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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식월(食月)의 컨트렉터(contractor)
글쓴이: 가렴
작성일: 12-07-21 15:29 조회: 2,681 추천: 0 비추천: 0

Prologue


내가 눈을 떠서 가장 먼저 본 광경은, 불길한 검은 불꽃을 머금은 한 자루의 검을 든 소년이었다.

그 뒷모습. 검신(劍身)을 타고 흐르는 불꽃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적을 베어 쓰러뜨리던 그의 용맹하고 아름답던 모습. 그 광경은 내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광경이자, 가장 아름다운 회상이자, 가장 슬픈 추억이었다.

그것이 - 내가 태어났을 때의 최초의 기억이자, 가족들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

그 후로 소년에게 거두어진 나는 그를 주인으로 모셨다. 그의 손을 잡고 수많은 곳들을 여행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못 견디게 즐거웠다. 그는 자상한 아버지였고, 듬직한 오라비였으며, 즐거운 동행자였다.

그 아름다웠던 날들.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래서 더 애틋한 그런 추억들.

나에게 있어서 주인님은 모든 것,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런 현상을 두고 세간에서는 이렇게들 말하지. ‘임프린팅(Imprinting)’이라고.”

“사람을 무슨 새대가리인 것처럼 말하지 맛!”

“어머. 실례구나. 아무리 나라도 그런 무례한 비유는 하지 않아.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심한 말을 하는거니.”

“...으음. 알았으면 됐어. 앞으로 조심-”

“새한테 미안하잖니.”

“그래, 알았어. 벤다! 고통없이 보내줄테니 그 목을 내놔라, 짜샤!”


추억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때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내게는 슬픔을 불러일으킬 그리움도 없고, 그리움을 떠올릴 추억도 없었다. 나의 가장 첫 기억은 주인님. 그 분은 나에게 삶을 선물해준 은인이었고, 이후의 삶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후-.”

“...뭐야, 그 표정은?”

“아니, 별로. 딱히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던가, 가족이라 쓰고 민폐 짐덩어리라 부른다던가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이미 다 말 했잖아! 통렬하게 지적해 주셨네요! 그것도 내가 가장 신경쓰고 있던 부분을!”

“어머, 그래? 생각보다 눈치는 있었구나? 역시 부족했던 건 눈치가 아니라 양심이었니?”

“...이젠 됐어. 역시 베겠어.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고통은 없게-”

“고통은 없게, 뭐?”

“-고, 고통은 없게 꼬집어주겠다~ 에잇~”

“...웃든지 울든지 핏대 세우든지 하나만 해, 하나만. 오히려 더 무섭잖아.”

“후우, 정말. 여전히 눈물나는 충심이네. 일반적인 의미랑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게 안타깝긴 하지만.”

“우우... 야, 그게 무슨 의미얏!”


그래서 찾았다.

찾고 찾고 또 찾았다. 얼마의 세월이 지났는지, 얼마나 넓은 지역을 떠돌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내 눈앞에서 사라진 주인님을 찾아 세계 곳곳을 떠돌았다.


“흥. 그래도 좀 아쉽네. 모처럼 네 그 천박한 본모습을 주인님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흥! 네 그 가식적인 모습보다 백배는 더 매력적일 걸?”

“야만견!”

“도둑고양이!”

“힘만 센 바보 계집애!”

“입만 산 헛똑똑이!”

“캬르릉!”

“크르릉!”

“...너희들, 진짜로 사이 좋은 것 맞지?”

““당연하죠!!””

“...퍽이나.”


그리고 찾았다.

비록 나에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님일지라도, 나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쌓았던 모든 세월을, 공유했던 모든 추억들을 잊어버린 그런 주인님일지라도 -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대답 해봤자 별로 신용은 안 가지만. 뭐, 좋아. 그건 그렇고, 나 없는 동안 주변 이웃 분들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겠지?”

““...””

“어, 뭐야? 왜 이런데서만 사이좋게 대답이 없어?!”

“주, 주인님. 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하면요. 그러니까-”

“그러길래 내가 주인님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자고 했잖니.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 주인님, 쟤 잘못이에요.”

“‘제 잘못이에요’겠지! 뉘우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잘못 남한테 미루지 마! 주인님! 저 정말로 억울해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죠. 그러니까..”

“야, 류시연! 너 지금 들어왔지! 문 열어봐! 류!시!연!”

““으아악! 왔다!””


기뻤다.

이 분은 나의 주인님.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 주었던, 내가 사랑할, 나를 사랑해 줄 - 바로 그 분.

나는 오늘도 그분의 품에 안겨 그분의 온기를 느끼며 행복을 느낀다.


“뭐?! 뻥치시네! 야, 이 라디오 음성 빨리 안 꺼!”

“흥! 남의 나레이션에 상관하지 마!”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이라도 그냥 넘어갈 나레이션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나레이션이 있어!”

야 이녀석들아! 지금 이 비상시국에 무슨 짓이야!


이것은 그런 이야기.

한 마리의 강아지와, 한 마리의 고양이와, 그 주인의 소소한 행복이 담긴 그런 일상이야기.


“이 녀석들아, 어떻게 좀 해봐! 잘못했으면 본인들이 가서 해결을 봐야지! 얌마, 견희야! 정신줄 놓지 마!”

“후후후. 멋진 나레이션이었다.”

“주인님, 안 되겠어요. 이 녀석, 이미 정신줄 놔 버렸어요. 일단 우리끼리라도 몸을 피하죠.”

“야, 이 망할 꼬맹이들아! 내가 다른 건 다 건드려도 속옷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아아!!”

“소, 속옷?! 야 너희들,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몸부터 어서 피해요!”

“...엥? 주인님? 묘향아?”


...를 가장한 본격 '악의 화신인 못된 발정강아지‘와, 주인의 동정을 지키려는 착한 순애고양이의 서스펜스 액션 대작 드라마!


“아앗! 묘향이 네 녀석, 남의 회심의 나레이션에 감히 무슨 짓을!”

“잡았다, 요놈!”

“우와아아악!!”

“우후후. 우리 귀염둥이 강아지. 너무 귀여워서 뼈와 살이 분리되는 극상의 쾌락을 맛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네에에?”

“누, 누누누 누님! 눈이 웃고 있지 않아요! 맞춤법도 엉망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살려주세요!!"

“오호호호!! 너도 못지않게 엉망진창이로구나아아!!”

“끼이야아아아악!!"


시작합니다!


1. 시작은 언제나처럼 경쾌하게 - 데스사이드(Death Side)로



1.


나는 어려서부터 오컬트같은 것은 믿지 않는 아이였다.

손금점, 타로카드, 별자리 점, 오늘의 운세, 유령, 귀신, 심령현상, 요괴, 마술, 악마, 천사 -.

그 어느 것에도,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남들은 열광하는 환타지 영화도, 내게는 한편의 잘 꾸며진 연극처럼 시시해보였다. 게임이나, 여타 소설도 마찬가지. 내게 있어서 현실은 현실. 그런 거짓된 세계에 일일이 열광하고 반응하는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신기하고 이상해보였다.

아무리 잘 꾸며진 이야기라도 - 결국은 이야기는 이야기.

자신의 인생이 아니다. 즉, 그런 것에 신경써도 정작 본인의 인생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시간에 좀 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음, 역시 시연은 현실적이네.”

“그런가요?”

내 말을 듣던 시유 누나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어투로, 꽤나 무거운 말을 하시네요.”

“그런가?”

‘웃차’하고 바구니 안에 쌓여있던 빨래들을 마당의 빨래줄에 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유누나.

나는 마루에 앉아 그런 누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는 가볍게 땋아내린 양갈래. 하프(Half)임을 무엇보다 선명히 알려주는 안경 뒤에 숨겨진 녹색 눈동자와 갈색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그녀를 한층 더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로 만들어주었다. 부모님(그러니까 누나의 부모님 말이다)이 여행을 떠나며 내놓은 이 집을 홀로 꾸려나가기에는 억척스러움이 부족해보이는 외모지만, 이래봬도 관리인 경력 3년 차. 어지간한 일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처리해버리는 능력과 강단이 있는 사람이다. 옛날에는 좀 더 뭐랄까, 활달하고 개구쟁이같은 장난기같은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는데, 역시 세월에는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나만해도, 지금은 이렇게 익숙해졌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해보이던 그녀의 메이드 복장이 말이다.

“...사람의 적응이란 참 무섭구나.”

“응? 왜 그렇게 더럽혀진 새색시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요?”

“뭐냐, 그 구체적인 표현은.”

그러고보면 여기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게 또 한 가지 있었지.

연신 호기심을 드러내며 쫑긋거리는 두 귀. 부드러운 털에 휩싸인 연한 갈색 꼬리가 내 손끝을 간질였다. 견희였다. 나는 어느새 내 옆에 발라당 드러누운 그녀의 갈색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잘 다녀왔냐?”

“으웅. 신체적 문제를 뜻하는 거라면 잘 다녀왔지만... 역시 낚시는 어려워요. 나한테는 맞지 않는걸까.”

간지럽다는 듯 파르르 귀를 떨며 견희가 한숨을 내쉰다. ‘낚시도구’를 마루 위에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심각하게 양손으로 턱을 괴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 좋은 꼬리가 스륵스륵 움직이며 마루 위를 쓰는 빗자루처럼 빙글 돌았다.

나는 퉁퉁 부어있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대답했다.

“아침부터 신이 나서 나가더니. ‘난 개니까 사냥에는 자신 있다고!’라며 자신만만하게 나간 사람이 누구더라? 그것도 화가 잔뜩 난 시유 누나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하고 말이지.”

“으윽.”

견희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흘끔, 그녀들이 망쳐서 다시 한 번 빤 옷가지들을 빨랫대에 널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유누나를 곁눈질하며 두려운 표정으로 몸을 바르르 한차례 떨었다.

“...누님은 안경 벗으면 무서워.”

“뭐, 그런 성격이니까 말이지. 말 그대로 눈에 뵈는게 없어진다고나 할까. ...정확히 말하면 옛날 성격이 되살아나는 것 뿐이지만.”

“안경을 벗으면? 윽, 뭐에요? 그 시대에 뒤떨어진 성격. 언제적 설정이야?”

“설정이고 자시고, 현실이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솔직히 오늘 아침 일은 조금 너무하기도 했지. 하하, 설마 누나가 아끼는 속옷들 전부 잿물에 담궈버렸을 줄은.”

“윽, 하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빨래를 했단 말에요! 잿물에 푹 담가서 북북 솥에 삶아주면 새것처럼 때가 쏘옥!”

“여느 광고글 따라하지 마라. 그리고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말 못해줬는데...”

“후에?”

“종이를 태워 물에 섞는다고 해서 ‘잿물’이 되는 건 아냐.”

그건 단순한 환경 오염이다.

“에?”

예상대로 고개를 갸웃하는 견희. 나는 그녀에게 조목조목 ‘잿물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궁금한 사람들은 직접 인터넷에 한 번 쳐보시라.)

“...아.”

“휴. 죽지 않은걸 다행인줄 알아, 이 녀석아.”

“...윽. 그, 그래서 돈 많이 벌어서 화 풀어주려고 그랬다, 뭐.”

“뭐, 결국 실패했지만~”

“주인님은 심술쟁이!”

불퉁거리는 얼굴로 투닥거리는 견희였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칠흑같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내린 묘향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너같이 단순한 애한테는 무리라니까. 처음에 주인님을 만났을 때도 그 난리를 쳤으면서 도대체 무슨 똥베짱으로 계속 낚시를 하겠다는 거니?”

“으윽. 그래도 내기에는 이겼다, 뭐!”

이를 한가득 드러낸 강아지 소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째려본다.

고양이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기에는 이겼지. ‘운 좋게’.”

“우, 운이 아니야! 그게 내 진짜 실력! 지금 건 그냥 장난이라고!”

소녀가 쾅쾅 마루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너 말이야...”

라며, 고양이 소녀는 조금은 질린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 알겠니? 결국 사람낚시란 말이지.”

“아니,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표현은 그만 두래두.”

결국 참다 못해 무심코 딴죽을 거는 나.

정말, 언제 들어도 누가 들을까 무서운 대화다.

다른 좋은 표현 다 놔두고 왜 굳이 저런 끔찍한 표현을 쓰는 거야?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양이 소녀가 말을 이었다.

“알겠니? 결국 영업이란 심리전이야. 너 같은 뇌세포 하나를 쓰는데도 전심전력을 다해야하는 바보에게는 억만년이 걸려도 무리인 분야라고. 이제 그만 내게 돌려주시지? 덕분에 요 며칠간 매상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기나 해?”

“우우윽, 그럴 수는 없어! 두고 봐, 꼭 비결을 알아내서 너보다 훠얼씬 더 많이 벌어올테니까!”

“어느 세월에?”

“그러니까 곧!”

“퍽이나.”

“우끼!”

투닥거리는 소녀들. 그녀들의 주위로 갈색의 강아지 꼬리와 검은 고양이 꼬리가 운율에 맞추듯 바닥을 치며 서로 얽혀들어간다. 마치 장난치는 짐승새끼들같은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휘리릭. 되감기는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그래, 역시 돌이켜보면, 그날 아침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2.


이야기 시작부터 갑작스럽지만, 한가지 묻고 시작하자.

“당신, 얼굴에 죽음의 상이 떠있군요.”

-이라는 말을 아침 등교 길에 들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못들은 척, 무시하고 지나갈까? 아니면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라며 산뜻하게 웃으며 주먹질을 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그 선택지는 논외로 치도록 하자. 왜냐고? 그 이유는 이 말을 한 당사자가 아직은 앳된 목소리의, 여자아이이기 때문이다. 시커먼 사내놈이라면 마음놓고 주먹질을 해줄 의향도 있지만, 아무래도 여자아이를 때리는 건 조금 그렇잖아? 아무리 초면에 실례되는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말이지.

그렇다고 모른 척 지나가기에는 내용이 조금 찝찝하고.

아무튼 그러한 관계로 그 날 아침 내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한심하지만 이랬다.

“...하아?”

“당신의 얼굴에 죽음의 상이 떠있다고 말했어요. 무시하고 그냥 가면 아마, 오늘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 후회하실 일이 있을걸요?”

새하얀 천막 안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작은 실루엣은, 그렇게 실로 깜찍한 엄포를 내 놓았다.

흐음. 죽음의 상이란 말이지. 나는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흘낏 바라보았다. 세월에 조금은 빛이 바랜 은색의 시계바늘은 이제 막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은 아직 여유.

...흠. 뭐, 재미있을 것 같으니,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

나는 잠시 헝크러진 머리를 긁적이고는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반쯤 가려져있던 천막입구의 천을 걷어 올리고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뒤의 가까운 미래에 가장 후회하게 될 선택을, 나는 단 3초의 여유시간도 갖지 않은 채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버린 것이었다.



천막 안은 의외로 밖에서 보던 것보다 꽤 넓었다.

폭이 대략 5미터정도 되어 보이는 방 안에는 작은 원방형 나무탁자가 그 중앙에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넓직한 사각형의 청록색 판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팔괘의 문양과 함께 여러가지 별자리를 암시하는 은가루들이 잔뜩 뿌려져있었고, 그 겉 테두리를 기이한 글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장식하고 있었다. 점술도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뭔가 대단해 보이는 도구였다. 그리고 구석의 천막 모서리부근에는 물을 떠다 놓은 듯한 큼지막한 항아리 서너 개가 놓여있었다.

“여기요, 여.기.”

나는 방 안을 죽 둘러보다가 나를 부른 소녀의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헤에."

그리고 살짝 감탄성을 토해낸다. 의외로...랄까.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또한, 무척이나 특이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청록색 판과 똑같은 색의, 어찌보면 서양의 드레스와 수녀복을 합쳐놓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귀여운 프릴이 달린 드레스의 밑단은 펑퍼짐하니 소녀의 다리와 의자를 가렸고, 그 위에 소담스레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듯한 아름다운 황금빛 문양이 새하얀 천 위에 연녹색 사파이어를 중심으로 수 놓여있었다. 마치 면류관(冕旒冠 : 고대 왕이 공식 행사때 쓰던 예를 갖춘 모자.)처럼 구슬을 늘어뜨린 열두가닥의 끈이 달린 예모를 눌러쓴 소녀의 흑갈색의 보석같은 눈동자는 도발적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붉은 입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도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갈대빛의 융단같은 머리카락은 틀어올려 고정시켰음에도 거의 바닥까지 흘러내려 아슬아슬 흩날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흔히 볼 수 없는 미소녀의 모습에,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잠시 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크흠!’하고 귀엽게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그, 핥아내리는 듯한 번들거리는 시선은 좀 거둬주시겠어요? 조금 부담스러워서..."

"안 했어! 그리고 뭐야, 그 사람을 성범죄자 취급하는 듯한 눈은?! 내가 그렇게 못 미덥게 생겼어?!"

"아뇨. 하지만 겉만 봐서는 모르는 거니까요. 아무리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봤을 것 같은, 만년묵은 동정남같은 눈을 하고 있는 남자라도 일단 남자는 남자니까요."

"..사람을 그런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지 말아 줘. 만년묵은 동정남이라니. 마법사조차 초월하는 레벨이잖아. 그건 무슨 신이냐."

“음... 부처님?”

“전 세계의 불교신자들한테 사과해라.”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교소가, 작지만 짜랑짜랑하게 한동안 천막 안을 휘돌았다.

헤에, 확실히 이쁘긴 이쁘구만.

목소리도 좋고.

“당신, 재미있는 분이네요.”

“너도. 사람에게 아침부터 사형선고를 때린 것 치고는 상당히 귀여운데?”

“어머. 그건 혹시 저한테 반했다는 뜻? 이 일을 어쩌나. 저는 꽤 눈이 높은데.”

“안심해라. 나도 나랑 비교해서 가슴이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어린 여자애는 논외다.”

꽈아악-. 순간 내 머리를 압착기처럼 쥐어짜는 강한 악력을 느꼈다.

어, 어라?

혹시 나... 방금 지뢰밟은 거야?

“뭐.라.고.요?”

그리고 소녀의 화사한 미소 위로 떠오르는 것은, 흉악하게 빛나는 새파란 힘줄.

정답. 그것도 아주 그냥 대차게 밟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아.”

와아~ 요즘 여자애들은 무섭구나아.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만들어낸 미래는 틀림없이 머잖아 성범죄가 근절된 희망찬 세상이겠지.

바람직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하하. 저기 노-”

“혹시 농담으로 소녀의 가슴을 후벼파는 저질 성추행 발언을 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거라면 그만 둬 주세요. 제 흥분한 오른손이 오버히트해서 당신의 하트를 뺏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정말로죄송합니다죽을죄를지었습니다한번만용서해주신다면견마지로를다하겠습니다!!”

속사포처럼 사과했다.

하트를 뺏긴다니. 그랬다가는 죽잖아.

다행히 한 동안 자신이 죽일 놈이라는 자아성찰과, 눈물로 얼룩진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서 그녀의 화를 겨우 풀 수 있었다.

얼얼한 얼굴을 매만지고 있을 때 그녀가 쌜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복채는, 선불입니다.”

“...복채? 여기, 서양식 점집 아니었어?"

"무슨 말이에요?"

라며, 소녀는 손가락으로 휙하고 입구의 윗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옥류관(玉瀏館). 삶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하는 분들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그런 사기꾼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너야말로 모든 서양식 점집들을 사기꾼으로 모는 것은 그만 둬.

속으로 넌지시 딴죽을 걸고 소녀의 새하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고동색 나무판이 장식처럼 입구 위에 달려있다.

왠지 고풍스러워 보이는 필체로 한자로 음각되어있는 '玉瀏館'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옥류관?"

"옥이란 도가(道家)에서 예로부터 가장 성스럽게 여겨왔던 보석 중 하나. 물 또한 ‘상선약수(上善若水 ; 최상의 도는 물과 같다는 뜻의 사자성어)’라는 고사에서 의미하듯 최상의 가치를 지닌 자연물로 유명하죠. 옥과 물이 머무는 곳. 곧 그 어느 곳보다 성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랍니다!“

약간은 으스대는듯한 표정으로 소녀가 말했다. 흠. 뭐, 잘은 모르겠지만 무지 좋은 뜻인가보네. 뭐, 이럴 때는 같이 칭찬해주는 것이 손님으로서의 미덕이라는 거겠지.

“그래그래. 장하다, 장해.”

“아, 뚱한 표정.”

그녀가 뺨을 불룩 내놓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째릿 노려보았다.

“이래봬도 이쪽 분야에서는 일류, 아니 특급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한다고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나는 검지를 척 들어보이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아침부터 ‘죽음의 상’이니 뭐니하는 흉한 소리를 들어버렸다고.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듣는다 한들...”

어느 의미로 보면 더 안 좋다.

소녀가 손뼉을 ‘짝!’하고 마주치며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 그랬었죠? 저도 참. 별거 아닌 것은 곧 잘 잊어먹는 나쁜 습관이 있어서...”

“그 별거 아닌 것이 혹시 제 목숨인건 아니겠죠, 자칭 특급 점술가 씨?”

나는 의심스런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때문일까, 약간이지만 그녀가 찔끔거리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무, 무슨 말씀이실까. 호호! 자자, 앉으세요, 앉으세요. 당신의 고민을 속 시원히 해결해 드립니다!”

“아니, 해결이고 자시고 현재 시점에서 제 고민의 근원자체가 바로 당신입니다만.”

내 지적은 시원스럽게 무시하며, 소녀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초록 색의 판을 쓸어보였다.

으음. 뭐, 좋은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탁자 옆에 놓인 ‘모금함 - 불우이웃을 도와주세요’라는 이름의(그 불우이웃이 혹시 댁은 아니겠지?) 작은 상자에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집어 넣었다. 그런 내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소녀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후, 다행이다. 이것으로 오늘 하루는 무사히..."

"뭐?"

"아, 아뇨! 아무 것도 아니예요, 아무 것도."

분명 뭔가 거슬리는 말을 한 것같은데...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탁자 위의 청록색 판을 손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으흠! 자,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아마도 방금 제가 말한 '죽음의 상'에 관한 것이겠죠?"

"뭐, 그렇지."

아무래도 아침부터 그런 불길한 것 듣게 되면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고. 아무리내가 그런 데에는 둔감하다고는 해도 말야.

아니, 그것보다도 뭐야? 그 죽음의 상이란 것은.

"죽음의 상이란..."

하고, 소녀가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가느다란 두 손은 탁자 위의 청록색 계기판(비슷한 것)을 매만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딸깍! 딸깍!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딸깍! 기이잉!

앗, 방금 살짝 진동한 것같은데?

희미한 연녹색 빛이 은은히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계기판. 하지만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계기판을 조작하기 여념이 없다.

호, 신기한 빛이네.

"첫번째로는 하루 안에 죽음을 맞는 상. 그리고 두 번째는..."

끼이익. 그녀가 계기판의 모서리에 달려있는 가느다란 나사 비슷한 것을 조이며 말을 이었다.

"일정기간 동안 죽을 만큼 고생하는 상이죠. 후우. 다 됐다."

'하, 하루 안에 죽어? 죽을 만큼 고생해?'

어느 쪽이든 사양이라고!

"뭐, 참고로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다른 쪽으로 옮겨질 가능성은 있으니 설사 죽는 상이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경사는 무슨?! 아까부터 죽거나 그만치 고생하거나, 엄청 불안한 키워드만 늘고 있거든요?!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그 눈 뭐야?! 그 도축장의 소닭보는듯한 그 불길한 눈은 뭐야?!"

"운명이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 빌지 마! 진짜 불길하다고!"

통탄할 일이로다! 이 녀석, 날 죽일 의지로 가득 차있어! 점쟁이가 아니라 자객이었던 거냐?!

두둥! 하고 효과음이 일어날 것 같은 자세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합장하던 소녀는 이내 웃으며 계기판을 다시 조작하며 말했다.

"후후. 농담이에요. 죽음의 상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으로 퇴치할 수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런 건 좀 빨리 말해달라고..."

"말린 북어로 발바닥을 한 십만 대쯤 맞으면..."

"어딘가의 새신랑이냐!"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거야...'라며 투덜거리자니 그녀가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쿡쿡 웃었다. 거 참 사람 놀리기 좋아하는 아가씨일세.

...뭐, 성격은 좀 꼬인 것같긴 해도, 웃는 모습은 확실히 예뻤다.

"자, 다됐다."

라고 말한 그녀의 손에 들린 기계판은, 이제 완연한 연녹색의 빛무리를 흘리고 있었다.

호오, 꽤 예쁘네. 마치 반딧불이 같아.

내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가 은은한 청록색 빛을 뿌리는 계기판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태일법여 만상여일 태극일원 무시무종(太一法如 萬狀如一 太極一元 無始無終)..."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주문같은 것을 외우고 나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옴 바라바라 비훔'이라고 몇 번 진언을 외우는 듯 하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읇은 것은 태일원진경(太一元珍經)이라고 하는 도가의 옛 경전의 구절의 일부분이에요. 시공역침판(時空易琛版)은 팔괘(八卦)와 28수(동양의 별자리. 서양의 황도십이궁처럼, 동양의 별자리는 28개로 나뉘었다)의 이치에 따르지만, 그 근원은 태일(太一)에 있기 때문에 고래로 시공역침판의 주인들은 점을 치기 전에 항시 태일원진경을 읆음으로써 근원의 축복을 빌었지요.“

“흐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아듣는 이야기는 단 한구절도 없었지만.

우웅.우웅. 이제 청록색의 계기판은 흡사 발광(發光. 發狂이 아니다)이라도 하는 듯 청록빛의 띠로 둘러쌓여있었다. 호, 정말 대단한데? 되게 임팩트있는 물건이잖아? 이런 것 따로 만들어 파는 곳도 있나?

나는 이정도의 물건이라면, 왠지 장식품으로도 괜찮을 것같다는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발광하고 있는 청록색 판을 들여다보았다. 청록빛 빛무리에 휩싸인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은가루들이 반짝이고 있다.

그녀는 작은 붓을 들어 무언가를 잔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름."

"류시연."

판의 위쪽에 내 이름이 적혔다.

"나이."

"17 세"

오른 쪽에 한자로 十七이라는 숫자가 적혔다.

"생년월일은요?"

"93년 11월 8일."

왼쪽에 6자리의 생년월일이 적혔다.

"흠...본관(本官 : 출생지.)은?"

“서울이야. 태어난 후로 이사한번도 안했거든.”

“호오.” 잠시 감탄성을 토해내던 그녀는 아래쪽에 그의 본관을 적어놓고는, 이내 필요한 자료를 다 모은 듯 눈을 감았다.

집중한 그녀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집중한 탓인지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두 손을 펼쳐 감싸 안듯 청록색의 판 위로 손을 올리며 외쳤다.

" 달을 따르는 이십팔 수의 성신(星神)들이여. 운명의 주관자여. 세계의 발자취여. 눈앞의 불안한 여행자를 위해 시우(時雨)의 때를 알게하라."

그녀는 몇가지를 더 조작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청록색의 판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남은 일은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시공역침판이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멍하니 빛무리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계기판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임팩트있는 광경인지라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눈이 그리로 향하고 있었다.

츠츠츳! 순간적으로 청록빛의 오오라가 계기판(소녀가 시공역침판이라고 부르는)을 휘감아돌며 고리모양으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환상적인 광경에 넋을 잃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극지방에서나 볼 수 있다는 오오라가 과연 이런 광경일까. 특히 밤하늘의 별가루같은 은빛가루들을 휘감는 모습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어느새 나는 멍하니 시공역침판이라는 그 기이한 도구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고 있었다.

이제는 저 역침판인지 나침반인지가 점괘를 내서 보여주리라. 과연 어떤 상이 나올까? 설마 진짜로 오늘 내로 죽는다는 점괘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뭐 딱히 점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좀 찝찝하잖아? 진짜라니까? 딱히 무섭지는 않다고. 나는 손가락을 달달달떨어가며 누구를 향한 변명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공역침판을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위이잉... 이젠 흡사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흩뿌리며 판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안에 뿌려져있던 은가루들이 푸스스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저 위의 천장을 통과하고 내리쬐는 약간의 해빛이 그런 은가루들을 비추었다. 노오란 햇볕을 받고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가루들. 그리고...

그 상태로 10여분이 흘렀다.

“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시공역침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급기야 고장난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마냥 툭툭 손바닥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 이거 왜이래?"

"고장난 거 아냐?"

라고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뭣이!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뭐라고요?"

"뭐, 꽤 정교한 물건이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것이 내 미래를 점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아니, 뭐 꽤 신기한 장치긴 했지만 말이지."

"우리 떡밥 28호를 무시하지 마~!"

그녀는 이제 흡사 보글보글 끓는 냄비뚜껑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뭐야? 그 떡밥 28호라는 이름은. 방금 전까지만해도 시공역침판이라는 멋드러진 이름으로 불리던 청록색 판은 졸지에 떡밥 28호가 되어 내동그라졌다.

씩씩거리며 부글거리던 소녀가 외쳤다.

"이, 이렇게 되면 좋아요! 오늘 제가 확실하게 보여드리죠! 당신의 상이 얼마나 지독한 상인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이어이. 그러니까 은근슬쩍 불안한 키워드 늘리지 마라니까? 그리고 그게 안되니까 이러는거 아냐? 그 불량.. 아니, 초록색 판도 잘나가다 김빠진 콜라같이 맥없이 꺼져버리는데 무슨 수로?"

불량품이라고 말할려다 도끼눈을 뜨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런 나를 째릿하고 노려보던 소녀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흥! 그 얄미운 여유도 거기까지다!에요! 두고 보라고요!”

“어이어이. 댁이 내게 앙심을 품어서 될 문젠가, 이게?”

“승부에서 지고도 속없이 웃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언제부터 승부였냐?”

황당해서 물어보는 내 물음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녀는 천막의 구석에 모셔져있던 커다란 상자를 꺼내들었다. 폭만해도 소녀의 어깨너비는 되어보였고, 길이는 거의 나의 키만한 커다랗고 길다란 상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보이는 상자를 가볍게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소녀가 음충맞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후후. 최후의 수까지 쓰게 만들다니. 각오해라, 에요.”

“너 중간부터 말투가 많이 바뀐 것같지 않냐.”

“시끄럽다, 에요.”

투덜거리며 소녀가 상자를 열려다 멈칫했다.

“..뭐, 좋아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은 더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죠. 당신도 목숨이 관련된 것이니 잘 생각하고 결정하는게 좋아요.”

“모, 목숨?”

아무리 장난이라고해도 목숨까지 걸라고 하면 꺼려지는게 사람 심정이다. 분신사바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막상 하라고 하면 꺼려하지 않던가.

“이거... 안하면 안되냐?”

“아이 참. 안하면 오늘 내로 죽는다니까요...아마.”

“아마?! 아마라고?! 지금 아마라고 그랬냐?!”

“에잇, 시끄러워요! 조용히 제 설명이나 듣고 그대로 따라하세요!”

소녀는 상자 뚜껑 위에 손을 올린 채 말문을 이었다.

“시연 님은 요괴나 악마라는 존재를 믿어요?”

“전혀.”

나는 즉답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아마 백명한테 물어봐도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할 꺼에요.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 정보가 제한되어있으니, 믿으라고 말해봐야 그건 근거없는 강요에 가깝겠죠.”

“뭐야, 그 존재한다는 듯한 말투는?”

“그거야 당연해요.”

라며, 소녀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인다.


“진짜로, 존재하니까요.”


“-아, 거기 119죠? 여기 정신이 오락가락해 보이는 아이가 대략 한 명-”

“우와악! 무슨 짓이에요?!”

소녀는 후다닥 내 핸드폰을 닫아버리며 소리쳤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말도안되는 헛소리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당신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망가트려도 좋다고 생각하시는건가요, 지금?!”

“걱정 마라. 요즘은 정신병원도 처우가 좋아져서 예전처럼 비인도적인 일을 벌이는 곳은 없다고 하더라.”

“그걸 지금 말이라고!”

뭐라고 소리치려던 소녀는 이내 말문을 닫고는 험악하게 웃어보였다.

아, 화났다.

“후, 후후후. 좋아요. 굳이 앞에다 대령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이거죠?”

“음, 뭐, 보여주면 믿을지도.”

“그 말, 기억하세요. 당신이 초래한 일이라는 거, 잊지 말고요.”

그 순간 소녀는 상자의 뚜껑을 망설임없이 열어 젖혔다.


~~


또 다른 에필로그 (프롤로그 후일담♥)


"저기요, 주인님.“

“뭐냐, 견희야. 그렇게 넋 나간 얼굴로.”

“방금 전 악마가 강림했던 것같은 느낌은 제 착각인가요, 주인님?”

“하하, 설마. 악마로 가장한 관리인 누나였겠지.”

“...뭔가 앞뒤가 바뀐 것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주인님 말씀이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그럼 다음 질문.”

“뭔데?”

“보통 (쓰잘데 없는) 프롤로그가 이렇게 길수도 있어요?”

“...방금 그냥은 넘겨들을 수 없는 어떤 말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드는데.”

“착각이에요.”

“그러냐.”

“그럼요.”

“...”

“...”

“...”

“...아무튼, 프롤로그 이거 왜 이리 쓸데없이 길어요? 헉! 혹시 이거, 분량을 날로 먹으려는 누군가의 농간은 -”

“그 이상 말했다가는 네 출연 장면을 확 줄여버리겠다는 그 누군가의 전언이 있었는데.”

“자, 쓸데없는 질문은 후딱 넘겨버리죠!”

“...너도 안 나오는 건 싫은 모양이구나.”

“네. 저도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요.”

“...”

“자, 그럼 계속 제 멋진 활약을 기다리시는 독자분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죄스러우니 준비되어있는 997개의 질문을 패스하고 바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많아! 천개면 본문보다 많잖아! 아니, 본문 실을 공간도 없겠다! 이 양심도 없는 작가같으니라고! 글을 쓸 생각은 청계천 하수구 바닥에 쓰레기랑 같이 던져버린거냐!”

“우왓! 말했다! 결국 말해버렸어! 주인님, 안녕!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그 동안 주인님과 함께라서 행복했어요!”

“-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거죠, 견희 양?”

“..엑?”

“에이, 아무리 그래도 작가님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하네에~”

“어,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우와, 이런 기분이었구나! 잘못했습니다! 그 때 웃어서 죄송했어요! 웃으면 안 되는 장면이었던거야!”

“걱정하지 마. 작가님도 네 진심은 알고 있을거야! 힘내, 파이팅!”

“...이거 진짜 어그로 제대로네요, 주인님. 저 이대로 주인님 한 대만 때려도 되요? 네?”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누가 보면 진짜인줄 알겠다.”

“물론 진짜이옵니다만!”

“진짜다! 여기 진짜가 나타났다!”


-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


“후. 너 때문에 일 똑바로 하라고 혼났잖아. 이게 뭐야?”

“에이. 주인님도 즐겼으면서.”

“누가 들으면 오해할만한 발언 금지! 애초 다섯줄을 넘기지 않는 기획이었는데 벌써 두쪽을 넘겨버렸다고! 명백하게 아웃이란 말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독자들에게도 재미없는 개그로 ‘아웃 오브 안중’일 테니까요.”























“...어, 지금 이 순간 제 운명이 크게 바뀐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제 착각인가요?”

“...그 동안 즐거웠다. 영원히 널 잊지 않으마.”

“...이렇게 말하고 싶으-”

“똑같은 레퍼토리 반복하지 마, 따샤!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후회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랬어요, 주인님!”

“확실히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말은 명백히 틀렸다!”

“옛 선현의 지혜를 그렇게 함부로 부정해도 되는거에요?”

“괜찮아. 애초에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 내 대사가 아니라 작가의 생각일 뿐이니까!”


-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이 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어, 방금 굉장히 무서운 나레이션이 지나간듯한 느낌이 드는데.”

“차, 착각이겠지요, 주인님.”

“그, 그렇겠지? 착각이겠지?”

“그, 그럼요. 착각이죠. 아하하하!”

“아하하하!”


- 작가의 좁아터진 마음을 과소평가한 그들의 운명은 -


“그만그만그만이이상의 직접적인 개입은 위험해!”

“그, 그래요! 위험해요! 세계관이 붕괴되버린다고요!”

“지금 네 대사도 상당히 위험해! ...아무튼 이제 끝내자. 벌써 분량을 한참 오바했다고! 이 이상 본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 누군가의 서슬퍼런 눈빛이 실시간으로 트랜스미션되고 있단 말이야!”

“그래요, 이만 끝을 보도록 하죠!”

“...애초에 네가 997개 운운하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진 않았을텐데.”

“그래서 세 개로 줄였잖아요?”

“...그래, 내가 졌다. 아무튼 그래서, 그 마지막 질문이란?”

“네, 그럼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뭔데?”

“...나, 지금 살아있는 거 맞나요?”

“...”

“거기서 고개를 돌리시면 어떻게 해요오오!!”

“여기선 나도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주인니이이임!!”

“앗! 내가 없는 동안 둘이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요!”

“너희들! 이 기회에 말하는 거지만, 풍기를 문란하게하는 행위따위 우리 집 안에서는 절대 금지니까 말이야!”

“히이익!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우씨! 누가 악마얏!!”


~~


...마지막 에필로그는 무시하셔도 관계 없습니다아.

그리고 누가 댓글 좀 달아줘요오오! 비평도 상관없으니까,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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