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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마왕, 나와 협상하자!
글쓴이: 아카토
작성일: 12-07-05 15:52 조회: 1,588 추천: 0 비추천: 0


어젯밤에 내 안의 분노를 누르듯이 꾹꾹 눌러싼 짐을 가지고 충격적인 17살의 생일이 지난 다음날인 오늘, 나는 가출했다. 이유? 더 이상 이딴 집에선 못 살겠으니까 그러지 가출하는 이유가 그거 말고 뭐가 더 필요해. 커서 용사가 되라고? 이때까지 너를 키운 건 전부 너를 용사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그럼 나는 그저 너희들의 놀이감이였단거냐!'


분노의 발차기를 아까 나왔던 지옥같은 집 현관에 먹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나갔다. 주변의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 쪽을 향한다. 전부 무시하고 나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내 인생을 저런 기막힌 곳에서 더 보낼 수는 없다. 보통 가출은 밤이나 새벽에 하는 게 아니냐고 묻지만,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망할 부모가 없는 낮에 나가는 게 더 좋은 선택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계속 걸어가다 예전부터 다녔던 검술 훈련소에 들어갔다.


"케이른! 이 시간에 왠일이야? 그 짐은 뭐고?"


어렸을 때부터 단짝이었던 친구인 테커가 훈련 도중 나를 발견하더니 말을 걸었다.


"아, 이거? 가출하려고."

"아 그래..... 뭐?!"


그는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목검을 바닥으로 떨궜고, 바닥과 목검이 만나는 순간,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시끄럽게 뭐야, 훈련 할 거면 제대로 해. 칠칠맞게 검이나 떨어뜨리고."


목검을 주워서 그에게 돌려주려는 순간,


"바보야! 훈련에 집중하게 생겼냐! 친구가 가출하겠다는데!"

"어, 그게 뭐? 그거 심각한 일인가?"

"아니, 애가 무슨 소리야. 너 어디 다쳤냐? 어제까지 멀쩡했었잖아."


테커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열이라도 있나..하고 중얼거린다.


"그래. 어제 아침까지 난 멀쩡했지. 정확히 말하면 생일 파티까지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기막혀하는 그를 잠시 뒤로하고 훈련소 앞쪽을 바라봤다. 사실 8년정도 동안 같이 훈련했던 사부에게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거였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없는 듯 했다. 할 수 없이 테커한테 말하고 대신 전해달라 부탁해야할듯 하다.


"그래. 친구로서 너한테는 특별히 말해주마. 어제 생일 파티가 끝나고 나서, 우리 가족끼리 밤에 모이는 시간을 가졌어. 그 때 엄마가 검을 주며 이렇게 말했지. '너는 용사가 되어라.' 라고,"

"뭐? 용사? 지금 이 시대에 용사라고?"


풋, 하며 그가 비웃음을 지었다. 보라고, 망할 부모. 용사는 이미 몇 세기도 전에 멸망해버린 부족과 같다니깐? 그저 옛날 동화책에나마 겨우 자리를 잡고 사는 인종이라고.


"그래서? 그거 때문에 가출하는 거야?"

"어. 도저히 그 집에선 못 살겠다."

"그러네.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 용사가 될 친구... 풉."

"이 자식이.. 한 대 맞을래?"


들고 있던 그의 목검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테커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야.. 그거 내려 놔. 니가 휘두르는 거에 맞으면 최소한 피 보는 거 알잖아."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하긴, 주변에서 힘이 넘친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 편이지만. 자세를 다시 바로하고 목검을 테커에게 돌려줬다.


"그나저나 답이 없다. 이 시대에 용사라니. 뭐야, 너희 부모는 동화 매니아라도 되는 거야?"

"글게 말이다. 요즘 공주 잡아가는 바보 같은 마족이 어디 있다고."


정말이지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허탈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한 마족 사람이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인간과 마족은 격렬한 전쟁 끝에 타협을 했다는 말이 역사 시간에 배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전쟁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고, 다시 그런 짓을 시작하겠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나는 부모에게 용사가 되라고 강요받았던 거다. 정말.. 비참한 인생 아닌가.


"그래서? 어디라도 갈 데는 있는 거야?"

"아니, 딱히 없어. 그냥 그 집에서 나가면 어디라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럴 줄 알았다. 대책 없는 건 여전하니까. 우리 집에서라도 며칠 묵을래?"

"오오.. 그래도 되냐?"

"물론. 불쌍한 친구를 위해서라면야."


이런 친구를 뒀다는 사실이 신에게 감사했다. 이걸로 며칠 머물 장소는 어떻게든 해결했지만..


"그런데,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

"....."


앞날이 어둡다. 최소한 그런 거라도 생각하고 나올 걸 그랬나. 어제는 분노로 가득 찬 밤을 보냈기에 짐을 쌌다는 사실 이외에 막상 준비한 게 없는 실정이었다.


"용병이라도.. 할까?"

"....어울리긴 하겠네. 그런데 너, 실전 경험 없잖아? 그래도 되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인간과 마족이 타협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들과 산에는 사나운 짐승들과 인간과의 조우를 거부하는 마족들이 떠돌고 있어서 마을 게시판에는 용병 모집 문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예전보다 줄긴 했지만. 차라리 그런 거라도 하면 먹고 살 수는 있겠지.


"어? 너 허리에 차고 있는 그거, 뭐야? 검 같은데?"

"아, 이거? 어제 그 망할 엄마가 선물해준 거. 일단 쓸모는 있을 것 같아 챙겨놨어."

"헤에. 한번 구경해도 돼?"

"얼마든지."


테커는 내 허리에서 검을 빼간 뒤, 찬찬히 살펴봤다.


"오... 이거, 꽤나 좋은 검이잖아? 적어도 이 마을에선 보기 힘들어."

"그래? 확실히 쓸만하긴 하겠네."

"일단 우리 상점에는 없는 물건인데.. 어디 보자."


그는 검집을 약간 열어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잠깐, 이거. 귀족들 물건인데?!"

"뭐? 그럴 리가. 우리 가족들 중엔 그런 사람따위 없을텐데."

"봐, 여기. 홈이 파여있잖아.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지만, 저번에 아빠가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느니 뭐니 해서 대장장이에게 검 제작을 부탁했다고 했어."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그럼 뭐지, 엄마는 귀족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검이란게 그렇게 쉽게 넘겨주는 물건인가? 의문만 쌓여갔다.


"뭐, 자식 하나 용사 만들기 위해 별 노력을 다 했나보지. 그딴 건 상관없어. 이미 그 사람들은 내 부모가 아니야."

"매몰차네. 며칠 있다가 다시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싫다고. 나는 왕립 기사가 되기 위해 이때까지 열심히 수련하고, 살아온 거야. 그런데 나보고 시덥잖은 그런 용사 놀이나 하라고? 귤 까라 그래."


정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느낌이다. 차라리 나를 어디서 주워왔다면 그게 더 충격을 덜 받았을 정도로. 아,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앞길이 막막하다. 용병 짓만 하다가 기사가 됐다는 사람들도 있기야 하다만,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으로 그저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뭐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런 거 같은데. 한번 나가보자."


그렇게 테커와 같이 훈련소에서 나왔을 때, 광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까처럼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럴까 해서 하늘을 쳐다본 순간, 나도 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자리에서 돌이 돼버렸다.


"꺄아~~~ 도와주세요오오~~"


....뭐야 저 삼류 연극 같은 대사 처리는. 하지만, 더 이상 그건 삼류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 그 대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한 나라의 공주라는 엄청난 초호화 캐스팅이었으니.


"뭐.. 뭐야 저게!"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금발의 나부끼는 머리, 화려함을 자랑하듯이 펄럭거리는 드레스,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순백의 무언가. 그렇구나. 공주도 흰색 속옷을 좋아했구나....가 아니잖아! 저 여자 진짜 공주잖아!


"케이른, 저 사람.... 에이르 공주님 맞지?"

"....믿기지 않지만 그래보이는데."


입벌리고 바라보는 민중들 위에서 그저 계속 비명을 지르며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 잠깐... 공주 주위에 보이는 저 보라색 날개... 마족의 날개 아니었나? 그럼 뭐야, 이거 퍼포먼스인가? 공주가 직접 참여할 만큼의 화려한 공연이 있었나. 아니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하, 공주는 내가 납치해가겠다! 그럼 다들 잘 있으라고!"


공주를 잡고 날아다니던 날개 달린 마족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 저 멀리 평원쪽으로 사라져갔다. 잠시동안의 연극 같은 상황에 사람들은 그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공연이었을까?"


옆에서 테커가 아까의 멍한 얼굴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거였으면 좋겠는데."


응, 그렇네 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옛날이야기의 재현같았다. 광장을 둘러싸던 사람들도 웃음을 머금고 점점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평소와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다들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화려하게도 하네. 공주님 속옷까지 보일 정도로."

"그걸 본거냐. 그런 상황에도 눈이 그런 데로 잘도 굴러가나보다."

"아니.. 그냥 뭐, 순간적으로."

"참, 그러고 보니 너, 공주님 좋아한다 했었지?"


갑작스러운 테커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그의 입을 있는 힘껏 막으며 말했다.


"야!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2년 전쯤엔가, 우연히 공주를 길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저 심부름하러 온 거였지만, 고귀한 그녀의 모습에 뭐랄까, 한눈에 반해버린 그런 느낌을 받았고, 그걸 이 자식이 옆에서 보고 다음 날 꽤나 놀려대서 폭력으로 입을 막고 평생 비밀이라고 했었다. 너무 지나서 잊어버린걸까. 다시 기억나게 해주는 수밖에.


"야... 나... 죽엇...."


약간 손에 힘을 주자 그는 괴로운듯이 내 손을 툭툭 치며 항복의 의미를 전달했다. 이 녀석 남자 주제에 뭐 이리 약한거야. 그렇게 툴툴대며 손을 놓자, 나를 죽일셈이냐며 달려들었다.


"야!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실수라고는 해도 그것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건 좀 아니잖아!"

"아, 알았어. 알았어. 뭔 애가 그렇게 엄살이야."

"엄살 아니야. 진짜 죽는다고."

"알게 뭐야. 너야말로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된다고. 내가 끌려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알았어. 미안해."


공주를 좋아한다. 사모한다. 청혼한다. 등과 같은 공주에게 구애행위를 할 의사나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할 시에 나라에서 처벌한다. 그게 이 나라의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왜냐면, 공주의 아버지인 왕이 엄청난 딸바보라서. 저번에도 한 녀석이 술김에 그런 말을 거리에서 무심코 했다가 근처 경비병에게 잡혀갔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그 정도로 그런 말은 금기란 거다. 다시 훈련소로 돌아갈까 하고 뒤를 보자, 성 쪽 길에서 경비병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야, 저놈들. 설마 나 잡으려고 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저 먼 거리까지 들렸을려고."


그렇게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계속 우리 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런데.... 왜 점점 이쪽으로 오는 거냐.."

"....그러게. 뭔가 예감이 안 좋은데?"


도망가면 더 의심 받을 거 같아 그 자리에서 나와 테커는 멈춰 있었다. 그리고, 경비병들은 정확히 우리 둘 앞에서 멈췄다. 진짜 들린 거야? 그럼 나 이대로 잡혀가는거야?!


"흐음... 케이른 씨 맞습니까?"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에, 뭐야? 내 이름까지 어떻게 안 거야.


"네, 그렇습니다만..."

"맞게 찾아온 것 같군요. 국왕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저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장은 병사 2명을 불러 나의 양 팔을 잡고 끌어갔다. 잠깐, 뭐야. 모셔간다고 하지 않았어? 너희들은 이게 모셔가는거냐?


"케이른!"


끌려가는 나를 보고 손을 뻗으며 크게 소리치는 테커. 마치 헤어지는 연인과 같은 장면이다. 그래, 나를 그렇게나 걱정하는 거냐. 역시 너는 오랜 친구...


"너를 절대 잊지 않을게!"


...는 개뿔! 그냥 도망치냐! 아니 이게 뭐야아! 열심히 발버둥쳤지만 그저 앞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아...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 걸까.


* * *


"그래, 자네가 케이른인가?"

"네, 그렇습니다. 폐하."


가출을 하고 오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상냥한 아저씨들에게 끌려오니 지금은 국왕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를 차리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스펙타클한 전개야. 아니 그것보다 나 왜 여기 끌려온 거지. 정말 그 공주를 좋아한다는 말 때문에 그런 건가?


"생각보다 어리숙하게 생겼어. 우리 에이르한테는 맞지 않지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어쩔 수가 없군..."

"....."


...폐하? 그거 설마 혼잣말이라고 한건가요? 저한테 전부 들립니다만. 은근히 까는 것도 다 들리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일단 들리지 않는 척했다. 주변의 사람들도 그냥 자연스레 넘기는 듯 했다. 여러모로 암묵적인 룰이 판치는 나라다.

"그래, 자네가 왜 여기 오게 됐는지 알고 있는가?"

"....아니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발뺌하기로 했다. 아닐 수도 있잖아.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죽기 아니면 살기.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해도 발뺌하면 그만!


"그렇겠지. 일단 이것부터 봐주게."


그렇게 말하며 왕은 기사를 통해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밀봉은 이미 풀린 상태라 편지를 열고, 그 내용을 봤을 땐, 너무 황당해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폐하. 이건..."

"그 마왕이라는 자식이 멋대로 놔두고 간 거지. 우리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고 말이야."


...아무래도 그건 연극이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내용은 믿을 수 없다. 뭐? '케이른과 그의 누나 케르샤를 원정대로 삼아. 그 두 명 이외의 사람이 올 경우 네 딸의 뒤는 책임지지 못한다.'라고? 이건 무슨 말이지. 내가 읽어왔던 이야기에도 이렇게 자세하게 용사와 그의 동료를 집어내는 마왕은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제가 공주님을 구하러 가야된다는... 말씀이신지.."

"잘 이해했군. 그래. 자네는 지금부터 '용사'가 되는 거라네."


용사. 그 단어 하나만이 내 머릿속에 퍼져나갔다. 몇 시간 전까지 그렇게나 고대의 인종으로 취급했던 직업. 그리고 내가 가출한 결정적인 이유. 그것이 어제의 사건 이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고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도, 현실로.


"그 녀석은 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과 같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참히 내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해간 망할 자식이네. 자네가 어떻게든 그 녀석을 무참히 처리하고 에이르를 무사히 구출해주게나."


...마왕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이대로 내가 공주의 구출을 실패했을 경우 전쟁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아, 이젠 정말 모르겠다. 내가 용사가 돼버렸나 보다. 그리고 그 동료는 내 누나인 케르샤. 아마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 채 집 안에 틀어박혀 마법서만 죽도록 보고 있을 그 사람이 내 동료란다.

용사..동료..마왕..공주.. 현실과는 동떨어진 단어들이 계속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동화에선 어쨌더라. 이렇게 한 뒤 용사는 무사히 공주를 구출해 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


"그럼 폐하, 제가 공주를 구출해온다면, 저는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겁니까?"

"....내가 지금 환청을 들은 것 같다만. 누구와 결혼을 한다고 했나?"


아. 내가 무슨 소리를. 멘탈붕괴로 인한 말실수가 제대로 터져 나왔다. 딸바보인 사람 앞에서 공주와 결혼을 하겠다고? 사형 즉결심판이다. 대대손손 살아나질 못할 거다. 애초에 내가 죽으면 대대손손따위는 없겠지만.


"아닙니다. 잠시 마왕이 빙의된듯 하군요. 폐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꼭 공주를 구해 이곳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그래. 부탁하네. 믿을 건 자네뿐이야."


일단 그렇게 인사를 하고 궁을 나오려는 순간, 뒤쪽에서 다시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대를 편성하게. 저 얼빠진 놈이 일주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출격시키고."

"네, 알겠습니다. 폐하."


....믿고 있기는 개뿔. 완전 신용 안하고 있잖아. 게다가 저것도 혼잣말이랍시고 하는 거겠지 또. 흥, 이쪽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공주를 구해와봤자 남겨지는 건 내 피로일 뿐일거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공주를 잡아간 마왕과 협상해 공주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 동화 속에 나오는 정직한 용사? 헹, 그딴 게 어디 있어. 여긴 그 시대가 아니라고.


* * *


그렇게 왕궁을 나온 뒤,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집의 문은 여전히 파괴되어 있는 상태였고, 이제는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잊혀져갔다. 왠지 문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누나~ 방에 있어?"


누나의 방 앞에서 노크를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안 나오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열심히 마법서에 푹 빠져있는 상태일 거다. 할수없이 방 안의 자물쇠를 마법으로 풀었다. 누나가 내가 대답하지 않을 땐, 이 마법을 사용해서 들어오라며 저번에 특별히 알려준 거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아 금방 익히게 됐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니,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른, 여자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가 예의라고 언제나 말했잖니."

"했습니다만. 누나가 책에 빠져서 못들은 거라고 나도 언제나 말하잖아."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엄청 쿨하게 넘기는데. 그거 나보다 책이 더 소중하단 말 아니야?"

"아니야, 누나는 언제나 동생을 제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답니다."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방구석에 있는 의자를 갖고 와서 누나 옆에 앉아 보고 있는 책을 슬쩍 보았다. 무슨 지렁이가 막 기어다니는데 이런 걸 어떻게 읽는 지 알 수가 없다.


"이 책, 무슨 내용이야?"

"응, 이거? 순간이동에 관한 개념서."

"오, 순간이동?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그럼. 한 번 해볼게."


그렇게 말하고 누나는 약간의 주문을 외우더니 순식간에 서재 앞으로 이동했다. 신기하단 감정과 부럽다는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오오.. 역시 마법이란 거 편한 거구나.. 나도 배우고 싶어."

"아니야, 오히려 누나는 너처럼 힘으로 해결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고 다시 주문을 외우더니, 흔들의자로 돌아왔다. 아까까지 읽던 책이 사라진 걸 보니 서재에 꽂아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내 방에 있는 거라면 뭔가 할 말이 있나 보네?"

"응. 누나는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깐."


의자를 들썩거리며 방금 왕궁에서 있던 일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어제 사건으로 내가 가출하려는 것도 덤으로. 그러더니 누나는 잠시동안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응. 재밌어 보이네. 가끔은 밖에 나가보는 것도 좋겠지."

"에? 괜찮겠어, 누나? 여기서 마왕의 탑까지는 꽤 거리가 될텐데?"

"괜찮아. 동생이 원하는 일인데, 누나가 가끔씩 힘을 써야지. 언제 출발하는데?"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당장."

"그래? 그럼 10분 정도면 기다려 줄래?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

"오케이."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준비라.. 나도 어제 거의 다 마쳤지만 다시 한 번 방에 돌아가볼까. 이제 다신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는 곳이니.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서 내 방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아까와 다른 점은 없었지만, 마음가짐의 차이 때문일까. 왠지 내 방이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복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앞으로의 여정,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공주를 내 것으로 만든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거지?

아, 모르겠다. 복잡한 건 질색이니 일단 저질러나 보자. 그럼 뭐가 어떻게 되든지 하겠지.


"케이른! 준비 다 됐어!"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나. 몸을 일으켜 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있는 누나는.. 정말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저기.. 누나? 이런 복장이 어디 있었어?"

"글쎄? 나도 오늘 처음 보는 거야. 그래도, 이거 괜찮지 않아?"

"아니, 괜찮기야 한데..."


짙은 남색의 로브에 나무 지팡이. 후드 바깥쪽으로 나온 상아색 머리. 그리고, 평소에는 몰랐던 가슴 쪽이 매우 강조되어있다. 로브가 저렇게 음탕한 옷이었나. 평소에는 많이 껴입고 다니는 편이라 보통 이상 정도나 될 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로브 하나만 걸치니 더 강조되는 느낌이다.


"어라, 왠지 모르게 음흉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그럴 리가. 누나의 가슴이 꽤나 커 보인다고 누구도 생각 안했을거야."

"그래? 그럼, 자."


누나는 갑자기 양 손으로 강조된 부분을 올려받치더니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그렇게까지 내 여기가 탐난다면 한번쯤은.. 괜찮아."


...뭐라고오?! 옷이 사람 성격까지 바꾸는 건가? 내 누나가 이렇게까지 변태일 리가 없어!


"아니아니, 동생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난 그렇게 친누나의 가슴을 마구 만져대는 변태따위가 아니라고."

"음, 그래도 내가 읽은 책에는 세상 남자들은 다 늑대라고 들었는데, 아니야?"

"...아닌 것도 아니지만.."


도대체 마법서는 왜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가르치는거지. 얌전히 세상의 진리 같은 거나 가르쳐주라고. 그나저나 저 복장은 아무리 봐도 예전에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그것도 용사물이었을텐데. 잠깐, 설마?!


"케이른, 갑자기 어딜 그렇게 뛰어 가?"


다시 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옷장을 열었을 때,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과, 엄청난 좌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분명 어젯밤까지 없었을 갑옷이 있었다. 그것도, 엄마가 읽어준 동화책에 나왔던, 그 용사의.


"젠장, 이게 무슨 짓이야..."


분명 그 망할 부모가 넣어놓고 간 거겠지. 마치 이건, 오늘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는 거 같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케이른, 왜 그래? 어머, 그 갑옷은..."

"어. 아무래도 용사 전용이겠지. 한번 입으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벗지도 않는 그런 갑옷."

"누나는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입어봐."

"그래.. 어차피 나도 지금은 용사니까.."


용사의 갑옷을 장착했다! 라는 효과음 따위가 어디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런 게 있다면 벌써 누나를 동료로 얻었을 때 나왔겠지. 갑옷을 입었다 해도 정의감이나 힘이 막 넘쳐흐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빨리 이걸 벗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우리, 정말 동화에 나오는 용사와 마법사같네. 그럼 다른 동료들은 없는 걸까?"

"음.. 일단, 그 편지에는 누나와만 같이 오랬으니 딱히 필요 없겠지. 게다가 우리 둘이서도 탑까지 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


내 힘이랑 누나의 마법이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케이른! 왜 우리 집 문이 이렇게 무참히 부서져 있는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무시하자. 내가 부순 게 아니야. 내 발이 부순 거지. 사실에 대해 계속 추궁하는 누나의 팔을 잡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성문이 눈에 보였다. 경비병들에게 사정을 말하자, 바로 문을 열어줬다. 아, 이제 이 문을 나가면 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 그럼 잘 있어라. 그 동안 날 키워줬던 마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나와 누나는 성문 밖으로 향했다.


* * *


갖고 나온 짐에서 지도를 꺼냈다. 여기서 마왕의 탑까지는 대략 걸어서 10시간정도 걸린다고 스쳐지나가는 길에 들은 기억도 있듯이, 확실히 보통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소에 입지도 않는 갑옷까지 걸치고 있으니 한발 한발 걸어가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아... 누나..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왜 그래, 케이른. 언제부터 누나보다 체력이 약해진거니."

"아니.. 이 갑옷.. 너무 무거워.."


옛날 용사나 지금 기사들은 이런 걸 입고 생활하는구나.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런 거 10시간 정도 입고 걸어가다간 사망하겠는데.


"음.. 그럼 이러면 어때?"


그렇게 말하고 누나는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그 모습이 너무나 마법사 같아 눈이 약간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주문을 마쳤을 땐, 갑옷의 무게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 뭐야? 이거, 하나도 안 무거워!"

"다행이네. 제대로 된 것 같아서."

"마법이야, 이것도? 와아.. 나도 가르쳐줘!"

"너한테 가르치려면 1달도 넘게 걸릴 거야. 저번에 자물쇠 푸는 마법도 20일이나 걸려서 겨우 배운거잖니."


하긴.. 나는 선천적으로 마법에 소질이 없나보다. 그나저나 정말 마법이란 거 좋은 거 아닐까. 나도 차라리 검술 따위 내팽겨치고 마법이나 배울 걸 그랬다. 왠지 모르게 인생이 후회스러워지는 느낌.


"그나저나, 케이른 너는 마왕의 탑에 가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옛날이야기처럼 마왕을 쓰러뜨리고 공주를 구출할 거니?"


아아. 그쪽 얘기인가. 생각해보니 그 쪽에 관한 건 말 안하고 넘어갔던 것 같다.


"아니. 마왕과 협상해서 공주를 내 것으로 만들 셈인데?"

"....뭐?"


누나가 매우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놀랄 만도 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용사 따위 없었을 테니까! 괜찮잖아. 이런 프론티어 정신. 개척자라니깐.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 마왕과 무슨 수로 협상을 할건데?"

"음.. 글쎄? 가서 어찌저찌 이야기하면 풀리지 않을까?"

"그래. 그건 어찌됐든 좋아. 넘어갈게. 그런데, 공주님을 네 것으로 만들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거네?"

"당연하지. 뭘 묻는 거야. 난 이미 마음속으로 작별인사까지 했다고."

"왜 빨리 말 안 한 거야! 이 바보 같은 동생!"


우와.. 누나가 처음으로 나한테 바보라고 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해진다.


"어떡해... 내 마법서들.. 우리 집..."


누나가 안절부절하며 뒤의 성을 바라봤다. 역시, 나보다 책들이 더 중요하다 이거지?


"그렇게 책이 중요하다면 지금이라도 가져오던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동생을 중요시하지 않는 누나 따위 필요 없다. 차라리 나 혼자서라도 갈 테다. 그렇게 마음먹고 누나를 뒤로 한 채,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약간 거리가 벌어졌을때 쯤,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에 그만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으... 컥.. 뭐야 갑자기 이건.."


고통스럽다. 아까의 갑옷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무게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앞으로 가려해도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케이른?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으.. 모르겠어.. 나도.....어라?"


누나가 다가오자 아까의 고통이 언제 있었냐는 듯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왜 그럴까. 아까 마법이 잘못 걸린 걸까.."

"아니, 지금은 괜찮아.. 괜찮아졌어."


걱정하고 있는 누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뭐가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나를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될 듯하다. 그래서 그런 고통이 생긴 거니까. 그걸 누나에게 말하자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치며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그 동화에 있었던 내용이잖아!"

"응? 어떤 거?"

"그 내용 기억 나. '용사는 동료를 버려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용사는 자신의 동료들을 지켜야한다.' 라고 주인공이 독백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뭐? 그러면 내가 동료들을 버리고 가거나 하면 이 갑옷이 벌을 내리는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설마. 그럼 이 갑옷이 그 동화에 나오는 용사가 썼던 갑옷이라고?"

"아무래도 그런 거 아닐까? 한번 실험해보자!"


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봐. 호기심은 아주 하늘을 찌른다. 누나의 말대로 다시 한 번 멀어져봤다. 그리고 역시 아까와 비슷한 거리에서 그 격렬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윽..아무래도..맞는 것 같네.."


뭐야 이게. 이런 불공평한 게 어디 있어! 그럼 옛날 용사는 무슨 솔플따위도 안 하고 지낸 거야? 동료동료 거리면서 붙어 다니는 이유가 이런 거였냐고!


"신기하다..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젠 슬슬 못 참겠으니까 빨리 이쪽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아,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동생이 아퍼하는 걸 잊어버리지 마! 그건 그거대로 상처라고. 후우... 어쨌든 이 이상한 갑옷의 정체는 알았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게 있는 거지.


"그럼, 동생이 맘에 안들 때, 약간 멀어지기만 하면 되려나."

"그런 무서운 말 서슴없이 하지 말라고! 정말 내 누나 맞는 거야?!"


내가 아는 누나는 이런 성격이 아니란 말이야.. 설마, 정말 옷의 영향이라도 받은 거 아닐까?


"누나, 그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가 어떤 성격이었지?"

"음.. 아마 주인공에게 까칠하지만 상냥하고 자신의 길을 관철해나가는 멋진 여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인공에게 까칠한 성격만 영향을 받았나 보다. 아니, 몸매에도 영향을 받았을까. 그렇게 말하니 다시 눈이 그 부분으로 향했다. 어이, 정신 차려. 나! 누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지 말라고! 아니, 그 용사가 변태여서 그 영향을 받는 걸 수도..


"하아.. 어쨌든 빨리 가자. 이제 해가 점점 기울어져 가. 이대론 오늘 안에 탑까지 도착하긴 무리겠어."

"그래. 그래도 꽤나 재미있는 여행이네. 바깥세상은 언제나 이런거였으려나."

"언제나 안 이래. 누나가 자주 밖을 안 나가니까 모르는 거지."


누나와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걸어가다 문득 뒤를 바라보니 아직도 성이 보인다. 시간은 많이 지난 것 같아도 별로 진전은 없다. 이래가지고선 정말 안 되겠는데. 아, 맞다.


"누나, 그.. 순간이동 쓸 수 있어?"

"순간이동? 갑자기 왜?"

"그걸로 마왕의 탑까지 바로 갈 수 없을까?"


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그건 안 돼. 순간이동은 내 눈에 보이는 정도로만 이동이 가능하다고 책에 쓰여 있었거든."

"그럼, 눈에 보이는 정도로 휙휙 여러 번 가면 안 되는 거야?"

"그랬다간 탑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나는 쓰러지고 만답니다. 이래뵈도 마법이 체력을 많이 쓰는 거라서."


왠지 무리일 것 같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다른 방법은 없나.


"아! 순간이동은 무리지만,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

"어? 뭔데?"

"우리 다리가 빨라지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고 누나가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다 마치고 나니 눈에 띄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누나, 무슨 마법을 건 거야?"

"느끼는 게 더 빠를 거야. 케이른, 한번 뛰어가볼래?"


누나의 말대로 한번 달려가 봤다. 그런데, 평소보다 4~5배는 빨라진 느낌이 든다! 우오아아아 뭐야 이거 너무 빨라! 계속 이렇게 달리다가는 하늘까지 날아갈 수 있을 정도야!


"어때, 케이른? 괜찮아?"

"어? 뭐라고?! 잘 안 들려!"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와 벌어진 거리 때문에 누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벌어진 거리? 그걸 눈치 챘을 땐, 이미 몸 곳곳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케이른?! 무슨 일이야!"


으아, 난 아무래도 바보인가 보다. 아까까지 그렇게 경계하던 거리 유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으으.. 나란 놈. 멍청한 놈.


"왜 그래? 아아, 그거 때문이구나."


누나도 나한테까지 와서야 알았는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내 몸을 쓰다듬어줬다.


"으윽, 어쨌든 효과는 확실한 거 같아. 이대로 계속 뛰어가면 30분도 안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나한테도 마법을 걸고.. 자, 이제 천천히 걸어가볼까."

"오케, 전속력으로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아까와 같은 스피드로 뛰어갔다. 뒤를 바라보니 누나가 따라오...질 않네. 어라? 그럼 뭐야, 나 지금...


"아아아악!!"

"케이른! 천천히 걸어가자고 했잖아!"

"못.. 들었어... 그런 거.."


정말 누나가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우여곡절 끝에 마왕의 탑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맹수들이나 마족들이 나타났을 땐, 그저 누나의 손을 잡고 뛰어가기만 하면 그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한 채 녀석들은 그냥 앉아서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완벽한 전투 스킵(skip)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래도 괜찮을까? 이런 곳은 경험을 충분히 쌓아가지고 오는 게..."

"그건 마왕을 때려잡을 때나 그러는 거지! 나는 협상하러 온 거니 괜찮아. 옛날에도 사신(使臣)들은 죽이지 않는다 했잖아."

"너는 도대체 무슨 시대를 보고 온 거니.."


탑에 도착해서 천천히 윗층을 향해 걸어갔다. 무수히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건 꽤나 힘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몸이 무거워지고 속도도 아까같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여기는 마법이 통하지 않나봐. 갑옷이 다시 무거워졌어."

"그래? 신기한 곳도 있구나."


마왕의 탑이라 그런 건가. 최종보스라는 느낌? 어찌됐든 계속 오르다보니 눈앞에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옆쪽의 뚫어진 틈으로 밖을 바라보니 꽤나 높이 올라온 듯하다.


"이 문을 열면.. 공주가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마 마왕도 옆에 있겠지. 조심해야 돼. 케이른."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한 상태로 문을 약간 열었다. 그랬더니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보야! 그 사람들이 오질 않잖아! 왜 이렇게 먼 데까지 끌고 오는 건데!"

"미안 미안, 날아오느라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어."


아침에 들었던 공주와 그 마족의 목소리다. 그런데 무슨 상황인거야. 오히려 공주 쪽이 더 화내고 있잖아?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그만 몸이 굳어졌다.


"어? 저기 문이 약간 열렸는데?"

"뭐하고 있어. 빨리 닫고 와! 에휴.. 왜 이렇게 후진 곳으로 데려와 가지고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어이. 네가 계획했던 일이잖아. 이 정도는 좀 참아주라고. 어라?"

"아..."


문의 벌어진 틈새로 그 마족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왠지, 엄청나게 불안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이야 이거,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네. 에이르! 우리가 원하던 손님들이 드디어 왔다."

"정말?! 어디어디? 와, 정말이네! 케르샤 언니!"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건,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에이르 공주의 모습과,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마족 남자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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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터넷사이트에서 올리고 있던 작품 1챕터에 한 번 올려봅니다.

부디 잘 읽어주시길.


p.s. 덧붙여 초반의 '지옥같은'은 붙여서 읽어주셔도 별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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