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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와 버그 픽서와 마스터 (Bug & Bug Fixer & Master)
글쓴이: 루트4
작성일: 12-07-25 22:24 조회: 2,011 추천: 0 비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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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그와 버그 픽서와 마스터 (Bug & Bug Fixer & Master)

수업이 모두 끝난 방과 후, 나는 지금 반 친구인 수지와 함께 집으로 가고 있다.

“오늘 수업 정말 졸렸어. 그렇지?”

“응, 뭐, 그, 그랬지.”

너무 긴장했는지 말을 더듬어버렸다. 예전에는 수지와 같이 걸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괜히 며칠 전 그 일 때문에 수지를 의식하게 돼버린 것 같다.

수지는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같은 중학교에 가게 되었고, 올해도 같은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일수록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나는 수지를 그저 편한 동성친구 정도로 여겨왔다.

아니, 그랬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수지는 외모든 성적이든 성격이든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항상 수지의 옆에 있던 나는 그런 사실을 딱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반 남자 애들이 내게 와서 “야, 나 한수지 좀 소개시켜줘라.”하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알았다고 답했고, 남자 애들은 고맙다면서 갔다.

남자 애들의 그 부탁을 듣고서야 나는 수지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이후로 나는 수지를 의식하게 되었다. 수지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수지는 예쁘고, 전교 10위권 안에 들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모두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그야말로 정석의 미소녀였다.

만약 수지와 다른 학교에 갔다면 수지는 나란 사람의 존재를 평생 모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수지는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이다. 나는 생긴 것도 평범하고, 성적도 보통 정도인데다가, 성격도 그리 좋지 못하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옆을 걷고 있는 수지를 쳐다보았다. 수지는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수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오늘은 더 예뻐 보인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매일 수지와 함께 걷는 이 하굣길이 오늘은 더 길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때 갑자기 수지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지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 내게 의심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다시 그 눈빛을 거둔다. 그리고 잠시 후, 수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지혁아.”

“으, 응?”

나는 또 다시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지는 이어서 말했다.

“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 하고 싶은 말?”

“그러니까 내일 저녁 9시에 공원으로 나와 줘.”

“…아, 으, 으응.”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우리 둘만 있을 때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말인 걸까. 혹시, 고백 같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수지 같은 애가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자 우리 집 바로 앞이었다. 나는 수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집 쪽으로 발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다음날 공원에 가지 못했다.

사실 이것은 한 달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다. 이 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장면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혀있을 뿐, 전체적인 기억은 마치 누가 지우개로 깔끔하게 지워버린 것 같다. 그래도 떠오르는 장면을 조합해보자면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나는 괜히 무서워졌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 집이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말했건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평소에는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다녀왔니?”하고 말씀해주셨다. 집에 아무도 없나 싶은 생각이 든 나는 이상하다가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안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가족들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나는 방금 인기척이 느껴졌던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닫혀있는 안방 문을 열었다.

나는 ‘그 현장’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

거기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으로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두려움만 남았다.

내 등 뒤에서 또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 인기척을 느끼고 등 뒤를 돌아보자마자, 내 가슴에 정확히 박히는 칼. 나는 어떠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다리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어 쓰러지고 만다. 흔들리는 시야. 아찔한 정신.

하지만 그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절대로 잊지 못할 단 한 가지가 있다.

그때 웃고 있던 그 남자의 눈빛. 순수한 흥미만으로 가득 찬 눈빛은 공포와 증오로 가득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칼을 다시 내 가슴에서 빼내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그의 얼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웃음을 똑똑히 지켜보면서 소름이 끼칠 듯한 충격을 받은 채로, 뒤늦게 다가온 극심한 고통 때문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원래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부상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틀 뒤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깨어났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그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며 경찰에 신고한 옆집 아주머니 덕분에 나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퇴원할 때까지 나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계속 누워있기만 했다. 그 사건을 겪고 나서 내 마음에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에 휘날리며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는 창밖의 단풍잎, TV 속에서 깔깔대며 웃고 있는 개그맨, 불쌍하다며 동정하는 시선을 담은 속삭임, 그 모두가 마치 거울에 반사되는 빛처럼 내게서 튕겨나갔다.

자신과 헤어진 직후에 칼에 찔려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들은 수지도 나에게 병문안을 왔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나를 본 수지는 그 모습에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미안해.”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떠나는 수지를 잡지 않았다.

그렇게 공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어느 날부턴가 한 모르는 소녀가 매일매일 병문안을 와주었다. 그 소녀는 매일 저녁쯤에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침대 옆에 서 있다가 면회 시간이 끝나면 떠났다.

처음 며칠간 나는 소녀를 무시했지만, 매일 나를 찾아오는 그 소녀에게 결국 흥미를 가지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 소녀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가 그 소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소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소녀는 결국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름이 뭔지, 날 아는 지, 혹시 전에 만난 적은 없는지, 왜 내게 병문안을 오는지 같은 이야기들을 물어봤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절대 대답해주지 않았다. 언제나 무표정했던 그 소녀는, 묵묵부답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심한 부상이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해서 입원한 지 한 달 정도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그 소녀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오늘,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나는 그곳에서 결코 울지 않았다. 울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으려나. 그건 절대로 부모님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러한 슬픔과 침통함보다도, 웃으면서 내 가슴에 칼을 찌르던, 아마 같은 표정으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슴에도 칼을 찔렀을 그 남자를 향한 증오가 내게는 훨씬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내 인생을 망친 그 남자.

나중에 알아보니 그 남자는 우리 지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피해자 수만 해도 18명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아직도 그 남자는 잡히지 않았다. 경찰에서도 인력을 총동원해서 쫓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 같다. 이대로는 아마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게 분명하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웃는 얼굴로 칼을 꽂아 넣던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그 남자의 손에 죽어버렸을 열여덟 명의 사람들을 대신해 복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내 앞에, 매일 병문안을 와주었던 소녀가 나타났다.

나는 소녀를 보고 왠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동안 그 소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내심 아쉽기라도 했던 걸까. 나는 소녀에게 나를 왜 찾아왔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대답으로 내 가슴에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칼이 박혔던 그 자리 바로 옆에 명중했다. 그 주먹에 나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나는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을 떠보니 내가 있는 곳은 처음 보는 방이었다. 책장이 많이 있고, 각 책장마다 책이 가득히 꽂혀있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다.

그 테이블 양 옆에 의자 두 개. 하나에는 내가 앉아 있고, 나머지 하나에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은 버그 덩어리야.”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소녀.

말이 끝난 뒤 소녀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소녀도 역시 아무 말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소녀는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자 소녀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는 책장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더니, 까치발로 사전 하나를 꺼내 든다. 소녀는 사전을 펼치고 어떤 페이지를 찾는 듯이 마구 넘기더니 내 앞에 내려놓는다.

평범한 사전처럼 보이는데, 한 단어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동그라미 쳐진 단어는 ‘버그’인가.

나는 묻는다.

“‘버그’라는 단어의 뜻을 보라는 거야?”

소녀는 말없이 끄덕인다.

나는 사전을 본다. ‘버그’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벌레.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생기는 오류 같은 문제. 이런 건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나에게 이걸 왜 보여주는지 의아해져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윽”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삼켰지만,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아무런 말이 없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소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약간 금색 빛이 감도는 길고 부드러운 검은 머릿결, 예쁘게 반짝이는 살짝 푸른 눈, 높게 세워져 있는 코, 빨가면서도 분홍빛을 내는 입술과,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

넋이 나간채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던 소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숨겨진 세 번째 의미가 있어.”

“응?”

“이 세상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존재. 그게 바로 버그.”

여전히 소녀는 알 수 없는 말만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어찌됐든 상관이 없다. 나는 소녀에게서 떨어져서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하나의 질문을 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나를 왜 여기에 데려왔는지 알고 싶은데.”

내 말을 들은 소녀는 무표정하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버그 픽서 인사부 - 이 예 린]

다른 군더더기 없이 단 10글자만 적혀있는 심플한 명함.

정확히 신분과 이름만을 밝혀주는, 명함이라고 불리기 위한 최소한의 요소만 포함하고 있는 명함이었다.

그 명함을 내민 뒤 소녀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슬며시 떴다. 소녀는 요염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고 말했다.

“나와 같이 일하지 않겠어?”

“……뭐라고?”

나는 얼빠진 되물음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소녀는 알 수 없는 말만을 하고 있었으니까.

소녀는 예쁜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 세상은 버그 덩어리야. 이 세상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존재, 그게 바로 버그. 그런 버그를 고치는 게 버그 픽서의 역할이고. 그리고 내가 바로, 버그 픽서야.”

버그 픽서.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오류를 만들어내는 ‘버그’들을 고쳐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나에게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겠지.

“이 세상은 버그 덩어리야.”

똑같은 말을 세 번째로 하는 소녀. 소녀는 이어서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들이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들. 쉬운 예를 들자면, 네가 복수하려고 하는 그 연쇄살인범 같은 존재. 그런 존재들 모두가 바로 버그지.”

소녀의 입에서 나온 ‘복수’와 ‘연쇄살인범’이라는 말에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진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소녀에게 묻는다.

“왜 하필 나지?”

이렇게 묻자 소녀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너에게는 능력이 있어.”

“나는 싸움도 잘 못하는데.”

“그래도 너에게는 증오가 있지.”

소녀의 입에서 나온 ‘증오’라는 말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결국은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만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세게 고동친다.

나에게는 증오가 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소녀가 나의 일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치 않다. 매일 병문안에 와서 나를 관찰하고 다짜고짜 나를 주먹으로 쓰러뜨려 이런 곳에까지 데려올 정도면 그 전부터 미행을 했다고 해도 충분히 이상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나는 그 남자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중요한 건 하나 뿐이었다.

“만약 내가 그 권유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 남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소녀는 조금도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나 소녀는 뒤이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버그 픽서가 된다면 절대로 개인적인 복수심에 빠져서는 안 돼. 구체적으로는, 웬만해선 버그들을 죽일 수 없어.”

“…….”

“우리는 버그 킬러가 아니야. 버그 픽서. 어디까지나 버그들을 고쳐가는 사람들일 뿐. 버그들을 죽이는 건 권한 밖의 일.”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소녀의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정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잡아서, 경찰서에라도 보내면 내 역할은 끝나는 건가?”

“…….”

“그 남자는, 우리 가족을, 다른 사람들을, 몇이나 죽였는데!”

난 왜 화를 내고 있을까. 이것은 소녀에 대한 분노인 걸까, 혹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인 걸까.

“…….”

“왜 그런 놈을 살려놔야 하는 건데!”

“……그건 우리의 권한이 아니니까.”

조금은 딱하다는 듯한, 또 조금은 슬프다는 듯한, 그리고 조금은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녀. 그 목소리는 살짝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다, 사실 이건 내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화를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다시 입을 연 소녀의 낮은 목소리가 채워진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누군가를 그리는 듯한 눈빛과 함께 조용한 목소리로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소녀를 향해서 물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남자를 죽이지도 않는다면…….”

“그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을 수 있겠지. 너는 지금의 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억울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생기지 않겠지. 그럼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 아닌가?”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버그 픽서가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지금의 나처럼 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억울하게 죽고 마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도 충분히 큰 의미를 가진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옳은 말이고, 또 옳은 일이다.

버그 픽서는 이 세상에 오류를 일으키는 버그를 고치는 사람들이라고, 소녀는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들이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들을 고쳐나가는 그런 일을 한다고도 말했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이라고 말해도 과장은 아니겠지.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나여야 할까? 나보다 싸움을 더 잘하거나 머리가 더 좋은 사람도 많이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이 일에 더 적임이 아닐까? 아까도 소녀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지만 소녀는 나에게 ‘증오’가 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증오, 그것 하나만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일까.

이 일을 받아들일 것인가―다시 말해, 버그 픽서가 되어야 할까 하는 고민에 깊게 빠져있던 나의 옆으로 소녀가 걸어왔다.

소녀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참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부탁해.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은 할 필요 없어.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다면 충분해. 그러니까 꼭 버그 픽서가 되어줘.”

소녀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여전히 살짝 푸르고 예쁘게 반짝였다. 소녀는 마치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이끌려 버렸던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눈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 할게.”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의 대답을 들은 소녀는 오히려 깨물고 있던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소녀는 눈을 피하고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나서야 말했다.

“그럼 따라와.”

소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소녀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나는 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소녀의 뒤를 쫓아가려고 일어났다. 내 첫 발이 땅에 닿았을 때쯤, 소녀는 “아”하고 말하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잠깐, 앞으로는 나를 ‘예린 선배’라고 불러.”

이 말만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 소녀, 아니, 예린 선배. 나는 우선 조금 놀라서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멈춰 서 있었고, 다음으로는 부끄러워져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예린 선배.”

예린 선배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서 말했다.

“당연히, 선배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

다시 한 번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알겠습니다, 예린 선배.”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앞이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두운 긴 복도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예린 선배(너무 길고 불편하니 혼자서 생각할 때는 ‘예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는 나보다 나이가 어릴 것이다. 생긴 모습만 놓고 봤을 때에는 한 15살 정도 된 것 같아 보이니까. 이렇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다.

키는 140~150cm 정도. 또래 아이들 중에서도 작은 편이 아닐까. 몸매는 적당하게 날씬하다. 그리고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찰랑대며 흔들린다. 솔직히 말해서 첫눈에 반해버릴 것만 같이 아름다웠다.

내 병문안을 왔을 때는 무표정한 얼굴만을 보여줬는데, 이곳에서는 다른 표정들을 많이 본 것 같다. 물론 기본 베이스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말이지. 게다가 말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처음 들은 예린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알토 보이스였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음에도 3분 정도 걸려서 겨우 그 긴 복도의 끝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환하게 빛이 나오는 방이 하나 있었다. 예린은 옆에 있는 카드 인식기에 카드를 찍었고,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예린을 따라 나도 들어갔다. 눈이 부셔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 방에는 큰 책상 하나와 책장 몇 개, 그리고 의자 하나가 있다. 아까 전 우리가 있었던 방을 절반 정도로 축소해놓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의자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그의 책상 앞에 서자 그는 의자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카리스마 넘쳐 보이는, 어딘가 조금 무서워지는 눈빛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일까. 살짝 노랗게 물들인 듯 오묘한 색깔을 내는 머리카락과 날카로워 보이는 그 얼굴에 나는 다시 한 번 무서워졌다. 그 남자는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씩 웃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입을 열고 말했다.

“어머나, 이제 온 거야, 예린 언니?”

어, 언니? 이렇게 험상궂게 생긴 사람의 입에서, 언니라고?

“저번주에는 할머니라고 부르더니 오늘은 언니입니까.”

“왜? 재밌으면 된 거지, 뭐, 헤헤. 참고로 저저번주는 오빠, 또 그 전 주는 누나였지.”

“당하는 당사자는 재미가 없으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 그래. 알겠어. 이제부터는 여동생이라고 불러줄게.”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뭐, 그건 대충 넘어가고, 그나저나 결국 저 애를 데려왔네?”

갑자기 대화의 포커스가 나로 넘어왔다. 게다가 저 말투는 이미 내가 누군지를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남자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 저, 저는, 신지혁, 이라고 합니다. 고, 고등학교 1학년, 입니다.”

신분과 이름, 단 두 가지만 밝힌 자기소개였다. 그러고 보면 예린이 준 명함도 그랬지.

“아항~ 그래~?”

나는 예린이 준 명함을 보고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는데, 이 남자는 나와 달랐다. 나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짧은 자기소개만으로 모든 걸 이해한 것 같았다.

날 보던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반가워. 나는 버그 픽서 정보수집부 마스터, 차성운라고 해.”

마스터.

단어 하나일 뿐인데,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져 오는 것만 같다.

이 남자도 예린의 명함이나 나의 자기소개처럼 신분과 이름만을 밝혔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는 걸까. 우리는 상대를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마스터’라는 세 글자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차성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내가 범접할 수 없을 만한 존재가 아닐까.

“저, 마스터가 뭔가요?”

나는 이런 생각을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라? 내 여동생한테 설명 못 들었어?”

“정말로 여동생 취급입니까…….”

예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차성운을 째려보고는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버그 픽서들은 다섯 개의 부서로 나뉘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어. 나는 인사부, 이 남자는 정보수집부. 각 부서에 속한 버그 픽서들은 자신이 속한 부서의 마스터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해.”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예린이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어서 말했다.

“마스터는 다른 버그 픽서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기 자신은 명령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팀장 같은 건가요?”

“뭐, 비슷해.”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나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아마도 나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겠지.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뭐, 비슷행~”하며 예린을 놀리고 있는 저 사람이 말이야.

“그런 말투로 따라하지 말아주세요.”

“왜? 재밌으면 된 거지, 뭐, 하하.”

“그러니까 당하는 당사자는 재미가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걸까. 예린은 큰 한숨을 쉬며 “에휴, 됐습니다.”하고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런 사람이 한편으로는 어렵지 않게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 무서워졌다. 꼭 죽이는 게 아니더라도 저 남자는 정보수집부의 마스터니까 아마도 저 남자가 명령만 내리면 정보수집부의 인원을 총동원해서 내가 하루에 눈을 몇 번 깜빡이는지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억지미소를 짓고 있자니, 차성운은 내게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아, 맞아, 오빠.”

“오, 오빠?!”

으으, 이거 실제로 당하니까 정말로 기분 나쁘다.

“응, 오빠. 오빠, 저기, 여기 올 때 복도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길지 않았어?”

순간적으로 내가 ‘오빠’라는 설정이라면 반말을 써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는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또 다시 억지미소를 짓고 “그, 그랬죠.”하고 대답했다.

그런 나에게 차성운은 살짝 웃음 지은 뒤 말했다.

“거기 벽은 말이야. 전부 다 서버 컴퓨터로 채워져 있어.”

“……저, 전부 다요?”

그 긴 복도 벽면 전체가 컴퓨터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아마 거기에는 정보수집부에서 수집한 정보들이 모여 있겠지. 어쩌면 내가 하루에 눈을 몇 번 깜빡이는지도 이미 다 들어있을지 모른다.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본건지, 차성운은 다시 살짝 웃음 짓고 말했다.

“각 개인에 대한 정보나, 전 세계 국가들의 기밀 사항들, 게다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우리는 알고 있어, 오빠.”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 이라고요?”

“응, 미래에 일어날 일. 다시 말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우리는 알고 있어. 미래에 가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서, 많은 걸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미래에 가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여전히 턱을 괴고 앉아있는 차성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어서 말했다.

“우리 정보수집부에, 자기 마음대로 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버그 픽서가 있거든. 아니, 버그라고 해야 하려나?”

그 말에, 아까 전 예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 세상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존재.’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들이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존재들이 ‘버그’라고, 예린은 말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들. 말 그대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들. 그들이 바로 ‘버그’다.

과거나 미래로 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이런 저런 일들을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과거나 미래를 바꾸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아니, 시간여행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충분히 세상은 떠들썩해지겠지.

이런 세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그런 버그들을 고치는 것, 그것이 바로 버그 픽서가 하는 일― 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믿기 힘든 게 사실이다.

“‘버그’는 소위 말하는 초능력 같은 거야. 방금 말한 것처럼 시간을 이동하는 버그, 다른 사람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숨는 버그, 심지어는 절대로 죽지 않는 버그도 있어, 오빠.”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는지 차성운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여전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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