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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우리는 왕따다
글쓴이: 푸우니
작성일: 12-07-11 12:36 조회: 1,605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과 교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학교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난 그렇게 벚꽃이 화려하게 만발하는 때에 더 이상의 두근거림을 참지 못하고 학교로 향하는 가로수 길에 서 있다. 이제는 제법 농후해진 봄 햇살을 피해 벚꽃나무 아래에서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일 년간의 짝사랑, 그리고 안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란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무모하게 시도한 유치한 고백.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짝사랑이라는 것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무섭고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나를 말도 안 되는 망상의 파도 속으로 이끄는가 하면,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이 제대로 된 사고를 유지할 수 없게도 만들곤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멋진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끝없는 고민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차라리 이대로 빠르게 시간이 흘러 이 감정이 무뎌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도 하지만, 역시 그런 것보단 행복한 해피엔딩을 꿈꾸며 나 자신을 자위하는 것이 매일의 반복이다. 그것이 무시무시하면서도 두려운 마력을 내뿜는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감정이었다.

“하아.”

하지만 역시 그건 어디까지나 일방적이었던 것뿐이었을까.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다면 이곳으로 나오라고 한 나의 요청에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답해주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 흩날리는 꽃잎이 벌써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그녀가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불운과 오해가 겹쳐진 사건 때문에 학년 내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버린 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래, 그러고 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안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실망이라니. 원래부터 결과를 알고 있었는데도 혼자 끙끙거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 참지 못하고 시도해본 것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저기.”

하지만 그때였다. 기대고 있는 나무 뒤쪽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순간 숨이 멎는 거 같았다. 천천히 왔다갔다 떨어져 내리는 벚꽃 사이로 난 딱딱한 표정을 보이며 소리가 들린 나무 뒤쪽을 쳐다봤다.

“승연이가 아니라서 미안.”

너무나 당연한 거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바라던 그녀는 아니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여학생은 커다란 안경에 양쪽으로 땋은 머리가 모범생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서우였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차승연과는 평소에 항상 같이 다니는 단짝 친구. 한데 어째서 그런 서우가 이곳에 있는 거지?

“왜 네가 나왔어?”

“승연이가 말 좀 전해달라고 그래서……”

“왠지 안 들어도 알 거 같군.”

“그럼 하지 말까?”

“아니, 그래도 이유는 알고 싶으니까.”

한숨을 푹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서우는 쭈뼛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눈을 차갑게 뜨고는 그 큰 가슴을 쭉 내민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와우……가 아니라. 긴장이 몰려오는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오해는 말아줘. 승연이의 말을 전해줄 뿐이니까.”

“그, 그래.”

왠지 분위기가 바뀐 거 같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장황한 언어의 창은 그야말로 앞에서 언급한 짝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훨씬 더 아프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너 같은 놈이 감히 나를 넘본다고? 미쳤어? 장난 하자는 거야? 솔직히 네놈한테 고백 쪽지를 받자마자 역겨움이 몰아쳐 왔어! 너 같은 놈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거 자체가 아이들에게 놀림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이 미친 찌질이 왕따 새끼! 넌 그 사건 이후로 아무리 외모가 봐줄 만 하다해도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남학생 부동의 일위야! 솔직히 너한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 자체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이 왕따 새끼야!”

“쿠, 쿨럭!”

내가 알던 승연이 전해달라고 했던 말 맞나 싶을 정도로 이건 엄청난 모욕이잖아! 난 그녀의 차가운듯하면서도 시크 했던 매력에 빠졌었던 것이었는데, 이토록이나 독설가였다니!?

“휴! 난 승연이의 말을 전한 거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 그렇다면 어째서 마지막에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 자체가 창피하다고 말한 건데?”

너 이중인격자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태도가 휙휙 하고 바뀌는 거지!

“아, 그건 전하다 보니 흥분해서 그런 거야. 미, 미안. 아무튼 난 그럼 가볼게!”

“……”

서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언행일치를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자괴감이 몰려온다.

“결국은 왕따여서야?”

왕따인 난 엄청난 모욕을 들으며 뻥하고 차여버렸다.

……으앙, 이거 눈물 나잖아.



1화 - 처녀귀신과 러브레터.



1


“휴!”

그녀의 친구를 통해서 비참하게 차여버린 나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있는 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까지 이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특히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날 비웃는 거 같은 느낌이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정말 뭣도 아닌 녀석이 괜히 나댔다가 우스운 꼴을 보였을 때의 사람들 시선. 그런 꼴불견이 지금의 나 같다 이 말이라고. 왠지 누군가가 날 지켜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정말 딱 기분만 그런 줄 알았던 내 귀에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후후.”

흠칫.

……부, 분명 기분 탓일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누군가가 뻥하고 차여버린 나를 훔쳐보며 비웃고 있을 리가!?

찰칵.

“…….”

아니, 그래도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자! 궁상을 떨어도 집에 가서 떠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재빨리 벚꽃 나무를 돌아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몸을 엄습해 왔지만 억지로 무시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항상 지나는 이 벚꽃길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또 왜다냐.

사삭!

“아오, 젠장!”

역시 불길함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리가 없지! 분명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고로 아까 전에 들었던 그 음습한 웃음소리와 사진 찍는 소리는 내가 만들어 낸 환청이 아니었단 말이야!

타다다닥!

“아, 안 돼!”

이제는 대놓고 말까지 하면서 쫓아오는 겁니까! 다리를 교차하는 속도에 힘을 주고 정말 죽도록 벚꽃길을 전력 질주했다. 안 그래도 차여서 슬픈데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는다면 난 창피함에 쥐가 되어 구멍만을 찾으러 다닐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결국엔 뻥하고 터져버려 그 자리에서 영혼이 죽어버릴 수도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도대체 어떤 녀석이 남의 비련을 비웃으며 쫓아오는 것이냐! 평생 내방에다 사진을 걸어 놓고 저주해 줄테닷!

홱!

“…….”

“자, 잠깐 기다려주세요!”

“저, 저주는 개뿔. 으아아악!”

고개를 돌려 나를 쫓아오는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사색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새까맣고 기다란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쫓아오는 귀신같은 여자. 그래, 분명 처녀귀신 같은 몰골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신기하게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내 쪽으로 정확히 뛰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긴 교복치마와 답답하지만 단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했다. 머리는 괴상하지만 옷차림만은 단정한 여학생이었다는 것인데……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혹시!

홱!

“너 뭐야!”

“일단 멈춰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싫어어!”

타다다닥!

방금 전에 다시 한 번 모습을 확인함으로서 확신할 수 있게 됐다. 이상한 모습에 새빨간 가방이라면, 우리 학년에선 꽤 유명한 1반의 왕따잖아! 근데 왜 그런 왕따가 나를 쫓아오는 건데!?

“당신이 차인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한테는 꽤 수준 높은 학생이었잖아요? 서우 학생은 우리 학년에서도 그 크고 몰캉한 달덩이와 지적인 얼굴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보, 본 거냐!”

그때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지금 나 차였다고 광고하고 다닐 생각이냐! 그리고 난 서우한테 차인 게 아니라, 차승연에게 차인 것입니다만!

타다닥!

“당신이 차인 이유는 왕따이기 때문 아닙니까?”

“저, 저 놈이?”

“저는 년입니다!”

아니, 그보다 우린 왜 달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묘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제 이 벚꽃 가로수길만 지나면 시내로 들어가 사람들 틈에 숨어버려야지!

“멈춰주세요! 전 당신을……헤엑.”

수, 숨이 찬 모양이군. 하긴 나도 지금 갑작스럽게 뛰는 바람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등에선 땀 한바가지가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저기요!”

그때였다. 저주하고 싶어도 이미 귀신인 처녀가 부리나케 도망가는 내 뒤로 크게 소리쳤다.

“전 당신의 고백을 폄하하기 위해 접근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이런 꼴을 해도 저한테 고백하는 남학생은 있습니다. 그 남학생과 당신, 둘 모두 전 훌륭한 대한민국의 청소년이라 생각합니다!”

그 소리에 난 나도 모르게 순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가 요즘 애들답지 않게 어딘가 성숙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이름을 모르는 저 여자의 말엔 진정성이 있었다. 아, 여기서 말투와 목소리가 성숙하다는 것은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나쁘게 말한다면 지나치게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거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고개를 돌리자 기다란 머리로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헥헥 거리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한 5m 정도.

“그러면 왜 나를 쫓아오는 건데?”

“화, 화나지 않습니까!”

“응?”

“왕따여서, 왕따여서 차인 것이 화나지 않냐는 말입니다!”

……다 들었구나. 하나도 빠짐없이. 아니, 그보다 내가 알기론 너도 왕따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왜 당신이 그렇게 흥분하는 겁니까?

“무, 물론 저 역시 오늘 고백을 받은 입장에서 그 사람이 왕따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서우 학생의 행동은 너무 지나쳤어요! 사람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최악의 남자라고 하는 건 너무 했어요!”

이때 난 생각했다. 홀로 주먹을 꽉 쥐고 열변을 토해내는 저 여학생이 내가 차인 장면을 모두 보았다면 저런 식으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왜냐면 내가 고백한 여자는 서우가 아니라 승연이었으니까. 저 녀석은 분명 서우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며 승연의 말을 대신 전하는 그 장면만 본 모양이었다.

일단 난 그녀의 말을 끊고 요점부터 묻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그래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제가 보기엔 우리 학교 학생들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어요. 잘 살고, 잘 어울리고, 잘 아첨하고, 강한 학생만을 떠받들어주는 행위가 참을 수 없어요!”

옆머리와 앞머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려 입과 뺨 약간밖에 보이지 않는 여학생은 말을 끝마친 후 잠시 입을 앙 다물었다. 가늘지만 새빨간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진짜 처녀귀신…아니, 상황에 맞지 않게 요염하게 느껴지는 건 또 왜이려나.

뭐 입술은 그렇다 치고. 현재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확실히 우리 학교 학생들이 좀 졸렬하긴 하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힘을 합쳐 우리를 왕따로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합시다!”

“…….”

저기요, 방금 혹시 우리라고 했나요? 그리고 복수라니? 설마 온갖 무술을 연마해서 밤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을 덮친 뒤, 한방에 숨통을 끊자는 것……일 리가 없지!

“복수라니?”

“왕따를 당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왕따를 당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여자겠지요.”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무, 물론 내가 왕따를 당하게 된 그 사건에는 여자가 중심이었지만.

“그래서 그 여자들을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무,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녀는 나의 말에 유일하게 보이는 약간의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주먹을 쥐고 상체를 위로 바짝 올렸다. 입술은 폭발하기 직전의 무엇처럼 앙다물어져 있었다. 저 여자, 아직 완전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입술만은 엄청나게 매력적이야.

“그러면?”

“왕따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차였다면, 자신을 찬 여자를 공략하여 멋지게 다시 고백을 성공시키자는 겁니다!”

“……난봉꾼이라도 되라는 거냐.”

“나, 나, 난봉꾼?”

화악.

분명 그러한 소리가 난 거 같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것을 보면.

“저, 저, 저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왕따인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이미 행동에 나선 저의 동료도 한 명 있습니다.”

“휴! 뭐야, 도대체.”

그녀가 다시 진지한 태도가 되어, 아니. 항상 진지했지, 저 녀석은. 어쨌든 그렇게 말하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려버렸다. 하도 끈질기게 쫓아오면서 진지하게 말하기에 들어봤더니 결국 망상병 환자 아니야? 우리 같은 왕따는 이미 인식부터가 나쁘게 되어 있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걸 모르는 건가. 그리고 난 차이긴 차였어도 딱히 심한 짓을 당한 건 아니라고.

“어디가시는 겁니까?”

“집에 갑니다.”

“포, 포기 하시는 겁니까?”

“포기고 자시고. 내가 딱히 심한 꼴을 당한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복수라는 명목으로 생쇼를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새, 생쇼라고 하셨습니까?”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을 멈칫하더니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반문했다. 그리고는 곧 화를 억지로 참는 거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겐 실망입니다! 저도 오늘 고백을 받았는데, 그 고백한 남자가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크게 실망할 거예요!”

“아, 진짜!”

저 여자가 왜 아까부터 유난히 고백을 들먹이며 말하는 거야!?

“흥입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타다닥.

아니, 오늘이 아니라 평생 물러나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설마 너 아까 전에도 그렇게 달리면서 팔을 휘적휘적 거렸냐. 꼭 간절히 하늘로 비상하길 원하는 병아리 같은 모습이군. 애초에 그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기면 될 것을!

“바보 같은 놈.”

“놈이 아니라 년입니다!”

드, 들렸나.



2



차인 다음 날……이 아니라, 안타깝게 짝사랑이 실패해버린 다음 날. 난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등굣길에 오르고 있었다. 이제 수백의 꽃잎이 흩날리는 벚꽃길을 지나면 학교다. 하지만 역시 그곳을 지나갈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곳을 지나친다면 어제의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올지도 모르겠거든. 물론 그렇다고 등교를 거부하면 그건 그것대로 눈물 나올 일이 생기겠지만.

“휴우!”

어제부터 습관이 되어버린 한숨을 내쉬며 발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이 길에선 차인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처녀 귀신에게 정말 죽도록 쫓기기도 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녀석 정말 무서웠다고. 눈도 제대로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정확히 내 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어봐, 안 무섭겠어?

웅성웅성.

그때였다. 내가 막 고개를 흔들며 처녀귀신을 떨쳐내고 있을 때, 저 앞쪽에서 몇몇의 학생들이 둥글게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해 다가가서 상황을 살피자 웬 두 여학생이 서로 대치해 있었다. 한 명은 큰 키에 딱 봐도 ‘나 노는 언니’라는 느낌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와는 대비되게 단정한 교복차림에 작은 키, 동그란 안경이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과연 내 예상대로 큰 키의 여학생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싸움이 일어나려 하는 거 같았다. 작인 키 여학생은 상대의 말에 눈을 한 번 끔뻑거리며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꾸 나 괴롭히면 뒤, 뒤진다!”

……아니, 이보세요. 그렇게 벌벌 떨며 말해봤자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고요.

“네가 진짜 미쳤구나?”

“그, 그런 거 같아요. 아, 아니! 내가 미친년이라면 넌 왕미친년이닷!”

“푸핫.”

누군가의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나도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을 정도로 저 여학생의 경고는 아무리 봐도 귀엽게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됐고. 그보다 너 내가 앞머리 까고 다니라고 했지?”

움찔.

키 큰 여학생의 말에 움찔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작은 키의 여학생. 하지만 행동과는 다르게 입만은 쉬지 않고 상대를 공격했다.

“흐, 흥! 너, 너보다 예쁜 내 얼굴이 부러워서 그렇지?”

“뭐야?”

“그래봤자 난 이마 까면 더 예쁘다 뭐! 그러니까 지금 당장 까겠습니다!”

덜덜 거리는 손으로 재빨리 이마를 드러내 사과머리를 하는 그녀의 미모는 확실히 위협적인 여학생보다 훨씬 뛰어났다. 안경을 써서 그렇지 자세히 보면 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기다란 속눈썹이 상당히 여성적이며, 입술을 오므릴 때마다 나타나는 보조개는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거기다 품에 쏙 들어올 거 같은 작은 체구가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이게 진짜, 누굴 놀리나!”

홱!

그리고 그 순간 큰 키의 여학생은 열등감을 느꼈는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생각인 듯 했다.

“후엥!”

작은 키의 여학생은 순간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꽤나 익숙해 보였다.

어쨌든 아무나 좋으니 저 여학생을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저 높게 올라간 손이 내려가기 전에 말이야. 물론, 나는 그 흑기사에서 제외되겠지만!

퍽!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응? 뭐라고?

휘이익!

짜악!

그리고 나는 그대로 큰 키의 여학생에게 놀부전의 흥부처럼 볼때기를 얻어맞고 말았다.

“아?”

오호! 여자에게 뺨을 맞으면 이런 느낌이구나……가 아니잖아!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휙!

“…….”

방금 내가 보았던 그 머리카락 괴물은 꼭 어제의 누구 같은데 말입니다?!

“너, 넌 뭐야?”

“아, 아하하!”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난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해하는 큰 키의 여학생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아니요, 제가 일부로 나서서 괜히 맞은 건 아닌데요. 갑자기 처녀귀신같은 어떤 나쁜 사람이 저를 밀쳐서 이렇게 됐습니다!

“일단 폭력보단 말로……”

“이게!”

“으익!”

탓!

절대 여성에게 겁을 먹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장 비켜 이것들아!

난 작은 키 여학생의 손목을 잽싸게 잡은 후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내달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겁을 먹은 것이 아니다. 그래도 남자인데 설마 여자 하나 못 이길까!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평화주의자. 되도록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이렇게 도망, 아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냥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와줄 생각으로 같이 이끈 것이고. 혼자 놔두기엔 조금 불쌍하잖아?

그 후 고등학교 교문 안까지 들어온 나는 한적한 급식소 뒤쪽까지 달렸다. 원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 자체를 싫어해 일단은 생각 없이 조용한 곳으로 온 것이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잡고 있던 여학생의 팔목을 놔주었다. 그러자 그 여학생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는지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고 빠르게 공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앙.”

“…….”

저기요? 숨을 쉬는 거 치고는 묘하게 소리가 뇌쇄적인데요?

마른 입술을 새빨간 혀로 침을 발라가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여학생을 보고 있자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아까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데 말이지.

“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 아니! 나에게 도움을 주다니, 영광으로 알아라!”

그때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벌게진 얼굴로 손가락 끝에 나를 거는 여학생.

“아, 예에.”

대충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해 슬쩍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그런 나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손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역시 당신은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침부터 나를 전속력으로 뜀박질 하게 만든 원흉이 나타난 것은.

“너 뭐야!”

여전히 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처녀 귀신은 입술을 물결모양으로 만들더니 흐뭇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삿대질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다. 아니, 지금 누구 때문에 내가 아침부터 이렇게 됐는데! 분명 아까 날 밀었던 사람은 당신이잖아!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역시 운이 좋지 않아 분출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군요. 절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갑자기 뭔 소리야?”

“쉽게 말하자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몇몇의 학생들을 선정하여 그것을 향해 일방적인 폭력을 가함으로서 조화로운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 그것이 잘못됐다고 보고, 왕따인 우리들도 보통의 학생들과 다르지 않으며 언제든지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제 말했잖아요?”

갑자기 나타난 처녀 귀신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머리에 의해 가려진 얼굴만 아니라면 단정한 옷차림에 요즘 애들답지 않게 비교적 긴 치마가 상당히 모범적으로 보였지만……역시 그냥 약간 정신이 나간 여자일 뿐이겠지. 그렇잖아? 사람을 밀어서 뺨을 맞게 한 것도 모자라 괴상한 궤변을 늘어놓는 저 모습 좀 보라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나에게 딱히 피해가 온 것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아.”

그게 내 원래 성격이니까. 받은 만큼만 돌려준달까? 딱히 시선을 모으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했듯이 난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다.

“아까 뺨을 맞지 않았습니까?”

“그건 네가 밀어서 그렇게 된 거고! 그러고 보니까, 너! 왜 그것에 대해선 사과 안하는 거야?”

“지, 지금 선행을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시는 겁니까?”

흠칫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다음 말하는 처녀 귀신이다.

“마음 같아선 제가 나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그만해요!”

뭔가 중요한 말이 나올 것 같은 그 순간에 이때까지 조용히 구석에서 우리의 대화를 구경하던 키 작은 여학생이 나섰다. 아아, 도대체 이게 뭐냐고.

“언니, 일단 우리 자기소개부터해요. 대, 대화를 하려면 이름은 알아야 하잖아요.”

“응. 그러자.”

제 의사는 무시하고 강제 대화입니까!

하지만 내가 따지기도 전에 곧바로 그녀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어버렸다.

“아, 안녕하세요. 1학년 김단비에요. 당신은 언니가 인정한 좋은 분이신 거 같으니까 제 원래 성격으로 대할게요.”

“원래 성격?”

“아! 제가 어제 말했던 동료라는 사람이 단비입니다. 붙임성이 없고 소심한 성격 탓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고치기 위해 일부로 독설을 하고 다니는 중입니다.”

“독설이란 게 혹시?”

“예! 아까 왕미치년이라는 매우 심한 욕설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죠!”

아니요. 언제부터 왕미친년이 매우 심한 욕설이 된 건지요? 그리고 그렇게 벌벌 떨어가며 말하는 독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왜 당신이 그렇게 뿌듯하다는 듯 말하는 건데!

“그리고 저는 2학년으로 단아린입니다.”

“언니, 얼굴을 보여주셔야죠.”

“그, 그건!”

단비라는 여학생은 처녀귀신……아니, 단아린에게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단아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두발자국 정도 물러서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 보니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는 거지? 그런 음산한 모습을 하고 다니니까 왕따를 당하는 거지! 물론 그냥 평범하게 다녀도 혼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 어쨌든 당신도 이름을 알려주셔야죠!”

“뭐 2학년 심노을. 이정도면 되지?”

상대의 이름을 듣고 무시하고 가기는 조금 그래서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단아린은 나의 말에 놀랐다는 듯 손바닥을 짝 맞대더니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이 1학년 때 그 여자화장실을 침입해서 변태가 되어버린 그분이셨군요! 그러면 그것 때문에 왕따를 당했고, 왕따를 당함으로서 어제 차여버린 건가요?”

“쿨럭!”

저 여자, 아무렇지 않게 나를 두 번씩이나 죽였어. 무엇보다 침입이 아닌 실수였단 말이다!

“그, 그런! 벼, 변태셨나요?”

김단비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뒤로 물러난다. 어이, 왜 그렇게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건데!

“됐다, 됐어. 어쨌든 난 이만 가볼 테니 다신 나한테 접근하지 마.”

홱!

그냥 몸을 돌려버렸다. 단아린의 말은 한마디로 왕따끼리 힘을 합쳐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주자는 거 같은데, 솔직히 관심 없다. 딱히 학교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왕따가 된 그 사건은 순전히 우연과 불운이 겹치는 바람에 발생한 것이다. 뭐 언젠가는 자연스레 오해가 풀리겠지. 누군가가 내가 왕따라는 사실 때문에 대놓고 피해를 주며 나 몰래 뒤에서 욕을 하고 다니거나 그런다면 나서보겠지만, 지금도 그렇게 딱히 힘들고 나쁜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다. 조금 외로운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것마저 익숙해져버렸다.

“저기요!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 고백을 했던 겁니까?”

움찔.

“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도 어제 고백을 받은 입장에서 당신 같은 남자는 최악이군요!”

“아, 진짜!”

재차 몸을 돌려 단아린을 노려봤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참으려 했는데, 어제부터 자신이 고백을 받았다는 황당한 말을 나불거리며 계속해서 내 신경을 긁고 있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니,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내가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데!

“누군가를 설득할 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자가 그러한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건!”

“너나 나나 서로의 다른 입장이 있는 건 마찬가지야. 네가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하듯, 난 내가 딱히 왕따라서 피해를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나서기 싫다는 거야.”

나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조금 불쌍해보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앞머리와 옆머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일부로 꾸미지 않는 티가 나는 거 같았다. 아마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사연을 굳이 억지로 알아내가며 오지랖을 발휘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가 얼굴을 보여주면 저희와 힘을 합치시겠습니까?”

“뭐?”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휘익.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어디선가 순풍이 불어와 우리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귀 뒤쪽으로 넘어가는 머리칼에 따라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난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순간적으로 호흡이 멎는 줄 알았다.

“너?”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때까지 왜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지 이유를 모를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밤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을 가져다 박아놓은 거 같은 눈동자에 기다란 속눈썹, 갸름한 턱 선에 새하얀 피부는 가히 경국지색의 미모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다 가늘지만 새빨간 빛을 띠고 있는 입술은 본격적으로 제 매력을 발휘하는 거 같았다.

“이제는 됐습니까?”

양 볼에 선홍빛의 홍조가 생겨났지만 눈썹이 찡그려져 있었다. 얼굴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창피한 모양이다. 하지만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런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거지? 그리고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예, 예쁘구나.”

앗! 나도 모르게 마음 속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단아린은 곧바로 얼굴을 포함한 목 전체까지 붉히는 묘기를 보여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칭찬을 해줬음에도 왜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인 거야?

“솔직히 네가 고백을 받았다고 했을 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인가 보네. 확실히 예쁜 얼굴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아뇨. 단비 외의 학생에게 얼굴을 보인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엥?”

그렇다면 그 처녀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너에게 반해서 고백한 남학생이 있다는 거냐?!

“사, 사실이에요. 언니는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녀요.”

“아하, 그렇구……나?”

그보다 당신은 언제부터 나와의 거리를 그렇게나 벌려놓은 겁니까?

“어쨌든 이젠 저희의 동료가 되는 겁니까?”

그때 단아린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그게 말이지. 난 네 얼굴 보면 힘을 합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네가 뭣대로 얼굴을 보인 것이지.”

“뭐, 뭐라고요?”

그렇게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사실이잖아요?

“같은 말 자꾸 하게 할래? 내가 딱히 피해 받은 것도 아닌데 뭣 하러 사서 고생해?”

“다, 당신은 최악의 남자입니다!”

그렇다고 치지 뭐. 난 간단히 그녀의 말을 무시해버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로 급식소를 돌아 교실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얼마의 시간을 소모한 건지!

뭐 내가 자신들의 동료가 되어줄 거라고 믿고 있던 단아린에겐 미안하지만 정말로 내 원래 성격이 이러한 걸 어쩌랴. 그저 난 조용히 지내다 졸업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졸업 후에는 생판 남이 되는 녀석들인걸.

타다닥.

“응?”

그때였다. 무언가가 뛰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제 보았던 처녀 귀신이 또 다시 팔을 휘적거리며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미, 미친!”

“거기 서십시오!”

서라면 서겠냐아! 일단 넌 너무 무섭다고오!

“으아아앗!”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가 재빨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잡혔다간 또 어떤 설교를 들을지 모른다. 저 여자는 어쩐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타다닷.

이제는 완전히 급식소를 벗어나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급식소는 학교의 오른쪽에 있었고, 이곳에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있는 곳에서 반대로 한 번 더 돌아 건물 반대쪽으로 가야했다. 결국 입술을 깨물고 급격히 몸을 꺾은 나는 곧바로 문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발에 힘을 줬다.

“……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막 학교 안으로 들어서려는 여학생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불룩한 블라우스에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여학생, 서우였다. 왠지 지금 그녀와 마주친다면 또 다시 우울해질 거 같아 나도 모르게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던 것이다.

“당신은 너무하십니다!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것입니……”

퍽!

“꺄악!”

“윽!”

그때 나를 쫓아 건물을 돌며 몸을 꺾었던 단아린이 내 등에 크게 부딪혀 넘어졌다. 나 역시 갑작스런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우우, 너무 하십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앙 다문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그러니까 왜 쫓아온 건지. 난 분명히 그런 놀이에 안 끼겠다고 말 했는데 말이지.

“앗! 당신을 찬 서우학생이군요!”

역시 이 여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사람을 쉽게 죽일 타입이야. 일단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창과 같다고!

“그래. 그러니까 잘 봐. 저 서우가 나한테 딱히 피해준 거 있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승연이에게 고백했고, 승연이에게 차였다. 하지만 단아린과 인연을 끊어버리기 위해선 일단 서우에게 고백한 걸로 하자.

“심한 말을 하긴 했지만 딱히 없습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거야.”

“너, 너무 하십니다!”

양 손을 말고 가슴까지 올린 후 몸을 들썩거리면서 말하는 그녀에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거냐.

“그보다 너 저거 떨어졌다.”

말을 돌릴 겸 아까 나와 부딪혔을 때 떨어뜨린 거 같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단아린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더니 곧바로 그것을 주워들어 품으로 가져갔다. 의외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은근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게 뭐야?”

“알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알려줘라. 편지 같아 보였는데.”

“그, 그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또 다시 살포시 홍조를 만드는 단아린이다. 평소에는 상당히 또박또박 말도 잘하면서 꼭 어떤 부분만 나오면 완전히 애가 되어버리는 거 같아 순간적으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레터입니다.”

“엥?”

러브레터? 전혀 의외의 말이잖아?

“아직 안까진 보진 못했지만 러브레터입니다.”

눈이 아예 안보일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러브레터면 러브레터지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건데? 그리고 어제부터 고백 받았다고 했으면서 아직까지 내용을 안 본거냐!

“내용을 안 봤으면서 어떻게 러브레터라는 것을 아냐?”

“펴, 펴, 편지지 위에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적혀 있으니까요.”

“흐음, 그러면 확실히 러브레터가 맞긴 맞군. 근데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러브레터……뭐!”

자, 잠깐! 방금 뭐, 뭐, 뭐라고오?!

“이리 내놔!”

“왜, 왜이러십니까?”

난 자꾸만 소중한 것을 감추려는 듯 품속으로 편지를 숨기는 단아린에게서 강제로 그것을 빼앗기 위해 손을 놀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아, 진짜! 빨리 내놔!”

홱!

“다, 당신은 정말 너무하는 인간입니다!”

내가 편지를 빼앗아 높게 쳐들자 단아린은 원망스럽다는 듯 날 쳐다보며 눈에 눈물을 맺혔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요즘 시대에 러브레터로 고백하며, 편지지 위해 ‘좋아합니다.’라고 적어놓은 놈이 있다니!

“처음 받아 본 것인데……정말 너무 하신다구요.”

결국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였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기도 전에 난 충격을 받아 영혼이 유체이탈 하는 경험을 맛봐야했다.

“역시 요즘 시대에 러브레터로 고백하며 편지지 위해 좋아한다고 적어 놓은 놈이 있을 리가 없지.”

당연히 없을 거다. 아마도.

“나만 뺀다면.”

“네?”

깜짝 놀랐다는 듯 고개를 치켜뜨는 단아린에 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너 이거 어디서 받았어!”

“하교를 하던 중 어떤 여학생이 제 사물함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뒷모습 밖에 보지 못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전해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빌어먹을.”

이건 뭔가 있었다. 승연의 사물함에 집어넣어놨던 내 러브레터가 이유 없이 이 녀석에게 와있을 리가 없었다. 짐작컨대 누군가가 어떠한 조작을 해놓은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제 서우에게 차인 이유를 전해 들으며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 것이지.

“피해……를 받아버렸네.”

허무한 표정으로 내가 쓴 러브레터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단아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리고 그때, 이 순진한 아가씨가 한 마디 던졌다.

“다, 당신 설마 저와 서우 학생 둘에게 양다리를 걸치려 한 것입니까? 그건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아,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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