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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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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던 날
글쓴이: 김윤환
작성일: 12-07-08 22:56 조회: 2,469 추천: 0 비추천: 0

0. 암전(暗轉)





늦은 밤.

나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걷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천천히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질 않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머리가 아파 온다. 발걸음은 점점 비틀거린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다시 한 번 물어보지만, 대답은 없다. 나는 계속 걷는다.

하지만 곧 익숙한 길이 나타난다.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나는 오로지 감에만 의존해 앞으로 나아간다.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익은 듯 내 몸은 자연스럽게 어딘가로 가고 있다. 두통은, 나아지지 않는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적시고, 이윽고 눈가로 흘러내린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빗줄기가 거세진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에 뒤덮인 검은 하늘을 빗방울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좀 더 자세히 본다. 아니다.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야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늘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매 순간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다. 곧 새로운 빗방울이 나타나지만, 마찬가지로 추락한다. 지상은 언제나 그랬듯, 아무 말 없이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텅 비어 있는 하늘을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던 나는 갑자기 바닥에 넘어진다.

차갑다. 빗물이 온몸을 적신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두통은 점점 심해진다. 스스로 머리를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의 통증이다. 차가운 빗물이 쉴 새 없이 머리로 떨어졌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지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심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가지 의문을 고집스럽게 제시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고여 있던 빗물이 입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지금 쓰러져 있구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 따위는 상관없어.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세상이 어두워진다.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건 머릿속에 채워 넣는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던 모종의 의지와, 비틀거림과, 발의 통증과, 머리의 통증과, 차가움과, 입 안에 스며든 빗물과, 몸을 줄기차게 때리고 있는 빗물과, 조각조각 끊어진 채 남아 있는 기억들과, 그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과, 울고 있는 사람들과, 누군가의 품과, 그 안에서 흘리던 눈물과, 지금 내 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과, 더욱더 심해지는 두통과, 떨려오는 몸과, 차디찬 바닥과, 갑자기 느껴지는 시큰한 외로움과, 그리움과,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사라지는 순간들과, 가빠지는 숨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찾아온 암전(暗轉)의 순간과, 그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섞여 더 이상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는, 늦은 밤을, 떠올리고 있다.





“안아줘.”

한 소녀로부터 그런 부탁을 받았다.

시간은 아마 늦은 밤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단둘이 남게 되어 그녀에 집에 놀러갔었다.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줌마가 있고,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이 있고,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따뜻한 생기가 있는, 어린 시절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소꿉친구의 집.

나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와 함께 게임을 했다.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이었나? 아니, 아니면 별로 없는 편이라 내가 대화의 주도를 잡았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즐거웠다는 감상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늦은 밤이 되었다. 아주머니는 내일 새벽에 일찍 일을 나가야 한다면서, 편할 때 들어가고 너무 늦어지면 자고 가도 상관없다면서 먼저 잠들었다. 그때부터 묘한 기류가 둘 사이에 감돌았다. 열 시가 넘자, 나는 슬슬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녀가 내 손목을 잡은 것이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이 어떤 뜻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그녀를 보면서 지금 그녀를 혼자 두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그녀의 팔이 천천히 내 등을 감쌌다. 나와 그녀는 한참 동안 그렇게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러웠다. 아침이 찾아오고 그녀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아주머니는 이미 일을 나가신 뒤였고 그녀는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를 깨워 같이 아침을 먹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대로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녀가 현관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의 관계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친구들 중 한 명이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관계.

하지만 알았어야만 했다.

그녀가 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

내가 그녀를 안은 밤, 잠들기 직전 몽롱한 상태에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랬더라면.

적어도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끔찍한 두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억이 희미하단 것과 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집이다. 나는 현관 앞에 서 있다. 눈앞에 누군가가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은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집어 들어 머리를 닦았다. 얼굴과 목, 팔다리에 묻은 빗물도 될 수 있는 한 닦았다. 옷에 묻은 빗물을 짜냈다. 그런대로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목조 계단을 올라간다. 굳게 닫힌 방문이 나타난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연다. 방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지? 천천히 떠올려 보지만, 모르겠다. 갑자기 두통이 다시 찾아온다. 전에 느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무너진다. 나는 방바닥을 구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던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심결의 팔을 뻗어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다. 갑자기 두통이 사라지면서 편해진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던 기억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온몸을 떨며 흐느낀다. 갑자기 자상한 손길이 머리를 어루만진다.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됐어.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드디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녀다. 항상 함께하기로 약속한 나의 소중한 소꿉친구. 어느 밤,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불러들여, 같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한 여인.


이제 그만, 우리 행복해지자.


말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와이셔츠의 단추를 푼다. 하나씩, 하나씩……. 브래지어까지 남김없이 벗은 그녀의 상체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새하얀 살결과, 그 끝부분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돌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유리 인형처럼.

그 상태에서 다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고인 눈이다. 아니다.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녀가 울고 있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조용한 흐느낌이었다.

행복해지자? 그래. 그녀의 말대로다.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나와 그녀는 끔찍한 기억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끝내고 행복해질 때다. 내가 억지로 입술을 움직여 웃자, 그녀도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안아줘.


나는 그녀의 부탁대로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등을 감싸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안았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기기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않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눈앞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아름다운 추억만을 골라서 떠올려 본다. 처음 만났던 때. 몇 살이었더라. 하여간 아주 어렸을 때였지. 엄마들끼리 친구였던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녔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새끼 오리처럼 자꾸 졸졸 따라다니는 네가 조금 짜증났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너한테 화를 냈지. 그 후 단단히 삐져 버린 너를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초등학교 졸업여행 때 네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학교 전체에 난리가 났지. 그때 혼자 길을 잃고 울던 널 찾아낸 것도 나였지, 아마. 지금이야 훨씬 나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넌 상당한 길치였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중학교 때, 사춘기가 찾아왔었잖아. 서로 쓸데없는 일로 대판 싸우고 집에 가서 씩씩대고 있는데, 친구들 중 한 명이 전화를 걸어 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어. 앞뒤 잴 겨를 없이 달려가서 서로 끌어안고 막 울었잖아. 서로 내가 더 잘못했다고 우기면서. 그래, 지금처럼 막 울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때가 언제더라.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잤던 날. 기억하니? 처음이라 서로 굉장히 아팠지만, 넌 울면서도 끝까지 계속 해달라고 애원했어. 사실 그때 나, 죄책감 느꼈다. 널 너무 아프게 한 건 아닌지, 괜한 일을 한 건 아닌지 후회 많이 했어. 그때 무릎 꿇고 싹싹 빌었더라면, 우린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세상이 다시 흐려진다. 그녀의 몸은 이미 뿌연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베개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기겁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에 묻어 있는 액체를 확인했다. 눈물이었다. 거울로 확인해 보니 눈가가 조금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나마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다. 적어도 얼음으로 눈을 마사지할 시간 정도는 될 것 같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좋은 아침이었다.



1. 재회(再會)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인지 아침부터 참 피곤했다.

버스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아침 자습 시간에 문제집을 풀려고 가방을 열었더니 필통을 깜빡했다. 결국 옆자리 녀석에게 펜을 빌려야 했다. 자습이 끝나고 1교시가 시작하기까지 20분의 쉬는 시간. 나는 책상에 드러누웠다.

고 3이 되고 난 이후로 부쩍 잠이 부족해졌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가끔 야자도 빠지고 놀러가는 등 비교적 여유롭게 지냈지만, 3학년에 올라가고 나니 입시 이외의 모든 것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다. 참, 현실은 여러 가지로 시궁창이다.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수능을 보는 것.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수능이 끝나고 무엇을 할지 떠올려 보았다. 기타도 배우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조리기능사 자격증도 따 보고, 혼자 배낭여행도 떠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여행 계획을 비밀에 부치고 조용히 떠나도, 결국은 시끌벅적한 여행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

“아침부터 축 늘어져서 뭐 하는 짓인지. 야, 일어나. 오늘만 지나면 내일이랑 모레는 쉬잖아. 지금 스트레스를 쌓아 뒀다가 그때 확 풀어 버리자고.”

?가 지금 막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 녀석이라면 보나마나 내 행동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따라붙겠지.

오늘도 깔끔한 단발머리에 상쾌한 표정이다. 완벽한 마이페이스. 엎드려 있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싱글대는 이 녀석은… 음. 그러니까 내심 소꿉친구 1호로 부르고 있는 녀석이다. 그나저나 방금 발언은 좀 지적해 줘야 하지 않을까. 뭐 하러 일부러 스트레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덧붙여 몇 호니 하는 건 그냥 이름의 가나다순이다.

“너야말로 아침부터 왜 그렇게 기운이 넘치는 거니. 안 졸려? 몇 시에 잤어?”

“운동 끝나고 컴퓨터 좀 하다가 1시쯤. 아, 그러고 보니, 왜 문자 씹었어! 답장 기다리다가 그냥 잤잖아!”

나랑 비슷하게 잤는데도 이 차이는 뭘까. 타고난 유전자의 차이일까. 강 씨 집안의 식구들은 모두 이렇게 에너자이저인 걸까.

하여간, 이 녀석(실제로도 가끔 이렇게 부르곤 한다. 일종의 애칭이다.)은 보다시피 나와 같은 19세. 고 3이다. 본명은 강윤주.(물론 가명 따윈 없지만.) 피지컬이 로지컬을 현저히 초월하며 지능을 제외한 각종 스테이터스가 높다.(안경을 씌워 놓으면 그럴싸한 모범생으로 보인다는 것이 조금 열 받는다.) 중학교 때부터 탁구를 시작해, 지금은 우리 학교 안에서는 적수가 없는 체대입시생이 되었다. 탁구는 민첩함이 생명이라지만 근력 또한 쓸데없을 정도로 강하다.

“자느라 못 봤나 보다. 근데 무슨 일? 급한 얘기였어?”

“아니 그건 아니고. 일요일에 애들이랑 다 같이 놀러 가자고. 오랜만에.”

오랜만이라.

확실히 오랜만이긴 하다. 4월 이후로는 한 번도 같이 못 놀았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딱히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바빴으니까.

“하지만 거절한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몰라서 묻는 거냐.

“야, 우리 고 3이다. 너도 슬슬 입시 시즌이잖아. 대회라도 하나 더 나가서 상 타 와야지.”

예체능이 일반 수험생보다 편할 거란 것은 편견이다. 이 녀석을 오랫동안 지켜본 소꿉친구로서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체대입시생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직접 몸을 혹사시켜야 하고, 선후배 간의 위계도 일반 학생보다 훨씬 엄격하다. 이 녀석도 입학 초기에는 뾰족한 성격 덕분에 자주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가끔 에너지 충전도 해 줘야지. 너 계속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공부만 하면 엉덩이에 땀띠 생긴다.”

“안 생겨.”

사실 흠칫했다. 이 녀석, 내가 요즘 남몰래 피부과에 다니고 있단 사실을 알아챘나?

“진짜? 한번 까 보자. 와봐.”

“야, 하지 마!”

여러 가지 의미로 기겁했다. 바동대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다.

“근데 진짜 안 갈 거야? 에이, 너 빠지면 재미없는데.”

“난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재밌게 놀고 와라.”

스케줄러를 펼쳐 이번 주 공부할 분량을 체크했다. 보자. 이번 주말엔 고전시가랑 경제, 수학을 파야겠군. 여유가 있으면 한국지리도.

“그럼 여자애들만 모아서 걸즈토크라도 해야겠네.”

“그러던지.”

“셋이서 같이 무심한 남자 하나를 씹을 거야.”

“잘해 보셔.”

“한참 뒷담화를 까다가, 내가 은근슬쩍 떡밥 하나를 뿌리는 거지. 물론 야한 얘기로. 여자 셋이 목소리를 죽이고 머리를 맞대며 청춘의 끈적끈적한 에로스 토크를 펼치는 거야.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전혀.”

“그러다가 정인이가 갑자기 ‘상훈이는 몸 안의 단백질을 빼내면 좀 온순해지지 않을까’라며 운을 띄우겠지. 분위기는 점점 묘하게 흘러가고, 세 여자는 한상훈의 몸에서 극상의 단백질을 빼내기 위한 작전 회의를 개최하는 거야.”

“미쳤냐?!”

참고로 정인이라는 아이는 소꿉친구 2호. 이과라서 우리랑은 다른 반이다. 물론 보통의 이과생은 남자 몸에서 단백질을 빼내겠다는 발상 따윈 하지 않는다.

“어이쿠, 마침 이런 우연이. 한상훈 군은 공부에 여념이 없어 여자아이들이 몰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육체적 속박은 내가. 배출을 위한 테크닉은 나머지 두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어떤 작전인지는 직접 겪어 보면 알 텐데…….”

“…갑자기 이번 주는 공부하기가 싫어지네. 간만에 실컷 놀아 보자고.”

소꿉친구 셋이서 정말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지만,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들어 주지 않는 것도 좀 그렇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중간고사도 끝나서 여유가 있으니까.

“오케이. 그럼 이따 점심시간에 애들이랑 만나서 얘기하자.”

윤주는 손을 흔들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여자친구가 없는 우리 반의 솔로부대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얘들아, 나도 애인이 없는 건 마찬가지란다. 양심상 차마 솔로부대에 입대는 못 하겠지만.





“졸려어…….”

내가 낸 소리는 아니다. 잠은 이미 1교시 수업을 들으며 완전히 깼다. 지금은 이미 점심시간이다. 함께 모여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햇볕 잘 드는 벤치에 앉아 일요일에 뭘 하고 놀지를 토의? 할 예정이었지만, 한 녀석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통에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자, 커피. 마시고 잠 좀 깨.”

“오, 카페인. 땡큐.”

이 안쓰러운 아이가 바로 소꿉친구 2호, 이정인. 원래는 길고 자연스러운 곱슬머리를 찰랑대곤 했지만, 고 3이 된 이후 부쩍 수척해졌다.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이 녀석에게는 못 따라간다.

“꿀꺽, 꿀꺽? 섭취 완료. 삐비빅. 카페인이 체내에 축적되었습니다? 라지만, 어차피 3일이면 배출되니까 다시 섭취해야 돼. 아니, 카페인의 존재 유뮤와는 상관없이 난 항상 피곤하니까 계속 마실 수밖에 없고, 이러다간 결국 커피 중독이 되고 말거야. 어, 어떡하지, 상훈…….”

“정인아. 이런 말하기 정말 미안한데, 넌 이미 중독이야.”

정인이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매일 캔 커피를 세 개씩 마셔 대고, 오다가다 틈틈이 자판기 커피도 뽑아 마시고, 휴일에 놀러 갈 땐 캔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커피 중독이 아니면 누가 중독이란 말인가.

“울고 싶다, 진짜. 3학년에 올라오니까 공부할 게 너무 많아졌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인이는 사실 자기가 이과라는 데 제법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시선은 뭐야! 이 문레기들! 우우,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하다고 무시하지 마! 대학도 우리들이 훨씬 쉽게 간다 뭐! 이공계가 야근 많다고 동정하지 마! 언젠가는 이과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올 거야! 이과로 대동단결! 그날이 오면 우리 학교 도서관에 과학 서적만 잔뜩 꽂아 놔야지!”

그 자부심이란 게 대체로 이런 수준이다.

조금만 더 지켜보면 안쓰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정인이를 위한 커피를 사온 윤주는, 아까부터 자그마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운동부 학생이 독서에 빠져 있는 모습이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다르다.

“BL 집어넣어.”

“쳇, 한참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윤주는 툴툴대면서도 순순히 책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솔직히 여자아이들이 남성 간의 사랑에 묘한 호기심 같은 걸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남자가 멀쩡히 옆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그런 걸 즐기는 건 좀… 많이 그렇다. 윤주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내 앞에서는 읽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혹시라도 읽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초심자에게 적합한 물건부터 빌려줄 테니까. 그렇지. 소프트한 걸로는 ‘펜 끝에 깃든 애정’이라는 게 있는데, 이건 인기작가와 편집자가…….”

대신 이렇게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

정신적으로 심히 지친 나는 문득 한 명이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야, 그러고 보니 시연이가 없다?”

“걔? 못 들었어? 조퇴했다던데.”

윤주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못 들었다.

“어디 아프대?”

“아니, 땡땡이.”

그럴 줄 알았다.

음. 소꿉친구 3호, 그러니까 최시연이라는 아이는…… 여러 가지 사정 탓에 조금 삐딱선을 타게 되었다. 바로 옆 반이라 쉬는 시간에는 우리 반에 놀러오지만, 평소 교실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창밖만 보는 아웃사이더다. 무슨 사정인지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결국 네 명이 모여 일요일의 행선지를 정하자는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뭐 상관없어. 나중에 전화해서 상의하면 되니까. 그렇게 의견을 모은 우리 셋은 초여름의 따뜻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만약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알았더라면, 좀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을 텐데.





밤 열한 시.

야자가 끝나는 시간. 학교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나도 그 속에 있었다. 윤주는 정규 수업이 끝나면 바로 탁구 연습을 하러 가고, 정인이는 항상 도서관에 가서 한두 시간씩 더 공부하다 가곤 한다. 시연이가 학교를 땡땡이치지 않는 날이면 둘이서 하교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버스를 타고 동네에 도착했다. 조금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면 단독주택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가 나온다. 집은 그 근처에 있다. 조금 어둡긴 하지만 대로로 가려면 꽤 멀리 돌아가야 한다.

하품을 하며 앞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컴퓨터를 켜지 말고 그냥 일찍 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갈림길의 오른쪽으로 발을 들인 순간.

누군가가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전에는 이 골목길에서 불량 학생 몇몇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기도 했었다. 나도 언젠가 한 번 그들과 마주쳐 돈을 조금 뺏긴 적이 있었는데, 윤주에게 무심코 이 사건을 털어놓은 후, 두 번 다시 이 골목에서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진심으로 화난 윤주는 굉장히 무섭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 아니면 그들 모두가 내게 앙심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 나를 덮치려 한다면?

나한테 승산은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운동이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불량 학생과 싸워 이길 완력 따위는 없다.

지금 위치는 집으로부터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 전력질주를 하면 어느 정도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리저리 꺾인 골목길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집까지 가는 길 정도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몸에 익을 정도로 자주 다녔으니까.

나는 뛰쳐나갈 타이밍을 쟀다.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로 보아 어림잡아 1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빠.”


뛰어나가려던 내 몸이 일순간 멈추었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뭐하는 거야. 왜 겁먹고 그래. 나라고.”

틀림없다. 이 목소리는?

“…지아야?”

“오랜만이야, 오빠.”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생이별하게 된 내 하나뿐인 동생.

한지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거기 앉아서 쉬고 있어. 차 마실래?”

대답은 없었다. 거실 쪽을 슬쩍 봤더니,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빠로서 차 정도는 대접해주고 싶었다.

지아.

내가 일곱 살, 지아가 네 살이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유난히 나를 잘 따랐던 지아는 나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면서 울었다. 부모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하지만 겨우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지아는 아버지를 따라 내 곁에서 떠나 버렸다.

그 당시 지아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던 내 소꿉친구들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나는 지아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어린 마음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우는 대신 아이들을 달래 주었다.

어머니는 지아가 어디로 갔는지 단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다만,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내가 우연히 지아의 SNS를 찾아낸 덕분에 우리는 사이버 상으로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아는 호주에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내가 처음 찾아낸 지아의 SNS 글은 모두 영어로 적혀 있었다. 혹시 한국어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작년에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지아가 갑자기 ‘이제부터는 같이 이야기할 수 없게 됐어.’라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탓이었다. SNS도 폐쇄해 버렸다. 그 후 1년 동안 지아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 지아가 여기에 찾아온 걸까.

다시 만난 지아의 모습은 작년에 봤던 사진과 거의 다름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같이 있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무 말도 없이 컴퓨터를 켜고 이것저것 조작하고 있었다. 마침 슬슬 녹차가 다 우러난 것 같아서 잔을 들고 지아에게 다가갔다.

“뭐 해…….”

“이번엔 칼이야? 참 잔인하기도 하지.”

깜짝 놀라서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지아는 갑자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좀 말해 줘.”

당황하며 항변했지만 이미 지아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은 지금 아흔아홉 번이나 반복되고 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난 확실히 알 수 있어. 난 반복되는 세상을 모두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반복되는 세상이라니. 혹시 연락이 끊어진 사이 마음의 병이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입으로 뱉어낼 수는 없었다. 곧 지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시연 언니.”

갑자기 등장한 소꿉친구의 이름에 나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시연 언니는 지금까지 서른일곱 번을 칼에 찔려 죽었고, 스물아홉 번을 목이 졸려 죽었어. 열여덟 번은 온몸이 불에 타서 죽었고, 열다섯 번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실족사했어.”

나는 잠시 시연이가 칼에 찔리고, 목이 졸리고, 온몸에 불이 붙고, 높은 곳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곧바로 몸서리쳤다. 어지럽다. 갑자기 지아가 왜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아가 다음으로 한 말은, 내게 조금 남아 있던 이성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오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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