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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배트와 주먹과 불협화음
글쓴이: noanswer
작성일: 12-07-16 18:48 조회: 2,922 추천: 0 비추천: 0
세하는 아주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물론, 학기 초에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선 반성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스스로의 인기가 실제 인기보다 과소평가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문제였지만, 자기 자신의 힘에 너무 도취되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만에 하나 학기 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을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학기 초에 그 말을 하려고 하는 자신을 막는 것. 만약 그 말만 막았다면, 신학기로부터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방과 후에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싸움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공부시간이 충실해졌을테고(확신할 순 없다), 그랬다면 시험 성적도 좋아졌을 테니까(확언할 순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 시험 성적이 안좋은 것마저 자신이 학기 초에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랑 싸워서 이기는 사람과 사귀겠어! … … 그런 소릴 왜 했을까?”
세하는 잔뜩 풀이 죽어서 중얼거리며 자기 앞에 널부러져있는 떡대를 바라보았다. 몸을 움찔 움찔 떠는 모습이, 상태가 그리 양호해보이지는 않았다.
“죽지는 않겠지.”
기대와 희망을 담았다기보단, 많은 사람을 때려눕혀온 연륜을 담아 그렇게 진단한 세하는 뒤로 돌아가 근처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근처에서 흠칫거리며 보고있던 남자들 패거리가, 일부는 쏜살같이 도망치고 일부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세하를 피해 쓰러진 떡대에게 달려갔다.
‘뭐라고 했더라, 근처 무슨 짱?’
세하는 잠시 전을 회상해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저 정도로 쓰러진 상대를 굳이 기억해둘 필요는 없다. 근처에서 뭐하는 알아주는 짱이라면서 으스대던 떡대는 복부에 한대, 복부에 한대, 그리고 다시 복부에 한대를 맞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저게 어디 짱이라면, 먹짱같은 거 아닐까? 세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떡대가 쓰러진 교사 뒤에서 나와 교문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싫다. 집에 가서 숙제를 끝내고 드라마라도 보며 기분 전환을 해야지, 생각하며 세하는 조금 기분을 전환해보았다.
“수지랑 얘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세하는 나름 절친인 수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평소 같이 들어가곤 하던 수지는 살 책이 있다며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가버렸다. 청소 당번이었던 세하는 그런 수지를 보내고, 무사히 청소를 마친 다음 하교를 시작했는데 채 교사를 나서기도 전에 떡대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대체 내 어디가 좋을까? 하며 세하는 의미없이 고갤 갸웃거렸다. 세하 본인이 남자라면, 머리도 별로 좋지 않고 말보단 주먹이 먼저 나가는 자신같은 여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간 도전해온 남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녀석들을 보면 역시 몸이 먼저 움직여버리니까. 몸? 역시 몸일까? 외모?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처치곤란인 세하는 ‘마음이 아니면 역시 몸이겠지'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고백해온 남자들의 목적을 일축했다.
어차피 일회성 만남-일회성 싸움 상대일 뿐이니까 멋대로 생각해도 상관 없겠지, 대충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세하는 집에 가서 뭘 할까 고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하고 쇳소리가 났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다.
느닷없이 들린 쇳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리가 난 곳을 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쇠로 된 교문에 닿아있는 알루미늄 배트였다.
배트랑 교문이 부딪혀서 소리가 난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배트로 교문을 때려서 그런 소리가 난거지.’
그런 생각의 이유는 간단했다.
교문에 닿아있는 배트의 손잡이를, 손이 잡고 있었으니까.
걸음을 멈춘 세하의 5미터 전방, 반쯤 문이 닫혀있는 교문가에서, 왼손에 알루미늄 배트를 든-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의 남학생이 서있었다.
‘음,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이겠지?’
세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꺄악.”
남학생이 세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교실에 프린트물을 두고 왔네. 얼른 가서 가지고 돌아와야겠다.”
“야, 그건 아니지.”
곤란한 듯 서둘러 만류하는 맑은 목소리. 세하는 만류 때문이라기보다, 상황과 사람에 어울리지 않게 맑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정말 눈치도 없는 목소리다.
세하는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역시, 혹시, 배트 들고 거기 서있는 거, 나랑 관련된 건가요?”
“응.” 남학생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말고는 용무가 없어.”
세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오늘은 기분이 매우 나빴다. 평소에는 이틀에 한 명, 사흘에 한 명 꼴로 오던 ‘연애지망생'들이 갑자기 오늘은 하루에 세건이나 있었고, 그 셋 다 완전히 취향이 아닌 계열이었으며, 그 때문은 아니지만 절친과도 같이 집에 못가고, 휴식 시간도 빼앗기고, 엉망이었는데, 그래서 저 떡대를 끝으로 오늘 할당량은 끝- 집으로 가자- 하고 생각했는데.
마치, 고생고생해서 시험공부를 끝냈더니, 그 뒤로 두 챕터 더 시험 범위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예요?”
세하는 귀찮아하며 물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죠?”
세하의 물음에 남학생이 베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그냥 여고생에게, 배트를 들고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얼마나 되겠어?”
세하가 대답했다. “야구 응원?”
세하의 대답에 남학생이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교문에 닿아있던 배트를 들어, 세하를 가리켰다.
“유세하, 열여덟. 고등학교 올라와서 싸움으로는 단 한번도 진 적 없음.”
남학생이 말한 그대로였다. 세하는 입을 다물고 조금 더 진지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크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보였지만, 일단 손에 흉기를 들고 있으니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예쁘지만 친구가 없음.”
“없는건 아니거든요!”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예쁘지만 친구는 한명뿐.”
“.......”
확실히 그녀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수지 밖에 없긴 하다. 세하는 이를 앙다물고, 처음으로 적개심을 띄며 남학생을 노려보았다.
세하의 그런 태도를 본 남학생이 담담히 말했다.
“아무래도 예쁘다는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음.”
“앗차! 물론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깜짝 놀란 세하의 말에 남학생이 빙긋 웃었다.
“세하는 참 솔직하구나. 난 그정도로 솔직하진 못해서 이렇게 되고 말았어.”
남학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그 표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워보이기도 하고, 굉장히 슬퍼보이기도 해서 세하는 뜻을 묻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남학생은 그런 세하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자신과 싸워서 이기면, 상대와 연인이 되겠다고 선언함. 맞아?”
역시 그 얘기였구나, 생각하며 세하는 방금 전의 말에 대한 의문을 지워버렸다. 말하자면, 그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상대는 적이다. 그 조건은,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는 의미가 없으니까. 세하는 자세를 낮추고, 왼 발을 살짝 뒤로 빼며 대답했다.
“맞아요. 도전하실래요?”
그런 세하의 전투적인 자세를 보며, 남학생은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다음 고개를 숙였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하를 가리키고 있던 알루미늄 배트는 어느새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학생은 왼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인 다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은 뒤 말했다.
“나는 소진후라고 해. 이 알루미늄 배트를 무기로 쓸거야. 널 이겨서 네 애인이 되겠어.”
진후는 땅을 향했던 배트를 들어올려, 다시한번 세하를 겨냥한 뒤 말했다.
“네게 도전하겠어.”
“인정할게요.”
세하는 대답하면서 더욱 자세를 낮췄다. 솔직히, ‘아무리 날 애인으로 삼고 싶다고 해도 무기를 들고 오다니, 너무 치사한 거 아냐?’라는 생각을 평소부터 해오고 있었지만, 상대가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어떤 무기를 들고오더라도 그녀 자신이라면 충분히 대처하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런 불평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 진후라는 남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몸도 뚜렷하게 단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무기가 그리 능숙해보이지도 않았다. 세하는 진후가 배트로 자신을 겨냥했을 때, 배트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배트 무게를 완전히 지탱하지 못하는거다.
자기가 들고 있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눈빛만큼은 진지하지만, 그 외, 체력도 기술도 무기도 전부 자신의 아래 있다. 그건 알 수 있었다.
세하에겐 이미 승리가 보이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가방을 땅에 떨어뜨렸다.
털썩.
진후가 물었다.
“가방 안에 뭐 들었어?”
“책이랑 갤탭......악!”
무심코 대답하던 그녀는 가방 안에 들어있던 고가의 전자기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아까도, 싸우기 전에 가방을 조심스레 내려놨었는데! 세하는 얼른 가방 안의 태블릿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후웅.
하는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지만, 세하는 반쯤 굽힌 몸을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듯 뒤로 날렸다. 깡 하고 배트가 바닥을 치는 쇳소리가 났다. 세하는 먼저 왼발을 딛고 속도를 죽인 뒤 오른발로 몸을 지탱해, 달릴 준비를 하는 자세가 되었다. 시선은 전방의
배트를 들고있는 진후를 향해
그리고 땅을 박찬다.
“햐앗!”
예쁘장한 용모에 걸맞지 않은 거친 기합소리와 함께 세하는 진후의 허벅지를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으악!”
진후는, 막 치사하게 기습한 사람같지 않은 얼빠진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몸을 뺐다. 세하의 오른발은 진후의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진후는 세하의 발차기를 피한 뒤에도 좀 더 뒤로 간 뒤 말했다.
“말도 안하고 그렇게 차려고 하는게 어딨어?”
"치사하게 신경 돌리고 기습한 시점에서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 않아요?"
"약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배트를 묵인한 걸로 다 했다고 생각해요."
"하긴" 진후는 자신이 들고있는 배트를 흘끔 보았다. "그건 그래!"
기합같은 외침과 함께 진후는 위에서 아래로 배트를 휘둘렀다. 세하는 그걸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 몸을 옆으로 빼 간단히 배트를 피하며 동시에 왼손을 진후에게 내뻗었다.
"큭!"
진후는 배트를 회수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황급히 허리를 뒤로 꺽었다. 세하는 반쯤 움켜쥔 주먹을 순간적으로 펴 반뼘의 리치를 더 확보했지만 진후의 앞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이었다.
"칫!"
세하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왼손을 회수함과 동시에 진후를 향해 한발짝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왼발을 디딤발 삼아 다시 한 번 왼손을 내질렀다.
진후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드득!
배트가 땅바닥을 긁으며 세하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세하는 순간적으로 계산해, 디딤발에 균형을 잃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배트의 힘점에 더욱 가까워짐으로써 작용점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세하는 진후의 품 안으로 안겨들어갔다.
"윽!"
세하의 등 뒤에서 배트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진후는 당황하며 세하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세하의 옆구리를 갈기려던 배트는 허공을 갈랐고, 그 여파로 배트를 들고있던 진후의 손은 품 안에 들어온 세하를 끌어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안은 쪽 보다는, 안긴 쪽이 공격하기 쉽다.
세하는 오른주먹으로 진후의 명치를 쳤다.
"허헉!"
진후의 입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저절로 허리가 꺽였다. 그의 손에서 배트가 땅으로 떨어졌다.
세하는 다시 오른손을 뒤로 빼며 말했다.
“비겁해져도, 소용 없죠?”
거의 세하에게 안긴 상태에서 진후가, 지나치게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만도 않아.”
그 평온함에 놀란 세하가 서둘러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봤지만, 진후는 그보다 먼저 세하를 끌어안은 그대로 그녀의 목을 왼 손으로 감은 뒤 오른손으론 그녀의 교복 상의 등부분을 붙들고, 그녀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녀를 거꾸로 들어올렸다.
“꺄, 꺄악!”
“너 생각보다 무겁다.”
“죽일거예요!”
세하는 목이 졸리고 거꾸로 들린 상태에서도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다리를 힘껏 버둥거렸다. 반동을 주면, 분명 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계산이었다.
진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부터 써보고 싶었어, 스플렉스.”
그리고 세하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세하는 눈 앞이 시꺼매지는 것 같았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등이 아프다기보단 따가웠고, 몸이 조각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상황 판단이 안되서, 버둥거리지도 않고 있을 정도였다.
“에구구구. 역시 이거, 기술 거는 사람도 아픈거네.”
진후가 당연한 소리를 하며 일어났다.
“보통 레슬링 기술은 링 위에서 하니까...... 콘크리트 바닥은 충격이 너무 커.”
진후는 몸을 숙여 아까 떨어뜨린 배트를 줍다가, 답답한 듯 교복 셔츠를 풀어헤쳤다. 가숙으로 덧대어진, 걸상 등받이만한 철판이 떨그렁 하며 땅으로 떨어졌다. 철판의 가운데는 마치 블랙홀 모형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진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사람 주먹 힘이 이래?”
“으으, 으윽.......”
마치 대답하듯, 등 뒤에서 세하의 이 앙다문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후는 고개를 흔들며, 뒤로 돌았다. 스플렉스를 먹었으니, 머리를 진후 쪽으로 향한 채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어야 할 세하는 반의 반 쯤 일어난 채로, 양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불타는 듯 이글이글한 두 눈으로 진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후는 말 없이 그 모습을 보다가, 자기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며 배트를 곧게 쳐들었다가, 바로 내리쳤다.
깡,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배트는 분명 땅을 치지 않았으니까. 난 소리는, 굳이 따지자면 퍽, 에 가까웠다. 퍽, 하고, 배트가 그녀의 몸을 때렸다.
세하의 신발 밑창을 때렸다.
진후가 눈썹을 꿈틀 했다.
진후의 배트를 피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세하는, 일어나려던걸 포기하고 그대로 땅에 누우며 발바닥-신발 밑장으로 진후가 내리친 배트를 받은 것이다. 세하는 찌릿한 발바닥에 인상을 찌푸렸다.
진후가 말했다.
“팬티 보이는데.”
“속바지예욧!”
세하가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항변하며 발을 높이 찼다. 진후의 배트가 마치 역재생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했다. 진후는 이를 앙다물고 다시 배트를 내리쳤지만, 이번에는 세하가 오른쪽으로 굴러서 피했다.
깡!
진후는 세하 쪽으로 몸을 돌리며 공격에 대비해 한걸음 물러섰고, 그 덕에 세하가 견제용으로 내뻗은 잽을 피할 수 있었다. 세하는 아직 스플렉스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 상태에서의 가벼운 잽만으로도 진후의 얼굴에 풍압이 일 정도였다.
‘그냥 견제용 잽이라도, 맞으면 아프다.’
역시나 당연한 생각을 하며 진후는 가벼운 스탭으로 세하와의 거리를 쟀다.
“저기요.”
세하가 그런 진후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아까 그거, 본거요.”
“뭐?”
“아까 본거 있잖아요!”
“아, 팬티?”
“그거 속바지예욧!”
진후는 빨개진 세하의 얼굴에, 사실은 제대로 못봤다는 걸 앞으로도 말해주지 않기로 했다. 세하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방금 전 화두는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토스였고요.”
“토스였구나. 나라면 그렇게 안할텐데.”
“시끄러워요. 어쨌든, 갑자기 궁금해져서 말인데요.”
진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차피 곧 연인이 될테니까 서로 궁금증을 푸는 건 좋은 일이지.”
세하가 이를 드러내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말은 잘하네요. 죽일거예요.”
“그래서, 궁금한건?”
생명의 위협에 진후가 말을 돌리자, 세하도 별 반발 없이 따라왔다.
“왜 저한테 반말 하세요? 혹시 삼학년?”
“아닌데?”
“동갑이예요?”
“아닌데?”
“혹시, 아니겠지만, 분명 나보다 연하고, 일반적으로 나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 일학년?”
“맞아.”
세하가 탕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발로 땅을 찼다.
“너, 나보다 어리면서 반말하고 있었어?!”
“응.”
“죽일거야!”
세하가 몸을 낮추고 대시해 들어오자, 진후는 과장되게 왼쪽으로 굴렀다. 세하가 낮게 휘두른 주먹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던 것도 그 과장된 회피 덕분이었다. 따사롭게 대화한 시간을 통해 스플렉스의 충격을 수습했던 세하는 즉시 몸을 진후 쪽으로 돌려 발을 높이 든 뒤 내리찍었고, 진후는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배트를 머리 위 가로로 들어올려 그 발을 막았다. 양 손으로 배트 자루와 끝을 잡아 가까스로 지탱한 것이다.
“반말 좀 들었다고 죽이려고?”
자칫 잘못했으면 알루미늄 배트를 정강이로 내리찍을 뻔 했던 세하는 번개같은 판단력으로 무릎을 좀 더 굽혀 신발 밑창으로 배트를 내리찍었고, 한 숨 돌릴 여유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후의 푸념을 무시하며 그녀는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세하가 누르는 힘에 어깨가 꺽이는 기분을 느끼며, 진후는 배트 끝을 지탱하고 있던 왼손에 힘을 뺐다. 배트가 기울어지며, 배트 위에 발을 올리고 있던 세하의 발이 미끄러졌다.
“쳇!”
세하는 혀를 차며 배트에서 발을 뗐고, 진후는 세하가 한 다리로 서 있는 와중 몸을 일으키며 세하의 머리를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으악!”
별로 귀엽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세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트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그랬을 터였다.
배트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가다가 갑자기 밑으로 ‘쏘아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 휘두르던 속도는, 한손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강해서 절대 중간에 그렇게 멈출 수도 없었고, 배트를 휘두르던 진후의 자세도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세하의 머리를 향해 내리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관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갑자기 배트가 아래로 ‘내리쳐졌다’.
‘이건, 말도 안돼!’
행동으로는 되었지만.
꽝!
하는 소리가 들렸을 리는 없지만, 기분 상 들린 것 같았다. 배트는 아무런 사정도 봐주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정수리가 아니라 이마로 배트를 받은 것은, 본능적으로 배트의 궤도를 지켜보던 덕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배트의 회피를 꾀하며, 배트의 움직임을 읽기 위해 고개를 들었으니까. 배트가 떨어져내릴 때 그녀의 이마를 치게 된 것이다.
몸의 힘이 전부 빠졌다.
정수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몸의 제어를 잃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거품같은 침이 튀었지만 제대로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여자애가 이런 꼴이 되다니.”
뭔가 한없이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진후의 목소리가 세하에게 들려왔다. 세하는 뭔가 말해보려고 했지만, 고개조차도 돌릴 수 없었다.
“다 자업자득이야. 알지?”
세하는 마지막에 갑자기 불합리하게 궤도를 꺽은 배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세하의 지식 속의 이 세계에서는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언제나 준비해주고 있었다.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로 세하는 중얼거렸다.
초능력을 집어넣은 배트.
초능력기구.
진후는 뭔가 웅얼거리는 세하를 보며, 아직도 움직이는구나, 생각하며 내심 질렸다. 그 다음 지저분해진 알루미늄 배트를 들어, 조심스럽게 겨냥한 뒤, 척추나 뼈가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날개뼈 아래를 내리쳤다.
“커헉!”
세하는 몸을 쫙 폈다가 부들부들 떨더니,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진후는 그런 세하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말했다.
“유세하, 넌 내꺼야.”
안좋은 꿈을 꾼 것 같다. 세하는 욱씬 욱씬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교실 천장이었다. 교실 천장 치고는, 조금 좁은 것 같았지만.
세하는 고개를 흔들다가, 찌잉 하고 아파오는 이마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왜 아프지?’
세하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왼쪽 등허리도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프지?!”
별로 섹시하진 않은 신음소리를 내며, 세하는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허리를 만져보았다.
“으으윽.”
단단히 다친 듯 손 끝이 닿자마자 욱씬거렸다. 어디가 부러질만한 게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살펴보면 피멍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 보니 이마도 왠지 조금 부풀어 있는 것 같았다.
“이마에 혹 나면 완전 웃긴데.”
세하는 걱정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누워있던 곳은 갈색 쇼파였다. 분명 교실에는 일반적으로 없는 물건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교실은 아니었다. 벽이나 바닥, 천장, 창의 느낌은 학교인게 분명했지만, 훨씬 좁았고 잡다한 물건이 많았으니까. 벽에 붙어있는 책장에는 가지가지 크기의 책들이 순서 없이 꽂혀있었고 창가에는, 정확히 말하면 창가 쪽 바닥에는 가지가지 크기의 화분이 빼곡히 놓여있었다. 흙은 촉촉했지만 아무 것도 나 있지는 않았다. 벽에는 알아보기 힘든 설계도와 수식이 적힌 쪽지가 붙어있었고, 벽에 붙어있는, 학생용 책상을 네개 이어놓은 일종의 작업장 같은 곳에는 보쉬 공구세트가, 역시 크기 별로 네개 쌓여있었다. 갈색의 미닫이 나무 문이 아닌, 베이지 색으로 칠해진 철문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초록색 빨간색으로 장식된 미슬토가 걸려있었다. 철문 옆에는 눈에 익은 알루미늄 배트가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어져 놓여있었다. 그 익숙하고 거부감 생기는 느낌에, 세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트를 응시했다.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진후가 들어왔다.
“일어났네.”
“꺄악!”
마침 지켜보고 있던 곳이 열리는 바람에 세하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질렀지만 진후는 그 비명이 아예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애초에 비명이란 개념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평온하게 문을 닫았다. 그 다음, 쇼파 옆에 있던 걸상에 걸터앉았다.
한 편, 일단 비명을 지르고 본 뒤 배트와 진후를 동시에 바라본 세하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냈다.
“꺄악!”
반응은 똑같았지만.
진후는 세하가 비명을 다 지르고 누워있던 쇼파에서 일어나 앉을 때까지 기다린 뒤 선한 표정으로 왼 손을 들며 인사했다.
“안녕, 자기?”
“안녕…누가 자기얏!”
얼결에 마주 인사한 세하는 진후의 말을 전부 인식한 뒤 소리쳤다. 진후는 목을 움츠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놓은, 방금까지 세하가 지켜보고 있던 배트를 집어들었다. 세하가 침을 꿀꺽 삼켰고, 진후는 배트로 세하를 겨냥한 뒤 말했다.
“그야, 유세하, 너지.”
세하는 뭉툭하고 울퉁불퉁한 배트 끝 부분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내가, 네 자기냐고.”
진후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배트를 내렸다.
“아무 것도 기억 안나?”
“아무 것도 기억 안나!”
때는 이때다 싶은 기분에 세하는 강하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진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어쩔 수 없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일말의 기대를 가지며 진후를 쳐다보았다. 진후는 배트를 높이 들며 말했다.
“다시 맞으면 기억이 날거야.” “아냐완전기억났어!”
배트가 떨어지기 직전 세하는 두 손을 뻗으며 외쳤다. 진후는 배트를 내렸고, 세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솔직히 배트를 쓰는 건 비겁하지 않아?”
“그건 그런데, 나도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진후가 배트를 다시 벽에 기대놓으며 말했다. 세하는 진후의 등을 보며 물었다.
“솔직히 난 잘 이해를 못하겠어. 내가 ‘날 쓰러뜨린 사람과 사귀겠다!’, 이렇게 얘기한 나도 잘못된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 쓰러뜨려서까지 나랑 사귀고 싶은거야?”
“그거 말인데……” 진후는 배트가 쓰러지지 않게 잘 세워놓은 다음 세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도 이해가 안되더라.”
“뭐?”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진후를 바라보며 세하는 입을 쩍 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진후를 손가락질 하며 외쳤다.
“하지만, 너 나를 쓰러뜨렸잖아!”
무기를 쓰긴 했지만, 하며 세하는 벽에 기대어진 배트를 흘끗 쳐다보았다.
진후는 어깨를 으쓱 하며 수긍했다.
“그야 그렇지.”
“게다가 후배인 주제에 반말 하고 있고!”
“원래 연인 사이는 그런 거 아냐?”
“선배라고 불러!”
“누나♡”
“크아아악! 사사건건 마음에 안드네!”
세하는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다시 진후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너, 나랑 사귀고 싶어서 날 쓰러뜨린거 아냐? 근데 왜 네가 이해를 못하는데!”
“그거 말인데!” 진후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세하를 마주 손가락질했다. 세하는 왠지 깜짝 놀라서 손을 내렸고, 그 자리를 차지하듯 진후의 손가락이 세하를 향해 전진해왔다.
“나 사실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뭐?”
“사귈 필요는 있지만!”
“…………뭐?”
자신의 머리 속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진후의 말이 계속되자, 세하는 눈이 뱅글뱅글 소용돌이 모양이 될 것만 같았다. 진후는 혼자서 기세가 꺽인 세하의 눈 앞에 손가락을 들이대고, 중지와 엄지를 모은 다음, 다시 딱 소리를 내었다. 소용돌이 치고 있던 세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세하는 눈 앞에서 총 모양으로 되어있는 손을 본능적으로 위로 쳐낸 뒤 위로 쳐낸 손의 소매를 왼 손으로 잡고 끌어당기며 오른 손으로 손의 주인의 목을 잡았다.
세하는 싸늘한 목소리로 진후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게?”
진후는 남은 한 손으로 간신히 닿는 쇼파를 탭하며 자기가 대답하기 심히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최대한 어필했고, 세하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진후를 밀어 놓아주었다. 진후가 뒷걸음질 치며 켁켁거렸다.
“너, 와, 진짜 폭력적인거, 알아? 으으, 깜짝, 콜록, 놀랐네.”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려놓고 좋아하진 않는다고 하니까 그렇지.”
“좋아하면 때려도 된다는 식으로 들리니까, 그 말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때리는 것보단 낫지.”
세하는 손을 탈탈 털며 진후를 노려보았다.
진후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확실히, 넌 참 강해. 그래서 난 너를 택한거야.”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짜증에 찬 목소리로 세하가 날카롭게 물었다.
“너도 날 좋아하진 않지?”
“물론이지. 애초에 난 널 모르니까.”
“나랑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당연하지! 지금처럼 내가 학기초에 쓸데없는 말을 나불댄 것이 후회된 적이 없었어!”
달려들 것처럼 캬악거리는 세하를 보며 진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할 게 있는데 말이야.”
이를 드러낼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세하는 제안이라는 진후의 말에 반응했다.
“제안?”
“응.” 진후는 몸을 털며 말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우리가 사귀는 일은 없었던 걸로 할게.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없었던 일로 해도 좋아. 내 제안은 길어도 한 달 내에 끝날거고, 제대로만 해준다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똑같이 우리 관계는 없었던 걸로 하겠어.”
진후의 말을 들은 세하는, 그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 다음, 생각 하건 말건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세하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비죽이며 대답했다.
“이해했어. 내가 수락할 수밖에 없겠네.”
“물론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나랑 계속 사귈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싫으니까!”
“아하하하. 그렇게 싫어하면 그거대로 나 울거야?”
“됐고.”
세하는 웃는 진후에게 물었다.
“그래서, 순진하고 예쁘고 착하고 남들보다 조금 날렵한 소녀를 강제로 폭력을 동원해서까지 애인 삼아서 네가 이루고 싶은 욕망은 뭐야?”
“욕망이라니…….”
진후가 쓴웃음 지었고, 세하는 계속 말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진후는 세하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몸을 돌렸다가, 다시 돌렸다가, 또 돌렸다가, 답답해진 세하가 때릴까 말까 고민하던 중 “역시 말해야겠지.” 하고 중얼거린 뒤 세하를 똑바로 보며 자신의 부탁을 전했다.
“날 좋아하는 여중생이 있는데, 내 연인인 척 해서 그 여중생을 반항하지 못할 때까지 패서 때려눕혀줘.”
“이 쓰레기야!”
세하는 일단 주먹을 뻗어 진후를 때렸다.
창 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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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진짜 아프게 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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