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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용사♂ 키우는 드래곤♀
글쓴이: 리블렌
작성일: 12-07-26 16:13 조회: 2,073 추천: 0 비추천: 0
-용사♂ 키우는 드래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다.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상대가 내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쇠사슬이 되어 몸을 옭아맨다.
그저 마음 편하게 사냥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일이 꼬여버린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설마 ‘그 녀석’, 전부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날 여기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녀석이 나를 함정에 빠뜨릴 리가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사념이 뒤엉킨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위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내 말을 믿겠나?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오는 목소리.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거대한 녀석이 말을 거는 것이리라.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초원은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존재가 만들어낸 그림자로 뒤덮여버렸다.
“믿을 수밖에 없겠군.”
나는 힘겹게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치 불덩이를 뱉어낸 것처럼 목과 입이 타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런가. 그럼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잠깐. 그 전에 할 말이 있다.”
상대의 말을 끊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겁다. 당장이라도 상대가 내뿜는 기운에 짓눌려 쓰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는 않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며 상대와 시선을 맞춘다. 그것의 육체와 같은 빛깔의, 타는 듯이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뭐지?
안쪽에 화염이 일렁이고 있는 거대한 입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머리 위로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뿔. 붉은색 비늘로 뒤덮인 어마어마한 크기의 육체와 그걸 지탱하고 있는 4개의 다리.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달린 꼬리는 대지를 휩쓸어버릴 것처럼 길었고, 한 쌍의 날개는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넓게 펼쳐져있다. 현존하는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 그것이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의 명칭이었다.
긴장을 지우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최강의 적을 향해 나는 외쳤다.
“던전 입구에서 최종 보스가 나오는 건 반칙이잖아,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하아, 곤란하게 됐군.”
유니시스의 교장실. 그곳에서 교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한 노인이 한 장의 문서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한 소년의 전학 신청서. 문서 윗부분에는 아트리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멋대로 학교를 뛰쳐나간 녀석을 순순히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불합격 처리를 해버리는 거야 간단하다. 하지만 교장 자신이 크리스틴 가와 꽤나 질긴 인연이 있는 사이라는 게 문제였다. 거기다…….
“그렇다고 전학을 거부하자니, 녀석이 1년 전에 여길 그만둔 이유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1년 전까지만 해도 아트리는 무척이나 우수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뛰어난 용사인 아버지를 동경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위대한 용사가 되기 위해 언제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늘 바빠서 집을 비우는 아버지를 대신해 병약한 어머니를 간호하면서도, 성적은 언제나 최상위를 유지했다.
“설마 그 존경해마지않는 아버지와의 불화가 원인으로 유니시스를 그만두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아트리의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세계로 떠나있었다. 한 세계에 4명이나 용사가 투입된, 무척이나 이례적인 임무였다. 그 임무가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아트리의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것이다. 그녀의 상태는 이미 의사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생명이 며칠 남지 않은 어머니를 위해 아트리는 다른 세계에 있는 아버지를 부르려고 유니시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교장은 직접 아트리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통신을 이어주었다. 그때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교장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트리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장례식이 끝난 직후, 아트리는 유니시스를 그만뒀다. 그때 그가 한 말을 교장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버려야만 한다면, 그런 게 용사라면 전 용사 따위는 되지 않겠어요.’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아내를 버린다. 교장은 그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용사로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선택의 때가 온다. 아주 소중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그 선택에 정답 따위는 없다.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아트리의 아버지는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보다 세계를 구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뿐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 결과로 아트리가 상처 입은 것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장은 아트리가 유니시스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녀석이 왜 다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냐는 건데.”
이게 이번 일에서 가장 이상한 점이었다. 아트리는 아버지라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용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유니시스로 돌아오겠다는 걸까?
교장의 시선이 책상 구석에 놓여있는 신문으로 향한다. 그는 손을 뻗어 신문을 바로 앞까지 가져왔다. 한 기사에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져있다.
-3개월 전 행방불명된 용사, 도르아 크리스틴의 수색이 중단.
도르아 크리스틴. 아트리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계의 구원을 위해 힘쓰던 그는 결국 임무에 실패하고 동료 용사와 함께 행방불명됐다. 곧 대규모의 수색이 시작됐으나, 그들의 생사여부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며칠 전, 점점 규모가 축소되어가던 수색은 결국 완전히 중단돼버렸다.
“만약 직접 아버지를 찾으려는 거라면?”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 허락되는 건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용사뿐.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아트리가 유니시스의 졸업장을 얻으려하는 거라면? 아니, 졸업까지 갈 것도 없다. 2학년 말에 a랭크 용사에게만 주어지는, 원하는 세계에 가볼 수 있는 특권. 그것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그것이 아트리가 유니시스로 돌아오려는 이유라고 한다면, 절대로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교장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트리는 용사가 되려는 게 아니다. 그저 권리를 얻기 위해 용사가 되려는 척을 하려는 것이지.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진실은 아트리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그의 요청을 거부해도 되는 걸까? 만약 아트리가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다시 용사가 되려는 거라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가설 하나로 그 꿈을 짓밟아도 되는 걸까?
“아니, 그런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다.”
오랜 시간 망설이던 교장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만약 아트리가 정말 그런 의도를 갖고 돌아온 거라면, 그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침내 교장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1년만인가.”
나는 눈앞에 있는 학교, 유니시스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곳이지만, 그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로 버리고 떠났던 곳이다. 지금에 와서는 애착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다. 원래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었으니까.
동화나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세계에 혼돈과 질서를 가져오는 절대자들.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명예로운 존재. 이것이 보통 용사와 마왕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도 용사라는 직업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용사도, 마왕도 세계 규모로 펼쳐지는 거대한 사기극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교내의 밝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보면 안다. 이곳의 학생들은 지금도 자신이 언젠가 세계를 구원하는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법과 과학이 동시에 발달한 기형적인 세계이자, 모든 용사와 마왕의 고향인 ‘바란체’. 이곳에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계들을 관리한다는 명목 하에 용사와 마왕을 육성하고 있다. 긴 평화로 타락해가는 세계에 마왕을 보내 인위적으로 전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용사를 보내 구원을 연출한다.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의 자작극이다. 하지만 멸망을 향해 나아갈 뿐인 세계에 다시 한 번 질서를 가져온다는 명목으로, 이 사기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후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전부터 내 마음속에 가득 차있는 용사에 대한 불신감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내가 유니시스로 돌아온 이유는 용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목적을 달성하기까진 그렇게 속여 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른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녀석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려나?”
1년 전에 ‘그 녀석’에게 받은 목걸이를 손에 쥐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은색 타워실드 위로 두 개의 황금빛 검이 교차해있는 모양으로, 곳곳엔 여러 가지 빛깔의 보석이 장식돼있는, 무척이나 화려하게 세공된 장신구였다. 그 녀석과도 곧 다시 만나게 될 텐데, 그때 자신은 무슨 표정을 지으면 되는 걸까?
“하하, 나도 참 바보 같기는. 이제 와서 망설여도 의미는 없는데 말이야.”
유니시스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유니시스의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착한 곳은 1층 안쪽에 있는 교장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는지 이미 교장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는 차까지 준비된 상태였다.
“왔는가, 아트리 군? 후흐흐.”
“오랜만입니다, 교장 선생님.”
변함없이 음흉한 웃음소리군요,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겉보기엔 저래도 일단은 전설이라고까지 불린, 뛰어난 용사였던 남자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으리라.
“1년 정도 못 본 사이에 쓸데없이 공손해졌군. 뭐, 아무래도 좋네만. 자네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네. 나보단 못하지만, 나름대로 우수하기는 한 인재였는데 그런 불행한 사건에 휘말리다니.”
가시가 돋친 말투였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교장과 아버지는 긴 악연으로 똘똘 뭉친 사이다. 서로를 물어뜯는 발언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일상이나 마찬가지다. 현역 용사로 활약하던 아버지는 3개월가량 전, 모종의 사건으로 행방불명된 상태다.
“자네가 이곳에 돌아온 것도 그 녀석 때문인가? 설마 직접 아버지를 찾아내겠다든가, 그런 말을 할 셈은 아니겠지?”
“설마요. 전 그냥 다시 한 번 용사라는 꿈에 도전해보고 싶어진 것뿐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만나야만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왜 어머니를 버린 건지,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키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수색이 중단된 이상 스스로 그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밖에 없다. 용사가 되든지, 아니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특수한 권리를 손에 넣든지. 어느 쪽이든 전제조건으로써 유니시스의 학생이 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나는 1년 전에 한 번 이별을 고했던 이 장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교장은 묵묵히 내 눈동자를 주시했다.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버텨내며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긴 침묵 속의 줄다리기는 내 승리로 끝났다.
“뭐, 그렇다면 좋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은 하네만, 일단 자네의 데이터의 변동사항에 대해 설명해주겠네.”
용사를 육성하기 위해 전투 훈련은 필수다. 하지만 학생 시절부터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기에, 마도서를 이용해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곳에서 사용되는 모든 것을 입력해둔 것이 바로 데이터다.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용사의 공격력, 방어력, 체력 등의 파라미터와 무기, 방어구, 마법, 소지금 등 모든 정보를 가상세계 내부에 입력해놓은 것이다.
교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1년 전, 자네가 유니시스를 그만뒀을 때 모든 데이터는 말소됐네. 뭐, 능력치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자네가 계속 육체를 단련해왔다면 그대로 유지되겠지. 특수능력 또한 예전 그대로 유지될 걸세. 다만 모든 아이템과 소지금은 초기화됐네.”
즉, 맨몸으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다. 나는 평상심을 유지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랭킹 시스템의 데이터는 개인 데이터와 따로 관리하고 있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자네의 원래 랭크가 그대로 유지될 걸세.”
“푸웁!”
그리고 교장의 발언을 듣고 마시던 차를 뿜어버렸다. 교장은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어느새 손수건을 펼쳐서 얼굴을 가드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무척이나 열 받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든다.
랭크 시스템은 학생들의 수준을 나눠놓은 것으로, 명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뛰어난 학생에게 패널티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용사를 예로 들자면, 모든 용사는 자신보다 낮은 랭크의 몬스터를 사냥해도, 던전을 클리어해도, 공주를 구출해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물론 랭크가 높을수록 몬스터는 강해지고, 던전의 함정도 지독해진다.
교장이 내 능력치는 비슷하게 유지될 거라고 말했지만, 용사의 전투능력에 능력치의 차이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무기와 방어구의 성능 쪽이다. 용사의 강함은 아이템으로 정해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맨손으로 a랭크의 던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이 빌어먹을 영감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랭크만 유지된다고? 웃기지마!”
나는 맹렬한 기세로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교장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지만 교장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듣기 거북한 웃음을 흘린다.
“후흐흐,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군. 이래야 그 녀석의 아들답지.”
교장의 말투가 가벼워졌다. 교장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적인 입장으로 대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즉, 폭력엔 폭력으로 대응해줄 테니 한 번 덤벼 보라는 것이다. 그는 멱살을 잡힌 채로 내 멱살을 역으로 움켜쥐더니, 엎어치기로 나를 땅에 꽂아버렸다.
“끄아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머리와 등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온다. 끔찍한 고통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여기 콘크리트 바닥이라고! 날 죽일 셈이냐, 이 노망난 영감이!”
“흥, 이 정도로 죽일 수 있었으면, 네 아버지 대에서 진즉에 죽였다, 이놈아.”
“젠장, 랭크가 유지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것도 같이 초기화해달라고!”
“싫은데? 멋대로 뛰쳐나간 놈을 다시 받아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일이지. 나와 네 아비의 끔찍한 악연만 아니었으면 넌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어.”
교장의 말을 듣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다. 유니시스의 사람들에게 있어 멋대로 학교를 그만둬버린 자신은 배신자니까. 어쩔 수 없다. 일단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크읏, 그래도 맨손으로 a랭크에서 시작이라니, 무리잖아요. 도와줄 거면 끝까지 도와달란 말입니다.”
“안 되는 건 안 돼. 어차피 시험에서 안 좋은 성적을 내면 자동적으로 랭크는 내려갈 테지. 몇 번 랭크 다운되면 그때부터 제대로 시작하면 되잖아? 아직 졸업까지 1년 반 가까이 남았으니까.”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요!”
랭크가 높아도 패널티만 존재할 뿐인데도 사람들이 높은 랭크를 추구하는 것엔 이유가 있다. 졸업 후, 다른 세계로 가게 될 때, 높은 랭크의 용사부터 원하는 세계를 선점할 특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2학년.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데 내년까지 기다려서는 모든 것이 늦어버린다. 내가 노리는 건 또 다른 특권 쪽이었다.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마치고, a랭크의 용사만이 원하는 세계에 미리 가볼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그때까지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좋은 장비를 구해서 a랭크 자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네놈, 2학년 말의 특권을 손에 넣어서 아비를 찾으러 가겠다는 속셈은 아니겠지?”
칫, 쓸데없이 예리한 노인네다.
“그, 그럴 리가요. 그저 최대한 빨리 랭킹을 올리고 싶을 뿐입니다. 제 미래를 위해서요.”
“미래라. 뭐, 그렇다고 해두지. 하지만 아트리, 이건 너에게 있어서도 좋은 기회다.”
“기회, 라고요?”
“랭크 변동은 시험 한 번에 최대 1단계까지만 가능해. 만약 랭크가 초기화돼 c랭크가 된다면, 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 연속으로 랭크 업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중간고사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맨손으로 시작해서 몇 주 만에 포인트를 모아 승급시험을 치루는 건 쉽지 않을 걸? 그에 반해 a랭크에서 시작하면 중간고사에서 랭크 다운이 된다고 해도, 기말고사에서 랭크 업을 하면 다시 a랭크가 될 수 있지. 물론 맨손으로 a랭크의 던전에서 사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너라면 몇 가지는 방법이 떠오를 텐데?”
확실히 교장의 말처럼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파티 사냥. 좋은 장비를 갖춘 a랭크 용사와 파티를 짜서 같이 사냥하며 편하게 장비를 모으는 방법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아무런 이득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봉사활동을 해줄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것도 그 대상이 유니시스 사람들에게 있어 배신자나 다름없는 나라면 더더욱.
-날 버리고 가버리는 거야?
순간 머릿속에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그 녀석이라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방법만은 택해선 안 된다.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아무튼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네. 자네는 1학년 때 일반 학교로 전학을 가버렸으니, 원칙대로라면 1학년부터 다시 다녀야하네만, 이번엔 특례로 2학년 2학기부터 다니도록 조치해뒀네. 이걸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준 셈이지. 앞으론 자네에게 달렸네.”
교장의 말투가 업무를 볼 때의 딱딱한 말투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의 과거의 동료로서 해줄 말은 다 했다는 거겠지.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으리라.
“이걸로 내 용건은 끝이네. 정식으로 이곳의 학생이 되는 건 내일부터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되네.”
“적응 차원에서 가상 세계에 한번 접속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뭐, 데이터 처리는 끝난 상태니 문제는 없겠지. 로그인 개시까지 30분도 안 남았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아, 자네 교복과 체육복은 사물함에 넣어놨으니, 탈의실로 가서 갈아입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교장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아트리가 나가고 조용해진 교장실에서 잔뜩 쌓인 문서에 도장을 찍던 교장은 잠시 일을 멈추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걸 말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잠시 고민에 빠진 교장은 곧,
“뭐, 아무래도 좋은가. 후흐흐.”
라며 책임감 없는 말을 내뱉더니, 곧 도장 찍는 작업을 재개했다.

“실내도 그다지 변함없음, 인가.”
나는 사물함에서 꺼내온 교복을 들고 탈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니 기억속의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생각해보면 이곳을 떠난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무언가 크게 달라질 정도의 기간이 아닌 것이다.
“분명 남자 탈의실은 이쪽이었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탈의실을 찾아낸 나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좌우의 벽에 한 줄씩, 그리고 중앙에 추가로 두 줄, 총 네 줄의 로커가 배치돼있었다. 내 로커는 가장 안쪽에 위치해있을 것이다. 사물함도 그대로 방치돼있었으니, 로커 또한 마찬가지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탈의실의 안쪽으로 향했다.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언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중앙의 로커들을 지나쳐 탈의실 가장 안쪽까지 들어온 후에야 나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탈의실 안쪽에서 한 소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던 것이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은발이 눈처럼 새하얀 살결 위로 드리워져있다. 가지런한 이목구비의 비율은 완벽해 마치 뛰어난 장인이 공 들여 만들어낸 인형을 보이는 듯하다. 속옷과 스커트만을 입고 있는 소녀의 가녀린 라인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스커트를 벗고 있던 소녀는 아트리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외의 사태에 깜짝 놀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옆에 있는 록커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카렌, 클로에, 키아. 그곳에 적힌 이름은 전부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명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남자 탈의실이었을 터다. 그런데 어째서? 설마, 탈의실의 위치가 바뀌었다? 빌어먹을 영감,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들어온 내 잘못인가.
“아, 그, 나는…….”
변명을 하려 했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기보다 이미 소녀의 속옷차림을 본 순간 어떤 변명을 해도 통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뒤가 없지 않아? 어차피 죽을 거라면 좋은 걸 보고 죽는 것이 남자라는 생물이다. 그런 생각에 나는 시야를 가리고 있던 두 손의 손가락을 살짝 벌려 소녀의 모습을 살폈다.
소녀가 허벅지 위치에서 애매하게 붙들고 있던 스커트가 그녀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지만 나는 거기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소녀가 쥐고 있는, 어디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새까만 단검이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았으니까.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소녀의 녹색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그 안에는 명백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건가. 하지만 죽기 전에 아주, 무척이나 좋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죽기 전에 1초라도 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새기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단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던지려했던 단검을 무기력하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시선은 내의 목걸이에 고정돼있었다. 소녀의 앵두빛의 자그마한 입술이 열리며 말을 자아냈다.
“아, 트리?”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아 무미건조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내 사고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신히 자신이 이 소녀를 알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악이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녀석과, 그것도 이 이하가 없을 정도의 최악의 방식으로 만나다니. 나는 긴장으로 굳은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간신히 미소를 만들어내며 말했다.
“오, 오랜만이야, 넬.”
그녀의 이름은 네리안 오르도. 애칭은 넬. 유니시스의 몇 안 되는 a랭크 용사 중 한 명으로, 1년 전까지 내 약혼녀였던 사람이다.
넬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두 명의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여자 탈의실. 들어오는 사람의 성별은 뻔하다. 조금 전엔 상대가 넬이라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이번엔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하지만 출입구는 하나밖에 없다. 퇴로를 차단당한 상태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쪽으로.”
넬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로커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안에 걸려있던 옷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넬, 자, 잠깐.”
“조용히.”
나는 항변하려 했으나, 날아온 스커트가 그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당황하며 황급히 스커트를 떼어내자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로커의 문이 닫히고, 어두워졌다. 로커의 손잡이 부분의 조그마한 틈새로 약간의 빛이 새들어올 뿐이었다.
“왜 너까지 들어오는 거야?!”
“훔쳐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리고…….”
넬이 양팔을 살며시 내 허리에 감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가 하고 싶으니까.”
넬의 숨결이 아트리의 목을 간지럽힌다. 로커 속은 무척이나 비좁았다. 넬의 몸과 맞닿은 상태라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위험하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그런데 오늘은 누구 던전으로 사냥 갈 거야?
-글쎄. 저번에 갔던 곳으로 다시 갈래?
-에~, 거긴 이제 슬슬 지겨운데.
로커 밖에서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고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 소리, 넬한테도 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 넬. 조금만 떨어져주면 안 될까?”
“조용히.”
한계에 다다른 나는 넬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그녀는 물러나기는커녕 더욱더 몸을 밀착시켰다. 가슴 쪽에 부드럽고 물컹한 감촉이 느껴진다. 윽, 이 녀석, 1년 사이에 가슴이 상당히 커졌잖아. 이쪽이 물러나려고 해도 이미 최대한 로커의 뒤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터라 더 공간이 없었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던 거야?”
갑작스레 넬이 그런 질문을 던져왔다. 로커 속은 무척이나 어두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1년 전에 유니시스를 떠날 때, 나는 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만은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진실을 말해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넬이 얼마나 상처 입을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혹시 내가 싫어졌어?”
“그런 건 아냐.”
“그럼, 다시 나와 약혼하자. 반대하는 어른들은 오라버니가 어떻게든 해줄 거야. 그러니까…….”
“미안, 그럴 순 없어. 내가 너와 다시 약혼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기다렸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내가 넬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커진다. 주위가 얼어붙은 것처럼 갑작스레 한기가 느껴진다.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바깥 상황을 확인한다. 로그인 개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들 광장으로 이동한 것인지, 다행히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면 그런 말은 못해!”
넬의 목소리에는 강렬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늘 무표정을 유지하며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 나는 그 분노가 지닌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나를 기다려왔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나는 다시 한 번 넬을 배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안.”
나는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이외에 그가 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사과 따위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맞닿은 살결로 넬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노일까, 아니면 초조함일까? 확실한 건 냉정을 잃은 그녀와 계속 이야기해봤자,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넬을 안아 올렸다.
“무슨……!”
바둥거리며 반항하는 넬을 껴안은 채 발로 로커의 문을 걷어차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탈의실에는 우리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허리에 감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가지마.”
넬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넬은 날 붙들고 있던 손을 풀고 스스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에 넬의 품에서 빠져나와 전력으로 출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기다려!”
당황한 넬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트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의 결심이 뒤틀려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곳에는…….
“넬, 왜 이렇게 늦어. 로그인 개시까지 5분도 안 남았……. 어, 아트리? 왜 네가 여기에?”
넬의 오빠, 에반이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반 오르도. 랭킹 3위의 용사이자, 오르도 가문의 장남이다. 넬과 같은 색상의 멋들어진 은발,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그리고 수려한 외모를 지닌, 심지어 여자애들에게도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유니시스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완벽한 남자.
하지만 시스콘이다.
“어? 잠깐, 여긴 분명, 응?”
당황한 듯 그의 시선이 내 얼굴과 여자 탈의실의 표지판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한다. 그때 내 뒤를 쫓아 넬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거기서, 아트리!”
여자 탈의실에서 나온 남자와 그 뒤를 따라 나온 속옷 차림의 울먹이는 소녀.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한 소녀의 오빠. 이거 혹시, 무지하게 위험한 상황 아냐?
에반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네 놈, 내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가슴까지 큰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위, 위험해. 이 녀석, 여동생 사랑으로 인해 이성의 끈을 놓쳤어! 이대로 있으면 살해당하고 만다. 위기를 직감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반이 살의의 파동을 내뿜으며 뒤쫓아 온다.
“오라버니, 아트리에게 손대지 마세요!”
넬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살짝 안심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런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 것이다.
“죽이더라도 내가 직접 죽일 거니까!”
그리고 내 안심은 3초 만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넌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와!”
에반의 말을 듣고 넬은 탈의실로 돌아갔다. 이제 쫓아오는 건 에반 한 명뿐. 절대로 붙잡힐 수는 없다. 어떻게든 광장까지 도망쳐서 로그인 개시 시각까지만 버티면 나의 승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2시 27분. 남은 시간은 앞으로 3분. 원래는 교칙 상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로그인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살짝 뒤돌아보니 에반이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쫓아오고 있다. 붙잡히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죽는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광장은 로그인을 준비하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곳의 중앙에는 가장 세계를 구축하는 ‘마도서’가 펼쳐져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형 마법진이 바닥에 새겨져있다. 동시에 다수의 인원이 로그인하기 위한 설비다.
나는 마도서를 중심으로 빽빽하게 늘어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에반은 숨을 헐떡이며 나를 찾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도망친 이상 이제 발각될 가능성은 없었다. 나는 에반과 거리를 두며 인파 사이에 몸을 숨긴 채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분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로그인이 시작됐다. 바닥의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온 빛의 파동이 광장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직후, 나는 가상의 세계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나는 번화한 도시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번화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가상 세계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온통 회색으로 도배된 현실의 도시와 비교하면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중세의 도시였다.
나는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리셋 되었으니 딱 기본적인 무구만 갖춰져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현실은 그보다도 참담했다. 방어구는 전무했고, 무기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허름한 검 한 자루가 끝이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텅 비어있고, 지갑엔 가죽 갑옷이나 하나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푼돈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 빌어먹을 영감, 적어도 1학년 때 기본 지급되는 물품 정도는 넣어줘야 할 거 아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쓸만한 수준의 검인지 확인해보려는 심산이었으나, 그 검의 정체는 나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장난감 칼이었던 것이다.
-삐융삐융! 가X라이더 변신! 뿌요오오옹!
뭉뚝한 플라스틱으로 된 날이 기묘한 효과음과 함께 온갖 화려한 빛깔을 내뿜는다.
“…….”
-디리링! 디리링! 삐융삐융!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검은 계속 그 특유의 소리와 빛을 퍼뜨려나간다. 주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나는 온힘을 다한 무릎치기로 칼날의 중앙을 가격해 그것을 반으로 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다.
-삐, 삐비, 가X라라라라, 변, 뿌, 뿌부우우…….
반으로 접힌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난감 칼은 여전히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분노에 가득 차 검을 발로 마구 밟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광적인 모습에 구경꾼들은 겁을 먹었는지 하나둘씩 모른 척하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곧 장난감 칼은 영원한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꼴이…….”
나는 이 세상 모든 짜증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터벅터벅 무기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죽갑옷이고 뭐고, 일단 검부터 구해야했다.
무기점의 주인은 대머리 아저씨였다. 뇌까지 근육으로 돼있을 것 같은 외모의 무기점 주인은 화로 앞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무기점 주인은 작업을 중단하고 카운터로 나왔다. 나는 벽에 걸려있는 수많은 무기들을 둘러보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은 무기들이었으나, 이제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10실버 안쪽으로 검 좀 보여주세요.”
숏소드 정도는 살 수 있을까? 가능하면 롱소드 정도는 손에 넣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무기점 주인이 보여준 검은 딱 한 자루였다.
“5실버다.”
그것도 연습용 목검이었다.
“에? 쇼, 숏소드는 얼만데요?”
“15실버.”
“비싸! 5실버만 깎아줘요!”
“비싸면 나무 쪼가리 들고 사냥하든가.”
나는 어떻게든 숏소드를 사보려고 했지만, 무기점 주인의 태도는 완고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검을 들고 a랭크 던전에서 사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날은 달려있는 검을 들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때 갑자기 뒤에서 주머니 하나가 날아와 카운터 위에 떨어졌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랭크 2위까지 올라갔던 천재 용사가 저런 푼돈 가지고 흥정이나 하고 있다니, 네놈도 갈 데까지 갔군. 주인장, 저 녀석에게 여기서 제일 좋은 걸로 풀세트를 맞춰줘.”
목소리의 주인은 에반이었다. 무기점 주인이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 가득 찬 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나는 카운터에 5실버를 올려두고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무기점 주인에게서 뺏어 에반에게 던져서 되돌려주었다.
“네 도움은 필요 없어.”
“하아? 바보냐. 그런 장난감으로 a랭크 던전에서 어떻게 사냥을 한다는 거야? 너, 다시 넬하고 약혼해라. 그럼 아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잊어주고, 우리 ‘길드’가 너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
그의 제안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내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이겠지. 하지만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 녀석과 다시 약혼할 일은 없을 거야.”
아트리의 대답에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그래.”
“네놈, 넬이 지난 1년 동안 어떤 마음으로 널 기다려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반이 오른손으로 무기점의 벽을 강하게 후려친다.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살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하지만 난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
“이제 됐어!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오늘부터 우리들은 너를 배신자로 취급하겠어.”
“내가 너희들을 배신한 건 1년 전부터야.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주인장, 여기 있는 모든 무기와 방어구 중 싼 것부터 살 수 있는 데로 전부 매입하도록 하지.”
에반은 금화가 든 주머니를 다시 무기점 주인에게 던졌다. 내가 장비를 갖추지 못하게 전부 사버릴 셈이다. 좋지 않은 상황이 됐다. 매진된 물품도 며칠 지나면 재고가 들어오긴 할 테지만, 그 동안은 아무 것도 구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확실히 길드를 적으로 돌리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리라. 하지만 이것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과. 후회는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에반의 방해가 이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아트리, 너한텐 진심으로 실망했다.”
그런 말을 남기고 에반은 무기점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쉰 후 목검을 허리에 차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사냥할만한 장소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가슴을 쿡쿡 지르는 것 같은 이 고통을 무시하기로 했다.

마도서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곳으로 사람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학교 측에서 만들어둔 가상 세계 내부에서 마왕은 자신의 마도서를 사용해 또 다른 가상 세계, 던전을 구축한다. 즉, 마도서 안의 마도서, 가상세계 안의 가상세계다.
마왕은 가상세계의 어느 위치에 자신의 던전으로 통하는 워프게이트를 형성시켜두고, 쳐들어오는 용사를 배제한다. 그리고 용사는 그 던전을 찾아가 내부에서 기다리는 마왕을 처치한다. 얼마나 뛰어난 던전을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 던전을 어떻게 돌파해내는가. 이 단순한 구조가 가상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의 방식이다.
마을의 게시판에서 원하는 조건의 던전을 찾은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 후, 나는 목표로 삼았던 워프게이트를 발견했다. 워프게이트는 광장에 있던 것을 축소해놓은 듯한 형태였다. 바닥에 마도서가 놓여있고, 그걸 중심으로 마법진이 펼쳐져있다. 마법진의 크기가 광장에 있던 것보다 훨씬 작을 뿐, 전체적인 구조는 같다. 나는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순간적으로 주위가 빛으로 가득 찼고,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주위의 모습이 바뀐 뒤였다.
던전의 입구 부근에는 몇몇의 파티가 사냥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사냥하고 있던 파티의 멤버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이 사냥터는 우리들이 선점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곳을 찾아봐.”
“뭐? 선점이라니, 그런 룰은 없잖아.”
“물러나지 않겠다면 우리는 너와 싸우지 않으면 안 돼. 우리도 패널티를 짊어지면서까지 pk를 하고 싶지는 않아. 얌전히 물러나주지 않겠나?”
에반이 손을 쓴 건가. 언젠가 방해가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이야. 상대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정말로 pk를 걸어올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한 패널티는 길드 측에서 보상해주겠다고 했으리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던전을 나와 다른 사냥터를 찾기 시작했다. 목검만으로도 어떻게든 사냥이 가능할 것 같은 던전을 찾아다녔으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아주 좁은 지역도 양보해줄 수 없고, 당장 나가지 않으면 pk도 불사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던전까지 벌써 4번째. 길드의 입김이 닿았다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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