충격의 반동으로 바닥에 떨어진 칫솔을 주워들며 나는 그제야 고통과 분노에 덧붙여 원통함이 섞인 목소리로 호소해보지만, 서리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주먹을 날리는 건 뭐야.”

“아니……, 뭐랄까… 굉장히 기분 나빴거든. 한 대 먹여주고 싶을 정도로.”

아까의 웃음은 일종의 비웃음─사실 말 못할 귀여움에 즐거워 웃었던 것으로 결코 비웃은 게 아니다─에 속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아직 중학생의 손맛치고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매웠다. 그렇다고 상대가 그리 느낀 것을─꾸짖는 것도 속 좁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난 수년간 툭하면 자신을 향해 휘두른 주먹의 경험과 막대해도 화내지 않는 성격 탓도 있으리라. 솔직히 지금도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고 있었다. 이러다 언젠가 폭발하는 게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 없이 물로 입을 헹구고 세안을 마쳤다. 그동안 옆에서는 서리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내리고 있었다. 그 직후, 얼굴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정성스럽게 한쪽 옆머리를 땋는 서리의 모습에 시선이 갔다.

“왜, 왜 그래?”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서리는 조금 당황하면서 멋쩍은 듯이 볼을 붉히고 말했다.

“그냥, 어릴 적부터 빠짐없이 묶고 있구나 해서.”

“……이상해?”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에 말한 것이었는데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아니, 익숙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 어울리는데.”

수건을 걸어놓고 먼저 나서자, 뒤에서 기분 좋은 듯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동생이기에 기분 좋으라고 빈말로 건넨 것도 아니고 여자를 대하는데 있어서 서투른 내가 기분을 맞추려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리는 없었다.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렇긴 해도, 한곳에서는 동생이란 단어에 의해 눈에 콩깍지가 쓰였다는 점은 간과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서리 나름대로 교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것 같으니 틀린 말은 아니리라.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 왼편에 자리 잡은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느긋하게 학교에 갈 준비를 갖추었다. 아직은 설익은 겨울의 12월 틈─이제 날씨도 어느덧 서늘해지고 있어 제대로 복장을 갖추지 않으면 춥다.

나는 검정색 바지에, 새하얀 와이셔츠, 그 위로 회색의 조끼, 바지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재킷으로 이루어진 교복을 입었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일본의 가쿠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명문고는 아니지만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이 있는 학교답게, 일제강점기의 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교복을 사용 중이다. 마지막으로 붉은색 넥타이까지─직접 묶는 형식이 아니라 지퍼형식이라 간편하게 목에 매었다.

본래는 남고였다가 학교 측의 사정으로 인해 공학으로 바뀌었는데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하복은 간편하게 하얀색 반팔 와이셔츠뿐이면서 이렇게나 고집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학교의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나─다행스럽게도 여성의 교복은 그렇지가 않으니 그 점을 위안삼기로 하자.

딱히 실용성이 있다면 옷에 불만을 가지지 않으므로─나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에 가깝다.

교복은 근 일 년간─정확히는 가을철이래로, 입어온 옷답게 내 몸에 딱 들어맞았다. 나름 옷걸이가 좋다는 말도 들은 적 있으니, 그것은 보장 할 수 있다.

그렇게 빠짐없이 단정하게 복장을 갖추고 아래로 내려가면, 언제나와 같이 부엌에서 백성현, 한수련 부부가 맞이해준다.

이제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부부는 여전히 서로간의 애정이 넘쳐서 아직 한창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런 모습에 서리는 눈꼴이 시리다며 언짢아하는 듯 했지만, 나는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서리는 나이에 맞지 않게 두 분이 젊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인기에 비해 연애 한번 못해봤기 때문에, 연인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자신이 비참해 보이나 싶다.

“그럼 한번 괜찮은 남자랑 사귀어 보면?”하고 흘리듯이 무심결에 물으니,

“절대로 싫어! 첫 남자인데 기억하고 싶지 않을 추억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게다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고…… 뭣보다, 괘, 괜찮은 남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걸.”

생각보다 처음에 큰 의미를 두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아직 어린 주제에 가면 안 될 곳까지 진도를 빼지는 않겠지……. 그런데 정말로 괜찮은 남자 한명 없는 걸까─잘 찾아보면 한명쯤은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빠의 반조차도 못되는 녀석들인 걸.”

어쩌면 의외로 서리의 눈이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처럼 주먹을 받아주길 원하는 사람을 바라는 거려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딱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밝지도 않은, 나긋한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건네자─성현이 신문에서 눈을 떼며 인자하게 웃으며 “잘 잤니.”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받아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뻤다.

“어서 와서 앉아. 학교 늦겠다.”

수련이 앞치마를 한 채 아침 식사치고는 조금 부담스러운 만큼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해왔다. 근래 들어 한창 성장기의 나이라며, 아침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이렇게 신경써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무리라고 생각한다. 키는 더 자랄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체격은 변하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가녀린 몸은 체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도통 살이 붙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먹고, 또 먹고, 배가 터질 것만큼 배불리 먹어도, 체중이 늘 생각조차 하질 않는다. 그렇다고 운동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준수함이나 늠름함보다는 갸름함에 여자애 같은─빈말인지 사실인지 모르게 종종 그런 소리를 들었다. 어릴 적 성현이 “수선은 아버지보다는 연…, 그러니까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 했을 정도이니 반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유약함이 드러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탓에 밖을 잘 돌아다니지 않아서인지 대조적으로 피부가 하얗다. 그렇다고 정말 여자로 보일 정도는 아니기에, 관심은 꺼두고 있었다. 아니,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그런 말은 거의 듣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충분히 남자답게 자란 것이리라.

곧, 위에서 중학생 교복을 입은 서리가 쿵쿵거리며 빠르게 내려와서는 탁자 앞에 앉았다. 누가 봐도 화목한 가족이 아닐 수 없는 모습의 풍경이─꿈에 그리워 마지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이 시간이 언제나 지속되었으면…….

비록, 부모를 잃은 순간 실의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이렇게나 따스하고, 이토록 평온하며, 행복에 겨워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다.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었다.

이 생활에─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잇달아 가슴 속 깊고 깊이 만족스럽게──.

──파삭.

이것은 무슨 소리일까?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잠시 정신이 멍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화목한 풍경이 펼쳐진 식탁에 앉아있었을 터─지금 시계로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공동……. 이라고 표현할 만큼 넓은 장소였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다…….

어릴 적에 몇 번이고 들락거렸던 집 근처의 오래된 도서관─정확히는 신설되면서 안의 내용물만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의 광경이다. 예나지금이나 천정은 변함없이 드높고, 구석구석을 채운 수납장들이 질서정련하게 빼곡히 안을 메우고 있다.

책을 이루는 고유의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천정으로 난 유리창으로 멋들어진 하늘을─바라볼 수가 없다. 유리창 위로 새하얗게 가득히 메운 물질에 하늘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형체가 바닥에 떨어져 부스러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포근하게 보일 듯한, 하지만 차가움을 품은 그것은─누가 뭐래도 눈덩이였다.

아──기억났다.

이곳에 자신이 있는 연유를. 순간 상실감과 동시에 무기력해져서 기운이 빠졌다.

꿈이었다……. 언제고 이어지길 바랐던 현실이 사실은 거짓이었고, 꿈이길 바랐던 지금의 이 상황이 진짜였다.

너무도 생생하고 이제는 아련해지기 시작해져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행복했던 나날의 환상이다.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현실의 중압감에 짓눌렸다.

여전히,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나는 처음 이곳에 온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거짓 같고, 믿기지 않았던, 그 날의 차가움을.

2

“추워.”

무심결에 내뱉은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느 때와 다른 서늘한 아침 공기. 얼마나 추웠는가하면 이불을 꼭 동여매고 있음에도 그 차가움이 이불에 의해서라고 할 정도이니, 있으나 마나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이야 차릴 것도 없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다만─너무도 추워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추위에 으슬으슬 떨면서 살며시 눈을 뜨면, 시계로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다름없는 방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장으로, 평소와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위화감이다.

정확히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푸른빛에 물들어 있는 천장이라 일찍 일어났나 싶었다.

결국에는 추위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일어나야했으니 불만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긴 해도, 얼음장 같은 이불이라도 있는 것이 그나마 나았던 모양이다.

일어나면서 이불이 걷어지자, 순간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팔짱을 꼈다.

보통은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겠으나, 현재로서는 차가운 이불이라 사양하겠다.

보일러가 고장 나기라도 한 것인지 너무도 춥다. 그건 몸이 유약하기 보다는 선천적으로 추위를 잘 타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생애 이토록 추운 날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도 살을 에는 정도까지는 아니라 인내하고자 한다면 참을 수 있다. 물론 그 참을성이란 게 추운 쪽으로는 무리인 것 같아 문제다. 그것도 잠깐─갑자기 추위조차 잊을 정도로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순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의 그림자.

이불 위로 작은 그림자가 아름답게 춤을 추며 수(繡)를 놓고 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어렴풋한 두근거림. 이불 위로 비추는 그림자에서 시선을 창문으로 옮기면, 단조로운 색의 커튼에서 작은 그림자 여럿이 하늘하늘하며 움직인다.

입으로 따뜻한 숨결이 서늘하게 변하며 흩어져 가는데도 신경 쓰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마음을 붙잡는 신비함이 있었다.

손끝으로 서늘하게 닿는 천. 차갑다기 보다는 시원함이 더하다. 가볍게 천을 걷어 올려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있게 될 이곳에 새로운 감회를 가졌을 때보다 무언가 벅차오르는 기분을 받으며,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해 이제 곧 정초에 접어들게 될 예정인 나─백수선은 시계(視界)로 순백의 세계를 맞이했다.

잠시 그것이 잠결에 본 헛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으나, 곧 멍한 얼굴의 볼을 꼬집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 이전에 커튼 너머로 느껴지는 서늘함과 푸른빛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그저 꿈이길 바라는 마음에 재확인해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단번에 정신을 맑게 만드는 그런 놀라움보다는 신비함에 가까운 현상.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짧은 인생에 앞으로도 다시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아름다움이었다.

시계로 들어오는 순백의 세계는 말 그대로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흠이라고는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는 눈 설(雪)이 내려앉은 주택가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다.

실제로 필요치 않다면 말을 곧잘 하지 않고 듣는 쪽인 나였으나, 이런 광경이라면 누구를 붙잡고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그렇게 되면 그 감정을 형태로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빈약한 어휘를 탓하게 되리라.

많이 쌓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가 뜨면 금세 녹아버릴 만큼은 아닌 정도로 쌓인 눈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여백─건물의 벽면조차, 새것처럼 깨끗해 보였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뇌리에 새겨진다.

지금껏 살아오며 눈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게 접해보았고, 눈으로 덮인 도시도 여러 번 본 사람으로서 어디에 감명을 받았냐고 묻는다면, 자신도 딱히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광경이라고 느꼈다.

같지만 같지 않은 기억 또는 경험이다.

한 번 보았던 것이면서도 다시 보기 위해 그것을 찾는 사람처럼, 같은 장소에서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항상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이, 이 아름다운 광경 또한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눈 덮인 세상이라는 현상에 특이한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때는 12월 중순이었고 눈이 언제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겨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눈이 언제오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한 세상이 멸망하든 전쟁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으므로, 눈이 쌓여있다 한들 관계없다.

이질적이란 느낌은 말 그대로 성질이 다른─이 세계의 것이 아닌듯해 보였다.

“으으, 추워.”

그런 감상도, 사무치는 한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몸을 부르르 떨고는 잠시 잊고 있었던 차가움마저 치밀어 오른다.

한마디로 넋 놓고 바라보는 것조차도 여건이 좋아야 가능하다는 소리다. 아직 사회를 경험하지 않은 주제에 잘도 그런 소리를 내뱉는다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고교생의 신분이란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나이인 셈이었다.

사회를─학교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종종 조금 슬퍼지기도 했으나, 잘 견디며 살아왔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도 순수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세상물정에 밝고 산전수전 겪은 느낌이랄까.

물론 그렇지 않은 고교생도 있다만─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유감이다.

아마도 남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이겠으나, 이런 스스로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되레 그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하고 정신을 차렸다. 감상에 연연할 정도로 감상적인 사람도 아닌데다, 걸핏하면 감기에 걸릴 정도로 추위에는 약하다.

‘약하다’라는 말은 ‘싫다’는 말과도 같다.

서늘한 것은 기분이 좋지만 차가운 것은 너무나도 싫다. 남과 달리 추위를 느끼게 되는 한계점이 낮은 모양─추위를 쉽게 타는 체질이다. 그래서인지 곧잘 추위에 의해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만다. 흔히들 바람이 칼날 같다고 말하는 겨울철은 나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한마디로 건강이 제일이고, 다르게 말하면 아픈 건 싫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말이긴 하나, 특히 이제 본격적인 수험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할 마당에 감기로 앓아누울 정도로 한가히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차가운 숨결을 내뱉으며 난방이 되지 않는 방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 자리 잡은 벽걸이 시계가 12시 0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는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잠이 든 하루였다.

평균 수면시간이 5시간인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시간이다. 잠시 의심 가득한 얼굴로 시계를 뚫어져라 노려보니, 시침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늦잠을 자더라도 이렇게 늦게 깨어날 리도 없거니와, 오늘이 비록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이라 해도 이 시간까지 자도록 내버려둘 알람시계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침대 옆, 자리 잡은 책상 위의 알람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알람시계 또한 12시 00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라? 이것도 움직이지 않아.”

원인은 간단하지만 한낮 한시에 두 개의 시계가 멈추었다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단순히 희귀한 경험이라 치기에는 너무나도 기분이 꺼림칙하다.

이번엔 손을 뻗어 그 옆에 놓인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는 12시 0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름이 끼치며, 추위와 다른 서늘한 감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는 확실한 증명이 된 셈이니, 반박할 도리가 없다.

나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킨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설마, 늦잠 잔건가…….”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상당히 얼빠진 소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쪽이 더 두렵다. 솔직히 위험이란 단어에 자각이 없는 것일지도─.

하지만 과민반응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계가 멈추었다 한들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하는 것 외에는 불편할 것도 없고─그건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이며, 건전지를 갈아 끼우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빗어져 동시에 멈추었을 시계는 귀중한 경험을 한 셈으로 치면 넘어갈 수 있었다.

너무 현실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쪽으로 밖에 머리가 도는 것을 어쩌겠는가. 아마도 친구들이라면 시간이 멈추었다든지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본다.

그런 생각에 살짝 웃음이 새어나온다.

정말 시간이 멈춘 것이라면 책을 읽을 생각에 좋아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니까. 이런 점을 보면 내 쪽이 더 비상하려나.

하여간에, 일단은 잠옷차림을 한 채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로 닿는 바닥이 차가워서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조금 불안한 기분도─창가로 드는 푸른빛에 물든 방안을 보면 평온해진다. 방의 구조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곳은 언제고 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고아니까.

이 부부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오갈 데 없이, 그대로 보육원에 남게 되었으리라.

그 후, 절차를 걸쳐 이곳으로 온 나는 자상한 부부의 아들로 입양이 된 나는─이곳에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두 분께 좋은 아들이 되려고 애쓰며, 불평불만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아는 바로는, 기억에 의존해 떠올려 봐도, 부모의 얼굴은 모른다. 너무도 어렸을 적의 일이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이유는 그것만은 아닐지도.

그래서인지 현재 머무르는 곳은 분에 넘치도록 무척이나 상냥하고 자상해서 정말로 부모님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실질적으로 이미 부모이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단 한 겹의 벽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 상태였다.

고작 한 겹의 벽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견고하고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본래, 마음의 벽이란 게─그런 것이다.

쉽게 허물어 질것 같아도, 이상하게 좀처럼 그리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되도록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고, 보기 좋은 모습만 보이려 행동해왔다.

덕분에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웃지 못 할 상황에, 이것을 기뻐해야할지 분간이 서질 않는다. 그렇게 생활을 보내는 나날이지만, 나름 즐기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절친한 친구도 몇 있으며, 그 중에는 행동하나하나가 재미있는 여자도 존재한다. 덧붙여,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1살 차이의 귀여운 여동생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활에 너무도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그리고 행복해했다.

이때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이 계속되리라고─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이것이 영원(永遠)하기를.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방을 나선 후, 나는 조용히 1층 거실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방안과도 같은 푸른빛을 머금은 벽과 바닥이 서늘하면서도 조용한 것에 나는 조금 으스스함을 느꼈지만, 하얀 입김을 내쉬고는 겨드랑이에 팔을 넣은 채 추위에 떨기 바빴다.

맨살인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시리고,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평소 정겨운 감각을 주는 목제 바닥의 색다른 감촉에 새삼 감각을 되새겨보았다.

거실의 벽에는 텔레비전이 있고, 그 앞으로 직사각형의 검은빛을 띠는 테이블이, 근처에는 따스하고 포근한 모노톤의 패브릭 소파가 놓여, 항상 가족이 모여 정답게 방송을 시청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내려온 거실은 방과 같이 창가로 푸른빛을 맞이하며 내부를 차갑게 물들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런 이면은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게 추위에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거실에서 급급한 보일러 계기판을 찾았다. 단독주택이긴 하지만, 한 대의 보일러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1층에서 조절을 해야만 한다. 실별온도조절장치가 있기 때문에 효율성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게 나는 보일러 계기판 앞에서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만큼 추위에 떨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다.

계기판을 오른손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나는 뭐가 문제인지 확인했다.

솔직히, 확인이랄 것도 없다. 보통이라면 불이 들어와야 정상이겠지만, 만지는 동안에도 불이 들어올 기색은 없고 보일러실에서 작동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고장.

보일러가 꺼졌나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여지없이, 더더욱 커다란 문제를 떠안겨준다. 겨울철에 이보다 슬픈 상황이 있을까─.

이건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혹독한 시련이다.

눈물을 머금고서 나는 차가워진 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 시간에 수리공을 부른다고 하여 바로 올 것 같지도 않고, 집에는 이 상황에 대비한 물건─난로 비슷한 것조차 없다.

여태껏 별 문제 없이 살아왔으니 그런 생각을 해봤어야지.

그나마 현재 떠오르는 방법으로는 현재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옷이나 입어두자고 생각해, 나는 다시금 위층으로 향했다. 도중 내 시선이 거실과 이어진 단 하나의 문에 자리 잡았으나, 이내 거두며 그대로 올라갔다.

다시 찾은 장소는 여전히 차가움을 품은 공간으로, 예전에는 그나마 벽걸이 시계의 미세한 소음이 자신을 맞이해주고는 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 적막이 흘렀다.

나는 문 옆에 자리 잡은 옷장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계절에 맞는 교복과 몇몇 사복이 함께 구비되어 있고 겉에 걸칠 수 있는 코트도 하나 존재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는 내용물에 입맛이 쓰다. 옷장에 있는 것치곤 교복과 코트 외에는 착의하질 않았으니─뭐라고 해야 할까, 이 옷장의 주인에게는 학교 이외의 생활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삼 놀랄 것도 없었으나,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하기야 고교생이 된 이후로는 학교 이외의 시간은 남아돌지 않을 정도니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이제와 회의를 느끼는 것도 우습지만─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드는 게 지금의 심경이다.

지금의 이 감정은 옷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가족과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줄어든 것에 대한 자신의 불찰일 것이다. 이제는 학교의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친한 친구도 몇 생기더니, 가족과의 시간을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소홀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옷이라는 건 단순히 의복이란 일편(一片)이 아니라, 입는 사람의 생활과 기억이 담긴─인생 그 자체다. 나에게 있어 언제나 아무 생각 없이 꺼내 입는 교복도 어느덧 인생의 한 자락이 되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만, 가끔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라도 외출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동생과 함께 어울렸던 적도 이젠 까마득하다.

떨떠름하게 입 꼬리를 올린 채 나는 옷장을 뒤적였다. 당연하게도 교복은 제외해둔다. 학교 가는 날도 아니거니와, 오래간만에 사복을 입어보고 싶었다.

현재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니 대충 따스하게만 입도록 하자.

간편하게 면으로 된 긴팔과 검은 바지, 그 위에 코트만을 걸쳤다. 겨울에는 터틀넥이나 머플러를 주로 애용하는 추세이긴 하나, 목이 답답하거나 까슬까슬한 소재는 익숙지가 않다.

검은 머리와 눈, 옷이 한데 어우러져─일색(一色)을 띄었다. 누군가 보면 칙칙하다고 불평을 토로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로 어두운 쪽의 색깔의 의류뿐이라 어쩔 수가 없다. 딱히 하얀색이 싫다는 건 아니었으나, 곧잘 덤벙대는 나에게는 너무 쉽게 더럽혀져 티가 나버리곤 했다.

그나저나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착의하는 것이라지만, 안 입는 것만 못하지 않나 싶었다. 이불도 그랬듯 옷도 무척이나 차가웠던 것이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양말까지 완전 무장한 채 다시 방을 나선 직후, 나는 아까 보았던 문과 다른 또 하나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제의 단조로운 갈색 빛을 띠는 그것은, 소녀에 어울리는 팻말이 붙어─왠지 모르게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방의 주인을 나타내고 있다.

백서리─여동생의 이름이다.

이 추위에 서리의 방은 괜찮은 것인지, 하는 염려 섞인 생각이 들었다. 유약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여자아이이고, 차가운 데에서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마음이 아프니까─살짝 확인해보기로 했다.

끼이익, 하는 가벼운 소음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으로 살며시 머리를 내밀었다. 만약 잠에서 깨어있었다면 프라이버시라며 노크를 하지 않은 대가로 마구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오래간만에 들어선 동생의 방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상자와 같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소녀의 방답게 무척이나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물건이─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소녀의 방이었다. 문의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책상이 있고, 그 옆에는 책상과 같이 밝은 색을 띈 책장이 놓여있으며, 반대편 한구석에 놓인 옷장과 내 방과 같이 창가에 붙은 침대가 주된 세간이었다.

여기서 다른 점을 찾자면, 한쪽 벽 위에 에어컨이 놓여 있고, 옷걸이에 따로 교복을 놓아두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옷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듯하다.

내방처럼 단조롭지는 않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장소─이전에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푸른빛을 머금은 방안은 내방과 다를 바 없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서리…… 백서리……?”

불현듯 드는 말 못할 감정에, 음성을 흘렸다. 무언가 가슴이 콱 하고 막혀버리면서 불안한 기분이 든 것이다.

이제 나는 방안으로 완전히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 볼록하게 솟아오른 침대로 다가갈 때마다 장판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감각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다다른 침대 앞에서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듯 멈칫했으나,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뻗는다.

어떤 사람이 보면 오해받을만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만큼 나는 현재 긴장하고 있다. 이 불안한 감각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느꼈던 것이다.

보육원에서 오는 길에 성현으로부터 적잖이 마음의 안식을 얻었던 나는, 낯선 집에 도착해 처음으로 대면한 조그마한 아이가 보인 반응에 지레짐작 겁을 먹고, 다시 되돌아가게 될까 두려워했었다. 지금의 이 불안감은 그때의 것과 유사하다.

겨우 찾아낸 안식처를 잃어버리게 될까, 무서워했던 기시감(旣視感)이 현재 내 가슴을 옭아매고 있었다.

끝내 한기를 품은 부드러운 표면에 손끝이 닿고, 그것을 살며시 내리면─평소와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잠에 든 서리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계에 들어오는 진실에 가차 없이 부서져 내렸다.

“어─?”

갑작스러운 충격에 바보스러운 음성을 흘리며, 이해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침대 위, 그곳에는 있어야 할 것이─사랑스럽게 잠에 든 소녀가─하나 뿐인 여동생 백서리가─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릴 적에 선물했던 커다란 곰 인형만이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혼잡해지고, 형언 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들어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마음 속 깊이 쥐어짜내 흘린 간절함 섞인 말에는, 대답 해줄 사람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침대에 앉은 나는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서리가 말도 없이 어딜 나갈 아이가 아니지만─지금은 이른 시간이라 산책을 나갔을 수도 있다. 육상부인 서리는 곧잘 러닝(running)을 하곤 했으니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합리적으로 생각해 자기를 위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고 몸에 소지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두고 서리가 두고 나갔을 리는─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생각해도 몸만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집이 차갑다.

살아있는 존재도 아닌 집이 차가운 것은 당연하나, 평소의 온정이라곤 한줌도 채 되지 못하고, 다정한 소리조차 흐르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라는 감각. 이제껏 살아오며 집안이 이토록 추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느끼는 생소한 감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살던 집임에도, 매일 생활하는 곳인데도, 처음 사는 곳인 것처럼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처음 순백의 세계를 맞이하며 느꼈던 부자연스러움이, 이질적인 광경에 대한 위풍에, 잠시나마 속았다. 불안감은 어렴풋이 느끼던 감각에서 이제야 확신이 되었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넘긴 느낌이 이제와 비상함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따스한 집이 차갑게 죽어있다…….

대체 잠이 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제저녁 잠이 들기 전의 일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누군가 잘라내 도려낸 듯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만 괴로워질 뿐이었다.

잠들기 전의 일만이 아니다. 자잘한 것조차 곧잘 기억해내던─공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나는 부분적으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잠들기 전의 일만이 아니다. 하찮은 것조차 잘 기억해내던─공부는 별개의 이야기다─나는 부분적으로 경험했던 일상이 떠올랐다. 마치 사진과 같이, 인상적인 단편은 기억은 나지만, 그 전후의 사정은 기록이 남지 않은 느낌.

복잡한 심경이다. 어떻게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알지 못할 무언가 일이 난 것만은 알겠다.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새어나올 듯이 가슴이 갑갑하다. 이유도 모른 채 단 한순간에 행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어릴 적 곧잘 길을 잃고 방황하던 때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하다못해 사람의 온기라도 있었으면 이 정도로 심리적 불안을─고독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나는, 벌써부터 단정 짓지 말자고 생각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설마 그 활발한 아이가 납치를 당했을 리는 없으며, 집을 나가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도 없다.

조금 단순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을 노릇도 아닌데다, 딱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 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경시하지 않았다. 반대로 충분히 자각했기에 신속히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 이때만 해도 나는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방을 나섰다.

이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나는 순백의 세계로 한걸음 내딛었다.

이상하게도 남겨지는 집은 너무나도 쓸쓸하게 보였다. 금방 돌아올 것이 자명한데도, 다시 그러지 못할 것처럼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나는 1층 거실에 이어진 부모님의 방문을 지나쳐 그대로 현관의 신발을 신고 문은 나선 참이었다. 그 앞에서 잠시 서서 문을 열어볼 생각도 했으나, 만약 그 안에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더 괴로울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솔직히,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방 안에는 어느 누구도 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어릴 적, 생소한 공간에서 잠에 들지 못할까 염려하여 자상하게도 자리를 내어주신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손잡이에 뻗었던 손을 거두며 잠시나마 느낀 차가움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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