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달은 웃지 않는다.
글쓴이: 日月木
작성일: 12-02-15 23:44 조회: 4,958 추천: 0 비추천: 0

달은 웃지 않는다. (가제)

# 001

최근에 정신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털어 놓다가는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고, 부모님에게 상담을 하기엔 지금은 너무 먼 곳에 계신다.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시기 까지는 아직도 한 달이 남아 있다. 그 시간 동안 참고 견디기 보다는 눈을 꼭 감고 정신 병원에 갔다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지식인에게 물어볼까?’

컴퓨터를 보는 순간에 찰나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순식간에 머리를 흔들어 멀리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애당초 그 동네가 정말로 제대로 된 답을 내줄 수 있는 인간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다. 시간 많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뽐내거나, 사람을 골탕 먹일 요량으로 글을 써 대는 놈들의 집합소일 뿐이다.

하지만, 도서관을 가서 아무리 책을 찾아 봐도 지금 내게 처한 상황을 표현할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버렸다. 이는 크나 큰 손실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고등학교 입학식이다. 새로운 반에서 소수의 아는 얼굴과 다수의 모르는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그곳에서 피폐해진 모습으로 가서 타인에 의해 점수가 낮은 인간으로 평가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번 고등학교에서 진학하면서 만든 캐치프레이즈도 있지 않았던가?

활기차고, 명랑하며, 사랑스러운.

마지막이 무리수라는 판단이 들기도 했지만, 이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고등학교에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계획도 나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눈에 그늘을 진 상태로 교실에 들어갈 지도 몰라.”

얼굴 속의 보기 힘든 참혹한 꼴로 교실로 들어가게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유독 튀는 부분이 바로 눈이었다. 다크 서클이 짙게 낀 모습. 이대로는 연극부에서 전문 저승사자 배역으로 캐스팅할 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 다크 서클만 아니면 적어도 캐치프레이즈 중 활기와 명랑 정도는 먹어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다크 서클로 인해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두 개도 이미 사그라져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데는 한 달 전부터 시작한 꿈에 원인이 있었다.

꿈이라면 적어도 바로 일어난 직후에도 가물가물해야만 정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시작된 꿈은 꾸는 순간에도 일어날 때도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꿈은 꿈으로 끝나야 하는데, 일일연속극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A지검에서 끝난 꿈을 꾼 상태에서 다시 잠에 들고 보니, A지점에서 새로이 꿈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묘한 상태가 한 달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꿈이 조금이라도 즐거운 내용이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 최고의 아이돌이며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고 있는 최시영과 연애를 하는 꿈이었다면.

꿈을 깨고 싶지 않을 심정이었을 게다.

하나 이 꿈은 정말로 싫었다. 꿈속에서 나는 단순히 꿈에서 내가 되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관음증에 걸린 환자처럼 타인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더 웃기건 내가 그 타인의 몸에서 기생하는 감각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타인이 보는 시선에 따라 내가 보는 풍경도 달라지고 있었다.

그 타인은 남자였다. 어차피 기생하는 터라 스스로의 모습은 어떤지 잘 몰랐다. 그는 여자 아이와 여행을 하였다. 무작정 가는 길이었지만, 어디를 가든 시체가 널려 있었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말라비틀어진 좀비와 같은 모양새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남자와 여자 아이를 보면 기겁을 하고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남자는 검으로 사람들을 무참하게도 죽여 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남자의 시선을 통해 똑똑히 봤다.

첫 날에는 일어나자마자 구토를 하였고, 며칠간은 식욕이 없는 상태로 정신이 나가 있는 채로 가만히 있었다. 보름 정도가 되엇을 때는 시체를 봐도, 남자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며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도 잠을 자는 일은 괴로웠다. 꿈을 꾸게 되면 보기 싫은 장면들이 다시 나열되어서다.

그러다 보니 잠은 제대로 자는 상황인데도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들어서고,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대로는 정서적인 부분에서 크게 문제가 생길 거만 같았다. 이래 뵈도 나는 성장 중인 청소년이었고, 19세 영화로도 보기 힘든 잔혹한 장면을 수 백 번을 보는 데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외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꿈이면서도 스테레오가 어디서 맛이 갔는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분명히 여자 아이가 입술을 움직이고, 무기를 덤비는 상대도 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상황인데도 나는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데 스피커가 나오지 않는 상황과 진배 다를 바 없었다.

잔혹한 장면이 눈에 펼쳐지는 것과 별도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도 만만치 않게 짜증을 유발했다.

이런 저런 이유도 꿈은 내게 유해한 매체라는 점은 분명했다.

“진짜로 최시영하고 나하고 짝짜꿍을 하는 꿈이라면 최고인데 말야.”

최시영의 얼굴을 떠올린 다음에야 겨우 마음을 안정시킨 나는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TV 앞에 있는 게임기 앞에 다시 앉았다. 최근엔 게임만 하는 생활이 계속 되고 있었다. 꿈으로 인해 이미 나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집에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의 반 친구들이 이런 저런 반모임을 주최해면서 나를 몇 번이고 불러대고 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을 하는 상황이었다.

뭐, 사실 건강상의 이유는 맞았다. 다크 서클이 점령해버린 얼굴 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으니까 말이다.

그리고는 게임만 주구주창하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순간만이 현실을 잊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 순간 만큼은 꿈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기억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도피처로는 최적의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던 참이었다.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나는 게임을 잠시 멈추고, TV 화면에서 1초도 눈을 떼지도 않았던 시선을 문 쪽으로 향했다.

다시 딩동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누르다가 점차 빨라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차피 게임은 멈춰진 상태에다가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는 모두 내가 쓰고 있는 헤드셋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초인종을 신경질 날 정도로 누르고 있던 사람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즉,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상대는 교회 관계자이거나 그 외의 불청객인 가능성이 높았다. 손님일 확률도 미약할 정도로 있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해도 좋았다. 통계에 따르면 교회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았고, 괜히 대답을 하다가는 문 앞에서 진을 펼친 채로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한 번 문을 열고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관계자는 물을 얻어먹겠다고 말하면서 몸은 집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집이 좋네 마네 감평을 하면서 신을 믿어서 십일조를 내라고 장사를 하였다. 2시간 동안 큰 소리가 나지 않는 수준의 설전을 벌인 끝에 내쫓을 수는 있었지만, 이 일이 있을 뒤로는 약속이 된 사람이 아니라면 아예 대답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멈췄다.

이제야 다시 조용해진 상태에서 게임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래.

다시 게임이나 하자.

패드를 잡고 게임에 몰두하는 순간이었다.

콰광!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젠장 할.”

헤드셋을 벗고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예상보다 질긴 상대였다. 무슨 의도로 초인종을 누르는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프릴이 잔뜩 달린 흰 색의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였다.

특이하게도 트윈테일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기했지만, 그보다는 표정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에는 커다란 야구 방망이로 뒤로 젖혀져 있었다. 문을 두드리다 못해 이제는 아예 부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철제문을 부순다고?

‘아까 그 소리는 손으로 친 게 아니었어?’

찰나의 생각도 잠시였다. 이미 뒤로 젖혀진 야구 방망이는 반동과 함께 이미 앞으로 오고 있었다.

그렇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의 생각은 아주 잠깐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 전에 야구 방망이는 내 배를 가격하였다. 그나마 얼굴을 맞을 것을 소녀가 힘을 줘서 방향을 바꾼 덕이었다.

그래, 고마웠다.

소녀의 배려에 나름 감사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졌다고 해서 딱히 기절은 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소녀의 공격이 맛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꽤나 강력한 일격이었던 덕에 그대로 나는 나지막하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을 뿐이다. 차라리 비명을 질렀다면 아픔이 조금은 덜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배룰 움켜지고 있었다.

금발의 소녀는 내 모습을 보고 조금도 미안하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문이나 빨리 열어야지.”

지금까지 문을 열지 않았던 내 탓을 하면 소녀는 야구방망이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야구방망이에 맞은 배가 너무 아파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던 나는 이 황당한 방문객을 막지 못했다.

겨우 아픔이 진정된 다음에야 거실로 들어가자 소녀는 소파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안하무인과 다를 바 없는 행동에 나는 소녀 앞에 섰다.

자세히 보니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지만 딱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보다 외국인과 아무런 친분이 없는 내가 이런 소녀를 알 리도 없었다. 더구나 친척 중에는 외국인이 없을뿐더러,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면 부모님이 곤란하지 않겠어?”

소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돌아가셨어."

"……."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일수도 있지만, 부모님을 가지고 한 거짓말이라면 나중에 발각되었을 적에 혼을 내면 되는 일이다. 괜히 거짓말이라고 몰아 세우다가는 마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법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보호자 분은 계시지 않고?”

“괜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그 정도로 배려 있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아. 그렇지 않았다면 적어도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에 맨 발이라도 뛰쳐나왔을 거야.”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널 몰라. 집을 잘못 찾아 와놓고…….”

소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메랄드와 같은 눈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도 아주 조급 섞여 들어간 거 같기도 했다. 그 눈을 보자 내 말은 점점 사그라지다가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했다.

“너는 내 조력자야. 이미 그렇게 정해졌어. 아무 오래전부터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말이야.”

그 말에 나는 확신이 들었다.

이 얘는 분명 이상한 얘다.

그 때였다. 소녀의 손이 내 멱살을 잡아 당겼다. 나와 소녀의 얼굴 간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닿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의 코가 부딪힐 정도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부정하고 봤다.

“얼굴에 다 써져 있어. 이런 얘가 있냐는 식의 눈길! 내가 모를 거 같아.”

그리고는 나를 밀쳐냈다. 순간적인 힘이 어린 나이치고는 꽤 센지라 목이 아팠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나는 왠지 내 자신이 처량해진 느낌이었다.

‘꼬마에게까지 휘둘러야 하다니.’

소녀는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셔버렸다.

“내 이름은 셀레나야. 성은 아직 밝히고 싶지 않아. 네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몇 가지 없어. 나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조력자인 네 집을 찾았고, 너는 내 지시에 따라야만 해.”

“싫어. 아무 이유도 없이 널 왜 도와야 하는데.”

“정말로?”

“내가 조력자라는 증거도 없잖아.”

“있어. 네 이름을 알고 있거든.”

“내 이름을?”

“박문영, 맞지?”

셀레나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반대로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름을 맞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문패에 적혀 있다고.”

문패엔 아버지와 어머니에다가 내 이름까지 적혀 있다.

애당초 문패를 보고 이름을 맞추지 못한 사람은 있을 리가 없다.

“문패가 있었어?”

셀레나의 반문에 나는 한 숨을 쉬었다.

“경찰이나 부르겠어. 부모님이 정말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경찰의 보호를 받는 쪽이 낫겠어. 차라리 나도 네가 경찰에 인도되는 쪽이 더 좋고.”

일단 수화기를 듣고 112를 누르려고 했다.

셀레나가 다가와 수화기를 잡은 손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 마.”

울상 지은 모습에 순간 동정심이 생겼다. 여기엔 셀레나의 귀여운 외모에 한 몫을 하긴 했지만, 어느 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 저리 말한다면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동정심보다도 셀레나에게 휘둘리는 일은 이쪽에서 먼저 사절이었다.

버튼 1번을 두 번 누르고, 2번을 누르는 사이.

나는 아주 잠깐 셀레나의 얼굴을 스쳐봤다.

방금 전까지는 울상을 하고 있던 셀레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의문이 생겨 바로 2번을 누르지 못했다.

“꿈꾸고 있지 않아?”

직격탄이 날라 왔다.

셀레나의 손이 2번을 누르기 전의 손을 잡았다.

“꿈이라고?”

“최근엔 조금 힘들지 않았어. 꿈에서 본 관경 때문에 말이야. 하긴, 어느 누구라도 힘들 걸. 아무리 꿈이라도 한 달 내내 사람이 죽어서 썩거나 죽는 모습을 본다면 어느 누구라도 게임으로 도피하고 있는 심정일 거야.”

마치 지금의 내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셀레나의 방문. 이는 이상한 아이의 단순한 소행이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경고하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의심할 가치가 있었다.

“넌 누구지?”

셀레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해잖아, Selena라고. 어원은 달이라고 하던데. 뭐, 여기서만 통용할 이름이지만. 뭐, 어쨌든 한 가지만 제안하도록 할 게. 1년 동안 나를 도와주도록 해. 대신에 그 꿈을 꾸지 않도록 해주겠어.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야.”

나는 조금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만큼 한 달 내내 꾸어 온 그 꿈은 내게 지옥이 있었다. 언제까지 지속될 지도 모르는 그 끔찍할 꿈을 단번에 처리해준다면, 1년 동안 집에서 생활하는 일 정도는 간단히 허락해줄 수 있었다.

1년 정도는.

“계약 성립이야. 그러면 이젠 내 방은 어디로 하지?”

방은 남아돌았다. 집에는 방만 네 개가 있었고, 내 방 외에는 세 곳이 비어 있었다. 여행을 간 부모님의 방과 손님용으로 쓰는 방이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간 여동생 방이 비어 있어. 가구는 그대로 있으니까 그대로 쓰면 될 거야.”

이불 밖에 없는 손님용 방보다는 여동생 방이 더 나을 성 싶었다.

“유학 기간은 언제까지인데?”

“2년은 남았어.”

“충분하겠네. 방은 어느 쪽이지?”

방의 위치는 손으로 가리켰다.

셀레나는 여동생의 방으로 향해 갔다.

“잠깐만.”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

“당연히 많지.”

“나중에 하도록 해. 오늘은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거든.”

“일단, 너와 나의 계약으로 꿈을 꾸게 하지 않기로 해잖아. 그런데 그게 너 마음대로 되는 일이었어?”

비약한 상상일지도 모르나 셀레나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의 힘으로 내 머릿속에서 그 이상한 꿈이 한 달 내내 지속하게 되었고, 그걸 빌미로 계약을 하게 만든다는 시나리오. 나는 그 시나리오에 당한 희생자일 수도 있고.

“아니, 내가 하는 일이 아니야. 어쩌다가 그 꿈을 수신할 수 있는 인간이었을 뿐이지. 어차피 이젠 꿈을 수신하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오늘부터 그만 둘 예정이었어. 참고로 말하자면 이걸 한 사람은 내가 아냐. 애당초 내게는 그런 힘 따위는 없어. 조금 신기한 일은 할 수 있지만.”

셀레나의 말은 전부 믿기 어려웠다. 근거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은 수긍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분명히 셀레나는 평범과는 먼 목적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 목적에 조력자라는 이름으로 끼어들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인과 관계를 파악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셀레나는 하품을 하였다.

“이제 됐지. 오늘은 씻지 않고 자고 싶을 만큼 피곤하다고.”

“잠, 잠깐!”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셀레나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뭔데!”

나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딱 한 가지만 더 말할 게!”

셀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그게 뭔 데.”

“아무리 봐도 넌 나보다 어려 보이잖아. 적어도 넌 13세 정도는 되었을 거 아냐. 그런데도 나한테 반말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어?”

아주 사소한 부탁과 나름 논리 있는 말에 셀레나는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을 정도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 내 얼굴은 붉어졌다. 이토록 비웃음을 당할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적어도 나이가 어린 얘한테 반말을 들어서는 내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 체면 말이다.

“너 설마 뒤에서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모에라고 소리치면서 죽었던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적어도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한 말 같은데?”

능글맞은 셀레나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말했다.

“위계질서를 똑바로 하자는 한국 고유의 유교 문화를 따르자는 거야.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잖아.”

“그러면 네가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적어도 난 너하고 동갑이거든.”

뭐라고!

그 얼굴과 몸을 가지고 동갑이라니!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셀레나를 쳐다봤다.

“넌 외국 사람이잖아!”

“외국이 뭐 어때서!”

“외국은 원래 발육이 빠르다고! 너 정도면 중학생 3학년이 아니라 초등학생 3학년으로 보는 쪽이 더 맞을 거다. 그런 주제에 나하고 동갑이라고!”

셀레나는 분한 표정이 되었다. 내 말이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 말은 하나도 틀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셀레나는 외모적으로는 훌륭했다. 인형과 같은 귀여움은 말 그대로 어린 아이에게서 보이는 법이었다. 더구나 몸매도 일자이니 셀레나가 어리다는 증거는 확실히 되었다.

“꼴뚜기처럼 생긴 주제에 누구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발육부진인 거하고, 네가 꼴뚜기처럼 생긴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셀레나는 여동생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닫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젠 여동생의 방은 셀레나의 방으로 바꿔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어쨌든 1년 동안은 이곳에서 지내게 될 테니 말이다.

“1년?”

나는 1년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1년이라는 말이 유독 무겁게 느껴져서다. 나는 소파에 가 앉아서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려고 하는 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민을 하던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받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냐, 아들아!”

활기찬 목소리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 하와이에 계신다.

아버지는 백수이시고, 어머니야 주부시니 두 분은 자주 여행을 다니신다. 어차피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꽤나 많으니 평생 한량으로 지내며, 할아버지의 재산을 까먹으면서 평생을 살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시는 아버지였다.

“왜, 아버지도요.”

“집에 아무 일도 없지?”

아버지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어제 확인 했어요. 월세 빠진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마세요.”

할아버지의 재산 중에는 빌딩이 있었다. 아버지는 빌딩에 가게를 얻은 사람들이 세를 제대로 내는 지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전화하였다.

보통은 세가 오는 날을 기준으로 3일 이내로 오고하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뭐, 몰론 그거도 묻고 싶었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묘하게 우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따로 계세요.”

“그게 말이다. 할아버지의 형제가 얼마 전에 나타났다고 하더라.”

“예?”

할아버지는 6.25 전쟁 시절에 월남하였다. 가족은 모두 북쪽에 있어, 남쪽에서는 할아버지 혼자였다. 북쪽에 있던 가족은 정치범으로 몰려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적어도 할아버지에겐 형제가 한 명도 없는 상태였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할아버지가 우연히 독일에서 형제 상봉을 하셨다고 했지.”

기이한 일이었다. 아무리 형제라 하더라도 수 십 년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서로가 형제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에는 말이다.

“나로서는 괴이하지. 그 덕에 할아버지가 내게 맡긴 재산을 일부 옮기지도 모르고….”

결국 그랬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을 재산이 엉뚱한 데로 흘러갈 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아버지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위임한 상태였다. 명의 자체는 아예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형제가 나타난 이상, 재산 분할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아버지의 욕심은 정말로 끝이 없었다. 욕심 많은 아버지 밑에 나 같은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의문일 정도였다.

“어쨌든, 네 할아버지의 생각을 아직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네가 잘 처신하도록 해.”

갑자기 나온 으름장에 나는 영문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형제분이 이미 독일에서 일가를 이뤘는데, 이미 손자 손녀도 있는 모양이더라. 그 중의 한 명이 널 찾아 갈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어쩌면 그쪽에서 널 탐색할 의도일지도 모르지. 장차 할아버지의 친손자의 능력을 보고 재산을 빼돌릴 궁리를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는 무조건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해.”

“예, 예. 알겠습니다.”

겨우 말을 꺼낸 나는 아버지와의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셀레나가 들어간 방을 봤다. 여전히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미 잠에 들지도 모르고, 들어가서 성화를 내봤자 제대로 된 결과를 내기는 힘들 거 같았다.

“내일 처리하자.”

내 스스로도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까닭에 이상한 일은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일이다.

라는 마음으로 내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바로 잠에 들지는 못했다. 꿈에 대한 두려움과 셀레나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이 양 쪽에서 괴롭혔다.

그러다가 깊은 밤이 돼서야 나는 잠에 들었고, 그 끔찍한 꿈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잠에서 일어나자 셀레나는 식당에서 이미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냉장고에서 아무 재료나 꺼내 간단히 식사를 차린 것이었다. 양도 꽤 많았다. 한 3인분 정도가 사라졌다. 밥통은 텅 비어 있었고, 반찬도 비워져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앉은 셀레나를 봤다.

“내 밥은?”

셀레나는 턱을 까닥였다. 그곳에는 내가 슈퍼에서 사 뒀던 빵이 있었다. 나는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그 동안, 셀레나는 가만히 TV를 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TV 버튼을 껐다.

“무슨 짓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 마. 토하고 싶어지니까.”

“일단 여기에 앉아.”

거실 바닥에 앉은 나는 셀레나가 정면에 앉도록 했다. 셀레나가 자리에 앉자, 나는 어제 있었던 아버지와의 대화에 대해 말하였다.

셀레나는 쌈박하게 대답했다.

“내가 했어.”

예상했던 바였지만, 너무 쉽게 인정을 하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냐.”

“그게 어렵지 않다고?”

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거실로 다시 나왔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품 속에 커다란 책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책은 웬만한 책보다 넓고 두꺼웠다.

그 마법사들이 나오는 영화에서 나오는 커다란 책처럼 보였다.

“무슨 책이야?”

처음에 왔을 때는 아무런 짐이 없었던 셀레나가 어떻게 저 책을 가지고 있는 지는 잠시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었다.

“핸디캡.”

셀레나는 그 한 마디로 정리했다.

자리에 앉은 셀레나는 책을 펴서 훑어보더니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펼쳐진 책을 그대로 들어서 내게 보여 주었다.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느 나라 글자야?”

알파벳하고는 전혀 틀렸다.

어느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보이는 꼬부랑거리는 글씨였다. 도대체 이런 글씨를 어느 누가 쓰는 지도 짐작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못 읽어.”

“당연하지.”

“무식하기는.”

셀레나는 책을 도로 가져갔다.

“무식한 너 때문에 힘만 빼잖아.”

“그니까 그게 어느 나라 글자냐고!”

셀레나는 대답은 무시하고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러모로 핸디캡이 없으면 불편해. 다른 곳처럼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 여차여차 핑계를 댄 다음에 호적을 만들면 되는데, 여기는 그런 게 조금도 통하지 않거든. 더구나 이 나라에서는 나는 누가 봐도 외국인이잖아. 그래서 핸디캡이 필요했어. 이 핸디캡은 총 1283가지야. 모두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해. 대부분이 사소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번 경우처럼 유용한 것도 있어.”

“유용한 거라니? 할아버지의 형제를 만들어 내는 일?”

“딱히 만들지는 않았어. 최면을 걸었을 뿐이야. 여기서 필요한 핸디캡은 조력자의 가족에게 최면을 거는 일이지. 너는 조력자로 선택되었기에, 그 가족이 인정할 만한 적당한 신분을 만들었어. 할아버지의 과거를 조사하고, 그 과거에 맞춰서 만들어 낸 인물. 나는 그 인물의 손녀로 설정되었지.”

마법과 같은 일이 그리도 쉽게 일어나는 걸까? 저 책 한 권으로 말이다. 순간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몰론 호적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핸디캡이 있어. 이건 호적을 만들기 위한 최면과 조작이야.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필요한 부분을 쓰다 보니 9장이 소모되었어. 그거 치고는 꽤나 쓸모 있는 결과를 만들었지.”

“조력자의 가족에게 최면을 거는 일이라면, 조력자에게도 최면을 거는 일이 가능한 거지?”

“맞아.”

나는 한 숨을 쉬었다. 지금의 셀레나는 할아버지 형제의 손녀로 되어 있다. 나와는 먼 친척이 된다. 이토록 웃기고 어이가 없는 일이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셀레나의 조력자로서 이 이상한 상황을 뚫고 갈 자신이 있을까?

꿈을 없애버린 일을 치더라도 눈앞에는 여전히 깜깜한 일들만이 남아 있을 거 같았다.

나는 한 숨을 쉬었다.

“조력자의 가족에게 최면을 거는 핸디캡이라고 했지. 그러면 조력자에게 최면을 걸어도 된다는 것은 포함되지 않은 거야?”

“포함되어 있어. 조력자 및 가족들이라고 명시되어 있거든.”

“내게도 걸어 줘.”

내 말에 셀레나의 두 눈이 커졌다.

저건 무슨 반응일까?

놀라움, 당황 아니면…….

‘의외성?’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반응이든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셀레나는 책을 들고 일어났다.

“어디 가.”

“내 방으로 갈 거야. 조금은 피곤해서 쉬고 싶거든.”

“그 전에 최면을 걸어.”

“싫어.”

“조력자라도 걸어도 된다고 해잖아.”

“이미 넌 조력자로서 협력하기로 약속했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최면을 걸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이유도 알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몰라.”

라는 대답과 함께 셀레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셀레나의 현 반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최면을 걸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이상한 부분이었다. 차라리 셀레나의 입장에서도 내게 최면을 거는 쪽이 더 이익이었다. 지금의 내 심정도 그랬다. 최면에 걸리면 내 자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그녀를 배척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비일상을 대하는 마음도 그녀의 의도에 따라가게 된다. 또한, 그녀의 명령이라면 어떤 일도 해낼 지도 모른다.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조력자.

그걸 가지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가?

1년이라는 기한을 두지 않아도 될 만큼.

이해하기 힘든 셀레나의 반응과 달리 이 뒤로 나는 셀레나가 최면을 거는 일에 조금은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때는 나 외의 가족들이 모두가 그녀의 최면에 걸렸다는 생각에 심히 의기소침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나도 최면에 걸라는 말이 쉽게 나왔고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역시 최면에 걸리지 않는 쪽이 나았다.

최면에 걸린 나는 진정한 나 자신으로 볼 수 있을지나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걸리지 않은 쪽이 좋았다.

셀레나는 아침이면 쌩하니 나가고 저녁이면 들어왔다. 이곳에 온 모종의 일을 완수하기 왔다던 셀레나는 내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조력자로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하면, 셀레나는 지금은 아무 필요가 없다고 차갑게 말하곤 했다.

저녁이면 소파에 앉아 자기 전까지 TV만을 봤다.

주로 보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개그 쪽이었다. 옛날에 인기 있던 프로들을 보며 지금도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셀레나는 개그 코드가 확연히 틀린 건지 아예 웃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케이블로 재방송을 하는 개그 프로그램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내게 부탁을 해서 컴퓨터로 따로 개그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봤다.

셀레나의 이 이상한 행동에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1주일이 지났다.

입학식 전날, 일요일이었다. 어제도 반 얘들 몇 몇이 모임을 가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셀레나가 말하는 아주 사소한 핸디캡에 속하는 기분 나쁜 기억에 대한 정화를 받고 예전보다 꿈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 지금이라도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이 친구들과 만나는 일이 가능할 거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거절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입학식 때 두고 보자는 말을 들었다.

이 날에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셀레나는 아침 때 잠시 나갔다 들어오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셀레나의 말에 반응했다.

“누굴 찾았는데?”

“아, 아냐.”

셀레나는 황급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돼서 밥 먹으라고 말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셀레나는 불을 끈 채로 컴퓨터 앞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나는 키를 눌러 동영상을 정지시켰다.

“밥 먹어.”

“아, 어. 나중에 먹을래.”

셀레나는 저녁도 먹지 않았다.

늦은 밤이 되고 나는 슬슬 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셀레나가 타이밍 좋게 방에서 나오더니,

“배고파.”

라는 말을 꺼냈다.

“알아서 챙겨 먹어.”

“초콜릿하고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공교롭게도 지금은 없는 것들이었다.

“배고프면 밥이나 먹어. 군것질을 할 생각은 말고.”

“사다 줘.”

거울이 있다면 내 관자놀이가 튀어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갔다 와.”

“조력자잖아.”

방으로 들어가던 걸음이 멈췄다.

“조력자에 대한 첫 부탁이야. 들어 줘.”

“…… 알았어. 다음부턴 이런 부탁은 하지 마.”

“다음부터는 누나로서 부탁할 게.”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야밤중에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셀레나의 행동을 보면 어린 아이가 같았다.

“역시 나이는 거짓말인가.”

동갑이라고 했던 셀레나의 말을 떠올렸다.

이미 시간은 11시가 넘었기에 길은 자동적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도착해서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고르는 데, 뒤에서 등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같은 반이 되고 했던 소꿉친구인 강주하였다. 주하는 최근에 실연을 당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를 잘라 단발이 되었다. 실연 이후로 여러모로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오랜 만에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얼마 만이더라?”

“한 달은 넘었어. 그간 반 모임에 한 번도 안 나왔잖아.”

“병호한테 들었어?”

병호는 반 모임을 주도했던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주로 얘들한테 전화해 참석 여부를 물었다.

“직접 나갔으니까.”

의외였다. 주하는 내성적이고 노는 성격도 아닌지라 모임은 꺼려하는 편이었다. 쇼핑을 할 때도 친한 친구 한 둘 만나서 갈 뿐이다.

“의외라고 생각했어?”

“어, 그래.”

얼떨결에 대답하였다.

“네가 더 의외인데? 웬일로 초콜릿하고 아이스크림은 사는 거야.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가끔은 먹고 싶더라고.”

동거인이 먹고 싶어서 사려 왔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 아직 주하에게는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탓이다. 언제쯤이나 그 방법을 찾게 될까? 현 심정이라면 당장이라고 찾아서 내 몸에 부착하고 싶은데.

“몸은 다 나았고?”

“당연히 나왔지. 내일이면 입학식인데 몸이 좋지 않으면 안 되잖아.”

“거짓말.”

“응?”

“거짓말이잖아. 아저씨한테 얼마 전에 들었는데, 밖에 외출하지 못할 만큼 아픈 적은 없다고 하던데.”

“부모님에겐 말하지 않았거든. 혼자서 앓아 있던 거야.”

주하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부정을 하고 나서니 선뜻 반론은 펼치지 못했다. 조금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젠 됐어.”

라는 말과 함께 환한 표정으로 바꾼다.

“계산하고 나갈 거지?”

“그래야지.”

이젠 됐다는 주하의 말이 마음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예전에 주하를 좋아하던 시절에는 몰라도 지금에는 궁금해도 파고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주하의 관계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후일에도 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이젠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고, 주하 쪽에서도 굳이 제스처를 표현 할 이유가 없었다.

각자 계산을 마치고 나온 나와 주하는 잠시간 걸었다.

나와 주하는 아파트 단지가 같기 때문에 집에 가기까지의 경로는 대부분이 겹쳤다.

“내일은 입학식이네.”

“그렇지.”

“새로운 반과 친구들도 만나고.”

“넌 걱정 없을 거야. 워낙에 예쁘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일 테지. 남자들은 네게 구애를 할 테고, 여자들은 널 따라할 생각으로 말이야.”

“그런 사람들 싫어.”

“그래?”

주하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무심한 대응을 보이자 주하가 심통이 난 상태일수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사귀다가 헤어진 상대도 사실은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한 행동이고.

………망상도 그만해야겠다.

망상은 망상.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불쌍한 남자의 상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내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적어도 주하가 내게 여전히 관심이 있다면 고백했을 적에 이미 받아 들었지.

대화가 끊기다보니 어느새 망상에 빠지고 말았다.

스스로에게 자책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도달했다. 나와 주하의 집으로 가는 갈림길인 놀이터에 도착할 무렵, 익숙한 형상의 물체가 팔짱을 낀 채로 있었다.

그 물체의 정체는 셀레나였다.

“박문영!”

셀레나는 그대로 내게 달려와 드롭킥를 날렸다.

나는 그 순간 셀레나에게 골탕을 먹일 요량으로 일부러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 든 봉투를 위로 던졌다. 일부러 힘을 쥐어 높이 날아가도록.

이는 셀레나에게 내게 달려오는 순간부터 정해진 계획이었다.

드롭킥에 당해 넘어지면서 셀레나가 눈물을 흘릴 장면을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드롭킥을 하고 나서 재빨리 착지한 다음에 봉투를 잡아냈다.

놀라운 운동신경이었다.

“어, 어떻게!”

“너 정도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어.”

주하가 나와 셀레나의 촌극의 관객으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조금은 성난 목소리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셀레나를 소개했다.

“내 먼 친척이야.”

셀레나는 이미 초콜릿을 꺼내 입에 문 상태였다.

빠르기도 하지.

“먼 친척이라고? 친척은 한 명도 없는 거 아니었어.”

“얼마 전에 생겼어.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형제를 독일에서 찾았다고 했거든. 이 얘는 셀레나라고 그 잃어버린 형제분의 손녀야.”

“아, 그래서 먼 친척이구나.”

주하는 납득을 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편의점에서의 일을 떠올렸는지 다시 날 노려봤다.

“역시 거짓말이잖아.”

“기, 기억했어?”

“이상했어. 단 걸 좋아하지도 않은 얘가 갑자기 초콜릿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다니.”

“그거야.”

주하는 울상을 짓더니 그대로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초콜릿 하나를 먹어치우고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한 셀레나가 말했다.

“쟤, 너 좋아하는 거 아냐.”

“거짓말로 화내는 거 가지고 무슨.”

나는 단번에 일축했다.

월광 고등학교의 교복은 체크무늬 바지에 남색 재킷의 복장이었다. 여자도 비슷했다. 이 비슷한 옷차림의 학생들이 모인 입학식이 거행되었고, 식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다. 교장도 길게 오래 얘기를 하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식 도중에 사람의 기분을 나쁜 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지금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학생회장 최태관이었다. 앞으로 내가 다니게 된 월광 고등학교의 회장인 최태관은 문무겸비의 인재로 알려져 있었다. 엄마 친구의 아들이기도 해서, 내게는 그 원망스러운 엄친아이기도 했다.

이 엄친아가 주하의 예전 남자친구였다. 들려오는 소문도 하나같이 호의적이었다. 외모 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편이라는 평가가 많아서, 여자들은 최태관이 언제 연예계에 진출할 지에 대해 서로 내기를 하고 있을 정도라 했다.

그래서 주하와 커플이 되었을 적에는 남자와 여자 가릴 것도 없이 질투에 휩싸이던 시기가 있었다. 주하는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최태관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보면 어느 쪽이든 인정하게 되었다. 주하와 최태관. 미관상으로 보면 어울리는 한 짝이었으니까.

이와 반대로 내가 주하의 짝이 되었다면, 남자들의 등쌀에 꽤나 시달렸을 지도 모른다. 최태관과 커플이 되기 전에는 소꿉친구인 나와 자주 커플이라는 소문이 들었는데, 그 소문으로만 내게 달려드는 얘들이 꽤나 있을 정도였다. 그 덕에 중학교 시절에는 싸움 실력을 좀 올리게 되었다.

교실에 가니 병호나 주하를 비롯해 몇 몇 아는 얼굴이 보였다.

주하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병호가 주하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정작 일은 다음 날에 터졌다.

입학식에 미처 참가하지 못한 새로운 학생이 반에 들어온 것이다.

“셀레나!”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고 말았다.

담임이 내게 물었다.

“왜 놀라서 일어났지?”

자리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긴 전학생이 친척이라면 놀라만 하지 않겠어.”

그 말에 반 학생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셀레나는 언뜻 보면 주하 이상의 클래스다. 주하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희소성의 가치를 보면 셀레나의 손을 들게 될 마련이다.

적어도 셀레나는 보기 힘든 금발의 미소녀이니까.

셀레나는 바로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주하가 아침에 앉으려고 하다가 포기한 곳이었다.

나는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