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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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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드래곤 하트
글쓴이: 정글괴수
작성일: 12-07-19 18:45 조회: 3,016 추천: 0 비추천: 0

드래곤 하트


0. 여는 이야기

내 이름은 시어리스 드레이븐.
대륙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초일류 흑마술사이자 로렌츠 왕국의 궁중 수석 마도사이며 바람의 마도사라 불리는 실시아 드레이븐의 오빠이다. 그 말은 즉, 나는 대륙에 손꼽히는 강자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스스로 밝히기는 좀 뭣하지만 키도 크고 이목구미도 또렷해서 무척 잘 생겼다. 우연히 마주치는 숙녀라면 노소를 안 가리고 눈을 휘둥그래 뜨고 돌아볼 정도의 미청년인 것이다. 에헴.

사실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 절체 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내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왕의 명령?
전혀! 그까짓 거 면전에서 코를 파며 무시해도 날 건드릴 수 없다.
1만의 몬스터?
천만에! 괴물 같은 것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된다.
10만 명의 병사?
무슨 말씀을! 인간의 군대 따위는 내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며 도망칠 것이다.
그런 이 몸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 뭐냐고 한다면 그거야 간단하다. 그건 바로 드래곤이다. 아니! 평범한 드래곤이라면 무서워할 것도 없다. 좀 벅차겠지만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드래곤이 드래곤 중에서도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허무의 드래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내 앞에서 스스로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금발 미녀의 정체인 것이다.
"시어리스 드레이븐!"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녀는 나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렌지 주스를 입에 머금은 채로 파스타를 빙글빙글 포크에 말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빌어먹게도 밝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한 손에 스태프를 쥐고 있지 않았다면 달려와 나를 껴안았을지도 모를 듯한 반가운 목소리였다는 거다, 젠장!
"어? 어어?"
"오, 저기 봐? 오오!"
눈이 번쩍 뜨이는 엄청난 미인이 나를 보며 알은 체를 하자 식당 안 남자들의 묘한 시선이 떠올랐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다. 질투와 시기나 부러움 같은 마음? 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부담스러운 것을 넘어서 극구 사양하고 싶은 심정이다. 누구라도 내 대신이 되고 싶다면 적어도 이 자리만큼은 시어리스 드레이븐이라는 이름과 최고 마도사라는 직위를 기꺼이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
'젠장!'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비굴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두 손을 파리 마냥 싹싹 비볐다.
"이, 이야! 시어리스라니요?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나으리."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절실한 마음을 가볍게 짓밟았다. 무려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곧장 내게로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잡아 버린 것이다. 끄아아아악!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간 치고 이 정도로 제법인 마나가 시어리스말고 몇이나 더 된다고 생각해? 잘못 보려고 해도 잘못 볼 수 없는걸, 시어리스. 응? 시어리스. 그냥 시어리스라도 불러도 되지? 며칠 밤낮을 몸도 섞은 우리 사이잖아. 응, 응?"
푸핫!
라파엘로의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던진 그녀의 그 한마디에 나는 그만 아직 다 넘기지 못한 오렌지 주스를 뿜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주스를 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피했다.
"하, 하하?"
나는 맥없는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다! 웃으며 던진 그녀의 한마디에 식당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한순간 말을 잃었던 사람들은 이윽고 가까운 사람들과 고개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힐끗힐끗 나를 보는 시선이 몹시도 냉랭했다.
"자, 잠깐만! 무슨 오해할 소리를 하는 거야? 모, 몸을 섞다니?"
"나 하나를 향해 너희들이 덤벼들어 그 커다랗고 징그러운 것을 마구 찔러댄 것은 사실이잖아. 그때는 정말 너무했어. 싫다는 나를 향해서 억지로, …흑흑."
"우와아아아!"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해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는 허겁지겁 그녀의 입을 가로막으며 고함을 질렀다.
"무, 무슨 오해할 소리를 하는 거야? 이상하게 표현하지마! 칼이랑 모닝스타랑 스태프잖아!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다들……."
뱉어놓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나는 정말로 안 돌아가는 고개를 무겁게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몹시도 싫은 얼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나를 경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라고? 스태프랑 칼이라고?"
"들었어? 너도 지금 들었지?"
"그런 흉기로 협박 했단 말야? 저런 금수만도 못한!"
몇몇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뒤로 빠져나갔고 몇몇은 돌아서 문이란 문에 가리기 시작했다. 앞선 몇몇은 자경단이나 병사를 부른 것일 테고 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망칠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젠장! 이 근처에서 봤다는 레드 드래곤이 너였냐?!"
나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재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찾은 녀석이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레드 드래곤 중에 그녀일 줄이야!
"시어리스."
"왜?"
"아이참. 뭐야? 난 시어리스라고 부르는데 이러기야? 너도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말고 세레나라고 불러 줘.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전부 꾸욱 해줄 거야."
히이익!
"아, 알았어! …세레나."
"좋아."
드래곤 중에 드래곤. 드래곤 중에 최고로 미친 드래곤. 허무와 광기로 미친 파괴의 드래곤, 세레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코는 어디에 있어?"
"몰라. 만난 지 오래됐어."
"불러 줘."
"…왜?"
"누구라도 자신의 목에 칼을 박아 넣고 비웃는 녀석이 있다면 한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겠어?"
"……."
역시 좋은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불가능해. 그녀는 엘프야. 그 쪽에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는 것은 힘들어."
그러자 돌연 세레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에게서 숨조차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한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야? 그렇다면 쓸모가 없잖아."
생글거리던 가면이 벗겨졌다.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고 촐랑거리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살기로 온몸이 저릿저릿 할 지경이었다.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두 눈이 황금빛으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오한이 들것만 같았다.
그래! 바로 저런 얼굴이다. 저런 눈이다. 저게 바로 드래곤 중에 드래곤! 미친 드래곤, 세레나 신의 본모습이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 그것은 아이가 자그마한 벌레를 보는 것과 너무나도 닮은 눈빛이었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밟아야 참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콰당!
"큭!"
나는 테이블을 걷어차며 낮게 뒤로 물러섰다. 한 순간에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숨을, 비명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 세레나에게서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리에 일어섰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은 여기를 보며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우당탕!
"모두 꼼짝 마!"
"신고자는 누구요? 범죄자가 누구입니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두꺼운 갑주를 몸에 걸치고 창으로 무장을 한 그들은 식당에 뛰어들어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이윽고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뒤늦게 방안에 흐르는 심상찮은 공기를 읽은 것이다. 이런 소동에서 세레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무심히 나를 보았다. 그리고 몹시도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죽어라."
"월 오브 아이스!"
그녀의 목소리와 내 고함이 동시에 겹쳐졌다.
콰아아앙!
별안간 그녀가 서 있는 바닥에서 새하얀 얼음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이거야말로 내 마술 중에 마술! 히든 매직! 대륙이 낳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흑마술사, 초마사 루쉔 님의 비기인 캐스팅 없이 시동어만으로 구현하는 마술이다. 물론 원조에 비하면 본래 위력에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것이지만, 그래도 허를 찌른다는 점에서는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흐응."
느닷없이 치솟아 오른 얼음 기둥에 몸을 꿰뚫리고도 세레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 어딘지 따분하고 지루해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놈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진다 싶더니 붉은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세레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지금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때 뒤늦은 비명과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도망쳐! 도망쳐! 마술사다! 마녀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식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빠지고 구르며 사람들은 정신 없이 도망쳤다. 하지만 늦어! 지금 와서는 너무 늦다고! 세레나가 붉은 안개로 변한 것은 폴리모프를 풀겠다는 것이다. 젠장! 드래곤으로 현신 할 생각인 거다. 그렇게 되면 식당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을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것이다.
'빌어먹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니!'
통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허를 찌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인간으로는 가히 세계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흑마술사인 내가 혼신을 다한 마술도 녀석에는 여흥거리조차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다음 스펠을 외웠다.
"헤이스트!"
힘있는 말에 부응하여 마나가 온몸을 휘감았다. 가속주문이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냅다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아니, 여유가 있다고 해도 돌아볼 것도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오싹한 한기가 올라왔다.
우득! 쿵! 와지끈!
나무가 터지고 벽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말할 것도 없었다. 식당이 무너진 것이다. 이미 실체화를 끝낸 것이다. 비명과 고함, 절망을 담은 절규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이미 마을 안에는 안전지대가 없었다. 나는 두 다리가 부서져라 내달리며 외웠던 주문을 외쳤다.
"플라이!"
무겁게 짓누르던 중력이 일순간 제로가 된다. 있는 힘껏 두 다리로 땅바닥을 굴렀다. 나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날았다. 눈앞을 가로막은 벽은 타고 반대로 뛰어올라 더 높은 하늘로 솟구쳤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회전했다. 그러자 눈이 쑤실 정도로 시뻘건 것이 시야를 가렸다. 그건 단번에 식당을 부수고 저 높은 구름마저 뚫을 듯이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었다. 놈은 고개를 비틀어 입을 쩌억 벌리고는 금세라도 불길을 토해낼 것처럼 포효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울부짖는다.
건물이, 벽이, 길이,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의 흔적들이 드래곤의 발자취에 볏짚처럼 쓰러졌다. 아우성을 지거나 울부짖는 비명으로 열에 들뜬 것처럼 사람들은 통곡을 해댔다. 개중에는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거나 엎드려 빌며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을 박살내버렸다.
쩌억 입을 벌린 레드 드래곤의 입안에서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화염 브레스다. 인간이라면 제아무리 탄탄한 근육을 가졌다고 해도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었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튼튼한 몬스터라도 당해낼 수 없는 게 드래곤의 브레스다. 하물며 드래곤 중에 드래곤! 미친 드래곤, 세레나 신의 화염 브레스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마을의 운명은 여기서 끝장이었다.
"시작부터 클라이맥스냐!"
나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시작은 사소한 일이었다. 눈으로 따지자면 눈 뭉치 하나. 아니, 눈송이 하나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눈사태가 되어 굴러 돌아왔다. 그건 공주님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별것도 아닌 일이 지금 내 목을 죄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는 보석이라면서?"
데이지 공주가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함께 정원을 걷던 도중이었다. 함께 걸었다고 해도 단둘은 아니다. 따라오는 시녀와 병사, 귀족을 더한다면 손발을 다 합쳐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사옵니다, 공주님."
"무척 예쁘다고 했어. 얼마나 비싸? 아바마마는 이게 엄청 귀한 거래. 귀하면 비싸대. 드래곤 하트는 이것보다 비싸?"
고개를 갸웃하며 공주는 보아란듯이 자신의 앞가슴을 장식한 브로치를 들어서 내게 보였다. 그건 숙녀라면 앙가슴이 드러날 위치였기에 무척 민망한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브로치를 내민 공주도, 그것을 들여다보는 나도 비난하지 않았다. 도리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공주의 나이가 이제 겨우 여덟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렇사옵니다, 공주님. 드래곤 하트는 무척 값진 물건이랍니다."
"왜 비싸?"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각각의 드래곤 하트는 그 드래곤의 색으로 빛난답니다. 이를테면 골드 드래곤이라면 황금빛으로 빛나겠지요."
내 말에 공주는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럼 레드 드래곤은 빨간 색이야?"
"그렇사옵니다, 공주님."
"데이지는 빨간 색이 좋아."
"저도 공주님에게는 붉은 색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붉은 드래곤 하트라면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공주님에게 무척 잘 어울리시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달리 큰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한 말이니 무심코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좀더 현명하게 말을 골랐어야 했다. 그랬다면 공주는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 없이 그 말을 꺼냈고, 공주 또한 생각 없이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고 만 것이다.
"응! 그러니까 붉은 색의 드래곤 하트가 갖고 싶어. 그러니까 시어리스가 가져다줘."
심장이 얼어붙었다.
"공주님."
"응?"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이참! 시어리스는 내 말을 안 듣고 있던 거야?"
"죄송하고도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부주의한 저를 힘껏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냐, 괜찮아. 그렇게 사과하지마. 나, 하나도 화 안 났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공주를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레드 드래곤의 하트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걸까? 그때, 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붉은 색의 드래곤 하트를 가져다 달라고 했어."
얼어붙은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래곤 하트를?"
"응! 부탁해."
오, 젠장! 빌어먹을! 역시 틀림없다. 공주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드 드래곤의 하트를! 드래곤 중에서도 포악하고 잔인하며 튼튼하기가 으뜸이라는 레드 드래곤의 하트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예쁜 빨강이 좋아. 반짝반짝하는 새빨간 보석은 정말 예쁠 거야. 부탁해, 시어리스. 응? 가져다줄 수 있지."
공주는 내 팔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았다. 공주를 따라서 내 넋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말로는 전부 표현이 안될 만큼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정신 줄이 하나 둘씩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공주 님!"
그때 등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라서 아득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시종과 귀족들이 공주를 말리려고 하고 있음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그 소란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모두 조용히."
나는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자그마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소녀라도 분위기는 읽을 수 있는 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내새끼들은 다 뒈지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귀여운 소녀는 다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는 언제나 밝게 웃어야 한다. 아무렴!
"공주님."
나는 공주를 불렀다. 내 부름에 공주는 움찔, 하며 몸을 떨었다. 겁먹은 걸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고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공주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공주를 불렀다. 이번에는 애정을 가득 담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공주님."
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작고 왜소한 어깨가 떨고 있었다. 안으로 끌어당긴 턱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말없이 공주의 두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공주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 죽여 흐느껴 운 뒤에야 나를 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보며 공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데이지는 나쁜 아이야?"
"……."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심장이, 아까 얼어붙어 금이 갔던 심장이 와창장! 하고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간단하다. 고양이 손을 하고 눈시울을 비비며 울먹이는 공주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아! 나는 틀림없이 반해버렸구나, 하고.
"공주님."
"응?"
"공주님은 나쁜 아이입니다."
"우우!"
공주는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변했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공주의 한 손을 잡고.
"제 심장을 훔쳐갔거든요."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니, 얼어붙은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쩌억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장을 훔쳐간다는 게 뭐야?"
"제가 공주님을 너무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응! 나도 시어리스가 좋아."
공주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맙소사, 이토록 사랑스럽다니! 저절로 콧등이 뜨거워졌다. 공주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시어리스, 어디 아파? 코에 피나."
나는 소매로 코피를 쓰윽 닦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초일류 흑마술사이자 로렌츠 왕국의 궁중 수석 마도사이며 드래곤 슬레이어인 시어리스 드레이븐이 맹세합니다. 이 몸, 반드시 공주님께 아름다운 드래곤 하트를 바칠 것을. 그리고 그 날, 공주님께 정식으로 청혼을 할 것을."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의 안색은 이젠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개중에는 졸도해서 쿵, 하고 뒤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볼을 부풀린 채로 검지를 입에 물었다.
"데이지는 시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드래곤 하트를 가져다 드린다는 거죠."
내 말에 공주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가져다 주는 거야? 정말? 빨갛고 예쁜 걸로?"
"물론입니다. 청혼 선물이니까요. 제가 공주님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응! 나도 시어리스가 너무 좋아. 고마워. 기다릴게."
공주는 밝게 웃었다. 그 햇살 같은 미소를 보며 나 또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맹세했다. 공주가 원한다면 드래곤 하트는 몇 개라도 가져다 줄 생각이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어떤 드래곤 하트를 공주가 마음에 들어할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잔뜩 가져와서 고르게 할 생각이었다. 아니, 전부 줄 생각이었다. 이 세상의 레드 드래곤 따위 씨를 말려도 좋았다. 그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젠장 맞게도 처음에 만난 드래곤이 하필이면 드래곤 중에 드래곤. 광기와 파괴로 미친 허무의 미친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세레나 신이라니!
콰아아아아아!!
그런 생각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자니 별안간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화염 브레스였다! 제기랄! 나는 허겁지겁 몸을 뒤로 빼며 재빨리 캐스팅에 들어갔다. 죽을힘을 다해 캐스팅에 들어갔다. 번개처럼 마력 구성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갔다. 뇌가 터져라 캐스팅을 한 덕분에 나는 간발의 차이로 화염 브레스가 쏟아지기 전에 주문 구성을 마칠 수 있었다.
"텔레포트!"
공간이 일그러진다.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온몸에 격심한 중력이 걸리며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싶더니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나는 허공에 내팽개쳐졌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것과 동시에 몸이 고속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허공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윽! 뜨거, 뜨거!"
서둘러 마술을 완성한 탓에 이동 거리가 짧았다. 불과 몇 십 미터를 두고 지상에서 허공까지 시뻘건 불길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열기에 얼굴이 익어버릴 것만 같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콰콰콰콰콰쾅!
대기가 흔들리며 폭음이 터졌다. 브레스가 닿은 곳은 산이고 들이고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땅이 갈라지며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명피해는 없었다. 다행히 놈의 브레스는 마을을 빗나가 터진 것이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넋을 잃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 마을은 끝장이었다. 아니, 이미 끝장인가?
나는 재빨리 등을 돌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았다. 놈이 펄럭거리며 뒤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다음 마술에 들어갔다. 그때, 느닷없이 매서운 바람이 앞에서 불어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반대 방향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의 정체는 드래곤이 들이마시는 숨결이었다.
휘이이이이이이!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눈을 가리고 놈을 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드래곤은 한껏 숨을 들이켜 두꺼비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제기랄!
"또 브레스냐!"
점차 바람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빨아들이자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놈은 두 볼을 잔뜩 부풀린 채로 조용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뱉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다. 놈이 숨을 뱉으면 일대는 불바다가 될 것이다.
'장난이 아냐!'
이윽고 대기의 흐름이 완전히 멎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준비동작까지 갖춰서 진심으로 내뱉는 것이었다.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세레나 신이다. 놈이 진심으로 내뱉는 브레스는 차원마저 태워버린다. 플라이는 물론이고 텔레포트로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스펠은 아직 멀었다.
"젠장!"
방법이 없었다.
"세레나 신!"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고개가 돌아가고 녀석의 눈이 보였다. 그 크고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하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가 저절로 딱딱거렸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겁먹고 움츠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나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드래곤 중에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세레나 신 님이라고 한다면 멀게는 애스가 대륙부터, 가깝게는 로렌츠 왕국까지, 인간은 물론이고 들짐승마저 모르는 존재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금세라도 브레스를 내뿜을 것 같았던 드래곤이 따악하고 허공에 정지했다. 놈은 숨을 머금은 채로 나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며 나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드래곤이란 허영심으로 가득 찬 종족이었다. 등껍질이 뱃가죽에 붙어도 자신을 치켜세우며 아첨을 하는 상대가 있다면 일단 찬사가 끝낼 때까지는 으스대며 들어주는 바보 같은 놈들인 것이다. 제 아무리 미친 드래곤인 세레나라도 일단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이때가 기회였다. 드래곤이 자뻑에 빠져 헤롱헤롱 되는 틈을 노려 나는 몰래몰래 주력을 구성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녀석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멋진 바디라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멋진 몸매죠. 더구나 그 아름다운 피부는 이 세상의 어떤 존재라도, 아니! 그 어떤 드래곤이라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십니다. 더구나 그 눈! 그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은 정말로 최고죠.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존재라도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또, 또!"
"시어리스 드레이븐."
나는 느닷없는 말에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놈은 여전히 볼을 부풀린 채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의 정체가 드래곤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레인지 된 메시지 마술인가? 놈은 마치 한숨이라도 내쉴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시간 낭비였군. 그만 닥쳐라."
아차! 단지 어이가 없어서 굳어 있었던 거였을 줄이야, 젠장! 쪽팔림을 각오하고 있는 대로 아부를 떨었는데. 내 수치심을 돌려줘!
콰콰콰콰콰콰!
시뻘건 불길이 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태울 듯한 화염이! 아니, 업화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듯한 끝없는 열기를 머금고 나를 덮쳤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나 또한 캐스팅을 끝낸 뒤였다. 내 입에서 힘있는 말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백업! 프라이스매틱 스페어!"
마나가 나를 감싸고 허공에서 춤을 추듯 휘몰아쳤다. 동시에 힘껏 내민 내 손을 중심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온갖 빛깔로 반짝이는 마력이 뻗어 나왔다. 무지개빛깔의 마력은 내 온몸을 마치 막을 친 것처럼 둘러쌌다. 이것이야말로 이 몸이나 쓸 수 있는 고급 방어 마술, …우왓! 잘난 척하는 틈에 불꽃의 폭풍이 코앞까지!
쿠쿠쿠쿠쿠쿠!
눈앞이 아득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붉은 화염뿐이었다. 마치 프라이팬 위에 던져진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따위 고통에 괴로워할 틈이 없었다. 조금씩 방어막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브레스를 완전히 막아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윽고 방어막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이게 뚫렸어?!"
나는 무너져 내리는 방어막을 정신 없이 복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우는 것보다 다시 뚫리는 속도가 빨랐다. 점차 방어막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 그 틈새로 브레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팔이 녹아 내리고 다리가 불탔다. 머리는 순식간에 꼬부라져서 새하얀 연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할 틈이 없었다. 나는 억지로 입술을 놀리며 방어막의 복구에 온힘을 다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놈의 브레스가 서서히 줄어든다 싶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크으으으!"
땅바닥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순간 정신을 잃고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플라이 마술로 간신히 추락을 모면했다. 하지만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가 없었고 오른쪽 다리는 다행히 형태는 멀쩡했지만 불타서 시꺼먼 연기를 모락모락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뒤늦게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턱이 덜덜 떨리고 눈앞에는 번개가 쳤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리, 리, 리!"
젠장! 맛이 간 것은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내 몸에서 성한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조그마한 틈새 사이로 브레스에 살짝 닿은 것이 전부였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간단한 주문이라서 시동어만 외치면 되는데, 그 말이 마저 나오지 않았다. 턱이 쉴새없이 덜덜 떨어서 나오는 말을 왕창 씹어먹고 있었다.
'젠장! 이판사판이다.'
나는 그나마 상태가 좀 나은 왼쪽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는 말을 더듬는 내 얼굴에 힘껏 먹여 주었다. 콰득, 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입술 위가 뜨겁고 축축했다. 보나마나 코피가 터진 것이다. 코뼈도 덩달아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떨리던 몸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나는 곧바로 시동어를 외쳤다.
"리스토어!"
새파란 마력이 뻗어 나와 용트림을 하듯 내 몸을 감았다. 동시에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몸이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오케이! 나는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리스토어란 이런 마술이었다. 백업이라는 마술로 몸을 마력으로 떠놓으면 머리가 날아가지 않는 이상은 리스토어란 시동어로 언제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무적의 마술 같지만 사실은 실제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력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데다가 보통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서 움직임도 느려지고 지속 시간도 무척 짧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마나가 댐이 터진 것처럼 쭉쭉 빨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가능한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미러 이미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안개처럼 내 모습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마나가 사라졌을 즈음에는 내 주위에는 나와 똑같은 모습의 허상이 8개나 생겨났다. 그것들은 나와 똑같이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플라이!"
하늘을 박차며 우리는 공중에 정지했다. 맞은 편에는 놈이 거대한 목을 세우며 말없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치켜올리며 이럴 때 반드시 써먹으려고 준비했던 대사를 외쳤다.
"와라! 멍청한 드래곤아!"
"온힘을 다해 덤벼라, 인간."
녀석은 나를 보며 실로 기쁜 듯이 웃었다. 드래곤인 주제에 쓸데없이 인간 냄새가 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허공을 박차며 놈을 향해 날아올랐다. 힘껏 좌우로 펼친 두 손에는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모이기 시작했다.


"꾸엑!"
한심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나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놈에게 거만한 어조를 내뱉으며 자신만만하게 덤빈 지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은 뒤였다. 나는 땅바닥을 볼품 없이 데굴데굴 구른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악! 학! 크으윽!"
온몸이 잘근잘근 밟힌 것처럼 아팠다. 푸시시,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백업이, 그리고 미러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났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눈앞이 흐렸다. 마나고 체력이고 할거 없이 모두 바닥이었다. 간신히 서서 버티는 것이 한계였다.
"젠장! 역시 혼자서는 무리인가?"
나는 한때 녀석을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믿음직한 동료가 한 타스나 있었다. 지금은 달랑 나 혼자다. 등을 맡길 수 있는 그 많은 친구들과 행운과 우연이 겹쳐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상대다. 나는 더 강해졌지만 역시 나 혼자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놈을 이길 수 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드래곤이 느릿한 걸음으로 쿵쿵, 하고 땅을 울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치고는 제법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으스대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별로 나를 깔보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이런 녀석인 것이다, 드래곤이란 놈들은. 그랬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말없이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때 별안간 시커먼 그림자가 태양을 가렸다. 고개를 드니 놈의 거대한 앞발이 보였다. 녀석은 나를 밟아서 짜부라트릴 생각인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고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멍하니 지켜보면 여기서 끝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날 길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가 번쩍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건 완전히 도박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레나 신!"
나는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놈은 멈칫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세레나 신! 너는 근사하다! 멋지고 강한 녀석이 우아하기까지 하지. 하지만! 너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거다. 너는 홀로 태어나 홀로 살아갈 뿐이다. 네 이름 앞에 붙여질 성은 없으며 네 이름 뒤에 붙여질 성도 없다. 너는 홀로 완벽하기에 다른 피조물들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너는 인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엘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드워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의 죄는 바다보다 깊으며 하늘보다 높은 것이다!"
망가진 성대로 소리를 지르자니 고함 속에 피가 섞였다. 하지만 아프다고 입다물 때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놈을 비난했다. 그러자 놈이 무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억지다, 인간."
놈의 말대로 그건 완전히 억지였다. 그게 완전 억지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불안간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대로 놈은 당황하고 있었다. 아닌 척 해도 놈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놈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에코를 찾기 위함이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복수가 아님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복수를 생각했다면 나 또한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다른 누구보다 에코의 행방을 먼저 찾았다. 나는 그 말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레나를 쓰러뜨렸을 그때 에코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 그녀는 놈의 목에 자신의 번개 검, 스톰브링거를 꽂은 채로 차게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놈은 드래곤이다. 그것도 드래곤 중에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광기와 파괴로 미친 허무의 드래곤이었다. 그런 녀석이 겨우 인간과 유사 인종으로 구성된 파티에 패한 것도 모자라서 비웃음을 당했다. 아마도 놈에게는 에코가 던진 그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놈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에코를!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걸로 너는 지고 내가 이겼다. 왜냐면 너는 홀로 서 있는 드래곤이고 나는 더불어 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너는 영원히 알지 못할 거다. 암! 너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였다. 유치하고 진부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잘 먹히는 것은 항상 이런 거다. 녀석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광기가 섞인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녀석은 천천히 앞발을 내렸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만한 어조로 으스대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헛소리였다. 하지만 먹혀들었다. 녀석은 내가 에코와 똑같은 말을 하자 노골적으로 표정을 바꾸며 반응하고 있었다.
다 죽어 가는 녀석이 으스대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주제에 뭘 잘못 먹은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지가 이겼다고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이 녀석을 죽이기는 좀 찜찜하군, 하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허공을 향해 검지를 치켜세우고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걸어라, 세레나! 타인을 알아라! 인간을 보아라! 네 발로 걸어서 인간을 만나고 네 손으로 인간과 악수를 하고, 네 입으로 인간과 말을 나누어라. 그렇게 인간을 배워라!"
두 다리를 당당하게 세운 채로 한 손을 허공에 찌른 새러데이 나잇 피버 자세로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깊고 커다란 눈동자를 째려보고 있자니 심장이 유리처럼 와장창, 하고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산타할아버지였다. 녀석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그건 이 몸은 뭐든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 허세 따위는 처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니, 물러서면 끝장이었다. 나는 녀석을 눈빛으로 쏘아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힘껏 노려봐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무겁게 시간이 흘렀다. 점차 눈앞이 흐려졌다. 녀석을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표백되는 것만 같았다. 신경이란 신경이 죄다 들쥐에게라도 갉아 먹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기를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놈이 고개를 뒤로 뺐다.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게 인간을 이해하라고 했다. 하지만 너는 개미를 이해하려고 하는가?"
걸려들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훗, 하고 웃으며 스스로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까딱이며 이렇게 말했다.
"하찮은 질문이군. 나는 개미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개미는 나를 죽일 수 없으니까."
여기서 보통의 드래곤이라면 갈 길은 뻔했다. 모욕을 받았으니 나를 실컷 괴롭힌 끝에 갈가리 찢거나, 혹은 성질 급한 녀석은 바로 짓밟던가.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놈은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놈의 기특한 점이었다. 녀석은 미쳤지만 좀 이상하게 미쳐 있던 것이다.
놈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허공에 대고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녀석의 몸이 붉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안개는 땅바닥으로 낮게 깔리더니 이윽고 내 앞에서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처음에 보았던 금발의 미녀였다.
"엘프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나는 그녀를 찾아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 또한 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것은 네 안에도 그녀가 있다는 말일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네 말에 따르겠다. 인간을 보고, 인간을 배우고, 인간을 알겠다."
그녀는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두 사람을 배경으로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광경이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멋지게 갈무리되었다. 남은 것은 퇴장뿐이었다.
"인간과 걸어라, 드래곤이여."
자! 이제는 마무리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향해 등으로 작별을 고한 채로 멋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돌아서는 이 모습은 누가 봐도 흠잡을 때 없는 멋진 퇴장일 것이다. 하지만 느긋한 걸음과 달리 마음은 조급하고 답답했다.
'서둘러 도망치지 않으면 끝장이다!'
녀석이 날뛴 덕분에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멍하니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관리에게라도 붙잡히면 일이 귀찮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그런 생각에 초조해질 무렵, 별안간 팔짱을 끼는 손이 있었다.
히익!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넋이 나가다 못해 짜부라지는 것만 같았다. 느닷없이 팔짱을 낄 사람은 뻔했다. 팔짱을 낀 것은 보드랍고 가느다란 팔이었다. 그게 누구의 팔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돌연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는, …젠장! 예상대로 세레나 신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요?"
"네 말대로 나는 인간을 모르잖아. 그러니까 네가 알려줘. 함께 여행을 하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건 정말이지 한여름의 바람처럼 상쾌한 미소였다. 그게 얼마나 멋진 미소였냐고 하면 그 햇살을 닮은 미소에 어둠에 찌든 내 몸 따위는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잘 부탁해."
실체는 어쨌든 겉모습만은 엄청 미인이 부드러운 가슴을 내 팔에 비비며 팔짱을 끼는데도 기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건 내가 특별히 남다른 취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자신 있게 밝히겠다. 나는 어린 여자애가 좋다. 15세 이하의 귀여운 소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려도 무섭지 않다. 성격 나쁘지만 귀여운 여자아이와 마음씨 좋은 영감이 다툰다면 나는 기꺼이 영감쟁이를 반죽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녀가 아닌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절대 아냐!
"한때는 목숨을 노리던 적이 이렇게 여행 동료가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훈훈한 이야기네. 뭐, 좋아!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으면 말해봐. 서비스로 브레스를 확 뿜어 줄게."
"고, 고,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갈 길이 좀 바빠서. 이만, …끄아악!"
"사양한다는 게 무슨 의미야? 죽여달라는 소리야? 응?"
세레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두드드득, 하고 팔을 가로질러 초고속으로 소름이 올라온다.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고 보니 레드 드래곤은 왜 찾는 거냐?"
"…노 코멘트."
"죽을래?"
"드래곤 하트가 필요해서야! 레드 드래곤의!"
세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하트가? 왜? 거기서 마나가 더 필요해? 초마사라도 될 생각이냐?"
"훗! 여기에는 슬픈 전설이 있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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