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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왕이라 미안합니다.
글쓴이: 이클립트
작성일: 12-07-22 21:13 조회: 2,230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이 아스포리아 대륙에는 '마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둠과, 모든 마물들의 정점에 서서 지배하는 존재.
언제인지 모를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을 비롯한 모든 빛의 존재들과 적대해온 이들.
그들은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빛을 대륙에서 지워버리려고 했었다. 어떤 때는 직접 공격으로, 어떤 때는 '빛'의 세력들 사이를 이간시키는 계략으로, 또 어떤 때에는 양쪽 모두를 혼합한 방법으로.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마왕들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빛의 존재들은 멸망하지도 굴복하지도 않았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인간들에게는 그들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마왕을 비롯한 마족들을 쓰러트리고, 빛을 지키는 이들.
인류에게는 구원과 희망을, 인류의 적에게는 절망과 파멸을 선사하는 존재들.
인류는, 그런 그들을 '용사'라고 칭했다.


"이곳인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마왕 중 하나가 살고 있다는 성이."


용사 듀크 프레이크는 굳은 얼굴로 눈앞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처럼 구름이 몰려든 밤, 어둠의 성은 내려치는 벼락을 배경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랬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저 마른 고목 위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라도 붙을 것처럼……


─쿠르릉, 콰아앙!


"…… 이 아니라 진짜로 불 붙었어?!"


벼락이 떨어진 고목에는 불이 붙었고 곧바로 그 옆에 있는 건물까지 옮겨갔다.
다행히도 옮겨간 건물 자체가 홀로 뚝 떨어져있었던데다 워낙에 낡아빠졌던 터라 그 건물만 전소되는 것으로 큰 화재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 아니, 어차피 마왕의 성이니까 화재가 나든 말든 별로 다행도 아니고 상관도 없지만.


'벼락 자주치는 지역에 성 세워놓고 낙뢰 대책도 안세워놓은건가…….'


한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용사는 이윽고 머리를 털어 정신을 제대로 차렸다.
어떤 괴이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용사'.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퇴치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용사는 이곳까지 자신과 함께 와준 동료들을 돌아본다.
왕국의 기사단장 자리를 마다하고 와준 전사.
젊은 나이에 현자라고 칭해지는 대륙 굴지의 대마법사 여인.
성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정의의 신의 대신관.
도적임에도 정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대도.
자신의 모험을 지켜보고 도와준 엘프 음유시인.
힘든 일들도 많았고, 몇번이나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기까지 함께 와주었다.
동료들이 함께 있는 한, 자신은 올바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용사의 힘. 용사로서 걸어야할 길.
사람들을 규합하는 의지야말로, 진정한 용사의 조건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료가 있으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다.
동료들의 힘은 동료들의 힘이고, 용사 자신의 힘 역시 동료들에게 어울릴 정도가 아니면 안된다. 실제로 듀크 프레이크는 단신으로 악룡을 쓰러트리고 왕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적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 용사에, 동료들의 힘이 더해지면 할 수 없는 것따윈 없다.
하물며 어둠을 물리치고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
그렇기에, 듀크는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기며 마왕성의 문을 두드린다.
…… 손을 대는 순간, 금속제 성문의 녹슬대로 녹슨 이음쇠가 부서지더니 그대로 넘어가버렸지만.


"……."
"……."
"……."
"…… 들어갈까."


용사의 허망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렸다.
성문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니 도대체 청소를 언제한건지 알 수 없을만큼 엉망진창이 된 '한때 도로였던 돌멩이 집합체'가, 허리께까지 높이 자란 잡초들 틈 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한때 도로였던(생략)'의 양쪽에는, 날개가 달린 반인반조(鳥)의 형상을 한 석상들이 놓여져있었다.


"틀림없네. 가고일들이야."


대신관이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한다.
가고일이라고 하면 석상에 마법을 걸어 움직이게 만든, 골렘과 같은 종류의 마법 몬스터.
본래는 신과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신전'을 지키는 것이 주 임무였지만, 타락하여 어둠의 길로 떨어진 석상들.
과연 마왕의 성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몬스터들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 '정상적인 가고일'이라면, 의 이야기지만.


"…… 이것들, 움직일 수는 있는건가?"
"…… 무리일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전사와 마법사의 대화처럼, 눈앞에 있는 가고일들은 전부 비바람에 맞아 풍화되어 가루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본래 이런 마법 몬스터는 관리만 잘해주면 반영구적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인데 이런 꼴. 아니, 관리를 하긴 한걸까.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뒤를 보니, 원래라면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 스톤 골렘들조차도 비바람에 깎여 처량하기 그지없는 포즈로 바뀐데다 그나마 박살나기 직전이라 움직이는 것은 도저히 무리로 보였다.
그야 뭐, 머리가 떨어지고 팔이 떨어진 상태라면 골렘이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겠지만.


"방심하지 않도록 하게. 이곳은 사악의 지배자 중 하나인 마왕의 성. 이것 역시 어떤 함정일지 모르니."


그때, 대신관의 말이 흐트러지려는 일행의 마음을 다잡았다.
확실히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은 다른 존재도 아닌 '마왕'의 성. 보통의 던전과는 궤를 달리 하는 곳이다.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대륙의 모든 어둠을 지배하며 인류를 비롯한 '빛'의 존재들을 위협해온 불멸의 악. 그 중 하나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분류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그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 우리들을 방심시켜 함정에 빠트리려는 마왕의 술책이 틀림없─"


듀크가 소리높여 외치는 순간.
성벽의 일부가 투둑거리며 흔들리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요컨대, '소리 좀 질렀다고 무너져버렸네'라는 상황인 것이다.


"……."
"…… 어, 어서 들어가도록 하지……."


대신관은 당황하면서도 용사의 말을 엿먹으라는 듯이 끊어버린 성벽을 황망하게 지켜보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용사와 일행들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관에 도착했다.


"…… 이번엔 내가."


일행 중 전사가 용감하게 앞장섰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고, 만약 함정이 있다면 자신이 동료들의 방패가 될 셈이었다. 어떤 함정이든 즉사만 당하지 않으면 뒤의 대신관이 얼마든지 살려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전사는 현관문에 손을 댔다.
하지만, 거기서 끝. 전사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뭐하는거야, 열지 않고?"


현관문에 손을 댄 채로 굳어버린 전사를 보며, 도둑이 초조한 듯이 말을 걸었다.
설마하니 만지면 석화되버리는 저주라도 걸려있었던 걸까. 일행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전사가 움직였다.


"뭔가가 있는거야?"
"…… 직접 보면 알아."


전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볍게 현관문을 쳤다.
─펄럭.


"……."
"……."
"……."
"이거, 색칠 잘해서 철문으로 보이긴 하는데…… 나무껍질 기워서 만든 거야."
"…… 마왕성 현관문이, 나무껍질……."


유감스럽게도 전사의 뒤늦은 발언은 일행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했고, 용사 일행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약 수십분 뒤.
간신히 혼란을 수습한 일행은 '무언가 대단히 정성이 들어간 나무껍질 현관문'을 정중히 열고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휑하기 그지없는 마왕성의 내부가 드러났다.
다름아닌 '마왕성'이니까 뭔가 음산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지나치게 추웠다. 아니, 썰렁하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하다.


"…… 뭔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지 않아?"


그랬다. 없었다. 아무것도.
그 흔한 샹들리에나 카펫같은 장식물은 커녕, 기본적으로 놓여있어야할 물건들도 없다. 이를테면 계단의 난간이라거나 커튼이라거나 창문이라거나.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 아니, 잠깐.


"기다려. 여기 뭔가 있는데."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도둑은 잽싸게 달려가 그것을 살펴본다.
하여간 누가 도둑 아니랄까봐 등등의 생각을 하던 일행은 그의 뒤를 따라 그것을 함께 살폈다.
발견한 것은 작은 종이 쪽지.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물건은 압류물품이므로 이를 처분 또는 은닉하거나 이 압류표를 훼손하면(중략)>


…… 에, 그러니까 이건…….

"…… 압류딱지……?"


그렇다. 흔히 세상에서 그렇게 부르는 물건. 채무를 지고 그것을 갚지 못했을 때 보게 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것을 사용하는 기관도 많고 이것이 붙는 집도 꽤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로 '여기'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다. 적어도 '이런 장소'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마왕성에 도대체 이런 게 왜 있는거냐고오오오오오오!!"


용사의 절규가, 마왕성을 뒤흔들었다.

챕터 1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마왕


『나는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어둠의 옥좌에 앉아있는 마왕은, 그 악명에 걸맞게 공포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칠흑의 갑옷과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거대한 뿔 4개가 돋아나있었다.
등 뒤에는 어둠 그 자체가 실체화한 듯한 검은 날개 6장이 접혀져있었으며, 나를 바라보는 5개의 눈동자는 가면의 틈새 사이로 불길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나에게는 내 등뒤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동료들과, 나의 승리만을 기다리고 있는 왕국의 백성들, 그리고 나를 위해 항상 정의의 신께 기도를 한 왕녀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왕에게 검을 겨누고(중략)』


─황금의 용사 리오스 레이볼트의 자서전
‘나의 인생은 정의를 위해 바쳤다’ 581페이지에서 발췌.


"어서오세요, 주인님."
"아, 아아……."
"어딘가 불편하신가요, 주인님?"
"아니, 아무것도……."
"그럼 이쪽에 와서 앉아주세요, 주인님."


남자가 한명이고 여자가 한명인 커플 손님. 직접 말을 건 대상인 남자의 얼굴은 붉어질대로 붉어져서 건드렸다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보통 이렇게 접대할 때 남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여자 쪽에서 화를 내거나 때리던가 하는 식으로 격하게 반응하는 쪽이 일반적이지만, 유감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태까지 가진 않았다. 얼굴 붉어지고 말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여자 손님도 마찬간지니까.


"이쪽이 오늘의 메뉴가 되겠습니다, 주인님."
"그, 그럼 저는 커피……."
"아, 아아. 저도 그…… 같은 걸로."


다른 곳이라면 좀더 거리낌없이 주문하겠지만, 이곳은 어려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어째서인지 말투와 몸가짐을 똑바로 하려고 의식하게 된다고 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인님들♡"


주문을 모두 받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난다.
동시에, 두 사람이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 주, 죽는 줄 알았다……."
"아, 나도. 말 한마디 들을 때마다 소름이 화악하고 올라오더라. 등골이 오싹해질만큼 부끄러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올라왔다.
웃기지 말라고. 너희가 진짜 부끄러운 게 뭔지 알기나 하는거야? 듣는 너희들이 그 정도인데 직접 하는 나는 어떻겠냐, 제기랄.
하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욕을 퍼붓는다고 해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할 수 없다. 어찌되었건 손님은 왕이고 그 사람들이 여기에 돈을 내느냐 하는 것이 곧 내 월급이 얼마나 나오는가를 좌우하는 거니까.
어쨌거나, 개업 자체는 2년 전에 했음에도 그 동안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 나갔던 탓에' 묻혀있었지만 최근 유망한 신인들이 대거 입사하여 단번에 화제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메이드 카페 「메이드 인 헤븐」은 오늘도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다.


"아~ 아~ 지쳤다……."


하루 일과가 끝나자마자 나는 축 늘어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원래부터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이라 손님이 많긴 했지만, 오늘은 전쟁에 가까웠다. 손님들은 밀어닥치고 그 때문에 주문은 계속해서 밀리는데 주방에서는 문제가 생겨 음식은 늦게 나오고. 설상가상으로 원래 여기서 일하는 아르바이터는 전부 여섯명인데 그 중 네명이 이런저런 사유로 결석하는 바람에 나와 또다른 한명이서 죽도록 고생해야 했다.
뭐, 지금 내가 지친 이유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이유가 크지만서도.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쪽팔려 죽을 것 같다. 뭐가 '손님들한테는 무조건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쓰도록 해'냐고. 게다가 말끝마다 콧소리 붙여서 아양떨라는 건 대체 무슨 이유야.
정말로 이건 몇번을 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여어, 수고했어."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뻗어있으려니, 기쁨으로 가득한 배불뚝이 오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일하는 우리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저 인간은 아무것도 안하고 돈만 벌어들였으니 당연히 입이 귀에 걸리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뱃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오른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 저 인간과 우연히 만난 것 때문에 내가 이 망할 짓을 하고 있는 거니까.
빌어먹을, 그때 "합법적이면서도 급료 많이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있는데 해볼 생각없어?"라는 말에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덥석 물어버린 것이 문제다. 아니, 최소한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기라도 했어야 하는건데 돈이 너무 급해서 미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내 인생 최악의 실수 BEST 5위 안에 들어간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 계약서에 사인하려고 하는 과거의 나 자신을 두들겨 패서 그날 하루종일 어디 묶어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었기에 이렇게 일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너희가 들어와줘서 다행이지 뭐냐. 매상이 예전하곤 비교도 안되게 올라갔어."
"그거 다행이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추가 수당이라도 주던가. 이 배불뚝이 아저씨는 우리들덕분에 돈도 많이 버는 주제에 구두쇠라서 기본 급료 이외에는 보너스를 거의 주지 않는다.


"근데 말이에요, 아저씨."
"아저씨라니, 제대로 오너라고 불러."
"네, 네, 아저씨.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지난 3개월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한 질문이지만, 오늘도 역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애들은 괜찮다쳐도 내가 이 일 계속하는 건 문제있다고 생각안해요?"
"…… 넌 정말로 같은 질문을 매일매일하는구나."


그야, 안할 수가 있나.


"남자니까요, 저."


이제와서 무엇을 숨기리. 이 가게의 웨이트리스는 전부 여섯명인데 그 중 나 하나만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빌어먹을 계약서때문에 메이드복 입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 계약서를 이 가게랑 함께 뭉개버릴까 생각했던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내 말을 듣는 순간, 배불뚝이 아저씨는 진심으로 때려주고 싶을만큼 재수없는 웃음을 띄우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괜찮아, 괜찮아. 넌 외관도 목소리도 타고난 웨이트리스니까! 남자라는 걸 알고 있어도 내 눈으론 성별 파악이 불가능해!"


…… 그래.
사실상,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연보라빛의 머리카락에 붉은 눈. 여기까진 그렇다치자. 하지만,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는 얼굴과 체형과 체격에 목소리까지 남자라기에는 높고 여자라기에는 약간 낮은 편. 이건 상당히 심각하다.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나오기 전인 열 네살 무렵, 마을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던 인기 투표에서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1등을 차지했던 것은 아직까지도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부터 몸이 거의 성장하질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무엇보다도.


"게다가 말야. 이 일 시작한지 3개월이나 됐는데 손님들 중에서 눈치챈 사람 아무도 없잖아. 웨이트리스 중에 인기 제일 많은 것도 너고."
"말하지마! 그건 말하지마, 망할 아저씨이이이!!"


제기랄! 남자건 여자건 다들 하나같이 눈이 삐었냐! 한명 정도는 알아차려줘도 되잖아! 그럼 그거 핑계로 계약서 찢어버리고 나갈 수 있는데!
거기에 얼마 전에 했던 「인기 웨이트리스 투표☆주인님의 마음에 든 아이를 골라주세요♡」 이벤트 때 나한테 투표했던 놈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반드시 저주해줄테다, 네놈드으을!


"속으로 뭐라고 고함치고 있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그런다고 네가 여기서 일해야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1년 계약이었으니까 앞으로 9개월 남았다고. 아, 혹시 연장할 생각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연장할 것 같아?!"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몇번을 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메이드옷도 계속 입다보니 이제는 다른 사람 도움없이 혼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사실도 싫고, 손님들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아양 떨면서 말끝마다 콧소리 섞어야 된다는 것도 싫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급료는 높다는 거.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하자면 급료가 많기 때문에 이 쪽팔림과 수치심을 무릎쓰고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이다.


"뭐,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아직 일 다 안끝났는데 벌써 그렇게 뻗으면 곤란해."
"…… 뭐가요?"
"가게 청소."


…… 뭐어?!


"아니, 잠깐만! 왜 청소까지 내가 해야 되는 건데요?!"
"그야, 다른 한명은 벌써 퇴근했으니까."
"…… 그 짧은 시간에 도망친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테이블 위에 뻗지 말고 곧바로 튀었어야 되는건데!


"오늘 하루는 힘들었으니까 조금 쉬었다가 청소하도록 해. 그럼 나는 주방에 가 있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상큼발랄한 미소를 짓는 아저씨의 얼굴을 향해 테이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가끔이지만, 나 스스로도 아직 이성을 잃지 않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주방으로 사라진 후, 나는 다시 테이블 위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한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에 손을 대고 있는 몸이다. 여기 일도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고, 여기 일이 끝나는대로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하러 가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 약간이라도 숨을 돌려두는 것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삐비비비익. 삐비비비익.


"……응?"


…… 누구냐, 황금의 다음다음다음 정도로 귀중한 휴식 시간에 통신 걸어서 귀찮게 하는 놈은. 보나마나 성에서 보낸 거겠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계속 울리고 있는 통신기를 꺼내 받았다. 이 번호는 분명히…….


"뭐야, 너. 지금 내가 알바 중인 거 알면서 전화같은 걸 걸다니, 간덩이가 배밖으로──"


<용사 일행이 쳐들어왔습니다, 마왕님!>


…… 또냐. 내 기억으로는 이번 달만 들어서 벌써 세번이나 쫓아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너희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방법은 안되는거냐."
<대놓고 지금 "마왕은 나와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고 외치고 있는뎁쇼.>


아주 노리고 온 거라는 이야기군.


"알았어. 지금 갈테니까, 어떻게든 발목이라도 잡고 있어."


스켈레톤들이 부서지는거야 나중에 고치면 그만이지만, 기껏 모은 돈이 성 수리비로 털려나가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하늘이 부르고 땅이 부르고 사람이 부른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사악한 마왕을 처단하라고! 내 이름은 정의의 용사 듀크 프레이크! 백성들의 염원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용감히 검을 들어 지금 여기에……."


나는 앉아있는 의자의 손잡이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며 이제나 저제나 저 놈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저 놈이 이 알현실로 들어오기 전에 <대륙의 용사 명단>을 살펴본 결과, 듀크 프레이크라고 하면 용사들 중에서도 꽤 잘 나가는 편이라고 한다. 그레이트 데몬이 둘이나 사냥당했고, 놀라운 일이지만 레드드래곤도 한 마리 쓰러트렸다고. 일반적으로 용사 중의 절반은 입만 산 놈들이 많은데, 이쪽은 실력까지 있으니 우리 입장에선 상당히 곤란한 녀석이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도 전부 한 나라에서 이름을 떨친 녀석들 뿐이고.
덧붙여 지금의 내 모습은 '위장용'으로 변장한 상태.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뿔 4개가 장식으로 달린 투구와 장식용 날개 6장을 등에 붙인 채 의자에 앉아있다. 입는 것도 벗는 것도 번거로운 복장이지만, 용사들한테 내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하여간 저 놈이 입방아를 놀리기 시작한지 벌써 20분 째. 천정을 향해 검을 들어올린 자세로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떠들어대는 용사 놈이나 눈 한번 깜빡 않고 감격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 그 동료놈들이나 대단하다. 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저 놈들처럼 그런 걸로 대단해지고 싶은 생각따윈 눈꼽만큼도 없다. 그래서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 그러하니, 교활하고 잔혹하고 무도하며 사악한 마왕이여! 나의 정의로운 칼날이 내리는 심판 아래 무릎을 꿇어라!"
"염병하네."


그 길고 긴 일장연설을 딱 한마디로 되돌려주었다.
조금전까지 용사놈의 '열혈 정의 오오라'에 의해 따끈따끈해졌던 온도가 단번에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지금까지 일장연설을 늘어놨던 용사는 입을 뻐끔거리며 굳어있다가 간신히 분노의 표정을 띄우며 말한다.


"이, 이 사악한 마왕이 지금 나를 모욕하는거냐?!"
"지랄하네로 바꿔줄까?"


이연타.
여기까지 오니 슬슬 얼굴색이 빨개졌다 파래졌다를 반복한다. 확실히 이번에 쳐들어온 용사는 보는 것만으로 재밌는 녀석이다.
하지만 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몸, 더이상 이런 시덥잖은 일에 어울려줄 생각따윈 없다. 용사라는 인종이랑 얼굴 마주하고 보내는 1분 1초가 아까워 죽겠는 사람이라구, 나는.


"모욕이고 뭐시고, 심판받을 짓같은 거 안했는데 나는."
"발뺌하지 마라!! 네놈을 향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기에 내가 이곳에 온거다!!"


오냐, 그래. 그 말이 왜 안나오나 했다.


"그럼 정리 한번 해보자. 일단 내가 알기로 이 동네 세금은 옆 나라들이랑 비슷한 걸로 알거든?"
"……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사람을 납치하던가 산 제물을 바치라고 협박한다는 소리라도 있었냐."
"… 아니, 그런 건─"
"백성들 시켜서 강제 노역을 시키라도 한다든?"
"… 아니, 그─"
"그것도 아니면. 내가 옆 나라 침공을 했냐, 무력 시위를 했냐, 날씨 가지고 장난치면서 사람들 불안하게 만들기라도 했냐. 내가 알기론 난 지금까지 그런 적 한번도 없거든."
"아니─"
"근데 누가 무슨 원성을 어디에 찔렀는데?"
"……."
"니들, 조사는 제대로 하고 온 거 맞냐."


땡~! 1라운드 끝.
정의의 용사는 제대로 된 말 한번 못하고 입 다물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그리고 제 2라운드로 나이살 지긋하게 먹은 성직자 영감이 앞으로 나섰다.
… 뭐, 실제 나이로 따지면 내가 저 영감 두배는 많겠지만.


"그 요사스러운 입을 다물지 못할까! 도대체 어떤 괴이한 술수를 부려 이 나라 백성들과 옆 나라들을 속였는진 모르겠지만 네놈이 사악한 마왕이라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있다!"
"허, 그러셔? 증거는?"
"네가 마왕이기 때문이다! 이것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 과연. 이 영감은 좀 성가시겠는걸.
이런 '나는 옳은 길만 걸었네' 인생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상대하기 짜증난다. "나는 정의고 너는 내 편이 아니니까 너는 무조건 악이다"라고 지껄이고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혼자 납득해버리는 인간. 이런 녀석들에게는 논리고 문법이고 아무것도 안통하는데다 눈앞에 확실한 현실을 들이갖다대도 끄떡없이 자신만의 진리를 내세운다. 말을 들어야 논파를 하던가 설득을 하던가 할텐데 저런 타입은 이쪽 이야긴 아예 듣지도 않고 자기 할 소리만 지껄이니 확실히 말싸움의 상대로는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입 중 하나겠지.
뭐, 나는 저 양반 상대로 논쟁할 생각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지만서도.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무슨 헛소리냐, 간교한 마왕이여."
"별 건 아닌데, 댁같은 작자를 일일이 상대하다간 내 몸이 백개라도 과로사로 전멸할 거 뻔하거든. 그래서 댁들이 여기에 오자마자 잽싸게 연락했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디 어떤 어둠의 괴물을 준비했는지 보여봐라! 허나 이건 알아둬라! 어떤 마물이 우리를 가로막든 정의의 심판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글쎄. 이 '마물'은 좀 힘들걸.
곧이어 용사들이 부수고 들어왔던 문을 통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신고받고 왔습니다, 마왕님. 여기에 들어온 불법 침입자가 이 사람들입니까!"


푸른 색의 제복과 모자.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경봉을 손에 든 사람들.
흔히 경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마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려오자(사람만이 아니라 엘프랑 드워프에 켄타우로스같은 사람들도 섞여있었지만) 용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건 뭐야?!"
"보시다시피. 니들이 허락도 안했는데 성문 부수고 들어왔길래 경찰에 신고했는데."


아니면 내가 돌았다고 너희들의 그 기나긴 말을 들어줬겠냐. 한 귀로 흘려버리긴 했지만.
경찰들은 용사 씨와 그 일행들의 손목에 가차없이 수갑을 들이대고는 구속하기 시작했다.


"불법 가택 침입, 기물 파손, 한밤 중의 소란, 쓰레기 무단 투기, 폭행상해, 특수절도, 불법 무기 소지, 혹세무민 사기, 풍기문란, 밀렵, 도적, 위험물 반입, 그리고 명예훼손죄로 체포합니다."
"놔, 놔!! 난 용사라고! 이거 놔!"
"어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무례를!"
"타락했도다, 이 땅에 신의 광명은 없는건가!"
"무례고 광명이고 댁들 범죄자라고. 할 말이 있으면 서에 가서 해."


그리하여 마왕성에 쳐들어와(불법 가택 침입) 성문을 부수고(기물 파손) 경비로 세워놓은 몬스터들을 때려눕혀(한밤 중의 소란, 폭행상해) 하급 아이템들을 버리고(쓰레기 무단 투기) 보물 상자에서 멋대로 남의 보물 꺼낸 후(특수 절도) 내 앞까지 와서 온갖 욕을 퍼부은(명예훼손) 용사(불법 무기 소지), 성직자(사이비 종교 사기), 여마법사(풍기문란), 궁사(밀렵), 도적(현상범), 전사(위험물(이런저런 무기) 반입)의 파티는 싸그리 경찰들에게 연행되어갔다.


"…… 뭐, 이걸로 조용해졌네."


오늘도 변함없이 한 건 낙찰.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와서 자기 소개같은 걸 하는 것도 상당히 뻘쭘한 일이지만, 나는 마왕이다.
이 세상에 딱 9명 존재하는 마족들의 지배자, 그 중 한 사람. 인간들 사이에는 마왕이 한 100명 넘어가는 걸로 알려져있지만, 나를 포함한 9명 이외에는 전부 무면허 가짜들이니까 신경쓸 가치조차 없다. 물론 마왕을 자칭할 정도니까 나름대로 힘은 있겠지만.
마왕.
흔히 "세계 정복을 노리며 음침하게 크크크거리는 몬스터들의 왕"이라고 묘사되는 존재.
이곳 아스포리아 대륙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과 마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땅이다. 아마, 이 땅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 본인들조차 이제는 원래 싸움의 이유가 뭐였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짓을 해왔는지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도 모른다.
그 중 인간들 사이에는 마족을 토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용사'들이 있고, 그 용사들이 목표로 하는 제 1순위가 바로 마왕이다.
마족들은 물론이고 그 이외의 모든 어둠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진, 어둠에 속한 자들 중 최상위 계급. 그 힘은 지상의 신에 비견될 정도이며, 언젠가 모든 대륙에 어둠을 드리울 자들…… 이라고 전해진다.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마왕한테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마왕들이 대다수라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라는 말씀.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길, 「인간, 자기 분수 파악 최우선」. 그것이 내 신조다. 물론 나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 말은 무지 마음에 든다. 자기 능력도 제대로 파악못하고 야망만 크게 가져봤자 남는 건 파멸과 절망과 좌절과 눈물 뿐이니까.
물론, 내가 다른 마왕들처럼 인간들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지만.


"…… 그러고보니까 말야."
"응?"
"네가 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아까 그 사람들, 홀에서 뭔가 굉장히 크게 소리지르던데."


홀?
거기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을텐데. 뭣때문에…… 아니, 잠깐.


"펜. 압류딱지 덜 치웠어?"
"현관 근처에 몇개 남아있긴 할거야. 아마 그걸 발견한 거라고 생각해."


아, 역시.
추측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마왕성'이라고 타이틀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지. 아마 '보통의 음침하고 음험하며 악취미적인 마왕성'을 떠올리고 여기에 왔다면 100% 기겁하게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하리. 지금 나한테는 압류당한 물건들 찾아올 돈도 없는걸.
…… 아니, 뭐. 어차피 선대가 쓰던 물건이고 나로서는 없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골동품들 뿐이니까 상관 없지만.


"그치만 그 골동품들 전부 넘긴 덕분에 성까지 저당잡히진 않았잖아."
"생각보다 비싸긴 비싸더라. … 솔직히 이딴 크기만 크고 썰렁한 성, 남겨준데도 난 싫지만."
"…… 아니, 사실 이것도 별로 크진 않은데. '성'이라고 할까, 사실 '요새'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내가 대충 초안을 잡은 그림대로 바늘과 실을 움직여서 여자 아이 인형을 만들고 있던 나의 친구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 금발 꼬마─라고는 해도 키는 나보다 5cm 더 크지만 어쨌거나─의 이름은 '펜'. 원래는 펜리스 볼프라고 하지만, 길어서 부르기 짜증났기 때문에 그냥 펜이라고 줄여서 부르고 있다. 종족은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전투종족인 「웨어울프」이고,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임과 동시에 이 성의 재정 담당이고 수색 담당이면서 창고 담당이기도 하고 유격대장이며 성 관리와 함께 영지 관리와 순찰 대장까지 맡고 있다.
…… 거기, 지금 '무슨 직함이 이렇게 많아?'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이 성에 사람이 적어서 한 사람이 여러 직책을 겸직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펜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편이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추가로 이런저런 공예품을 만들어서 파는 것으로 이 성의 재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뭐, 웨어울프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사람 좋은 성격이라 전사로서는 실격이지만, 나같은 거하고 아직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적으로는 대합격. 그 때문인지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나보다 인기가 많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쨌거나, 확실히 펜이 말한대로 선대가 쓰러지고 내가 마왕으로 선택될 때까지의 공백기 동안, 이곳은 끔찍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선대의 부하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쳤지, 덕분에 도적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왔지, 가끔 선대가 죽었다는 소문을 모르는 용사들도 들락날락거리지. 하여간 '엉망진창'이란 단어의 극을 보는 듯했다.


"거짓말하지마. 네가 여기에 오고 난 뒤에도 관리같은 거 하나도 안했으면서."
"어쩔 수 없잖아. 생활비도 없어서 돈 벌기 바빴는데."


혀를 차며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만, 우리한텐 '돈'이 없다. 이 마왕성이 텅텅 비어있는 것도 돈이 없어서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고, 마왕인 주제에 당장 내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에 몇개씩이나 되는 아르바이트를 뛰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시장에다 내다팔 인형들을 만들고 있는 것도 다~ 돈이 없어서다.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현관에 있는 '철문처럼 보이는 나무조각문'도 펜의 작품이다. 손끝만 가지고도 사람 목숨 왔다갔다 하게 만들 수 있는 웨어울프이기 때문인진 몰라도, 손재주가 상당히 좋다. 실로 슬프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처음 인형 만들기 시작했을때만큼 이 녀석과 친구가 됐다는 사실에 기뻐한 적이 없었을 정도니까.


"……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난 사람 목숨 가지고 논 적 없어."
"예를 들면 그렇다는거야, 예를 들면."


1번, 나는 평화주의자다.
2번, 우리 성에는 돈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3번. 요즘의 인간들은 무섭다. 이 세가지가, 내가 다른 마왕들과 행동을 달리하는 이유다.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 인간보다 강한 종족따윈 셀 수 없을만큼… 아니, 세는 게 멍청해질만큼 많이 태어났다가, 또한 사라졌다.
처음 인간이라고 하는 종족이 태어났을 당시,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드래곤, 마족, 정령,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 뱀파이어, 웨어울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세상에 인간보다 강하고, 인간보다 영리하며, 인간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한 종족따윈 발길에 채일만큼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세계에서 가장 넑게, 가장 많이 퍼져있는 종족은 '인간'. 지금에 와서는 인간의 역사가 곧 대륙의 역사고, 다른 종족은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책에 따라다니는 부록에 지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왕조차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잡힌 마왕은 별로 없지만, 불과 수백년전까지 마왕을 "절대적인 절망"이라고 생각하던 것에 비하면 이야기거리도 안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용사'가 무서운 게 아니다. '인간'이 무서운 것이다. 이 기나긴 대륙의 역사 속에서 딱 한번 뿐이긴 하지만 대마왕조차 인간에게 쓰러진 적이 있는데 하물며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 같은 얼치기 마왕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대마왕이 쓰러진 건 3천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잖아. 그것도 그때는 천사가 끼어들었었고."
"… 확실히 일을 좀 크게 벌리긴 했었지, 그땐."


지금의 대마왕님이 그 자리에 앉기 전의 대마왕.
그 양반이 갑자기 훼까닥한건지 대마왕 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어서 노망이 난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갑자기 전대륙을 상대로 전쟁 선포하고 싸움 걸었다가 장장 30년에 걸친 전쟁 끝에 쓰러졌다.
이때 대마왕을 쓰러트린 것은 '인간 용사'라고 알려져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책에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는 왠만큼 진실이 알려져있다. 피니시를 날린 건 확실히 용사였지만, 대마왕을 '용사가 칼을 찔러서 죽일 수 있을 정도'까지 두들겨팬 건 다름아닌 천계 천사들이었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마왕에 필적하는…… 아니,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천사들이 열명 넘게 몰려와서 두들겨팼으니 아무리 대마왕이라도 배길 수 있을 리가 있나.
아무튼 그런 까닭에 역사상 처음으로 대마왕이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지도자를 잃은 마족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만큼 처절하고도 비참하게 깨지고 발리고 뭉개졌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 가장 빛이 충만했던 시절"이라고 칭송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마족들 입장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야기가 잠깐 딴데로 셌는데, 비록 마지막의 피니시만 스틸질 해간 거라고 하나 '인간'이 마왕을…… 그것도 '대마왕'을 살해했다는 건 마족에게 있어서 다시없을 치욕이다. 게다가 그게 무슨 싱크로니 시티라도 일으켰는지 그 이후부터 간간히 마왕을 때려잡는 용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정점이 바로 5백년 전.
대마왕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의 마왕들이 전원 살해당해, 통째로 물갈이 당한 사건이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 시대 최강의 용사라고 불렸을 인간들이 무더기로 출몰하여, 마왕들을 각개격파했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그 힘에 한계는 있는 법. 상대의 역량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 수까지 더해지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환호했고, 마족들은 절망했다. 이제야말로 마족들은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실제로 마왕들이 박살나고 십여년간은 마족의 씨가 마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냥'당했다.
하지만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 '마왕 물갈이 사건'이, 더더욱 큰 사건을 불러오게 됐다는 것을.
마족들의 숫자가 처음의 1/100 정도로 줄어들자, 이변이 발생했다.
마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마왕들이 탄생한 것. 그것 자체는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전투력'. 새로이 마왕이 된 이들은 지금까지의 '마왕'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
여기에 더해, 마족들의 숫자가 너무 줄어들어 더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된 대마왕(앞에서 뒤진 양반이 아니라 지금의 대마왕)과, 갈수록 싸가지 없어지는 인간들의 태도에 열이 받기 시작한 '신'이라는 양반이 "니들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고 허가까지 내주어 그 압도적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더이상 거리낄 게 뭐가 있으리. 신생 마왕들은 남아있던 마족들을 긁어모아 규합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인간쪽으로 거의 다 내려갔던 저울추를 뒤집어엎어버렸다.
이때 마왕들의 반격 방법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게 또 대단히 참신했다지.


선대 마왕들을 죽인 용사들을, 조용히 하나씩 찾아가서 다구리쳐 잡았다.


분명 그때의 용사들은 그 전의 용사들보다 강했지만, 그렇다고 단독으로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펙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걸 뒤집고 마왕을 때려잡는 인종이 용사였기 때문에, 그때 마왕들도 최소 둘, 많을 때는 셋 이상이 몰려가 용사 하나를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두들겨 뭉갰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안전을 위하여.
여하튼 "마왕들이 힘을 합쳐 용사를 다구리쳤다"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도 일어나고 그 이후 50년 정도는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안정기로 접어들어 지금은 다시 인간 vs 마족의 형세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신생 마왕들도 각각 흩어져, 그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여 마족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 나만 빼고."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인형을 만들던 손을 놓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마디 하나 크기의 루비를 꺼냈다. 오늘 아르바이트로 번 돈의 대부분을 날려먹은 원인이 이것이다.


"어제도 루비 아니었어?"
"할 수 없잖아. 다이아몬드는 비싸니까."


효과는 다이아몬드가 제일 좋지만, 그만큼 돈이 많이 드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루비를 들어올리고…… 입을 벌려서 집어넣은 다음 몇번 씹다가 그대로 삼켰다.
그것을 본 펜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매일 보는 거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 신기하겠냐. 「보석왕」이라서 보석이 힘의 근원이라는 건 둘째치고, 보석을 안먹으면 인간이 밥을 굶는 것하고 똑같이 되버린다는 게."


이게 내 일이 아니라면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겠지만, 내 일이라서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나와 펜이 그렇게 노력하면서 아르바이트하고 인형팔고 하면서 돈을 버는데도 우리 성이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내가 가진 마왕으로서의 호칭은 「보석왕」. 보석을 생명과 힘의 근원으로 삼으며, 보석이 상징하는 '속성'과 '강함'을 직접적인 힘으로 바꾸는 힘을 가진 마왕이다. 덕분에 내 이 연약하게만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물리적인 완력에 있어서는 자신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무지막지하게 나쁜 연비. 아까도 말했듯이, 보석이야말로 내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량인 것이다.
인간이나 다른 마족같은 식사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보석을 먹지 않으면 마왕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모르겠는데, 만약 너무 오랜 기간동안 보석을 먹지 않으면 인간이 밥을 못먹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처럼, 굶어죽는다는 게 문제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힘의 근원에 대해서 특정한 제약을 가지고 있다. 보석왕인 나는 보석을 먹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백야왕은 밤에만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거인왕은 발이 땅에 붙어있는 한 무적이라는 식으로. 물론 약점이 알려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에, 이런 이야기는 같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마왕 중에는 월광왕이나 불사왕처럼 인간의 피, 혹은 생명력을 섭취해야 되는 흉흉한 부류도 있으니까. 그에 비하면 보석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 응?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고보니까 펜."
"응?"
"너 말고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야? 얼음이라거나 아저씨라거나."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스켈레톤들이 나한테 직접 전화할 이유가 없었을텐데. 펜이야 그때는 아르바이트 뛰고 있을 시간이었니까 텔레포트를 못하는 이상 빨리 올 수 없었고.
다른 세 명은 어디로 간 거야?


"나하트 씨는 일이 있어서 늦는다고 연락왔었어. 뭐라더라, 고향에서 악마가 날뛰고 있으니까 정리하고 온다던데."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네. 얼음이는 그렇다치고, 아저씨는?"
"그게, 말이지…… 아하하하하……."


내 경험상으로 펜이 이렇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꼬리를 흐리는 경우는 딱 하나 뿐이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다.
하지만 펜한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반응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이 놈을 그냥……!


"아, 용사들 갔나요."

…….

"무섭죠, 공무원. 잡아갈 땐 인정사정 없다니까요. 하여간 세무관 다음으로 무서운 게 경찰이라고 하던가, 틀린 말 하나도 없어요."


…… 호랑이도 자기 욕하면 온다고 하더니.


"그러고보니 마왕님도 지난번에 벌금 물었죠? 길거리에서 군것질하다가 쓰레기 무단 투기로. 이야,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얄짤없이……."


"너 지금까지 어디 숨어있다 이제서야 기어나오냐."


이를 빠득빠득 갈며 눈 앞의 해골바가지를 바라본다.
새하얀 백골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켈레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새카만 해골에 마찬가지로 새카만 갑옷을 껴입은 이 작자는, 무엇을 숨기리. 흔히 '마왕군 4천왕'이라거나 '마왕군 5대 장군'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묘사되는 마왕성의 간부. 이 아저씨가 그 중 하나다. 이름은 이 작자를 언데드로 만든 사람이 대충 지어줘서 그런지 스컬트, 종족은 보다시피 스켈레톤이다. 뭐, 나나 펜이나 얼음이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그야 다락방에요."
"……."
"아시잖습니까. 전 싸움이 무섭다구요. 인생은 러브 앤드 피스가 최고라니까요."


……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잘못 뽑았어. 이런 인간인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다크 엘프 아가씨를 고르는 거였는데, 내가 그때 도대체 뭐에 씌여서 그 아가씨를 마다한 걸까. 아니, 그보다 이런 놈을 펜이랑 같이 간부 자리에 놓고 동률 취급한다는 게 어째 무지하게 미안해지는데.


"내가 어쩌자고 이런 놈을 부하로 뽑았는지……."
"에~이.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잖습니까. 저랑 마왕님이 같은 과니까요."


…… 참자. 참아야 하느니. 이런데서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간 기껏 고친 마왕성이 또 무너진다. 고친지 아직 이틀밖에 안지났는데. 게다가 내 능력은 쓰는만큼 돈이 나가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없다. 써서는 안된다.


"됐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랑 그 주제로 이야기 계속하다간 내가 내 명에 못죽지."
"이해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해골바가지 주제에 능글맞게 웃으며 저따위 소릴 지껄이자 순간적으로 빡돌 뻔했다.
후우, 후우. 릴렉스, 릴렉스.
…… 좋아. 진정됐다.


"설마해서 묻는건데, 숨어있기만 한 건 아니겠지 너."
"그야 당연하죠. 이미 지시를 내려놨습니다. 지금쯤이면 하인들이 경찰서에 가서 그 용사 놈들 장비를 보상금 명목으로 넘겨받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뭐, 그 놈들을 강제 노역시킬 일자리도 찾아보고 있겠죠."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되는 용사 놈들이지만, 이왕 쳐들어왔으니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이용하는 것이 인지상정. 녀석들 장비는 팔아서 우리 성 예산에 포함시키고, 녀석들이 가져간 물건들도 만약에 있다면 도로 찾아와야 할거고, 마지막으로 빡세게 굴려먹어 돈 벌게 한 다음 그 돈을 또 우리가 착복하면───


"마왕님. 입가. 침."
"…… 윽!"
"여전하시구만요. 돈 벌 생각하면 넋나가버리는거."


재빨리 입가를 소매로 스윽스윽 닦아낸다.
뭐, 용사들 문제는 이걸로 깨끗이 해결. 애먼 사람 목숨 노리고 남의 성에 무단침입한 대가는 확실히 뽑아내야지.
말했다시피, 요즘의 인간들은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성에 쳐들어온 용사들을 섣불리 죽이지 않는다. 단지 경찰에 넘기고 장비만 뺏을 뿐. 그러면 보통은 쪽팔려서라도 자기가 여기 와서 깨졌다는 소리는 퍼트리지 않는다.


"이걸로 당분간 밥 걱정 안해도 되겠다. 다행이야. 이번 달 생활비 아슬아슬해서 어떡하나 했는데."


솔직히 마왕씩이나 되서 이번 달 생활비같은 거 걱정해야 되는거냐,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딴 자존심에 얽매일 여유는 없다. 마왕도 먹고 살아야할 거 아냐.


"그 이야기는 해결됐다 치고. 오늘은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우리 성, 역시 문제가 좀 있지 않아?"
"응? 무슨 문제 말입니까? 마왕님이 사실은 애 같은 취미가 있어서 밤마다 인형 끌어안고 잔다는거요? 아니면 은근히 겁쟁이라서 밤에 불 다 끄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거요? 괜찮습니다. 절~대로 그 이야기가 마왕성 밖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을테니까요. 단지 옥상에 가서 몇번 큰 소리로 외쳐본 적밖에 없어요."
"……."


「다이아몬드 발칸」


죄송합니다. 인내심 한계 돌파였어요.
장담한다. 내가 어느 날 비명횡사한다면 저 놈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화병'으로 인한 것일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것이라고.
어찌되었건 나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창밖으로 던져버린 해골에 대해서는 깨끗이 신경끄기로 하고는 이 성의 제일 큰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이라도 저 놈이랑 의논하려고 했던 내가 미친 놈이지. 얼음이가 있으면 걔랑 의논하면 되는데 안타깝게도 걔는 지금 성에 없는 상태다.
…… 역시 마지막에 믿을 거라곤 친구밖에 없지, 응.


"의논하는 건 좋지만 말야……."
"응?"
"너, 방금 다이아몬드 얼마나 썼어? 그거 또 메우려면……."
"과거를 책망하기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 지난 일들은 깨끗이 털어버리고 미래를 바라보자꾸나, 친구야."


펜은 그 하늘색 눈을 가늘게 뜨고 잠깐동안 나를 노려보았지만, 곧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 힘의 근원은 보석이다. 방금 전에 사용한 다이아몬드 발칸의 경우에는 그 이름 그대로, 체내에 보관하고 있던 다이아몬드를 발칸포처럼 사출하는 기술이다. 시전 속도도 빠르고, 위력도 내가 쓸 수 있는 기술 중에서도 톱 클래스지만, 엄청난 단점이 하나 있다.
자아, 다시 살펴보자. 이 기술은 다이아몬드를 발사하는 기술이다. 그것도 발칸포라고 할 수 있을만큼 연속으로. 당연히, 다이아몬드의 소모 갯수도 실로 어마어마하다. 1초에 50발은 날아가니까.
쉽게 말해 방금 저거 한번 쓴 걸로 내가 메이드 카페에서 일하며 버는 월급 3개월치가 날아갔다는 소리다. 빌어먹을, 역시 화난다고 바로 쏘지 말고 그냥 주먹으로 때렸어야 되는건데.


"게다가 성도 부서졌어. 이거 수리비까지 생각하면, 아까 쳐들어온 용사들 장비를 몽땅 판 돈을 제하고도 앞으로 한달 정도는 우리 잼도 버터도 없이 물이랑 빵만 먹고 살아야될 거 같은데."


펜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어찌하리. 벌써 써버렸는데. 공격에 사용한 보석들은 산산조각나버려 파편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그걸 긁어모아서 어떻게 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 능력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긴지만, 정말 싫다.
어쨌거나 우리는 (현실 도피를 위하여)금전 문제에서 잠깐 눈을 돌려, 아까 말하려고 했던 본론을 끄집어냈다. 일단 이 마왕성에 가장 부족한 것은 물론 돈이지만, 그것 이외에도 또 하나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약하다는 거지. 그것도 무지하게."


군사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돈과 함께, 이 성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물건.
전부터 생각했지만, 용사들의 공격을 몇번이나 받고 나니 확실해졌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싸울 수 있는 힘을 늘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실질적으로 이 성에서 용사들과 싸울 수 있는 건 나와 펜, 아저씨, 얼음이. 이렇게 넷 뿐이니까.
하인과 하녀들이라면 합쳐서 10명 정도 있지만, 솔직히 그 숫자같곤 어림도 없다. 게다가 원래 하인들이란 집안일에 써먹으려고 둔 거지 싸우는데 쓰려고 둔 애들이 아니니까. 내가 걔들을 얼마 주고 고용했는데 그 예쁜(비싼) 얼굴들과 몸들에 생체기 하나라도 생기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저씨가 만들어낸 스켈레톤들도 몇명 있긴 한데, 그 아저씨가 스켈레톤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능력이 서툴러서 그런지 숫자는 일개 소대 정도로 30구가 될까말까한 정도다. 까놓고 말해서, 용사 일행이나 강대국의 군대는 커녕 왠만한 중소규모의 산적들이 와도 감당하기 힘들다. 실제로 나랑 펜이랑 아저씨랑 얼음이가 다 같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는 이 성이 산적들한테 함락당할 뻔한 적도 있다. 그땐 진짜 기가 막혔지.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인력 보충이라고 생각해."


딱히 다른 마왕들처럼 "세계 정복이다! 우헤우헤!"같은 걸 할 생각따윈 개미 눈물만큼도 없지만, 산적한테도 노려지는 마왕성이라는 건 솔직히 비참하잖아.
여기까지 말했을 때, 펜이 오늘 하루만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건 좋은데, 어떻게?"
"…… 글쎄. 나도 아직 생각 못했어."


일단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다른 마왕들이 한 것처럼 하위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쓰는 것이 있겠지만, 나는 그거 못쓴다.
왜냐, 나는 정식 후계 마왕이 아니라 혼란기 때 아무렇게나 선택된 마왕이니까.
원래 이 지역을 지배하던 선대 마왕(아마 호칭이 수천왕인가 그랬을 거다)은 용사들과 마왕들이 마구마구 나타나던 혼란기 중반부 시절에 덜컥 죽어버렸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이 말아먹을 선대 놈은 죽기 직전에 마왕의 힘과 자리를 랜덤, 즉 대륙 전체에 있는 누군가 중 아무나를 대상으로 계승시켰고, 그것에 하필 내가 걸려버린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 꼬마로 살아가던 내가 마왕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을 리 만무. 되고 싶디고 않았던 마왕이 되고 온갖 고생을 다 한 끝에 겨우 이 마왕성에 도착했더니 마왕성에는 몬스터 한마리 남지 않고 몽땅 토껴버린 상태. 당연히 재정 상태도 제로, 아니 마이너스. 나는 빈 손조차 아닌 빚부터 진 상태에서 두번째 인생을 시작했던 것이다.
마왕의 힘에 대해 알려줄 선대 마왕은 진작에 숨 넘어갔지, 돈은 없지, 배는 고프지, 혼자 있어서 외롭지, 춥지. 그 이후 50년 정도는 정체를 숨긴 채 돈을 벌기 위한 온갖 아르바이트에 전념했다.
편지 배달, 산딸기 따러 가기, 늪지대 독개구리 잡아오기, 약초 캐오기같은 일일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여장 연극에 여성용 드레스 모델에다 최근에는 남자의 몸으로 메이드 카페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까지. 진짜로 몸 파는 거랑 범죄 빼고는 안해본 게 없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들도 하나의 아련한 추억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 모든 게 꿈이었고 내일 아침 눈을 떠보면 마왕이 됐던 그 날이라고 하면 난 당장 창문 열고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의 그 필사적이고도 눈물나는 노력들 끝에 마왕성의 재정은 간신히 마이너스를 극복하고 제로를 지나 플러스로 돌입, 펜과 만나게 되고 얼음이를 알게 되고 아저씨를 부하로 들인 후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은 하인들도 부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물론 내가 먹을 보석 때문에 큰 돈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야기가 살짝 빗나갔는데, 어쨌거나 나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미 「보석왕」으로서의 능력을 가져버리는 바람에 하위 몬스터들을 지배한다거나 날씨를 기분 내키는대로 조종한다거나 하는 마왕 전용 스킬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쓸 수도 없다.
최선이 안되면 차선. 아저씨가 스켈레톤들을 부리는 것처럼 언데드 몬스터나 마법 생물들을 만든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상 불가능한데, 나는 마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쓸 줄 모른다. 내 마법 재능을 측정해준 얼음이가 말하길, "마력은 바보같이 높은데 재능은 끔찍하게 낮다."라나 뭐라나.
그럴 수밖에. 마력이야 선대한테 물려받은 거니 높은 게 당연하고, 마법사 재능 같은 게 있었으면 마왕이 되기 전 인간 꼬마 시절에 진작 어디 마법사 제자로 들어갔을테니까.
그런 고로, 네크로멘시도 사용 불가.
빌어먹을. 이렇게 하나하나 되새겨보니 진짜 비참한 심정이다.
그나저나, 진짜로 어쩌지.
우리 영지랑 붙어있는 나라들이야 나하고 딱히 원수진 것도 없고, 내가 잘해준 것들도 있어서 지금은 용사보다 내 편을 들어줄 정도라지만, 저 멀리 있는 동네의 강대국들은 아니다. 만약 걔들이 마음먹고 쳐들어오면 전쟁 개시 반나절 안에 끝장난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평화롭고 조용하며 행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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