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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말하지 못하는 얼음왕자와 학생상담부의 그녀들
글쓴이: 루트4
작성일: 12-07-08 16:31 조회: 1,674 추천: 0 비추천: 0


“분위기를 자꾸 깨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쾅.
나는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아, 뭐야, 잘못 왔나. 나는 학생상담실에 가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문에 달려 있는 팻말을 보니 그곳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학생상담실’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저런 초등학생 여자 애가 상담 선생님이라고?
나는 어쩌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


누구든 고민 같은 걸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이 너무 쪘다든가, 성적을 올리고 싶다든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든가, 혹은 오른손에 봉인되어 있던 힘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든가…….
어라, 마지막 건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어쨌든 이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음속에 고민 하나씩은 가지고 있겠지.
혹시나 고민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고민이 없는 그 자체가 고민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진 것을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요컨대 그런 식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
혹은 그와 반대로ㅡ모두에게 당연치 않은 게 당연한 것.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에게는 어렵다는 것.
혹은 어쩌면 모두가 하지 못하는 걸 자신은 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들은 모두 두려움이 될 수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게 있다.
모두들 당연하게 하는 일이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
그건 바로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아, 그래, 나는 여자랑 말을 할 수가 없어.
그게 바로 나의 고민이다.

그때 그 날’ 이후로 나는 여자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살면서 불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몇 번이고 고쳐보려고 애써봤지만 언제나 헛수고였다.
여자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서 나를 괴롭힌다.
‘그때 그 날’처럼 명확하지 않은 말로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도, ‘그때 그 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서다.
뭐, 여자와 말을 못 한다고 해도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저 또래 여자 애들과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뿐이다. 즉, 짧게는 말을 할 수 있다 이거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을 때 여자 애들이 와서 “뭐하고 있어?”하고 물으면 “책.”이라고 답한다든가 급식 먹고 있는데 “오늘 급식 맛있지?”하고 물으면 “응.”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두 글자부터는 좀 힘들지만…….
……
……
날 왠지 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인데, 한 글자쯤은 말을 할 수 있으니까 혹시 한 글자씩 떼어서 말하면 괜찮지 않을까? 로봇처럼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사회 수업 중인 교실에서 로봇 흉내를 내며 “삐빗, 응, 정, 말, 맛, 있, 었, 어, 삐잇”하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은 3초간 지속된 뒤 나를 제외한 모두의 폭소 타임이 시작됐다.
“풋, 뭐하는 거야.”
“푸하하, 바보 아냐?”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억지미소를 짓고 있었다. 으, 부끄러워.

……이튿날, 그때 우리 반 아이들과 사회 선생님에 의해서 내 별명이 ‘정말 맛있었던 로봇’이 된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소소한 해프닝 따위가 교사들 사이에서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니까 말이지.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사회 선생님께선 “글쎄, 민혁이가 수업 시간에 로봇 흉내를 내지 뭐에요.”하고 말씀하셨겠지. 그리고 그걸 들은 상담 선생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상담 선생님은 바로 우리 누나니까!


상담 선생님, 아니, 우리 누나는 나와 10살 차이다. 내가 18살, 누나가 28살. 누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상담 교사가 되었다.
내가 늦둥이라서 누나는 거의 나를 기르다시피 자라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는 나한테 “넌 동생보다는 오히려 애 같아.”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 누나는 퇴근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오늘 수업 시간에 로봇 흉내를 냈다며?”
나는 좀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서?”
“애가 왜 이렇게 귀염성이 없어! 왜 그런 거야?”
“내가 말할 것 같아?”
이렇게 말하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 어차피 또 여자 애들이랑 말하는 연습이나 한 거겠지.”
“푸웁!”
들이켰던 물로 분수를 만들었다. 무지개가 생기겠는걸.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누나는 살며시 웃는다.
“어? 맞았어? 정답이야? 그냥 한 번 찔러본 건데.”
한 번 찔러본 말에 완전히 정곡을 찔렸다.
“너 요전번에는 혹시 한국어가 아닌 다른 말로 말하면 될지 모른다면서 하루 동안 영어로 말을 하겠다고 했잖아. 근데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더니 ‘아, 생각해보니까 나 영어 40점이었어.’라면서 침울해했잖아.”
“시끄러!”
바닥에 세차게 뿜어버린 물을 걸레로 닦고 있던 나는 소리쳤다.
“그 다음에는, 뭐더라, 말로 하지 않고 수화로 하면 괜찮을 거라면서 수화를 열심히 공부해가더니 우울한 표정으로 집에 와서는 ‘그러고 보니까 애들이 수화를 알 리가 없잖아.’라고 한 적도 있었지.”
“그만해!”
나는 흘린 물을 다 닦고 걸레를 제자리에 갖다놓은 뒤 소리쳤다.
“또, 여자를 제대로 알면 여자와 말하는 게 무섭지 않을 거라면서 여자 애들이 많이 나오는 야한 동영상들을 잔뜩 보기도 했지.”
“그런 적은 없어!”
“어라, 아니었나?”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누나. 정말로 그런 적 없습니다. 여러분, 믿어주세요.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 누나는 “왜 여자 애들과 말하는 게 어려워졌어?”하고 물어봤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누나는 내가 여자 애들과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가족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는 오히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숨기고 싶은 비밀 같은 게 있다.
이번 경우가 그렇다. 아니, 사실은 가족이라서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입도 행동도 경박한 누나라서 숨기고 싶은 거지만…….
……아니야,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왜 여자 애들과 말할 수 없게 됐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내게 말하기는 힘든 거구나?”
“……응.”
설명하기 복잡한 느낌이라서 대충 긍정의 대답을 했다.

나는 이걸 언젠가는 꼭 고쳐야 한다고, 언젠가 꼭 고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는 어떻게든 해서 큰 문제같은 건 안 생기지만, 사회에 나가서는 분명 문제가 되겠지.
내가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 누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상담 선생님께 상담 받아볼래?”
“어?”
“아니, 그게, 작년에 새로 들어온 상담 선생님이 계시거든. 한 번 경험 삼아서 그 분께 네가 상담을 받아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나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상담 선생님이 누나 같이 경박한 사람만 아니라면 괜찮은 제안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 섣불리 그 악마같은 누나의 그 제안에 넘어간 것 같다.


***


자, 그래서 나는 바로 그 다음 날 방과 후인 지금, 학생상담실 문 앞에 있다.
학생상담실이 있는 곳으로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묘하게 풍겨와서 머리가 아픈 별관 5층.
축구부, 아카펠라부, 다마고치부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다마고치부의 활동은 꽤 소소할 것 같다…….
별관 5층은 각종 동아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어쩐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상담 선생님이 있을 장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제안을 할 때 누나의 표정은 무척이나 재밌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벌써 약속 시간인 5시에는 15분이나 늦은 상황이니까.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학생상담실 문을 열었다.

철컥.
“정답은 탈무드야!”
“……저, 저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려다가 잘 생각해보니까 아까 처음에 문을 열었을 때 수수께끼 문제를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을 해주자면, ‘탈주’의 ‘탈(脫)’에 영어로 분위기를 뜻하는 ‘무드(mood)’의 합성어지. 분위기에서 자꾸 벗어난다는 뜻으로…”
“해설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야! 갑자기 왜 그런 수수께끼를 내는 건지가 궁금한 거지!”
내가 이렇게 소리치자, 초등학생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여자 애가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혹시 말실수를 했나 싶어져서 미안해졌다.
그런 내 앞에서 여자 아이는 서서히 떨리는 입을 열었다.


“재밌으니까.”
“뭘 폼을 잡고 말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은 취소, 캔슬.


어라? 근데 자세히 보니까 이 아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건데.”
“다른 수수께끼를 묻는 거면 안 돼. 하루에 하나씩만 하니까.”
“다행히 그건 물어볼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너 혹시 우리 학교 학생이야?”
여자 아이는 좀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응. 너와 같은 2학년이야.”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몸이 굳고 심장이 찌릿찌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해진 것 같았다.
안 돼……. 내가 또래 여자와 말을 나누다니…….
……어라? 안 된다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내 앞에서 초등학생 여자 애ㅡ아니, 좀 어려보이는 고등학교 2학년생 여자 애는,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여자와 대화를 못 하는 건 네 마음의 문제인 것 같네.”
내 마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그 여자 애는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나오시죠, 소진 선배.”
“어머, 들켰나?”
이런 말이 한쪽 구석에서 들리더니 갑자기 그곳에 있던 상자가 열리고 거기서 똑같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이 나왔다. 이름은 소진인 것 같다. 조금, 글래머다.
“어떻게 알았어? 대단한 걸.”
“애초에 우리 부실에는 그런 상자가 없었던 걸요. 그리고 부장은 오늘 늦게 온다고 했고요.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숨어주셨어요. 아마 소진 선배가 숨지 않았다면 여기 이 내담자가 절 초등학생으로 오해해서 이렇게 말을 하는 일은 없었겠지요.”
여전히 아까 전 이해불능의 괴상한 감정을 해석하고 있었던 나는 방금 전 그 추측에 놀랐다.
어째서 내가 자기를 초등학생으로 오해했다는 걸 아는 거지?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혹시 ‘어째서 내가 자기를 초등학생으로 오해했다는 걸 아는 거지?’하는 생각에 놀란 거야?”
“헉!”
너무 놀란 나는 한 글자의 감탄사로 대답했다. 두 글자 이상으로는 못 말하니까.
정말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건가? 어떻게 저렇게 바로 알 수 있는 거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사…”
“사람을 놀리는 건 그만 둬.”
“아얏!”
선배가 가볍게 딱밤을 때리자 독심술사가 아파했다.
“아마도 네가 말을 잘 하는 걸 보니 교복을 입고 있지만 자신을 자기 또래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겠고, 만약 그렇게 본다면 이 아이는 분명히 중학생보다는 초등학생처럼 생겼으니까.”
엄청난 추리력이라고 생각해서 감탄했다.
“그래도, 이 내담자는 표정에서 감정이 참 잘 드러나네. 방금도 내 말에 감탄했지?”
또 들켜버렸다. 선배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 같은 건 잘 못하게 생겼어.”
그리고 나를 이렇게 평가 내렸다.
내 안에 담긴 모든 감정이 다 겉으로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알몸으로 서있는 것 같아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소진 선배, 이미 이 내담자, 라이프 포인트를 다 소진한 것 같은데요.”
“날 이름으로 놀리는 것도 그만 둬.”
“아야야! 때린 곳을 또 때리다니!”
선배는 다시 한 번 초등학생 같은 고등학생에게 딱밤을 때렸고, 또 한 대 맞은 후배는 선배를 흘겨보았다.

상담을 시작하자며 의자에 나를 앉혔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에서 상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본래 상담이라고 하면 상담을 하는 쪽과 상담을 받는 쪽이 대화를 나누듯이 하는 걸 텐데.
그렇다면 나는 또래의 여자들과 이야기를 못 하겠다는 고민에 대해서, 또래의 여자들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불가능했고, 나는 “저……”나 “그……” 혹은 “아……” 같은 한 글자 이내의 중얼거림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글래머 선배는 내 앞에 앉아 난처한 듯이 웃고 있었고, 초등학생 같은 고등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뒤의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음, 듣던 대로 정말 말을 못 하는 구나.”
“예…….”
선배의 말에 나는 여전히 한 글자로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얼음왕자라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응?”
초등학생 같은 고등학생(너무 길다. ‘초등학생’으로 줄이자. 솔직히 아직도 초등학생이 정말 아닌지 의심이 든다.)의 입에서 나온 알 수 없는 말에 선배는 되물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모르시는구나. 이 내담자, 2학년 여자들 사이에서 ‘얼음왕자’라고 불리고 있어요. 생긴 것도 쿨하고, 말을 걸어도 쿨하게 대답한다면서…”
“말도 안…!”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가 말한 건, 무려 세 글자였다.
“성공했네요, 선배. 역시 의식적으로 여자와 말하는 걸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나 어느 라이트노벨 비슷하게 신체적으로 여자와 대화를 못하는 체질인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아까 확인했고, 방금 무의식적으로 말이 세어 나온 모습을 보면 확실해요.”
“응, 그런 것 같아.”
초등학생이 나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를 내자 글래머 선배는 미소 지으며 긍정했다.
“다시 말해서 말이지. 넌 여자 애들과 말할 때 네 내면 속의 무언가을 의식하면서 말을 하지 못 하는 거야.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하지만 다행이야.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글래머 선배는 이렇게 나의 심리 상태를 정리했다.
내가, 내 마음 속 무언가를 의식해서 말을 못 한다ㅡ고?

그런 생각이 들쯤이었다.

‘넌 배신자야.’
‘평생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네게 나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던 거지.’

내 귓가에 이런 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나를 지켜주지도 못했으면서.’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던 거겠지.’
‘그때 그 날, 너는 죽어가는 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

나는 귀를 양쪽 손으로 꼭 막았다.
그래도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을 걸.’
‘넌 나를 절대로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넌 꼭 내 곁에서 끝까지 날 지켜줘야 돼.’

‘그러니까 너는, 다른 여자들과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돼.’

계속 듣다 보니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그녀’의 것이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그 목소리.
알아차린 순간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목소리는 그걸로 멈췄다. 나는 공포에 휩싸인 채로 귀에서 손을 땠다.
“어이, 괜찮아?”
“어디 안 좋은 데 있니? 양호실 안 가도 되겠어?”
나를 걱정해주는 초등학생과 글래머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 그들을 바라보자 표정이 심각하다.
‘괜찮아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하는 긴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원래 당연했지만, 이 순간 나는 ‘예’하는 한 글자의 대답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배신자가 되니까.

나는 말없이 옆에 있던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상담 선생님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에 뒤를 돌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멨던 가방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모르겠는지 작게 얼굴을 찡그린 채로 가만히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 그대로 ‘그녀’를 불렀다.
“지원…, 아…….”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지원이 아니야, 내 이름은 소지희야.”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소지희, 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그녀’와 아주 닮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아니었다.

나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에서 나가기 위해 흔들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서 문을 향해 한 걸음 발을 내딛은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것은 글래머 선배, 소진 선배였다.
소진 선배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서 좀 더 얘기하지 않을래?”하고 물었고, 나는 왠지 모를 강제적인 느낌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다.
어차피 얘기는 한 마디도 못 하겠지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까 소지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녀’와 닮은 그녀는 다른 두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이시한 분위기나 뚜렷한 이목구비 같은 걸 보면서 역시 ‘그녀’와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희는 늦게 와서 모르겠구나. 사실 아까 점심시간에 민지 언니가 와서 ‘너희에게 상담 받을 사람이 있어. 여자 애들이랑 말을 잘 못 하는 게 고민이래. 잘 부탁해. 후훗, 재밌을 것 같아.’라고 말하고 갔거든.”
민지는 우리 누나의 이름이다. 역시 누나는 흥미 본위로 나를 여기에 갖다 놓은 거구나.
“예, 그렇군요. 오늘은 반 당번이어서 점심시간에도 못 오고 오늘도 좀 늦게 오게 됐어요. 근데 문을 열었더니 어떤 남자 애가 귀를 막고 있질 않나,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나고 뒤돌아서 나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저앉질 않나. 저도 굉장히 놀랐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살짝 째려보는 소지희. 나는 어쩔 수 없이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뭐, 됐어요. 그래서 상담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소지희가 이렇게 묻자 글래머 선배는 대답했다.
“내담자가 우리와 말을 잘 하지 못 해서 역시 좀 어려웠는데, 수빈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담자의 심리를 꿰뚫어봐서 많이 알아낸 편이야. 역시 수빈이는 우리 학생상담부의 에이스란 말이야! 귀엽기도 하고! 이리 와, 언니가 껴안아줄게! 아니다, 내가 갈게! 우쭈쭈…”
“으앗, 하지 말아 주세요. 숨을 못 쉬…”
수빈인가, 저 초등학생의 이름은. 사실 초등학생은 아니긴 하지만 어느새 ‘초등학생 같은 고등학생’을 이렇게 줄여버렸으니.
소진 선배는 수빈을 꼭 껴안다가 풀어줬다. 수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정신을 잃은 듯이 엎어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지희는 한숨을 쉬고는,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하고 외쳤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내담자의 심리를 막 분석하고 꿰뚫어 보는 건 오히려 내담자를 당황시킬 뿐이에요. 그건 내담자도 바라지 않을 거라고요. 전 상담이라는 게 내담자와 상담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편안하게,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까부터 나를 가리키며 내담자라는 말을 계속 하는 것 같다. 상담을 받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일까.
어쨌든 소지희의 말은 확실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방금 전 나는 내 심리를 완전히 들킨 것 같아 당황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미 이 고민을 해결할 정답을 알고 있으니까…….


……어라? 정답을 알고 있다고? 내가?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지 알고 있다ㅡ는 생각이 든 까닭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소지희는 화를 내고 있었고, 선배는 살짝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왠지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걱정하고 있는데, 엎어져 있던 수빈이 깨어나서 말했다.
“저기, 탈무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이 사람은 자기가 만든 합성어를 대화에서도 쓰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로를 째려보던 두 사람은 시선을 돌리면서 각각 “정말?”,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말했다.
나는 드디어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졌다. 이 방은 왠지 나를 지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옆에 있던 가방을 메고…

“자, 그럼 우리 학생상담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소지희는, 그렇게 말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명에게는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은 3초간 지속된 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뭐라고?”
“가, 갑자기 무슨…….”
“…?!”
순서대로 선배, 수빈이라는 초등학생, 나다. 내게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입부하지 않겠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던 손에 힘이 빠져 다시 떨어뜨려 버렸다.
“아니, 뭐, 좋잖아요? 충격 요법이라고요, 충격 요법. 우리 동아리에는 여자가 많으니까요. 게다가 남자 부원이 있으면 남학생을 상담할 때 더 좋을 거고 말이죠.”
확실히 지금도 충격은 충격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남자 부원은 이미 있잖아.”
지희의 말에 선배가 그렇게 답했다. 나는 남자 부원이 있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아까 나온 저 상자 안에 또 다른 부원이 있는 건가?! 그때 지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부원은 아니죠. 1학년은 아직 정식으로 입부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학교는 전(前) 교장 선생님이 가꿔놓은 동아리 시스템에 따라 각 학생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동아리에 들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여자와 대화할 필요가 없는 동아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야구부에 들었는데, 들고 보니까 나는 운동을 정말 못하는 체질이었다. 야구부 부장님은 첫날 나의 체력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힘들면 굳이 나올 필요는 없단다.”
첫날부터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결국 야구부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그 날, 야구도 아닌 체력 훈련에서부터 지쳐버린 나는 둘째 날부터 야구부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서류상으로만 야구부인 거지.


동아리 활동은 우리 학교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나처럼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아무 동아리에나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학년은 입학한지 한 달이 지난 4월부터 입부할 수 있다.
아마도 1학년 중에 입부하기로 한 남자 애가 있는 듯하다.


“게다가 그것도 반은 협박이었잖아요. 그 무서운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 너 귀엽게 생겼구나. 우리 학생상담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안 들어오면… 알지?’하면 누가 안 들어오겠다고 하겠어요.”
아까 내게 지었던 미소를 생각했다. 그때도 뭔가 거부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강제적인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귀엽게 생겼었는걸. 아무튼 4월이 되면 그 남자 애도 입부할 테니 문제없잖아?”
“으,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살짝 고민을 하더니 소지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이 내담자, 2학년 애들 사이에서 유명한 ‘얼음왕자’잖아요? 분명히 홍보 효과도 있을 거예요.”
“윽!”
내가 정말 얼음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건가, 아까 그냥 놀리려고 지어낸 말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정말 부끄러워져서 숨고 싶어졌다.

“그래서, 입부할거야?”
소지희는 이렇게 물었다.
옆에 있던 선배도 “홍보 효과는 노려볼만 하겠군. 작년에는 다 합쳐서 4명이었으니까…….”하고 중얼거렸다. 뭐가 4명이었다는 거지?
선배는 다시금 강제적인 미소를 짓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우리 학생상담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안 들어오면… 알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소지희, 선배, 수빈을 차례대로 봤다.
이 동아리에 들어와도 나는 과연 제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으려나…….

이 동아리에 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기는 하다.
이 부실은 왠지 모르게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아까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게다가 여자와 말도 잘 못하는 내가 아무리 다른 남자 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있는 동아리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동아리에 들고 싶기도 하다.
선배의 강제적인 미소를 거절할 수 없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상담이라는 행위에 어쩐지 마음이 가는 것도 그 이유다. 충격 요법으로 내 고민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녀’와 닮은 소지희. 그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예.”
여전히 한 글자였지만, 확실한 의지를 담아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세 사람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뒤이어 수빈이 말했다.
“잘 부탁해, 얼음왕자.”
“윽!”
그 다음은 선배가 말했다.
“나도 잘 부탁해, 얼음왕자 후배.”
“앗!”
마지막으로 소지희가 말했다.
“내가 학생상담부의 부장이야. 열심히 활동하도록, 얼음왕자.”
“악!”
나는 ‘얼음왕자’ 3단 콤보를 맞은 뒤 너무나도 부끄러워져서 가방을 가지고 그 부실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문 밖에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말했다.
“재밌게 됐네.”
“완전 짜증나.”
역시 악마인 게 틀림없어!
“열심히 해봐, 얼음왕자 동생~”
“으으으으, 으아아아아!”
너무 부끄러워진 나는 소리치며 교문을 향해 달렸다.
“으아아아! 나는 얼음왕자가 아니야아!”

……이튿날, 그때 마침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하교하던 학생들과 남아 계시던 선생님들에 의해서 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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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챕터에 글을 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4기 때 한 번 글을 냈었죠.

그때는 제가 부족한 점이 어딘지 궁금해서 한 번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두 분의 지적을 듣고 그 글을 다시 읽어 보니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제게 부족한 점이 어딘지 궁금해서 한 번 글을 내봅니다.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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