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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티탄's
글쓴이: Hann
작성일: 12-07-11 01:23 조회: 2,161 추천: 0 비추천: 0

블랙티탄's


프롤로그


곤란하게 되었다.

산호는 골몰히 생각했다.

“저기 말이야. 디디, 어떻게 생각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수 각하.”

“내 친구가 히어로가 되었어.”

“그렇군요. 제가 죽여 버립니까?”

“안 돼.”

데몰리션 디스트로이어 Demolition Destroyer.

줄여서 디디D.D. 그녀는 대형 스크린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격투게임을 했다.

지휘통제실 가운데에 앉아있는 어린 소년, 아이기스 고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몇 급 히어로입니까?”

“2급.”

“장래가 유망하군요. 스카웃해버리죠.”

“심지가 곧은 녀석이야. 기각.”

아이기스 고트는 물빛 머리카락의 소년이다. 그는 손까지 잠기는 하얀 가운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 졌다!”

디디가 패드를 내려놓으며 팔다리를 쭉 폈다. 그녀는 이글거리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빌빌 꼬았다.

“고민이야.”

산호가 말했다. 그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17세에 불과한 소년이다. 그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총수의 걱정은 우리 모두의 걱정이지.”

디디가 뒤에서 산호를 껴안았다. 물컹한 가슴이 등에 닿았다. 산호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내가 총수가 된 지 어연 1년이 지났어.”

산호가 말했다.

“벌써 1년이군요. 아, 잠시만요. 안구가 촉촉해져서….”

아이기스는 가운 소매를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산호는 물빛 머리의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처음에는 정말 총수가 귀여웠었는데 말입니다.”

디디가 말했다. 그녀는 늘씬한 손가락을 뻗어서 산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이기스는 의자에서 내려와 산호에게 걸어왔다.

“저기 총수. 그렇다면 라이벌 구도가 어떨까요?”

“라이벌?”

“서로 간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사이라는 뜻이죠. 그 친구 분도 반복되는 악의 조직과 싸움에서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며, 우리 역시 이름을 떨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산호는 눈을 감았다.

디디와 아이기스가 산호의 말을 기다렸다.

“총수?”

산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키테schythe를 준비해라.”


7일 전.

점심시간 학교 옥상.

산호는 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옆에는 잔뜩 들뜬 가람이 있었다.

“나! 히어로 시험에 합격했어!”

산호는 먹던 빵을 떨어뜨렸다. 이 근육바보가 합격했다고?

“그거 국가기밀이잖아.”

“그딴 게 알게 뭐야 .넌 내 소울 메이트니까 가르쳐주는 거야.”

산호의 동공이 커지면서 흔들렸다. 그는 콧잔등을 쓱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 갑자기 사람 짠하게 만드네.”

“내가 정의의 사도가 되어 주겠어. 죄 없이 핍박 받는 사람들을 구할 거야.”

가람이 벌떡 자리에 일어섰다. 발부터 머리까지 호쾌하게 뻗은 키, 표범처럼 늘씬한 근육질 몸매.

“뜻은 좋으나, 햇빛은 가리지마.”

산호가 내려온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아, 미안.”

“고등학생 히어로면 우리나라 최연소 아닌가?”

산호는 떨어뜨린 빵을 주워들었다.

“아냐. 중학생도 있어. 더럽게 떨어뜨린 거 먹지 마. 내가 새로 사줄 게. 이제 나도 정부지원금을 받거든.”

산호는 먼지를 털어낸 빵을 우물우물 먹었다.

“됐어. 아깝잖아. 지금도 아프리카 난민소녀 에이카는 굶고 있다고.”

“너 마음씨 착하구나. 감동 먹었어.”

“…멍청이.”

산호가 나직이 말했다.

“응?”

“아니. 아무 것도. 자격증은 몇 급인데?”

“2급.”

“엄청나네. 2급이라니.”

가람은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날개 모양의 배지를 꺼냈다. 파란색이었다.

“이게 바로 윙이지! 부럽지?”

“대단한데 부럽진 않다. 야, 근데 그거 함부로 보여줘도 되냐?”

“워낙 모조품이 많아서 진짜 보여줘도 안 믿을 거래서 상관없다는데?”

“보안개념이 희박하군.”

“내일이면 히어로 슈트를 받을 거야. 정식으로 활동하는 거지.”

“벌써?”

“응. 그리고 바로 실전에 투입될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 별 볼일 없는 놈들을 상대할 거니까.”

“그게 누군데?”

산호가 물었다.

가람은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후훗, 그 별 볼일 없는 놈들의 이름은 바로 블랙 티탄즈! 어, 어? 왜 그래?”

순간, 산호는 가람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가람이 당황한 표정으로 산호를 바라봤다. 산호는 방긋 웃었다.

“아, 실수. 손이 미끄러졌네.”

다시 현재.

스키테는 새카만 까마귀 같은 전투복이다. 산호는 단단히 헬멧을 눌러썼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곧 청정장치가 작동해서 쾌적해졌다.

망막을 통해 사용자를 인식한 스키테가 작동되었다. 스키테의 헬멧에서 붉은 인공안구가 빛났다.

촤악!

어깨에서 까만 망토가 뻗어 나왔다. 산호는 팔을 뻗었다. 기이잉- 전투복이 위화감 없이 움직였다.

“디디.”

산호가 말했다. 헬멧을 통해 변조된 음성은 굵고 깊어서 카리스마가 있었다.

“왜 그럽니까? 또 전투복 입기 전에 화장실 안 갔다 온 겁니까? 그냥 싸버….”

“닥쳐. 디디.”

“그게 아닙니까?”

디디는 새카만 해골가면을 썼다. 그녀에겐 별도의 전투장비가 필요 없다.

“우리가 별 볼일 없는 조직이냐?”

디디가 턱을 긁적였다.

“총수가 취임한 이래로 제대로 된 성과가 없었지 말입니다.”

“내가 무능력한가?”

“그것보단 전대 총수님이 진짜 리얼 악당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하신 분이었지 않습니다. 악명을 위해선 우는 아이 사탕도 뺏을 분이었죠.”

디디는 산호와 마주섰다. 산호가 전투복을 입었는데도 디디가 약간 더 컸다. 그녀의 키는 185센티미터. 남자 못지않은 근육이 팔다리에 붙어있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에겐 고결한 야성미가 있었다.

“아이기스.”

산호가 무선통신을 켰다. 아이기스가 윙크를 하며 등장했다.

-준비 끝났어요. 총수.

“흑색두건단은?”

-2호부터 14호까지 대기 중입니다.

“1호는?”

-어디 짱 박혔는지 보이지 않네요.

통신을 엿들은 디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새끼, 빠져 가지고….”

산호는 디디의 어깨를 툭 쳤다.

“됐어. 가자. 블랙 티탄즈. 출격이다.”


라그나프 저스티스 한국지부.

히어로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오버테크놀로지의 결정체, 히어로 슈트를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 힘을 정의에 행사하는 자. 초국가적 조직, 라그나프 저스티스는 파견 형식으로 각 국가에서 지부를 설립하고 히어로 양성을 지원했다.

“슈트 테스트에서 괴물 소리를 들었다며? 그렇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이 바닥도 여긴 다 너보다 몇 년은 선배니까. 확, 재수 없게 굴면 그날로 끝이야.”

“아, 예.”

가람은 선배 히어로 스톤해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멀찍이서 음료를 마시고 걸어오던 블랙아웃 도한은 가람의 등짝을 쳤다.

“아이고, 돌망치 형님. 또 애 데리고 괴롭히는 겁니까.”

도한이 말했다.

“뭐?”

“됐고요. 조금 있다 경보 울린대요. 선배랑 저랑 갈 것 같아요. 출동 준비나 하세요. 얘는 그리고 지금은 제 조수에요.”

신입 히어로는 베테랑 히어로의 조수가 되어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보낸다. 가람은 도한의 조수다.

“너,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스톤해머 박장식이 외쳤다.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도한과 가람의 손목을 잡고 뛰어 도망갔다. 가람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

“천만에, 돌망치 선배는 10년 동안 3급에서 2급으로 올라가지 못했거든. 그래서 너한테 심술 나서 그런 거야. 넌 처음부터 2급이잖아. 그리고 내 조수가 남에게 무시당하는 거 기분 나쁘거든. 하여간 나이 먹고 꼬장만 늘었다니까.”

블랙아웃 도한은 4년차로 2급 히어로다.

“선배님은 2급이시죠?”

“어, 응. 나야 2급에서 끝이지만 넌 재능이 있어. 슈트 테스트에서 반응속도가 장난 아니던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겸손 떨지 마. 근데 넌 왜 히어로가 됐냐?”

“저는….”

위이이잉! 위이이잉!

“미안하군. 나중에 듣겠어. 일단은 출동이다.”

천장에서 붉은 사이렌이 번쩍였다. 도한은 먹던 음료를 던져버리고 격납고로 뛰어갔다. 가람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블랙 티탄즈네요.”

파랑과 하얀색이 섞인 슈트를 입은 가람이 말했다. 가람의 히어로 네임은 화이트팽. 이름답게 그의 헬멧은 송곳니가 장식으로 튀어나와있었다.

“저기 크로노스가 보인다.”

어두운 적갈색 슈트, 블랙아웃 도한이 말했다.

“1년 전에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오합지졸들이지. 연습상대로 딱이다.”

“앗, 비겁하게 인질을 잡았어요.”

가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한이 전황을 살피다가 말했다.

“나와 돌망치 선배가 앞에서 시선을 끌 테니. 가람, 네가 인질들을 구해라.”

“신참에게 맡긴다고?”

회색 슈트를 입은 스톤해머 장식이 짜증스레 말했다. 도한은 장식을 째려보다가 웃었다.

“우리 중에서는 가람이 가장 빨라요. 아마 우리 지부에서도 탑일 걸요.”

“끄응.”

도한이 가람의 등을 쳤다.

“가라, 화이트팽. 데뷔전이다.”

3명의 히어로는 블랙 티탄즈를 향해 뛰쳐나갔다.

블랙티탄즈는 지역은행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도한과 장식은 강행돌파로 입구를 막는 전투원들을 때려 눕혔다.

“질긴 놈들.”

흑색두건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은 좀비처럼 아무리 맞아도 다시 일어선다. 그들의 후드 안쪽에는 얼굴이 없었다. 그림자 아래에는 흉흉한 안광만이 번뜩였다.

“무리마세요. 돌망치 선배. 우리는 시간만 끌면 돼요. 읏차!”

도한이 근처의 전신주를 깨부쉈다. 그는 배전선을 팔에 휘어 감았다. 그의 몸에서 스파크이 일어났다. 도한은 흐르는 전류를 통제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뻗어나간 전류가 그물망처럼 흑색두건들을 휘어 감았다.

피시시이이-

흑색두건들은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후우우-.”

도한은 숨을 내쉬며 전류를 거뒀다.

“과연 블랙아웃이로군.”

쓰러진 흑색두건 사이에서 해골가면을 쓴 여자가 나타났다. 타오르는 적발의 그녀는 티타늄 블레이드를 곧추세웠다.

“레드스컬….”

도한은 그녀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블랙티탄즈 간부로 추정되는 검사다.

“도한, 넌 빠져. 육탄전에 약한 너는 무리다.”

장식은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땅에서 손을 떼자, 땅바닥에서 거대한 망치가 솟아올랐다. 그는 자기보다 더 큰 망치를 한 손으로 휘둘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도한은 은행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물 꼭대기에서 침투하는 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궤적이 빠르게 움직였다.

“후우, 후우.”

가람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그는 심호흡하며 옥상에서 아래로 침투했다. 중간에 흑색두건들을 만났지만, 빠르게 제압했다. 그는 마침내 배기관을 통해 인질들을 발견했다.

“나는 블랙티탄즈의 총수, 크로노스다! 후하하.”

인질들과 함께 있는 건 크로노스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주위에 다른 부하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람은 배기관을 발로 부수며 뛰쳐나갔다.

“멈춰라! 악당!”

가람이 삿대질했다.

“뭣! 넌 누구냐!”

놀라는 크로노스.

“나는 정의의 사도, 화이트팽! 널 응징하기 위해 여기 왔다.”

“네놈이 그 소문의 화이트팽이로구나!”

등에서 가스가 분사되면서 크로노스의 망토가 펄럭였다. 가람은 굉장히 멋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소문날 짓은 하지 않았지만, 내 두려움을 아나보군. 순순히 투항한다면 목숨을 살려주지.”

“해보시지!”

크로노스, 산호는 힘 조절을 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초보 영웅을 박살내버리면 의지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수준을 맞춰야겠지.

화이트팽은 고개를 숙여 산호의 주먹을 피했다. 그는 거침없이 크로노스의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눈으로 쫓기 힘든 스피드였다.

“컥!”

크로노스의 등이 꺾였다. 숨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총수, 봐주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죠?

아이기스가 통신망을 열고 말했다. 크로노스는 아이기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화이트팽이 어퍼컷을 날렸다. 정통으로 맞았다. 크로노스의 의식이 흐려졌다.

“악을 물리쳤다!”

화이트팽이 주먹을 높이 들며 외쳤다.


블랙티탄즈 지휘통제실, 반성회.

“간신히 살았죠. 아이, 맛있어라. 냠냠.”

아이기스가 말했다. 그는 패배기념 케이크를 혼자서 절반 쯤 먹었다.

“생각 외로 강했어.”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산호가 말했다.

“총수 각하가 너무 약한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패배의 맛이 달콤하군요.”

디디는 케이크를 한 입 떠먹으며 말했다.

“난 지략가라고! 아이구, 아파라.”

산호는 부러진 3번 갈비뼈를 매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디디는 갈색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잘도 그러시겠습니다.”

아이기스가 숟가락으로 디디의 접시를 두드렸다.

“디디, 총수께 말버릇이 고약하네. 총수 각하가 비록 체력도 비실비실하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어, 음. 아, 잠깐만요. 총수의 장점을 생각하려고 했는데 안 떠오르네요. 헤헷.”

아이기스가 혀를 빼꼼 내밀며 웃었다.

“그 화이트팽이 친구 분입니까?”

디디가 말했다.

“응.”

“굉장히 몸놀림 좋았습니다. 총수라는 짐이 핸디캡으로 있어서 한 손 밖에 쓰지 못했지만, 제 공격을 피했습니다.”

“미안해.”

“이제 반성회를 끝내고 케이크나 드시지 말입니다.”

디디는 케이크를 한 숟가락을 떠서 산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달달하네.”

디디가 엄지로 산호의 입가를 쓸었다. 산호가 멀뚱히 디디를 쳐다봤다.

“입에 생크림 묻었었습니다.”

디디가 웃었다.


#1 몬스터 카르텔


산호는 등교를 했다. 복도에서 가람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산호는 손바닥을 들어서 등짝을 후려쳤다.

짝!

“아야, 왜 때려?”

“아, 미안하다. 넘어졌다.”

“그런 것치고 너무 쓰린데. 혹시 내가 맞을 짓이라도 했냐?”

“아니.”

가람이 툴툴거리며 등을 매만졌다.

“그런데 너 얼굴 엉망이다? 어디 아파?”

가람과 산호는 자리에 앉았다. 산호는 기지개를 펴다가 고통을 호소했다.

“…계단에서 굴러서 갈비뼈가 부러졌어.”

“저런. 조심해야지.”

산호는 잠시 눈을 감고 화를 삭혔다.

“후…. 너 한 대만 더 때려도 되냐?”

가람이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나에게 원한 있냐?”

산호가 싱긋 웃었다.

“그런 거 없다니까.”


학교가 끝났다. 교문 앞에선 까만 머리로 염색한 디디가 서있었다. 학생들이 디디를 보며 속삭였다.

“되게 키 크다.”

“여자 맞지?”

“모델 아닐까?”

“운동선수 같은데?”

산호는 디디와 눈이 마주쳤다. 디디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총, 아니 산호 님.”

“것도 어색해.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디디는 산호와 나란히 걸었다. 디디가 산호의 볼을 꼬집었다.

“총수의 볼을 꼬집으려고 왔습니다.”

“한심스러운 이유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디디가 고개를 들이밀며 표정을 굳혔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디디가 검지를 들어올렸다.

“아이기스가 복통으로 실려 갔습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단걸 너무 많이 먹어서 위장이 설탕코팅 되었답니다.”

“내 고견으로 생각했을 때… 그럴 리가 없잖아.”

산호는 디디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발가락만 저렸다.

“지금까지는 총수가 받을 충격에 대비한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어제 몬스터 카르텔이 입국했습니다.”

산호는 표정을 굳혔다.

“총수?”

“…디디, 그런데 몬스터 카르텔이 뭐지?”

“그 사람이랑 동물이랑 푹찍해서 쓱쓱 잘라서 모자이크 합체 시키는 놈들 있잖습니까.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놈들이 입국했다는 건 명백한 도전입니다.”

“왜?”

“이 나라는 우리 나와바… 아니, 우리 영역입니다. 자기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여길 먹겠다 이거겠지 않습니까.”

“그럼 같이 먹지. 원래 밥도 같이 먹으면 더 맛있잖아.”

“….”

디디는 주먹을 불끈 쥐고 산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산호는 무릎까지 꿇으며 머리를 감쌌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파….”

“어쨌든 몬스터 카르텔 측과 협상이 있을 겁니다.”

“언제?”

“지금 당장입니다.”


스키테의 가죽감촉이 뽀득뽀득했다. 어제 세탁했는지 약품냄새가 났다. 산호는 헬멧을 썼다. 스키테가 가동했다. 붉은 안광이 점멸했다.

“아, 아.”

산호는 음성변조를 체크했다. 이상 없었다.

해골가면을 쓴 디디는 티타늄 블레이드를 헝겊으로 닦고 있었다.

“총수, 준비 됐습니까?”

“아이기스는?”

“만약을 대비해 흑색두건단과 후방에서 대기 중입니다.”

촤륵.

디디는 티타늄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녀는 보지도 않고 칼날을 칼집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머리색은?”

산호가 디디의 검은 머리카락을 지적했다.

“아, 깜빡했습니다. 그런데 저 까만 머리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디디는 붉은 머리가 더 멋져.”

디디는 딴청을 피우며 콧잔등을 긁었다.

“뭐, 그렇다면야.”

디디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이 닿은 부분부터 물감이 번져가듯이 머리색이 변했다. 작열하는 붉은색이었다.

산호와 디디는 폐허 건물에 들어갔다. 도시 변두리에는 폐가가 많다. 으슥한 곳은 악당들의 회합 장소가 된다.

끼이익.

산호는 낡은 문짝을 열었다. 구멍이 뚫린 나무 탁자가 보였다.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우울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새침한 노란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벽에 기대고 서있었다.

산호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디디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헬멧으로 가려진 산호의 얼굴은 알 수가 없다.

산호는 노란빛 소녀를 바라봤다. 발랄한 금발의 소녀였다. 노란색과 하얀색이 엇갈린 스트라이프 셔츠는 골반까지 내려왔다. 그 밑으로는 청바지가 미끄러지듯 다리에 붙어있다.

소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게슴츠레한 그녀의 눈동자는 녹빛으로 반짝였다. 눈동자가 에메랄드 같았다.

“총수.”

디디가 산호의 어깨를 살짝 쳤다.

“반갑습니다. 블랙티탄즈 총수, 크로노스. 저는 몬스터 카르텔 한국지부장 흑각입니다.”

산호는 무뚝뚝하게 걸어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펄럭이는 망토가 가라앉았다.

“한국지부?”

산호의 음성이 차갑게 퍼졌다. 흑각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기분 나쁘셨습니까?”

산호는 붉은 안광을 쏟아내며 말했다.

“같은 하늘 아래 2개의 태양을 필요가 없다.”

디디가 산호에게 속삭였다.

“총수, 방금 대사 조금 유치했어요.”

흑각은 양손을 깍지 껴서 턱을 괴었다.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그의 눈동자가 깊었다.

“그쪽에서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우린 악의 조직 따위가 아닙니다. 세상이 변했죠. 몬스터 카르텔은 기업입니다. 이윤을 추구하죠.”

“뭐, 그렇다면야….”

꾸욱.

디디가 산호의 등을 꼬집었다. 산호가 디디를 쳐다봤다. 해골가면 너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산호는 목을 다듬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쾅!

“건방진 소리하지 마!”

흑각은 미간을 꾹 누르며 안경을 벗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블랙티탄즈는 삼류조직. 우리가 여기 온 것도 예의에 불과합니다.”

“강조해서 말하면 누가 겁먹을 줄 알았나?”

흑각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봐, 좋게 말하면 들을 줄도 아셔야죠?”

“좋게 말하지 않으면?”

…정적.

디디가 조용히 칼을 뽑았다.

“세라비!”

흑각이 외쳤다. 뒤에서 방관하던 노란빛 소녀, 세라비가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소녀의 이름이 세라비였구나. 산호는 그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총수!”

디디가 칼을 휘둘렀다. 티타늄 블레이드가 허공을 갈랐다. 노란빛 소녀는 공중에 한 번 더 도약했다. 놀라운 동작이었다. 디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콰직!

디디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비틀었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가 소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후우-.”

디디는 숨을 내쉬며 뻗었던 다리를 당겼다. 벽에 부딪친 세라비는 몸을 툭툭 털어내며 일어섰다. 화사한 머리색과 다르게 소녀는 무표정했다.

디디가 오히려 당황하며 말했다.

“야, 야. 너 괜찮냐? 방금 느낌이 있었다구. 갈비뼈랑 내장이 얽혔을 텐데?”

무표정한 세라비의 입가에서 핏물이 새어나왔다.

“아, 아프…지 않다.”

세라비 다.

“거짓말 마. 되게 아파 보이는데?”

디디가 세라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소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녀는 디디의 손가락을 붙잡고 꺾었다.

뿌득.

디디의 검지가 관절 역방향으로 꺾였다. 디디는 뒤로 물러나서 꺾인 손가락을 다시 원래대로 꺾었다. 고요한 폐가에서 뼈 소리가 울렸다.

우득.

디디는 검지를 구부렸다 펴면서 이상유무를 확인했다.

흑각과 산호는 부서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괴물… 아니, 훌륭한 부하로군요. 세라비와 대등하게 겨루다니.”

“눈이 없나보군. 대등이 아니라 압도다.”

흑각은 땅에 떨어진 안경을 들어올렸다.

“블랙티탄즈의 입장에 대해서는 본사에 잘 말해놓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죠.”

흑각은 서류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노란빛 소녀, 세라비도 그의 뒤를 따랐다.

“굉장히 음침한 사내였습니다.”

디디가 말했다.

“저쪽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 없었어.”

“일방적인 통보였습니다. 여차하면 오늘 총수를 제거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산호는 디디의 어깨를 쳤다.

“디디, 잘했어.”

“천만에 말씀.”

디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산호는 사라지는 세라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붉은 안광이 짙어졌다. 노란빛 소녀의 잔상에 머리에 맴돌았다.


“총수는 바보에요? 아, 달다. 총수 때문에 자꾸 뭘 먹게 된다니까요.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이죠.”

아이기스 고트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그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산호에게 삿대질했다.

“그냥 거기서 죽여 버리지. 왜 살려서 화근을 만들어요? 아니면 거기서 총수도 콱 죽어버리던가. 아, 이건 농담.”

아이기스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

산호는 웃음에서 살기가 느꼈다.

“그만 좀 떠들어. 게임하는데 방해되잖아.”

디디가 말했다.

아이기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게임기를 발로 차버렸다. 디디가 꺼진 화면을 보며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아이기스의 멱살을 잡았다.

“너도 잘한 거 없어. 넌 또 세라비를 왜 안 죽였어?”

디디가 아이기스를 내려놓았다.

“어린 계집애 죽이면 꿈자리가 뒤숭숭하잖아.”

디디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이기스는 혼자 방방 뛰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빛 머리 소년은 붉어진 얼굴로 연구실로 들어 가버렸다.

“꼭 저럴 때보면 생리하는 계집애 같다니까.”

디디가 말했다.


체육시간에 가람은 영웅이다. 타고난 운동신경은 체육선생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어릴 적부터 주위에서 운동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가람은 목표가 뚜렷했기에 거절했다.

“몬스터 카르텔이라고 알아?”

산호가 물었다.

“알다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가람은 한 손으로 철봉에 매달려서 몸을 끌어올렸다. 멀찍이서 아이들의 탄성을 들렸다.

“아니, 누가 말하는 걸 들어서.”

“하여간 언론이란. 벌써 소문이 다 났나보네. 사실은 몬스터 카르텔이 불법입국했어.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지. 마약부터 시작해서 장기매매까지 불법이란 불법은 모두 손대는 녀석들이야.”

“그걸 그냥 놔둬?”

가람은 12개까지 채우고 철봉을 놓았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어제 소탕했는데?”

“응?”

“운이 좋았어. 간부로 추정되는 녀석은 놓쳤지만 괴인을 잡았지. 큰 소득이야.”

“괴인이라면?”

“겉은 인간인데 속은 괴물인 녀석들이지. 변신을 하게 되면 무지막지하게 강해져. 우린 변신 전에 빠르게 제압했지. 괴인치고는 많이 약하더라고. 갈비뼈에 주먹 한 방 꽂으니까. 푹 쓰러지던걸.”

가람은 자랑스럽게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 괴인은 어떻게 되는 거야?”

“라그나프 저스티스 본사 연구소로 보내. 희귀한 샘플이라고 하더라. 여자 괴인은 드문 케이스거든. 너 왜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아니.”

“그래? 아프면 양호실이라도 가봐. 읏차."

가람은 반대 손으로 철봉을 쥐었다. 가람의 등은 넓었다. 산호는 매달린 가람의 등짝을 발로 차고 도망갔다.


“같은 바닥에 몸담는 사람으로서 의리라는 거지.”

산호가 말했다.

“총수, 드디어 미쳤군요.”

아이기스는 먹던 아이스크림통을 산호의 얼굴로 내던졌다. 디디가 손을 뻗어 아이스크림통을 잡았다.

“고마워. 디디.”

“별 말씀을.”

산호는 세라비 구출작전을 건의했다. 아이기스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났다. 디디는 떨떠름할 표정으로 산호를 바라봤다.

“업계 사람끼리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알아? 이번 일로 몬스터 카르텔과 가깝게 지낼지.”

산호는 상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일개 괴인을 구하자고, 라그나프 저스티스 본부에 들어가요?”

“응. 그 말을 내가 하고 싶었어.”

“디디! 총수를 죽여 버려!”

아이기스가 외쳤다.

“거절한다.”

디디가 아이스크림통을 흔들며 말했다. 아이스크림이 단단하게 굳어서 나오지 않았다.

“내 적의 적은 친구다- 라는 말이 있잖아. 난 그 말을 이 때 써야할 것 같다. 몬스터 카르텔과 우린 악의 조직이고, 우리의 진짜 적은 라그나프 저스티스잖아.”

산호는 손짓하며 웃었다.

“차라리 라그나프 저스티스와 동맹을 맺겠어요! 안 그래? 디디.”

“잠깐, 그건 내가 싫은데. 걔들은 쪽팔리게 타이즈 입고 다니잖아.”

디디는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며 말했다.

“닥쳐! 디디.”

아이기스가 숟가락을 디디에게 던졌다. 디디는 숟가락을 집게손가락으로 받아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쌩큐. 아이기스.”

아이기스가 한참이나 산호를 노려봤다. 산호는 딴청을 피우다가 말했다.

“명령이야.”

“우, 우우….”

아이기스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디디가 아이기스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떠줬다.

“명령이래. 아이기스.”

세라바 구출작전은 간단했다. 세라비를 호송하는 차량을 습격한다. 호위 히어로는 화이트팽.

빠르게 습격하고 더 빠르게 퇴각한다.

“히트 앤 런이지.”

“그런데 어디서 얻은 정보입니까?”

“친구한테 물어봤어.”


라그나프 저스티스 한국지부.

가람과 도한은 휴게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선배, 우리가 잡은 괴인. 연구소에 갔다가 어디로 가는 거죠? 감옥?”

가람이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었다.

“거기가 끝이야. 해부할 거야.”

“네?”

“뭘 놀라고 그래?”

“해부라니요? 그래도 사람이잖아요.”

괴인은 고작해야 10대에 불과한 소녀였다.

“겉만 사람이야. 예쁘장한 소녀의 모습이지만. 속은 어떤 괴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아무리 그래도….”

“과학자들에게 실험체로 조각조각 난 뒤에 포르말린 용액에게 보관되겠지.”

가람이 탁자를 쳤다. 커피잔이 출렁였다.

“우린 정의의 편이잖아요!”

“그래서?”

도한이 물끄러미 가람을 바라봤다.

“그런 건….”

도한이 주먹으로 가람의 가슴을 툭툭 쳤다.

“정신 차려.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일하다간 금방 죽는다.”

도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갔다. 가람은 도한을 바라봤다.

커피가 식었다.


수갑과 족쇄가 세라비의 사지를 봉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세라비는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화이트팽 가람을 노려보았다.

“박사님. 꼭 저렇게 해야 되나요?”

가람이 말했다.

“어머, 안 그럼 큰일나요. 구속을 풀자마자 변신해버릴 걸요.”

한은오 박사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목덜미까지 자른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한국지부 과학부 주임이다. 그녀의 나이는 27세. 흔히 말하는 천재다.

“박사님?”

은오 박사는 가람의 뒤쪽에 서서 슈트 뒤판을 만졌다.

“잠시만요. 가람 씨. 어빌리티를 넣고 있어요. 다 만들었거든요. 엉덩이 탄탄하시네요. 허리라인이… 새끈하게 빠졌네요. 후훗, 멋져라.”

가람은 멋쩍게 섰다.

“…벌써 다 만들었어요?”

“가람 씨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거든요. 오해하지 마요. 대충 만들었다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가람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잘 생겼지, 몸 좋지. 나이도 어리지.”

가람은 은오 박사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사용법은요?”

“기어 온Gear on이라고 외치면 돼요. 간단하죠? 원래 보통은 슈트의 반응을 간신히 따라가요. 하지만 가람 씨는 달라요. 몸이 슈트의 반응속도를 오히려 능가하죠. 이런 경우는 좀처럼 드물어요. 그래서 기어 온을 달았죠.”

“기어 온?”

“슈트의 반응민감도와 출력을 끌어올리는 거죠. 기어 온 상태라면, 통상 2배, 3배까지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게 가능해요. 가람 씨의 3세대 슈트로는 이론상 8배까지 가능하죠.”

“엄청나네요. 8배라니….”

“하지만 3배까지예요. 그 위로 올라가면 가람 씨의 근육과 뼈가 버티지 못해요. 명심해요.”

가람이 얼굴을 굳혔다.

“알았어요.”

“헤에, 귀여워라. 너무 겁먹지 말아요. 끽해야 평생 휠체어 신세니까요.”

은오 박사가 가람의 볼을 꼬집었다. 탄력 있는 타이즈 가면은 살점까지 잡혔다.

“아파요. 박사님.”

“미안해요. 너무 탱탱해서 놓질 못하겠네.”

은오 박사는 가람의 엉덩이를 툭 치고 사라졌다. 가람은 꼬집힌 뺨을 매만졌다. 그는 시계를 바라봤다.

곧 호송차량이 도착한다. 군경찰이 동원되는 합동작전이다. 라그나프 저스티스는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다.

가람은 의자에 앉아서 세라비를 바라봤다.

“직접 널 체포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세라비는 아무 말 없이 가람을 노려봤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태어날 때부터 넌 불행하다- 라고 낙인찍힌 사람들도 있다. 세라비의 인생에서 선택은 없었다. 한적한 시골 고아로 태어나 조직에게 팔려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 아이들을 굶겼다. 빵 한 줌을 두고 또래 아이들과 싸웠다.

인륜은 배우지 못했고, 인성은 소멸했고, 감성은 정지했다.

사랑을 갈구했던 소녀는 어느덧 살인병기로 성장했다.

이제 죽음이 멀지 않았다- 세라비는 생각했다.

쿵.

호송차량은 튼튼하지만 안락하진 않았다. 덜컹일 때마다 몸이 들썩여서 여기저기 멍들었다. 부러진 갈비뼈는 내장 사이로 더욱 파고들었다. 괴인의 재생력을 갖춘 그녀도 안정을 취해야할 상처다.

피가 울컥 나왔다. 재갈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흑각이 생각났다. 직속상사다. 기분 나쁘고, 비열-비겁에다가 똑똑한 전략가다. 그에겐 세라비를 구해줄 정의도 의리도 없을 터다.

알싸한 죽음이 코끝에 머문다.

쿵!

차량이 흔들렸다. 아까보다 충격이 크다. 세라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스팔트가 폭발했다. 갈라진 아스팔트 틈 사이로 인공적인 연기가 뿌옇게 솟아났다. 군인들이 엄폐물을 찾아 산개했다. 그들은 연기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연기가 가라앉았다. 해골 가면을 쓴 디디가 서있었다.

“안녕. 아저씨들. 위문공연 왔어요.”

디디가 손을 흔들었다. 군인들이 총을 쐈다. 디디는 아스팔트 잔해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휘파람을 불며 칼날을 위로 뻗어 빙글 돌렸다.

“조롱하는 거냐!”

지휘관이 수류탄을 내던졌다. 디디는 보지도 않고 칼날로 수류탄을 쳐냈다.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래봐야 안 맞아요. 제가 나갈게요.”

가람이 지휘관에게 말했다. 군인들이 사격이 멈췄다.

“헤에, 벌써 나오는 거냐? 애송이.”

디디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목을 좌우로 번갈아 젖히며 웃었다. 우득, 우득 소리가 났다.

“저번에 놓쳤지만- 이번에는 내게 실수는 없다.”

가람의 말에 디디가 코웃음 쳤다.

“웃기시네!”

디디가 티타늄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가람을 상체를 젖혀 피했다.

디디는 상체를 젖힌 가람을 비웃었다. 그녀는 체조선수처럼 몸을 비틀어 가람의 머리를 다리로 후려쳤다. 가람은 땅바닥에 늘어졌다.

디디가 검지를 흔들었다.

“너 같은 초짜들은 그게 문제야. 상대가 칼을 들면 칼만 보게 되거든. 시야가 너무 좁아.”

군인들이 재차 사격을 준비했다. 디디는 가람을 방패로 삼았다.

군인들이 주춤했다.

“멍청하긴! 어서 쏴라.”

지휘관이 말했다. 군인들이 사격을 했지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일부는 쏘는 시늉만 했다.

군인들이 디디를 쫓는 동안, 흑색두건들은 조용히 후위에서 접근했다. 뒤늦게 알아챈 병사들이 총을 겨누었지만, 제압당했다. 흑색두건들은 총을 맞아도 움찔하며 다시 움직였다. 그들의 두건 아래는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왔다.

흑색두건 틈에서 크로노스가 나타났다. 붉은 안광이 군인들을 흘겨봤다. 그들은 명백한 악의 조직-. 군인들은 두려움에 총을 놓아버렸다.

크로노스는 호송차량을 열어젖혔다. 그는 어두운 차량 안으로 들어가 손을 뻗었다.

세라비는 크로노스를 올려다봤다.

“데리러 왔다.”

그는 세라비를 안아들었다.


블랙 티탄즈는 빠르게 철수했다. 지원부대가 도착했지만 블랙 티탄즈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아, 힘들다.”

산호가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잘도 그러겠습니다. 이거 안 보이십니까?”

디디가 총알구멍 난 어깨를 가리켰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고생했어.”

“제가 고생하는 게 오늘 내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건 없고. 이제 이 계집애 어떡할 겁니까?”

디디가 세라비를 가리켰다.

“음….”

산호가 턱을 괴며 생각했다.

세라비는 디디를 날카롭게 째려봤다.

“쳐다보는 게 반항적입니다. 그냥 죽여 버리죠.”

“안 돼. 그럼 구한 보람이 없잖아. 일단 족쇄하고 풀어줘 봐.”

디디는 세라비 가까이 가서 족쇄랑 수갑을 매만졌다. 전자식이었다. 디디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세라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가만히 있어. 손발 날아간다.”

디디의 붉은 눈동자는 차분했다.

휙.

가벼운 칼놀림 족쇄와 수갑이 잘려나갔다.

디디는 가늘게 눈을 뜨며 세라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허튼 짓하면 죽는다.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빌게 될 정도로 짓밟아버릴 거야.”

디디는 손을 뻗어 세라비의 재갈을 풀었다.

세라비는 저린 팔다리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블랙티탄즈…. 그녀는 생각했다. 블랙티탄즈 수장의 목을 베어간다면 조직도 흔쾌히 세라비를 반기지 않을까….

세라비는 디디를 밀어버리고 산호에게 달려들었다.

“…미안해.” 세라비가 말했다. 그녀는 산호의 목을 쥐어 잡으려 했다. 그런데 팔이 뻗질 않았다.

팔 언저리가 허전했다. 세라비는 뒤를 돌아봤다. 칼날에 묻은 피를 닦는 디디가 보였다. 그 옆에는 잘린 세라비의 양팔이 있었다. 언제 잘린 걸까….

“천만에, 내가 더 미안하지.”

디디가 말했다.

세라비의 양어깨죽지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너무해. 디디.”

산호가 말했다.

“안 잘랐으면 댁이 죽었습니다.”

“댁이라니…. 너도 아이기스처럼 나 무시하냐?”

산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는 꼴이 무시당해도 싸지 않습니까!”

디디가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하게 울려서 복도를 배회하던 흑색두건들이 고개를 내밀어 쳐다봤다.

“응,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다. 미안해.”

“알면 됐습니다.”

“그런데 세라비 좀 빨리 치료해야하지 않을까….”

땅바닥에서 세라비가 피를 흘리며 꿈틀거렸다.


“사람 구하러 간다더니 사람을 다 죽여 놨네요.”

아이기스가 수술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는 라텍스 장갑을 벗어서 내던졌다.

“수술은?”

“사실 괴인이라는 족속 자체가 팔다리 잘려도 본드로 붙여놓으면 낫는 애들인지라 의료행위가 오히려 민망하죠."

아이기스는 총수를 바라봤다.

“왜?”

“가까이서 보니까 왜 총수가 그토록 구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산호의 동공이 무거워졌다.

“….”

아이기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의외로 호색한이셨네요. 그 동안 몰라 뵙습니다.”

산호는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마. 난 순수한 마음이야.”

“네. 그러시겠죠.”

“들어가 봐도 돼?”

“아직 의식은 없을 겁니다.”

산호는 병실로 들어갔다. 아이기스는 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디디에게 시선을 옮겼다. 디디는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너 왜 이야기 안 했어?”

아이기스가 디디에게 물었다.

“뭐가?”

디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란빛 머리와 에메랄드 눈동자. 나도 깜짝 놀랐어.”

“자세히 보면 달라.”

“분명 다른 사람이지. 총수라면 충분히 그녀를 바다와 투영할거야.”


세라비는 깨어났다. 눈을 뜨니 주위가 어지러웠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희미했던 사물이 또렷해졌다. 전자시계가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3일이나 지난 상태였다.

“3일 동안 혼수상태였어.”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던 산호가 말했다.

“넌 누구야?”

세라비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 크로노스.”

“뭐? 너…. 어리잖아.”

비록 삼류지만, 조직의 총수가 이런 소년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산호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재수 없어….”

세라비가 말했다.

“음료수 마실래?”

산호가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냈다.

“과일음료는 없어?”

“응.”

산호는 냉장고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라도 줘. 목이 텁텁해.”

세라비가 음료캔을 땄다. 산호는 냉장고에서 과일주스캔을 꺼냈다.

“나는 과일 주스 마셔야지.”

세라비가 먹던 음료를 뿜었다. 그녀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산호를 노려봤다.

“과일은 없다면서!”

“응. 내가 마실 거 빼면 너 줄 거 없다는 거였지.”

세라비는 얼빠진 얼굴을 짓다가 눈동자를 치켜떴다.

“너…. 죽여 버리겠어.”

세라비가 캔을 으스러뜨리며 주먹을 쥐었다. 음료가 흘러 시트가 젖었다.

끼익.

병실의 문이 열렸다. 과일바구니를 든 디디가 들어왔다. 그녀는 경쾌하게 바구니를 세라비에게 던졌다. 세라비는 얼떨결에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상큼한 과일향이 났다.

“안녕. 갈비뼈는 무사하니?”

붉은 눈동자가 세라비를 응시했다.

세라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한으로 살며시 떨렸다. 이미 다 나은 갈비뼈가 저리고 어깨 죽지가 뜨거워졌다. 몸이 디디를 두려워하고 있다.

“너, 너희들 무슨 속셈이지? 고문을 하려면 해봐. 나, 난 한 마디로 내뱉지 않을 거야.”

세라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수, 나 없는 동안 협박했습니까?”

디디가 머리를 긁적이며 산호를 바라봤다.

“아니. 오히려 날 죽이겠다고 협박하던데.”

“에이,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세라비는 디디와 산호를 번갈아봤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적대조직에게 구해져서, 치료까지 받아버렸다.

“응. 나 그럼 학교 가볼게. 디디. 세라비를 부탁해.”

산호가 병실을 나갔다. 디디와 세라비만 자리에 남았다.

세라비는 감각을 검사했다. 육감이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산호의 발걸음이 느껴졌다. 이곳의 구조가 머릿속에서 3차원 도면으로 그려졌다.

“야.”

디디가 말했다. 세라비는 화들짝 놀랐다.

“으, 응?”“게임할래?”디디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게임기를 꺼냈다. 세라비는 난생처음으로 게임이란 걸 해봤다.

참 재미있었다.


산호와 가람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사거리라서 신호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아침 출근 시간대라서 차들이 끊임없이 경적을 울렸다.

산호는 가람을 힐끗 바라봤다. 가람의 주위에 머무는 우울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역력했다.

“난 무능력한가봐.”

“왜?”

“처음으로 맡은 단독임무인데 실패해버렸어.”

“그거 참 안 됐네. 힘내.”

산호는 건성으로 말했다.

“나 한 방에 뻗어버렸어.”

“상대가 너무 강했나보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 하아.”

“아하하…. 그, 그래? 아, 신호 바뀌었다.”

산호는 차마 가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가람과 산호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한 발자국 내딛었다.

부우웅!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경적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서 버스가 멈추지 않고 질주했다.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운전기사가 다급하게 방향을 틀었지만 최악의 선택이었다. 버스는 도로를 벗어서 인도로 경로를 바꿨다.

“내 가방 좀.”

가람이 산호에게 가방을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는 변신했다. 액체금속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푸른색과 흰색이 교차된 슈트가 나타났다.

화이트팽은 건물 5층 높이까지 도약했다. 그는 버스 앞에 착지했다.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콘크리트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가면 속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화이트팽은 발을 땅에 박고 양손을 버스를 향해 뻗었다.

“후우우우….”

심호흡했다.

손바닥이 버스와 부딪쳤다.

콰-앙!

손목의 감각이 사라졌다. 팔꿈치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어깨는 당장이라도 빠지는 것처럼 삐걱였다.

콰직!

버스의 앞부분이 움푹 찌그러졌다. 뿌연 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버스가 멈췄다.

화이트팽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면 속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잇따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버스충돌사건 이후, 가람에게 라그나프 저스티스에서 긴급호출연락이 왔다. 어느새 위치를 추적한 요원이 차를 끌고 가람 앞에 섰다. 차 뒷좌석에는 도한이 있었다. 도한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저질렀냐?”

도한이 말했다.

“선배, 제가 잘못한 겁니까?”

“잘못했지. 허가받지 않은 인명구조를 금한다. 알고 있겠지?”

“알아요.”

“그럼 왜 어겼지?”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그게 이유야?”

“그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멀뚱멀뚱 구경만 하란 소리입니까?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요!”

도한이 가람의 교복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까불지 마. 이 수칙이 생기기 전에 히어로 사망률은 지금은 2배였다. 자기가 감당 못할 재난에 끼어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는 함정이었다. 우리가 그런 사건사고마다 끼어든다면 그들은 우리를 유인하기위해 의도적으로 무차별 테러를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한 지휘체계를 통해 움직이는 조직을 갖춘 거다.”

가람은 도한의 팔을 밀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저는 또 같은 상황이 되어도 움직일 겁니다.”

도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그 말, 보고로 올라가면 히어로 자격증이 취소될 거다.”

“사람을 구한다고 취소되는 자격증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가람이 똑바로 도한을 노려봤다. 도한은 피식 웃었다.

“…너 심장이 뜨거운 놈이었군. 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난 너 같은 타입 싫진 않다.”

“선배?”

“적어도 남자라면 그 정도 줏대는 있어야지.”

“가, 감사합니다.”

가람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놈은 일찍 죽는다. 경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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