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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귀엽지 않은 그녀들
글쓴이: 미소녀관능소설…
작성일: 12-07-23 16:38 조회: 2,718 추천: 0 비추천: 0

나의 귀엽지 않은 그녀들

프롤로그 라기 보단 넋두리 혹은 잡설





다른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녀석은 결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째서인 지 ‘나의 꿈’이란 제목의 작문을 해 본 경험은 꽤나 흔한 편이다.

“웃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써 보세요.”

여자에 대한 저항력이 낮았던 나는 왕 가슴에 정장이라는 반칙성 장비를 장착하고 있던 여선생님의 색기 공격에 완벽하리만치 홀려 있었고, 정말로 진짜로 한 치의 거짓 없이 작문을 완성했다.

물론 거기에서 끝났다면 망상으로 물든 청춘의 한 페이지 정도로 남는 수준이었겠지만 왕가슴에 정장에 보조 무기로 검정색 스타킹까지 장비하고 있던 여선생님은 공격 마법을 영창했다.

발표할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라는 말에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들어버린 바보가 있었다.

그 결과, 몇몇 아이들에게는 존경의 시선을 받게 되었고, 선생님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아이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웃을 것 까진 없잖아! 같은 생각을 지금에 와서야 해 보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로 진지했다.

슬슬 교사니, 변호사니 하는 그런 사자 돌림의 전문직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된 거겠지만 그때의 나는 농담이나 망상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기사’가 되고 싶었다.

물론 버스기사나 택시기사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기사 말이다. 그러니까, 성검을 들고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런 기사. 드래곤과 맞서고 수만의 대군을 기세만으로 제압하는 그런 기사가 되고 싶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해서 ‘기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이라는 녀석은 만만하지가 않았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가 기사작위를 하사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는 소설을 써 본적도 있었지만, 진짜 기사라기 보다는 단순한 명예직이었다.

무엇보다, 만약 기사가 된다고 해서 지켜야 할 공주나 맞서 싸울 적이 냅다 튀어 나와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나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기사는 소설이나 만화에만 나오는 망상속의 존재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기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현실적인 의견을 설명해 준 어른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진실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 기사는 존재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기 직전이라는 애매한 시기에 나는 기사와 만났다. 아니, 만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내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내가 기사를 동경하는 것도 설명은 됐으려나?

버스 사고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구조되었고 나 홀로 남겨진 상황이었다. 언제 버스가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 구조를 바랄 수조차 없었다.

주마등 비슷한 것까지 봤다.

그때 나는 들었다.

구하러 왔다는 외침을.

순백의 갑옷.

빛나는 성검.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의 기사가 나를 구하러 와 준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침대 위였다.

그때부터 거의 1년간. 나는 기사가 되기 위해 수많은 기행을 벌이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잊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분명 유독 가스를 잔뜩 먹어 헛것을 본 거고. 나를 구해준 것은 용감한 구조대 아저씨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갈구하며 최대한 평범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기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고등학교에 평범하게 진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이 된 내 앞에.

‘진짜’ 공주님이 나타났다.

(1)




“여울군. 사람은 말이에요. 절대 꿈을 버려서는 안 돼요.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아버지는 그 말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꿈이 있기에 인간은 이렇게나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바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 졌다고 망상하세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간다면……. 분명 꿈은 이루어 질 겁니다.”

그런 말을 하며 아버지는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미소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벤트 CG는 있지만 엔딩 CG는 없음. 애초에 공략 루트가 없어 아무리 호감도를 올려봐야 나오는 거라곤 배드엔딩 뿐인 존재 그 자체가 함정인 여장남자 캐릭터를 공략하고 있었다.

물론 결과는 모두 실패.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수십번이 넘는 재 플레이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이벤트를 다 거치고, 호감도를 MAX로 올려 도달한 엔딩이 사실 녀석에게 달려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니, 배드 엔딩도 그만한 배드 엔딩이 없다.

제작자에게 분노를 넘어 경이마저 느낄 아스트랄한 전개였지만 그런 설정에 매력을 느낀 변태들이 이 세상에는 제법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인터넷에서 사족이 달려있는 녀석의 팬들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의기투합하여 팬클럽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열광적으로 동인지며 팬픽이며 pv같은 것들을 잔뜩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고 코믹에 참석하는 등 팬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달려있는 녀석의 지지율이 게임의 진히로인 마저 압도할 정도로 폭등하는 것이 아닌가. 캐릭터 싱글의 판매량이 원작 판매량을 앞지르는 것이 계기였을까.

제작사에서 달려 있는 녀석의 엔딩을 추가한 후속작을 발표했다.

결국 아버지가 해낸 것이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가슴을 쭈욱 하고 펴고있는 아버지를 향해 나는 정말로…….

죽빵을 갈겼다.

“이보셔요. 당신.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요새 환율이 얼마인데 일본 여행이세요? 게다가 그것까지는 그냥 넘어 간다고 칩시다. 저기 상자 안에 잔뜩 쌓여 있는 것들은 원반 던지기라도 하시려고요?”

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크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게다가 명백하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 자, 잠깐만요. 여울군! 저것들은 그냥 평범한 원반이 아닙니다? 캐릭터 CD라구요? 초회 한정판이라구요? 곧 가격이 무지막지하게 뛸 거라니까요? 어디까지나 아버지는! 재테크의 일환으로…….”

“그럼 지금 당장 팔아 왓!”

“……여울군. 아버지는 여울군을 그렇게 돈만 아는 수전노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인생에는 말이지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잔뜩 있답니다. 자아, 함께 인생의 보물을 찾으러 가요!”

“그것보다 일단 직업부터 찾아주시는게 어떻습니까? 이 32세 무직아!”

순간 조금은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32세 무직 필터를 거치자 무지하게 한심한 말이었다.

예를 들어서.

[인생의 보물을 찾아 보자] (32세 무직)

보물 이전에 다른 것부터 찾아 주세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32세 무직)

아, 예. 불가능 말고도 다른 단어들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따님이 참 귀여우시네요.](32세 무직)

……이쯤되면 한심함을 넘어 변태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무직’이 아니다. 일단은 ‘서브컬쳐 연구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이상한 직업이 맞다.

말이 연구가지 밤새 미소녀 잡지를 읽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피규어를 만들고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해가 뜨면 골아 떨어지는 말 그대로 폐인이다.

나아질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차라리 무직이 낫다.

그런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지친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그 빈자리는 그대로 내게 물려졌다. 덤으로 적자 투성이의 가계부도 함께였다.

수입 거의 없음. 지출 매우 많음.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여울군? 아버지는 식탁에 대한 녹화정책 폐지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지는데요? 아버지는 초식 동물이 아닙니다?”

“닥쳐. 누구 때문인데.”

이 정도 대화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이 고스로리 드레스를 봐줘. 어때.”

“……크고 아름답습니다. 가 아니라. 갑자기 웬 드레스. 어디 숨겨둔 딸내미라도 있어요?”

“여울군의 입학선물☆”

"……어째서 드레스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지금 내가 교복 살 돈이 부족해서 직접 만들고 있는 거 안 보이니까, 이 양반아아아아아앗! 당장 환불해왓!“

슬슬 폐륜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걱정으로 안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결심했다.

고등학교에서만은 오덕과는 관계없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자고.

그것을 위해 그리 짧지만은 않은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 사이의 2주 남짓한 시간을 통째로 투자했고.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결전의 날이 밝았다.

무엇이든 처음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그저 아이가 걸었을 뿐인 첫 걸음마에 부모님은 눈물을 흘린다. 매년 겨울이면 지겹게 내리는 눈도 첫눈이면 TV에까지 나올 정도가 된다. 첫키스쯤 되면 일생일대의 이벤트라고 불릴 정도다.

그리고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바로 첫인상.

그래. 첫인상이다. 모범생과 양아치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이자, 고등학교 3년을 좌지우지 할 최우선 사항.

요는 분위기다. 어떻게 해서든 저 녀석,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한 분위기를 뿜어낼 수 있다면 내 목표는 이루어 진 거나 다름없다.

국가 연금술사의 증표라며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회중시계는 평범한 손목시계로. 한쪽만 컬러라 사용하면 오드아이가 될 수 있는 렌즈는 평범한 무테 안경으로. 요정안이 발동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안대는 평범한 헤드셋으로. 모 암살자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존재의 죽음을 자르는 단도는 평범하게 귀여운 키홀더로 대체했다. 그 외에도 오덕들이 반응 할 것 같은 물건들은 전부 모아 폐기처분.

그것에 소요된 지출만 197,420원. 가슴 아픈 지출이지만, 평범한 고교 생활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말투를 바꾸는 데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일단 귀여운 척 금지. 의성어를 소리내어 말하는 것도 금지. 애니의 명대사를 외치는 것도 금지.

아무튼 금지. 금지. 또 금지.

일주일의 철저한 마인드 컨트롤 끝에 학교에 갈 때마다 ‘한여울 발진합니다.’하고 외치는 것도 그만 둘 수 있었다.

평범하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본 아버지가 울면서 이래서 자식 놈 키워 봐야 헛수고라고 한탄했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기로 했다.

아버지에게는 벌로 3일 동안 콩나물 밥, 콩나물 무침, 콩나물 국이라는 콩나물 3종 세트로 복수해 주기로 하자.

입학식이 끝난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교실 안에는 벌써 파티를 구한 녀석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는데, 중간 중간 비슷한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 역시………… 페이트……………….”

“……………………최종………………. 모에가……………………. ………………우승을…………………….”

“………………니니……………………천사…………………….”

워낙에 교실이 시끄러웠으므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에 들어오는 것은 기껏해야 단어 몇 개 정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무엇에 대한 대화인지. 그리고 화자의 취향까지 알 수 있으니 무서울 정도다.

대단하군, 오덕토크.

지난 이주일간의 철저한 특훈이 없었다면 나도 저 사이에 끼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오덕 토크를 하고 있던 녀석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

이럴수가. 설마하니 무슨 냄새를 맡은 건가? 내 위장은 완벽했을 텐데……!

설마, 오덕들의 체내에 존재한다는 동류를 간파하는 오덕센서라도 발동했단 말인가.

“저기……. 갑자기 미안한데. 나는 루리웹에서 활동하는 폭룡왕이라고 하거든. 혹시 루리웹이라고 알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내 정체가 간파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저것은 오덕들이 동류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흔한 떠보기다.

이 정도의 미끼를 물 정도로 내 결심은 만만하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6시간 동안 거울을 보며 연습한 표정이다. 그리고는 말했다.

“……루리웹?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런 떠보기 류의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결코 단순하게 부정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그 자리에서는 넘어 갈 수 있어도 그 단어에 반응 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때부터 오덕들의 집중 마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폭룡왕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 몰라? 그럼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 찾아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아, 네.

“아 미안. 지금 저승사자가 불러서 이만 가 볼게. 그럼.”

죽으러 가십니까.

근처에 소환사가 있었던 것일까. 갑자기 소환 되었던 폭룡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건 그렇고 닉네임이 저승사자인가. 생각 해 보니 무섭구만.

계획대로였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들도 모를 정도로 낮게 웃었다. 나를 감지해 낸 폭룡왕의 오덕 센스의 능력은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 맞서 승리했다.

그래. 이렇게만 하자.

그렇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 졌다. 그리고는 드륵 하고 앞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담임 선생님인가 보다. 고등학생이 담임 선생님의 출입을 간파하는 능력은 대분분 미래예지 수준이니까.

학교 지정 수영복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 아쉬운 감이 드는 체육복에 두꺼운 안경을 낀 20대 중후반 정도의 여자였다.

“자아. 여러분. 조용히 자리에 앉으세요.”

약간 혀가 짧은 것인지 발음이 미묘한 목소리로 말한 선생님은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과 1년 동안 함께 지낼 2반의 담임인 홍호진 이라고 합니다. 담당 과목은 테ㄹ……, 가 아니라 테육입니다. 여러분과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체육계 답게 짧은 머리 사이로 얼핏 보인 귀가 완벽하리만치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40명의 시선을 받는 것이 수줍은지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여, 여러푼!”

어째서인지 쾅 하고 교탁을 내려치는 선생님.

“제가 담임으로서 한마디만 하겠어요!”

어째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데는 항상 책상을 내리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홍호진 선생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외쳤다.

“여러푼은 이제부터 고등학생입니다아아아아!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평생 후회하지 않을 멋진 추억을 잔뜩 만들어 보자구요!”

처음 영원고에 배정되었을 때는 완벽하게 꽝을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립고라 등록금이며 교복이며 기타 등등이 근처 다른 국립의 2배 이상이었고,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신설고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확인 해 본 결과는 식당이니 체육관이니 기타 등등이 아예 덜 지어져 있었던 데다가 걸어서 다니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라 3년간 교통비와 도시락이라는 가슴아픈 추가 지출까지 덤으로 따라올 것이 확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입학식까지 마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영원고는 제법 괜찮은 학교였다.

우선 워낙 집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같은 중학교 출신이 없었으므로, 오덕으로 물든 내 흑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고. 무엇보다도 남자반 여자반으로 나뉘어있어 무늬만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와는 달리 한 반에 남자와 여자가 같이 수업을 듣는 완전체였던 것이다.

브, 브라보……!

어쩌면 내 고교생활에는 평온함 뿐 아니라 장미내음 물씬 풍기는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떠오르는데.

1학년 2반 교실에서는 한창 자기소개가 진행되고 있었다.

선생님이 번호를 부르면 일어서서 이름과 출신 학교, 취미 정도를 간단하게 말하면 끝나는 심플한 녀석이었다.

나를 포함해 우중충 한 남자 녀석들의 소개가 끝나고 이제는 여자들의 턴!

“그럼 니십 이번~”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아이가 일어났다.

짧은 단발머리에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는 얌전할 것 같은 소녀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평범한 남자에는 관심 없습니다. 이 중에 BL, 야오이를 좋아하거나 호모이신 분은 저에게 오십시오. 이상.”

“…….”

광속 커밍아웃 입니까?!

게다가 제일 중요한 이름이랑 출신학교도 빼먹었어?!

설마하니 학군에 포함되지 못한 기타중 출신의 수준이하 씨라도 된다는 거냐.

게다가 원작 지향이 아니라 오리지널 파였다.

어쨌거나 수준이하 씨의 선언은 금세 끝났고. 몇몇 소녀들의 눈동자가 이상하리만치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동료를 찾으려는 것이라면 수준이하 씨의 목적은 성공한 듯 싶다. 눈을 빛내고 있는 녀석들 중에 남자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하자.

‘우리 반에 호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라니.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말이지.

“아하하……. 참 독특한 자기 소개네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이름이 듣고 싶은데 말이지요. 그런데 BL이나 야오이랑 호모가 무슨 뜻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우후……. 우후후후후……. 그럼요.”

웃고있어! 수준이하 씨, 웃고 있어! 선생님 도망가세요! 그대로 있다가는 학생과 선생님이 진지하게 남남 커플링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구요!

……상상했다. 학문적으로든 항문적으로든 어쨌거나 참으로 부도덕적인 장면이었다.

“그럼 다음은 23번이네요.”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준이하 씨의 커밍아웃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지나가던 마법사가 침묵 마법이라도 외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기소개에 앞서 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나는 교실 쪽 자리의 뒤에서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뒷자리는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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