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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의 여름
글쓴이: 나제온
작성일: 12-07-14 12:11 조회: 1,607 추천: 0 비추천: 0

그 해 여름, 나는 당신과 만났다.

1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아무런 의욕도 안 나고,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없는 그런 시기가. 그 기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인생을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런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시기를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그저 사람의 모습을 했을 뿐, 실은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겠지.

그리고 바로 지금이 나에게 있어서 그런 시기였다. 손에 잡히는 건 없고, 계획도 없고, 미래가 보이지도 않고, 되는 일도 없다. 늪 속에 빠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도 1학기가 끝나고 오늘 방학식을 치뤘다지만 신선함이나 흥분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건 내가 방학 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기 중과 방학이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 암흑 속에 들어있는 듯한 기분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늘 마음이 무겁고 괴로우니까.

방학식을 마친 내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근처 공원에 앉아있었던 것도 그런 감정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무 것도 안 하고 한 시간이나 앉아있는 것은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니까.

아니, 그 평상시의 나라는 건 대체 언제적의 나를 말하는 건지, 지금은 그것마저도 알 수 없다.

"후우……."

"후우……."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왠지 옆에서 다른 사람의 한숨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기분 탓이겠지, 하며 고개를 돌려보자 내 옆에 왠 처음보는 여자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위에는 새하얀 와이셔츠, 아래에는 검은 청바지를 입은 여자였다. 피부도 새하얗고 날씬해서 굉장히 멋졌지만, 그래도 어째서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걸까. 이 공원에 벤치가 내가 앉아있는 이 벤치 하나 뿐일 리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곧 내가 굳이 이 벤치에 앉은 이유를 기억해내고 이 여자가 내 옆에 앉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른 벤치들은 새똥이나 누가 먹다 흘린 아이스크림 등이 있어서 더러웠으니까, 꼭 앉고 싶었다면 이 벤치밖에는 없는 거다.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이번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봤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는데 몸매와 스타일에 걸맞게 굉장히 아름다웠다. 쿨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눈 밑에 진하게 끼어있는 다크서클 때문에 굉장히 피곤해보였다.

"너……."

여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예?"

"무슨 일 있어? 왜 한숨을 쉬어?"

너무 편하게 말을 걸어온 탓에 일순간 나는 혹시 이 여자와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이 여자를 본 적 없다. 옛날이었다면 예쁜 누나가 말을 걸었단 생각에 당황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무기력한 기분에 사로잡혀있어서 그럴 기분조차 안 들었다.

"누나야말로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역으로 반문하자 여자는 약간 놀란 듯 싶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일……. 있지. 응. 남한테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누구나 그런 사정이 있겠지. 남한테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그 기분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왜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지 이 여자한테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알고 싶어?"

"아뇨."

알아봤자 귀찮을 뿐이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쪽의 이야기도 말해야 하니까. 서로 말하지 않고 듣지 않는 게 편하다. 어차피 어쩌다가 말을 섞게 됐을 뿐인, 진짜 남인 사이니까.

"그렇지……."

내 생각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나도 딱히 네게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한 건 아니니까."

"그렇네요."

그걸로 대화는 끝나고 침묵이 흘렀다. 애초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와서 대답했을 뿐이니까 이게 자연스러운 거다. 하지만 여자는 이대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등학생이야?"

"예."

"그럼 친구도 많겠네?"

"아뇨, 별로……."

고등학생=친구가 많다는 공식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같은 외톨이는 상처받는다. 어디에나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유감스럽게도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였으니까.

"몇학년이야?"

"1학년인데요."

"고등학교 1학년……. 좋을 때네. 그 젊음이 부러운 걸."

"누나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스물 하나."

"……아직 젊음이 부럽다고 할 정도의 나이는 아니잖아요."

아직 그 정도로 늙지는 않았다, 라고 하기보단 지금이야말로 젊음 그 자체의 나이다. 다른 사람의 나이를 부러워하기보단 다른 사람에게서 부러움을 살 나이인 거다……라고 잘난체 말해봤자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나도 아직 젊은 나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3년을 허무하게 날려버렸거든. 그래서 부러워."

"좀 노셨나봐요?"

"놀아? 하하…. 그런 것도 아니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3년을 날렸지."

여자는 등을 크게 젖히며 벤치에 기대서 이쪽을 봤다.

"너는 그렇게 살지 마라. 젊음을 만끽해. 공부를 하든, 이리저리 놀러다니든……. 그건 추억이 될 거야."

"추억…요?"

추억이고 뭐고, 지금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추억같은 건 생각할 기분조차 안 든다. 공부는 제대로 안 되고, 같이 놀러다닐 친구도 없다. 그저 흐르는 대로 살고 있을 뿐. 이대로 가면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3년을 날리게 되겠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벗어날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더 최악이다.

"그래.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추억뿐이야."

"마지막에 남는 건 돈 아닙니까?"

"…너, 꿈이 없구나."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꿈이 없는 사람 취급받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 더 기분이 나빠졌다.

"솔직히 그래요."

"그러면 안 되지.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해. 꿈을 가지고 그걸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게 제일 이상적인 모습이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동자는 뭔가를 동경하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어른들이 흔히들 말하는 그때 그렇게 살면 좋았을텐데, 하는 식인가. 어쨌든 정론이었다.

"맞는 말이에요."

"친구도 많이 사귀라고."

"그게 말처럼 쉬우면 정말 좋았겠네요."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아서 사귀지 않는 녀석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친구를 많이 사귀자, 하고 생각해서 짠 하고 생각처럼 사귈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 왕따 따위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런 말도 안 했을 것이다. 보나마나 그래도 노력해야지, 같은 말이 돌아오겠지.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뜻밖에도 여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딘가 씁쓸한 듯 웃으면서.

"친구는 쉽게 생기지 않아. 응.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사실은 조금만 흔들리면 금방 떠나가버리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실은 말이지, 나도 친구가 없거든."

"…씁쓸하네요."

"정말 그래. 그래서 넌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지만 말야."

알고보니 둘 다 친구 없는 외톨이였다니, 뭐 이런 우울한 모임이 다 있지? 방금 그 고백으로 이 자리의 공기가 한 세 배는 무거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넌 안 늦었잖아?"

"누나도 아직 늦은 건 아니잖아요."

무슨 3, 40대 아줌마도 아니고. 21살 밖에 안됐으면서 아까부터 전부 포기한 것 같은 말투다. 내 반론에 여자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씩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그렇지. 21살이면……. 그렇겠지?"

"그래요."

그 대화를 기점으로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돌았다. 갑자기 자리를 일어서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여기 계속 머물러있기도 불편한 상태로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니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 시원하네."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잘만 말을 섞어놓고 여기서 입다물고 있으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다.

"햇빛이 없으니까요. 구름이 낀 걸 보면 곧 비가 올지도 몰라요."

"그런가? 우산 없는데……. 넌 우산 있어?"

"아뇨, 저도 없어요."

"유감이구나."

"유감이네요."

유감이고 뭐고, 사실 아무 생각도 안 들지만. 여자는 읏차, 하고 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산이 없으니 비가 오기 전에 들어가야겠네. 너는?"

"저도 이제 들어가야죠."

비를 맞는 것도 싫고 언제까지 여기에 앉아있을 수도 없으니까. 내 대답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고서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학교는 방학했어?"

"오늘 방학식 했어요."

"그래? 방학 동안엔 바빠?"

"솔직히 딱히 하는 것도 없고 한가하네요."

모르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모르는 사람이라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비만 안 오면 난 내일 이 시간에도 여기 올 생각이니까, 심심하면 와."

"……와서 할 것도 없는데요."

"뭐 특별히 해야 하나? 이야기나 하는거지. 너 재미있더라."

……재미있다니, 방금 그 대화의 어디에 재미있게 느낄 만한 부분이 있었지? 다시 한 번 곱씹어봐도 재미는 커녕 영양가도 전혀 없었는데. 별걸 다 재미있다고 느끼네. 혹시 개그 프로그램이라도 보면 웃다가 숨 못쉬어서 기절하는 건 아닐까 걱정 될 정도였다.

"그럼 잘 가. 다음에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손을 흔드는 여자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보면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옆에 앉아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런 사람한테 무덤덤하게 대응한 나도 이상한 놈이다. 아니, 무덤덤했다기보단 무기력했다고 해야 하나.

오늘의 나는 왠지 좀 이상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얼굴이 예뻐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나쁘진 않았으니까. 내일 날씨만 맑다면 다시 한 번 가봐도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게 진짜 곧 쏟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다음 날, 밖에 나서는 걸 왠만하면 삼가는 게 좋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아마 어딘가에선 이미 물에 잠긴 집이 나오지 않았을까. 아마 지금 나가면 우산을 쓰든 우비를 쓰든 상관없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고 말겠지. 매년 꼭 한 번씩은 쏟아지는 비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는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연상의 여자랑 계속 만남을 이어가면서 사이가 좋아진다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것따윈 분명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로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 폭우라니, 이게 무슨 코미디냐. 이 우연에는 이제 누군가의 악의마저 느껴질 정도다.

뭐, 생각해보면 그 여자와는 겨우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관계였다는 거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만나기로 했을 뿐, 비가 내리면 끊어지는, 얼굴과 나이 외에는 이름도, 직업도, 사는 곳도, 그 무엇도 모르는 얄팍한 관계……. 그 정도였다는 거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워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뭐, 인연이 거기까지였다는 거겠지."

그 여자에 대한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생각해봤자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공부가 손에 안 잡히는 관계로 나는 게임을 하기로 했다. 게임을 하니 그 여자에 대한 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여자와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 없겠지. 몇개월 정도 지나면 그런 여자와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잊을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2

다음날에도 비가 왔지만 어제보단 많이 약해서 우산을 쓰고 나가면 괜찮을 정도였다. 역시 비오는 날에는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도 외출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일수록 나갈 일이 생기는 법이다. 꼭 안 좋은 식으로.

"옆집 정수가 입원했단다."

"정수가요?"

박정수. 옆집 아들로 중학교 2학년이다. 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곧잘 놀던 사이로 지금은 같이 놀진 않지만 그래도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는 별로 친하다고도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입원했다는데 모른척 할 정도로 먼 사이도 아니었다.

"어쩌다가요?"

"계단에서 굴렀나봐."

"쯧, 안됐네요."

"그래서 말인데, 네가 병문안을 좀 가라."

"그러죠."

밖에 나가긴 귀찮았지만 아는 사람이 입원했다는데도 집에 있고 싶어할 정도로 귀찮은 건 아니었다. 나는 곧 외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정수가 입원한 곳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대형 병원이었다. 걸어서도 갈 수 있을 정도였기에 나는 걸어가기로 했다.

비가 내리면 어쩐지 약간 감성에 젖게 된다. 그리고 이때 떠오르는 건 또다시 그저께 만난 그 여자였다. 나는 질리지도 않는 거냐…. 어쩐지 스스로에게 감탄마저 느낄 정도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1층에는 친절하게도 병문안을 할 때 가져갈 선물을 여기서 사가라는 것처럼 가게까지 하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곳에서 주스 선물세트를 하나 샀다. 병문안을 가면서 빈손으로 가는 건 역시 뭔가 좀 아니니까.

그리고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어디서 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정수는 아니다. 일단 여자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눈 아래에 진하게 끼어있는 다크서클과 쿨해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바로 그저께 공원에서 만난 21살의 여자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가 계속해서 저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말을 걸어야 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걸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반가운 감정이었지만 곧장 망설임이 몰려왔다.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사실 완전 남인데 말을 걸어도 되는 걸까? 이런저런 망설임에 가만히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이라도 느껴졌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로 어색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서로 눈까지 마주친 이상 이제는 피할 수 없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인사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2일만이네요."

"아, 응…. 안녕. 여기는 왠일이야?"

"아는 동생이 입원해서요. 병문안이나 올까 하고…. 누나야말로 여긴 왠일이세요?"

"그게…입원했어."

환자복도 입고 있고 해서 처음엔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여자는 어디에도 다친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라니, 대체 어디가 아파서?

"누나, 어디 아프세요?"

"아, 그게……."

여자는 곤란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지만 곧 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저기, 지금 시간 있어?"

"지금 당장 병문안을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시간이라면 있어요."

"그럼 잠깐 따라올래?"

여자는 나를 데리고 2층의 휴게소로 향했다. 환자복을 입고 있을 뿐, 어딘가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문제가 있어보이는 부분이라면 눈 밑의 다크서클 뿐인데 대체 왜 입원해있는 걸까. 휴게소에 도착한 여자는 의자에 앉았다.

"병원이라는 게 오래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맞은편에 앉은 나에게 여자는 제일 먼저 그렇게 말했다.

"글쎄요. 지금까지 병원에 오래 있어본 적이 없어서……."

"그래? 부럽네……."

여자는 테이블에 팔을 올려놓고 나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날 빤히 바라봤다.

"건강한 건 그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거야."

"맞는 말이네요."

"난 말이야……."

간단히 자신의 말을 수긍하는 내게 여자는 어딘가 저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한 채 말을 꺼내다가 멈췄다. 가만히 뒷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곧 죽을지도 몰라."

솔직히 그 말을 들은 순간, 이게 무슨 소리지? 라고 생각했다.
눈밑에 다크서클이 진한 것 빼고는 아무데도 아픈 것 같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갑자기 죽는다니……. 뭔가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다친 곳도 안 보이는데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수긍은 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여자가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불치병에 걸렸거든."

여자는 하하,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암이랑 비슷한 건데 암은 아니라나봐.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5년 전부터 계속 진행되서……. 이제는 말기인 것 같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요?"

"증상은 비슷한데 암에 대한 처방을 써봐도 전혀 소용이 없어. 현대 사회에 새로 나타난 신종 불치병 중 하나겠지."

과학이 발달하고 자연이 오염되면서 원래 없었던 각종 신종 질병이 나타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질병에 걸린 사람 중 하나가 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한때는 항암제 때문에 머리가 몽땅 빠진 적도 있어. 그래도 효과는 전혀 없더라. 지금도 병원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딱히 치료방법이 있는 건 아니야. 그저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 그냥 차라리 집에서 지내는게……."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거야.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그래도 여기 있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어쩌다보니 여기서 4년이나 머물고 있어."

"4년이라니……."

고등학교 3년을 그냥 날렸다는 건 이걸 말한 거였나.

"미련하지?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서."

"병원비는 괜찮은 거에요?"

"다행이랄까, 부모님이 부자거든. …하하, 재수 없었나?"

"아뇨."

치료법도 모르는 불치병에 걸려 죽게 생겼는데 부모가 부자라고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어디 있을까. 그런 놈이 있다면 어딘가 맛이 간 놈이 틀림없다.

"딱히 치료법도 없으니 하루 종일 병원에 있을 필요가 있는 건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집에도 들리고 그러긴 하는데……. 이렇게 비가 오면 어딜 나갈 수도 없네."

여자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말이야, 병원 사람이나 부모님 외에 이야기를 해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그래서 내가 병에 걸렸단 건 숨기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네."

"죄송해요."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

여자는 웃으면서 등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후우, 어쨌든 이걸로 끝이구나."

"네?"

"숨기지 않아도 돼. 모르는 사람 이야기 상대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건 나 같아도 성가실테니까."

"그런 건……."

아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확실히 성가실지도 모른다. 귀찮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라고 마음속 어디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서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이 성가시다고, 마음속 어디에선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랑 이야기 하는 거, 무척 재미있었어. 잘 가. 입원했다는 그 아는 동생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럼 이만."

"자, 잠깐만요!"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이름……."

"응?"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왜 이대로 보낼 수 없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아무튼 이대로 보낼 수 없는 생각에 나는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이름은……알아서 뭐하게?"

"……그냥 알고 싶어서요."

되는대로 나온 말일 뿐, 이름을 알아서 뭐하려는 건지는 나도 알지 못했기에 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그냥 알고 싶다니……. 뭐, 괜찮겠지. 알겠어."

여자는 기운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날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정화선. 내 이름은 정화선이야."

정화선……. 화선이라, 정화선……. 나는 붙잡고 있던 여자…아니, 화선 누나의 손목을 놓고 그 이름을 잊지 않게 속으로 몇번이고 곱씹었다.

"너는?"

"저는 주시호에요. 주시호."

"주시호……. 그렇구나. 나도 기억해둘게."

그렇게 말하고 화선 누나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가버렸다. 왠지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붙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주스 선물세트를 들고 정수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정수는 친구들이랑 장난치다가 계단에서 구르게 된 모양으로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입원하다가 퇴원한 후에도 당분간 깁스를 해야 될 것 같다는데, 그나마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 같은 게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온 나는 다시금 화선 누나에 대해 생각했다.

그저께 우연히 만나고 어제 비가 온 걸로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현아 누나와 나의 인연은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다. 사람의 인연이 질기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시한부 인생……이라."

솔직히 나로서는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화선 누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나가 있는 곳은 알게 됐지만, 누나가 숨기려고 했던 걸 알게 된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고 있자니 콰르릉,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무래도 천둥 번개가 칠 모양이다. 그럼 그전에 집에 돌아가는 쪽이 좋겠지. 나는 집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내 머리 한 구석에는 화선 누나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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