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악마X소녀
글쓴이: 하오
작성일: 12-07-13 21:22 조회: 1,640 추천: 0 비추천: 0
서장

걷는다. 걷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혀 걷고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지금 걷고 있는 곳은 계단. 옆으로 ‘16’이라는 숫자가 지나간다. 주변은 어두워서 계단 중간 중간에 있는 비상등만이 계단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우리 집은 7층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그것도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온 것은 평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숨이 차지 않는다. 숨을 찰 여유마저 없었다. 이미 생의 질감은 밑바닥까지 추락해있었다. 곧 내가 그렇게 될 듯이…….
‘17’이라는 숫자가 지나간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아득히 먼 시간을 걷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왜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비틀린 것은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때부터였을까?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전혀 사고의 진전은 없다. 오히려 머릿속의 어둠만이 그 몸집을 키워갈 뿐이었다.
‘18’이라는 숫자가 지나갔다. 아마 이 아파트는 18층짜리였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나아가면 옥상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나타날 것이었다. 아마 내 생애 마지막이 될 장소로 나아가며 나는 생각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긴 말을 또다시 되뇌었다.
어릴 적에는 별 탈 없이 자랐다. 정말 ‘평범’ 그 자체로 자랐다. 엄격하시지만 온화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항상 우리 남매를 지켜주시던 어머니. 그래 귀여운 남동생까지.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모자라지는 않았다. 주변관계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마치 판에 박아 놓은 듯 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일이…….
옥상문은 허술하게 열려서 삐거덕거리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보통은 조그마한 자물쇠로라도 잠겨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아마 내일쯤 되면 이런 옥상에 대한 부실한 관리에 대해 매스컴에서 집중 조명할 것이다. 매스컴에서 보도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물쇠가 채워지겠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이후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옥상으로 나섰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강한 바람에 하계교복의 짧은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은 내 몸은 추위에 움츠러들었다. 강한 바람에 마치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다리에 온 힘을 주었다. 가끔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지려고 하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 버텨내며 난간으로 다가갔다. 난간은 이렇다 할 안전장치도 없이 그래도 노출돼 있었다. 그 앞으로는 말 그대로의 낭떠러지. 이런 위험한 옥상. 아마 안전 불감증이라는 문책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어차피 내게는 장애물이 없어서 더할 나위 없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난간으로 다가가며 나는 생각했다. 그 사건. 아마 교통사고였을 것이다. ‘아마’라는 것은 내가 그 자리에 없어서 전해 들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그때 모두 돌아가셨다.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 그 날 나와 동생은 집에 있었다. 그렇게 단 둘이 되어버렸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 우리 집안은 크게 기울어졌다. 아니 일그러졌다.
다행히 보험사에서는 곧바로 보험금을 지급했고 친척들도 도와주어서 금전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면 오히려 인간관계. 친척들 중에는 막대한 보험금을 노리고 접근해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내 몸을 탐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큰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맡아주시고 지켜주셨다. 하지만 그 상실감만은 지켜주시지 못했다. 그래서 원래 살던 동네를 떠나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여전히 큰아버지께서는 우리남매를 지켜주시고 계시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살게 된 동네에서 다니게 된 중학교에서는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정말 전형적이라고 불러주고 싶을 정도의 악질적인 괴롭힘이었다.
그래도 버텨냈다. 남동생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렇게 중학교시절이 끝나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남동생은 가출했다.
그래. 가출했다. 이제 마지막 버팀목과도 같던 동생은 집에 없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동생의 방을 볼 때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가슴속을 휘저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막대한 보험금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듯이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내 몸 아니면 내 돈.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다. 동생마저 나를 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눈물을 지으며 마치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처럼 있는 것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정하기로 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난간에 서자 바람은 너무나도 거세게 느껴졌다. 바람에 날아가 버릴 듯 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날아가 버려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요 몇 년 사이에 처음으로 마음먹고 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먹고 정한 일이 될 것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을 이렇게 벌주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세상을 이렇게 등지는 것이다.
저 위로는 어두운 밤하늘에 도심의 밝은 빛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빛을 비추는 별들이 눈에 보였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서 마치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희미해서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만 같았다.
저 아래로는 새까만 아스팔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는 마치 미니어처 장난감처럼 보였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이 어두운 거리를 밝게 비쳐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로등 바로 아래뿐이었다. 대부분은 어둠에 덮여있었다.
저 반대편에는 다른 동의 아파트건물이 보였다. 저 건물의 사람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불행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저 반대편의 대지로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을 향해 추락했다.

제1장

‘생각보다 덜 아팠던 것 같아…….’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저 넓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분명히 하늘로 날아올랐을 터였던 지만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저 넓은 땅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두워…….’
주변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한줄기 빛도 없는 어둠. 자기 자신마저도 인지할 수 없는 어둠.
‘사후세계라는 게 이런 것일까? 너무 외롭고 쓸쓸한 것 같아…….’
지금 그녀의 말이 입으로 자아내는 것인지 단순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알 수 없는 어둠.
그제야 그녀는 살짝 후회했다. 자신이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일까? 그렇게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그녀는 죽었고 더 이상의 삶은 없었다. 삶의 가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이미 0원이리라. 혹은 폐기품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몰랐다.
‘그래도 혼자라는 거……. 생각보다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좋을지도 몰라…….’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이제 그녀는 얼마나 이곳에 있게 될까? 어느 종교처럼 환생이라는 것이 있어서 얼마 뒤에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다른 곳에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는 인간일까? 아니면 동물일까? 아니면 식물일까? 혹은 생명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목숨을 꺼뜨렸으니 그 벌로 지옥 같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여기서 영원히 혼자 있게 되는 걸까?
어느 쪽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쪽의 이야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영원히 여기 혼자 있는 것이 좋을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보았다. 천국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저건 그녀 이외의 누구 인 것 일까? 다가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움직이는 걸까? 애초에 이곳에 ‘이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 빛은 점차 그 밝기를 더해가며 그녀 주위의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빛이 빛이…….’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빛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보통 빛이라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이 아닌 목이 졸리는 듯 한 답답함을 느꼈다.
‘싫어 다가오지마’
그 순간 모든 것은 모습을 갖추었다. 그녀의 소리 없이 공허했던 외침은 이윽고 소리라는 개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지마!”
그녀의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창문 밖에서 몇 줄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줄기들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그녀 자신은 분명히 침대위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침대 위였다.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라는 것을 이미 등한시한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옷가지들도 이리저리 널려있고 교과서와 가방 같은 학업을 위한 도구들도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었다. 책상 위도 쓰레기로 너저분했다. 아마 이 방밖의 광경도 전체적으로 비슷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꿈이었을까? 그럼 어젯밤에 했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모두 꿈이라는 것일까?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도 덥지 않고 그대로 침대위에 누워 잤는지 회색의 무미건조한 교복을 입은 채였다. 양말까지 신은 상태였다. 온몸에서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서 긴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오기 위해 바닥에 발을 디딘다. 방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양말을 통해 그녀에게로 전해졌다. 왠지 자신의 방인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듯 한 느낌을 가지며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혼잣말을 계속 되뇌었다. 어제의 그 기억은 처절할 만큼이나 현실적이었다. 꿈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 강한 바람의 느낌도 지면과 맞닿을 때의 그 차갑고도 날카로운 감촉도…….
그러다 그녀는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새하얀 봉투 하나를 보았다. 그 봉투는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 봉투를 유심히 쳐다보다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책더미에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우당탕탕’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프다는 것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그 봉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봉투에는 앳된 글씨체로 ‘유서’라고 적혀있었다.
“으아아아아!!!!”
그녀의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다. 그녀의 정신은 완전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얼굴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이미 원래 그녀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다. 눈에서는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유서가 있어 유서가 유서가……. 그렇다는 말은……. 그러니까 나는…….”
‘자살했어’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유서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것은 방금 전 일로 필통에서 반쯤 그 모습을 드러낸 커터칼이었다.
“나는 자살했어. 자살했으니까……. 살아있는 게 이상해. 죽어야 돼. 죽어야 된다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녀는 커터칼에 손을 뻗었다. 어제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엉키며 이미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도망치는 거야’
“도망? 그래 도망치는 거야? 용서할 수 없는 이곳에서!”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터칼을 최대한 길게 빼낸다. 어느 문방구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그 커터칼의 날은 별로 쓰지 않아서 그런지 새것처럼 날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커터칼을 들고 있지 않은 반대편 손목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흐흐흐…….”
그녀는 이제 알 수 없는 웃음까지 짓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정신이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죽을 수 없어’
“아니 죽어. 죽을 거야!”
그렇게 커터칼로 온힘을 다해 손목을 그었다. 가녀린 소녀의 힘으로 그은 것치고는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나빴던 것일까? 정확하게 정동맥이 끊어지며 강렬한 피의 분수가 그녀의 손목에서 솟구쳤다. 화려한 붉은 빛 분수를 보며 그녀는 왠지 모르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것은 가히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에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눈앞이 어두워지며 몸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나는 죽일 수 없어’
마지막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눈을 떴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어둠속이었다.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는 그곳.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얼마 전에 본 그 어둠이었다.
‘또 이곳……. 이번에도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녀는 다시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 이유가 이번에야 말로 죽었다고 생각해서 인지 아니면 이 어둠으로 돌아와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이제 완전하게 죽은 건가? 그래……. 이제 완전하게 죽은 거야…….’
하지만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왔다.
‘아닐지도 몰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방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생긴 의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때 그녀는 살아있었던 것일까? 자기 자신조차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 되뇌었다.
‘그건 내가 죽을 수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야…….’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건 어차피 죽은 뒤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 말로 찾은 완전한 행복 혹은 고독.
‘난 곧 돌아가. 죽지않을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후회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걸까? 용서할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이었는데.
그리고 눈을 떴다.
저 멀리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름날의 따뜻한 밤기운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은 방금 전까지의 어둠이 아니라 어두운 천장과 형광등이었다.
“설마 방금 전 그것도 꿈?”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식의 꿈을 꾸는 것도 가능한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자문했다. 하지만 그 물음은 곧 대답이 돌아왔다. 방안은 온통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녀 자신이 입고 있는 교복은 물론이고 주변의 책과 물건들. 바닥에도 그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짚고 있는 바닥은 알 수 없는 액체로 가득했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
그것은 그녀 자신의 피였다.
“욱!”
목을 향해 올라오는 격렬한 구토를 겨우 참아내며 그녀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알아차린 것이 있었다. 자신의 한쪽 손에 들린 커터칼을……. 그리고 다른 한쪽의 손목에 있는 가느다란 상처를…….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죽지 않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이번에는 정확히 손목의 정동맥을 끊어버렸다. 그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섬뜩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피의 분수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검붉은 액체만 보아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었다.
손목의 상처는 마치 작은 생채기라도 되는 듯이 이미 아물어있었다.
“난 죽을 수도 없다는 거야?”
‘죽을 수는 없어’
죽을 수조차 없다는 끝없는 절망. 손에 쥐고 있던 커터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바닥의 검붉은 웅덩이에 떨어지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들과 기억들이 한데 뭉쳐서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절망’ 그것은 둘도 없이 확실한 절망이었다.
“그럼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이야…….”
볼을 타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흘렀다. 그것은 얼굴에 뭍은 붉은 빛을 씻고 내려가서인지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걱정할거 없어.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가는 거야. 그렇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무책임한 생각을 아니 행동을 두 번씩이나 한 직후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자포자기라는 심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내일부터 학교에 가는 거야. 지금까지 일은 모두 잊고 학교에 가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졸음이 쏟아졌다. 지금까지의 정신적 피로가 한 번에 쏟아지는 것일까? 아니면 대량의 피를 흘린 반동일까? 그녀에게는 그런 사실들에 대해 따지고 들어갈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수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이번에 눈을 떴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은 더 이상 없었다. 밝은 천장과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이틀 동안이나 전혀 씻지 않아서 인지 얼굴은 번들거리고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몸에서도 땀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바로 씻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 다음에 느껴진 것은 식욕이었다. 그녀는 어제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강렬한 식욕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찾아낸 만든 지 며칠은 된 듯 한 반찬들을 꺼내 마찬가지로 한지 얼마나 된지 모를 밥과 함께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이윽고 배가 찬 그녀는 옥장으로 다가갔다. 옥장 문을 열자 문에 달린 거울로 얼룩지고 더러워진 회색의 무미건조한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옷을 입고 등교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더러워진 교복과 속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집안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치우기는 왠지 귀찮아졌다. 곧바로 엉망진창인 방안에서 오늘 필요한 물건들만 가방에 챙기고서는 등교준비를 마쳤다.
왠지 방안이 너무 깨끗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지저분한 방이 깨끗할 리 없잖아’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너무나 상쾌했다. 어제의 그 혼란과 피로는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이렇게까지 가벼운 마음인데 말이다.
‘아마 순간적인 충동이었을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가능하다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하지만 학교에 점차 가까워지자 마음이 조려왔다. 주변이 점차 똑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몸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학교에 가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전까지 매번 학교에 갈 때마다 느꼈던 공포가 그 괴롭힘의 공포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집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도망치지 않아도돼’
그렇게 굳게 다짐하며 그녀는 한 발작 한 발작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보통 느껴왔던 조소와 조롱의 시선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의문과 의심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곳에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비웃듯이 지나가는 학생들밖에 없었다.
착각이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젯밤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그녀를 잡아먹으려 하던 ‘공포’라는 감정을 억누르고 게걸스럽게 그녀의 안을 좀먹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자포자기’였다.
교실에 들어오자 그 감정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총기가 사라지고 없었고 어째서인지 며칠은 자지 못한 사람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한 긴 머리카락도 힘이 없어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자기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의 자리에는 이것저것 낙서가 되어있었다.
‘죽어버려’ 라든지 ‘저리 꺼져’ 라든지 그 외에도 다양한 낙서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평소에 느끼던 괴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포자기’라는 감정이 준 선물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 선물이 고마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뒤 담임선생이 들어왔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어제 학교를 나가지 않았는데도 방문이나 전화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존재가치는 담임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이 담임선생은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살짝 그런 의문이 그녀에게 생겼지만 금새 사라졌다.
담임외의 선생들도 그녀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걱정해주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픈 고독만이 남아있었다. ‘자포자기’는 현실이 되어 그녀에게는 단 한가지의 사실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야 돼지”
점심시간에 누군가가 그녀를 부른 말이었다. ‘돼지’라는 어쩌면 너무 전형적이라 재미도 없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 그녀를 부른 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머릿결부터 고급이라는 느낌이 나는 소녀가 있었다. 회색의 무미건조한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유난히 그 존재가 부각되는 듯 한 소녀였다.
얼굴 표정부터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미모라기보다는 호감형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했다. 그런 그녀는 또래보다 가슴도 나오고 허리도 잘록해서 몸매만은 눈을 땔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원래라면 무릎까지 덮는 치마를 일부러 짧게 해서 허벅지가 다 들어내 보일정도로 하고 있었다. 얼굴보다는 몸매를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정수정. 학교 최고의 인기인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그녀는 자신도 그것을 즐기는 소녀였다.
“대답은 안 하는 건가? 이서현?”
그녀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입학과 함께 그녀를 괴롭히는 선봉장을 맡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저 존재감이 부족한 아이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를 서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학교의 왕따로 내몬 것은 그녀의 소행이었다.
“으 응…….”
서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는지 수정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너. 어제 하루 학교에 나오지 않더니만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인데?”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오른속으로 힘차게 서현의 뺨을 후려갈겼다. ‘찰싹’거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서현의 왼쪽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흘리지 만은 않는다. 이미 익숙해진 광경에 반의 학생들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넌 말이지. 이런 년이야? 알겠어?”
“응…….”
그렇게 긍정 아닌 긍정밖에 할 수 없다. 자포자기 한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더 마음이 놓였다. 이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남동생있지?”
수정은 갑작스럽게 표정을 풀며 불쑥 남동생이야기를 꺼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인지 주변에 관심 없는 척 하며 듣고 있던 학생들도 그녀들 쪽으로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응…….”
서현도 약간 동요하고 있었다.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였다. 지금이라도 동생이 돌아온다면 이 지독하게 어두운 마음이 좀 더 밝아 질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남동생이 있는 장소를 아는 애가 있다는 거야. 그것도 나랑 매우 친한 애가”
그녀의 표정에는 능글맞은 웃음이 번져갔다. 하지만 서현은 그런 표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동생이 살아있다. 이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그 남동생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거짓말일지도 몰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다. 앞에 있는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좋은 정보를 넘길 리 만무했다. 그렇다는 건 그녀를 어떻게든 골려줄 생각으로 저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급속도로 그녀의 눈동자에서 희망이 빛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수정은 서현이 급격히 흥미를 잃어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말을 했다.
“그 애가 말이지. 너를 위해서 오늘 방과 후에 만나자고 하던데? 동생에 대한 걸 알아낼 절호의 기회라구. 어때?”
마지막 ‘어때?’만은 어쩐지 앞의 말과는 그 어조가 다르게 느껴졌다. 낭떠러지에서 등을 떠미는 듯 한 어조였다. 거부할 권리는 물론 받아드릴 권리조차 없이 그대로 주입되어 오는 어조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녀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의심스러운 말을 긍정하고 말았다.
방과 후의 교실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서현은 그저 멍하니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것은 고요함속의 외로움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오늘 방과 후에 교실에서 기다리면 돼. 응? 누구냐고? 김현수. 알지?’
수정의 말이었다. 그리고 만날 상대는 김현수.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수정의 남자친구이자 학교에서 이름 난 날라리였다. 이 이상 최악의 조합이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들은 소문에는 그가 한 학년 위의 선배를 임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뻔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돈 아니면 몸을 원하고 다가온다. 오히려 자신을 거부해주는 쪽이 마음이 편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녀는 자포자기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미 해는 지기 시작해 하늘은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오렌지 빛이 교실 안으로도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교실안의 나무 바닥과 그 빛이 섞으며 어떤 의미로 장관을 연출했다. 아마 여름이라는 계절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꽤 늦은 시간일지도 몰랐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마치 도둑이 남의 집에 숨어들어오는 듯 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김현수. 학교 최강최악의 소년이었다. 일반적인 고등학생 치고는 꽤나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키도 꽤나 커서 180은 되어보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몸은 말라서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얼굴에도 자신감으로 넘쳐 그것은 이미 오만함이었다. 그런 그는 들어오자 말자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라? 네가 이서현이야?”
밝게 웃는 그의 얼굴의 어딘가에서 꾸물꾸물 거리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느낌이 그가 갑작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자 사라져버렸다. 그는 억지로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오. 소문하고는 다르잖아? 이거 어떤 의미로 실망인걸?”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속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혼자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별명을 듣고 적어도 평범 이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그게 아니잖아? 너 조금만 꾸미면 수정이하고 맞먹겠는걸? 이히힛”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엄청난 속도로 내뱉어내는 그의 말에 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그녀 자신에게 밝게 대해주는 사람은 처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저건 거짓이야. 이 남자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이것이 혹자들이 얘기하는 ‘여자의 감’이라는 것일까? 그럴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이 들자 그녀는 그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한쪽 손이 그에게 잡혀있어 어느 정도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뭐야? 빼는 거야? 히힛. 매력적인데? 그늘진 미소녀. 그래. 너는 그늘진 미소녀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난폭하게 그녀를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덥석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엉덩이 쪽을 움켜잡았다.
“까악!”
그녀는 세 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어이? 유승태 찍었어?”
그 말에 교실 뒷문이 ‘드르륵’열리더니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났다. 그 소년은 머리를 짧게 깎고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단정’하다는 말보다 ‘의기소침’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안경을 쓴 그 얼굴에는 어쩌서인지 그늘이 져있었다. 그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으 응……. 여기…….”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의 액정에 찍힌 그가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
서현은 섬뜩함을 느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의 인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현수는 그 액정화면을 보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서 풀어주었다.
“잘 봤겠지? 말만 잘 들으면 넌 아무 일도 없어. 알겠지? 괴롭힘도 없을 거야. 하지만 반항하면 알지? 저런 사진이 교무실에 뿌려지면 아무리 너라고해도 크크크”
여전히 밝은 목소리였지만 얼굴만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의 그늘이 한순간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유유히 교실 밖으로 나갔다. 동생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미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꼴을 당하리라 생각은 못했다. 분명히 모든 것을 포기했을 터인데 왠지 모를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저 저기…….”
승태라 불렸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그는 갑자기 기겁을 하며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소리치며 말이다. 왜 그러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 감정을 소중히…….”

서현은 눈을 떴다. 하지만 떴다라고 하기보다는 떠졌다라고 하는 편이 더 낳을 심정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자살에 실패하고 그 다음은 현수의 협박이 이어졌다. 왜 살아 있는 걸까? 아니 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 갈 수밖에 없어.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자포자기라는 심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해져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조금은 상쾌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포자기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한 것일까? 그녀 자신마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그녀였다.
등교 이후에는 수업 그리고 도중에 간혹 있는 괴롭힙. 그것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괴롭힘의 강도가 약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현수가 어제 말한 것은 아마 이런 것에 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수정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평소보다 더 매서웠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현수에게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별로 집에 돌아가기도 싫었기에 교실에 혼자 남아버렸다. 다시 어제의 일이 생각나게 하는 오렌지 빛이 교실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거리며 열렸다. 그녀는 천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수가 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곳에 나타난 것은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네가 이서현이야?”
그가 말했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단정하게 입고 있는 교복을 보면 어디선가 모르게 모범생 느낌도 나는 소년이었다. 얼굴 역시 그다지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존재감도 약간 희미해보였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소년은 약간 주눅 든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망설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게 말이지……. 어제 이맘때쯤에 그 일…….”
“그…….”
어제 이맘때 쯤 이라는 말에 그녀는 반응했다. 그녀의 반응에 소년은 양손을 가로저으며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니 그게 현수랑 관련된 말은 아니고 그 녀석이 괴롭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뭐 너에 대한 소문도 들은 게 있어서……. 나 솔직히 여러 사람이 한명을 괴롭히거나 하는 건 정말 싫어해서 말이야”
소년의 말에서는 왠지 모르게 믿고 싶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거짓이 추호도 없는 완전무결한 진실은 이런 말일지도 몰랐다.
“넌…….”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은 여전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망설이는 듯하자 소년은 천천히 교실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 널 본건 어제가 처음이었고 말이야. 사실 나 너에게 반했다고나 할까. 그 있잖아? 첫눈에 반했다라고 하는 거 말이야“갑작스러운 고백. 보통이라면 당황정도는 해야 하지만 그녀에게서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살아오면서 취득한 단 한가지의 절대적인 감정. 그것은 의심. 모든 것은 의심해보고 보는 것이다.
‘이 아이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나 같은 걸……. 아니 이건 진실일지도 몰라’
의심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진심이 뒤섞이며 그녀의 작은 머릿속은 혼란에 빠졌다. 그것을 그녀가 머뭇거린다고 받아드린 때문일까? 소년은 그녀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무리한 부탁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너에게 반했어.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그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소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살아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백의 말. 그런 말을 해준 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없었다. 이것은 부모님이 해주었던 그 어떤 달콤한 말보다도 마음에 와 닿고 있었다. 왜 일까? 지금 그녀의 처지가 그 만큼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일까?
“그게 저……. 동정이라면…….”
그녀가 억지로 힘을 짜내며 말했다. ‘동정’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심을 뒤로 하고 찾은 새로운 결론이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 동정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동정이 아니야! 이건 진심이라고…….”
그에게 거짓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을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정말이야? 그…….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난…….”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딱히 생각나는 말은 없었다. 열심히 고민한 끝에 그녀가 생각해낸 말은 이 한마디였다.
“이름이 뭐야?”
그 말에 소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 말에는 따뜻함이 담겨있었다.
“최승기”
“승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너라면 나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가 지났다. 그녀에게 있어서 어제는 천지개벽과도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적과도 같은 날이었다. 기적이라는 말만큼이나 지금 그녀는 수년 만에 느껴보는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최승기…….’
속으로 그 기적을 일으킨 소년의 이름을 되새겨보았다. 어제 오렌지 빛으로 가득한 교실 안에서 말해준 그 이름. 실로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감정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뒤에 이을 말을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새로운 감정.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자포자기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져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신비한 일조차도 전부 이것 때문일 것 같다는 제멋대로이지만 확고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등교를 했다. 평소의 등굣길과 다르게 왠지 모를 상쾌함으로 그녀는 가득차 있었다. 하루 만에 같은 광경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이후 이어진 학교생활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괴롭힘이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전에 현수가 했던 이야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계속 수정의 눈초리는 매서워져가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현수는 그 날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 어째서 일까? 고민해보았지만 그녀에게는 낼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서현아”
이름으로 불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포함한 주변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크게 특징이라 불릴 것을 찾기 힘든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서현은 잘 알고 있었다. ‘잘’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승기…….”
누군가의 이름을 자신의 의지대로 친근하게 부른다는 것은 서현에게 너무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대답하는 것도 너무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서현아. 어제 집에 잘 들어갔니?”
안부라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으 응…….”
너무 오랜만이라는 말은 너무 어색하다는 말과 동일했다. 어색했다. 그녀의 마음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초조해하고 있는 듯 했다.
“저기…….”
서현과 승기는 그만 동시에 서로를 부르고 말았다. 이런 광경이 보기 짜증났는지 그녀를 계속 주시하던 수정이나 다른 학생들은 그 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교실에 들어온 뒤부터 인지도 모르겠다.
그 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서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말해…….”
그녀는 계속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는 말투. 아직 그녀에게는 사람과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자문해본다.
그녀의 그런 말을 듣고도 잠시 망설이던 승기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오늘 오후에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서 만나지 않을래?”
무슨 뜻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이후 적당한 잡담을 한 뒤 그는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오후 수업이 마친 교실에서 그녀는 기다릴 것을 결정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수업이 끝난 뒤의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 이전에는 수업이 끝나면 도피처를 찾아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광경. 그러면서도 왠지 그리운 광경. 오렌지 빛으로 물든 교실은 몇 번이고 보아도 새로워 보였다.
“승기는 어째서…….”
단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그에게 믿음이 가는 이유를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인 것일까?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 속에서 이제는 추억이라고 해도 너무 빛바래버린 따뜻함을 그에게서 느꼈던 것일까?
‘모르겠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역시 이 방법은 무리인걸까?’
순간 그녀는 한기가 들었다. 방법? 무슨 방법에 대해 생각했던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방금 전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위화감은 마침 난폭하게 열린 교실 문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어이”
나타난 것은 승기가 아니었다. 현수였다. 며칠 동안이나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였다. 이번에는 전과는 난폭하게 보일정도로 당당하게 교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여전히 서글서글한 표정이었지만 그 너머에 있는 음흉한 속내가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그 표정은?”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주변 아이들에게 어떤 괴롭힘을 당해도 무표정이었던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변에 대한 무관심에 가까운 무표정은 어디까지나 자기방어를 위한 일종의 심리적 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벽이 약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내 알바가 아닌데 말이야. 어이”
현수가 밖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자 그의 그림자에라도 숨으려는 듯이 누군가가 들어왔다. 잔뜩 움츠려있는 그늘진 안경소년. 서현은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승태. 잘 찍어 알았지? 내가 처음 시도하는 일이니까 말이야”
“아 알겠어…….”
아마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표정에서 확실히 들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현수에게 반항할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의지는 꺾여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의 손에는 작은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어제까지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만나기전의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그녀의 심리를 조금은 눈치 챈 것일까? 현수가 말했다.
“저 녀석은 신경 쓰지마. 어차피 있으나마나 한 녀석이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승태를 무시해버리고서는 현수는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당당하다고 하다면 당당한 걸음이었지만 왠지 그 걸음은 뱀이 기어오는 듯 한 기분 나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 기분 나빠…….’
솔직한 느낌을 마음속으로라도 말하게 된 것도 그 소년 덕분일까? 생각해보니 오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그 소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천천히 그녀에게 접근한 현수에 의해서 끊어졌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며칠 전과 같은 구도. 하지만 그 동안 그녀의 심리는 크게 변화해 있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그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그녀에게는 그의 완력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뭐야? 갑자기 반항적으로 변했는데? 뭐 좋아. 이쪽이 오히려 더 흥분되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들였다. 힘이 부족한 그녀의 몸은 마치 거대한 인력에 이끌리듯이 그대로 그의 품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오호 좋아 좋아. 바로 이거야. 어이 유승태 잘 찍어! 알았어!”
어느새 그에게서는 서글서글한 표정은 없어져있었다. 이미 욕망에 찌들어버린 추악한 얼굴이었다. 삐뚤어진 웃음으로 점철된 그런 얼굴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한 쪽 손은 그녀의 양 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채로 한쪽 손으로만 그녀의 몸을 유린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저항해보지만 오히려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돌과 같은 단단한 물체에 걸린 것 같았다.
“반항도 적당히 하는 게 신상에 좋아”
그렇게 말하며 현수는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욕망에 몸을 맡긴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에서 살짝 벗어나 보이기도했다. 그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기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그녀였다.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당연했다. 아니 물어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내 동생……. 동생의 행방은…….”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계기. 계기라고 부르기에는 어설픈 협박. 하지만 일부러 확인해보지 않았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동생? 이제 와서 동생타령이라니. 내가 그런걸 알고 있을 리 없잖아?”
이미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가 입에서 내뱉은 대답은 예상대로의 것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어째서 굳이 물어본 것일까?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마지막 저항이 끝났다.
“뭐야? 별로 충격이 아닌가? 하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 몸과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건가? 큭큭”
혼자서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는 흥분하다 못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굴. 그 다음에는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쪽 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지만은 말이야. 도대체 너의 어디가 그렇게 특별하다는 건지 모르겠어. 그저 이렇게 색기넘치는 몸뚱이일 뿐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이 서현의 가슴을 난폭하게 쥐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현수의 얼굴은 더욱더 흥분해 이제 광기에 어린 듯 한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좋아 그거야. 좋은 소리 낼 수 있잖아? 왕따? 웃기지마. 나한테 여자는 다 똑같으니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흥분되는 이 현실과 더더욱 욕망에 소용돌이치는 상상이 만나며 상호간에 공명을 일으키며 끝임 없이 계속되는 흥분의 폭발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잡았던 손은 점차 내려가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광신도가 자신이 믿는 신을 만나 즐거워 미치는 듯 한 얼굴을 한 채로…….
‘지금이야’
서현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생각이 몰아쳤다.
‘도망가야해’
더 이상 반항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것은 곧 범해질 자신의 생존본능이 소리치는 메아리일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이제 몸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는 질렸는지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기 시작했다.
‘도망쳐야해’
도망을 가야만 한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점차 그의 얼굴이 다가와 이제 곧 그녀의 입술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아마 첫 키스. 싫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첫 키스를 이런 상대에게 주기는 싫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도망쳐’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끝임 없이 메아리치는 그 생각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가 첫 키스를 하려는 동안 한쪽 손은 분주히 움직이며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코앞에서 그가 말했다.
“걱정마. 처음에는 아플지 모르지만 금방 기분 좋아 질 테니……. 크큭”
징그러울 정도로 기쁜 듯 한 그 웃음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악마의 웃음소리로 들렸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의 첫 키스가. 순결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빼앗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 안에서 메아리치던 생각이 폭발했다.
‘도망쳐라!’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마치 잡다한 모든 것이 거대한 흐름에 씻어져 내려가듯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새하얗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변에 놀란 것인지 그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 어이. 갑자기 왜 그래?”
약간 동요하고 있던 그의 몸이 갑자기 뒤로 밀려나갔다. 서현이 몸 전체를 뒤으로 기울이더니 다시 앞으로 크게 밀어올렸기 때문이었다. 이 동작을 한번 더 반복하자 현수의 몸이 크게 기운다. 다시 한 번 그녀가 몸부림치듯이 움직이더니 자신을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그를 뒤로 밀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강한 힘에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현수는 균형을 잃은 체 뒤로 넘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승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저 이 상황을 멍하니 찍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역시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도……. 도망쳐야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더니 교실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녀가 나간 뒤 교실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정적은 곧 웃음소리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크큭……. 크하하하하하!”
소란스러우면서도 징그럽다고 할 수도 있는 찢어지는 듯 한 웃음소리. 현수가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었다. 입에서 침이 흐를 정도로 정신없이 웃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웃음에 승태는 그만 섬뜩한 느낌이 들어 비명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좋아 좋아 좋아 좋아 바로 이거야!”
그렇게 소리치며 현수는 뒤따르듯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광기에 들린 사냥개마냥 서현을 찾아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자 방금전과 같이 징그럽게 웃으며 뒤를 쫒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고 복도 끝에 있는 계단 쪽으로 달렸다. 계단에 도착하자 그녀는 한시의 망설임도 없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 한 동작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 계단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그녀가 급히 옆으로 피하지 않았으면 크게 부딪힐 뻔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짧게 머리를 깎은 존재감이 적어보이는 큰 특징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소년. 승기였다.
“서…….”
그는 그녀를 보고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아끌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한쪽 팔을 잡은 채로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상할리 만큼 강한 여자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완력에 이끌려 승기는 저항의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끌려올라갔다.
잠시 뒤 그 계단에 현수도 도착했다.
“도망가는 거야? 도망가는 거냐고? 좋아 좋아. 이 기분이야. 너는 최고야! 최고의 사냥감이야! 이 힘을 시험해 볼 수 있겠어!”
그렇게 광기에 어린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서현이 뛰어올라간 계단을 뒤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번에 두세계단을 아니 네다섯계단을 뛰어오르며 그는 한없이 웃어댔다. 마치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한 번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활화산과도 같은 기세로 그는 뛰어올라갔다.
서현쪽은 금세 옥상으로 들어가는 문에 도착했다. 그녀가 문 앞에 서자 뒤따라 끌려온 승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골랐다.
“도대……. 체……. 이게……. 헉헉…….”
그의 체력은 이미 바닥나버려 신물이 올라올 것만 같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밑에서는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에서 괴물이 뒤따라오는 소리인 듯만 해서 승기는 감히 확인해보기도 싫었다.
한편 서현은 그저 옥상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옥상……. 옥상이라면…….’
몇 일전에 있었던 일이 갑자기 망령과도 같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던 자살의 감촉은 아직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이 그것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옥상문 앞에 서자 그것을 덮고 있던 모든 것들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문손잡이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밑에서는 난폭한 괴물이 뒤따라오는 듯 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고 곧 있으면 이곳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왠지 웃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난 도저히…….’
망설인다. 망설이고 만다. 결국 그녀는 중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에도 없는 그녀는 망설인 채 혼란스러운 채 그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히 그녀자신의 생각일 텐데 들은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이제 나에게 맡겨. 그러니까 괜찮아’
줄곧 하나였던 그녀의 사고가 둘로 갈라진다. 그녀가 인식할 수 있었던 범위가 둘로 갈라진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전에처럼. 지금까지처럼. 방금 전처럼. 넌 나에게 맡기면 돼. 그걸로 족한 거야’
말을 걸어온다. 그녀의 생각이. 그녀의 마음이. 그녀의 정신이. 또 다른 그녀와도 같은 자신안의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머리카락의 검은 물이 순식간에 아스란히 무너져간다. 그 무너져간 곳에 새하얀 눈과도 같은 색이 자리 잡는다. 눈빛이 급속히 흐려진다. 하지만 흐려졌다고 생각한 곳에는 새빨간 색이 자리 잡는다.
‘넌 누구야?’
있을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로…….
‘난……. 바로 너야’
하지만 있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자기 자신에게로…….
‘그건 말도 안 돼. 넌……. 넌 내가 아니야!’
소리친다. 있을 수 없는 소리를 친다. 자기 자신에게로…….
‘아니 바로 너야…….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마치 메아리와 같이……. 있을 수 없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자기 자신에게로…….
그리고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녀자신은 정신을 잃고 그녀자신이 눈을 떴다.
‘악마야…….’

제1장 끝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