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완전히 사라지는 방법
글쓴이: Ultrablu
작성일: 12-07-13 11:48 조회: 1,521 추천: 0 비추천: 0
00. 세상에서 잠시 외출하는 여자,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

한 남자가 잠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더니 다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아무 감흥 없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고등학생 치고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갈색 눈을 연신 깜빡이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고 있던 하얀 와이셔츠의 깃 부분이 불편했는지 가끔씩 깃 부분을 다시 정돈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청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뭔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있던 그 남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눈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돌렸다.
그 남자가 있던 거리는 도시의 번화가쯤 되는 모양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근처에는 옷가게들이 모여 있었고, 팔리기를 기다리는 옷들이 여기저기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끔씩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옷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고르거나 가게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있는 스피커에는 빠른 템포의 최신 곡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여기저기 틀어대는 통에 어떤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정신없는 번화가의 모습이었지만, 그 남자는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끔씩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꽤나 늦었는지 그 남자는 가끔씩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체크했다. 하지만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는 거리를 관찰할 시간을 줘서 고맙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한 여자가 뒤에서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염색을 한 모양인지 밝은 갈색 빛의 긴 생머리를 한 채로 앞머리를 일직선으로 자른 그녀는 그를 놀래킬려는 생각인지 까만 눈동자의 큰 눈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담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고 있던 하늘색 박스 후드티와 빨간색 치마, 파스텔 톤의 분홍색 빵모자를 계속 정돈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인우야! 오래 기다렸어?”
인우는 딱히 놀라지 않았는지 여자를 항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싱긋하고 웃었다.
“아니 별로, 사람 구경 하다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그나저나 우리 하린 양은 왜 그렇게 늦으셨는가?”
그러자 하린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은 나 안 늦었어. 10분 전부터 네 뒤에 계속 있었는데…….”
“아, 진짜? 근데 왜 나 안 불렀었어? 혹시 ‘사라지는 상태’였던거야?”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뒤에 있지 말고 앞으로 나오지 그랬어, 그랬으면 왔을지라도 알았을 텐데.”
“네가 너무 재밌는 표정으로 사람들 보고 있기에, 방해하기는 싫더라. 거기다가 좀 멀리 있었어, 그래서 귀찮기도 했고.”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인우는 다시 싱긋 웃더니 하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그러실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 오셔요. 네가 있건 없건 간에 사람들 관찰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알았지?”
“알았어. 그나저나 어디로 갈 거야?”
“아, 영화나 볼까 해서, 어제 공짜표 두 장이 생겼거든…….”
“진짜?! 어디서 얻은 거야?”
한빛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들은 1학년 때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사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같은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라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걸로 끝날 수도 있는 사이였지만,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자면 다르지만 비슷한 공통적인 접점이 있었다. 그것은 둘의 특이성이었다.
인우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귀신-사실 진짜 귀신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잘 모르지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우는 언제나 귀신과 함께 살고 있었고, 10살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인지했다. 그리고 10살 때 이후로 귀신과 일반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우는 걱정 없이 귀신을 관찰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취미도 ‘사람 관찰’이 아닌 ‘귀신 관찰’이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았던 것이 이유였다.
하린은 13살까지는 평범하게 살아왔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끔씩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현상을 겪고 있다.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많으면 여섯 번까지 하린의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라짐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닌, 10분에서 20분 후에 복구된다. 그 사라짐을 겪게 되면 하린은 이 세상에서 방관자가 된다. 즉, 아무것도 만질 수도 없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으며,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처음에 이 현상을 겪을 당시에 하린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자신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 (하린은 이 표현을 자주 쓴다.) 후에도 걱정하며 하루 이틀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하린은 그 현상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둘이 접점이 생기게 된 것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장마철이어서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사라지는 현상을 겪게 된 하린은 수업 종이 치는 걸 무시한 채로 비어있던 어학실로 들어가서 창문으로 멍하니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교실로 들어가 봐야 출석도 하지 못할 거 그냥 안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 어학실로 인우가 들어왔다. 교복이 군데군데 젖어있는 걸로 봐서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 어학실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하린은 누가 어학실로 들어오던지 말든지 상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관이 가능한 것도 아닌 것이 이유였다.
몇 분간 정적이 흘렀다. 그저 밖에서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적이 하린이 바란 정적이었고, 하린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정적이었다. 그 때였다. 어학실 안을 계속 둘러보던 인우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하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간 하린은 적잖이 동요했지만, 곧 다른 곳으로 가겠지 싶어서 그 자리에서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린의 앞에서 인우가 정적을 깼다.
“저기……. 창 밖에 보시는 거 방해해서 죄송한데…….”
하지만 여전히 말을 거는 대상이 자신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하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또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인우가 머쓱했는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하린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저기요, 듣고 계신가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 때서야 하린은 고개를 돌렸다. 겉보기에는 별 감흥 없어 보였지만, 이제까지 평화롭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사라진 세상이 침해받을 위기에 직면해서인지, 내면에서는 엄청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말은 할 수 없기에, 하린은 일단 입모양으로 자신의 말을 전달하기로 했다.
‘제가 보이시나 봐요?’
“네? 저기 한번만 더…….”
‘제.가. 보. 이. 시. 나. 봐. 요?’
그러자 인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네, 보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만 보이는 거니까요. 저는 귀신을 보는 눈을 가져서요, 여기저기에 있는 귀신들도 보고 막 그래요, 벌써 어학실 입구에서도 두 명이나 봤는걸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인우를 정신병자로 규정했다.
“혹시 언제…… 돌아가셨나요? 돌아가실 때도 말을 못하셨나요?”
하린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인우를 예의 없는 정신병자로 규정했다.
‘저 귀신 아닌데요?’
“네? 다시 한 번만…….”
‘저 귀신 아니라고요!’
인우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보이자, 하린은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입모양으로 말 맞추는 것은 잘 못해요……. 혹시 가능 하다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데려다 주실 수는 있나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하린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린은 자신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느꼈다.’
“아, 그 그러시기 곤란하면 저…….”
곧이어 세상에 완전히 나타난 하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 말이야…….”
그러자 인우의 눈이 커졌다.
“어! 말할 줄 아셨네요? 그럼 아까는 왜 말 못하시는 척 하신거에요?”
그러자 하린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아, 뭐 그건 그거구요……. 여하튼 설명해주세요, 어디서 돌아가셨기에 여기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참지 못한 하린이 소리쳤다.
“나 안 죽었다고! 살아있다고! 멀쩡하다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고! 귀신은 무슨 귀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인우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들어? 아까 이야기 한 것도 나 귀신 아니라고 한거야! 그냥 너랑 똑같은 학년에 같은 학교 사람이라고!”
“살아…… 있다고?”
“그래! 살. 아. 있. 다. 고!!”
하지만 인우의 표정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 못한 듯 보였고, 하린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 나한테는 흑백으로 보인거지?”
“뭐라고?”
인우는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두지 않은 채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내 눈에는 아까도 말했지만 귀신이 보이거든?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보여. 그런데 귀신들은 모두 흑백으로 보이지. 물론 죽은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색을 조금은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귀신들의 색은 모두 흑백이야…….”
하린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인우는 그에 아랑곳 않고 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살아있다면 정상적인 색을 가지고 있어야 맞지…… 그래, 지금처럼, 그런데 너는 아까 분명 나한테 흑백으로 보였어…… 이건 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너는 귀신을 보는데, 그 귀신들이 다 흑백이었어, 그런데 아까 나도 흑백으로 보였으니까 나도 귀신일꺼라고 생각했다…… 그거지?”
“그렇…… 지.”
고개를 저은 하린이 한숨을 작게 한번 쉬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드냐…….”
“하…… 하지만 말했었잖아! 내 눈에는 귀신이 보인다니까!!”
“참나…… 네 눈에 귀신이 보이면, 나는 가끔씩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나오는 존재겠네?”
그러자 인우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린을 바라보았다.
“진짜야? 너 진짜 세상에서 사라지는 존재야?”
하린은 그 말을 듣고 인우를 생각 없고 예의 없는 정신병자로 규정했다. 하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인우를 계속 바라보자 인우도 갑갑하다는 듯 말했다.
“아, 진짜라니까! 진짜 나 귀신 볼 수 있다고! 아, 진짜 이걸 보여줄 수도 없고…….”
계속 곤란한 표정을 짓던 인우가 어학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문 앞에.”
그러자 하린이 인우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에 두 명 있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한 명, 강도로 죽은 사람 한 명. 그 중에 강도로 죽은 사람은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했어. 하지만 그 집에 있는 돈이라고는 20만원이 전부였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그냥 단순히 무단횡단으로 죽은 사람이야.”
“와, 너 소설 진짜 잘쓰는구나?”
“아, 글쎄 소설이 아니라고! 그렇게 따지면 네가 뭐라 그랬지? 그 세상에서 사라지는거? 그것도 말 안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진짜거든? 아까 네가 흑백으로 보였네 어쨌네 했잖아! 그럼 그건 어떻게 설명할껀데!”
그러자 인우가 말문이 막혔다. 딱히 반박할 무언가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진짜라고!!”
그 때였다. 어학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선생님 한분이 들어와 소리쳤다.
“수업시간에 여기서 뭐하는거야!”
그렇게 둘은 학생부실로 끌려가 벌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하린과 인우는 다시 만나서 그에 대해서 언쟁을 벌이다가 각자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둘은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서로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의지할 존재가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하린은 가끔씩 자신이 사라지면 아무리 수업시간이라 할지라도 인우의 옆에 가 있었다. 하린으로써는 자신을 봐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편한 느낌이 든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계기를 토대로 둘은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고, 그것이 쭉 오늘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었다. 약간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어쨌든 둘은 서로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 현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서로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들어주고, 가끔씩은 곤란한 일이 생기면 함께 해결하는 등,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커플이었다.
잠깐 기지개를 켠 하린이 영화 티켓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그저 그렇네…….”
“그래? 나는 재밌던데?”
“그게? 솔직히 연기는 봐줄만 했는데 스토리 전개가 엉망이었잖아.”
인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던가? 뭐, 어쨌든 나는 재밌었어.”
그 모습이 웃겼는지 하린이 쿡쿡거리며 웃자, 인우가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뭐가 그렇게 웃긴건데?”
“그냥……. 왠지 웃겨서.”
하린은 한참을 웃었지만, 인우는 도저히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때였다. 하린이 어지러운지 잠시 비틀대다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 쪽 아니야.”
그러자 인우가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하린은 어지러움이 멎었는지 모자를 고쳐 쓰며 일어났다.
“나 잠시 ‘사라지고’ 올게.”
“알았어. 뭐, 영화도 다 봤고 했으니까 그냥 집으로 데려다 주면 되겠지?”
“다른데 더 가기로 한 곳 있지 않았어?”
인우가 씨익 웃었다.
“괜찮아, 다음에 가면 되니까.”
미안한 듯 고개를 끄덕인 하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구석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얕게 한숨을 쉬고는 뭔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린의 표정에서는 설렘도,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하린의 머릿속에 무언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스쳐갔다. 그냥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 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몸 안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 나가는 느낌과도 흡사하게 느낄 법도 했다. 그렇게 덜컹거림은 3번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 하린의 모습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린이 사라지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예고라도 하듯 하린의 머릿속에 덜컹거리는 느낌이 스쳐지나가고 난 후에 천천히 하린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 덜컹거림은 늘 한결 같이 사라기지 전에 하린을 스쳐 지나갔다. 별 것 아닌 느낌이었지만 하린은 그 덜컹거림이 묘하게 좋았다. 물론 덜컹거림 이후에 오는 잠깐의 무기력감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묘한 기대감과 이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하린은 즐기는 듯 했다.
근처에 있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하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인우에게로 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하린을 발견한 인우는 살짝 미소 짓더니 말없이 하린의 옆으로 가서 섰다. 하린은 자신의 옆에서 인우가 짓는 미소를 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인우는 느꼈다. 사라지는 순간만큼 이라도 하린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하린은 바랐다. 사라지는 순간만큼 이라도 인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그렇게 둘이 나가고 난 후, 극장에 있던 TV에서 아나운서가 다음 뉴스를 전하기 시작했다.
“다음 뉴스입니다. △△시에서 의문의 시체가 또 발견되어서 사람들의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기자의 보도입니다.”
“어제 저녁 6시 20분 경 이번 시체는 □□동에 있는 한 아파트 뒷골목에서 발견되었으며, 며칠 전에 발견되었던 시체와 똑같이 외상이 하나도 없이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근 한달 동안 꾸준히 발견된 시체에 대해서 □□동 주민들은 불안을 표하고 있습니다.”
“불안해서 어디 살겠습니까? 하루 이틀 발견된 것도 아니고 한달 동안 꾸준히 입니다. 꾸준히.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만 한달이지 다른 곳에서 일어난 것도 합하면……. 어휴……. 빨리 범인을 잡아 주던지, 아니면 순찰을 강화하던지 해줬으면 좋겠군요.”
“한편 이에 대해 경찰은 처음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외상이 없고 주변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단순 약물로 인한 자살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시체가 계속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건을 타살로 추정하고 수사의 방향을 바꿨다고 브리핑에서 전했습니다.”
“에……. 현재 여러 근거로 미루어 봤을 때 타살로 추정을 할 뿐이지만 주변에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저희로써도 수사에 힘든 점이 많습니다. 일단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 했으니 그 부검 결과에 따라서 수사가 결정될 방침입니다.”
“추가로 경찰은 현재 일어나는 이 사건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하면서도 전국에 있는 모든 경찰에게 순찰을 강화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두고 타살인지 자살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며 인터넷에 게시하고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한 일당이 붙잡히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뉴스, ◇◇◇이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요즘…….”
그리고 잠시 후 뭔가 잘못 되었는지 직원이 황급히 오더니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TV에서는 최신 유행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01. 분노의 백색, 질투의 어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을 한 남자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면서 계속 뛰고 있었다. 이미 땀범벅인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뛰고 있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뛸 수 있을 법한 거리의 두 배 정도를 뛴 상태였고, 거기다가 다른 사람보다 체중도 많은 상태였기 때문에 뛰는 걸음 하나하나가 고역처럼 보였다.
그렇게 3분 후, 그는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었고, 의도치 않게 주저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이제 자신에게 올 절망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울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남자가 있던 막다른 길로 누군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 그가 처음 본 것은 어둠이었다. 단순한 골목길의 어둠이 아니었다. 그 어둠은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 했고, 그 어둠 때문에 골목길이 한층 더 어둡게 보였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외형은 볼 수 없었지만, 얼굴의 생김새는 상당히 하린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린이 가진 분위기는 주변보다 채도가 밝은 편임에 반해서 그 누군가가 가진 분위기는 어둠 그 자체였다. 까만색 바탕에 하얀색 눈동자를 가진 눈에서는 상대를 깔보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고, 손짓 하나하나마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를 쫓아오던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소리쳤다.
“누…… 누구야 당신! 누군데 나를 따라오는거야!!”
그러자 그 누군가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인간이란 것은 따분해……. 그렇지 않아? 언제나 나를 보면 하는 말이 ‘너 누구야!’아니면 ‘살려주세요!’ 둘 중에 하나라니까? 그래, 안다고 상황이 변할 것 같아?”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왜? 알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빠져 나가서 인간들이 그렇게 의지하는 ‘경찰’이란 존재한테 고자질이라도 하시게? 응? 그 전에, 누가 살려둔데? 좋아,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뭐, 나는 딱히 이름이 없지만……. 구지 부르고 싶다면 ‘흑화’라고 불러.”
그러더니 흑화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자, 이제 이름도 알았으니 빠져나가려고 발악하시는 수밖에 없나?”
“저…… 저를 죽이실 생각이신 겁니까?”
“어.”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말의 의미를 잊은 건지 충격에 빠진 건지 그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입을 벌렸다.
“왜…… 왜 저를…….”
“아아……. 정말 인간들이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다 똑같다니까? 좋아, 그럼 나도 똑같은 패턴으로 대답해줄까?”
또 다시 기분 나쁘게 웃은 흑화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혹시 말이야, 인간들 몸 안에 빛이 있다는 거…… 알아?”
“비……. 빛이요?”
“그래, 빛…….”
주저앉은 그에게 접근한 흑화는 그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딱 여기쯤에 있지. 밝기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 모두가 가진 빛이지. 너에게도 빛나고 있어. 아주 아름답게 말이야…….”
그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흑화가 다시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런데 나도 이 빛이 정체가 뭔지는 아직 잘 몰라. 다만, 하나는 확실하지. 너에게서 이 빛을 빼면, 네가 죽게 될 것이란 거.”
“빛을…… 빼요?”
“그래, 내 목적이 그거야. 너의 빛을 빼는 거. 어때? 흥미롭지 않아?”
그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유심히 보던 흑화가 다시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흠……. 그 빛이란 것이 뭔지 참 궁금하다는 표정인데……. 뭣하면 지금 보여줄 수도 있어. 어때?”
“아…… 아…… 안돼요!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흑화가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래……. 그렇겠지, 인간이니까 죽고 싶지 않겠지……. 살고 싶겠지, 몇 가지 구차한 이유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하겠지……. 좋아, 어디 한번 내가 그 이유를 맞춰볼까?”
어둠 속에서 흑화가 손가락 세 개를 쭉 폈다.
“네 꿈, 네 가족, 네 생명. 맞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나 인간들이란 이렇지. 언제나 똑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지. 언제나 그것이 유토피아 인줄 알면서 살아가지. 자신들이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말이야. 네가 말한 그 세 가지, 다른 범죄자에게는 이유가 될지 몰라도 나에게는 전-혀 이유가 안 돼.”
“어…… 어째서…….”
그러자 흑화가 아까 쿡쿡 찌르던 곳에 손을 ‘쑤욱’하고 밀어 넣으며 말했다.
“커…… 커억…….”
“다 나한테 없는 것이거든,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지 싫어하거든. 그리고 말이야…….”
흑화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가진 빛도 같은 이치야. 잘 가라고, 이름도 모르는 인간!”
“자…… 잠깐…… 잠깐…… 만…….”
이미 눈과 입이 비정상적으로 벌려진 그의 귓전에 대고 기분 나쁘게 웃은 흑화는 엄청난 속도로 밀어 넣은 손을 빼냈다. 곧이어, 그는 생명을 잃고 축 늘어져 쓰러졌다. 그리고 흑화의 손에는 눈부신 빛 한 줌이 들려 있었다. 흑화는 그에게서 빼낸 빛이 만족스러웠는지 황홀한 표정으로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은 세상에 있는 어떤 전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법한 빛이었다. 그 빛은 꼭 낮 12시에 뜬 태양을 보는 것처럼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동한 황홀하게 그 빛을 바라보던 흑화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이제 하나의 물건이 돼버린 그에게 다가가서 아직 눈물이 다 마르지 않는 그의 눈에 대고 빛을 흔들어댔다.
“어때, 보여? 이게 네가 가진 빛이야.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빛이 있어. 이제는 믿겠지? 킥킥킥……. 그거 알아? 네 표정 무지 웃긴 거? 킥킥킥……. 네가 직접 이 표정을 봐야 하는데!!”
흑화는 자신이 한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칼로 무 자르듯 흑화는 웃음을 그쳤다.
“이제…… 질렸어…….”
그러더니 흑화는 그가 보라는 듯이 그의 빛을 눈앞에서 꽉 쥐었다. 매우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빛이 작은 조각들로 쪼개졌다. 그렇게 허공에 흩날린 조각들은 잠시 동안 공중에 떠 있다가 흑화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흑화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아아, 좋아……. 이번 녀석도 만족이야…….”
흑화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은 꽤나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곳곳에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화와 물건이 된 그가 있는 골목길의 가로등은 흑화의 어둠 탓인지 희미하게만 빛나고 있었다.
빛으로 이뤄진 어둠, 그것이 흑화가 지닌 어둠이었다. 빛을 뺏고 파괴하면 파괴할수록 흑화의 어둠은 짙어지고 있었고, 현재 흑화가 가진 어둠은 흑화가 빼앗은 빛의 훈장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흑화도 자신의 어둠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흑화는 언제나 빛을 빼앗는 것을 즐겼고, 자신이 뿜어내는 어둠을 보면서 사람들이 겁에 질려 하는 모습 또한 즐겼다. 그것이 흑화가 유일하게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 때였다. 흑화의 뒤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래, 결국 오늘도 한건 했구나.”
흑화가 귀찮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았다. 그 곳에는 노란색으로 물들인-갈색이 아닌 정말 샛노란 색이었다.- 단발머리를 가진 여자가 까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흑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공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틈틈이 주변에 신경을 쓰면서 입고 있던 긴소매 체크무늬 셔츠와 하얀색 스키니 진을 계속 매만지며 신고 있던 까만색 캔버스화로 바닥을 두드리며 ‘툭툭’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흑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백화였군……. 여기는 어쩐 일이지?”
“어쩐 일이긴, 늘 똑같지.”
흑화는 백화가 바닥을 두드리며 내는 ‘툭툭’소리가 심히 거슬렸는지 표정에 한껏 짜증을 담았다.
“오호라, 네가 사랑하신다는 그 인간을 내가 괴롭혀서 라는 건가? 영웅 하나 납셨군!”
“영웅이건 뭐건 간에,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냐니?”
백화는 경멸스럽다는 눈빛을 유지한 채로 흑화 뒤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저 사람, 네가 그런 거 아니야?”
“아아! 저 사람? 그래, 내가 그랬지. 왜, 불만이라도 있으신가?”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러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흑화가 뭔가 알아냈다는 듯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어이쿠,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하늘을 찌르는 터라 눈물마저 날 것 같군요, 백화양.”
“도대체 왜 사람들의 빛을 빼앗는 거지?”
“나한테 없으니까.”
너무 당연한 듯 한 즉답에 백화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난 나한테 없는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질색이거든…….”
“겨우 그깟 이유로 사람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거야?”
“호오? 사라지게 한다?”
백화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가시가 가득 돋혀있었다.
“너도 분명 사람에게서 빛을 빼앗으면 완전히 죽지 못하고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정신만이 밖으로 빠져나와서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을거야.”
“그래,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사라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냥 죽는 거 아닌가?”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 살아있는 정신들이 너와 내 눈에도 보이고 말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신들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을 떠돈다는 사실인거지.”
그러자 흑화가 눈을 굴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죽은 거랑 무슨 차이인데? 어차피 육신이 죽어 있잖아. 그걸로 된거 아니야?”
“아니, 전혀 다르지. 그 정신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는 대신에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잖아? 그리고, 애초에 네가 그 어둠 속에 담아두고 있는 빛들을 다시 돌려준다면 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 알잖아!”
“몰라, 그까짓 거. 관심도 없고.”
백화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난 그저 사람들이 가진 빛을 뺏고 즐기고 내 어둠 속에 더하면 그만이야. 그저 내가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인간? 그런 거는 애초에 이 세상에 딸려있는 부수적인 존재 아니겠어?”
“그래서, 너는 자신의 딸의 주변을 떠돌면서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모르고 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사람이나, 자신의 자식 주변을 떠돌면서 부질없이 자식을 지켜주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 주변을 떠돌며 제발 자신을 돌아봐주길 바라면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
“미안하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나한테 전혀 안 먹혀. 거기다가 애초에 나는 흑백으로 보이는 사라진 사람 따위에게 전혀 관심 없어.”
아까 흑화가 빛을 뺀 사람에게서 흑백의 정신이 빠져 나와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백화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결국 찌질이들 아니야? 흑백이 되었건 자신이 보이건 말건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어. 그런데 그저 살아있을 때의 추억에만 젖은 채로 세상을 떠돈다고? 결국 구제 불능인거잖아.”
“그. 입. 닥. 치. 는. 게. 좋. 아.”
“너나 신경 끄고 꺼지시지? 너는 우리의 창조자가 너를 빛의 존재로 창조 했다고 너를 구세주쯤 되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언제 내가 다른 사람의 빛을 뺏는 것을 막아본 적이 있던가? 결국 너도 두려운 거잖아. 너도 빛을 가진 존재로써 나와 승강이 하면서 여차저차 하다가 내가 홧김에 빛을 뺏을까봐 두려운 거잖아. 그렇지 않아?”
백화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흑화가 그녀의 발언권을 차단했다.
“그래, 물론 너는 아니라고 말하겠지. 그게 빛의 존재로써의 도리이니까. 또한, 결과적으로 사람이 가진 빛은 너의 생명과도 연관되고, 사라지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리고 내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나는 계속 강해지니까.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겠지. 하지만 과연 네가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결국 너도 내 앞에서는 저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하는 찌질이 하나에 지나지 않아.”
“내가? 내가 널 두려워 해? 빛의 근원이자 빛의 존재인 내가 겨우 한낱 어둠의 존재인 너를 두려워한다고? 웃기지마. 애초에 너와 나는 한 창조자 밑에서 태어난 존재야. 그런데 과연 네가 내 빛을 빼앗을 수 있을까?”
“한 창조자 밑에서 태어난 존재?”
갑자기 흑화가 온 골목길이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신조차 컨트롤 하지 못할 정도로 웃어대던 흑화는 가끔씩 웃음을 참고 뭔가 말을 하려고 시도하는 듯 했지만, 그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포기한 흑화는 몇 분간 계속 웃어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한참을 계속 웃던 흑화는 자신을 경멸하는 듯 쳐다보는 백화의 눈을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 덕분에 오랜만에 웃었군. 이제까지 네가 한 농담 중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었어.”
“농담이라니?”
“한 창조주 밑에서 태어났다는 말……. 개소리 치고는 많이 웃겼어. 우리가 한 창조주 밑에서 태어났다고? 그래, 너는 태어났겠지. 하지만 난 태어나지 않았어.”
백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흑화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역시 모르나보군……. 너와 나를 몇 번만 잘 관찰하면 나올 수 있는 결과일텐데 말이야……. 너와 나는 정 반대의 존재야. 네가 빛을 관할한다면 나는 어둠을 관할하지. 내가 낮을 담당한다면 나는 밤을 담당하지. 네가 안에 빛을 품고 있다면, 나는 밖에 어둠을 품고 있지…….”
“그게 이거랑 무슨 관계인데?”
그러자 흑화가 소리쳤다.
“그 ‘정반대’ 라는 것이 단순히 빛과 어둠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니까 관계가 있지! 그래, 창조주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너는 잘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너와 반대되는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네가 사랑을 받으면 나는 그 사랑을 받지 못했고, 네가 창조주의 근처에서 자랄 때, 나는 바깥에서 널 저주하며 혼자 살아갔어! 그런 내가 과연 창조주 밑에서 태어난 존재일까? 아니, 네가 생각해도 그건 아닐걸? 나는 그냥 너를 위한 부수적 존재로 만들어졌지 태어나지 않았다고! 그게 짜증나고, 그게 싫다고! 그래서 내가 널 싫어한다고!”
둘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백화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 너의 그 분노 때문에 인간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지? 네가 말했듯이 인간들은 부수적 존재라며, 그냥 나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되지 왜 하필 인간들의 빛을 빼앗는거야?”
“너를 천천히 짓밟아 나갈꺼니까.”
“그게 무슨…….”
흑화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내가 인간의 빛을 뺏음으로써 얻는 것이 두 가지가 있지. 첫 번째, 너는 결국 인간을 위한다고는 하면서 자신이 두려워서 나서지 못한다는 위선자 인증. 두 번째, 너를 짓밟을 만큼의 힘. 그리고 첫 번째는 웬만큼 충족했지.”
“분명 아까도 말했겠지만, 난 네가 두렵지 않다고.”
“호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쥔 백화를 보며 흑화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너와 내가 대결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때?”
“대결?”
“그래, 대결. 입으로만 네가 두렵다 두렵지 않다 나불대지 말고,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러자 백화가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이 흑화를 노려보았다.
“왜, 싫은 거야? 너도 어차피 내 말에 반박하고 싶어 했잖아. 네가 내 우위에 있다며? 그럼 어디 한번 증명해봐.”
“증명해서 내가 얻는 것이 뭐가 있는데?”
“오호라? 역시 백화야, 계산 하나는 치밀하군. 그래, 대결이니까 서로가 이기면 얻는 것이 있어야겠지.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흑화가 두 발자국 정도 백화에게 다가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인간들의 빛을 뺏는 것을 포기하지. 어때? 그 정도면 네가 원하는 것에도 나름 근접하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 네가 이기면?”
“내가 이기면…….”
흑화가 손가락으로 백화를 가리켰다.
“네 빛을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뭐라고?”
“말을 못 알아들어? 네 빛을 내가 가져간다고. 그래서 흑백으로 변한 네가 지극히도 사랑하는 조물주님 곁에서 자신을 봐달라면서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즐겨주겠다고. 알았어? 그리고 말이야…….”
흑화가 백화를 껴안더니 귓전에 대고 말했다.
“너에게 선택의 권한은 없어. 어디 한번 날 굴복시켜봐. 기대하고 있을게. 아 참, 그리고 승부 방식은 우리 모두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어 주는 인간을 매개로 해서 승부하도록 하지. 자, 그럼…….”
어둠을 흩날리며 흑화가 사라지자 백화는 흑화가 있었던 자리를 잠시 동안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결국 그렇게 흑화와 백화는 각자 서로를 막기 위해서 서로 반대되는 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의 근원은 서로에게 올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역시 각자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