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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I love You?
글쓴이: 회색꽃
작성일: 12-07-10 14:53 조회: 1,985 추천: 0 비추천: 0
하얗고 곱상한 손가락에서 종이조각이 유능한 곡예사마냥 살랑살랑 떨어져 책상에 안착했다. 「점심 뭐 먹을 거야?」 라고 적혀 있는 종이조각. 그것을 날려 보냈을 주인은 답변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을 뿐이다. 혹은 아프던지.
오늘 아침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녀석의 얼굴에는 홍조가 꽃마냥 풋풋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처음에는 짙은 색조 화장을 의심했지만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녀석이 화장을 할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곤 이내 열꽃이 피어올랐다는 걸 눈치 챘다. 태생이 하얀 얼굴이라 감기까지 걸린 녀석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열꽃을 화장이라 착각하는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누가 봐도 안 좋은 상태였던 녀석은 끝까지 자신의 상태는 괜찮으며 수업을 여섯 시간쯤은 가뿐하게 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멍청하고 우직한 옹고집으로 녀석은 기어코 3시간째 수업을 듣고 있다.
거친 숨소리를 들릴락 말락 조용히 내뱉는 녀석은 역시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아프면 집에서 쉬어야 할 것을 애당초 이 녀석에게 있어 지금의 강의는 정규 커리큘럼의 일환도 아니다. 단순히 녀석이 청강하는 무수히 많은 수업들 중 하나 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누워 있는 녀석의 깊은 생각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후한 교수님의 목소리 사이로 녀석의 거친 숨소리가 살짝 들려온다. 본인은 극구 거부하겠지만 강의가 끝나면 양호실에 데려가자. 이 미련퉁이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폐렴 한 발짝 직전까지 자신은 아프지 않다고 주장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공책의 가장 자리 부분을 짧게 잘랐다. 물어보았으니까, 답변을 해주는 것이 예의다. 교수님의 목소리를 오롯이 옮겨 적어나가던 손을 잠시 돌려 자른 종이의 크기만큼 짤막하게 썼다.
「네가 결정해.」
참으로 무책임한 답변이 아닐 수 없지만 애당초 우리의 점심은 언제나 녀석의 주도하에 결정되었다. 군주제에 물들어 있는 평범한 소시민 A에게 민주제를 가져다준다고 해서 제대로 써먹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녀석 또한 그걸 알고 있을테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고.
톡톡, 하고 녀석의 자리를 두어번 두들겼다. 흡사 휘파람 소리에 뱀이 몸을 새우듯 녀석은 그 소리에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녀석의 용태는 장난삼아라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태로 꿋꿋하게 종이를 집어든 녀석은 곧장 엎어지리라 예상한 내 생각을 조롱이라도 하듯 자신의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흘겨보았다.
어째서? 설마 내가 선택해 주길 바란 걸까? 이런 건 전혀 녀석 답지 않은 반응이다. 본디 녀석이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하면서도 약간은 오만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는 건 녀석의 상태가 자못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는 수업이 끝나는 즉시 양호실로 녀석을 끌고 가자고 생각을 되새겼다.
녀석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은 보기 싫었다. 완벽함과 동경의 대상 그리고 영웅. 녀석이 자신을 어떻게 상상하던 내게 있어 녀석은 그런 인물이다. 영웅의 팬인 소시민 A는 결코 자신의 영웅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플루엔자 따위에 쓰러지는 걸 결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녀석은 끝을 모르는 냥 흘겨보다 제 풀이 지쳤는지 혹은 머리가 아려왔는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어도 다시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와중에도 교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녀석의 상황이 영 신경 쓰여 강의가 집중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노랫말처럼 교수님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하늘 저 편으로 사라질 뿐이다. 시험 기간이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이 무슨 정신 나간 상황인가.
조금은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녀석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금 공책의 모서리를 잘랐다.
「도시락 사올 테니까, 동방에서 기다려.」
과연 녀석이 이 답변을 만족할까? 나는 시간을 되돌린 것 마냥 다시금 녀석의 자리를 두어번 두들겼다. 그에 녀석은 깨어났고 나는 녀석에게 종이를 넘겼다. 종이를 받든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쓰윽 종이를 훑어보았다. 과연? 다행스럽게도 답변의 내용이 낙제점은 아니었는지 교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엎어지셨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교수님이 어떠한 말씀을 하실 줄은 꿈에도 모른 체.
수업이 끝나고 진짜 교수님께옵소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내던지셨다. 교수님이 나가고 난 뒤지만 아직도 그 말씀은 잊혀지지 않는다.
‘학우분들의 수업을 듣고자 하는 뜨거운 열기로 말미암아 과제를 부담 없이 줄 수 있네요.’ 하고 교수님은 말씀하셨고 그 발언은 대중들의 몽매한 입에서 탄식을 쏟아내게 했다. 나는 그 충격으로 살짝 멍해져 있는 머리를 빠르게 굴려 오늘 날짜를 떠올리려 애썼다.
24일.
그 말은 즉 작성해야하는 자유 주제의 레포트가 24장이라는 걸 의미했다. 엎어져 자고 있는 녀석이라면 ‘24장?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냐?’라고 마치 누워서 떡먹기처럼 말하겠지만 나를 비롯한 이 강의를 듣고 있는 평범한 학생들에게 24장의 레포트는 주제 선정에 있어서부터 막막한 난제였다.
아직까지도 저번 달에 19장의 레포트를 억지로 짜내며 쓴 기억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끔찍한 기억으로 소뇌 어딘가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만약 녀석이 ‘내꺼 쓸래? 난 청강생이니까 레포트 같은 거 안 내도 상관없고.’라고 한 치의 악의도 없으면서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결코 완주하지 못했을 19장의 레포트가 이번에는 5장 추가되어 24장이 되었다.
더욱이 저번의 레포트 평가가 Good으로 나온 이상 안정적으로 A+을 받기 위해서는 Excellent라는 평가가 필요했다. 그 말은 즉 전보다 고급스러운 주제, 간학문적 접근 그리고 마무리로 근사한 어휘의 삼위일체가 이뤄져야 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필시 험난한 여정이지만 옆에서 세상 모른 체 자고 있는 녀석은 해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원래 그 교수님이 조금 까다로운 분이시니까. Good도 많이 안 주셔. 무엇보다 네 글, 잘 썼어."
누나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머리가 아려왔다. 동아리 방. 녀석은 내 옆에서 미동도 않고 자고 있다. 사각의 테이블에는 도시락의 잔해들이 널려있고.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누나는 내 레포트를 넘겨보고 있었다. 째깍하고 시계 침이 움직였다.
"그래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살짝 말끝을 흐렸다.
"다만 주제가 조금 아쉽네. <현대 사회의 新 관음증> 이라는 제목은 멋진데 말이야. 역시 그 교수님 타입은 아냐. 아무래도 운동권 출신이라고 하니까. 좀 더 거창하고 역사의식이 담겨 있을 거 같은 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가요."
상황파악이 끝났다. 아마도 나는 수업이 끝나고 녀석을 깨워 동아리 방으로 데려 갔고 거기서 누나를 만난 거겠지.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양의 레포트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을 것이다. 저번 레포트는 Good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과 함께.
어느덧 내 시선은 녀석을 향해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에서 고양이마냥 노곤함을 풀어내는 녀석. 흘끔 눈길을 돌렸을 때 누나도 녀석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누나는 눈이 마주쳤다. 초침의 소리. 누나는 펜과 메모장을 꺼내 듣기 좋은 리듬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종이는 이내 테이블을 가로 질러 내 시야에 들어왔다.
「걔는 네 경쟁 상대가 아니야. 과도 다르고 단순히 지식욕이 강할 뿐이니까. 걔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마.」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단순한 세 어절의 말은 어떠한 뜻을 품고 있을까.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누나는 그랬어요?」
물음에 누나는 배시시 웃었다. 햇살에 비친 누나의 웃음은 조금 서글펐다.
한 날 한 시에 약간의 차이를 두고 두 사람은 태어났다. 한명은 천재. 한명은 범재.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나 자매사이에도 경쟁이 존재하는데 쌍둥이인 그들이 경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천재와 범재의 경쟁이 성립될 리가 없다. 누나가 한 발짝을 내딛으면 녀석은 어느 사이 저 멀리 별들이 명멸하는 세상에 가 있다. 압도적인 차이 속에서 누나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듯 무리에 무리에 무리에 무리를 반복하는 것 혹은 경쟁을 포기하는 것 단 두 가지뿐이 아니었을까.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
누나는 조그맣게 남은 공간에 그렇게 쓴 글을 내게 보여주곤 필담의 흔적을 가방에 쏙 넣었다.
"안녕하세요! 네 녀석도 안녕."
때마침 타이밍 좋게 동아리 방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사이로 자신은 앙증맞다고 주장하지만 앙증맞기 보다는 왜소한 녀석이 들어왔다. 몸에 비해 커다란 가방을 매고 큼지막하면서도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녀석은 왠지 모르게 다람쥐를 떠오르게 하는 남자다.
"하온이 안녕."
누나는 능숙하게 그런 필담을 나눈 적 없는 냥 하온을 보며 인사했다. 더 이상 그 주제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도'는 좀 빼지?"
녀석은 내 핀잔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곧장 들어와 누나의 옆 자리를 차지했다. 뭐가 그리도 행복한지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녀석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녀석이다. 내면적으로는 모르게지만.
"오늘은 뭐 해요?"
하온이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하온의 가방은 그 크기에 걸맞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학생의 기본인 필기도구와 책들은 물론이거와 치약, 칫솔, 수건, 폼 클렌징 등의 각종 생활용품을 비롯해 군것질거리와 그에 어울리는 차까지. 대체 녀석의 가방에는 무엇까지 들어 있을까.
"언제는 우리가 뭐 해서 모였냐?"
녀석은 앙증맞게 생긴 쿠키가 담긴 봉지와 보온병 두어개를 꺼냈다.
"너한테 안 물어 봤어."
대체 내가 무슨 밉살스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언제나 늘 내게 적대적이었다. 녀석은 반 년 간 일관적인 자세를 유지했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다.
"글쎄, 뭐든 하지 않을까."
누나의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답변에 하온은 그러한 답변이 나올 줄 알았는지 곧장 '그래요?'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밖의 문패에 내걸린 '파아란.'이라는 동아리 이름만으로 보통 사람들은 여행이나 봉사를 주제로 삼은 동아리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고. 하지만 지난 일 년 반 동안 봉사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활동의 목적이 여행이 된 적도 없다.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동아리는 동아리 부실을 낭비하고 있을 뿐인 동아리에 불과했다.
대체 이런 동아리가 어떻게 존속될 수 있는지는 대학 동아리를 관리하는 부서의 나태함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혹은 풍문 형이 예상외로 유능하던가.
"누나 차는 뭐 드실 거예요? 홍차? 녹차? 커피?"
어느새 누나의 앞에는 맛깔스러운 쿠키가 하얀 꽃이 수놓아진 접시에 놓여있었다.
"커피로 줄래?"
"네."
쪼르르륵 하고 세번째 보온병에서 귀여운 토끼 모양이 그려진 머그잔으로 커피가 떨어졌다.
"커피 더 드실 거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녀석은 곧장 보온병을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녀석이 쿠키를 와드득 씹는 소리가 동아리 실에 매워나갔다. 머그컵에 입을 가져다 대고 무언가를 마시는 녀석은 빠끔 얼굴을 빼어들었다. 얌채 마냥 미소 짓고 있는 녀석이 밉다기 보단 우스웠다.
"나도 줘."
엎드려 있던 녀석이 자세를 유지한 체 팔을 내밀었다. 녀석의 정면에 앉아 있던 하온은 녀석의 행동을 예상할 수 없었는지 살짝 흠칫했다. 녀석의 행동은 하온에게 있어 언제나 규격 외였다. 아니 비단 하온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녀석의 행동은 규격외지만, 적어도 나와 누나는 녀석의 행동에 적응이 되어 있다. 하지만 하온은 녀석과 만난 지 체 반년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규격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도 성인군자는 아닌지라 하온의 잠시 동안이지만 당황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그 김에 나도."
하온은 적의적인 눈빛을 보내면서도 가방에서 순순히 쿠키와 차를 꺼냈다. 2인분의 접시와 컵도 함께. 대체 몇 인분까지 들어가 있을까.
"차는 홍차랑 녹차로."
홍차는 녀석의 것, 녹차는 내 것. 하온은 뻔뻔스러운 내게 적대적 눈빛을 보내다가도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겠지만, 홍차는 누가 마셔?"
"물론."
하고 입이 다물어졌다. 그렇구나. 하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자신 없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너 홍차 안 먹잖아."
하온은 자신의 논리적 타당성에 들어맞지 않는지 나를 추궁했고 누나마저도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사람은 늘 새로운 걸 추구해야해."
"그제에 네놈은 사람은 변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 것 또한 변했겠지.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녀석은 순순히 녹차와 홍차를 담은 보온병을 꺼냈다. 어제,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은 심각할 정도로 아팠고 차는 홍차 이외에는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덜 아프고 홍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근데 넌 대체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냐?"
여전히 누워있지만 깨어있을 녀석에게 물었다.
"커피 냄새가 났어."
"과연."
녀석이 나와 누나의 필담을 눈치 챘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관없다. 눈치 챈 수가 있으면, 눈치 채지 못한 수가 있으니까. 녀석이 홍차를 취급했던 수가 있고, 없던 수가 있듯.
"여기."
하온이 조심스럽게 녹차와 홍차를 담은 머그잔을 내밀었다. 굳이 내게 두개를 내민 이유는 녀석에게는 내가 전하라는 것이겠지. 녀석은 차를 받아들고 나서야 노인마냥 '으어어~' 괴성을 기지개 피며 일어났다.
"잘 잤다아."
이마에 찍혀있는 빨간 도장은 녀석이 얼마나 잘 잤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의 녀석은 아픈 모양은 아닌 것 같다. 저번의 녀석은 아팠고, 이번의 녀석은 아프지 않다. 지금까지 7번 겪은 현상이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시공불연속가변시기장치.
녀석은 그렇게 그 괴상한 기계를 정의했다. 흔히 평행세계라고 부르는 걸, 살짝 어긋나게 만드는 기계. 녀석은 LHC부터 시작해서 각종 이론을 들먹였지만 범인에 문과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녀석의 마지막 말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이건 시공을 초월하는 기계니까 세계를 건너 뛰다보면 언젠가는 네가 원하는 세계에 닿을 수 있을 거야." 라고. 그것은 마법과 같은 터무니없지만,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결국에 나는 녀석에게 안녕을 고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는 건 곧 현재의 세계와 결별을 뜻했으니까.
그 이후 한 달 동안 7번을 이동했다. 그 7번 동안 세계는 굉장히 미묘하지만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하온의 머그컵이 변할 때도 있었고, 오늘처럼 아팠던 녀석이 아프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일상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변화에 불과하다. 이상적인 세계는 아직 멀고 먼 이야기다.
"동아리 실이 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름이니까 에어컨 같은 게 하나 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전기야 학교 공공재라고 치지만 에어컨은 조금 힘들지. 거기다 우리가 동방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도 에어컨 없었어도 충분했어."
"너한테 말 안했어."
이번 세계에서 바뀐 점은 녀석이 아프지 않고 녀석이 홍차를 먹지 않으며 하온이 좀 더 까칠해졌다. 뭐, 맨 마지막은 원래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변화라고 보긴 어렵지만. 아무튼 집에 가면 적어두기로 하자.
"아무렴 어련하실까."
하온은 획 토라져 자신의 시선에서 정면을 배제했다.
"마냥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야. 축제에서 중간의 성적만 가져올 수 있으면 에어컨 값 정도야 나올 걸?"
누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들었다. 축제. 일반적인 대학이 그러듯 도하 대학에도 축제가 있다. 조금 색다른 점을 살펴보자면 전통이라는 미명아래에서 사람이 많은 동아리가 유리한 난제를 걸어놓고 먼저 맞추는 동아리부터 늦은 동아리까지 등수를 매겨 놓고 활동비를 지급 한다는 것. 물론 풀지 못해도 어느 정도 활동비는 나오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기에 모든 동아리들이 축제 기간에 열심히 활동했다. 하지만 우리 ‘파아란’은 이번년도의 신입 회원이 하온 한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축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는 건 힘든 일이 분명했다.
"풍문형, 저, 누나, 하온까지 부원수가 4명밖에 안돼요. 다른 동아리는 최대한 낮게 잡아도 10명은 거뜬히 넘어 가구요. 승산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럴까?"
"당연하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눈웃음을 짓고 있는 누나의 눈은 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쿠키를 와득이다 녹차를 후르륵거리고 있는 녀석을 향했다. 불가능을 모른다. 비상식을 상식으로 이끌어 내리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에게 붙는 단어, 천재. 하지만 녀석이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일에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누나가 무엇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뭐 생각한 거라도 있으세요?'
누나의 독순술이 뛰어나길 빌며 입을 오물거렸다. 말을 알아 드셨을까. 놀랍게도 누나는 독순술에 재능이 있으셨는지 말을 알아듣곤 너무나도 예상하기 쉬웠던 답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려놓았다.
'네가 알아서 해.'
비록 다른 세계지만 당장 쓰러질 정도로 아파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녀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을 회유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누나가 '네가 알아서 해.'라고 했으니까. '척'이라도 해야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대축제에서 중위권의 랭킹을 얻을 확률은?"
"10% 미만."
녀석의 입에서 퍼센트가 곁들어진 숫자가 짤막하게 나왔다. 보통은 후하게 줘서 10%라고 말할 텐데 참으로 정직한 녀석이다.
"너를 부원으로 취급한다면?"
녀석은 쿠키를 먹다 말고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부원이 4명밖에 없는 부서가 유래 없이 우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축제를 주체하는 학생회와 대의원회는 반발하는 타 동아리들 때문에 패닉상태에 빠지겠지."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느릿한 나귀를 움직이게 하려면 당근이 필요한 법이다. 내가 녀석을 회유할 수 있는 당근 그것이 무엇일까.
"풍문 형이 알면 기뻐할 소식이네요."
방금 전부터 불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하온이 대뜸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녀석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덩달아 내 얼굴도. 당췌 무슨 불만인지 알 수 없지만 자기가 말을 꺼내놓곤 재를 뿌리는 행동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풍문 형을 싫어하는 건 파아란 동아리의 회원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일터인데!
"하지만 난 부원이 아니야."
녀석은 조신한 아씨마냥 고고하게 말했다. 녀석은 단적으로 말해 풍문 형을 싫어한다. 그에 어떠한 뒷 배경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축제에서 우승하는 것과 학생회와 대의원회가 패닉에 빠지는 건 풍문형이 좋아하는 것이고, 녀석은 풍문형이 좋아하는 행동을 결단코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뭐, 축제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살짝 서먹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고 흘끔 본 시계는 어느새 동아리 모임의 시작 시간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풍문 형은 왜 안 오는 거야?"
"오빠가 약속을 지킬 리 없잖니. 뭘 새삼스럽게."
누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풍문 형에 대한 편견을 내보였다. 하온과 녀석도 그러려니 하는 걸 보면 풍문형도 어지간히 존재감이 없는 인간이다.
"그 사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쿠키 더 줘."
"읏. 내가 왜."
당당히 쿠키 접시를 내미는 녀석의 행동에 하온은 툴툴 거리면서도 곧장 의자 뒤편에 걸어놓은 가방을 들었다. 결국 풍문형은 정기 모임이 끝나는 시간 까지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물론 그게 한 두번이 아니기에 모두 그러려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결국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모임은 끝났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하온은 무언가 아쉬운 듯 미적거리다 결국엔 제갈길로 갔고 녀석은 교수와 상담이 남아있다며 사라졌다.
"오늘 왜 모였던 거죠?"
그리고 나는 요인 보호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누나의 뒤를 걷고 있었다. 흘끗 쳐다본 누나의 어깨까지 살짝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모이는 날이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미있지 않았어?"
"그렇기야 하죠."
"그럼 된 거야. 그 이상 뭘 더 바라겠어. 어차피 따로 할 일도 없었잖아?"
할 일이라는 점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레포트가 떠올랐지만 괜히 입 밖으로 꺼내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네요."
"그치? 그거면 된 거야. 별달리 할 건 없고 시간은 남고 적당히 개운하게 시간을 버리기에 정말로 좋은 동아리지…누구씨만 없다면 말이야."
오후에 있었던 필담의 연장일까.
"누나."
"왜?"
누나에 대한 녀석의 감정이 어떨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애증? 평범한 자매 사이에도 생겨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감정은 아닐 것이다. 굳이 생각해본다면 증오라는 단어가 걸맞을 것이다. 혹은 시기와 질투이거나.
"그런 거 안 좋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거야. 정신을 차려보면 아차, 하고 이미 선을 넘어 있는 거지. 하지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
그치? 하고 되묻는 누나의 표정은 어떠할까.
"애당초 그 사람이 잘못이야. 동아리장 주제에 모임에도 제대로 참석 안 하고 말이지."
그 말에 살짝 얼이 빠져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풍문 형? 녀석이 아니라?
"…"
"자서?"
아무 말이 없자 누나는 이름을 부르며 몸을 돌렸다.
"괜찮니?"
괜찮을 리가 없다.
"누나, 저 먼저 돌아 가볼게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서?"
내일 누나의 얼굴을, 녀석의 얼굴을 어찌 보면 좋을까.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빠른 발걸음으로 걷다 누나가 시야에 안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문득 머릿속으로 시공불연속뭐시기 장치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맘대로 발동한 적 없는 그 장치에 나는 오늘 이 일 만큼은 없는 세계로 갈 수 있길 빌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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