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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별밤을 헤매는 마법사
글쓴이: Tiff
작성일: 12-02-10 21:21 조회: 2,721 추천: 0 비추천: 0

만약 마법사가 눈앞에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이 좋을까.

알라딘의 램프를 안 순간부터 끊임없이 생각해 온 난제이지만 나는 이렇게 빌었다.

‘여자에게 인기가 많아지게 해줘.’라고.

하필 왜 이런 소원을 빌었냐면(아니 사실 꽤 중요한 소원 아닌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그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한다.

왜냐면 지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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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당신과 결혼할 수만 있다면, 남편과 헤어지겠어요!”

“영감을 잃고 쓸쓸했는데…… 나이 들어서 주책이지. 주책이지만……!”

“아바바바바(유모차에서 침 묻은 사탕을 내미는 분홍색 리본의 아기)”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가아아악!!”

차가 쌩쌩 달리는 6차선 도로를 죽을힘을 다해 가로질렀다.

급정거해 준 운전자님들 고마워요!

“야 이 미친놈아! 뭐하는 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을 하려던 아저씨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만하지.

내 뒤를 따라 일개 소대에 준하는 여자들이 달려오고 있으니까.

실수였다.

나는 단순히 학교에서 핑크색 편지를 받게 된다면 좋겠다고, 혹은 수제 초콜릿과 함께 고백을 받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시는 대로.

지나가던 어머니뻘의 아주머니도, 나이를 곱게 잡수신 할머니도, 심지어 말도 못하는 아기와 암컷 고양이까지 나한테 사랑을 고백해 오는 바람에 나는 지금 쉬지도 못하고 달리고 있다.

“제길, 제길, 제길, 살려줘……!”

가끔 내 또래 여자애들이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폰카를 들고 쫓아오기도 했지만 육아와 집안일로 단련된 아주머니들께 거칠게 밀쳐져 넘어지곤 했다. 백화점 마감 세일보다 더한 지옥이 바로 내 뒤에 펼쳐져 있다.

「소원은 이루어졌어. 이제 여자에게 인기 많은 남자가 될 거야.」

귀엽게 윙크를 하던 그 꼬마 악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린애 장난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 역시 피식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문제집을 사러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래. 뭐 좋아. 인정하자고. 속이 몹시 쓰리지만 인정해 줄게.

따지고 보면 내 실수지. 소원의 범위를 정확하게 한정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하지만. 그렇지만!

모기한테까지 인기가 많은 건 문제가 있지 않냐?

“아따따따따따!”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멈추기라도 하면 바로 근처에 있던 암컷모기가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3월에 모기라니! 하긴 요즘 모기는 1년 내내 서식하는 반려 생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연유로 나는 쉬지도 못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발이 좀 빠른 편이라는 것.

나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와 깊숙한 태클로 나를 넘어뜨리려던 정육점 아주머니를 뛰어넘은 후 횟집 앞 수족관 물고기들이 나를 향해 정열적으로 뻐끔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급하게 커브를 돌았다.

“히이이이에하우악?!”

비명 소리가 좀 이상한 것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주인(男)을 끌고 달려오는 셰퍼드(女)와 그레이트 피레니즈(男)를 끌고 달려오는 주인(女)의 협공에서 도망가는 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이런 비명은 필연적이다.

왼다리와 오른쪽 어깨를 물리고 잡힐 뻔 했지만 깊은 엣지에서 이어지는 매끈한 트리플 러츠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했다. 레오타드의 매력에 푹 빠져 피겨 스케이트 방송을 끼고 살았던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수위 아저씨가 멍한 얼굴로 박수를 쳐 주었지만,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을 것 같지만, 하나도 안 기뻐!

딱정벌레라기엔 좀 징그럽게 커다란 것이 끔찍한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기분이 들지만 신경 쓰지 않겠어. 이제 곧, 조금만 더 가면, 저 문만 열며어어어어언!

[나랑 영결식……해줄래……?]

처녀 귀신까지 튀어나왔드아아아악!!

1장 :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내가 자취를 시작한 것은 오늘로 일주일째이다.

어머니의 재혼을 앞두자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취를 허락받았다. 중학교 졸업 전부터 혼자 준비를 하려니 정신이 없었지만 혼자서 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나 혼자 지내니까 밤늦게 컴퓨터를 해도 상관없겠지? 책상을 더럽게 써도 잔소리는 안 들을 거고. 옷이 조금 구겨졌다고 덜렁이 취급 받는 건 이제 끝이다! 라면서.

결혼 준비로 바쁜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만 해도 나는 정말 들떠 있었다.

막상 살아보니까 어떠냐고? 생각한 것과 실전은 많이 다르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생활인 것 같다.

앞마당도 넓고, 전망도 좋고, 학교도 가깝고. 이 정도면 완벽한 조건이잖아.

단지 이곳이 학교 옥상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춥다.”

뺨에 붙었던 신문지가 찬바람에 휘잉 날아갔다.

공사장에서 주워온 비닐 위에 요를 깔았는데도 아래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다리가 펴지질 않았다.

패딩 점퍼 아래로 두꺼운 옷을 세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굉장히 춥다. 따뜻하지도 않은 주제에 움직이기는 굉장히 불편했다.

“춥다춥다춥다.”

손에 감각이 없어서 쳐다봤더니 손가락이 전부 곱은 채 새하얬다. 어머니가 챙겨줄 때 잔말 말고 장갑을 가져올 걸. 여름을 기다리는 굼벵이처럼 몸을 잔뜩 꼬부리고 두 손을 다리 사이에 끼고 잤더니 피가 통하질 않았다.

이러다가 손을 잘라야 하는 건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나서 손을 마구 비볐더니 점점 감각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시멘트벽에 기대어 앉았다. 바람을 막아줄까 싶어서 계단탑 근처에 자리를 잡았는데 방향을 잘못 선택했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

시간은…… 아침 다섯 시 반이군. 슬슬 아침이나 먹을까.

가방 속에 넣어둔 밀폐 용기를 꺼냈다. 1000원 숍에서 산 용기 안에는 어제 점심 때 식당 아주머니께 부탁드려서 얻은 밥과 김치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동토를 퍼 올리는 작업을 방불케 하는 식사를 끝내고 차가운 방화문을 열었다.

삐이거어어어어억.

소름끼쳐!

아래로 내려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얼른 자물쇠를 잠가놓았다. 원래대로 쇠사슬을 치고 커다란 자물쇠를 걸어두었지만 이런 구식 자물쇠는 철사로 몇 번 찔러서 돌려주면 쉽게 열린다. 하지만 다른 애들이 열린 걸 보고 옥상에 올라와도 곤란하니까.

샤워실은 1층 교직원 화장실 옆에 있다. 세면도구를 들고 운동장에서 보이지 않도록 허리를 굽힌 채 달렸다. 처음에는 그냥 화장실에서 세수만 했지만 아침에 샤워하는 게 버릇인지라 씻지 않으면 영 찝찝하다. 몸을 녹일 수도 있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고.

뜨거운 물을 맞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니 추웠던 밤도 잊을 수 있었다.

10분 만에 깔끔한 모습으로 샤워실에서 나온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계단을 향했다. 아직 학교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먼저 교실로 가서 한잠 자줘야지.

그 때 교장실 근처에서 낑낑거리고 있던 똥개(이게 이름이다.)가 나를 발견하곤 잽싸게 달려와 애교를 부렸다.

어머니. 아들이 드디어 개를 키울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지만 않는다면 꽤나 평화로운 아침이 아닌가요? 요새는 지각도 안 해요!

“하하하. 오늘도 포동포동하네. 너 엄청 맛있게 생겼다. 아, 그렇다고 해서 널 진짜 먹겠다는 건 아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똥개는 몇 번 꼬리를 흔들더니 바지를 물고 잡아끌었다. 개의 표정을 연구해 본 적은 없지만 저건 꽤나 곤란한 표정 같은데.

“그래그래. 같은 집에서 사는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 무슨 일인…….”

똥개를 따라간 나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 14회 졸업생 기증’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박힌 똥개의 집은 개집치고는 꽤 크고 아늑하다. 어느 정도냐면 ‘어린애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로써 한 말이지, 정말로 그 안에 여자애가 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외국인인 걸까. 긴 금발이 개집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데도 주거침입자께서는 쿨쿨 잘도 자고 계셨다.

나이는 열 넷이나 열 다섯 정도로 보였다. 몸을 안쪽으로 넣은 채 얼굴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데도 머리가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았다. 체격이 작거나 엄청나게 유연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니. 제 3의 가능성도 있군. 이 개집이 실은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똥개가 실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을 지키고 있는 번견이고 개집 안은 블랙홀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P-4817 혹성으로 순간이동을 한다거나.

……내가 생각해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아.

방석을 깔긴 했지만 바닥 위에서 자는 건 꽤 고역일 텐데도 소녀는 아주 단잠에 빠져 있었다. 저러면 감기 들 텐데.

한참 잘 자는 여자애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교 선배이자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똥개의 애절한 눈빛을 무시할 수만은 없어 하얀 뺨을 톡톡 두들겼다.

“헤이! 굿모닝. 웨이컵! 유…… 유 스톨 더 하우스 프롬 허……. 아니, 쉬인가? 하여간 일어나!”

“우웅……. 안 자. 안 잘 거야…….”

외국인인 주제에 잠꼬대가 한국말이라니.

다행이다.

완전히 안심한 나는 본격적으로 소녀를 깨우기로 했다.

“보통 이런 때는 ‘5분만 더’라든가 ‘더는 못 먹어’ 같은 말을 하는 게 정석 아냐? 안 잘 거라니. 넌 이미 자고 있거든? 일어나라고!”

소녀의 작은 코를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부가 굉장히 보드랍고 말랑말랑해서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사람 코가 이렇게 부드러운 거였나?

내 코 주무르기 공격이 유효했는지 소녀는 몇 번 손사래를 치더니 부스스 얼굴을 들어올렸다.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엉키고 코는 새빨갰지만 굉장히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우와. 사람 속눈썹이 저렇게 긴 건 처음 봤어. 게다가 눈동자는 맑은 루비 색으로, 잡색 하나 섞이지 않은 금발과 더불어 눈에 띄는 외모였다.

먹이를 기다리는 개와 비슷한 포즈로 개집 안에서 몸을 일으킨 소녀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3월의 냉기에 가득 찬 복도는 온통 시멘트 천지. 달게 꾸던 꿈속과는 180도 다른 현실이겠지.

“못 나가.”

“뭐? 너 지금 명백한 주거침입죄―”

“다리가 저려서 못 나가겠어.”

어쩔 수 없군. 나는 소녀의 가느다란 두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자 잠도 덜 깬 주제에 소녀는 어디서 허락도 없이 내 몸을 만지냐는 둥, 팔을 너무 세게 잡았다는 둥, 시끄럽게 굴었다.

앙칼진 것은 목소리뿐으로, 맥없이 끌려나온 꼴을 보니 앉은뱅이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이거 엄청난 동질감을 느끼는데.

가출한 거지인가 싶었지만 입고 있는 것은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붉은색 코트다. 그 아래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다리는 몸을 지탱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거기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으니 정말 이쑤시개 수준으로 가늘어 보였다.

소녀는 다리를 몇 번 주무르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이제 날 가둘 거야?”

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러고 싶어도 지하철 사물함은 내 짐만으로 꽉 차서 너 못 넣어주는데. 돈 주면 넣어줄게.”

“이제는 금품 요구까지……. 긍지 높은 마법사들도 엄청나게 타락했구나.”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쉰다. 모든 것을 체념한 기색이 역력해서 보고 있는 내가 울컥할 정도였다.

“너 말이야. 그렇게 포기하면 안 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지금 몹시 추워도 여덟 시간 뒤면 해가 뜰 거야, 라는 게 인생의 위안이자 행복이라고. 나 지금 좀 멋진 말 했지? 그런데 눈가에 차오르는 이 액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태양이 뜬다 해도 바람이 멈추는 건 아니잖아. 내가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강력하다는 점 외에 전혀 의지가 안 돼.”

“이런 멍청이! 광합성을 해야 고기쌈도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나 지금 엄청난 바보랑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이야. 너 마법사는 확실히 아니구나? 바보와 멍청이 중 어느 부류?”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샐쭉하게 쳐다보았다. 어쭈. 다리가 좀 펴진다고 이제 날 막 무시한다 이거지?

“얕보지 마. 이래봬도 마법사는 안 될 거니까. 대학 다닐 때 결혼을 해서 일찌감치 가족을 꾸리는 것이 인생 프로젝트 제 1탄이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만 첫째라서 꾹 참는 큰 딸하고 아빠가 좋은데 편지로밖에 표현 못하는 작은 딸을 키울 계획이었지만 최근엔 전면 수정. 조그만 게 정의감에 불타서 누나를 놀리는 남자애들을 혼내 주려다가 지가 맞아서 들어오는 셋째이자 장남을 고명으로 하나 넣고, 온 세상의 귀여움을 한 몸에 가지고 태어난 막내딸까지 추가했지. 장래 직업은 차례로 의사, 변호사, 경찰청장, 한류 스타.”

“내 생각을 굳이 바꾸지는 않을게. 바보와 멍청이와 얼간이 중에 하나를 택하는 건 달걀과 닭의 순서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쓸데없어 보이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세 호칭 모두 너에게 잘 어울려.”

[SYSTEM : 성도준(은/는) ‘바보 겸 멍청이 겸 얼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부가 효과 : 정신력 -10 평판 -725 의지 +0.00021

……이딴 칭호 필요 없어!!

“내 장래 계획이 구체적이라는 것만 알아주면 됐어. 그런데 넌 누구야? 왜 개집에서 자고 있던 거야?”

1층 현관에 걸려 있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소녀는 내 질문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리를 빼앗아서 미안하다며 똥개를 한번 쓰다듬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우리 학교는 야자가 끝나는 시간인 10시 이후로는 문을 잠근다. 운동장은 개방이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는 소리다. 문 바깥에서 자물쇠를 걸기 때문에 30분 쯤 뒤에 수위 아저씨가 문을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소녀가 갇혔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해 하기를 기다리며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소녀는 문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어? 잠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달려가 손잡이를 밀어 보았지만 두꺼운 유리로 된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덜그럭거리며 문을 열려고 난리를 피우는 새에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야! 거기 서! 너 어떻게 나간 거야?”

그러자 소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숙녀에 대한 예의가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그래서 제대로 에스코트나 하겠어?”

“문을 뚫고 지나가는 여자를 에스코트 하려는 남자는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세 가지 추측을 내놓을 수 있지. 첫째는 네가 미래에서 온 액체금속이라는 거고, 둘째는 P-4817 혹성으로 연결된 입구가 사실은 이 문이라는 거고, 셋째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거야! 사람 좋아 뵈는 부동산 아저씨가 가난한 고등학생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도,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것도, 덧붙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몽땅 꿈이라는 주장인데 네 생각은 어때?”

소녀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정도니까 저 표정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내가 몸으로 부딪쳐도 차가운 유리문은 자신의 존재를 굳건히 과시할 뿐이다. 바늘에 찔려도 터지지 않는 비누막도 아니고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보라구!

내가 유리문에 철썩 붙어있는 꼴은 엄청나게 한심해 보였을 거다. 자신의 집을 되찾고 우아한 포즈로 개집에 드러누운 똥개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싶다는 듯 컹컹 짖었다. 개와 개집에서 잔 소녀가 앞뒤에서 나를 경멸하고 있다니. 음. 인격이 랭크 다운하는 기분이다.

“백일몽이라고 생각하는 건 네 자유야.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바보 겸 멍청이 겸 얼간이 취급받는 것도 네 자유고.”

되돌아 온 소녀가 유리문 건너편에서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다시 볼 수 있는 친구에게 하는 가벼운 작별 인사 같았다.

하지만 저 작은 여자애가 이 추운 초봄에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설사 저 애가 기상 시간을 착각한 귀신이라고 해도 이대로 보내버리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았다.

“샤워 하고 싶지 않아?”

발을 멈추는 소녀. 다행히 귀가 좋은 것 같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하얀 얼굴에 눈을 고정시켰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덜 추울 텐데…….”

왜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는 거지?

“아 정말 따뜻하다~. 이제 살 것 같아.”

세차게 떨어지는 물이 타일을 타고 흘러 배수구로 쏟아져 나간다. 남자 샤워실에 데리고 오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차할 때 내가 변명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설득했다.

나는 샤워 부스 바깥에서 소녀의 코트와 겉옷을 든 채 서있었다.

물소리에 섞인 콧노래는 꽤나 경쾌한 멜로디였다. 저러다가 성불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뜨거운 물을 맘껏 써도 되는 거야?”

“글쎄. 허락받고 쓰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이 학교 학생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헤에. 학생 겸 관리인인 거야?”

학생인 건 맞지. 무단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냥 잠시 지내고 있을 뿐이야.”

“그렇구나.”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대답하는 목소리마저 노래하는 듯 했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일보 전진을 시도했다.

“그런데 너 어디서 왔어? 왜 똥개네 집에서 자고 있던 거야?”

콧노래가 딱 끊겼다.

울림이 좋은 샤워실 안에 물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역시 물어봐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을까. 세상에 질문이 많고 많지만 종류는 딱 두 가지가 있다. 여자에게 해도 되는 질문과 해서는 안 되는 질문. 나는 기어코 지뢰를 건드린 것이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풍부한 경험(대부분이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의 결과이다.)을 토대로 예상되는 반응 몇 개를 골라보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숱한 남자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네가 뭔 상관이야?”이지만 한여름에 추위를 느끼게 하는 ‘무시’라는 방법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후퇴할 순 없을까?

달칵.

샤워부스 안쪽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짜증이나 울음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불의의 습격이었다.

물에 젖은 금발이 발갛게 상기된 뺨에 달라붙어 반짝였다. 가느다란 목 아래로 좁고 둥근 어깨가 보였고, 하얗게 빛나는 완만한 쇄골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아침햇살 같은 눈동자는 장난기 어린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귀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활력에 얼이 빠진 채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소녀는 살짝 미소 짓더니 마치 내 뺨을 쓰다듬을 것처럼 희고 가느다란 팔을 뻗어――

자신의 옷을 가져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벽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뭘 기대한 거냐, 대체.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가 조용해지면 돌아오겠다고 말한 병아리색 머리의 소녀는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단지 내 이름에 대해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성도준? 성은 없는 거야?]

성씨라고 가르쳐 줬더니 신기하다는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 소녀는 남색 교복 물결을 홀로 거스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애는 돌아올까?

매점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게 해서 빵이랑 우유라도 사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꼭 길 잃은 고양이를 돌보는 것처럼 하고 있군. 그 애라면 또 어딘가의 문을 통과해서 훔쳐 먹을 수도 있겠지.

“많이도 먹네.”

식당에서 급식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마주앉았다. 젓가락을 끼적거리며 갈치조림에서 파와 고추를 골라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둥글게 덮는 새카만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언제나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애인데, 이름이…….

“어 안녕, 유재희.”

“내 이름 못 외웠지.”

윽. 교복 명찰을 슬쩍 본 게 들켰나?

가느다란 붓으로 한 번 그은 듯한 긴 눈썹 아래에 있는 눈동자는 유난히 새카맣다. 그녀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흘 전 1교시 영어시간에 짝지어서 20분 동안 자기소개를 했는데도 못 외우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

그 말대로 요즘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시간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깨우던 선생님들도 이제 반쯤 포기한 것 같다. 일주일 만에 대놓고 숙면을 취하니까 아주 문제아라고 찍힌 거겠지.

“그, 그러는 너는 굉장히 적게 먹네. 다이어트?”

어색함을 날리기 위해 화제를 바꿨더니,

“그거 다이어트 하라는 소리? 강요 혹은 권유? 아니면 여자는 모두 다이어트에 매진 중이라는 남자들의 순진한 착각?”

전혀 의도치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굳어버린 나를 무시한 채 재희는 국을 조금 떠먹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이 가려졌다.

깨달았을 때는 나는 이미 빠른 목소리로 내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을 붙이고 있었다.

“아니. 그런 말은 아니었어. 나로서는 좀 통통한 여자가 좋지만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말라야 한다는 것에 지나친 강박증이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너는 무척 평범한 한국 여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 물론 마른 여자가 좋다고 하는 남자도 있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취향이고 역시 여자든 남자든 고운 마음이 중요한 어필 포인트…… 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쪘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마음이 곱지 않다고 하는 것도 아니야.”

어디서 속사포 같은 말이 들려오자 주변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시선을 내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재희는 고개를 여전히 숙인 채 밥을 먹었고, 나는 두 손까지 흔들면서 말했다.

“그, 그치만 너도 성미가 급하다. 나는 그저 네가 밥을 적게 먹는 거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다이어트 하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그런 대답을 해버리면 내가……, 아 물론 대화를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건 나쁜 버릇이지. 그 점은 내가 반성. 하지만 대화라는 게 그렇잖아? 생각하고 말하는 것하고 그저 자동 반사처럼 튀어나오는 것하고”

“나도 그냥 해 본 소리야. 밥 먹어도 돼.”

“넵.”

누군가 내 시간을 지울 수만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 1분만 지워줬으면 좋겠다. 으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냐.

“동생이 제빵사가 꿈이라 굽고 남은 빵을 간식으로 싸주거든. 그래서 그거 먹고 나면 배가 안 고파. 하지만 급식비가 아까우니까.”

“아! 그래서 밥을 적게 먹는구나. 그러니까 평소에 다이어트를 한다는 오해를 받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내 말을 오해했고 그런 고로 누가 봐도 너는 날씬……”

누가 내 입 좀 멈춰줘.

이제 말을 멈추는 게 좋을 테지만 바로 앞에 앉은 여자애의 심심한 표정에 나는 결국 입을 또 열고야 말았다.

“동생이 빵을 만든다고? 그거 참 부럽네. 오늘은 무슨 빵이었어?”

태연한 척하며 갈치 껍질을 벗겨 파와 고추 더미 위에 얹었다. 재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참치…… 참치케첩빵.”

“푸훕.”

입 밖으로 분출된 밥알을 얼른 쓸어 담았다. 재희의 급식판에까지 튀었지만 다행히도 반찬에 묻지는 않았다.

먹은 빵을 떠올리는 것인지 살짝 눈을 감은 재희는 꿈꾸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겉에는 초콜릿으로 코팅되어 있었어.”

“우와. 그거 듣기만 해도 괴상――”

“맛있었어.”

“――은근히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는데.”

“응. 인터넷에서는 꽤 유명해. 팬이 많은 것 같아.”

내가 확인한 것으로는 처음으로, 재희가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핏기 없는 입술이 조금 완만한 곡선을 그린 것 뿐이지만 밀랍 인형처럼 감정이 없어 보이던 인상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 웃는 얼굴에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를 떠올렸다.

가녀린 체구와 귀여운 얼굴에 걸맞지 않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잘 어울리던 소녀.

……역시 핫 팩이라도 챙겨줄 걸.

걱정을 잊기 위해 밥을 국에 말아 와구와구 먹었더니 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먹어서…… 위에 좋을 거 같지는 않아.”

“그, 그런가?”

같은 반 여자애가 빤히 쳐다보며 그런 말을 하는데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까.

교과서에 나오는 사진처럼 등을 꼿꼿이 편 채 팔을 90도로 움직여 규칙적으로 서른 번 씩 씹었다. 밥을 한 번 먹고 반찬을 한 번 먹기를 반복하자 재희는 참견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는 가버렸다.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못하는 나는 인간 형상의 돌덩이.

고치라고 해서 고친 게 뭐가 잘못된 건지 누가 좀 가르쳐 주면 좋겠다. 제발. 플리즈.

생각해 보면 나의 고질병은 초등학교 때부터 지적받아 왔던 것이다.

통지표에 좋은 말만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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