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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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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정체불명의 약혼녀가 왔다!
글쓴이: 헤라리스
작성일: 12-07-14 20:50 조회: 1,611 추천: 0 비추천: 0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백색.

여섯 개의 면과 그것들을 이어주는 모서리가 열 둘. 선과 면을 제외해도 가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는 방. 심지어 내부를 밝혀줘야 할 전등마저 찾을 수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백색의 방 스스로가 빛을 내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거대한 공간.

소녀의 어두운 과거라고 부를 수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그러한 백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입방체형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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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 세계’

소녀의 오라버니 되는 사람은 이곳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던가.

모든 질서와 섭리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한 세계.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어디서든 있지만, 어디서도 없는 세계. 오직 보존의 의무만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로 과거, 현재, 미래로 통하는 모든 차원과 시간의 중심이 되는 세계.

그리고 이것은 그 세계가 붕괴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 ◆ ◆

루핀 샤 다크니스.

소녀 자신이 그 이름을 다시 기억해낸 건 한 사람의 일생보다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탈세계에 머무르면서 오직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만 허용 받은 루핀은 백색 이외의 다른 색은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입방체형 세계에 앉아있었다.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지만,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 해낸 건 그녀에겐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소녀는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던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건 그녀가 오랜만이라고 느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의안 같은 공허함으로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를 드디어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 보는 이로 하여금 몽환적인 환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만큼 신비로운 색의 눈동자를 가진 루핀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제야 모두 기억해냈습니다. 오라버니.”

정적

“진위의 왜곡자. 정론을 기만한 자. 마스터 키. 요그소토스. 무한의 광주리. 트릭스터. 길 잃은 딜레탕트. 절망의 아틀리에. 라비린토스. 실족의 로렐라이. 망연한 세이렌. 스핑크스의 혀. 일곱 대죄를 짊어진 마녀. 불쌍한 인간의 자식. 갇힌 소녀…….”

정적

“결국 이 모든 이름들이 저 한 사람이었던 거군요. 그렇죠? 오라버니.”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변함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소녀의 시선은 언재나 정면을 향해있었다. 루핀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색의 방만큼 희고 가녀린 피부를 가진 소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 만큼 시간이 흐르건 간에 이탈세계의 소녀의 성장은 10대의 육체로써 멈춰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거짓말쟁이. 거치는 반석. 빛 좋은 개살구. 광음을 지배하는 신. 신의 기적. 사기꾼. 사면초가. 잔혹한 고문관. 마수의 미궁. 쓰이지 않는 지도. 물거품. 사람을 잡아먹는 것. 능력의 족쇄. 인간. 여자……, 그 의미도 전부 기억났습니다. 저는 결국 제 자신에게서 도망쳐버렸군요. 감정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세계로부터, 도망쳐 나온 저를 이 세계에 가둔 건 오라버니이시고요. 제 기억이 어딘가 틀리진 않았나요?”

정적

“……왜?”

무표정하던 루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문이라고 부르는 감정이었다. 이상하게도 소녀의 눈시울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이탈세계는 그런 소녀의 존재 이외를 용납하지 않았다. 백색의 방은 루핀의 눈물조차 지워버렸다. 그래서 눈물 한 방울도 소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소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왜? 어째서 제가 구해지길 바라신거지요?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빈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저를 가둬둘 이탈세계를 창조할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였나요? 저는 오라버니께서 바라시는 데로 다시 기억해내고 말았어요. 모든 것을 버리기 이전의 자신이…… 악의뿐인 무수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여자가! 저는 스스로가 구원을 바랄만큼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고요!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오라버니이셨을 텐데! 어째서! 왜! 어째서!”

감정을 폭발해낸 루핀이 비명을 질렀다.

그 탓이었을까, 백색의 방이 우르르르 진동했다. 본래 이탈세계란 어딘가 존재하기 위해 내부의 힘으로 외부와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방금 전 루핀의 절규는 새하얗게 물든 백색의 벽에 무리를 줄만큼 강해서 결국 균열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루핀이기에 가능했다.

“……오라버니. 정말로 여기에 계신가요?”

정적

소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백색의 벽에 기다란 틈이 나있었다. 방금 전의 진동 때문에 생겨버린 일탈세계의 유일한 균열이 루핀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소녀는 자신의 팔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벽에 난 틈 속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팔을 뻗었다.

이탈세계 밖에 무엇이 있겠냐만, 루핀은 그 손에 잡힌 것을 힘껏 잡아당겼다.

“이건…….”

사진이었다.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사진 속에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사진을 살펴보던 소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사진은…… 본적 있는데…….”

루핀은 재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진 속에 찍혀있는 건 낯익은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어딘가 미덥지 않게 느껴지지만 밝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는 소녀 자신의 의문 속에 마저 숨어있는 어두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루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세계야말로 소녀가 버리고, 도망쳐 나온 세계였으니까.

루핀은 사진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뒤집었다.

곧 숨이 죽었다.

한때 잊어버렸지만 기억해냈다. 그것은 자신이 쓴 글씨라는 것을.

〔나의 약혼자. 내 왕자님.〕

천진한 문장의 나열이 조금 더 이어졌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만나겠다고 약속했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솔직한 감정으로 썼던 그 문장을 읽는다.

〔그 분을 다시 만나고 싶어.〕

다시 만나고 싶어. 소녀는 입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오라버니. 이건 오라버니께서…….”

정적.

“그럼 제가 기억을 되찾길 바라신 이유도…….”

정적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저를 이탈세계에 가두신 이유도…….”

정적. 그러나 루핀은 어렴풋이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녀가 다시 기억을 되찾고 나서 줄곧 마음속에 품어온 어떤 의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을.

소녀는 고개를 무겁게 떨궜다.

새하얀 이탈세계는 그런 루핀을 가볍게 껴안아 주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위로했다.

그런 세계를 바라보며 루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 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도 되는 건가요……?”

정적

“비록 지옥 같은 세계였지만,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도망치려고 했었지만, 결국은 제가 바라고 있었던 것이 남아있었던 모양 이예요. 제가 다시 만나고 싶어 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 이상하게, 기억을 버리기 전부터 잊고 있었어요. 저도 참 바보죠?”

루핀의 어깨가 꿈질 떨렸다.

이탈세계에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소녀의 표정은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고마웠습니다. 오라버니.”

다만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루핀은 백색의 방에게 말했다.

백색의 벽. 그것은 소녀가 잔인하다고 느껴 도망친 세계와 이탈세계 구분하는 경계임과 동시에 루핀이 모든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그녀를 보호해준 존재였다. 백색의 방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루핀을 보호해 그녀가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길 바라며…… 존재했다.

그 세계에게 소녀의 소망이 담긴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오라버니.”

그 순간, 이탈세계는 한 번 더 진동했다. 마치 전율하는 듯 했다.

백색의 벽에 난 틈이 점점 더 넓어지고, 이내 금이 가있는 유리가 약한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지듯 그렇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조각 조각난 새하얀 빛의 폭풍이 루핀을 감싸 안듯 무너져갔다.

그 속에서 소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깜박였다.

차츰 본래 색을 되찾아가는 시야가 이끄는 세계로 망설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루핀이 정한 방향으로……, 정체불명의 소녀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 ◆ ◆

맞은 뺨이 아프다.

성현은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며 남자기숙사에서 끌려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넥타이도 아닌 멱살이 잡힌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소년은 딸 바보인 남자 기숙사 관리인 선생님에게 눈빛으로 SOS신호를 보냈지만 전파는 재대로 닿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피곤한 듯 벽에 몸을 기대어 자고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성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만 돌려, 멀어져가는 남자기숙사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 기숙사 방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남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입으면서…….

소년은 붉은색 머리칼의 소녀에게 물었다.

“어째서?”

“데이트니까. 테이트. 주말이니까 어차피 수업도 없고, 예정도 없고, 방해꾼도 없고, 약속했잖아? 짐. 꾼. 노. 릇?”

“아니, 그건 그렇지만. 어째서 이런 아침부터……랄까 남자 기숙사라고! 왜 여학생이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데? 그리고 내 방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왔어? 젠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말도 안 나온다!”

“정말이지……. 현은 불평이 너무 많아.”

“불평하지 않게 생겼어? 느닷없이 내 뺨은 왜 때린 거야?”

“그, 그거야……, 여자 입으로 그걸 말하도록 시켜야겠냐, 짜샤!”

또다시 날아오는 손바닥.

짝!

성현은 양쪽 뺨에 붉은 손바닥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겨우 멱살잡이에서 풀려났다.

"왜 때려?!"

“현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런 거잖아! 조금만 섬세함을 길러봐! 누구든지 아침부터 그런 것을 보여주면 당황하게 된다고. 그, 검고 커다란…….”

“그, 그건 생리현상이야! 내가 어쩐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응? 내가 본건 현이 키우는 검고 커다란 타란툴라였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머리 위에 ?를 떠올리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로부터 도망치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주현. 붉고 긴 웨이브 헤어스타일의 소녀는 오늘 사복 차림이었다. 그녀가 성현을 만나서 친해지게 된 계기로부터는 반 년 이상이 지난 상태인데, 폭군 같은 성격에 비해 의외로 순정파 소녀는 소년이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돌아간다.”

성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돌아 남자 기숙사로 걸어갔다.

그 직후, 뒤에 남겨진 주현으로부터 뒷덜미를 잡혀 그대로 정지.

“오호? 어딜 가려는 건가? 바보가.”

“바보는 너야. 아직 아침도 못 먹었다고. 그리고 잠자고 있는 나를 두들겨 깨운 게 누군데?”

설명할 것도 없이 남자 기숙사 관리인 선생님께 수면제 탄 음료수를 먹이고, 이전에 소년 몰래 복사해둔 그의 기숙사 방 열쇠를 들고, 남학생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소년의 방을 찾고 나선, 당당히 정면으로 성현의 방에 입실한 주현이었다.

“그 왜 아침식사도 밖에서 하는 건 어떨까~하고. 방해꾼이 끼어들면 귀찮거든. 내가 쏠게!”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얼버무리지 마. 내 방 열쇠 내놓고.”

“으으…….”

주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치마 주머니에서 열쇠 다발을 꺼냈다.

“……이거 전부 내 방 열쇠?”

“이야~ 기왕 복사해 둘 거라면 200개 정도 만들어 두는 건 어떨까 싶어서 무심코. 데헷.”

무심코 라니.

“자물쇠를 바꾸는 편이 좋겠어.”

소년은 일단 100개도 안되어 보이는 열쇠다발을 지긋이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나머지 열쇠들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럴…… 수가.”

그러나 정말로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연 사람은 어느 샌가 소년의 눈앞에 서있었었다.

문득 성현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상이 떠올랐다. 하나밖에 되지 않지만 귀여운 키홀더와 연결된 그 열쇠는 아무리 봐도 자신의 기숙사 방 열쇠가 틀림없음을…….

“너도 냐. 바다혜.”

“경솔했군. 내가 너무 늦었나.”

바다혜. 차분한 표정 위에 음침한 그늘을 드리우며 엄지손톱을 깨무는 파란머리칼의 쇼트헤어 소녀. 언제나처럼 뿔테안경이 약간 흘러내려와 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복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그녀의 목적지도 남자기숙사였던 모양이었다.

아주 똑같군.

성현은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그전에 다혜가 예리한 눈초리로 주현을 노려보는 것이 훨씬 빨랐다.

“칫. 발정 난 암컷에게 선수를 빼앗긴 건가.”

“누가 발정 난 암컷이야! 이 푸르죽죽 창부가!”

“차, 창부라고?”

“먼저 싸움을 걸어온 건 그쪽이잖아. 방해꾼이!”

두 미소녀 사이에 끼인각 성현은 일상과 같은 이런 싸움을 중재시키는 역할이었다.

“아침부터 왜 싸움질이야, 두 사람 다. 다혜는 말이 심했어. 주현도…….”

“현은 어느 쪽 편을 드는 거야? 흥!”

“……매번 이런 식으로 싸움이 끝나니까 뒷맛이 안 좋은 겁니다.”

“호오~ 그러셔?”

“…….”

다혜는 중지로 흘러내린 뿔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싸움의 불씨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그에 대해서 바라던 바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현의 눈동자가 전의로 반짝였다.

아무래도 소년이 그녀들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버린 탓이 컸다.

“잠깐 이런 곳에서 싸움은……!”

“괜찮아, 현! 어차피 엿보는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으니 잠시 소란을 피워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성현. 언제까지고 주변의 눈길을 피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어차피 누군가 봤다고 한들, 기억조작 마법을 쓰면 전부 잊어버릴 테니까(요).””

“이런 일로 말 맞추지 마!”

소년은 소리쳤지만, 더 이상 두 소녀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이주현

바다혜

성현만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정체. 인외(人外)의 존재들이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맞부딪히는 이질감이 그대로 공기에 전해졌다. 성현은 저릿한 몸의 감각을 겨우 버텨내면서 알 수 없는 힘의 중심부에 서있는, 원인이 되는 두 소녀를 쳐다봤다.

막을 수 없다!

강대한 두 힘이 이곳에 맞부딪힌다!

성현의 예상대로라면 이 싸움은 두 사람 중 한 쪽이 쓰러져야만 끝날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공복으로 울리는 배를 붙잡으며 소년은 이를 갈았다.

“두 사람 다…… 이제 적당히……!”

“알파 디스트럭션(alpha destruction)!”

이주현이 외쳤다. 소녀가 뻗은 두 팔에서부터 휘감겨 나온 진홍의 화염이 주현의 몸을 감싸듯이 형체를 고정해나갔다. 그것은 갑주. 태고의 화염 속에서 재련되어 언제나 새빨간 화염으로 타오르는 아름다운 갑주였다. 진홍색 갑주를 입은 주현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오메가(project omega)!”

바다혜가 외쳤다. 소녀의 심장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창백한 색을 가진 냉기가 순식간에 다혜의 몸을 감쌌다. 숨결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의 돌풍을 찢고 나온 건 우아한 천 옷을 입은 한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자신을 감싼 바람이 일시에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혜의 천 옷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숨 막힐 정도의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 노출도 높은 선녀의 날개옷. 라즈 폴라리스.”

“……언제 봐도 답답한 핵의 갑주인가요. 아이언메이든.”

그곳에 있는 건 더 이상 이주현과 바다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능의 힘을 가진 신, 괴물 혹은 진화한 존재가 군림해있었다. 칭송받아야 마땅할 두 존재가 사랑을 위해 다툰다.

그래야 했는데……

“얼른 끝내고 돌아와. 기숙사에 돌아가서 밥 먹고 있을 테니까.”

““이봐(요)!””

뇌가 움직이는 판단력에 비해서 위기 감각에 둔한 성현은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등을 돌렸다. 뭐 이제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을 도망치기로 작정한 소년은 잠시 적당히 숨어있을 곳을 찾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두 소녀들이 본격적으로 성현의 일상에 침투해 들어온 건 겨우 한 달 전 일이었다. 요 짧은 시간동안 기괴하고 어딘가 뒤틀린 세계의 맛을 알게 된 소년은 더 이상 비 일상을 동경하지 않았고, 오직 소란스럽지 않은 평온한 일상을 바랬다.

하지만 그가 후회하기보다 더 이야기는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이리라.

챙!

갑작스럽게, 소년이 달리는 방향이 일그러졌다.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뭐…….”

성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깨진 것처럼 보이는 허공을 쳐다봤다. 마치 3차원에 평면을 박아 넣은 듯, 균열 속에는 흰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현을 따라 달려온 아이언메이든 이주현과 라즈 폴라리스 바다혜도 그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건”

소년의 혼잣말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는 두 소녀.

균열에서 불어오는 백색의 폭풍에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소녀의 사이로 성현이 균열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와장창!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폭발을 일으켰다. 눈앞에 새하얗게 변하는 가운데, 소년만이 그 균열속에서 달려 나오는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처음에 작았다가 마침내 자신의 키만큼 커졌다. 성현은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기 직전에 그것은 소년의 품에 안겼다.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의 소녀. 백색 속에서도 뚜렷이 분간할 수 있었던 보랏빛 눈동자.

“……다시 만났어요.”

성현의 품에 안긴 소녀는 그를 보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해하던 소년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너는……?”

“당신의 약혼녀. 루핀 샤 다크니스 랍니다.”

운명을 움직이기 위한 톱니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정체불명의 소녀. 그러니까, 소년의 약혼자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오면서 그가 바랐던 평온한 일상은 더 이상 영원히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핀 샤 다크니스는 소년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며 최고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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