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어느 마왕의 지침서
글쓴이: 푸른오징어
작성일: 12-07-07 04:38 조회: 3,462 추천: 0 비추천: 0

우선 두서없이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이어서 근본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놓아 보겠습니다. 자기소개를 잠깐 하자면, 저는 마왕입니다.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첫 문장만 읽고서 북북 찢어 버리려는 행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해서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래요, 이건 당신께서 지금 생각하시고 있는 것처럼 어설픈 서양국의 환상 소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한 중학교 2학년의 망상도 아니고요. 시간적 배경은 현대, 공간적 배경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요, 아직까지는 ‘예비’마왕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겠군요. 그쪽인 현재의 저에게는 더욱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소개를 좀 더 하자면 전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정확히는 1학년이지만, 두 달 후에 학년이 바뀌므로 그렇게 신경 쓰지는 맙시다. 그래요, 지금까지 17년이라는 짧은 것 같기도 하고 긴 것 같기도 한 세월을 살면서 어렴풋이 느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에게는 바로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제까지는 제 자신이 갖고 있는 포텐셜 에너지를 존재조차 모르고 지내왔지만, 아마 본격적으로 사용하기만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여자 유치원생의 팬티를 벗기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 겁니다. 잠깐만요. 방금 건 농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비록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한다구요!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애초에 편지라서 조용하긴 하지만요.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네요, 유감입니다. 그래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 이것이야말로 신이라 불리는 힘이에요. 하지만 전 신처럼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지 위해 힘을 쓰지 않아요. 오직 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부도덕한 짓이라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해도, 압도적인 제 힘으로 균형 같은 것은 파괴해 버릴 겁니다. 그야말로 마왕의 전지전능한 힘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정말 떨리네요.

그래요, 제가 왜 마왕인지를 설명해야겠군요. 사실 이것을 먼저 설명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제가 마왕인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입니다. 저는 책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야겠군요. 근데 문제는 너무 많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서 편지지에 남은 공간이 없네요, 유감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방과 후 옥상에서 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까지 계속.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여느 때와 다름없을 것 같았던 오늘 아침, 학교에 도착하니 이런 편지가 내 책상위에 놓여있었다. 정체를 모르는 의문의 편지. 사실, 이 편지를 처음 발견했을 땐, 분홍색 편지봉투에 하트 스티커까지 붙어있었기에 아주 잠시 동안만은 청춘의 한 획을 긋는 두근거리는 사건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인가 들떠서는, 하루 종일 수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채 헤실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 이 편지를 세절기에 넣고 갈아버렸으면 좋겠다. 일과 시간 내내 편지를 몰래 가방에 넣어놓고 방과 후에 교실에서 몰래 열어서 편지를 읽은 뒤의 실망감은 한국어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다.

중학교 시절 그럭저럭 무난한 학창생활을 보내왔다. 그리고 학업상의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집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보니 흔히 말하는 지역의 ‘텃세’라는 것에 잠깐 기가 눌리기도 했지만, 한 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한 명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도 이제는 이 학교에 적응했군, 이렇게 일 년도 다 보내는구나.’ 라는 마음으로 요즘에는 편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통수를 칠 줄을 몰랐다. 하느님도 무심하십니다. 제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드리는데.

혹시 이건 괴롭힘의 일종이 아닐까.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가짜 연애편지나 고백 편지로 순진한 남자애나 여자애를 불러내서, 비웃으면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거나, 괴롭히기까지 하는 장난이 있다는 것을. ‘이런 편지’를 연애편지라고 봐야 하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편지쯤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지도 않은 것에는 놀아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적으로도 이롭다. 만약 이것이 장난이라면 기분이 나쁠 테고, 만약 진짜라고 해도 이 경우에는 답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관심종자의 편지 같은 것은 차라리 염소 먹이로 주는 쪽이 생산적이겠지.

분명히 그럴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는 정말 한심한 븅신이 아닐 수가 없다.

혹시 오해할 것 같아서 일러두는데, 절대 편지에 쓴 내용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비일상적인 일이 멋있고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아니다.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 이세계인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사유는 빌어먹을 내 마음이 너무 소심해서이다.

난 괴로운 기억이 오래 가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별 하찮은 기억마저도 괴로운 기억으로 분류해버리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가 합해지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미묘하게 줄 정도의 멘탈을 가지게 된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볼까.

중학생 시절, 평소처럼 등굣길을 지나는 도중이었다. 마침 내 옆으로 차 한대가 지나갔고,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근처에 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 없나요?” 난 별 생각 하지 않고 이 길을 따라 내려가셔서 우회전 한 뒤. 첫 번째 샛길에서 우회전하라고 말해주었다. 내 초등학교의 위치였다. 여자는 고맙다고 말하며 차와 함께 사라졌다. 그로부터 2분을 더 걸은 뒤에, 갑자기 생각나버렸다.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샛길에서 우회전해야 했었다. 그 잘못에 나는 그 순간 괴로워했고, 아직까지도 이건 내게 트라우마 중 하나이다.

다른 예도 있다. 초등학생 시절, 나이 많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작은 슈퍼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하도 우리 동네에 슈퍼라곤 거기 하나밖에 없었기에, 나와 내 친구는 하굣길에 종종 그 슈퍼에 들르곤 했다. 하루는 모처럼 오천 원짜리가 생겨서 슈퍼에 간 날이었다. 친구와 나는 사탕 하나씩을 사 먹고 거스름돈으로 오천육백 원을 받았다. 할머니가 그만 천 원짜리 한 장을 더 주신 것이다. 내가 돌려드릴까 말까 망설이는 와중에 내 친구가 내 팔을 잡아끌었고. 그때 돈을 돌려드리지 못한 것이 아직도 후회스럽다. 참고로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더욱더 맘에 걸린다.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까지 계속.’


정말 기다린다면 어쩌지. 만약 내가 무시하고 갔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면 어쩌지. 그러다가 요즘같이 추운 날씨 때문에 감기 같은 거라도 걸려서 고생하면 어쩌지. 밤늦게까지 있다 돌아가는데 어두운 밤길 차에 치이면 어쩌지. 혹시 이 아이는 왕따인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면 어쩌지. 내가 나가지 않았다가 세상에 절망해서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지. 나 때문인가. 내가 잘못한 건가. 역시 만나러 가야 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온갖 생각들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벌떼처럼 휩쓸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런 마음고생 할 바에야 그냥 한 번 속아 넘어가 주고 쿨하게 넘어가자는 것이다. 애들이 놀리더라도 하하 웃으며 넘어가면 다음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이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좋은 윈윈 아니겠는가. 본연하고는 좀 다른 의미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어느새 옥상에 도착해버렸다. 옥상 철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이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조금 짓궂은 친구들의 재밌는 장난일까, 아니면 도움을 원하는 가여운 아이의 여린 손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만, 위의 두 가지 선택지 이외의 상황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설령 편지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중2병 같은 것이라던가……. 깊게 생각하지 말자. 닥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한다고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우선 무슨 일이든 마주한 다음의 일이다. 난 옥상 철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철문이 기기긱기기긱 거리며 열렸다. 곧바로 옥상의 녹색 인조잔디와 난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들의 장난도,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도 아닌 그냥 페이크 편지였다. 어깨로 숨을 쉴 정도로 허무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심정은 ‘시한폭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명종 시계더라’ 같은 느낌으로 안심되었다. 물론 그에 더불어 괜히 올라온 것 같은 허탈한 느낌은 남아 있었다. 나는 잔뜩 녹슬어서 쓸데없이 뻑뻑한 옥상 문을 닫고 다시 옥상에서 나왔다.

역시 시간 낭비였다. 와서 좋을 것 없었다. 아래층으로 계단을 한 칸 밟는다.

…….

하여간 이 성격을 빨리 고쳐야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아래층으로 계단을 두 칸 밟는다.

…….

빨리 가지 않으면 저녁 준비가 늦어질 거다. 아래층으로 계단을 세 칸 밟는다.

…….

저녁 찬거리는…어떻게…하지…. 위층으로 계단을 한 칸 밟는다.

………….

뭐로……해야……. 위층으로 계단을 두 칸 밟는다.

………….

음…………. 위층으로 계단을 세 칸 밟는다.

이런 젠장. 아무래도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계속해서 걸린다.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까지 계속.’


아아 이 빌어먹을 소심남. 이러니까 항상 고생만 하고 다니지. 부탁이란 부탁은 다 받아주었다가 당일까지 해결해주지 못해서 쓴 소리 들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Not only Yesman But Also Trouble' 줄여서 노이 뱃. 의미는 없다.

그래도 어쩌면. 내가 못 본 것 일수도 있으니까. 옥상에 올라가서, 한 번만 다시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번에도 없으면 진짜로 돌아간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간다. 바로 옥상을 나와 학교를 떠나서 집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옥상 문을 열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이 옥상의 인조 잔디 바닥과 낡은 스테인리스강 난간만이 보인다. 우선은 옥상의 한쪽 끝으로 이동한다. 전후좌우 확인완료. 이제 좌우를 확인하면서 앞으로 전진 한다. 옥상의 반대쪽 끝에서 전후좌우 다시 확인완료. 조사결과 아무것도 없음.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옥상 철문으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미친다. 옥상 위에는 더 높은 곳이 존재한다.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그 계단을 통하는 문의 위쪽에는 또 공간이 있다. 올라올 테면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철제 사다리 또한 딱 붙어 고정되어 있다.

사다리의 높이는 2층 높이. 올라가다가 잘못해서 떨어지면 사망 혹은 하반신 불구. 그런 리스크를 감안해서까지 찾아보아야 할까? 장난일지도 모르는 편지를 위해?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난 고소 공포증이다. 고소 공포증이라 놀이동산도 싫고 스키도 못타고 수영장에서도 미끄럼틀은 못 타는 남자. 그런 한심한 녀석이다.

다시 한 번 갈등의 기로에서 헤맨다. 정말로 올라가야 할까. 내가 올라가서 얻는 것? 물론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있다 해도 별 거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내가 지금 해야 할 행동이 사서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다시 되새긴다. 결론은 가치 없음 판별. 근데 왜 이 망할 다리는 이미 사다리를 밟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사다리는 오르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꼭 붙잡고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어렸을 때는 이정도 높이의 사다리는 많이 타봤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겁만 많아져 버린 것 같다. 사다리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잔뜩 맺힌다. 벌써부터 노화라니, 장래를 위해서는 실버타운이라도 알아봐야겠다.

다시 한 칸. 또 다시 한 칸. 서두르지 말자, 시간은 많으니까. 한 칸 한 칸 밟고 나니, 어느 새 나는 학교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사다리 위를 올라오느라 잔뜩 지쳐서, 힘겨운 숨을 내쉬며 바로 앞으로 엎어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옥상 위의 옥상에서 잠시 일어서 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학교 건물, 옆으로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교문 밖에는 주택, 시장, 상가, 역까지. 이 일대의 지형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만약 낚시더라도, 이런 풍경을 보게 해 준 것에 대해서는 그 편지의 주인에게 감사한다.

“와주셨군요. 정말 기쁩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풍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 내가 고개를 돌린 장소에 서 있는 사람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긴 흑발 생머리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우리 학교 학생임은 틀림없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매우 기뻐 보였고, 즐거운 것 같은 표정도 짓고 있었고,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무방비해서 위태위태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놀랐지만, 상대가 너무 예쁜 여자였기에 그만 더 놀라버렸다. 특이한 점이라곤 키가 150도 안 될 정도로 작아 보였다는 것. 귀여울 정도로 작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만큼이라면 아마 콤플렉스겠지. 내가 이런 저런 감상에 젖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 쪽에서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과연 제가 판단한 남자답군요. 세심함과 추리력을 겸비한 남자, 충분한 그릇을 갖고 있습니다.”

익숙한 말투. 방금 전 편지에서 읽은 그 말투이다. 이 말투와 편지 내용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대상을 보니 확실히 이 사람은 여자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사탄(데빌 킹), 마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쁘다는 말은 취소하지 않겠지만, 그거에 더해서 정상인은 아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완전체녀? 흑발 긴 생머리 말고는 얼굴도 몸도 너무 순해 보여서 마왕이라고 부를만한 특징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학교 교복이 원래 좀 다크다크해서 거기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좀 있었지만.

“혹시 저를 옥상으로 불러내셨나요?”

고개 한 번 끄덕. 계속해서 짓고 있는 생글생글한 미소. 금방이라도 ‘도를 아십니까.’하고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저에 대해서 아십니까? 죄송하지만 전 지금 당신을 처음 보았는걸요.”

동갑인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초면이라서 존댓말을 쓰게 된다. 게다가 상대방이 반말을 사용하지 않으니까. 이런 것은 맞춰줘야 하는 걸까. 어쨌든, 고개 한 번 끄덕.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 충실한 심복, 제니터가 아닙니까.”

이 여자 뭔가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우선은 일반인처럼 리액션을 취해본다.

“아니, 제 이름은 박준식…….”

“그렇지 않습니다. 제 심복은 Park Jun Sick이라는 나약한 이름이 아닙니다.”

어째서 이름에서부터 부정당하는 건데.

“그렇지 않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펠링 틀렸습니다.”

박 준이라는 사람이 아프다는 것 같잖아.

“그래요, Park……제니터 군. 당신은 제 충실한 심복입니다.”

방금 본명 말하려다가 고친 거 맞지? 아무래도 더 이야기할 가치는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난 여길 빠져나가겠다.

“죄송하지만 전 그런 쪽에 취미 없거든요. 실례지만 다른 사람 찾아보심이아아앗!”

“안 돼! 가지마! 이야기 좀 더 들어줘!”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어린애 같은 말투로 내 허리를 잡으며 안겨왔다. 그 충격으로 우리 둘은 같이 넘어졌다. 결과적으론 내 위로 그녀가 엎어진 꼴이 되었다.

“뭐하는 겁니까!”

“하, 하지만 제니터가 갑자기 가버리길래…….”

그러니까 제니터가 누구냐고. 그녀는 어느새 내 위에서 내려왔더니 울먹이기 시작한다.

“아파……무릎 까진 거 같아……힝…….”

무릎에서는 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까여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위화감 있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얼굴로 사탄이니 제니터니 중얼거린 사람 맞습니까. 설정에 충실하지 못하는군.

“좀 봐요. 얼마나 다쳤는지.”

내가 그녀의 무릎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녀의 다리 또한 예상보다도 작고 부드러워서 그만 놀라버렸다. 난 진정하고 가방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상처를 씻어야 해서 그런데, 스타킹 좀 벗길게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 한 번 끄덕. 난 스타킹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다리를 조금씩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어째선지 스타킹의 시작점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리 거의 끝까지 손을 올렸을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저, 혹시. 팬티스타킹 입으셨나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 한 번 끄덕.

“그, 그그, 그런 건 미리 말해주셨어야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특히 내 미래의 이력서가. 아아, 선이 보인다. 특히 붉은 선.

학교 옥상에서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는 여자의 치마 속에 손을 넣고 팬티스타킹을 벗기려는 혈기왕성한 남학생…….

현행범으로 잡혀간다면 변변한 변호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하고 검사와 함께 내게 형벌을 내릴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부탁이니까 팬티스타킹은 스스로 벗어주세요.”

“아, 으응…….”

자리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어서 팬티스타킹을 내리는 그녀의 모습을……아, 아니다. 난 아무 것도 못 봤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

“앗, 바닥이 차가워.”

제발 못 들은 것으로 하자. 아직 인생의 20%밖에 못살았는데 철창신세를 질 순 없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저기, 다 벗었는데.”

눈을 살며시 떴다. 아까 신고 있던 갈색 스타킹을 벗어낸 그녀의 다리는 흰색에 가까운 살색이었다. 게다가 가늘기까지 하니, 아마 팔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그 다리의 중간 부분에 살짝 올라온 무릎에서 작은 산수유 열매처럼 생긴 붉은 상처를 발견했다.

“그, 그럼. 일단 소독할게요.”

아까 꺼냈던 생수병의 물을 살살 흘려서 그녀의 상처까지 타고 가도록 부었다. 상처 위로 물이 통해서 가자 그녀는 얼굴을 조금씩 찡그리며 움찔거렸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온갖 고생은 다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은 좀 귀여워 보여서, 필요 이상으로 계속해서 나는 물을 바르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면서……위험하다. 이쪽에 눈 떠버릴 것 같다. 어느 새 반쯤 남아있던 물을 다 부은 뒤였다.

“연고 바를 테니까 가만히 있어주세요.”

가방에서 꺼낸 연고를 살짝 짜서 상처 부위에 문지른다. 흰색 연고와 상처가 섞여 옅은 딸기우유 색을 낸다. 문득 핥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진정 거기까지 간다면 일주일 쯤 뒤에는 결석 사유 증명서에 법정 출두라고 적어야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준비가 철저하군요, 제니터. 과연 심복답습니다.”

어째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지 처음의 말투가 되었다. 이제는 이런 말투까지도 애써 어른스러운 척을 해 보려는 것 같아 보여서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축구 때문에 그래요. 이번엔 밴드 붙일게요.”

정사각형의 밴드를 상처 부위에 붙인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다 끝났으니까 이제 스타킹 다시 신어도 돼요.”

“고맙습니다.”

그녀가 스타킹을 받아든다. 난 차마 시선 회피를 못하고 무심코 스타킹을 신는 모습을 바라본다. 처음에 오른쪽 발, 그 다음엔 왼쪽 발을 넣은 뒤, 조금씩 허리 위까지 끌어올린다. 근데…….

어째선지 방금, 묘한 색깔이 비친 것 같다. 착각이겠지. 아무리 이 사람이 이상하다고 그런 정신 나간 짓까지 할 리가…….

아니, 어쩌면 이 사람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물어보게 되었다. 남자로써의 섬세함 같은 것들은 이미 10분전부터 내 뇌세포 안에서는 본의 아니게 멸종해버린 것 같다.

“혹시……팬티는 입으셨나요?”

여기서 당장이라도 성추행 현행범으로 끌려가도 위화감 없을 말을 내뱉자. 잠시 동안의 깊은 침묵. 그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은 점점 빨개진다. 원래 피부가 하얘서 그런 건지 붉어진 느낌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내 고개 한 번 도리도리.

“봤……어?”

“아, 아아, 안 봤어요! 그보다 왜 안 입고 다니는 겁니까!”

살짝 본 것 같긴 하지만.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팬티스타킹 신었으니까, 팬티는 안 입는 게…….”

“대체 어디의 상식입니까!”

되도 않을 소리를 늘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이 여자는 절대로 뭔가 잘못 알고 있다. 잘도 이 꼴로 고등학교를 일 년이나 보낸 건가. 웜○의 랜덤 지뢰만큼이나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안 들키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충고하는데, 앞으로는 절대로 팬티 입고 다니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속바지도 입고. 여자애가 몸가짐이 대체 그게 뭡니까,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산타할아버지가 잡아갑니다?”

“제, 제니터의 눈이 무섭습니다. 마치 친모를 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 무! 튼! 내일부터는 팬티 무조건 입어요! 안 입으면 진짜 화내겠습니다!”

난 대체 왜 여기서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아이한테 팬티를 입으라며 화내고 있는가. 뜻은 신만이 아시겠지. 이젠 아무래도 좋다. 올 겨울 패션 아이템은 은발찌로 결정이다.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그, 그럼 내일부터 팬티를 입고 온다는 조건으로 내 심복이…….”

“네?”

“흐, 흑…….”

내가 화난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 대체 무엇으로 거래를 하려 드는 걸까.

“그, 그래도! 이건 양보할 수 없습니다! 원래 부탁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조건도 같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제니터가 내 심복이 되지 않는다면, 난 평생 팬티 안 입을 테니까!”

얘는 과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을까. 참고로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뱉어서 나중에 증거 자료로 쓰이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녹음은 해 두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서 이 대사를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습니까. 다 그쪽을 위해서 하는 소리인데 왜 그걸 들어주는 조건으로 새로운 조건이 붙어야 하는 건데요.”

“거짓말! 우리 엄마도 맨날 나 잘되라는 소리라고 하면서 이불 개라던가, 방 청소 하라던가, 스타킹은 똑바로 벗어서 세탁바구니에 넣으라고 하는걸! 사실 자기가 귀찮아서 그러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아주 논리왕이 따로 없군.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초딩이다. 외관으로나 내면으로나 완전히 초딩이다. 나이 많은 초딩. 초딩에게 고등학교 교복을 입혀 놓으면 이런 느낌이겠지.

“지, 진심이니까! 내 심복이 되어준다면 매일마다 어떤 팬티 입었는지도 보여줄게!”

이미 다른 의미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대로 그녀를 방치하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해질 것 같았다. 혹시 이대로 계속 팬티를 안 입고 다니다가 밤에 괴한이라도 만나면…….

‘흐흐, 아가씨. 밤길을 혼자 다니면 위험하지.’

‘사, 살려주세요…….’

‘한 번 옷을 벗겨볼까……어이, 너 팬티 안 입고 있냐. 이거 완전히 변태 여자였구만. 그럼 나도 양심의 가책 없이 즐길 수 있겠군.’

‘아, 그게 아니라……저는……아, 안 돼…….’

어째서 떠오르는 전개는 야한 애니메이션의 내용인 거냐. 이런 내가 정말 싫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이런 전개가 아니더라도 결코 뒷맛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아,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저는 그쪽의 심복이 되고, 그쪽은 스타킹 안에 팬티를 입는 것으로.”

전후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누가 봐도 내가 변태인 것처럼 들리겠군. 지금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변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변태라는 시점에서 훌륭한 것은 물 건너갔지만.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야호! 신난다! 제니터 최고!”

감정변화가 궤도 엘리베이터 급이다.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방 뜨는 내 앞의 어린아이 동급생. 아니, 일단 임시로 가짜 마왕이라고 하자. 고등학교 1학년을 두 달 남긴 그 날, 나는 마왕의 부하 제 1호가 되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녹은 팥빙수처럼 우울한 색깔이었다.



마왕의 부하가 되기로 하는 말도 안 되는 계약이 치러진 지 얼마 지나서, 나는 가짜 마왕에게 물었다.

“무슨 마약을 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

“아, 말이 잘못 나왔네요. 어떻게 마왕이 될 생각을 하셨나요?”

“방금 심하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별 말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자. 어린애처럼 일일이 캐묻기나 하다니. 아, 가짜 마왕은 오히려 어린애 쪽에 가깝겠구나.

“그래요, 설명을 해 드리겠다고 했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을 봐 주세요.”

가짜 마왕은 두꺼운 책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두꺼운 것은 아니고, 적당히 예를 들자면 베○나르 ○르베르의 상○력 사전 정도랄까.

“소설책? 아니, 내용은 만화책이네요.”

“유감이지만 틀렸습니다. 이 책은 오직 저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책입니다. 짐에게 바쳐진 봉헌서입니다. 보험서가 아닙니다, 봉헌서입니다.”

보험서라고 말한 적 없는데.

“느닷없이 봉헌서라니 그렇게 말하시면 이쪽에 취미가 없는 저로써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집니다.”

어째 유로2012 경기를 네이○에서 전체 주요장면으로 요약해서 보는 느낌이다. 이쪽 속성에서의 하이라이트 헛소리만을 선별해서 듣는다고나 할까.

“일단 ‘봉헌서’라는 게 뭔지만 읽어 보게 해주세요.”

“보험서가 아닙니다, 봉헌서입니다.”

보험서라고 말한 적 없다니까. 가짜 마왕의 말은 적당히 무시하고 책을 펼쳤다. 책장을 휘릭휘릭 넘기면서 대략적으로 파악한 내용은, 마왕이 동료들을 모아 세계를 정복하는 내용이었다. 재미는 요즘 나오는 만화책들의 재미를 상중하로 나눈다면 중 수준. 시간을 내서 읽을 만큼은 아니고 시간이 남아돌 때 읽으면 적당히 흘려보내기 좋을 것 같다.

“어떻습니까. 막 감동이 밀려오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잃어버린 기억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가짜 마왕을 무시한 채 만화책의 장을 조금 유심히 보았다. 등장인물 중에서도 검은 긴 생머리의 여자아이는 가짜 마왕하고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10분 정도 시간을 들여 읽고 나서, 짧게 감상평을 이야기했다.

“재미없네요. 설마 이거 아직 연재하는 건 아니죠?”

“재미로 읽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가짜 마왕은 내 손에서 만화책을 뺏어갔다. 그리고는 만화책의 페이지 중 하나를 펼쳐서 가리켰다. 가짜 마왕의 손가락 끝에 위치한 것은 아까도 보면서 가짜 마왕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여기 이 마왕 캐릭터! 이건 어딜 봐도 이 몸이지 않습니까!”

이 무슨 신종 정신병인가. 아, 어쩌면 요즘 초등학생은 이런 걸지도.

“…….”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까! 여기 있는 인물은 아무리 봐도 이 몸이지 않습니까!”

“…….”

“그, 그러니까……거기 나오는……그게…….”

“…….”

“미안……제발 그만 쳐다봐 줘…….”

반응이 재밌어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을 생각도 했지만, 눈가가 점점 촉촉해지는 가짜 마왕이 불쌍해졌다.

“일단 그건 넘어가도록 할게요. 그럼 다른 질문, 왜 접니까?”

“그러니까, 그건…….”

“……?”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가짜 마왕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필이 꽂혔습니다. 훌륭한 부하의 필입니다. 정말로, 한눈에 반했습니다.”

한눈에 반했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이야. 고맙네요, 여자에게 그런 말 들어본 거 처음이에요. 기분이 썩 좋지만도 않네요.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마왕의 부하 제 1호로써 세계 정복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박준……제니터.”

안 익숙하면 제발 이름으로 불렀으면 좋겠다.

“아까부터 계속 제니터, 제니터 그러는데, 대체 제니터가 뭡니까?”

“서……설마 모르고 있던 것입니까?”

“모르고 자시고간에 설명을 안 해주시면 알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자기 기준에서만 판별하지 말라고.

“제니터는 직위명입니다. 인간들의 말로 말한다면 문지기 정도가 되겠군요.”

아니, 한국어는 세계 고용어가 아닌데. 애초에 제니터도 영어일 뿐이잖아.

“문지기……문지기인 겁니까.”

뭐랄까, 그거. 그냥 최하 말단이라는 거 아닌가. 마왕 관련된 소설을 읽으면 항상 문지기의 역할은 제일 먼저 당하거나,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거나, 혹은 아예 생략되어있는 존재다. 여기 이 마왕이란 사람은 날 겨우 문지기나 시키려고 그렇게 애쓴 건가.

“지금 겨우 문지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이, 설마요. 제 앞에 있는 게 겨우 마왕인데.”

“우와, 제니터는 사람을 비하하는 여러 방법을 알고 있군요.”

“비하라니요, 좀 얕잡아 봤을 뿐인걸요.”

“어, 어찌됐든! 제니터는 결코 아무에게나 내려주는 칭호가 아닙니다. 그 칭호의 무게는 마치 아버지의 부양의 의무와도 같습니다. 문지기는 마왕의 부하들 중에서 가장 먼저 용사와 조우하는 자, 제니터의 뒤에는 수많은 마왕의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 모두를 책임지는 자, 그것이 제니터인 것입니다.”

말은 좋네.

“아, 네네. 뭐 그러세요. 정말 신나네요.”

“마, 맘에 안 드는 겁니까?”

이번엔 시무룩해진 가짜 마왕. 슬슬 이 사람의 감정변화에도 적응되어간다. 이런 표정을 짓다가도 내가 괜찮다고 하면 다시 표정이 밝아지겠지.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책표지만 보고 책을 고르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일단 경험해 보면 나름대로 보람이 많겠죠.”

“그, 그렇죠! 역시 제니터는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표정이 환해진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아, 아앗! 벌써 시간이!”

가짜 마왕의 말에 나도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 새 시간은 6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수업이 5시에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시간이 지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6시 반이네요. 근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 엄마가 7시까지 안 들어오면 저녁 안 준다고 했는데!”

요즘에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고등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꽤나 놀랐다.

“그럼 제니터, 나머지는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늦으면 안 돼요!”

“잠깐만요, 만나는 시간과 장소는 정하고 가셔야 하는 게…….”

내가 따지기도 전에 가짜 마왕은 입으로 “카레~♪카~레♬”노래를 부르면서 사라졌다. 카레 좋아한다는 점까지도 정말 어린애 식성이다

“나도 돌아가도록 할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사다리로 다가갔다. 역시 사다리 위는 너무 무섭다. 설마 내일도 여기서 모이는 건 아니겠지.

오늘 K마트에서 굴비 세일하는데. 내가 갔을 때 아직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