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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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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반드시 너와 결혼하고 말겠어.
글쓴이: 로스나힐
작성일: 12-07-08 03:55 조회: 1,866 추천: 0 비추천: 0

Introduction.


0.


소년은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방바닥에는 소녀의 시체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도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한껏 긴장한다. 깊게 숨을 들이 쉰다.


벽을 더듬지도 않고 능숙하게 조명 스위치를 찾았지만, 누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잠시 스위치에서 손을 떼고 교복 셔츠 옷깃을 고친다. 누군가에게 보이기라도 하려는 것 같지만, 역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잠시 차림새를 가다듬는 데에 시간을 들인 소년은 단숨에 불을 켰다.


“잘 있었어?”


그 질문을 받아줄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 책상과 책장, 장롱 등 평범하게 학생의 방을 구성하는 가구 정도는 보이지만, 강아지나 고양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과를 보고하기 시작한다.


애써 미소 짓고 있는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단정하게 정리하려고 했지만, 먼지투성이인 셔츠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셔츠 안쪽에 유성 매직으로 쓰인 질 낮은 낙서들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그가 분명 돌아버려서 아무도 없는 방에 대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거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무도 없는 방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다. 말을 걸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매우 관용적인 수준까지 늘려보면,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냥 있기만 한 게 아니다. 즐비하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브로마이드다. 문이 있는 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면에 총 스물네 장의 그림이 가지런히 붙어있다. 색감이나 그림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여성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그 중 가장 희귀한 것은 살짝 색이 변한 A2 사이즈의 브로마이드로, 만화책 “RE: Vortex” 1권 초회 한정 부록이다.


총 23권으로 완결, 2013년에 시작되었으며, 2024년에 완결이 났다. 작품은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2017년 애니메이션화에 힘입어 인기작의 반열에 올랐다. 썩 질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팬들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수준의 게임이 세 번 발매되었으며, 캐릭터 상품 또한 다양하게 출시되었다.


책장 옆 장식장에 진열된 피규어 수만 보아도 얼마나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었는지 예상할 수 있다. 다양한 비율, 다양한 스케일, 다양한 퀄리티로 수십 종류. 이것이 모두 같은 캐릭터니 말이다.


그렇다. 소년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있다. 작품 내 메인 히로인 리아가 말이다. 물론 실제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지만, 그녀가 어떠한 식으로 대답할지 알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열렬한 팬.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단계. 광적인 수집과 파고들기가 동반되는 상태. 그보다 한층 더 깊은 곳에 도달한 이의 특권인 것이다.


“사랑해 리아.”


이쯤 되면 조금 무섭다.


그렇지만 소년도, 그림 속 리아도, 피규어 리아도, 모두 웃고 있으니…….



1.


일요일. 오전. 평소라면 더 누워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느 누가 감히 이벤트 한정 리아 사진집을 얻을 기회를 날려버릴까. 뭐, 어느 누구나라고 하는 건 주어 과잉이겠지만, 적어도 특정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이라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일이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간만에 컬렉션을 정리해 포스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이벤트를 준비하던 쪽에서 연락해 온 것이다.


사전 공지 없이 모니터링을 통해 참가자를 선정하여 진행하는 극비 이벤트. RE: Vortex에 대한 애정도가 극도로 높은 몇몇을 초대, 한정 상품의 전달과 간단한 식사, 후에 있을 프로젝트 등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런 설명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당연한 거다. 타이밍 좋게 포스팅을 한 것이 주최 측의 눈에 들었지만, 내용이 빈약했다면 초대되지 않았을 테니까. 나의 컬렉션은 그야말로 위압적이다.


포스터 14종, 코믹스 일반판 3질, 한정판 3질, 피규어 총 8종 전 종, 게임 1편 일반판, 한정판, 2편 일반판과 리아 커버 특전판, 배지, 열쇠고리, 다키마쿠라와 침대 시트, 폰 케이스 까지. 이외에 동인 상품이 잔뜩 있으나 굳이 세진 않겠다.


물론 관련 상품을 이보다 많이 모은 녀석도 있을 테다. 하지만 난 별로 RE: Vortex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리아다. 그뿐이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낯부끄럽다고 해도 별수 없다. 사실인걸.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초대되었는가가 걱정이다. 어중간하게 좋아하는 놈들도 있고, 진지하게 좋아하는 놈들도 있을 테지. 어느 쪽이건 내 입장에선 불쾌한 법이다. 전자는 예의가 없고, 후자는 위협적이다. 차라리 나 혼자 초대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당장 고민해도 하는 수 없다. 생각이 깊게 빠지는 것을 자제하고 입고 나갈 옷이나 고르고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리아 사진집 증정 이벤트 관련하여 확인차 연락 드렸습니다. 유 성하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일어나 계셨군요."


다소 경박한 목소리의 담당자다.


"오늘 오전 11시까지 R 타워 1305호실로 와주시면 됩니다. 로비에 안내 데스크에서 물어보시면 안내해 드릴 거고요."


비대칭으로 8:2 가르마.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뒷머리를 짧게 한 스타일에 염색은 하지 않았다. 목에 작은 십자가 장식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슈트를 타이트하게 입었기에 보이지는 않는다. 정장과 구두를 빼입은 건 물론 회사에서 지정한 복장인 탓도 있지만, 이미지를 중화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유의 능글능글함은 지울 수 없다. 오히려 복장이 너무 고급인 탓에, 말을 한 번만 섞어보면 본인의 경박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버릇 적으로 지금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어떠한 인간인지 상상해본다. 일방적인 추측이지만, 신기하게도 별로 빗나가는 경우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시간 늦지 않게 와주시고요.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는 저쪽에서 먼저 끊었다. 나름 예의 차린 것이 무시당한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바쁜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되도록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다.


***


R 타워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택시를 탔다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이지만, 금전적으로 여유가 너무 없어서…….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더니 하필이면 배차간격이 벌어진 구간이다.


시간은 넉넉히 잡고 나왔음에도 초조하다.


버스를 10여 분 넘게 기다린다고 해도 약속시각 30분 전에는 도착할 테지만, 기분이란 건 그렇게 합리적으로 굴러가질 않는다. 망할.


다행히도 버스는 예고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내릴 때까지는 열다섯 정거장을 지나야 하지만, 목적지인 R 타워는 한참 전부터 시야에 들어온다. 눈에 차고 넘칠 듯 거대한 국내 서브컬쳐 시장의 총본산. 성지. 무릇 덕질에 발을 한쪽이라도 들여놓았으면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장소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명된 서브컬쳐 시장을 급속도로 성장시킨 R 그룹이 만든 건물이기 때문이기도, 그 건물이 이제는 만화, 애니메이션, 장르 문학, 게임, 캐릭터 상품을 제작하는 업체들의 모선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50층 규모인 그 크기부터 어마어마한데, 사실 진짜는 로비를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인테리어다. 자사 작품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과 캐릭터를 최대한 활용한 오브제. 이벤트 참여를 위해 몇 번이나 왔던 장소지만, 들어설 때마다 솔직하게 감동하고 만다. 덕질의 이상향 같은 느낌이기에.


좀 더 둘러볼까 싶었지만, 예정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곧장 13층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벤트에 초청된 유 성하님 맞으십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여성 직원이 웃으며 맞이한다. RE: Vortex TVA 1기 팀 제복의 어레인지 버전을 입고 있다. 애초에 R 타워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미디어와 현실의 괴리감을 최대한 줄여 디자인된 제복이다. 작중에서는 리아가 디자인한 것으로 나온다.


"네. 맞는데요."

"죄송하게도 오늘 이벤트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런가요."

"오른쪽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45층으로 올라가 주시면 됩니다."

"45층이요?"

"예. 특별히 진행하는 이벤트이기 때문에, 주최 측의 요청으로 장소를 45층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오늘 몇 명이나 초대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이벤트 방침상 알려 드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45층이라니. 안내받은 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최상층에서 진행되는 이벤트는 여태껏 들은 적이 없다. 최상층은 최상층답게 R 그룹의 회장이나 그에 준하는 사람이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도착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색의 계단이었다. 단차는 매우 낮았다. 계단은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며, 끝에 있는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조차도 없었다. 향할 곳은 위쪽밖에 없었지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뭐 하나? 어서 올라오지 않고.]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흘러나올만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기에 순간 깜짝 놀랐다.


[모티브는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야. 물론, 노래를 따온 건 아니고, 어느 거품처럼 떠오르는 히어로가 나오는 작품을 살짝 베낀 거지. 색은 일부러 반전했지만, 솔직히 어떤 형상인지 잘 감이 안 와서 말이야. 대충 만들었지.]


내부 전체가 계단으로만 이루어진 건물 이야기가 떠올랐다.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거대 괴수가 등장해서 자네를 포로 만들어버리고 말걸.]


당연히 괴수 같은 건 나오지 않겠지만,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중년. 흰머리가 많이 보이지만, 따로 염색해서 가리진 않았다. 올백으로 넘기고, 진회색 정장을 입었다. 시계, 구두, 타이 등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최상위 브랜드. 전형적인 픽션에서의 보스 이미지. 하지만 감정이 차갑게 식어가는 단계이기에 자신이 몸에 걸친 것에서조차 느껴지는 것이 없다. 그냥 걸치던 것을 걸치고 있을 뿐이다. 티끌만큼이라도 흥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매우 협소한 범위로 파고들어 갈 필요가 있다. 세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런 상상을 하며 문을 열었으나, 보인 것은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2.


상대가 상상과는 다르더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많아 봐야 중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 중후한 목소리를 가졌다니.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하니, 다른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어서 오게."


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소년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움직임이 거의 없다. 표정 변화만이 어느 정도 눈에 띌 뿐이다. 저건 인형이고, 본인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분명하다. 무슨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인형은 TV에서나 나올법한 길고 긴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새하얀 식탁 위에는 그와 어울리는 음식이 그득했다. 디테일하게 조각이 들어가 있었지만 역시 새하얀 의자가 줄지어 있었다.


배경과 대조되어 눈이 아플 정도로 새카만 집사 복을 입은 남자가 의자를 빼어내며 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면 뭐 바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잠시만요. 이벤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직 사람들이 다 안 온 것 같은데."

"이벤트? 무슨 이벤트?"

"오늘 1305호실에서 11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이벤트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집사가 곧바로 설명한다.


"아, 아 그렇지. 그런 게 있었지. 신경 쓰지 말게. 그런 거 얘기하려고 이리 부른 게 아니니까."


그런 거라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벤트 장소가 변경된 것이 아니라 나만 이곳으로 불려 온 것이다. 이미 시간은 11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취소된 것이 아니라면 이미 이벤트는 진행 중이란 얘기다.


"어떤 일 때문에 이리 부르신 건진 모르겠지만, 괜찮다면 저는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은데요."


솔직한 심정. 하지만…….


생각해보면 보통 이런 경우는 더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을, 따로, 이런 곳에 부른다는 게 설마하니 감금이라도 할 생각은 아닐 테다. 이벤트 따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공치사를 하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갑자기 내가 거대한 음모의 중심이 되거나. 세계의 적이 나타났기 때문에 싸워야 할 사람으로서 나를 골랐다거나. 그럴 리는 없지만서도.


"그런 거 참여해서 뭐 하려고?"

"그런 거라뇨? 한정 아이템을 구할 좋은 기회 아닌가요."

"뭘 주기로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기껏해야 액세서리 정도일 텐데.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이벤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실걸?"


역시나. 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반응하는 건 얘기를 더 듣고 나서도 늦지 않을 것 같다.


"한정으로 제작된 액션 피규어였습니다."

"아, 그랬나? 그거 돈 들인 것치고는 나름 잘 나왔던데. 하여간 대충 만든 거니까 말이지. 게다가 리아도 없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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